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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인도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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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의 인도 원정은 고대 그리스인들의 인도 지역과의 접촉과 그 영향을 다룬다. 전설에 따르면, 디오니소스는 인도 원정을 통해 포도 재배법을 전파하고 도시를 건설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327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펀자브 지역을 정복하고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포루스 왕을 격파했지만, 군대의 반란으로 인해 더 동쪽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 간의 충돌이 있었고,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이후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기원전 180년에는 인도-그리스 왕국이 성립되어 북인도를 지배했으며,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가 융합된 그리스-불교 문화가 발달했다. 이 시기의 예술은 간다라 미술로 대표되며, 한국 불교 미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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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의 인도 원정
지도
그리스의 인도 원정
시기기원전 327년 ~ 기원전 323년
장소인도 아대륙, 인더스 계곡
원인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케메네스 제국 정복 후 인도 침공
결과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인도 북서부 지역 합병
인더스 강 서쪽 지역에 그리스 총독부 설치
교전 세력마케도니아 제국
지역 부족 및 왕국 (예: 포로스)
주요 인물
마케도니아 제국알렉산드로스 대왕
크라테루스
헤파이스티온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
인도 왕국포로스
탁실레스
암비 왕
주요 전투
영향
문화적 영향헬레니즘 문화의 인도 전파
간다라 미술의 발달
정치적 영향인도 북서부 지역의 정치적 분열 심화
마우리아 제국의 등장 배경
관련 정보
관련 전투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인도-그리스 왕국

2. 디오니소스 전설과 인도

고대 인도에서 돌아온 바쿠스/디오니소스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바쿠스)는 포도 재배와 포도즙 추출 방법을 최초로 발견했다.[1] 그러나 헤라 때문에 광기를 얻어 여러 지역을 방랑했다. 프리기아에서 여신 키벨레(레아)에게 치료받고 종교 의식을 배운 후, 아시아를 여행하며 포도 재배를 가르쳤다.

2. 1. 인도 기원설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는 성장하면서 포도 재배와 귀한 포도즙을 추출하는 방법을 최초로 발견했다.[7] 그러나 헤라는 그에게 광기를 일으켜 여러 지역을 방랑하게 했다. 프리기아에서 여신 키벨레(그리스인들에게는 레아로 더 잘 알려짐)는 그를 치료하고 종교 의식을 가르쳤으며, 그는 아시아를 거쳐 포도 재배를 가르치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의 방랑 중 가장 유명한 부분은 인도 아대륙 원정으로,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인더스강 근처 뉘사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현지인들은 그들의 도시가 먼 옛날 디오니소스에 의해 건설되었고 디오니소스 신에게 헌정되었다고 말했다.[8] 이러한 여행은 일종의 군사적 정복 형태였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브리튼과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세계를 정복했다.[9] 그는 개선 행렬의 창시자로 여겨졌으며, 승리하여 돌아온 후 자신의 숭배를 그리스에 도입하려 했지만, 그 숭배가 가져오는 혼란과 광기 때문에 이를 두려워한 일부 군주들(예: 펜테우스 또는 리쿠르고스)의 반대에 직면했다.

2. 2. 인도 원정



전설에 따르면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는 포도나무 재배와 포도즙 추출 방법을 처음으로 발견했다.[7] 그러나 헤라는 그를 미치게 만들어 세상을 방랑하게 했다. 프리기아에서 여신 퀴벨레(그리스인들에게는 레아로 더 잘 알려짐)는 그를 치료하고 종교 의식을 가르쳤다. 이후 디오니소스는 아시아를 여행하며 사람들에게 포도나무 재배법을 전파했다. 그의 여정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인도 아대륙 원정으로, 몇 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더스강 근처 니사라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지역 주민들은 오래전 디오니소스가 그들의 도시를 세웠고, 도시 이름이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쳐졌다고 말했다.[8] 이 여정은 군사적 정복의 형태를 띠었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영국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세계를 정복했다.[9] 승리하고 돌아온 그는(개선 행렬의 창시자로 여겨짐) 자신의 숭배를 그리스에 도입하려 했지만, 그가 가져오는 혼란과 광기를 두려워한 펜테우스나 리쿠르고스 등의 왕자들에게 반대받았다.

