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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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리스 불교는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가 융합된 독특한 문화 현상으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이후 중앙 아시아와 인도 북서부 지역에서 발생했다. 마우리아 제국 아소카 왕은 불교를 장려하며 헬레니즘 세계에 불교 사절을 파견했고,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 시대에는 불교가 번성했다. 이 시기 불교는 헬레니즘 신앙과 융합되어 종교적 혼합주의를 보였으며, 예술, 철학, 언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상호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간다라 미술은 부처의 인간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데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부처의 모습이 처음으로 인간의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리스 불교는 동서양 문명 교류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으며,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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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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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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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문화적 혼합, 종교적 혼합 |
기간 | 기원전 4세기 ~ 서기 5세기 |
지역 | 박트리아 간다라 중앙아시아 인도 아대륙 북서부 |
역사적 배경 | |
시작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 |
특징 |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의 상호작용 및 융합 예술, 철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나타남 |
주요 특징 | |
예술 | 불교 예술에 헬레니즘 양식의 도입 (예: 간다라 미술) 불상의 표현에 그리스 조각 기법 적용 |
철학 | 불교 사상에 그리스 철학의 영향 (예: 윤리, 논리학) 두 사상의 조화로운 해석 시도 |
종교 | 불교와 그리스 종교의 신앙 체계 융합 (예: 신들의 습합) 새로운 형태의 종교적 실천 등장 |
주요 인물 | |
왕 | 메난드로스 1세 (밀린다 왕) |
철학자 | 피론 나가르주나 |
주요 유적 | |
영향 | |
예술 | 간다라 미술의 발전 및 동아시아 불교 예술에 영향 불교 조각 및 회화의 새로운 표현 방식 제시 |
사상 | 불교의 헬레니즘 철학 수용 및 발전 동서양 사상 융합의 선례 제시 |
종교 | 불교의 대중화 및 확산에 기여 다양한 종교 간의 상호작용 가능성 제시 |
관련 용어 | |
언어 | 그리스어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
추가 정보 | |
참고 문헌 | "The Shape of Ancient Thought: Comparative Studies in Greek and Indian Philosophies" by Thomas McEvilley "Buddhism and the Silk Road" by Susan Whitfield |
2. 역사적 배경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는 다리우스 대왕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는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6]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4년에 아케메네스 제국과 중앙 아시아를 정복하고, 펀자브로 진출했으나 비아스강에서 퇴각하여 펀자브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아무다리야와 박트리아 지역에 여러 도시를 건설했고, 그리스 정착지는 카이베르 고개, 간다라 (탁실라 참조), 펀자브로 확장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워 인도까지 확장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마우리아 제국은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인더스 계곡과 간다라를 통합하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혼인 동맹을 맺었다. 또한 마우리아 제국은 셀레우코스 제국에 500마리의 전쟁 코끼리를 이전했다.[7]
아소카 황제는 칼링가 전쟁 이후 불교로 개종하고 불교의 달마를 제국 전역에 퍼뜨렸으며, 그리스인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고 주장한다.[8]
마우리아 멸망 후 그레코-박트리아 왕국(기원전 250–125년)과 인도-그리스 왕국 (기원전 180년 – 서기 10년)이 성립되었다. 이후 월지, 인도-스키타이, 쿠샨 제국 (서기 1–3세기)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조차 불교는 번성했다.[10]
인도의 불교는 5세기경 힌두교 부흥 이전까지 주요 종교였으며, 벵골 등 주요 거점은 인도의 이슬람 침략 동안 대부분 종식되었다.
2. 1.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 (기원전 4세기)
'''앞면''': 니케에게 왕관을 받는 알렉산드로스.'''뒷면''': 코끼리 위에서 포루스 왕을 공격하는 알렉산드로스.
은화. 대영 박물관.]]
