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전투 (1945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뉘른베르크 전투 (1945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5년 4월 16일부터 20일까지 미국 제7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독일군의 패배로 끝났으며, 뉘른베르크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은 동서 양면에서 연합군의 공세를 받아 뉘른베르크를 포함한 남부 독일 지역까지 전선이 좁혀졌다. 독일군은 카를 홀츠의 지휘 아래 뉘른베르크를 방어하려 했지만, 미군의 강력한 공격에 도시가 포위되었고, 결국 항복했다. 이 전투로 인해 뉘른베르크 시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뉘른베르크의 역사 - 뉘른베르크 강령
뉘른베르크 강령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 중 의사 재판에서 제시된 인간 대상 의학 연구 윤리에 관한 10가지 원칙으로, 나치 독일의 비윤리적 인체 실험 반성에서 비롯되어 피험자의 자발적 동의, 사회적 유익성, 과학적 근거, 고통 및 부상 최소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법적 구속력은 없으나 임상 연구 윤리 역사상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고 각국 법률 및 윤리 규범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뉘른베르크의 역사 - 나캄
나캄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나치 독일과 그 동맹국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1945년 결성한 비밀 조직으로, 독극물 투입 계획 등을 추진했으나 실패했으며, 최근 다큐멘터리와 영화를 통해 알려지면서 역사적 평가와 대중문화적 영향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 1945년 군사사 -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은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내고 제2차 세계 대전 종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장기적인 방사능 피해를 야기하여 전쟁의 참상과 핵무기의 위험성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남아있다. - 1945년 군사사 - 드레스덴 폭격
드레스덴 폭격은 1945년 2월 영국과 미국 공군이 군사적 목표를 가지고 독일 드레스덴에 감행한 대규모 공습으로, 민간인 사상자를 발생시켜 전쟁 범죄 논란과 전략 폭격의 윤리성 논쟁을 야기한 사건이다. - 1945년 독일 - 포츠담 회담
포츠담 회담은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포츠담에서 트루먼, 처칠(애틀리 교체), 스탈린이 참석하여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처리 문제를 포함한 전후 질서를 논의했으며, 독일 분할 점령, 군비 해제, 나치 잔재 청산, 전쟁 배상, 폴란드 국경 문제, 일본 항복 요구 등을 결정하고 외무장관 협의회를 설립했으나, 폴란드 국경 문제와 소련 영향력 확대로 냉전의 기원이 되었다. - 1945년 독일 - 포츠담 협정
포츠담 협정은 1945년 미국, 영국, 소련의 연합국 정상회담에서 제2차 세계 대전 후 독일의 점령, 배상, 영토 문제, 전범 재판 등을 합의한 내용으로, 냉전과 한국전쟁의 배경이 되었으며 독일인 추방 문제 등 현재까지도 논란이 있다.
뉘른베르크 전투 (1945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명 | 뉘른베르크 전투 |
일부 | 제2차 세계 대전 중 서구 연합군의 독일 침공의 일부, 서부 전선의 일부 |
![]() | |
날짜 | 1945년 4월 16일 ~ 20일 |
장소 | 독일 뉘른베르크 |
결과 | 미국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미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조지 S. 패튼 웨이드 H. 해슬립 존 W. 오다니엘 로버트 T. 프레더릭 |
지휘관 2 | 카를 홀츠 리하르트 볼프 빌리 리벨 |
병력 규모 | |
병력 1 | 45,000명 |
병력 2 | 2개 사단 (추정 20,000~50,000명) 2개 연대 (추정 2,000~11,000명) 러시아 해방군 (추정 18,000명) 루프트바페 (추정 2,000명) 및 국민돌격대 |
참가 부대 | |
부대 1 | 제15 군단 제3 보병 사단 제45 보병 사단 |
부대 2 | 잔존 병력 및 민병대: 제17 SS 기갑척탄병 사단 제21 공군 사단 국민돌격대 제국 노동 봉사단 히틀러 유겐트 |
사상자 | |
사상자 1 | 130명 |
사상자 2 | 전투원 400명, 비전투원 371명 |
2. 배경
1945년 초, 제2차 세계 대전은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다. 나치 독일이 벌지 전투와 노르트빈트 작전에서 패배한 후, 서방 연합군은 1945년 2월 8일부터 독일 서부 전선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연합군은 라인강을 건너 루르 공업 지대를 포위했고,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진격해오면서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36][4]
프랑스 해방 이후 독일 본토로 진격한 연합군은 얄타 회담에서 합의된 점령 계획에 따라 작전을 수행했으며, 바이에른 지방의 점령은 주로 미국 육군 제7군이 담당했다. 4월에 이르러 미군과 소련군은 동서에서 독일 중심부를 향해 압박해 들어왔고, 독일이 통제하는 영역은 베를린에서 뮌헨까지 이어지는 좁은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이 지역에는 나치 전당대회 개최지로 유명했던 뉘른베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4]
뉘른베르크는 과거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였고 전통적으로 독일의 중심지로 여겨졌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는 전당대회 개최지로서 "나치즘의 성지"라는 강력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뉘른베르크 점령은 연합군에게 중요한 목표였으며, 독일군 역시 상징적인 도시를 사수하려 했기에 치열한 전투가 예상되었다.
