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블레이신게임
1. 개요
돈 블레이신게임은 1950년대 메이저 리그에서 활약한 야구 선수로, 1953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하여 1966년까지 여러 팀에서 2루수로 뛰었다. 1958년 올스타전에 출전했으며, 1967년부터 1969년까지는 일본 프로 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다. 은퇴 후에는 난카이 호크스 코치,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치, 한신 타이거스 감독, 난카이 호크스 감독을 역임하며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그는 '싱킹 베이스볼'이라는 야구 철학을 강조했으며, 2005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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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돈 리 블레이신게임 |
|---|---|
| 원어 이름 | Don Lee Blasingame |
| 출생일 | 1932년 3월 16일 |
| 출생지 | 미시시피주 코린트 |
| 사망일 | 2005년 4월 13일 |
| 사망지 | 애리조나주 파운틴힐스 |
| 신장 | 177 cm |
| 체중 | 72.6 kg |
| 타석 | 좌타 |
| 투구 | 우투 |
| 포지션 | 2루수 |
| 아마추어 | 코린스 고등학교 립스컴 대학교 |
|---|---|
| 메이저 리그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55년~1959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1960년~1961년) 신시내티 레즈 (1961년~1963년) 워싱턴 세네터스 (1963년~1966년)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1966년) |
| 일본 프로 야구 | 난카이 호크스 (1967년~1969년) |
| 드래프트 | 1953년 아마추어 FA |
| 데뷔 (MLB) | 1955년 9월 20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마지막 경기 (MLB) | 1966년 8월 27일,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
| 데뷔 (NPB) | 1967년 4월 8일 |
| 마지막 경기 (NPB) | 1969년 9월 28일 |
| 타율 | 0.258 |
|---|---|
| 홈런 | 21 |
| 타점 | 308 |
| 올스타 | 1958년 |
|---|
| 일본 프로 야구 | 난카이 호크스 (1970년~1977년, 감독) 히로시마 도요 카프 (1978년, 코치) 한신 타이거스 (1979년~1980년, 코치) 난카이 호크스 (1981년~1982년, 코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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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주 출신 야구 선수 -
훌리오 보본
훌리오 보본은 2007년 텍사스 레인저스에 지명되어 메이저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은퇴 후에는 뉴욕 양키스에서 코치로 활동했다. -
미시시피주 출신 야구 선수 -
코리 디커슨
코리 디커슨은 미국의 야구 선수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여러 팀에서 외야수로 활약했으며 잭슨 아카데미 야구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2017년 올스타, 2018년 골드 글러브를 수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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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고등법원
광주고등법원은 1952년에 설치되어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전북특별자치도, 제주특별자치도를 관할하며, 제주와 전주에 원외재판부를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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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2년
1502년은 율리우스력으로 수요일에 시작하는 평년으로, 이사벨 1세의 이슬람교 금지 칙령 발표, 콜럼버스의 중앙아메리카 해안 탐험,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 상관 설립, 크리미아 칸국의 킵차크 칸국 멸망, 비텐베르크 대학교 설립, 최초의 아프리카 노예들의 신대륙 도착 등의 주요 사건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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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시노 겐지
도마시노 겐지는 1988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89년 신인왕을 수상하고 빠른 발과 수비력을 갖춘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활약한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현재 야구 해설가이다. -
연도별 타격 성적을 포함한 문서 -
나가오카 히데키
나가오카 히데키는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유격수 및 2루수로 활동하며 2022년 골든 글러브상을 수상하고 2024년 최다 안타 타이틀을 획득했다.
2. 선수 경력
립스컴 대학교 출신으로, 프로 선수 경력은 1953년 B 클래스 캐롤라이나 리그의 윈스턴세일럼 카디널스에서 시작했다. 이 팀에서 131 경기에 출전하여 141개의 안타, 7개의 홈런과 .290의 타율을 기록했다. 다음 시즌을 위해 버팔로스와 함께 스프링 트레이닝에 참가했으나, 호텔 방에서 전구를 잡다가 손에 화상을 입고, 시즌 전날 베이스에 걸려 넘어지는 부상을 당해 시즌 초반 2주를 결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에 깊은 인상을 남겨 로스터에 포함되었으며, 당시 딕시 워커 감독은 그의 플레이 스타일에 대해 칭찬했다.