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기원전 327-326년)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아대륙 침공 지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된 고대 인도 자치 부족


기원전 327년 알렉산드로스 대왕펀자브 지역으로 진출했다. 탁실라의 통치자 암비 왕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오르노스라는 요새로 도망쳤으나, 알렉산드로스는 포위 공격 끝에 이곳을 함락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 전투(기원전 326년)에서 포루스 왕과 격전을 벌였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당시 동쪽 갠지스강 근처 마가다에는 난다 왕조의 강력한 군대가 있었다. 이들은 보병 20만 명, 기병 8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6천 마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히파시스 강(현재의 비아스 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인더스 강을 따라 아라비아 해로 가는 길을 정복했다. 그는 군대의 대부분을 크라테루스와 함께 카르마니아(현재 이란 남부)로 보냈고, 네아르코스에게는 페르시아 만 해안을 탐험하는 함대를 맡겼다.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게드로시아(현재 파키스탄 남부 마크란)를 거쳐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알렉산드로스 이후 고대 인도의 헬레니즘 사트라피


알렉산드로스는 탁실라에 그리스 군대를 남겨두었다. 에우데무스와 페이톤 같은 장군들이 기원전 316년경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 소피테스(기원전 305–294)는 펀자브의 독립적인 인도 통치자였다.

3. 1. 펀자브 정복

기원전 327년 알렉산드로스 대왕펀자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탁실라의 통치자였던 암비 왕은 알렉산드로스에게 도시를 항복시켰다.

3. 2. 히다스페스 전투

알렉산드로스 대왕히다스페스 전투(기원전 326년)에서 고대 인도 군주 포루스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1] 이 전투는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된다. 탁실라의 통치자인 암비 왕은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오르노스 요새로 도망쳤고, 알렉산드로스는 포위 공격 끝에 이 요새를 함락시켰다.[1]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히다스페스 전투 당시 동쪽의 마가다 군대는 보병 20만 명, 기병 8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6천 마리로 알렉산드로스 군대를 압도할 정도였다.[1]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히파시스(오늘날의 비아스)에서 반란을 일으켜 진격을 멈췄다.[1]

3. 3. 마가다 제국과의 대치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히다스페스 전투를 벌였을 때 마가다군은 동쪽으로 보병 20만 명, 기병 8만 명, 전차 8,000대, 전투 코끼리 6,000마리를 거느리고 있었다.[1] 이는 알렉산드로스 군대를 낙담하게 만들어 인도 아대륙으로의 진군을 방해했다.[1]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갠지스강에서 거대한 인도 군대와 다시 마주칠 것을 두려워하여 히파시스 강(현재의 비아스 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더 이상 동쪽으로 진군하기를 거부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신하 코이노스를 만난 후에 철군하는 것이 낫다고 확신했다.[1]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위의 인용문에서 템플릿은 제거되어야 한다. 인용문 템플릿을 제거하고 아래와 같이 수정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히다스페스 전투를 벌였을 때 마가다군은 동쪽으로 보병 20만 명, 기병 8만 명, 전차 8,000대, 전투 코끼리 6,000마리를 거느리고 있었다.[1] 이는 알렉산드로스 군대를 낙담하게 만들어 인도 아대륙으로의 진군을 방해했다.[1]

알렉산드로스 군대는 갠지스강에서 거대한 인도 군대와 다시 마주칠 것을 두려워하여 히파시스 강(현재의 비아스 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더 이상 동쪽으로 진군하기를 거부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그의 신하 코이노스를 만난 후에 철군하는 것이 낫다고 확신했다.[1]

플루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그러나 마케도니아인들은 포루스와의 싸움으로 용기가 꺾였고 인도에서의 더 이상의 진격을 멈추었다. 2만 명의 보병과 2천 명의 기병만으로 적을 물리치느라 모든 힘을 다 썼던 그들은, 알렉산드로스가 갠지스 강을 건너겠다고 고집했을 때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갠지스 강의 폭이 •32 펄롱이고 깊이가 •100 패덤이며, 강 건너편 둑에는 무장한 병사와 기병, 코끼리가 가득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간데리테스와 프라에시 왕들이 기병 8만 명, 보병 20만 명, 전차 8천 대, 전투 코끼리 6천 마리를 이끌고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보고에는 허세가 없었다. 왜냐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을 통치했던 안드로코투스셀레우코스에게 코끼리 500마리를 선물했고, 6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인도 전역을 휩쓸어 정복했기 때문이다.[1]

