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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찰루키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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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찰루키아 왕조는 7세기부터 12세기까지 데칸 동부에 위치했던 칸나다 혈통의 왕조이다. 바다미 찰루키아에서 파생되었으며, 풀라케신 2세가 비슈누쿤디나 왕조를 정복한 후 그의 형제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를 벵기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서찰루키아와 라슈트라쿠타의 지배를 받았으나, 9세기 구나가 비자야디티야 3세의 독립 선언 이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힌두교를 숭상하며 시바파가 우세했고, 텔루구 문학 발전에 기여했다. 잦은 내전과 외세의 침략으로 쇠퇴하여 12세기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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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찰루키아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개요
현지 이름동찰루키아
다른 표기벵기 찰루키아
전신찰루키아
후신촐라 왕국
존속 기간624년 ~ 1189년
수도벵기
공용어칸나다어, 텔루구어
민족칸나다인, 텔루구인
종교힌두교
기타 종교자이나교
정치 체제군주제
위치중부 인도
국가 원수마하라자

2. 기원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에서 벵기 찰루키아가 파생되었다. 624년, 바다미의 통치자 풀라케신 2세(610년 ~ 642년)는 비슈누쿤디나 왕조의 잔당을 물리치고 데칸 동부의 벵기 지역을 정복한 뒤 그의 형인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를 총독으로 임명했다.[5][6] 이후 바타피 전투에서 풀라케신 2세가 팔라바 왕조와의 전투 중 사망하자, 비슈누바르다나의 부왕령은 독립 왕국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11세기부터 동찰루키아 왕조는 자신들이 전설적인 달 왕조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이 전설에 따르면, 그 왕조는 부다, 푸루라바, 판다바, 사타니카, 우다야나를 거쳐 달 왕조의 후손이다. 59명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우다야나의 후손들이 아요디아에서 통치했다. 그들의 후손 비자야디티야는 닥쉬나파타(데칸)를 탐험하던 중 트릴로차나 팔라바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임신한 미망인은 무디베무(오늘날의 잠말라마두구)의 비슈누바타 소마야지에게 피난처를 제공받았다. 그녀는 은인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비슈누바르다나라고 이름 지었다. 그 소년이 자랐을 때, 난다 바가바티 여신의 은총으로 닥쉬나파타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신화적인 기원론이다.[7]

2. 1. 서찰루키아 왕조와의 관계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에서 벵기 찰루키아 왕조가 파생되었다. 624년, 바다미의 통치자 풀라케신 2세(610년 ~ 642년)는 비슈누쿤디나 왕조의 잔당을 물리치고 데칸 동부의 벵기 지역을 정복한 뒤 그의 형인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를 총독으로 임명했다.[5][6] 이후 바타피 전투에서 풀라케신 2세가 팔라바 왕조와의 전투 중 사망하자, 비슈누바르다나의 부왕령은 독립 왕국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즉 동찰루키아는 원래 칸나다 혈통이었다.

동찰루키아의 시조인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의 팀마푸람 판에 따르면, 이들은 마나비야 고트라에 속하며 카담바 왕조, 서찰루키아 왕조와 마찬가지로 하리트푸트라(하리티의 아들들)였다.[7]

2. 2. 전설상의 기원

11세기부터 동찰루키아 왕조는 자신들이 전설적인 달 왕조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 전설에 따르면, 그 왕조는 부다, 푸루라바, 판다바, 사타니카, 우다야나를 거쳐 달 왕조의 후손이라고 한다. 59명의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우다야나의 후손들이 아요디아에서 통치했다. 그들의 후손 비자야디티야는 닥쉬나파타(데칸)를 탐험하던 중 트릴로차나 팔라바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그의 임신한 미망인은 무디베무(오늘날의 잠말라마두구)의 비슈누바타 소마야지에게 피난처를 제공받았다. 그녀는 은인의 이름을 따서 아들에게 비슈누바르다나라고 이름 지었다. 그 소년이 자랐을 때, 난다 바가바티 여신의 은총으로 닥쉬나파타의 통치자가 되었다는 것이 이들의 신화적인 기원론이다.[7]

