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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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노성은 일본 오카야마현에 위치한 산성으로, 663년 백강 전투 이후 당나라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하여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후반에 건설되었으며, 절구 형태의 산 정상부를 둘러싼 2.8km 길이의 성벽과 4개의 문, 6개의 수문 등 다양한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기노성은 백제 기술자의 지원을 받아 건설되었으며, 1986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존 및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또한, 기비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인 '우라 전설'의 배경이 되기도 하며, 고대 한반도계 사람들이 건설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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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노성 | |
---|---|
기본 정보 | |
이름 | 기노성 |
원어 이름 | 鬼ノ城 (きのじょう) |
유형 | 한국식 산성 |
위치 | 소자, 오카야마, 일본 |
![]() | |
상세 정보 | |
축조 시기 | 7세기 경 |
축조 주체 | 야마토 조정 |
재료 | 나무, 흙, 돌 |
사용 시기 | 아스카 시대 - 나라 시대 |
상태 | 활발한 고고학 유적지, 일부 건물 재건 |
문화재 지정 | 일본의 사적 "기조산" |
구조 | |
성곽 구조 | 고대 산성 (신코로세키식 산성) |
잔존 유구 | 성문, 각루, 석루, 토루, 수문, 敷石(부석) |
재건 요소 | 성문, 각루, 토루 |
2. 역사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연합군이 패한 후,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성했다고 여겨진다.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에는 서일본의 요충지에 오노성 등 12개의 백제식 산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노성도 이 방위시설 중 하나라고 추측된다.[3] 그러나 어느 역사서에도 일체 기록이 없고, 축성 시기가 백강 전투 시점하고는 부합되지 않는 등, 아직 명확하게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 없는 미지의 산성이다.
1986년 3월 25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소자 시 교육위원회가 2001년부터 사적 정비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서문이 있었던 장소에서는 건축물과, 토담, 석벽의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오카야마 현 교육위원회에서 성내 확인 조사도 시작했다. 덧붙여, 성이 있는 장소에서는 다수의 희소 식물도 있어 1999년 발굴조사와 자연보호라는 부분에서 마찰이 있었다.
1978년, 유적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가 수행되었다. 이 조사의 결과와 발굴된 유물을 통해 이 성은 아스카 시대에 건설되었고 7세기 4분기부터 8세기 초까지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기원전 667년에 성이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노성은 2006년 일본성 재단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5]
2. 1. 백제 부흥 운동과 기노성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연합군이 패한 후, 당,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성했다고 여겨진다.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에는 서일본의 요충지에 오노성 등 12개의 백제식 산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노 성도 이 방위시설 중 하나라고 추측된다.[3] 그러나 어느 역사서에도 일체 기록이 없고, 축성 시기가 백강 전투 시점하고는 부합되지 않는 등, 아직 명확하게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 없는 미지의 산성이다. 사서에 기재가 없고, 상기에 말했던 12개의 백제식 산성에 해당되지 않는 것을 신농석식 산성이라고 부른다.절구형태의 기노조 산의 산정상 주위를 석벽과 토담으로 된 성벽이 주위 2.8km에 거쳐 둘러쳐 있다. 성에는 문과 성밖으로의 배수기능을 가진 수문이 존재한다. 문은 동서남북 4방향, 수문은 5군데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는 식량 저장고등 건축물의 초석과 봉화, 물을 깃는 장소등이 확인되었다.[4]
백제와 야마토 일본 연합군이 663년 백강구 전투에서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야마토 조정은 당 또는 신라 양쪽 또는 양쪽 모두의 침략을 두려워했다. 이에 덴지 천황은 600년대 후반 내내 거대한 해안 요새 네트워크 건설을 명령했으며, 종종 백제 기술자, 장군 및 장인의 지원을 받았다. 신라-당 전쟁 (670–76)의 발발을 알지 못한 채, 일본은 신라가 더 이상 당과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후인 701년까지 요새를 계속 건설했다.[3]
기노성은 어떤 역사적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으며, 건설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고학 발굴 결과 7세기 후반에 건설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은 키비 고원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키비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산의 정상 부분을 포함한다. 4개의 문, 모서리 탑, 6개의 수문이 있는 석재 및 토루로 된 벽이 2.8km 뻗어 있다. 벽 안쪽 면적은 약 30헥타르이다.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포장석 발견은 일본에서 처음이다. 성 안에는 7채의 건물 기초석, 한 채의 기둥 건물, 저수지 및 우물, 12개의 대장간 및 제철소 유적이 확인되었다.[4]
일본서기에 따르면 660년 백제가 당과 신라 연합군에 멸망하고, 661년 나카노오오에노 황자등이 백제 부흥을 위해 군대를 파견, 663년 백촌강 전투가 발발했다고 한다. 664년 쓰시마섬, 이키섬, 지쿠시국등에 사키모리와 봉수를 배치하고, 지쿠시국에 미즈키를 축조, 665년 나가토국에 성을 쌓고, 지쿠시국에 오노성과 키이성을 축조, 667년 야마토국에 다카야스성, 사누키국에 야시마성, 쓰시마국에 가네다성을 축조하고, 오미오쓰노미야로 천도 하였다고 한다.