1954년에는 텍사스 리그의 휴스턴 버펄로스 소속으로 144경기(575 타수)에 출전하여 .315의 타율, 181안타, 5홈런, 51타점(RBI)을 기록했다. 특히 34개의 도루를 기록하며 빠른 발을 선보였고, 이로 인해 "돈 블레이징게임"(Don Blazing-game영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 별명은 이후 "블레이저"(Blazer영어)로 줄여져 선수 생활 내내 사용되었다. 워커 감독은 "그는 팀에서 가장 더러운 유니폼을 입고 다닌다. 이것이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다."라며 그의 허슬 플레이를 높이 평가했다. 휴스턴은 그해 텍사스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시즌 후 애틀랜타 크래커스와 딕시 시리즈에서 경기를 치렀다.
원래 유격수로 뛰었으나, 1954년 시즌 후 쿠바에서 열린 윈터볼에서 2루수로 포지션을 변경했다. 이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기존 2루수였던 레드 쇼엔디스트의 계약 종료에 대비한 조치였다. 1955년에는 AAA 클래스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의 오마하 카디널스에서 132경기(497타수)에 출전하여 .302의 타율, 150안타, 3홈런, 46타점, 17도루를 기록했고, 그해 9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콜업되어 메이저 리그에 데뷔하게 되었다.
이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과 일본 프로 야구(NPB)에서 활약했으며, 소속팀 경력은 다음과 같다.
| 기간 | 리그 | 소속팀 |
|---|---|---|
| 1953 |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캐롤라이나 리그) | 윈스턴세일럼 카디널스 |
| 1954 |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텍사스 리그) | 휴스턴 버펄로스 |
| 1955 |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 오마하 카디널스 |
| 1955–1959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NL)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 1960–1961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NL) |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 1961–1963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NL) | 신시내티 레즈 |
| 1963–1966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AL) | 워싱턴 세네터스 |
| 1966 |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AL) |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
| 1967–1969 | 일본 프로 야구 (PL) | 난카이 호크스 |
메이저 리그와 일본 프로 야구에서의 상세한 선수 경력은 아래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2.1. 메이저 리그 시절 (1955-1966)
돈 블레이신게임은 1955년부터 1966년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활약한 2루수이다. 이 기간 동안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신시내티 레즈, 워싱턴 세네터스,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등 여러 팀을 거쳤다.
메이저 리그 통산 1,444경기에 출전하여 타율 0.258, 1,366안타, 178개의 2루타, 62개의 3루타, 21개의 홈런, 308타점, 105도루를 기록했다.
2.1.1.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1955-1959)
립스컴 대학교를 졸업한 후, 1953년에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했다.
1955년 9월 20일, 23세의 나이로 시카고 컵스를 상대로 한 카디널스의 2-0 승리 경기(부시 스타디움)에서 메이저 리그 데뷔를 치렀다. 2루수로 선발 출장하여 리드오프 타자로 나선 그는 첫 타석에서 샘 존스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하며 데뷔 첫 안타를 기록했고, 솔리 헤머스의 홈런으로 득점했다. 그해 가을 카디널스에서 5경기에 출전하여 23번의 출루 기회에서 12번 출루했다.
1956년에는 처음 세 경기는 벤치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알렉스 그라마스를 대신하여 카디널스의 유격수 자리를 차지하며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6월 12일까지 첫 50경기에서 .263의 타율을 기록했다. 이틀 뒤, 카디널스가 레드 쇼엔디스트를 뉴욕 자이언츠로 트레이드하면서 블레이신게임이 2루수 자리를 맡게 되었다. 시즌 남은 기간 동안 2루수로 뛰면서 150경기(587타수)에서 .261의 타율, 153안타, 94 득점, 27타점을 기록했다. 8개의 도루를 기록했지만, 같은 횟수의 도루 실패도 기록했다.
1957년은 블레이신게임에게 최고의 시즌이었다. 타율 .271을 기록했으며, 홈런(8), 타점(58), 득점(101), 안타(176), 도루(21, 리그 3위)에서 개인 최고 기록을 세웠다. 그의 첫 메이저 리그 홈런은 5월 12일 레드 머프를 상대로 기록했지만, 팀은 밀워키 브레이브스에게 10-4로 패배했다. 9월 4일에는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12회 말, 4-4 동점 상황에서 1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 돈 맥마흔을 상대로 2루타를 쳤다. 이후 3루 도루에 성공했고, 맥마흔이 다음 두 타자를 고의사구로 내보내 포스 아웃 상황을 만들었으나, 밥 헤즐의 실책으로 블레이신게임이 홈을 밟아 카디널스가 5-4로 승리했다. 6월 12일에는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더블헤더 첫 경기에서 10회에 2타점 적시타를 포함하여 4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10-3 승리에 기여했다. 리드오프 타자로 주로 기용된 그는 내셔널 리그 (NL)에서 가장 많은 650타석을 소화했다. 수비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여 NL 2루수 중 보살과 병살타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시즌 후 NL MVP 투표에서는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에드 부셰와 함께 공동 12위에 올랐다.