3. 역사

서기 641년과 705년 사이, 자야심하 1세와 망기 유바라자를 제외한 몇몇 왕들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다. 그 후 가족 간의 불화와 약한 통치자들로 특징지어지는 불안한 시기가 뒤따랐다. 한편, 말케드의 라슈트라쿠타는 바다미의 서찰루키아를 축출했다. 벵기의 약한 통치자들은 그들의 왕국을 한 번 이상 지배했던 라슈트라쿠타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구나가 비자야디티야 3세가 집권한 848년까지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동찰루키아 통치자는 없었다. 그 당시 라슈트라쿠타의 통치자였던 아모가바르샤는 그를 동맹으로 대했고, 아모가바르샤의 죽음 이후 비자야디티야는 독립을 선언했다.

3. 1. 초기 역사 (7세기 ~ 8세기)

서기 641년과 705년 사이, 자야심하 1세와 망기 유바라자를 제외한 몇몇 왕들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동찰루키아 왕조를 통치했다. 그 후 가족 간의 불화와 약한 통치자들로 인해 불안정한 시기가 이어졌다. 한편, 말케드의 라슈트라쿠타는 바다미의 서찰루키아를 축출했다. 벵기의 약한 통치자들은 그들의 왕국을 한 번 이상 지배했던 라슈트라쿠타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848년 구나가 비자야디티야 3세가 집권하기 전까지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동찰루키아 통치자는 없었다. 당시 라슈트라쿠타의 통치자였던 아모가바르샤는 그를 동맹으로 대했고, 아모가바르샤가 죽은 후 비자야디티야는 독립을 선언했다.

3. 2. 라슈트라쿠타와의 갈등 (8세기 ~ 9세기)

서기 641년과 705년 사이에는 자야심하 1세와 망기 유바라자를 제외한 몇몇 왕들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통치했다. 그 후 가족 간의 불화와 약한 통치자들로 특징지어지는 불안한 시기가 뒤따랐다.[1] 한편, 말케드의 라슈트라쿠타는 바다미의 서찰루키아를 축출했다. 벵기의 약한 통치자들은 그들의 왕국을 한 번 이상 지배했던 라슈트라쿠타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1] 구나가 비자야디티야 3세가 집권한 848년까지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동찰루키아 통치자는 없었다.[1] 그 당시 라슈트라쿠타의 통치자였던 아모가바르샤는 그를 동맹으로 대했고, 아모가바르샤의 죽음 이후 비자야디티야는 독립을 선언했다.[1]

3. 3. 비자야디티야 3세의 독립 선언 (9세기)

서기 641년과 705년 사이에는 자야심하 1세와 망기 유바라자를 제외한 몇몇 왕들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동찰루키아 왕조를 통치했다. 그 후 가족 간의 불화와 약한 통치자들로 인해 불안한 시기가 이어졌다. 한편, 말케드의 라슈트라쿠타는 바다미의 서찰루키아를 축출했다. 벵기의 약한 통치자들은 그들의 왕국을 한 번 이상 지배했던 라슈트라쿠타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848년 구나가 비자야디티야 3세가 집권하기 전까지 라슈트라쿠타를 견제할 수 있는 동찰루키아 통치자는 없었다. 그 당시 라슈트라쿠타의 통치자였던 아모가바르샤는 비자야디티야 3세를 동맹으로 대우했고, 아모가바르샤가 죽은 후 비자야디티야 3세는 독립을 선언했다.

3. 4. 내부 갈등과 쇠퇴 (10세기 ~ 12세기)

641년과 705년 사이에 자야심하 1세와 망기 유바라자를 제외한 몇몇 왕들이 매우 짧은 기간 동안 동찰루키아 왕조를 통치했다. 그 후 가족 간의 불화와 약한 통치자들로 인해 불안한 시기가 이어졌다. 한편, 말케드의 라슈트라쿠타 왕조는 바다미의 서찰루키아 왕조를 축출했다. 벵기의 약한 통치자들은 그들의 왕국을 여러 차례 지배했던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도전에 맞서야 했다. 848년 구나가 비자야디티야 3세가 집권하기 전까지 라슈트라쿠타 왕조를 견제할 수 있는 동찰루키아 통치자는 없었다. 당시 라슈트라쿠타의 통치자였던 아모가바르샤는 비자야디티야 3세를 동맹으로 대했고, 아모가바르샤가 죽은 후 비자야디티야 3세는 독립을 선언했다.