알렉산드로스가 박트리아와 간다라를 침략했을 당시, 이 지역들은 이미 사문교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불교와 자이나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팔리 경전에 따르면, 박트리아의 상인 형제 타파수와 발리카는 고타마 붓다를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했다고 전해진다.[12]
2. 2. 마우리아 제국과 불교의 수용 (기원전 4세기-기원전 2세기)
마우리아 제국은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격파하고 인더스 계곡과 간다라 지역을 통합했다. 이 지역들은 이전에는 아케메네스 제국, 마케도니아, 셀레우코스 제국의 지배를 받았었다.[13] 그러나 마우리아 제국은 셀레우코스 제국과 평화 조약을 맺고, 메가스테네스와 같은 그리스인들이 마우리아 궁정에 거주하면서 교류를 이어갔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손자 아소카는 불교를 받아들여 비폭력(아힘사)을 강조하고 불교를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아소카의 칙령에 따르면, 그는 불교 사절단을 아시아의 그리스 지역과 지중해까지 파견했다.[14] 칙령에는 안티오코스 2세 테오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 등 헬레니즘 시대 통치자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15]
아소카는 자신의 왕국 내 그리스인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고 주장하며, 팔리 자료에는 다르마락시타와 같은 그리스인("요나") 불교 승려들이 불교 전도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6] 다르마락시타는 다르마굽타카 불교 학교를 설립했다.[17]
2. 3.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의 등장 (기원전 3세기-기원후 1세기)
마우리아 제국 멸망 이후 그리스-박트리아 왕국과 인도-그리스 왕국이 성립되었다.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에 아이 하눔과 바그램과 같은 여러 도시를 건설했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시대에 2세기 이상 지속된 행정 체계를 구축했으며, 이들은 항상 인도 영토와 직접적인 접촉을 유지했다.[18] 그리스인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치하의 역사가 메가스테네스와 그의 아들 빈두사라 치하의 데이마쿠스와 같이 마우리아 제국의 궁정에 외교관을 파견했으며, 이들은 인도의 문명에 대해 광범위하게 보고했다. 메가스테네스는 인도의 종교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보냈고, 이는 수세기 동안 고전 세계에서 널리 유통되고 인용되었다.[18]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아이 하눔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잘 드러나듯이, 마우리아 제국 통치 기간 동안 인도 입구에서 강력한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했다. 기원전 180년경 마우리아 제국이 숭가 제국에 의해 무너지자,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인도로 확장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고, 이 아래에서 불교가 번성할 수 있었다.

북인도에는 인도-그리스 왕국이 있었으며, 그 중심지는 대략 알렉산드리아 에스카테 주변이었다. 그들은 서기 10년까지 북인도 지역의 여러 지역을 통치했다. 불교는 인도-그리스 왕들 아래에서 번성했으며, 일설에는 그들의 인도 침략이 숭가 제국(기원전 185-73년)의 종교 박해로부터 불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숭가 제국은 마우리아 제국을 전복시켰다. 자르마노체가스는 스라마나(가능성은 있지만 반드시 불교도는 아님)였는데, 스트라보, 카시우스 디오, 니콜라우스 오브 다마스쿠스와 같은 고대 역사가들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 (서기 14년 사망)가 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 안티오크와 아테네로 여행했다.[19][20]
2. 4. 쿠샨 제국의 불교 지원 (기원후 1세기-3세기)
쿠샨 제국은 월지의 5개 부족 중 하나로, 기원전 125년경 박트리아에 정착하여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을 몰아내고 서기 1년경부터 파키스탄 북부와 인도 북부를 침략했다. 이들은 이미 1세기 이상 그리스 문화 및 인도-그리스 왕국과 접촉해 있었다. 쿠샨 제국은 화폐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언어를 표기했으며, 그리스 문자를 채택했다.[19][20]조로아스터교, 그리스, 브라만교 신들과 함께 붓다를 존경하고 종교적 혼합주의로 유명했던 쿠샨 왕 카니슈카는 약 100년경 카슈미르에서 제4차 불교 공의회를 소집하여 설일체유부 경전을 개정했다. 카니슈카의 일부 화폐에는 그리스 스타일로 "Boddo"라는 단어가 그리스 문자로 새겨진 화폐에 붓다의 가장 초창기 묘사(약 120년)가 새겨져 있다. 카니슈카는 또한 원래의 간다라 프라크리트 대승불교 경전을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했는데, 이는 "불교 문학 경전의 진화의 전환점"이었다.[27] 카니슈카 재위 1년(12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카니슈카의 함은 ''Agesilas''라는 그리스 예술가가 서명했는데, 그는 쿠샨의 탑(체티야)에서 작업을 감독하여 이렇게 늦은 시점에도 그리스인들이 불교적 실현에 직접 관여했음을 확인해 준다.