2. 2. 축성 배경 및 과정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연합군이 패한 후, 당,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성했다고 여겨진다.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에는 서일본의 요충지에 오노성 등 12개의 백제식 산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노 성도 이 방위시설 중 하나라고 추측된다.[3] 그러나 어느 역사서에도 일체 기록이 없고, 축성 시기가 백강 전투 시점하고는 부합되지 않는 등, 아직 명확하게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 없는 미지의 산성이다. 사서에 기재가 없고, 상기에 말했던 12개의 백제식 산성에 해당되지 않는 것을 신농석식 산성이라고 부른다.고고학 발굴 결과 7세기 후반에 건설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은 키비 고원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키비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산의 정상 부분을 포함한다. 절구형태의 기노조 산의 산정상 주위를 석벽과 토담으로 된 성벽이 주위 2.8km에 걸쳐 둘러쳐 있다. 성에는 문과 성밖으로의 배수기능을 가진 수문이 존재한다. 문은 동서남북 4방향, 수문은 5군데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는 식량 저장고등 건축물의 초석과 봉화, 물을 긷는 장소등이 확인되었다.[4]
성의 위치는 세토 내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곳은 국제 교류와 무역의 주요 해상 경로였으며, 따라서 침략자의 주요 경로이기도 했다. 시코쿠 섬에 있는 현대 요새인 야시마성과 기야마성은 기노성의 시야 안에 있다.
『일본서기』에 기록된 당시의 국제 정세와 방어 시설 설치 기사는 다음과 같다.
- 사이메이 천황 6년(660년): 백제가 당나라·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
- 사이메이 천황 7년(661년): 나카노오오에노 황자 등이 백제 부흥을 위해 장군 아즈미노 히라후, 박시진전래진, 백제 왕태자 부여풍장 등과 함께 군대를 파견.
- 덴지 천황 2년(663년): 백촌강 전투 발발.
- 덴지 천황 3년(664년): 쓰시마섬, 이키섬, 지쿠시국 등에 사키모리와 봉수를 배치하고, 지쿠시국에 미즈키를 축조.
- 덴지 천황 4년(665년): 나가토국에 성을 쌓고, 지쿠시국에 오노성과 키이성을 축조.
- 덴지 천황 6년(667년): 야마토국에 다카야스성, 사누키국에 야시마성, 쓰시마국에 가네다성을 축조. 이 해에 나카노오오에 황자는 오미오쓰노미야로 천도하고, 다음 해 정월에 덴지 천황이 됨.
2. 3. 기노성의 운영과 폐성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연합군이 패한 후, 당,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성했다고 여겨진다.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에는 서일본의 요충지에 오노성 등 12개의 백제식 산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노 성도 이 방위시설 중 하나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어느 역사서에도 일체 기록이 없고, 축성 시기가 백강 전투 시점하고는 부합되지 않는 등, 아직 명확하게 이렇다 저렇다고 말할 수 없는 미지의 산성이다. 사서에 기재가 없고, 상기에 말했던 12개의 백제식 산성에 해당되지 않는 것을 신농석식 산성이라고 부른다.절구 형태의 기노조 산 정상 주위를 석벽과 토담으로 된 성벽이 주위 2.8km에 걸쳐 둘러쳐 있다. 성에는 문과 성 밖으로의 배수 기능을 가진 수문이 존재한다. 문은 동서남북 4방향, 수문은 5군데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는 식량 저장고 등 건축물의 초석과 봉화, 물을 긷는 장소 등이 확인되었다.
1986년 3월 25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소자 시 교육위원회가 2001년부터 사적 정비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서문이 있었던 장소에서는 건축물과, 토담, 석벽의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오카야마 현 교육위원회에서 성내 확인 조사도 시작했다. 덧붙여, 성이 있는 장소에서는 다수의 희소 식물도 있어 1999년 발굴조사와 자연보호라는 부분에서 마찰이 있었다.
고고학 발굴 결과 7세기 후반에 건설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은 키비 고원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키비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산의 정상 부분을 포함한다. 4개의 문, 모서리 탑, 6개의 수문이 있는 석재 및 토루로 된 벽이 2.8km 뻗어 있다. 벽 안쪽 면적은 약 30헥타르이다.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포장석 발견은 일본에서 처음이다. 성 안에는 7채의 건물 기초석, 한 채의 기둥 건물, 저수지 및 우물, 12개의 대장간 및 제철소 유적이 확인되었다.[4]
세토 내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곳은 국제 교류와 무역의 주요 해상 경로였으며, 따라서 침략자의 주요 경로이기도 했다. 시코쿠 섬에 있는 현대 요새인 야시마성과 기야마성은 기노성의 시야 안에 있다.
