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20세기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소설, 시, 희곡, 여행기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다. 1883년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학을, 파리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앙리 베르그송,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 불교, 공산주의 등 다양한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그의 작품은 인간의 자유, 실존적 문제, 종교적 갈등 등을 다루며, 대표작으로는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오디세이아》 등이 있다. 그는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의 작품은 영화로도 제작되어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카잔차키스는 사회주의적 입장을 견지했으며, 묘비에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라는 문구를 새겼다.

니코스 카잔차키스
기본 정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1904년의 카잔차키스
원어 이름Νίκος Καζαντζάκης그리스어
로마자 표기Níkos Kazantzákis
출생일1883년 2월 18일 (구력 3월 2일)
출생지크리티 칸디예, 오스만 제국 (현재 그리스 이라클리오)
사망일1957년 10월 26일
사망지프라이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서독 (현재 독일)
국적그리스
직업시인, 소설가, 수필가, 여행 작가, 철학자, 극작가, 저널리스트, 번역가
학력
대학교아테네 대학교 (1902–1906; 법학 박사, 1906)
대학교파리 대학교 (1907–1909; 박사, 1909)
결혼
배우자갈라테이아 카잔차키스 (1911년 결혼, 1926년 이혼)
엘레니 카잔차키스 (1945년 결혼)
기타 정보
안장 장소이라클리오 베네치아 성벽의 마르티넨고 요새
언어현대 그리스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웹사이트카잔차키스 출판사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그리스의 극작가 - 그리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
    그리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의 그리스 작가로, 소설, 희곡, 언론, 문학 평론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잡지 발행과 편집을 거쳐 80편 이상의 소설과 46편의 희곡을 집필했다.
  • 그리스의 소설가 - 그리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
    그리고리오스 크세노풀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의 그리스 작가로, 소설, 희곡, 언론, 문학 평론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잡지 발행과 편집을 거쳐 80편 이상의 소설과 46편의 희곡을 집필했다.
  • 그리스의 사회주의자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그리스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인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을 창당하여 총리를 역임하며 사회 개혁, 복지 확대, 독립 외교를 추구했으나, 경제난과 부패 스캔들로 비판받기도 하며 그리스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그리스의 사회주의자 - 멜리나 메르쿠리
    멜리나 메르쿠리는 영화 《일요일은 참으세요》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그리스의 배우이자 가수, 정치인으로, 그리스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며 문화 유산 보호와 유럽 문화 수도 제도의 설립에 기여했고, 군사 정권 시절 반정부 운동과 민주화 이후 범그리스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2. 생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초상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초상화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 헤라클리온(당시 칸디아)에서 태어났다. 당시 크레타 섬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1907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앙리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았다.

1911년 갈라테이아 알렉시우와 결혼했으나 1926년 이혼했다. 1924년 엘레니 사미우(헬렌)를 만나 1928년부터 연애, 1945년에 결혼했다.

1922년부터 1957년 사망할 때까지 파리, 베를린(1922년~1924년), 이탈리아, 러시아(1925년), 스페인(1932년) 등지를 여행했다. 베를린에서 공산주의를 접하고 블라디미르 레닌을 지지했으나, 소비에트 연방 방문 후 조셉 스탈린의 부상을 목격하고 소련식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테네에서 언어학자 요아니스 카크리디스와 함께 일리아드를 번역했다. 1945년 비공산 좌파 정당 지도자로 무임소 장관을 역임했으나 다음 해 사임했다. 1946년 그리스 작가 협회는 안젤로스 시켈리아노스와 함께 카잔차키스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했으나, 1957년 알베르 카뮈에게 단 한 표 차이로 수상에 실패했다. 카뮈는 카잔차키스가 자신보다 "백 배는 더" 노벨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했다.

1957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사망했고, 유해는 크레타섬에 안장되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 Είμαι λέφτερος}})라고 적혀 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 Είμαι λέφτερος}})라고 적혀 있다.

2.1. 초기 생애와 교육 (1883-1911)

1904년의 카잔차키스
1904년의 카잔차키스

이라클리오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이라클리오에 있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무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1883년 오스만 제국 치하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오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미르티아 마을 출신이다. 아버지 미할리스 카잔자키스는 곡물과 포도주 중개상으로 중산층에 속했다. 당시 크레타 섬은 그리스에 합병되지 않고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가족 기록에 따르면 카잔차키스는 1883년 2월 18일(구력)에 태어났으나, 헤라클리온 인구조사에는 그의 출생년도가 188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카잔차키스는 크레타 섬에서 중등 교육을 마치고, 1902년부터 1906년까지 아테네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906년에는 Ο Φρειδερίκος Νίτσε εν τη φιλοσοφία του δικαίου και της πολιτείας그리스어 (법과 국가 철학에서의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제목의 법학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재학 도중 수필 《병든 시대》와 소설 《뱀과 백합》(1906)을 출간하기도 했으며 희곡 《새벽》(1907)을 쓰기도 했다.