3. 문화적 상호작용
헬레니즘 그리스 문화는 다리우스 대왕의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제국이 중앙아시아를 정복하면서 시작되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기원전 334년에 아케메네스 제국과 중앙 아시아를 정복한 후, 펀자브로 진출했다. 그는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포루스를 물리치고 사트라프(총독)로 임명했으나, 비아스강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펀자브 정복을 완수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아무다리야와 박트리아 등 새로운 영토에 여러 도시를 건설했고, 그리스 정착지는 카이베르 고개, 간다라 (탁실라 참조), 펀자브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사후, 디아도코이가 왕국을 세웠고,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워 인도까지 확장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의 마우리아 제국은 난다 제국을 정복하고,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격파하여 인더스 계곡과 간다라를 획득했다. 양국은 혼인 동맹을 맺기도 했다.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는 불교로 개종하고 인도주의적 개혁을 채택했다.[10] 아소카의 칙령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인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
마우리아 쇠퇴 후, 슝가 제국이 들어섰고, 셀레우코스 제국의 박트리아 반란으로 그레코-박트리아 왕국(기원전 250–125년)이 형성되었다. 이후 인도-그리스 왕국 (기원전 180년 – 서기 10년)이 분열되었다.
중앙 아시아와 북인도에서 그리스의 오랜 존재는 예술과 종교적 상호작용을 촉진했다.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 1세(기원전 160–135년)는 "구세주 왕 메난드로스"라는 그리스어 비문이 새겨진 동전을 발행했다. 일부 후대 왕들은 카로슈티 문자로 "마하라자사 다르미카" (다르마의 왕)라는 칭호를 새겼다.
메난드로스 1세와 메난드로스 2세의 일부 동전은 불교 상징인 팔각형 바퀴를 포함한다. 밀린다 빤하에 따르면, 메난드로스 1세는 불교 아라한이 되었다.[21] 인도-그리스 동전의 코끼리 상징도 불교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인도-파르티아 왕국은 인도-그리스 동전의 상징성을 채택했지만 코끼리는 사용하지 않았다.
여러 인도-그리스 통치자들은 불교의 비타르카 무드라와 같은 제스처를 취하는 자신이나 그리스 신들을 묘사했다.
에티엔 라모트(Étienne Lamotte)[57]와 토마스 맥에빌리(Thomas McEvilley)는 그리스 불교 발전에 그리스의 영향을 주장했지만, "그리스-불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58] 간다라 불교 미술의 헬레니즘 영향은 널리 인정되지만,[37][62][63] 비(非)인도적 특징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64] 예술 외 영역에서 그리스의 영향은 크지 않다고 추정된다.[65][66][5][67][68][69][70] "그리스-불교 미술"이라는 용어는 비판받기도 한다.[72][73]
3. 1. 종교적 혼합주의
그리스인들은 박트리아에 아이 하눔과 바그램 같은 여러 도시를 건설했고, 셀레우코스 제국과 그리스-박트리아 왕국 시대에 2세기 이상 지속된 행정 체계를 구축하여 인도 영토와 직접적인 접촉을 유지했다. 그리스인들은 찬드라굽타 마우리아 치하의 역사가 메가스테네스와 그의 아들 빈두사라 치하의 데이마쿠스와 같이 마우리아 제국의 궁정에 외교관을 파견했으며, 이들은 인도의 문명에 대해 광범위하게 보고했다. 메가스테네스는 인도의 종교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보냈고, 이는 수세기 동안 고전 세계에서 널리 유통되고 인용되었다.[18]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마우리아 제국 통치 기간 동안 인도 입구에서 강력한 헬레니즘 문화를 유지했는데, 이는 아이 하눔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잘 드러난다. 마우리아 제국이 기원전 180년경 숭가 제국에 의해 무너지자, 그리스-박트리아인들은 인도로 확장하여 인도-그리스 왕국을 세웠고, 이 아래에서 불교가 번성할 수 있었다.
인도-그리스 왕 메난드로스 1세(기원전 160–135년)의 동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중앙 인도까지 발견되었으며, 앞면에 그리스어로 "구세주 왕 메난드로스"라는 비문을 새겼다. 메난드로스 이후의 몇몇 인도-그리스 왕들, 예를 들어 조일로스 1세, 스트라토 1세, 헬리오클레스 2세, 테오필로스, 페우콜라오스, 메난드로스 2세, 아르케비오스는 동전에 프라크리트어로 쓰인 "마하라자사 다르미카" (문자 그대로 "다르마의 왕")라는 칭호를 카로슈티 문자로 새겨 넣었다.