미 제7군은 독일 남부로 진격하며 3월 말 프랑크푸르트 남쪽에서 라인강을 건너 교두보를 확보했고, 이후 아샤펜부르크(4월 3일)와 하일브론(4월 12일)을 차례로 점령하며 뉘른베르크로 접근했다.[34][2] 4월 12일, 아돌프 히틀러는 모든 도시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광신적인 나치 당원이자 프랑켄의 가울라이터인 카를 홀츠를 뉘른베르크 방어 책임자로 임명했다.[34][2] 4월 15일, 미군은 뉘른베르크 북쪽의 밤베르크를 점령하고 뉘른베르크를 향한 최종 공격을 준비했다.[36][4]
그러나 계속된 공습으로 도시 대부분이 이미 파괴된 상태였기 때문에, 전쟁 말기 뉘른베르크 점령 자체의 전략적 중요성은 낮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가 지닌 상징성 때문에, 뉘른베르크를 둘러싼 5일간의 전투는 피할 수 없었다.
2. 1. 독일군 상황
1945년 2월 8일부터 서방 연합군은 서부 전선에서 독일을 향한 공세를 시작했다. 독일군은 라인강 동쪽으로 밀려났고 루르 공업 지대는 포위되었으며, 동부에서는 소련군과 폴란드군이 진격해 오면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4월에 이르러 미군과 소련군이 동서에서 서로 접근하면서, 독일이 통제하는 영역은 베를린에서 뮌헨까지 이어지는 좁은 지역으로 축소되었으며, 이 지역에는 뉘른베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제12군집단이 베를린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제6군집단은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 방면으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4] 독일군의 저항은 북부보다 남부에서 더 거셌지만, 미국 제7군은 3월 28일 프랑크푸르트 남쪽에서 라인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돌파에 성공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제7군은 4월 3일 바이에른의 아샤펜부르크를, 4월 12일에는 하일브론을 점령하면서 뉘른베르크는 미군의 직접적인 공격 범위 안에 놓이게 되었다.[2]나치 독일의 전당대회 개최지였던 뉘른베르크는 상징적인 의미가 컸다. 비록 계속된 공습으로 도시가 크게 파괴되어 전쟁 말기 전략적 중요성은 낮아졌지만, 연합군과 독일군 모두에게 "나치즘의 성지"로 인식되었다. 1945년 4월 12일, 독일 최고 사령부는 모든 도시를 끝까지 사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아돌프 히틀러는 국방 위원이자 프랑켄의 가울라이터인 열성적인 나치 당원 카를 홀츠를 뉘른베르크 방어 책임자로 임명했다.[2] 4월 15일, 미 제7군은 뉘른베르크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밤베르크를 신속하게 점령했다.[4]

미군이 접근하자 홀츠는 구시가지 주변에 대전차포와 대공포, 그리고 목재 등으로 방어선 장벽을 구축하라고 명령했다.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극히 제한적이었지만, 홀츠는 "미군은 조만간 무너질 것"이라고 공언하며 항전 의지를 다졌다.[2] 당시 뉘른베르크의 지휘 체계는 다음과 같았다.