1907년에는 파리로 유학하여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앙리 베르그송의 영향을 받았다. 1909년 소르본 대학교에서 제출한 박사 학위 논문은 1906년 논문을 수정한 것으로, Friedrich Nietzsche dans la philosophie du droit et de la cité (법과 국가 철학에서의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제목이었다.

그리스로 돌아온 후 그는 철학 서적 번역을 시작했다. 1911년 갈라테이아 알렉시우와 결혼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1912-1926)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이 발발하자, 카잔차키스는 지원병으로 참전했다. 1917년 요르고스 조르바스라는 남자와 함께 광산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그리스인 조르바의 바탕이 되었다. 1919년 그리스 공공복지부 장관으로서 캅카스와 남러시아에 있는 약 15만 명의 폰토스인을 포함한 그리스인 난민들의 귀환 사업에 착수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1922년, 빈에서 불교를 연구했고, 그 후 독일로 건너가 공산주의를 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황폐해진 유럽에서 종교에 만족하지 못했던 그는 공산주의에서 희망을 찾으려 했으나, 1925년1927년 두 차례에 걸쳐 소련을 방문하여 소련의 공산주의를 직접 목격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깨달았다. 1926년 갈라테아 알렉시우와 이혼했다.

2.3. 집필 활동과 망명 (1927-1945)

1938년, 12년의 세월을 들여 완성한 서사시 《오디세이아》를 발표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그리스를 점령한 기간 동안 카잔차키스는 에이나섬에서 《그리스인 조르바》 등을 집필했다.

1945년, 테미스토클리스 소풀리스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잠시 입각하는 한편, 엘레니 사미우와 재혼했다. 1946년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발표하고, 유네스코 고전 번역부장을 역임했다. 이 해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리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2.4. 전후 활동과 죽음 (1946-1957)

1945년, 테미스토클리스 소프리스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잠시 입각하는 한편, 엘레니 사미우와 재혼했다. 1946년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발표하고, 유네스코 고전 번역부장을 역임했다. 이 해 이후 사망할 때까지 그리스로 돌아오지 않았다.

1948년 이후 프랑스 앙티브에 거주했다. 이 시기에 그리스도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 최후의 유혹 등 후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소설들을 발표했다. 1953년 소설 미할리스 대장이 발간되자 그리스 정교회는 맹렬히 카잔차키스를 비난했으며 이듬해 로마 가톨릭 교회도 최후의 유혹금서 목록에 올리기도 했다. 이후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그리스에서 일시적으로 출간되지 않기도 했다. 카잔차키스는 테르툴리아누스(터툴리안)의 말을 인용해 로마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 정교회에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다. 1955년에는 그리스 왕실의 도움으로 최후의 유혹이 그리스에서 발간되었다.

1956년에는 국제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7년 중국 정부의 초청으로 중국을 여행했으며 일본을 경유해 돌아오는 도중 백혈병 증세를 보여 급히 독일의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때 알베르트 슈바이처 박사와 만나기도 했다. 고비를 넘겼으나 독감에 걸려 10월 26일 독일에서 사망했다.

공산주의에 가까운 정치 활동을 했고, 소설에서 참신한 그리스도상을 제시하거나 그리스 정교의 부정적인 측면을 묘사했기 때문에 당시 그리스 국내에서도 평가가 엇갈렸다. 소설 최후의 유혹은 가톨릭 교회에서 금서 취급을 받았다. 또한 1945년 그리스 작가 연맹은 카잔차키스를 노벨 문학상 후보로 추천했지만, 정부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했다. 실제로 1947년1950년에 후보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말년인 1957년에는 알베르 카뮈에게 1표 차이로 수상을 놓쳤지만, 이에 대해 카뮈는 나중에 "카잔차키스가 나보다 100배 이상 노벨 문학상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초상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초상화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 Είμαι λέφτερος}})라고 적혀 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 Είμαι λέφτερος}})라고 적혀 있다.