메난드로스 1세와 메난드로스 2세의 일부 동전은 승리의 그리스 상징, 즉 승리의 야자수나 니케 여신이 건네는 승리의 화환과 관련된 팔각형 바퀴의 불교 상징을 포함하고 있다. 밀린다 빤하에 따르면, 메난드로스 1세는 통치 말년에 불교 아라한이 되었으며,[21] 그의 유물이 공유되고 안치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플루타르코스에 의해서도 반영된 사실이다.[22]
인도-그리스 동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끼리 상징도 불교와 관련이 있었을 수 있는데, 안티알키다스와 메난드로스 2세의 동전의 유사성에서 알 수 있듯이, 안티알키다스의 동전에서 코끼리는 제우스와 니케와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고, 메난드로스 2세의 동전에서 불교의 바퀴와 같은 관계를 가진다. 조로아스터교의 인도-파르티아 왕국이 서기 1세기에 북인도를 침략했을 때, 그들은 인도-그리스 동전의 상징성을 상당 부분 채택했지만 코끼리를 사용하는 것을 삼갔는데, 이는 그 의미가 단순히 지리적인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메난드로스 1세 통치 이후, 아민타스 니카토르, 니키아스, 페우콜라오스, 헤르마이오스, 히포스트라토스 및 메난드로스 2세와 같은 여러 인도-그리스 통치자들은 오른손으로 불교의 비타르카 무드라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나머지 손가락을 뻗은 제스처)와 동일한 축복 제스처를 취하는 자신 또는 그리스 신들을 묘사했는데, 이는 불교에서 부처의 가르침의 전달을 의미한다.
프톨레마이오스에 따르면 그리스 도시들은 북인도에서 그리스-박트리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메난드로스는 번성하는 불교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인 사가라 (오늘날의 시알코트, 파키스탄 펀자브주)에 수도를 세웠다.[23] 데메트리오스가 건설하고 메난드로스가 재건한 대규모 그리스 도시는 탁실라 근처의 시르캅 유적지에서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는 불교 탑이 힌두교 및 그리스 신전과 나란히 서 있어 종교적 관용과 혼합주의를 보여준다.
3. 2. 언어와 문자의 교류
그리스인들은 인도에서 불교 전파에 기여한 사례가 여러 기록에서 나타난다. 테오도루스라는 그리스인 메리다크(주의 민간 총독)는 카로슈티 문자로 부처의 유물을 봉헌했다는 내용을 남겼다. 이 비문은 기원전 1세기에 메난드로스 또는 그의 후계자가 통치하던 시기에 지어진 탑 내부의 꽃병에서 발견되었다.[25]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필기체 그리스어로 작성된 불교 필사본이 발견되었다. 이 필사본에는 다양한 부처를 찬양하는 내용과 함께 대승 불교의 인물인 "로케스와라라자 부처" (λωγοασφαροραζοβοδδοgrc)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다. 이 필사본은 서기 2세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26]
4. 철학적 영향
그리스 철학과 불교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 이후 간다라 지역을 중심으로 두 철학 체계 간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피론주의와 견유학파, 퀴레네 학파 등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그리스 철학 학파들이다. 피론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동행하여 인도의 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세 가지 특성에 대한 가르침을 접하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다.[29][31] 오네시크리토스는 인도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도 나쁘거나 좋지 않으며, 의견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을 배웠다.[32] 퀴레네의 헤게시아스는 아소카 왕의 불교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33]
4. 1. 피론주의와 불교의 유사성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에 피론, 아낙사르쿠스, 오네시크리토스 등 여러 그리스 철학자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인도에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체육철학자("벌거벗은 철학자")로 불리는 금욕주의를 따르는 인도 철학자들과 교류했다.[28]피론은 그리스로 돌아와 서양 최초의 회의론 학파인 피론주의를 창시했다.[29] 그리스 전기 작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피론의 평정심과 세상과의 초연함이 인도에서 얻은 것이라고 설명했다.[29][30]
피론은 불교의 세 가지 특성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바탕으로 철학을 발전시키면서 불교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29][31]
4. 2. 견유학파와 불교의 유사점
스트라본에 따르면, 견유학파 철학자 오네시크리토스는 인도에서 "인간에게 일어나는 어떤 것도 나쁘거나 좋지 않으며, 의견은 단지 꿈에 불과하다. ... 최고의 철학은 쾌락과 슬픔으로부터 정신을 해방시키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을 배웠다고 한다.[32] 견유학파인 페레그리누스 프로테우스는 짐노소피스트들, 특히 칼라노스, 단다미스, 자르마노체가스에게 영향을 받았다.4. 3. 퀴레네 학파와 불교의 연관성