- 시장: 빌리 리벨[7]
- 가울라이터 및 전국 방위 관구 지도자: 카를 홀츠
- 전투 사령관: 리하르트 볼프 대령
뉘른베르크 방어를 위해 다음과 같은 부대들이 급조되었다.
- 제17SS 기갑척탄병 사단 제38SS 기갑척탄병 연대 일부 병력
- 제21공군 야전 연대 일부 병력
- 각종 보충 부대
- 향토 방위대 (Heimatwehr)
- 비행장의 공군 지상 근무 요원
- 국가 노동 봉사단(RAD)
- 히틀러 유겐트 소속 "전차 파괴 대대" (Panzervernichtungsbataillone)
- 국민 돌격대 (Volkssturm)
- 동방 의용 부대 (Ostlegionen)
- 후방 부대: 16세부터 50세까지의 여성 및 국민 돌격대에 징집되지 않은 남성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참호 굴착과 대전차 바리케이드 건설 작업에 동원될 예정이었으나 실제 참여는 저조하여 선전적인 의미가 더 컸다.
총동원 결과 11,000명에서 12,000명 가량의 14세 이상 남성이 소집되었다. 그러나 이들 부대의 장비는 매우 열악하여 전차나 야포와 같은 중화기는 거의 없었고, 라이플과 권총 정도의 개인 화기만 지급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일하게 의미 있는 화력은 시내 곳곳에 배치된 약 140기의 대공포였는데, 여기에는 연합군에게도 위협적이었던 8.8cm 대공포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대공포들은 대부분 고정식 방공 포대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RAD 대원들이 운용하고 히틀러 유겐트와 동방 의용 부대 대원들이 지원 역할을 맡았다. 뉘른베르크 조차장에서 대량의 대공 포탄을 실은 열차가 발견되어, 탄약 부족 문제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방어 부대로 편성된 부대 중 일부(제38SS 기갑척탄병 연대, 제21 공군 야전 연대 등)는 이미 전선에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하여 재편성 중인 상태였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고, 전투복조차 부족하여 사복 차림에 완장만 두른 경우가 많았다. 이는 게릴라로 오인받아 포로가 되더라도 즉결 처형될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였다. 특히 비행장 지상 요원, 히틀러 유겐트, 국민 돌격대 등 급조된 부대들의 장비는 더욱 열악했다.
당시 요제프 괴벨스의 선전부는 "결국 무기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전투에서 병사는 다른 방법으로 무기를 얻을 것이다."라는 식의 정신론을 강조했으며[8], 뉘른베르크의 대관구 감찰관 게오르크 하버칸 역시 히틀러 유겐트와 같은 "젊은 힘"이 적의 "목을 물어뜯을 것"이라는 기대를 표명했다.[9] 실제로 뉘른베르크 전투에서 일부 히틀러 유겐트 대원들은 판처파우스트를 이용한 공격이나 육박전을 통해 수 미터 거리까지 접근하는 대전차 전투를 감행하기도 했다.[10]
전투 사령관 볼프 대령은 시내 곳곳에 목재와 노면 전차 등을 이용해 대전차 바리케이드를 급조했지만, 이는 미군의 기갑 부대 앞에서 거의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11] 또한 볼프는 미군 주력이 뉘른베르크 서쪽의 퓌르트 방면에서 침입할 것으로 잘못 예측하고, 레드니츠 강에 남아있던 다리들을 폭파하라고 명령하는 등 전술적 실책을 범하기도 했다.
국민 돌격대에 소속된 50세 아버지를 둔 한 학생은 당시의 절망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사슬에 묶인 (식량용) 소와 성의 두 개의 해자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백기를 들고 성을 해방자에게 넘기는 것뿐이었다[12].