1958년 시즌 전반기에 .276의 타율을 기록하며 활약했고, 개인 통산 유일하게 내셔널 리그 올스타 팀에 선발되었다. 올스타전에서는 빌 마제르스키가 2루수 자리를 전부 소화했지만, 블레이신게임은 4회에 워렌 스판의 대타로 출전하여 플라이 아웃으로 물러났다. 8월 6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8-7 승리를 거둔 경기에서는 4안타 2타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그가 그해 "많은 부상"을 겪었다고 보도했지만, 154경기 중 143경기에 출전하며 꾸준한 모습을 보였다. 시즌 성적은 .274의 타율, 71득점, 19개의 2루타, 10개의 3루타(개인 최고 기록), 2개의 홈런, 20개의 도루였다.
1959년에는 단 하나의 홈런만을 기록했는데,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게 5-3으로 패한 경기에서 샌디 쿠팩스를 상대로 쳐낸 것이었다. 6월 9일 밀워키를 상대로 12-3으로 승리한 경기에서는 3안타, 3득점, 2타점을 기록했고, 7월 19일에도 밀워키를 상대로 9-5 승리에 4안타 2득점으로 기여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289와 26개의 2루타로, 두 기록 모두 개인 최고 기록이었다. 타점은 24개에 그쳤지만 90득점을 올렸다. 15개의 도루를 성공했지만, 리그에서 가장 많은 15번의 도루 실패를 기록하기도 했다.
1959년 시즌 후, 오사카 스타디움에서 열린 난카이 호크스와 다이마이 오리온스 연합팀과의 미일 야구 경기에 출전하여 일본 야구를 처음 경험했다. 이 경기에서 다이마이의 에노모토 키하치가 친 중견수 방면 안타성 타구를 역방향으로 잡아 2루로 들어오던 유격수에게 백토스로 연결하여 병살을 만들어내는 명수비를 선보였다. 당시 1루 주자였던 난카이의 히로세 노리타카는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자신이 왜 아웃되었는지 몰라 2루 베이스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고 한다. 이 경기를 관전하고 블레이신게임의 연습을 지켜본 히로오카 타츠로는 그가 묵묵히 수비 기본 동작을 반복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공은 몸의 정면에서 잡아야 한다"는 기본기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2.1.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신시내티 레즈 (1960-1963)
1959년 시즌 후, 12월 15일 블레이신게임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데릴 스펜서와 레온 와그너를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 자이언츠는 이전 시즌 12월부터 그의 영입을 논의해 왔으며, 실책이 잦은 내야 수비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시절처럼 팀의 리드오프 타자로 기용되었으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1960년 그의 타율은 0.235로 떨어져 메이저 리그 경력 중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136경기(523타수)에 출전하여 123안타, 2홈런, 31타점을 기록했으며, 도루는 16번 시도 중 14번 성공하며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1961년, 블레이신게임은 신인 척 힐러에게 주전 2루수 자리를 내주었다. 시즌 개막 후 첫 2주 동안 단 3번의 대타 기용에 그친 후, 밥 슈미트와 함께 신시내티 레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자이언츠는 그 대가로 에드 베일리와 추후 지명 선수(셔먼 존스)를 받았다.
프레드 허친슨 레즈 감독은 "우리는 내야를 다잡아 줄 선수가 필요했고… 블레이신게임이 바로 그 선수였다"고 영입 이유를 밝혔다. 블레이신게임이 합류한 지 3일 만에 레즈는 9연승을 달리며 최하위에서 내셔널 리그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그러나 1961년 그의 타율은 0.222로 계속 하락했다. 시즌 후반에는 유망주 엘리오 차콘에게 출전 시간을 일부 내주었다. 123경기(450타수)에서 100안타, 1홈런, 21타점, 4도루를 기록했다. 레즈는 그해 내셔널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블레이신게임은 1961년 월드 시리즈에 출전하여 3경기에서 7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레즈는 뉴욕 양키스에게 5경기 만에 패배했다.
차콘이 1961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확장 드래프트에서 뉴욕 메츠에 지명되면서, 1962년 블레이신게임은 레즈의 주전 2루수 자리를 확고히 했다. 4월 18일 다저스를 상대로 한 경기에서는 3안타, 4득점, 2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14-0 대승에 기여했고, 5월 24일 휴스턴 콜트 .45's와의 경기에서는 2루타와 3루타를 포함한 4안타를 기록하며 5-0 승리를 이끌었다. 9월 5일 컵스와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는 5안타를 몰아치며 팀의 7-5 승리에 기여했다. 시즌 동안 141경기(494타수)에 출전하여 139안타, 77득점, 2홈런, 35타점, 4도루를 기록했다. 장타는 9개의 2루타와 7개의 3루타로 다소 줄었다.