퀴레네 학파의 철학자 퀴레네의 헤게시아스는 키레네(Cyrene, Libya) 출신으로, 키레네의 마가스가 통치하던 곳에서 활동했다. 일부 학자들은 헤게시아스가 아소카 왕의 불교 선교사들의 가르침에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33]5. 예술적 영향
중앙아시아와 북인도에서 그리스의 오랜 존재는 종교뿐 아니라 예술적 상호 작용의 기회를 제공했다.[57][58] 그리스-불교 미술은 간다라 등지에서 그리스와 불교의 영향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간다라 미술은 불교를 주제로 했지만, 서아시아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은 모티프가 많았다.[37][62][63]
간다라 불교 미술에 나타난 헬레니즘의 영향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지만,[37][62][63] 간다라 조각의 비(非)인도적 특징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는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의 대상이다. 박트리아에서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으로 뿌리내린 지속적인 그리스 전통, 이후 헬레니즘 동방과의 접촉, 로마 제국에서 온 동시대 예술가들과의 직접적인 교류, 또는 그러한 출처들의 복잡한 결합 등이 거론된다.[64] 왕족의 보석(팔찌와 목걸이)과 부적 상자로 장식된 보살 조각상, 콘트라포스토 자세, 의복의 강조, 그리고 많은 디오니소스적 주제 등이 그 예시이다.[37]
하지만 예술 영역을 넘어, 대부분의 학자들은 간다라 불교에 눈에 띄는 그리스의 영향이 있었다고 추정하지 않는다.[65][66][5][67][68][69][70] 일부 학자들은 이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3][71]
"그리스-불교 미술"이라는 용어는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비판을 받아왔다.[72][73] 요한나 해닉은 "그리스-불교 미술"이라는 개념이 "고대 간다라 조각의 보기 좋은 비례와 우아한 자세"를 원주민들이 개발할 수 있었다는 것을 유럽 학자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마이클 팔서를 인용하여 "그리스 '본질'을 가진 불교 미술"이라는 전체 개념은 영국의 인도 통치 기간에 시작된 식민주의적 강요라고 주장했다.[75][76]
5. 1. 불상의 인간화 표현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불상을 인간의 형태로 처음 표현한 것은 그리스-불교 상호작용의 결과로 여겨진다. 이전의 불교 미술은 비형상적으로, 부처는 빈 왕좌, 보리수, 불족적, 법륜 등의 상징으로만 표현되었다.[34]
부처를 인간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과 비형상적 상징의 정교한 발전은 ''디가 니카야''에 기록된 부처의 가르침, 즉 열반에 든 후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것을 금지한 가르침과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인다.[34]
이러한 제약에 얽매이지 않고, "형상 숭배" 때문에 그리스인들이 "부처의 조각적 표현을 시도한 첫 번째 사람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35] 그리스인들은 고대 세계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종교적 초점을 맞출 수 있는 혼합주의적인 신들을 개발했다.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가 헬레니즘 이집트에서 도입한 세라피스가 대표적인 예시로, 그리스 신과 이집트 신의 특징을 결합했다. 인도에서도 그리스인들이 그리스 신-왕(아폴로 또는 박트리아-인도 왕국의 신격화된 창시자 데메트리오스 1세)의 이미지와 전통적인 부처의 신체적 특징을 결합하여 단일 신성을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부처 표현의 많은 양식적 요소들은 그리스의 영향을 보여준다. 1~2세기 간다라의 서 있는 부처와 같은 직립 형상의 콘트라포스토 자세, 히마티온, 곱슬 머리카락과 우쉬니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 (기원전 330년) 스타일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이며, 얼굴의 절제된 품질은 모두 강렬한 예술적 사실주의로 표현되었다.[37] 아프가니스탄 하다에서 불교와 순수한 헬레니즘 스타일, 도상학을 결합한 많은 조각품이 발굴되었다. 부처의 곱슬 머리카락은 불교 경전의 부처의 신체적 특징 목록에 묘사되어 있다. 오른쪽으로 도는 곱슬 머리카락은 팔리 경전에서 처음 묘사되었고, ''다샤샤스리카 프라즈냐파라미타''에서도 같은 묘사를 찾을 수 있다. 자이나교 조각상의 누드는 아폴론 원형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37]
그리스 예술가들은 부처의 초기 표현, 특히 서 있는 조각상의 저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이는 "고전 또는 헬레니즘 그리스 스타일로, 페르시아나 박트리아를 거친 아르케 스타일의 그리스나 로마 조각이 아닌, 주름의 사실적인 처리와 최고의 그리스 작품을 특징짓는 조형적 볼륨의 힌트를 보여준다."[38]
그리스의 양식적 영향은 이상적인 사실주의를 통해 부처의 표현에 반영되어, 불교의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상태를 더 쉽고 매력적으로 시각화하여 더 넓은 청중에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이후 수세기 동안 부처의 인간화된 표현은 불교 미술의 규범이 되었지만, 점차 더 많은 인도 및 아시아적 요소를 통합하도록 진화했다.