너비 7m, 높이 6~7m의 토루는 성벽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너비 1.5m의 포장석이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 바닥에 깔려 있어 강력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방어 전선의 앞쪽 두 곳에 있는 돌출부는 석벽으로 지어졌다. 물의 흐름으로 인해 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수문은 방어 전면에 집중되어 있다. 4개의 수문이 있으며, 성벽 아래 2~3m 높이에 석벽이 건설되어 물 유입구를 제공하고, 수로 꼭대기에는 토루가 있다. 나머지 두 개는 석벽 사이로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는 침투 게이트이다. 또한, 수문의 성쪽 두 계곡에서 제방과 같은 유적이 발굴되어 성벽을 파편류와 물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하고 물을 확보했다.
성문은 동문, 남문, 서문(방어 전선), 북문(방어 후면)의 네 곳이었다. 주 출입구는 서문이며, 모서리 탑으로 보호되었다. 기노성 남쪽 기슭의 낮은 언덕이 남북으로 튀어나온 농촌 지역에는 길이 약 300m, 높이 약 3m, 너비 약 21m의 토루가 있다. 또한 성으로 이어지는 접근 도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조 요새의 부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벽의 바닥에서 많은 나무 제품과 스에키 및 하지기 도자기, 먹, 숫돌, 못 및 기타 철기류가 발굴되었다. 기노성이 요새로서 버려진 후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의 건물 기초 주변에서는 기와 탑, 물병, 용기 등 불교 관련 유물이 발굴되었다.[4]
1978년, 유적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가 수행되었다. 이 조사의 결과와 발굴된 유물을 통해 이 성은 아스카 시대에 건설되었고 7세기 4분기부터 8세기 초까지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기원전 667년에 성이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노성은 2006년 일본성 재단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5]
3. 구조 및 시설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연합군이 패한 후,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성했다고 여겨진다. 니혼쇼키(日本書紀) 등에는 서일본 요충지에 오노성 등 12개의 백제식 산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고, 기노 성도 이 방위시설 중 하나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어느 역사서에도 일체 기록이 없고, 축성 시기가 백강 전투 시점과는 부합되지 않는 등, 아직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산성이다.
절구 형태의 기노조 산 정상 주위를 석벽과 토담으로 된 성벽이 주위 2.8km에 걸쳐 둘러싸고 있다. 성에는 문과 성 밖으로 물을 배수하는 기능을 가진 수문이 있었다. 성 내부에서는 식량 저장고 등 건축물의 초석과 봉화, 물을 긷는 장소 등이 확인되었다.
1986년 3월 25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소자 시 교육위원회가 2001년부터 사적 정비를 담당하고 있다. 특히 서문이 있던 곳에서는 건축물, 토담, 석벽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오카야마 현 교육위원회에서 성내 확인 조사도 시작했다.
3. 1. 성벽 및 성문
기노성은 7세기 후반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산성이다.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연합군이 패배한 후,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기노성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고, 축성 시기도 백강 전투 시점과 일치하지 않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기노성은 절구 모양의 기노조 산 정상부를 둘러싼 형태로, 석벽과 토담으로 된 성벽이 약 2.8km에 걸쳐 이어져 있다. 성 내부 면적은 약 30헥타르이다. 성에는 동서남북 4방향에 문이 있었고, 성 밖으로 물을 배출하는 수문은 5곳에 설치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식량 저장고 등으로 추정되는 건물터와 봉화,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은 토루이지만, 성문 주변과 방어 시설에는 돌을 쌓아 만든 석벽이 사용되었다. 특히 성벽 아래쪽에 돌을 깔아 방어력을 높인 구조는 일본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다.
성문은 동문, 남문, 서문, 북문의 4곳이 있었는데, 주 출입구는 서문으로 추정된다. 서문은 모서리 탑으로 보호되었으며, 다른 문들에 비해 더 견고하게 만들어졌다.
기노성은 세토 내해를 내려다보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어, 시코쿠 섬에 있는 야시마성과 기야마성을 관측할 수 있었다.
성벽과 성문에 대한 상세 정보는 다음과 같다.