1963년이 되자 블레이신게임의 수비력은 예전 같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다.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그가 여전히 "능숙"하지만 "병살타를 만드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고 지적했다. 레즈는 그해 스프링 트레이닝에 새로운 2루수 유망주 피트 로즈를 데려왔고, 블레이신게임은 로즈가 결국 주전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로즈는 그해 신인상을 수상했다. 시즌 초반 로즈가 0.130의 타율로 부진하자 블레이신게임이 잠시 2루수 자리를 맡았으나, 그 역시 8경기에서 0.160의 타율을 기록하며 부진했고 다시 로즈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이후 거의 기용되지 못하던 블레이신게임은 7월 1일, 짐 코츠를 상대로 워싱턴 세네터스로 트레이드되었다.
2.1.3. 워싱턴 세네터스 &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 (1963-1966)
1963년 시즌 중반 신시내티 레즈에서 워싱턴 세네터스로 이적했다. 신시내티 시절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한 사이, 피트 로즈가 주전 2루수로 자리 잡으면서 블레이신게임의 출전 기회가 줄어든 것이 이적의 배경이 되었다. 당시 세네터스는 6월 말까지 타율이 0.200에 그쳤던 2루수 척 코티어를 대체할 선수가 필요했다. 블레이신게임은 이적 후 시즌 막판 좋은 활약을 펼쳐, 8월 24일부터 시작된 마지막 32경기에서 타율 0.316을 기록했다. 1963년 세네터스 소속으로는 69경기에 출전하여 254타수 타율 0.256, 65안타, 2홈런, 12타점, 29득점, 3도루를 기록했다. 신시내티 시절 기록을 합한 1963년 시즌 전체 성적은 87경기 285타수 타율 0.246, 70안타, 33득점이었다 (레즈 소속 기간에는 홈런, 타점, 도루가 없었다).
1964년에도 세네터스의 주전 2루수로 활약했다. 4월 23일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경기에서는 3안타 2득점(결승 득점 포함)을 기록하며 팀의 5–4 승리에 기여했다. 5월 29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는 6회 대타로 나와 볼넷을 얻어 동점 득점을 기록했고, 다음 이닝에는 테드 아베르나티를 상대로 2타점 적시타를 쳐 팀의 8–4 승리를 이끌었다. 8월 4일 클리블랜드전에서는 소니 시버트를 상대로 만루 상황에서 2타점 적시타를 쳐 팀의 4–2 승리에 기여했다. 이 해 블레이신게임은 143경기에 출전하여 506타수 타율 0.267, 135안타, 17개의 2루타, 1홈런, 34타점, 56득점을 기록했다.
1965년 시즌 초반에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4월 14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는 딕 라다츠를 상대로 2타점 3루타를 쳐 팀의 6–4 승리에 기여했고, 사흘 뒤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서는 3안타를 치며 팀의 유일한 득점을 올렸으나 팀은 1-2로 패배했다. 7월 18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는 피트 미켈센에게 2타점 적시타를 뽑아내며 팀의 3–0 승리를 도왔다. 하지만 8월 22일부터 9월 3일까지는 켄 햄린에게 2루수 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1965년 시즌 성적은 129경기 403타수 타율 0.223, 90안타, 47득점, 8개의 2루타, 8개의 3루타, 1홈런, 18타점, 5도루였다.
1966년 시즌은 켄 햄린과 함께 플래툰 시스템으로 시작했다. 좌타자인 블레이신게임은 주로 우완 투수를 상대했고, 우타자인 햄린은 좌완 투수를 상대했다. 그 해 유일한 홈런은 6월 13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데이브 위커샴을 상대로 친 솔로 홈런이었으나, 팀은 3-4로 패했다. 7월 4일 보스턴과의 더블헤더 1차전에서는 시즌 최다인 3개의 삼진을 당하기도 했지만, 2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6–4 승리에 기여했다. 7월 말까지 세네터스에서 68경기에 출전하여 200타수 타율 0.218, 43안타, 18득점, 11타점, 9개의 2루타를 기록했다.