1945년 4월 7일, 뉘른베르크는 "후방 작전 지역(rückwärtiges Operationsgebiet)"으로 선포되었고, 국민 돌격대 소집이 시작되어 4월 13일에 완료되었다.[13]
2. 2. 미군 상황
서방 연합군은 1945년 2월 8일부터 서부 전선에서 독일을 향한 동시 공격을 시작했다. 연합군이 라인강을 건너고 루르 공업 지대를 포위하면서 독일군은 큰 손실을 입었고, 동쪽에서는 소련군이 진격해오고 있었다. 4월에 이르러 미군과 소련군은 서로를 향해 진격하며 베를린에서 뮌헨에 이르는 독일 점령 지역을 압박했으며, 이 지역에는 뉘른베르크도 포함되어 있었다.[36][4]제12군 집단이 베를린을 향해 동쪽으로 진격하는 동안, 제6군 집단은 독일 남부와 오스트리아로 진격하라는 임무를 받았다.[36][4] 남부 독일에서의 독일군 저항은 북부보다 거셌지만, 미국 제7군은 3월 28일 프랑크푸르트 남쪽에서 라인강 교두보를 확보하고 돌파에 성공했다.[36][4] 치열한 전투 끝에 제7군은 4월 3일 바이에른의 아샤펜부르크를 점령했고, 4월 12일에는 하일브론을 함락시키며 뉘른베르크로 가는 길을 열었다.[36][4] 제7군은 뉘른베르크로 빠르게 진격하여 4월 15일에는 밤베르크를 점령했다.[36][4]

뉘른베르크 전투는 미국 제7군 예하의 XV 군단이 주도했으며, 군단장 웨이드 H. 헤이스립(en) 중장의 지휘 아래 있었다. 핵심 공격 부대는 존 W. 오다니엘(en) 소장이 이끄는 제3보병사단과 로버트 T. 프레데릭(en) 소장이 이끄는 제45보병사단이었다. 제3보병사단은 지크프리트 선을 돌파하고 라인강을 건너 밤베르크(4월 13일 점령)와 에를랑겐(4월 16일 점령)을 점령하며 남쪽에서 뉘른베르크로 접근했다. 제45보병사단은 보름스와 아샤펜부르크를 거쳐 북쪽과 동쪽에서 평행하게 진격했다. 이 두 사단은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뮌헨을 점령하는 임무를 맡았다. 뉘른베르크에서의 구체적인 전투 지휘는 제3보병사단의 오다니엘 장군이 담당했다.[14]
지원 부대로는 제12기갑사단, 동쪽의 제14기갑사단, 남쪽의 제106기갑기병단이 있었다. 미군의 전체 전력은 약 10만 명에 달했으며, 이 중 약 3만 명(주로 제3, 제45보병사단)이 실제 전투에 참여했다. 이들은 전차, 포병, 중화기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뉘른베르크 주변에 배치된 다른 부대들은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예비대로서 후방에 머물렀는데, 이는 과거 아르덴 대공세와 같은 독일군의 기습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미군 지휘부는 독일군이 알프스 산맥에 비밀 요새, 이른바 알프스 국가 요새(Alpenfestung)를 구축했을 가능성을 우려했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15]
3. 전투 경과
1945년 4월 16일, 미국 제7군은 뉘른베르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군 사령관 카를 홀츠는 미군이 서쪽에서 공격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미군은 동쪽과 북동쪽에서 공격을 개시했다.[5] 첫날 미군은 도시 외곽 일부를 점령했다.