4. 행정

초기 동찰루키아 궁정은 기본적으로 바다미의 통치 체제를 따랐으나, 여러 세대가 지나면서 지역적 요인으로 인해 벵기 왕국만의 독자적인 특징이 발전하였다. 팔라바, 라슈트라쿠타, 촐라, 서찰루키아 등 주변 국가들과 우호적이거나 적대적인 관계를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외부의 영향력 또한 존재했다.[1]

동찰루키아의 행정 제도는 중앙 정부, 지방 행정, 그리고 귀족 세력으로 구성되었다. 중앙 정부와 지방 행정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귀족 세력에 관한 내용은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잦은 형제 간 전쟁과 외국의 침략으로 인해 혼란이 빈번했다. 동찰루키아 영토는 여러 작은 제후국(영지)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엘라만칠리, 피타푸람, 무디곤다와 같은 지배 가문들과 코나 하이하야, 칼라추리, 콜라누 사로나타, 차기, 파리체다, 코타밤사, 벨라나두, 콘다파다마티 등 동찰루키아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충성한 가문들이 귀족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벵기 통치자가 강할 때는 충성했지만, 약할 때는 왕실의 적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4]

4. 1. 중앙 정부

동찰루키아 정부는 힌두 철학에 기반을 둔 왕정이었다. 비문들은 전통적인 국가의 일곱 가지 구성 요소(사프탕가)와 18개의 티르타(관직)를 나타낸다.[2]

행정 업무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비샤야와 코탐은 기록을 통해 알려진 행정 구역이었다. 카르마라슈트라와 보야-코탐이 그 예이다. 왕의 칙령(토지나 마을의 선물에 대한 기록)은 모든 나이요기 카발라바(Naiyogi Kavallabhas, 그들의 의무에 대한 표시가 없는 일반적인 용어)들과 부여받은 마을의 주민인 그라메야카들에게 전달된다. 마네야들은 때때로 비문에서 언급된다. 그들은 여러 마을에서 토지나 수입을 할당받았다.[3]

4. 2. 지방 행정

동찰루키아 정부는 힌두 철학에 기반을 둔 왕정이었다. 비문들은 전통적인 국가의 일곱 가지 구성 요소(사프탕가)와 18개의 티르타(관직)를 나타낸다.[2]

관직
만트리(대신)
푸로히타(사제)
세나파티(사령관)
유바라자(태자)
다우바리카(문지기)
프라다나(수석)
아디야크샤(부서장)



행정 업무가 어떻게 수행되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비샤야와 코탐은 기록을 통해 알려진 행정 구역이었다. 카르마라슈트라와 보야-코탐이 그 예이다. 왕의 칙령(토지나 마을의 선물에 대한 기록)은 모든 나이요기 카발라바(Naiyogi Kavallabhas, 그들의 의무에 대한 표시가 없는 일반적인 용어)들과 부여받은 마을의 주민인 그라메야카들에게 전달된다. 마네야들은 때때로 비문에서 언급된다. 그들은 여러 마을에서 토지나 수입을 할당받았다.[3]

형제 간 전쟁과 외국의 침략이 자주 이 땅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영토는 엘라만칠리, 피타푸람, 무디곤다와 같은 지배 가문과 코나 하이하야, 칼라추리, 콜라누 사로나타, 차기, 파리체다, 코타밤사, 벨라나두, 콘다파다마티 등 동찰루키아 가문과 결혼 관계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충성스러운 봉사로 높은 지위에 올랐던 여러 작은 제후국(영지)들로 분할되었다. 벵기 통치자가 강할 때는 귀족들이 그에게 충성과 경의를 표했지만, 약해지면 왕실에 대항하는 적들과 손을 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4]