8월 2일,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가 그의 계약을 사들였다. 캔자스시티에서는 주로 대타로 기용되었으며, 선발 출전은 3경기에 불과했다. 애슬레틱스 소속으로 12경기에 출전하여 19타수 3안타를 기록했다. 9월 콜업 이후인 9월 7일, 애슬레틱스는 그를 방출했다. 메이저 리그 마지막 해였던 1966년 시즌 최종 성적은 80경기(워싱턴 68, 캔자스시티 12) 219타수 타율 0.210이었다. 이로써 그의 메이저 리그 경력은 통산 1,444경기 출전, 타율 0.258, 1,366안타, 178개의 2루타, 62개의 3루타, 21홈런, 308타점, 105도루의 기록으로 마무리되었다.
2.2. 일본 프로 야구 시절 (1967-1969): 난카이 호크스
1967년, 블레이신게임은 일본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감독 쓰루오카 가즈토가 이끄는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했다. 그의 본명인 "블레이신게임"은 일본인들이 발음하기 어렵고, 구장의 스코어보드에도 다 적기 어려웠기 때문에 애칭인 "블레이저(Blazer)"를 등록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일본인들은 그를 "블레이저"라고 불렀으며, 호크스의 홍보 담당자는 이 이름이 "경쾌하게 들리고 심지어 영적으로 감동적인 음향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다"고 평했다. 블레이신게임은 난카이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대해 "일주일 동안 장애물 코스를 달리고, 망치와 도끼를 휘두르고, 산을 뛰어 올라갔다"고 묘사하기도 했다.
난카이에서 2루수를 맡은 그는 입단 첫해인 1967년, 128경기(478타수)에 출전하여 타율 0.268, 61득점, 128안타, 18개의 2루타, 6개의 3루타, 5개의 홈런, 28타점을 기록했다. 도루는 5개를 성공했지만, 주루 중 아웃(run out)을 9번 당하기도 했다. 1968년 시즌에는 134경기(513타수)에 출전하여 타율 0.275, 64득점, 141안타, 13개의 2루타, 7개의 3루타, 4개의 홈런, 39타점을 기록했으며, 도루 3개와 런 아웃 5번을 기록했다. 난카이에서의 마지막 시즌인 1969년에는 104경기(365타수)에서 타율 0.279, 46득점, 102안타, 10개의 2루타, 1개의 3루타, 6개의 홈런, 19타점을 기록했다.
블레이신게임은 선수 시절 병살 처리 시 빠른 발놀림과 글러브 처리, 정확한 송구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타격에서도 승부 근성을 발휘하여 공수 양면에서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67년과 1968년, 2년 연속으로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특히 번트 기술이 뛰어나, 그의 세이프티 번트는 3루 선상에 절묘하게 굴러가는 예술적인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기본기를 충실히 반복하는 스타일로 화려함은 덜했지만 기술의 확실성이 매우 높았고, 포구에서 송구까지의 동작이 빨라 당시 난카이 투수진 사이에서는 "어려울 때는 돈(블레이저) 방향으로 공을 유도하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편, 블레이신게임은 일본 야구를 경험하며 문화적인 차이도 느꼈다. 그는 일본 선수들이 경기 중에 실제로 심판을 밀치는 행동을 하고도 퇴장당하지 않는 것에 놀랐으며, 선수들이 더그아웃에서 미국 선수들보다 훨씬 편안하게 행동하고 경기 중에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 모습 등을 관찰했다고 언급했다. 1969년 시즌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3. 지도자 경력
* 난카이 호크스 코치 (1970년 ~ 1977년)
*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치 (1978년)
*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79년 ~ 1980년)
* 난카이 호크스 감독 (1981년 ~ 1982년)
* 순위는 시즌 최종 순위
: ※1 1979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 체제
: ※2 1973년부터 1982년까지 퍼시픽 리그는 전후기제
: ※3 1980년 5월 15일에 감독을 사임함
3.1. 난카이 호크스 코치 (1970-1977)
1969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1970년부터 난카이 호크스의 헤드 코치로 취임했다. 같은 해 노무라 가쓰야가 구단주 가와카쓰 덴으로부터 "난카이 재건을 맡길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요청을 받고 35세의 젊은 나이로 선수 겸임 감독이 되었는데, 이때 노무라가 내세운 조건 중 하나가 블레이신게임의 헤드 코치 취임이었다。 노무라는 "브레이저가 헤드 코치가 아니면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헤드 코치로서 블레이신게임은 1973년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는 경기 전 미팅에서 당시 난카이 선수들이 접하지 못했던 야구 이론과 지식을 전수하며 '싱킹 베이스볼(Thinking Baseball)'의 깊이를 가르쳤다。 이는 단순히 경기를 치르는 것을 넘어, 경기마다 치밀한 전략을 구성하는 방식으로 일본 프로 야구계에 영향을 주었다。
노무라는 블레이신게임에 대해 "생각하는 야구를 가르쳐준 은인"이라고 평가했으며, 자신의 ID 야구의 근원이 블레이신게임에게 있다고 자주 언급했다. 노무라가 히트 앤드 런 상황 대처법에 대해 '타구를 굴리겠다'고 답하자, 블레이신게임은 2루수나 유격수의 베이스 커버 움직임에 따라 타구 방향까지 조절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조언하며 노무라를 감탄시켰다.