4월 17일에는 조차장과 북쪽의 공항을 점령하고 구시가지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5] 4월 18일, 미군은 구시가지로 진입하려 했으나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치열한 시가전으로 뉘른베르크 성을 포함한 많은 역사적 건물이 파괴되었다.[5] 미군은 포격 지원 하에 부르크슈미트슈트라세를 통해 구시가지에 도달했다.[5]
4월 20일, 존 W. 오다니엘 소장이 지휘하는 제3보병사단과 로버트 T. 프레데릭 소장이 지휘하는 제45보병사단이 구시가지를 완전히 포위했다.[6] 독일군의 저항은 매우 거셌으나, 미군은 중화기와 항공 지원을 동원하여 이를 제압해 나갔다.[6] 이날 독일군 사령관 홀츠는 저항을 계속하라고 명령했지만, 미군과의 교전 중 사망했다.[6] 홀츠 사망 후 부사령관 볼프 대령은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휘하 부대에 항복을 명령했다.[6] 같은 날 저녁, 아돌프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에 미군은 아돌프 히틀러 광장에 성조기를 게양하며 5일간의 전투는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6][37]
3. 1. 1945년 4월 16일
미국 제7군은 홀츠가 예상했던 서쪽이 아닌 동쪽과 북동쪽에서 뉘른베르크 공격을 1945년 4월 16일에 시작했다.[5] 방어 사령관 볼프 대령은 미군이 뉘른베르크 서쪽의 퓌르트 마을에서 침입할 것으로 잘못 예상하고, 레드니츠 강의 다리들을 폭파하도록 명령했다.[11]아돌프 히틀러가 1945년 3월 19일 내린 네로 칙령에 따라, 대관구 지도자 홀츠는 뉘른베르크 시의 주요 기반 시설 파괴를 명령했다. "경고! 경고! 특수 작전 Z: 작전명 퓨마(Achtung! Achtung! Sonderkommando Z: Code 'Puma'!de)"라는 경보가 방송되었으나, 항복에 긍정적이었던 시장 빌리 리벨과 방송국 직원인 대공포 부대 하사 아르투르 쇠데르트(Arthur Schoeddertde)의 협력으로 방송이 중단되어, 도시의 전기, 가스, 수도 시설 파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로써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었던 파괴를 막을 수 있었다.[5][18] 다음 날 홀츠에게 심문을 받은 쇠데르트는 그의 태도로 인해 "위인"으로 불리기도 했다.[19] 또한 홀츠는 미군에게 물자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린데사의 냉동 창고에 보관된 냉동 육류 175만kg과 버터 67만kg을 주민들에게 분배하도록 명령했다.[20] 이 조치로 인해 1942년 식량 배급이 대폭 삭감된 이후 처음으로 시민들은 일주일에 빵 1700g, 고기 250g, 버터 125g를 배급받아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21]
16일 정오, 미군 전차 부대가 동쪽 에를렌슈테겐( Erlenstegende ) 근교에서 뉘른베르크 시역으로 진입했다. 오후 12시 45분, 전차 경보가 발령되었고 비전투원에게는 지하 피난 명령이 내려졌다. 제3보병사단 전차 부대는 부헨뷔르(Buchenbühlde)를 거쳐 지겔슈타인(Ziegelsteinde)으로 진격했고, 제45보병사단 전차 부대는 에를렌슈테겐(Erlenstegende)을 통해 남서쪽의 조차장으로 향했다. 그날 저녁까지 미군은 에를렌슈테겐과 부흐(Buchde) 외곽을 점령했지만, 양측 모두 야간 전투를 피해 큰 교전은 없었다. 등화관제 속에서 미군 포병만이 미리 정해둔 표적에 포격을 계속했다.[5][22]
3. 2. 1945년 4월 17일
1945년 4월 17일, 제7군은 조차장과 그 주변 지역인 파일호프슈트라세(Vellhofstraßede) 및 뵈르트(Wöhrdde) 지구를 점령했다.[5] 저녁 무렵에는 북쪽의 공항이 미군 수중에 들어왔고, 미군 포병은 구시가지에 대한 포격을 시작했다.[5][23]미군은 전화로 뉘른베르크 시장 빌리 리벨에게 항복을 권고했으나, 답변은 없었다.[23] 광신적인 나치 지역 지도자이자 전투사령관 카를 홀츠는 시장 리벨과 방침을 놓고 대립했으며, 히틀러와 철저 항전을 다짐하는 전보를 교환하며 도시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23]
시내에서는 전투와 혼란 속에서 자포자기한 일부 주민들에 의한 강탈과 약탈이 횡행했다.[23] 보세 창고의 와인 저장고에서는 "그로테스크한 술 연회"를 벌이던 많은 사람들이 미군의 포격으로 목숨을 잃거나 다쳤다.[23] 화물역에서는 식량을 실은 화차가 습격당했고, 시 소유의 의류 창고와 민간 기업들도 약탈 피해를 입었다.[23]
이날 미군은 계속해서 진격을 이어갔다. 제3보병사단은 알모스호프(Almoshofde)와 로에(Lohede)에 있는 독일군 저항 거점을 향해 나아갔고, 제45보병사단은 도시 남쪽에 위치한 SS 병영으로 진격했다.[23] 4월 17일 밤에는 북쪽, 동쪽, 남동쪽의 독일군 주요 전선이 상실되었다.[23]
3. 3. 1945년 4월 18일
4월 18일, 미군은 뉘른베르크 구시가지 주변에서 독일군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시가전으로 인해 역사적인 뉘른베르크 성을 포함한 많은 건물이 파괴되거나 손상되었다.[5] 북쪽, 동쪽, 남동쪽의 주요 진입로인 부허 슈트라세(Bucher Straße), 롤너슈트라세(Rollnerstraße), 바이로이터 슈트라세(Bayreuther Straße), 줄츠바허 슈트라세(Sulzbacher Straße), 오스텐트슈트라세(Ostendstraße), 레겐스부르거 슈트라세(Regensburger Straße) 등에서는 무장친위대(SS)와 공군 부대가 미군을 상대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미군의 진격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미군 포병은 이날도 구시가지에 대한 포격을 계속했으며, 미군은 부르크슈미트슈트라세(Burgschmietstraße)를 통해 구시가지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5] 저녁 무렵, 미군 부대는 구시가지의 환상 도로에서 약 1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하여 원형 포위망을 형성하고 열려 있던 남서쪽의 틈을 메웠다.