5. 2. 헬레니즘 도상의 차용
그리스-불교 미술은 간다라와 같이 그리스와 불교의 영향이 섞여 나타나는 예술이다. 간다라 미술은 불교를 주제로 했지만, 표현 방식은 서아시아나 헬레니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부처를 사람의 모습으로 처음 표현한 것은 그리스-불교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이전에는 부처를 빈 왕좌, 보리수, 불족적, 법륜과 같은 상징으로만 표현했다. 이는 부처가 열반에 든 후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지 말라고 한 가르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34]
그러나 "형상 숭배"에 익숙한 그리스인들은 처음으로 부처를 조각상으로 표현했다.[35] 그리스인들은 여러 신앙을 융합하여 혼합주의적인 신을 만드는 경향이 있었는데, 헬레니즘 이집트의 세라피스가 대표적인 예이다. 인도에서도 그리스인들은 아폴로나 박트리아-인도 왕국의 데메트리오스 1세를 모델로 하여, 부처의 특징을 결합한 신상을 만들었다.
부처의 표현에는 여러 그리스적인 요소가 나타난다. 1~2세기 간다라의 서 있는 부처상은 히마티온을 걸치고,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다. 곱슬머리와 우쉬니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 (기원전 330년)의 스타일에서 유래했으며, 얼굴은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37] 아프가니스탄의 하다에서는 불교와 헬레니즘 양식이 결합된 많은 조각품이 발견되었다. 오른쪽으로 도는 곱슬머리는 팔리 경전과 다샤샤스리카 프라즈냐파라미타에 묘사되어 있다. 또한 자이나교 조각상의 누드는 아폴론 원형에서 영감을 받았을 수 있다.[37]
초기 부처 조각상은 그리스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고전 또는 헬레니즘 그리스 스타일로, 주름의 사실적인 처리와 조형적인 볼륨감이 특징이다.[38]
이러한 그리스의 영향은 부처를 이상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깨달음의 경지를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간다라 미술이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노력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영감을 준다"고 말했다.[39] 이후 부처의 표현은 점차 인도와 아시아의 요소를 더 많이 받아들였다.
다른 불교 신들도 그리스 신들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헤라클레스는 박트리아의 데메트리우스 1세의 수호신이었으며, 부처의 수호신인 금강수의 모델이 되었다.[40][41] 일본에서는 분노한 근육질의 니오 수호신으로 발전했다.
일본 주오 대학의 가쓰미 타나베 교수에 따르면, 풍신은 그리스 신 보레아스에서, 어머니 신 하리티는 티케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42]
화환을 든 케루빔, 덩굴 스크롤, 켄타우로스와 트리톤과 같은 반인반수 생물도 헬레니즘 예술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6. 동서양으로의 전파
그리스 문화는 다리우스 대왕의 아케메네스 제국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정복하면서 중앙아시아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반란을 일으킨 그리스인들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34년에 이 지역을 정복했을 때, 그는 이미 정착한 많은 그리스인들과 마주했다. 그는 히다스페스 전투에서 포루스를 물리치고 사트라프(총독)로 임명한 후 인더스강과 젤룸강을 건넜으나, 비아스강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펀자브를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극동 지역에는 그리스 문화가 정착되었고, 아무다리야와 박트리아 지역에 여러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리스 정착지는 카이베르 고개, 간다라 (탁실라 참조) 및 펀자브로 확장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디아도코이들이 자신들의 왕국을 세웠고, 셀레우코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을 세워 인도까지 확장했다.