구분 | 상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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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 |
성문 |
3. 2. 수문
기노성에는 성문과 성밖으로 물을 배수하는 기능을 가진 수문이 존재했다. 문은 동서남북 4방향, 수문은 5군데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성벽은 폭 7m, 높이 6~7m의 판축 토루가 전체의 8할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성벽 최하부 안팎에 1.5m 폭의 부설석(포장석)이 설치되어 있어, 석성의 느낌을 강하게 준다.[16] 방어 전면의 2곳의 돌출부는 석축으로 축조되어 있다. 유수에 의한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수문은 방어 전면에 집중되어 있다. 성벽 하부의 2~3m에 석축을 쌓아 수구를 설치하고, 통수구의 상부를 토루로 굳힌 수문이 4곳 있다.[17] 다른 2곳은 석축 사이를 자연 통수시키는 침투식 수문이다.[18] 또한, 수문의 성 안쪽 2곳의 골짜기에서 둑 모양 유구가 발굴되었다. 토석류나 유수로부터 성벽을 지키고, 물을 확보하기 위한 구축물이다.[10] 제0수문의 성벽 하부에서는 마스(枡) 모양의 돌담으로 된 얕은 저수지가 발굴되어, 많은 목제품이 출토되었다.[19]
성문은 방어 전면에 동문, 남문, 서문, 방어 배면에 북문의 4곳이 열려 있다. 주 진입로로 보이는 곳에 서문이 있으며, 서문의 북쪽 약 60미터 모퉁이에 각루(성벽 모퉁이에 세운 망루)가 있다.[20] 각 성문은 문초(門礎)를 붙인 굴립주(掘立柱) 건물이고, 문도(門道)에는 돌을 깔았다. 서문은 평문(平門) 구조이며, 다른 문은 현문(懸門) 구조이다.[21] 각 문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문 | 칸수(間口) X 칸수(奥行) | 기둥 수 | 본주(本柱) 크기 | 기타 |
---|---|---|---|---|
동문 | 1 X 2 | 6개의 원주 | - | - |
남문 | 3 X 2 | 12개의 각주 | 한 변이 58cm 각 | 중앙의 1칸이 출입구 |
서문 | 3 X 2 | 12개의 각주 | 한 변이 60cm 각 | 문도 안쪽에 4개 기둥의 가림막[22] |
북문 | 1 X 3 | 8개 기둥 | 한 변이 55cm의 각주, 나머지는 원주 | 문도에 배수구 매설[23] |
서문 주변과 각루에 이르는 토루 상면의 기둥 구멍 배열은 판담(板談)을 위한 기둥 자리로 추정된다.[18]
3. 3. 건물터 및 기타 시설
기노조 산 정상 주위를 둘러싼 2.8km 길이의 성벽은 석벽과 토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에는 동서남북 4방향에 문이, 5곳에 성 밖으로 물을 빼는 수문이 있었다. 성 내부에서는 식량 저장고, 봉화, 우물 등의 시설과 건물 초석이 확인되었다.[11]성벽은 주로 폭 7m, 높이 6~7m의 판축 토루로 구성되어 있지만, 성벽 안팎 바닥에는 폭 1.5m의 포장석이 깔려 있어 석성의 느낌을 준다.[16] 방어선 두 곳에는 석벽으로 된 돌출부가 있다. 물의 흐름으로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문이 방어선에 집중되어 있다. 성벽 아래 2~3m 높이에 석벽을 쌓아 물을 빼내는 수문이 4곳,[17] 석벽 사이로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도록 하는 침투식 수문이 2곳 있다.[18] 수문 안쪽 계곡 두 곳에서는 제방과 같은 유구가 발굴되어 성벽을 보호하고 물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10]
성문은 동문, 남문, 서문(방어 전면), 북문(방어 후면)의 4곳이다. 주 출입구는 서문이며, 모서리 탑으로 보호되었다. 기노성 남쪽 기슭에는 성으로 이어지는 접근 도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조 요새로 추정되는 토루 유적이 있다.
성벽 바닥에서는 나무 제품, 스에키 및 하지키 도자기, 먹, 숫돌, 못 등 철기류가 발굴되었다. 성내 중심부에는 식량 저장용으로 보이는 고상 창고 건물터 5동, 관리동으로 보이는 건물터 2동이 발굴되었다. 12곳의 대장간 유적에서는 철기 제작에 사용된 도구들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스에키와 하지키 등 다양한 유물이 발견되었다.[10] 기노성이 요새로서 버려진 후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 건물 기초 주변에서는 기와 탑, 물병 등 불교 관련 유물이 발굴되었다.[4]
3. 4. 수성상 유구
鬼ノ城|기노조일본어 남쪽 기슭의 저구릉이 남북으로 돌출하여 좁아진 전원 지대에는 수성상 유구가 있다. 판축상의 토루로, 길이 약 300m, 높이 약 3m, 기저부 폭 약 21m이며, 토루 위에 사람들이 집주한다. 수성과 오노성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성으로의 진입로를 차단한 군사 시설[24]로 여겨진다.[25]4. 우라 전설
우라 전설은 기비 지방에 전해오는 모모타로 이야기의 모티브가 된 전설이다.