당시 난카이 선수였던 에모토 다케노리는 블레이신게임의 접근법에 대해 "일본식의 단순한 근성론과는 180도 다른 야구관. 상대의 버릇과 성격을 분석하고, 게임 상황에 따라 전략을 임기응변으로 전환하는, 매우 두뇌적인 스포츠의 세계"라고 평가하며, "노무라 감독의 경기 전 예상 문답은 브레이저 직전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1977년 시즌 후반, 노무라 감독이 공사 혼동을 이유로 해임되면서 블레이신게임도 함께 팀을 떠났다.
3.2. 히로시마 도요 카프 코치 (1978)
1978년 한 시즌 동안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 코치를 맡았다.
3.3. 한신 타이거스 감독 (1979-1980)
1978년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1군 수비 겸 헤드코치를 지낸 후, 1979년 한신 타이거스의 1군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한신 소속이었던 에모토 다케노리는 전년도 팀의 최하위 부진 이후 블레이저의 감독 취임 소식을 듣고, "굿 초이스. 블레이저라면 팀도 변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며 환영했다.
블레이저는 난카이 시절부터 강조해 온 "생각하는 야구(Thinking Baseball)"를 한신에 도입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취임 첫 해인 1979년에는 팀을 4위로 이끌며 전년도 최하위에서 벗어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시즌 중반까지 선두 경쟁을 벌이는 등 팀 전력이 향상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개막 전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와의 대형 트레이드(다부치 고이치, 고사와 겐지 방출, 마유미 아키노부, 와카나 요시하루, 다케노우치 마사시, 다케다 가즈시 영입)와 에가와 사건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고바야시 시게루를 영입한 전력 보강의 영향도 있었지만, 블레이저의 지도력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유격수였던 마유미에게 수비 시 발끝 방향 등 세밀한 지도를 통해 '생각하는 수비'를 강조했다.
그러나, 1980년 대형 신인 오카다 아키후미의 기용 문제를 둘러싸고 구단 프런트와 갈등을 겪기 시작했다. 블레이저는 "신인은 곧바로 주전으로 기용하지 않는다"는 메이저 리그 방식의 선수 육성 철학을 고수하며 오카다를 즉시 기용하는 데 부정적이었다. 그는 즉시 전력감 2루수를 찾다가 여의치 않자 야쿠르트에서 방출된 데이브 힐턴을 영입했다. 블레이저는 타격 부진에도 불구하고 수비력을 높이 평가하며 힐턴을 계속 기용했고, 오카다를 기용하지 않자 팬들과 언론의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경기 중에는 "오카다를 내보내라"는 관중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블레이저는 당시 한신의 주전 2루수였던 사카키바라 요시유키의 존재와 오카다의 성장을 위한 시간 필요성을 이유로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지만, 상황은 악화되었다.
결국 블레이저의 자택에 면도날이 든 협박 편지가 배달되는 등 극성 팬들의 위협이 이어졌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아내가 귀국을 호소했다. 또한 구단 프런트가 성적 부진을 이유로 힐턴을 퇴단시키고 브루스 보클레어를 영입한 것을 '현장 개입'으로 판단한 블레이저는 시즌 도중인 1980년 5월 14일에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에모토에게 "오카다를 키우려는 내 방식을 이해해주지 않고, 오즈 사장까지 '오카다를 써라'고 압력을 가한다. 내 신념에 어긋나는 일은 할 수 없다"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블레이저의 후임으로는 1군 헤드 겸 타격 코치였던 나카니시 후토시가 취임했지만, 팀은 최종 5위에 머물렀다. 히로시마 시절 블레이저를 코치로 영입했던 고바 다케시 감독은 블레이저가 "자신의 야구 외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성격 때문에 이러한 결말을 예견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연도 | |순위 | 경기 | 승리 | 패전 | 무승부 | 승률 | 경기 차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방어율 | 연령 | |
|---|---|---|---|---|---|---|---|---|---|---|---|---|
| 1979년 | 한신 | 4위 | 130 | 61 | 60 | 9 | .504 | 8.0 | 172 | .268 | 4.15 | 47세 |
| 1980년 | 5위 | 26 | 13 | 12 | 1 | .520 | -- | -- | -- | -- | 48세 |
* 순위는 시즌 최종 순위.