찬드라굽타 마우리아가 건국한 마우리아 제국은 난다 제국을 정복하고, 셀레우코스-마우리아 전쟁에서 셀레우코스 제국을 격파했다. 인더스 계곡과 간다라의 마케도니아 사트라프가 마우리아 제국으로 넘어갔고, 혼인 동맹이 체결되었다. 또한 500마리의 전쟁 코끼리가 셀레우코스 제국으로 이전되었다.
마우리아 황제 아소카는 불교로 개종하고 인도주의적 개혁을 채택했다.[10] 아소카의 칙령에 기록된 바와 같이, 그는 불교의 달마를 제국 전역에 퍼뜨렸으며, 그의 영토 내의 그리스인들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을 불교로 개종시켰다고 주장한다.
마우리아의 쇠퇴와 슝가 제국에 의한 전복, 박트리아의 반란은 그레코-박트리아 왕국(기원전 250–125년)의 형성을 이끌었다. 그레코-박트리아에 이어 인도-그리스 왕국 (기원전 180년 – 서기 10년)이 분열되었다. 불교는 월지, 인도-스키타이와 쿠샨 제국 (서기 1–3세기)에 의해 정복되었을 때조차 번성했다.
인도의 불교는 5세기경부터 시작된 힌두교 부흥 이전까지 수세기 동안 주요 종교였으며, 벵골과 같은 주요 거점은 인도의 이슬람 침략 동안 대부분 종식되었다.
6. 1. 동쪽으로의 전파: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중앙 아시아와 동아시아로의 불교 전파에는 그리스 출신 불교 승려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불교 경전을 번역하고 전파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마하밤사(제29장)에 따르면, 그리스-박트리아 왕 메난드로스 1세 (팔리어: "밀린다", 기원전 165–135년) 통치 기간에 "그리스 도시 알라스산드라"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북쪽으로 약 150km 떨어진 코카서스 알렉산드리아)에서 온 3만 명의 불교 승려를 이끌고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대탑 봉헌식에 참석한 마하 다르마라크시타는 "그리스인 (팔리어: 요나, 문자적으로 이오니아인) 불교 수석 승려"였다.[24] 달마락시타(산스크리트어, 또는 담마락키타(팔리어))는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황제가 파견한 선교사 중 한 명으로, 그의 이름은 '달마에 의해 보호받는'이라는 뜻이다. 그는 그리스인 (팔리어: "요나")으로 묘사되며, 그의 활동은 불교 형성기에 헬레니즘 그리스의 활발한 참여를 보여준다.[24] 메난드로스 1세는 나가세나의 가르침을 받아 불교로 개종했으며, 아라한으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불교의 위대한 후원자로 기록되었으며, 그와 승려 나가세나의 대화는 밀린다 팡하라는 팔리 불교 경전으로 남아있다.
간다라 지역은 그리스-불교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곳으로, 이곳의 불교 승려들은 북아시아 방향으로 불교 사상을 전파하고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쿠샨 왕조 시대의 그리스-불교 승려 로카크세마는 중국 뤄양으로 가서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번역가 중 한 명이 되었다.[43] 타림 분지에서 발견된 베제클리크 천불동의 프레스코화는 중앙 아시아와 동아시아 불교 승려들 사이에 약 10세기까지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선 불교의 창시자이자 소림사 승려들의 육체 훈련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달마는 중국 최초의 기록(547년 연현지)에서 중앙 아시아 출신 승려로 묘사된다.[44] 불교 미술에서 달마는 성미가 급하고 수염이 많으며 눈이 큰 야만인으로 묘사되며, 중국 찬 텍스트에서는 "푸른 눈의 야만인"(碧眼胡|bìyǎn hú중국어)이라고 불린다.[45]
7세기의 중국 역사서 양서에 따르면, 485년에 간다라 출신의 다섯 명의 승려가 부상("바다 너머의 극동의 나라", 아마도 동부 일본)으로 가서 불교를 전파했다.