고대 기비 지방에는 백제 왕자라고 칭하는 우라(온라)라는 오니(도깨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기노성을 거점으로 이 지역을 지배하고 악행을 저질렀다. 이에 스진 천황은 고레 천황의 아들인 기비쓰비코 노 미코토를 파견했다. 미코토는 현재 기비쓰 신사에 모셔져 있다. 미코토는 우라를 활로 쏘아 맞추었지만, 우라는 바위로 변해 화살을 삼켰다. 그래서 미코토는 화살 두 개를 동시에 쏘아 우라의 왼쪽 눈을 맞추었다. 그러자 우라는 꿩이 되어 도망갔고, 미코토는 매가 되어 쫓았다. 우라가 잉어가 되어 도망가자, 미코토는 가마우지로 변해 우라를 잡았다. 이렇게 우라를 토벌했다고 전해진다. 각각의 전설이 남아 활을 먹었다는 곳엔 야구이 신사(矢喰神社), 우라의 눈에서 피가 나와 흐르게 되었다는 지스이 강(血吸川), 잉어를 먹었다는 곳엔 고이쿠이 신사(鯉喰神社)가 존재한다.[2]
우라는 제철 기술을 가진 기비 지방의 호족이라 생각된다. 지스이 강이 붉은 이유는 철분을 많이 함유했기 때문이다. 기비 지방은 오래전부터 철의 산지로 알려져 『真金吹く吉備(순금이 나오는 기비)』로 불리고 있다. 성의 이름은 문자 그대로 "귀신 성"을 의미한다(''ki''는 ''오니''의 다른 음독이다). 전통적인 전설에 따르면, 과거에 온라(Onra) 또는 우라(Ura)라는 귀신이 이 성에서 기비국을 다스렸다고 한다.[2] 그러나 "Ki"는 백제의 고대 언어로 "성"을 의미하며, 나중에 단순히 "귀신"을 의미하는 ''한자'' 문자가 할당되었다. "Ki-no-jō"는 "성"이라는 두 단어를 결합한 이름이다.
5. 현대의 기노성
663년 백강 전투에서 일본-백제 연합군이 패한 후, 당과 신라의 침공에 대비해 축성했다고 여겨진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서일본 요충지에 오노성 등 12개의 백제식 산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기노 성도 이 방위시설 중 하나로 추측된다.
하지만 니혼쇼키를 포함한 그 어떤 역사서에도 기노성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며, 축성 시기가 백강 전투 시점과 부합하지 않는 등,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아 '미지의 산성'으로 불린다.
기노성은 절구 형태의 기노조 산 정상 주위를 석벽과 토담으로 된 성벽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이다. 성벽의 둘레는 약 2.8km이며, 성에는 문과 성 밖으로 물을 배출하는 수문이 존재한다. 성문은 동서남북 4방향에, 수문은 5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성 내부에서는 식량 저장고 등으로 추정되는 건물 초석과 봉화, 물을 긷는 장소 등이 발견되었다.
성의 위치는 세토 내해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곳은 과거 국제 교류와 무역의 주요 해상 경로였으며, 침략자들의 주요 경로이기도 했다. 시코쿠 섬에 있는 야시마성과 기야마성은 기노성에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성벽의 대부분은 너비 7m, 높이 6~7m의 토루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성벽 안쪽과 바깥쪽 바닥에는 너비 1.5m의 포장석이 깔려 있어 튼튼한 인상을 준다. 방어선의 앞쪽 두 곳에 있는 돌출부는 석벽으로 지어졌다. 물의 흐름으로 인해 성벽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수문은 방어선에 집중되어 있다. 4개의 수문은 성벽 아래 2~3m 높이에 석벽을 쌓아 물 유입구를 만들고, 수로 위에는 토루를 쌓았다. 나머지 두 개는 석벽 사이로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만들어졌다. 또한, 수문 안쪽 두 계곡에서는 제방과 같은 유적이 발굴되어 성벽을 토석류와 물의 흐름으로부터 보호하고 물을 확보하는 역할을 했다.