* 1979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제
* 1980년 5월 15일에 감독을 사임함.
3.4. 난카이 호크스 감독 (1981-1982)
한신 타이거스 감독직에서 물러난 후, 1981년부터 1982년까지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을 맡았다.
* 순위는 시즌 최종 순위.
* 당시 일본 프로 야구는 130경기제였으며, 퍼시픽 리그는 1973년부터 1982년까지 전후기제를 시행했다.
4. 야구 철학: '싱킹 베이스볼'
돈 블레이신게임은 자신의 야구 철학인 '싱킹 베이스볼'에 대한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브레이저의 싱킹 베이스볼 - 야구를 격렬하게, 생각해보자"라는 제목으로, 후지에 키요시와 함께 저술하여 1979년 코단샤에서 출판되었다.
5. 사생활
1960년, 오자크 항공 승무원이자 1957년 미스 미주리였던 사라 쿠퍼와 결혼했다. 사라 쿠퍼는 찰스턴 춤으로 재능 부문에서 우승했으며, 미스 아메리카 대회 최종 결선(상위 10명)에 진출한 경력이 있다. 사라의 아버지는 블레이신게임의 카디널스 시절 팀 동료였던 워커 쿠퍼이다. 장인인 쿠퍼는 이 결혼에 대해 "딸이 팀 동료와 결혼하는 것을 보니 내가 늙었다는 것을 알겠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부부는 슬하에 켄트, 브렛, 그레그, 던, 신디 등 5명의 자녀를 두었다.
블레이신게임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동안 가족들은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했다. 자녀들 모두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게 되었으며, 이는 특히 아들 켄트가 훗날 콜로라도 로키스에서 아시아 지역 스카우트로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2005년 4월 13일, 애리조나 주 파운틴 힐스에서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당일 오전에 형과 통화한 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가 온 것으로 알려졌다. 스코츠데일의 파라다이스 메모리얼 가든에 안장되었다.
6. 사망
2005년 4월 13일 애리조나주에서 사망했다. 향년 73세.
7. 수상 및 기록
코린트 스포츠플렉스의 유소년 야구 리그는 1970년대에 블레이신게임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980년에는 미시시피 스포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또한, 코린트의 한 거리는 그의 이름을 따서 블레이신게임 거리로 명명되었다.
7.1. MLB
* MLB 올스타전 출전 : 1회(1958년)
7.2. NPB
1967년, 감독 쓰루오카 가즈토가 이끄는 난카이 호크스에 입단하며 일본 프로 야구(NPB) 경력을 시작했다. 본명인 "돈 블레이신게임"이 당시 구장의 스코어보드에 전부 표기되기 어려워, 애칭인 "브레이저"를 등록명으로 사용했고, 이는 일본에서의 통칭이 되었다.
선수 시절, 병살 처리 시의 빠른 발놀림과 글러브 처리, 정확한 송구 능력은 여전했으며, 타격 면에서도 승부 근성을 보여주며 공수 양면에서 높은 수준의 플레이를 선보였다. 또한, 번트 기술에도 능숙하여, 특히 3루 선상으로 절묘하게 굴리는 세이프티 번트는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기본기를 중시하며 꾸준히 반복 연습했기에 화려함은 덜했지만, 플레이의 정확성은 매우 높았다. 포구부터 송구까지의 동작이 빨라, 당시 난카이 투수진 사이에서는 "어려울 때는 (2루수인) 돈 방향으로 타구를 유도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1967년과 1968년 2년 연속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고, 1967년부터 1969년까지 3년 연속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1969년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1970년부터 난카이의 헤드 코치로 활동했다. 당시 노무라 가쓰야가 35세의 젊은 나이에 선수 겸임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구단주 가와카쓰 덴에게 브레이저의 헤드 코치 임명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노무라는 브레이저를 "생각하는 야구를 가르쳐준 은인"으로 여기며, 브레이저는 경기 전 미팅을 통해 난카이 선수들에게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야구 이론과 지식을 전수하며 "싱킹 베이스볼(Thinking Baseball)"의 개념을 심어주었다. 이는 단순히 경기를 치르는 것을 넘어, 각 경기 상황에 맞는 치밀한 전략 구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일본 프로 야구계에 영향을 미쳤다. 노무라는 자신의 ID 야구의 근원이 브레이저에게 있다고 여러 차례 언급했다. 브레이저는 1973년 팀의 퍼시픽 리그 우승에 기여했으나, 1977년 시즌 후반 노무라 감독이 사적인 문제로 해임되자 함께 팀을 떠났다.