간다라 출신의 무착과 세친 (4세기) 형제는 유가행파(유식) 대승 불교를 창시했으며, 능가경과 같은 주요 경전을 통해 대승, 특히 선 철학의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6. 2. 서쪽으로의 전파: 로마 제국
로마 제국 시대에 서쪽으로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인들이 실크에 열광했기 때문이다. 로마 원로원은 경제적, 도덕적 이유로 실크 착용을 금지하는 칙령을 여러 차례 발표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스트라보 (기원전 64/63년 – 서기 24년경), 세네카 (기원전 3년경 – 서기 65년), 대 플리니우스 (23–79년) 등의 기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19][20] 스트라보와 플루타르코스 (45년경–125년경)는 인도-그리스 불교 왕 메난드로스에 대해 기록하여, 인도-그리스 불교에 대한 정보가 헬레니즘 세계에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자르마노체가스 (Ζαρμανοχηγὰς)는 사마나 전통의 승려였다. (불교도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스트라보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그는 아우구스투스 (서기 14년 사망) 통치 시기에 안티오크에서 니콜라우스 다마세누스를 만났고, 얼마 후 아테네로 가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46] 그의 이야기와 아테네에 있는 그의 무덤은 한 세기 이상 널리 알려졌다. 플루타르코스 (서기 120년 사망)는 알렉산드로스 전기에서 칼라누스의 자기 희생을 언급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인디언이 카이사르와 함께 아테네에 왔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인디언의 기념비'를 보여준다"라고 썼다.[47] 이는 자르마노체가스의 아테네 무덤을 가리킨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서기 215년 사망)는 그의 저서 스트로마타 (제1권, 제15장)에서 부처를 언급했다. 그는 "인도의 체육 철학자들 중에는 사르마나와 브라만이 있다. '힐로비'라고 불리는 사르마나 사람들은 도시에 살지 않고, 지붕도 없으며, 나무 껍질로 옷을 입고 견과를 먹고 손으로 물을 마신다. 오늘날 엥크라타이트라고 불리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결혼도 아이를 낳는 것도 알지 못한다. 또한 인디언 중 일부는 그들의 특별한 신성함 때문에 신성한 존경을 받게 된 붓다 (Βούττα)의 가르침을 따른다."라고 기록했다.[48]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인도 묘비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발견되었다.[49] 이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에 불교도가 존재했다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 나중에 기독교의 가장 활발한 중심지 중 일부가 설립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50]
기독교 이전의 수도원인 테라페우타이는 아마도 불교 용어인 "''테라바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51] 이들은 "거의 전적으로 불교 금욕주의의 가르침과 관행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 있으며,[52] 아소카의 서방 사절의 후손일 수도 있다.[53] 알렉산드리아의 필로가 테라페우타이의 교리와 관행을 설명했지만, 그들이 어떤 종교와 관련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종교 학자 울리히 R. 클라인헴펠의 분석에 따르면 테라페우타이가 실천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종교는 불교였다.
2022년, 미국-폴란드 고고학자들은 여신 이시스와 신 세라피스에게 헌정된 이집트 사원을 발굴했다. 여기에는 부처 조각상과 힌두교 신들이 포함되어 있어, 초기 로마 시대까지 그리스-불교의 영향이 확장되었음을 보여준다.
6. 3. 한반도와의 관련성 (추가)
간다라 미술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에 전래되었고, 이는 다시 한반도의 불교 미술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54][55][47][56] 특히 통일신라 시대에 건립된 석굴암 본존불상의 조형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는 학설이 제기된다.석굴암 본존불상은 한국 불교 미술의 대표적인 걸작 중 하나로, 그 숭고한 아름다움과 조형미는 인도와 중국의 불상 조각과는 다른 독자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간다라 미술의 영향, 특히 그리스 조각의 사실주의적 표현 기법과 불교 도상의 결합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7. 결론
그리스-불교는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가 만나 탄생한 독특한 문화 융합 현상이다. 이 문서는 그리스-불교의 역사, 문화, 철학, 예술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다루었으며, 동서양 문명 교류의 중요한 사례로서 그리스-불교가 가지는 의의를 강조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중앙 아시아 정복 이후, 그레코-박트리아 왕국 (기원전 250–125년)과 인도-그리스 왕국 (기원전 180년 – 서기 10년)을 거치며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가 융합되었다.[6][7][8][9]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 왕은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고, 그의 칙령에는 그리스인들도 불교로 개종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11] 이후 쿠샨 제국 (서기 1–3세기) 시대에도 불교는 계속 번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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