성문은 동문, 남문, 서문(방어 전선), 북문(방어 후면)의 네 곳에 설치되었다. 주 출입구는 서문이며, 모서리 탑으로 보호되었다. 기노성 남쪽 기슭의 낮은 언덕이 남북으로 튀어나온 농촌 지역에는 길이 약 300m, 높이 약 3m, 너비 약 21m의 토루가 있는데, 이는 성으로 이어지는 접근로를 보호하기 위한 보조 요새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바닥에서는 스에키 및 하지키 도자기, 먹, 숫돌, 못, 기타 철기류가 발굴되었다. 기노성이 요새로서 기능을 상실한 후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까지의 건물 기초 주변에서는 기와, 물병, 용기 등 불교 관련 유물이 발굴되었다.[4]
야마토 조정은 왜 (일본)의 방어를 위해, 조선반도를 마주하는 쓰시마섬에서 기나이에 이르는 요충지에 다양한 방어 시설을 건설했다.[9]。 기노성은 사서에 기록이 없고 축성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발굴 조사에서는 7세기 후반에 축성된 것으로 여겨진다.[10]。
기노성은 기비 고원 남단, 표고 397m의 귀성산 산정부에 위치한다. 깔때기를 엎어 놓은 형태의 산 모양 7~9부 능선 둘레를 석루・토루로 된 성벽이 2.8km에 걸쳐 두건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내 면적은 약 30헥타르이다. 성벽은 토루가 주체이며, 성문 4곳, 각루, 수문 6곳 등으로 구성된다.[11][12]。 성벽 보호를 위한 부설석 발견은 일본 최초이다. 성내에서는 초석 건물터 7동, 굴립주 건물터 1동, 溜井, 봉화장, 대장장이 유구 등이 확인되었다.[13]。 기노성은 산성에 필요한 설비가 거의 갖춰져, 미완성 산성이 많은 가운데 드문 완성된 고대 산성으로 여겨진다.[14]。
성벽은 폭 7m, 높이 6~7m의 판축 토루가 8할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나 성벽 최하단 안팎에 1.5m 폭의 부설석이 설치되어 있어 석성 느낌이 강하다.[16]。 방어 전면 두 곳의 돌출부는 석축으로 축조되었다. 유수에 의한 성벽 붕괴 방지를 위한 수문은 방어 전면에 집중되어 있다. 성벽 하부 2~3m에 석축을 쌓아 수구를 설치하고, 통수구 상부를 토루로 굳힌 수문이 4곳 있다.[17]。 다른 2곳은 석축 사이로 자연 통수되는 침투식 수문이다.[18]。 수문 성내 측 2곳의 골짜기에서 둑 모양 유구가 발굴되었다. 토석류나 유수로부터 성벽을 지키고 물을 확보하기 위한 구축물이다.[10]。 제0수문 성벽 하부에서는 마스 모양 돌담의 얕은 저수지가 발굴되어 많은 목제품이 출토되었다.[19]。
성문은 방어 전면에 동문, 남문, 서문, 방어 배면에 북문, 총 4곳이 있다. 주 진입로는 서문이며, 서문 북쪽 약 60m 모퉁이에 각루[20]가 있다. 각 성문은 문초를 붙인 굴립주로, 문도는 돌을 깔았다. 서문은 평문 구조이며, 다른 문은 현문 구조[21]이다. 동문은 간구 1칸×깊이 2칸, 6개 원주 구조이다. 남문은 간구 3칸×깊이 2칸, 12개 각주 구조로, 중앙 1칸이 출입구이며 본주는 한 변이 58cm 각이다. 서문은 남문과 같은 기둥 배열로, 본주는 한 변이 60cm 각이다. 문도 안쪽에 4개 기둥 가림막이 있다.[22]。 북문은 간구 1칸×깊이 3칸, 8개 기둥 구조이다. 본주는 한 변이 55cm 각주이며, 다른 것은 원주이다. 문도에 배수구가 매설되어 있다.[23]。 서문 주변과 각루에 이르는 토루 상면 기둥 구멍 배열은 판담을 위한 기둥 자리로 추정된다.[18]。
성내 중심부에는 식량 저장용 고상 창고로 보이는 초석 총주 건물터 5동, 관리동으로 보이는 초석 측주 건물터 2동이 발굴되었다. 12기 대장간은 철기 제작 대장장이 공방으로 추정되며, 하구, 철재, 못, 창깎이,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기타 출토 유물로는 스에키 원면 연, 항아리, 병, 식기류, 하지키 제염 토기, 완, 접시 등이 있다.[10]。
기노성 남쪽 기슭, 저구릉이 남북으로 돌출하여 좁아진 전원 지대에는 수성상 유구가 있다. 판축상 토루로, 길이 약 300m, 높이 약 3m, 기저부 폭 약 21m이며, 토루 상부에 사람들이 집주한다. 수성과 오노성의 관계처럼, 성 진입로를 차단한 군사 시설[24]로 추정된다.[25]。
기노성이 축조된 기비 지방은 야마토 정권 본거지인 기나이와 규슈, 조선반도를 잇는 해로인 세토 내해의 거의 중간에 위치한 요지였다. 기노성 산록 일대는 고대 기비 중심부이며, 기노성은 항구(기비쓰)에서 약 11km 떨어져 있다.[26]。
기노성은 예로부터 기비쓰히코노미코토의 온라 토벌 전승지로 알려져 있었다. 이끼 낀 돌담이 산재하여 성터로 판단, "키노시로"라 불렀다. "키"는 백제 고어에서 "성"을 의미하며, 후에 "귀" 자를 사용했을 뿐이다. "귀노성"은 "시로"를 나타내는, 그 땅과 이 땅의 말을 겹쳐 놓은 명칭이다.[26]。