3. 사상과 문학 세계

카잔차키스는 앙리 베르그송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와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강조했다. 그의 작품은 불교의 영향도 받았으며, 줄거리보다는 사상의 흐름을 중시했다. 1951년1956년에는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대표작으로는 《최후의 유혹》, 《그리스인 조르바》, 《오디세이아》(시) 등이 있다. 《미할리스 대장》과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지만, 카잔차키스는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3.1. 주요 사상적 배경

카잔차키스의 사상적 배경은 매우 다양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 앙리 베르그송의 생철학: 카잔차키스는 파리 유학 시절 앙리 베르그송의 강의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베르그송은 생의 약동과 직관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합리주의와 비합리성의 조화를 추구했던 카잔차키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카잔차키스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성뿐만 아니라 직관과 개인적 경험 또한 중요하다고 믿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의 초인 사상: 카잔차키스는 니체의 영향을 받아 기존 가치에 대한 비판과 새로운 가치 창조를 강조했다. 특히 인간의 자유를 탐구하고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제시했다.

* 불교의 영향: 빈에서 불교를 연구했던 카잔차키스는 무상(無常)과 해탈(解脫)의 개념에 영향을 받았다.

* 초기 공산주의 사상: 카잔차키스는 초기에는 사회 변혁과 이상 사회에 대한 열망으로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패배 이후 민족주의를 버리고 공산주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을 방문한 후에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으로 변했다.

* 실존주의적 경향: 카잔차키스는 불안, 자유, 선택 등 실존적 문제를 탐구했다. 그의 희곡 코미디(1909)는 실존주의적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는 장 폴 사르트르알베르 카뮈보다 앞선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 이념, 생활 방식을 접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을 형성했다. 그는 그리스의 특별한 사명을 동양의 본능과 서양의 이성을 화해시키는 것으로 보았으며, 이는 그의 작품에서 감정과 논리의 균형을 이루는 베르그송주의적 주제로 나타난다.

3.2. 문학적 특징

카잔차키스는 민중 언어(디모티키)를 사용하여 생동감 넘치는 표현과 그리스 민중의 정서를 반영했다. 앙리 베르그손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에 대해 탐구하고,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의 작품은 불교의 영향과 더불어 줄거리 전개보다는 사상의 흐름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는 소설, 시, 희곡, 여행기, 자서전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 특히 호머의 오디세이를 잇는 33,333행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를 통해 웅장한 서사적 스케일을 추구했다. 이 작품은 비평가들 사이에서 의견이 분분했지만,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축적된 지혜와 경험을 담은 가장 위대한 문학적 경험으로 여겼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 신화와 민담을 바탕으로 풍부한 비유와 상징을 사용했다. 또한 신, 인간, 자유, 구원, 실존 등 심오한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탐구했다. 그의 소설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리스 문화의 여러 측면(종교, 민족주의, 정치, 그리스 내전, 성 역할, 이민 등)을 탐구하며, 동서양 사이에 위치한 그리스의 독특한 위치를 반영했다.

카잔차키스는 "목표로서의 사회주의와 수단으로서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사회민주주의가 그리스와 문명화된 세계 전체에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는 사회주의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체제로 묘사했다.

그의 작품은 종종 종교적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최후의 유혹》과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이유로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카잔차키스는 교회로부터 반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에도 불구하고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이었다.

4. 작품 목록

카잔차키스는 소설, 시, 희곡, 수필, 여행기, 번역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다음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
좌우로 밀어서 보기
발표 연도제목장르비고
1906년뱀과 백합Όφις και Κρίνο그리스어소설카르마 니르바미(Karma Nirvami)라는 필명 사용
1910년건축가Πρωτομάστορας그리스어희곡그리스 민속 신화를 바탕으로 한 비극
1922년Συμπόσιον그리스어
1930년Ιστορία της Ρωσικής Λογοτεχνίας그리스어
1936년Le Jardin des rochers프랑스어소설
1938년Ταξιδεύοντας: Ιαπωνία-Κίνα그리스어여행기
1938년오디세이아Οδύσσεια그리스어서사시14년간의 집필과 수정 끝에 완성.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의 속편. 24개의 랩소디로 구성, 33,333행.
1943년그리스인 조르바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그리스어소설1964년 동명의 영화로 각색.
1944년Ασκητική그리스어
1948년그리스도는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Ο Χριστός ξανασταυρώνεται그리스어소설
1950년미하리스 대장Ο Καπετάν Μιχάλης그리스어소설
1951년마지막 유혹Ο τελευταίος πειρασμός그리스어소설1988년 동명의 영화로 각색.
1953년형제 살해Οι Αδελφοφάδες그리스어소설
1956년아시시의 가난한 자Ο Φτωχούλης του Θεού그리스어소설
1957년엘 그레코에게 보내는 보고Αναφορά στον Γκρέκο그리스어자서전


그 외에 스페인 기행, 지중해 기행, 러시아 기행, 모레아 기행, 영국 기행 등의 여행기가 있다.