3. 4. 인도 원정의 결과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인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인도-그리스 왕국 형성에 기여할 그리스 군대를 남겨두었다.[1] 특히 탁실라에 주둔한 그리스 군대는 이후 셀레우코스 제국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

알렉산드로스는 탁실라에 그리스 군대를 주둔시켰고,[1] 에우다모스와 페이톤 등의 장군들이 기원전 316년경까지 이 지역을 통치했다.[1] 이들 중 소피테스(기원전 305–294)는 펀자브 지역의 독립적인 인도 통치자였다.[1]

4. 셀레우코스 제국과 마우리아 제국의 충돌 (기원전 305년)

셀레우키아에서 제작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테트라드라크마. 앞면: 제우스의 머리, 뒷면: 코끼리와 아테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 중 한 명이었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메소포타미아와 옛 마케도니아 제국의 동쪽 영토를 차지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웠다. 기원전 305년, 셀레우코스 1세는 인도 북서부를 침공했다.[10]

이후 셀레우코스 왕조와 마우리아 제국은 지속적인 외교 교류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4. 1.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군대는 히파시스강을 따라 반란을 일으켰고, 알렉산드로스가 난다 제국과 싸우기 위해 정복을 하기도 전에 죽었기 때문에, 베아스강은 마케도니아 제국의 동쪽 국경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디아도코이였던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메소포타미아와 옛 마케도니아 제국의 동쪽 사트라피를 점령했다. 기원전 305년, 셀레우코스는 오늘날 북인도의 펀자브와 파키스탄을 침공해 인도 원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10]

한편,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제국의 설립자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그의 구루이자 정치적 조언자였던 차나키야의 도움을 받아 파탈리푸트라난다 제국을 전복시킴으로써 권력을 잡았다. 그의 다음 행동 방침은 그의 군대를 인더스강으로 이끌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싸워 사트라피들을 합병하는 것이었다. 마우리아-셀레우코스 전쟁은 2년 이상 계속되었으며, 그 지역에 중대한 영토적, 정치적인 변화를 낳았다.

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양국은 마침내 혼인 동맹을 맺었다. 찬드라굽타는 혼인 동맹으로 셀레우코스의 딸과 그리스 사트라피들을 얻었으며, 그 대신 셀레우코스에게 코끼리 500마리를 선물하였는데, 이는 훗날 이프소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공헌하는 자산이 되었다.[11]

셀레우코스는 또한 찬드라굽타의 수도 파탈리푸트라(현 파트나)의 궁정에 메가스테네스라는 이름의 그리스인 대사를 주기적으로 파견했으며, 메가스테네스는 인도와 찬드라굽타의 치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썼다.

4. 2. 외교 관계 수립

셀레우코스 제국마우리아 제국전쟁 이후 평화 조약을 맺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혼인 동맹으로 찬드라굽타는 셀레우코스의 딸과 결혼하고 그리스 사트라피를 얻었으며, 셀레우코스는 500마리의 코끼리를 받았다. 이 코끼리들은 훗날 이프소스 전투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이 승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1]

셀레우코스는 메가스테네스를 찬드라굽타의 수도 파탈리푸트라에 대사로 파견했다. 메가스테네스는 인도와 찬드라굽타의 통치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4] 이러한 외교 관계는 마우리아 제국 시대 동안 지속되었다.

5. 인도-그리스 왕국 (기원전 180년 - 서기 10년)

기원전 100년경 인도-그리스 왕국


인도-그리스 왕국의 창시자 데메트리우스 1세(기원전 205–171년), 인더스 계곡에서의 정복을 상징하는 코끼리 두피를 쓰고 있다.