초석 건물군 주변에서는 불교 관련 기와탑, 물병, 그릇 등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기노성 폐성 후 아스카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에 걸쳐 산악 사원이 운영되었다.[10]。
귀성산 산정에서는 소자 평야, 오카야마 평야, 오카야마시 시가가 한눈에 보인다. 고지마 반도 앞은 세토 내해, 바다 건너 육지는 가가와현 (구 사누키국)이다. 사카이데시의 사누키 조잔성과 다카마쓰시의 야시마성이 시야에 들어온다.[18][27]。
5. 1. 발굴 조사 및 복원
1986년 3월 25일에 기노성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소자 시 교육위원회가 2001년부터 사적 정비를 담당하고 있으며, 특히 서문 터에서는 건축물, 토담, 석벽 복원이 진행되고 있다. 2006년부터는 오카야마 현 교육위원회에서 성내 확인 조사를 시작했다. 성이 있는 장소에는 다수의 희소 식물이 있어 1999년 발굴 조사와 자연 보호 문제로 마찰이 있었다.[3]1978년, 유적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가 수행되었다. 이 조사 결과와 발굴된 유물을 통해 기노성은 아스카 시대에 건설되었고 7세기 4분기부터 8세기 초까지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기원전 667년에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기노성은 2006년 일본성 재단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5]
기노성은 "역사와 자연의 야외 박물관"이라는 기본 이념에 따라 서문과 각루, 토루가 복원되었다.[15] 그 외에도 성문, 수문, 초석 건물터, 전망대, 견학로 등이 정비되었고, "귀성산 비지터 센터"와 주차장을 갖추어 "사적・자연공원"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고고학적 연구는 1971년 다카하시 마모루가 토루의 열석과 수문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다.[28][11] 1978년에는 산요 방송 25주년 기념 사업으로 '기노성 학술 조사단'이 최초의 학술 조사를 실시했다.[29][11]
1990년에는 사적 '기노산' 지정지가 공영화되어 성내 구역의 70%는 오카야마현이, 외곽선 아래를 포함한 나머지 면적은 소자시가 소유하게 되었다.[11]
발굴 조사는 1994년부터 소자 시 교육위원회에서 시작되었다. '기노성 각루 및 서문 조사'(1997년), '기노성 남문 터 외 조사'(1998년), '기노성 서문 터 및 기노산 주변 조사'(1999년), '기노성 등성길 및 신수문 조사'(2001년) 등에서 성과가 보고되었다. 소자 시의 기노산 사적 정비 사업에 따른 발굴 조사도 계속되었으며, '고대 산성 기노성'(2005년), '고대 산성 기노성 2'(2006년)에서 그 결과가 보고되었다. 1999년부터는 오카야마 현 교육위원회에서 성내 발굴 조사를 시작하여 '국가 지정 사적 기노산'(2006년), '사적 기노산 2'(2013년)에서 성과를 보고했다.
시굴 조사에 앞서 지역 주민 등이 습지의 자연 보호를 요청했고, 오카야마 현과 소자 시 교육위원회는 '문화재 보호와 자연 보호' 문제를 조정했다.[30]
5. 2. 보존 및 활용
기노성은 1986년 3월 25일에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소자 시 교육위원회가 2001년부터 사적 정비를 담당하고 있으며, 특히 서문이 있었던 장소에서는 건축물과 토담, 석벽의 복원을 진행하고 있다.[4] 2006년부터는 오카야마 현 교육위원회에서 성내 확인 조사도 시작했다.기노성은 "역사와 자연의 야외 박물관"이라는 기본 이념에 따라 서문과 각루, 토루가 복원되었다.[15] 이외에도 성문, 수문, 초석 건물터, 전망소, 견학로 등이 정비되었고, "귀성산 비지터 센터"와 주차장을 갖추어 "사적・자연공원"으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1990년(헤이세이 2년)에는 사적 '기노산'의 지정지가 공영화되었다. 성내 구역의 70%는 오카야마현이 소유하고, 외곽선 아래를 포함한 나머지 면적은 소자시가 소유한다.[11]
발굴 조사는 1994년(헤이세이 6년)부터 소자시 교육위원회에서 시작되었다. 성과 보고는 '기노성 각루 및 서문의 조사'(1997년), '기노성 남문 터 외의 조사'(1998년), '기노성 서문 터 및 기노산 주변의 조사'(1999년), '기노성 등성길 및 신수문의 조사'(2001년)에서 보고되었다. 소자시의 기노산 사적 정비 사업에 따른 발굴 조사도 지속되었으며, '고대 산성 기노성'(2005년), '고대 산성 기노성 2'(2006년)에서 성과가 보고되었다. 성내 발굴 조사는 1999년(헤이세이 11년)부터 오카야마현 교육위원회에서 시작되었으며, '국가 지정 사적 기노산'(2006년), '사적 기노산 2'(2013년)에서 보고되었다.