같은 날 밤, 독일군 지휘관인 리하르트 볼프 대령, 카를 홀츠 돌격대지도자, 빌리 리벨 시장은 기존의 사령부였던 파니에플라츠(Paniersplatz)의 벙커가 미군의 박격포 사정거리에 들어가자, 구시가지 남서쪽 끝에 있는 경찰 본부의 팔멘호프 벙커(Palmenhofbunker)로 지휘소를 옮겼다. 홀츠는 히틀러에게 무선으로 철저한 항전을 통해 도시를 사수하겠다고 보고했다. 홀츠의 계획은 미군의 뉘른베르크 점령을 저지하는 것이었지만, 그 자신도 이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방어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군사적, 정치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도시 주민과 부대의 막대한 희생만 초래할 뿐이었다. 이러한 자살적인 항전 의지는 당시 히틀러가 제국 방위 위원들에게 요구했던 것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3. 4. 1945년 4월 19일

4월 19일 아침, 인접 도시인 퓌르트가 저항 없이 항복하면서 서쪽에 있던 미군 제42사단은 별다른 저항 없이 뉘른베르크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뉘른베르크 성 근처의 St.Johannis 지구, 프뢰러 광장, 중앙역 주변의 구 시가지에서는 건물 하나하나를 두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특히 독일군 저격수의 활동은 미군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 시가지가 입은 피해는 매우 컸으며, 전쟁이 끝난 후 수십 년이 지나도록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4월 19일 밤이 되자 미군은 독일군의 마지막 방어선이었던 구 시가지의 환상선까지 도달했다. 이로써 미군은 중앙역 앞의 쾨니히 거리와 프뢰러 광장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24]。
3. 5. 1945년 4월 20일
4월 20일, 존 W. 오다니엘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3보병사단과 로버트 T. 프레데릭 소장이 지휘하는 제45보병사단이 구시가지를 포위했다.[6] 독일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하여 미군은 중화기와 항공 지원을 동원해야 했다.[6]이날 뉘른베르크 시장 빌리 리벨은 벙커에서 자살했다.[6] 일설에는 그가 도시를 미군에게 넘겨주려 하자 전투지휘관 홀츠에게 사살당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진상은 불분명하다.[25] 부사령관 볼프 대령에 따르면 리벨은 오전 12시 30분경 팔멘호프 지하 벙커의 홀츠 집무실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26]
전투지휘관 홀츠는 부하들에게 끝까지 저항할 것을 명령했다.[6] 홀츠 자신은 구시가지 경찰서 건물에 고립된 상태에서도 저항을 이어갔다.[6] 미군은 네 차례에 걸쳐 평화로운 항복을 제안했으나, 홀츠는 이를 거부했고 결국 미군이 건물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6] 홀츠를 중심으로 한 그룹은 수백 명의 경찰관, 군인과 함께 팔멘호프 지하 벙커에 틀어박혀 저녁까지 전투를 계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뉘른베르크 경찰서장 오토 쿠쇼도 사망했다.[27] 홀츠는 항복 교섭을 위해 접근한 벨기에 의원을 사살하는 등[28] 마지막까지 광적인 저항을 보였다.