기원전 180년, 인도-그리스인들은 인도 북부 및 북서부 일부를 침공하여 펀자브 지역을 지배했다. 이들은 이웃한 박트리아에 위치한 그리스 왕들의 그레코-박트리아 왕조(에우튀데미드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북부 인도의 침략은 장군 푸슈야미트라 슝가에 의해 마우리아 왕조가 멸망한 후 일어났으며, 그는 새로운 인도의 슝가 왕조(기원전 185년-78년)를 세웠다.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는 동부 인도(오늘날의 파트나)의 수도 파탈리푸트라까지 원정했을 수 있다. "알렉산더 이후에 온 자들은 갠지스강과 파탈리푸트라까지 갔다" (스트라보, XV.698 [5]).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원전 1세기 말까지 남아시아 북서부의 여러 지역을 통치했으며, 이후 스키타이인과 쿠샨족에게 정복당했다.

5. 1. 성립 배경



기원전 180년, 인도-그리스인들은 인도 북부 및 북서부 일부를 침공하여 펀자브 지역을 지배했다. 이들은 이웃한 박트리아에 위치한 그리스 왕들의 그리스-박트리아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인도 북부 침공은 푸시야미트라 숭가가 마우리아 왕조를 전복시키고 숭가 왕조(기원전 185년 ~ 기원전 78년)를 개창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는 동인도의 수도 파탈리푸트라까지 원정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로스를 쫓아 온 사람들은 갠지스강과 파탈리푸트라로 갔다"(스트라본, XV.698[12]).

5. 2. 메난드로스 1세의 원정

기원전 180년, 인도-그리스인들은 인도 북부 및 북서부 일부를 침공하여 펀자브 지역을 지배했다. 이들은 이웃한 박트리아에 위치한 그리스 왕들의 그리스-박트리아 왕조의 연장선상에 있었다.[12]

인도 북부 침공은 푸시야미트라 숭가가 마우리아 왕조를 전복시키고 숭가 왕조(기원전 185년 ~ 기원전 78년)를 개창한 이후에도 이어졌다.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는 동인도의 수도 파탈리푸트라까지 원정을 떠났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드로스를 쫓아 온 사람들은 갠지스강과 파탈리푸트라로 갔다"(스트라본, XV.698).[12]

5. 3. 멸망

인도-그리스 왕국은 기원전 1세기 말까지 남아시아 북서부 여러 지역을 통치하다가 스키타이인과 쿠샨족에게 정복당했다.[12]

6. 인도-그리스 문화의 유산

인도-그리스 왕국은 그리스 문화와 인도 문화의 융합을 촉진시켰으며, 특히 불교간다라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도-그리스 시대에 불교가 번성하면서 그리스-불교 문화 혼합주의가 나타났다.[13]

6. 1. 그리스-불교 문화

인도-그리스 치하에서 불교가 번성하여 그리스-불교 문화 혼합으로 이어졌다. 인도 아대륙의 예술 또한 이러한 교류 시기와 그 이후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상당히 받았다.[6]

6. 2. 간다라 미술

인도-그리스 시대에 불교가 번성하면서 그리스-불교 문화 혼합주의가 나타났다. 인도 아대륙의 예술 또한 이 시기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았다.[6]

6. 2. 1. 한국 불교 미술에 미친 영향

인도-그리스 시대에 불교가 번성하면서 그리스-불교 문화 혼합주의가 나타났다. 이러한 상호작용 기간과 그 이후, 인도 아대륙의 예술은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13]

참조

[1] 서적 Bull, 255
[2] 서적 Arrian, Anabasis, 5.1.1–2.2
[3] 서적 Bull, 253
[4] 서적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5] 웹사이트 "...those who, after Alexander, advanced beyond the Hypanis to the Ganges and Palibothra." https://penelope.uch[...]
[6] 간행물 Halkias 2014 and 2015 https://www.academia[...]
[7] 서적 Bull, 255
[8] 서적 Arrian, Anabasis, 5.1.1–2.2
[9] 서적 Bull, 253
[10] 서적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11] 서적 The Encyclopedia of Military History
[12] 서적 "...those who, after Alexander, advanced beyond the Hypanis to the Ganges and Palibothra."
[13] 간행물 Halkias 2014 and 2015 https://www.academ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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