총사시 귀노성산 방문자 센터에서는 귀노성 및 그 조사에 대한 전시를 견학할 수 있으며, 주차장이 병설되어 있다.[7] 성벽을 따라 2.8킬로미터의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다.[7]
JR 서일본 기비선 핫토리역에서 약 5킬로미터[6] 떨어져 있다. 자가용 이외의 접근 방법으로는 오카야마현 관광 연맹은 소자역에서 택시 이용(소요 시간 30분 정도)을 권하고 있다.[7]
6. 한국과의 관련성
백강 전투에서 백제와 야마토 일본 연합군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패배한 후, 야마토 조정은 당나라나 신라, 또는 양국 모두의 침략을 우려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덴지 천황은 600년대 후반에 걸쳐 대규모 해안 요새 네트워크를 구축하도록 명령했으며, 이 과정에서 백제 기술자, 장군, 장인들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3]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시기에 서일본에 12개의 한국식 산성이 건설되었으며, 기노성도 그중 하나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시대에 건설된 요새와 특정 장소의 동일성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이 시대의 요새 대부분은 ''kōgoishi'' (神籠石)라는 더 넓은 용어로 분류된다.
기노성은 어떤 역사적 문서에도 언급되지 않아 정확한 건설 연도는 알 수 없지만, 고고학 발굴 결과 7세기 후반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은 키비 고원의 남쪽 끝, 고대 키비 지방의 중심부에 있는 산 정상 부분을 포함한다. 석재와 토루로 된 벽은 2.8km 뻗어 있으며, 4개의 문, 모서리 탑, 6개의 수문을 갖추고 있다. 벽 안쪽 면적은 약 30헥타르이다.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포장석 발견은 일본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성 안에서는 7채의 건물 기초석, 기둥 건물, 저수지, 우물, 12개의 대장간 및 제철소 유적이 확인되었다. 현대의 많은 ''kōgoishi'' 요새가 미완성 상태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기노성은 산성에 필요한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고 있어 그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4]
성의 위치는 세토 내해를 조망할 수 있는데, 이곳은 국제 교류 및 무역의 주요 해상 경로였으며, 침략자들의 주요 경로이기도 했다. 시코쿠 섬에 있는 현대 요새인 야시마성과 기야마성은 기노성에서 볼 수 있는 거리에 있다.
1978년에 유적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고고학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 조사 결과와 발굴된 유물을 통해 이 성은 아스카 시대에 건설되었고 7세기 4분기부터 8세기 초까지 짧은 기간 동안 운영되었지만, 기원전 667년에 건설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기노성은 2006년 일본성 재단에 의해 일본 100대 명성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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わたしのふるさと便 岡山県【イチオシマップ】総社市など「温羅伝説の跡」壮大 奇想の鬼退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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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5-2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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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こまで分かった 鬼ノ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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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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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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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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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문서
国内の古代山城では、排水溝を石垣の最下部に設けるのが一般的であり、鬼ノ城の水口のある水門は特異な事例である。
[18]
서적
古代山城の魅力
吉備人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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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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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문서
角楼は、張り出した櫓で、西門と防御背面側の防御施設である。朝鮮半島では雉城(ちじょう)と呼称する。対馬の金田城と、讃岐国屋島に築かれた屋嶋城の浦生地区に類例がある。
[21]
문서
朝鮮半島の山城をルーツとする様式で、城門の入口に進入しにくい段差のある城壁を設け、普段は梯子・木段などで出入りし、戦闘時は撤去する城門で、防御性能を高める構造。屋嶋城と[[大野城 (筑前国)]]に類例がある。
[22]
문서
国内の古代山城では、大野城の大宰府口城門に類例があり、鬼ノ城の西門は二例目である。
[23]
문서
門道に埋設された排水溝の発掘は、国内の古代山城では初の事例である。その後、屋嶋城で二例目が発掘されている。
[24]
문서
交通路や城の進入路を塞ぐ塁状遺構は、「遮断城」と呼称されている。屋嶋城の浦生地区にも類例がある。
[25]
간행물
古代山城 鬼ノ城―発掘調査成果から展望する―
古代山城研究会
2009
[2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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吉備人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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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문서
坂出市の国の史跡「城山」まで約50km、高松市の国の史跡および天然記念物「屋島」まで約52kmである。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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鬼城山・築地山
ニュー・サイエンス社
197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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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30]
뉴스
鬼ノ城発掘/県教委と住民合意/来月から試掘調査着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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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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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山城は完成していたのか
熊本県教育委員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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西日本の古代山城が語る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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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歴史学会・考古学会における大論争があった(宮小路賀宏・亀田修一「[[神籠石]][[論争]]」『論争・学説 日本の考古学』第6巻、雄山閣出版、1987年)。
[35]
문서
1995年(平成7年)、文化財保護法の指定基準の改正に伴い「神籠石」は削除され、「城跡」が追加された。
[36]
간행물
古代山城研究の現状と課題
第一法規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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