홀츠가 사망하자 부사령관인 볼프 대령은 더 이상 도시를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6] 오전 11시, 볼프는 휘하의 모든 독일군에게 미군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 하지만 그는 도시 자체를 넘기지는 않고 부대에게 행동의 자유를 주었으며, 이 때문에 일부 부대는 개별적으로 전투를 지속했다.[27]
4월 20일 저녁, 아돌프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에 미군은 아돌프 히틀러 광장에 성조기를 게양하며 전투의 공식적인 종료를 선언했다.[6]

항복을 명령했던 볼프 대령은 4월 20일 밤 도주했으나, 다음 날인 4월 21일 새벽 지하실에 숨어있다가 미군 순찰대에 체포되었다.[30]
4. 전투 결과
4월 20일, 존 W. 오다니엘 소장이 지휘하는 제3보병사단과 로버트 T. 프레데릭 소장이 지휘하는 제45보병사단이 구시가지를 완전히 포위했다.[6] 독일군의 저항은 매우 격렬하여 미군은 중포와 공중 지원까지 동원해야 했다.[6] 이 과정에서 뉘른베르크 시장 빌리 리벨은 벙커에서 자살했다.[6]
독일군 사령관 홀츠는 부하들에게 끝까지 싸울 것을 명령하며 항복을 거부했다. 그는 구시가지 경찰서에 고립된 상태에서도 저항을 계속했으나, 미군이 네 차례 항복을 권유했으나 거부했고, 결국 미군이 건물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사망했다.[6] 홀츠가 사망하자 부사령관 볼프 대령은 더 이상 도시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오전 11시에 휘하 독일군에게 미군에 항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
같은 날 저녁, 공교롭게도 아돌프 히틀러의 56번째 생일이었던 이날, 미군은 아돌프 히틀러 광장에 미국 국기를 게양하며 뉘른베르크 전투의 공식적인 종료를 선언했다.[6] 격렬했던 시가전으로 인해 뉘른베르크 성을 비롯한 구시가지의 많은 역사적 건물이 파괴되거나 심하게 손상되었다.[5]
참조
[1]
서적
The Last Offensive
GPO
[2]
웹사이트
End of the War in Nuremberg - Nuremberg - Battle for a Symbol
http://www.kriegsend[...]
2012-04-14
[3]
웹사이트
End of the War in Nuremberg - Unequal Forces Line Up for Battle
http://www.kriegsend[...]
2012-04-14
[4]
서적
Central Europe, 22 March – 11 May 1945
https://archive.org/[...]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5]
웹사이트
End of the War in Nuremberg - Chronology of the Last Battles 1
http://www.kriegsend[...]
2019-11-27
[6]
웹사이트
End of the War in Nuremberg - Chronology of the Last Battles 2
http://www.kriegsend[...]
2012-04-14
[7]
문서
Wobei Liebels reale Einflußmöglichkeit gering war; Entscheidungen trafen im Wesentlichen Holz und Wolf; vgl. [[Willy Liebel#Oberbürgermeister und Leiter des Zentralamts im Rüstungsministerium|Willy Liebel]]
[8]
서적
Dieses und das vorangehende Zitat: [[Helmut Heiber]]: ''Joseph Goebbels''. Colloquium, West-Berlin 1965, S. 378 f. Nachdruck 1988 bei dtv, München
[9]
서적
Fritz Nadler: ''Ich sah wie Nürnberg unterging'', Fränkische Verlagsanstalt und Buchdruckerei, Nürnberg 1955, S. 112.
[10]
문서
Im damaligen Jargon: „geknackt“.
[11]
서적
Robert Fritzsch: ''Nürnberg im Krieg''. Droste, Düsseldorf 1984, ISBN 3-8112-0697-4, S. 98.
[12]
서적
Walter Kempowski: ''Das Echolot – Abgesang ’45'', 3. Auflage. Knaus, München 2005, ISBN 3-8135-0249-X, S. 52.
[13]
서적
Robert Fritzsch: ''Nürnberg im Krieg''. Droste, Düsseldorf 1984, ISBN 3-8112-0697-4, S. 94.