4.1. 소설

Όφις και Κρίνο그리스어 (1906년) - 카잔차키스의 첫 출판작으로, 카르마 니르바미(Karma Nirvami)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Le Jardin des rochers프랑스어 (1936년)
Βίος και πολιτεία του Αλέξη Ζορμπά그리스어 (1943년) - 1917년 카잔차키스가 요르고스 졸바스라는 남자와 함께 광산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1964년 동명의 영화로 각색되었다.
Ο καπετάν Μιχάλης그리스어 (1953년)
Ο τελευταίος πειρασμός그리스어 (1951년) - 1988년 동명의 영화로 각색되었다.
Ο Φτωχούλης του Θεού그리스어
Οι Αδελφοφάδες그리스어 (1953년)

4.2. 여행기

* 스페인 기행
* 지중해 기행
* 러시아 기행 (1940년)
* 모레아 기행
* 영국 기행
* 일본, 중국 기행 (1938) Ταξιδεύοντας. Ιαπωνία-Κίνα그리스어

4.3. 서사시, 희곡, 자서전

카잔차키스는 1938년에 14년간의 집필과 수정 끝에 오디세이아: 현대적 속편을 완성했다. 이 시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원작 시가 끝난 후 마지막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따라간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의 구조를 따르는 이 작품은 24개의 랩소디로 나뉘어 있으며 33,333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잔차키스는 이 시가 자신의 축적된 지혜와 경험을 담고 있으며, 자신의 가장 위대한 문학적 경험이라고 생각했지만, 비평가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전례 없는 서사시로 칭찬했지만, 많은 이들은 단순히 오만한 행위로 여겼다"라는 평가가 나왔으며, 많은 학자들은 오늘날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카잔차키스는 실존주의적 주제로 가득 찬 1막짜리 희곡 코미디를 썼는데, 이는 장 폴 사르트르와 카뮈와 같은 작가들이 주도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실존주의 운동보다 앞선 것이다. 파리에서 유학을 마친 후 그는 인기 있는 그리스 민속 신화를 바탕으로 한 비극 《건축가》(Ο Πρωτομάστορας)를 썼다.

《붓다》,《영혼의 자서전》,《엘 그레코에게 보내는 보고》도 이 시기에 쓰였다.

5. 한국과의 관계

카잔차키스는 1935년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고, 1938년에 여행기 Ταξιδεύοντας. Ιαπωνία-Κίνα그리스어를 저술했다. 이 여행 중에 경유 형식으로 한국(부산)에 잠시 들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카잔차키스의 작품은 1960년대부터 한국에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그리스인 조르바》는 자유와 삶의 본질을 추구하는 주인공 조르바를 통해 한국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작품은 카잔차키스가 1917년 요르고스 조르바스라는 남자와 함께 광산업에 손을 댔지만 실패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 《최후의 유혹》 등도 한국에서 상영되어 많은 관심을 받았다.

6. 평가와 영향

카잔차키스는 20세기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인간의 실존과 자유, 신과 구원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 작품 세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러 차례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의 작품은 실존주의 문학, 종교 소설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며,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금서 목록에 오르는 등 논란의 중심에 섰다. 카잔차키스는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을 인용하며 자신의 입장을 옹호했지만, 교회로부터 반기독교도로 매도되는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생 자유와 하느님을 사랑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카잔차키스는 초기 공산주의에 경도되었으나, 소련 방문 이후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깨닫고 사회주의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주의"가 그리스뿐 아니라 문명화된 세계 전체에서 승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그리스의 우익은 그를 "부도덕한", "볼셰비키 사건 야기자"라고 비난했지만, 그는 1957년 사망 후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위대한 작가"이자 "평화 헌신자"로 추모를 받았다.

카잔차키스는 앙리 베르그송과 프리드리히 니체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자유와 한계에 저항하는 투쟁적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의 작품은 실존주의적 주제를 다루며, 장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와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불교의 영향 또한 그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의 문체는 데모틱 그리스어를 사용하여 민중의 정신을 포착하고, 구어체 표현과 은유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이 특징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문체가 지나치게 화려하고 어렵다고 지적했지만, 다른 일부는 데모틱 그리스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카잔차키스는 깊은 영성을 지닌 작가였지만, 그리스 정교회와의 갈등은 그의 삶과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종교적 신앙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를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관점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전통적인 정교회 신앙과는 다른 해석으로 이어졌다. 현대 학계는 카잔차키스가 신성 모독이나 불경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과의 씨름을 통해 더 깊은 영적 성장을 추구했다고 평가한다.

7. 남긴 말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α. Δε φοβούμαι τίποτα. Είμαι λέφτερος고대 그리스어

카잔차키스의 묘비 비문.
카잔차키스의 묘비 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