1978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고바 다케시 감독의 요청으로 1군 수비 코치 겸 헤드 코치로 부임했다. 오사카에 가족을 남겨두고 단신 부임하여 팀을 지도했으며, 고바 감독은 "블레이저의 야구를 보며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고했다.
1979년에는 한신 타이거스의 1군 감독으로 취임하여, 1976년 난카이에서 트레이드로 이적했던 에모토 다케노리와 다시 만나게 되었다. 에모토는 당시 선수 회장이었으며, 전년도 구단 역사상 첫 최하위를 기록했던 팀 상황에서 블레이저의 감독 부임을 "굿 초이스. 블레이저라면 팀이 변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며 환영했다. 블레이저는 난카이 시절부터 강조했던 "싱킹 베이스볼"을 한신에 도입하려 했고, 취임 첫해 팀을 4위로 이끌며 전년도 최하위에서 벗어나 한때 선두 경쟁을 벌이는 등 팀을 재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시즌 전 크라운 라이터 라이온즈와의 대형 트레이드(다부치 고이치, 고사와 겐지 방출, 마유미 아키노부, 와카나 요시하루, 다케노우치 마사시, 다케다 가즈시 영입)와 에가와 사건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고바야시 시게루를 영입한 전력 보강 덕도 있었지만, 블레이저의 지도력 또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그는 유격수였던 마유미에게 수비 시 발끝을 항상 홈플레이트 방향으로 향하게 하고, 수비 위치나 움직임으로 상대 타자에게 투수의 구종을 간파당하지 않도록 하는 '생각하는 수비'를 강조했다.
그러나 1980년, 대형 신인 오카다 아키후미가 입단하면서 그의 기용 문제를 둘러싸고 구단 프런트와 갈등을 겪었다. 블레이저는 "아무리 실력 있는 신인이라도 메이저 리그에서는 처음부터 바로 기용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학에 따라 오카다를 즉시 주전으로 기용하는 것을 주저했다. 대신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영입한 데이브 힐턴을 타격 부진에도 불구하고 수비력을 높이 평가하며 계속 기용했다. 이는 팬들과 언론의 거센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경기 중에는 관중석에서 "오카다를 기용하라"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블레이저는 당시 한신의 주전 2루수였던 사카키바라 요시유키의 존재와 함께, "1군에서 꾸준히 활약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오카다를 섣불리 기용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블레이저의 자택에 면도날이 든 협박 편지가 배달되는 등 상황이 악화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내가 귀국을 호소했고, 구단 프런트가 힐턴을 성적 부진으로 퇴단시키고 브루스 보클레어를 영입한 것을 '현장 개입'으로 판단하여, 결국 1980년 5월 14일 시즌 도중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한신 퇴단 후, 1981년 친정팀인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으로 복귀했다. 요나미네 오사무와 버니 슐츠를 코치로 영입했다. 1년 차인 1981년에는 신인 투수 야마우치 타카노리, 야마우치 카즈히로와 베테랑 야마우치 신이치로 구성된 '트리오 더 야마우치'가 선발진의 주축을 이루고 후지타 마나부도 부활했지만, 팀은 전기 리그 5위, 후기 리그 6위(통합 5위)에 그쳤다. 당시 팀 내에는 코칭 스태프와 선수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2년에는 '트리오 더 야마우치'가 모두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하고 킨조 모토야스가 21세이브를 올리는 등 투수진이 안정되었으나, 주포 몬다 히로미츠의 부상 공백 등으로 타선이 부진하여 팀은 최하위(전기 5위, 후기 6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블레이저 자신도 지병인 심장병에 통풍까지 겹치는 등 건강 문제가 있었고, 구단 역시 선수 보강 등 자금 지원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결국 감독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귀국 후에는 난카이의 미국 담당 스카우트를 잠시 맡았고, 이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코치 및 어드바이저로 활동했다.
| 기록 | 내용 | 비고 |
|---|---|---|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 1967년 4월 8일, 대 도쿄 오리온스 1차전 (오사카 구장), 2번·2루수 | |
| 첫 안타 | 1967년 4월 14일, 대 도에이 플라이어스 1차전 (고라쿠엔 구장), 3회 초 사가 겐시로 상대 중전 안타 | |
| 첫 타점 | 1967년 4월 25일, 대 한큐 브레이브스 3차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 9회 초 사사키 게이고 상대 적시 2루타 | |
| 첫 홈런 | 1967년 4월 30일, 대 니시테쓰 라이온스 3차전 (오사카 구장), 3회 말 다나카 쓰토무 상대 좌월 선제 솔로 홈런 | |
| 올스타전 출전 | 3회 | 1967년 ~ 1969년 |
| 베스트 나인 수상 | 2회 | 1967년, 1968년 (2루수 부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