[14]
서적
Robert Fritzsch: ''Nürnberg im Krieg'', S. 100.
[15]
문서
Weil die Wehrmacht seit der Ardennenoffensive nie den amerikanischen Einheiten an Masse oder Material überlegen war, aber dennoch diese Form der Auseinandersetzung, die zu Niederlagen führen musste, suchte.
[16]
서적
Robert Fritzsch: ''Nürnberg im Krieg''. Droste, Düsseldorf 1984, ISBN 3-8112-0697-4, S. 100.
[17]
간행물
Verordnung über die Wiedereinführung der Normalzeit im Winter 1944/45 vom 4. September 1944, RGBl. I, S. 198.
[18]
뉴스
Onkel Baldrian: Die Stimme im Bunker
https://www.spiegel.[...]
Der Spiegel
2007-10-03
[19]
뉴스
Leben in Trümmern
https://www.br.de/na[...]
Bayerischer Rundfunk
2015-04-09
[20]
서적
Michael Diefenbacher, Wiltrud Fischer-Pache: ''Der Luftkrieg gegen Nürnberg''. Schmidt, Nürnberg 2004, ISBN 3-87707-634-3, S. 381 f.
[21]
서적
Robert Fritzsch: ''Nürnberg im Krieg''. Droste, Düsseldorf 1984, ISBN 3-8112-0697-4, S. 89.
[22]
서적
Fritz Nadler: ''Ich sah wie Nürnberg unterging'', Fränkische Verlagsanstalt und Buchdruckerei, Nürnberg 1955, S. 129.
[23]
서적
Für diesen und den vorangehenden Absatz: Fritz Nadler: ''Ich sah wie Nürnberg unterging'', Fränkische Verlagsanstalt und Buchdruckerei, Nürnberg 1955, S. 133 f.
[24]
서적
Fritz Nadler: ''Ich sah wie Nürnberg unterging'', Fränkische Verlagsanstalt und Buchdruckerei, Nürnberg 1955, S. 131.
[25]
문서
Die 1956 gerichtlich festgestellte Todesursache lautete auf Selbsttötung.
[26]
서적
Walter Kempowski: ''Das Echolot – Abgesang ’45'', 3. Auflage. Knaus, München 2005, ISBN 3-8135-0249-X, S. 51.
[27]
Youtube
US Wochenschau mit Bildern von Nürnberg und der Siegesparade
https://www.youtube.[...]
[28]
서적
Fritz Nadler: ''Ich sah wie Nürnberg unterging''. Fränkische Verlagsanstalt und Buchdruckerei, Nürnberg 1955, S. 133
[29]
서적
Zu den Abschnitten ab 17. April 1945: Robert Fritzsch: ''Nürnberg im Krieg''. Droste, Düsseldorf 1984, ISBN 3-8112-0697-4, S. 98 ff. und Michael Diefenbacher, Wiltrud Fischer-Pache: ''Der Luftkrieg gegen Nürnberg''. Schmidt, Nürnberg 2004, ISBN 3-87707-634-3, S. 380 ff.
[30]
서적
Zu diesem gesamten Absatz: [[Walter Kempowski]]: ''Das Echolot – Abgesang ’45''. 3. Auflage. Knaus, München 2005, ISBN 3-8135-0249-X, S. 52.
[31]
서적
Robert Fritzsch: ''Nürnberg im Krieg''. Droste, Düsseldorf 1984, ISBN 3-8112-0697-4, S. 105.
[32]
서적
Michael Diefenbacher, Wiltrud Fischer-Pache: ''Der Luftkrieg gegen Nürnberg''. Schmidt, Nürnberg 2004, ISBN 3-87707-634-3, S. 289.
[33]
서적
The Last Offensive
GPO
[34]
웹사이트
End of the War in Nuremberg
http://www.kriegsend[...]
[35]
웹인용
Unequal battle
http://www.kriegsend[...]
2013-01-06
[36]
서적
Central Europe, 22 March – 11 May 1945
http://www.history.a[...]
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2015-01-02
[37]
웹사이트
Battle for Nuremberg
http://www.kriegsend[...]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