4. 3. 귀족 세력

초기 동찰루키아 궁정은 바다미 공화국의 형태를 띠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지역적 요인으로 인해 벵기 왕국만의 독자적인 특징이 발전하였다. 그럼에도 팔라바, 라슈트라쿠타, 촐라, 서찰루키아 등과의 오랜 관계로 인해 외부의 영향은 계속되었다.[1]

동찰루키아 정부는 힌두 철학에 기반한 왕정이었다. 비문에는 전통적인 국가 구성 요소 7가지(사프탕가)와 18개의 티르타(관직)가 나타나 있다.[2]

관직
만트리 (대신)
푸로히타 (사제)
세나파티 (사령관)
유바라자 (태자)
다우바리카 (문지기)
프라다나 (수석)
아디야크샤 (부서장)



행정 구역으로는 비샤야와 코탐이 있었으며, 카르마라슈트라와 보야-코탐 등이 그 예이다. 왕의 칙령은 나이요기 카발라바들과 그라메야카들에게 전달되었다. 마네야들은 여러 마을에서 토지나 수입을 할당받았다.[3]

잦은 형제 간 전쟁과 외침은 혼란을 야기했다. 동찰루키아 영토는 여러 작은 제후국(영지)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엘라만칠리, 피타푸람, 무디곤다와 같은 지배 가문과 코나 하이하야, 칼라추리, 콜라누 사로나타, 차기, 파리체다, 코타밤사, 벨라나두, 콘다파다마티 등 동찰루키아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충성한 가문들이 귀족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벵기 통치자가 강할 때는 충성했지만, 약할 때는 왕실의 적들과 손을 잡기도 했다.[4]

5. 사회

동찰루키아 왕조의 사회는 카스트 제도를 기반으로 한 이질적인 인구 구성을 가지고 있었다. 현장의 기록에 따르면, 백성들은 폭력적인 성격, 어두운 피부색을 지녔으며 예술을 사랑했다고 한다. 브라만, 크샤트리야, 바이샤, 수드라의 전통적인 네 카스트 외에도 보야와 사바라 같은 소수 민족 공동체도 존재했다.[1]

5. 1. 카스트 제도

동찰루키아 왕국의 인구는 이질적이었다. 동찰루키아 왕국이 성립된 후 안드라 국가로 건너간 현장은 백성들이 폭력적인 성격을 지녔고, 어두운 피부색을 가졌으며, 예술을 좋아했다고 언급했다. 그 사회는 세습적인 카스트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심지어 원래 카스트를 부정했던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도 카스트를 채택했다. 전통적인 네 카스트 이외에도 보야와 사바라 같은 소수 민족 공동체도 존재했다.[1]

브라만들은 사회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베다샤스트라에 능숙했고 토지와 돈을 선물로 받았다. 그들은 평의원, 장관, 공무원과 같은 수익성이 좋은 직책을 맡았다. 그들은 심지어 군대에 들어갔고 그들 중 일부는 높은 지휘권의 자리에 올랐다. 크샤트리야들은 지배층이었다. 그들의 음모와 호전성이 두 세기 동안의 내전을 야기시켰다. 코마티(바이샤)들은 번창하는 무역 공동체였다. 페누곤다(서부 고다바리)에 본부를 두고 17개의 다른 중심지에 지부를 둔 강력한 길드(나카람)로의 그들의 조직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정부에 공동 업무 대신(사마야만트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드라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했고 그들 중 몇몇 하위 카스트들이 있었다. 군대는 그들 중 대부분에게 직업을 제공했고 그들 중 일부는 사만타 라주와 만달리카의 지위를 얻었다.[1]

5. 2. 계급별 특징

현장은 동찰루키아 왕국 백성들이 폭력적인 성격을 지녔고, 어두운 피부색을 가졌으며, 예술을 좋아했다고 언급했다. 동찰루키아 사회는 세습적인 카스트 제도에 기반을 두고 있었으며, 심지어 카스트를 부정했던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도 카스트를 채택했다. 전통적인 네 카스트 이외에도 보야와 사바라 같은 소수 민족 공동체도 존재했다.[1]

브라만들은 사회에서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들은 베다샤스트라에 능숙했고 토지와 돈을 선물로 받았다. 평의원, 장관, 공무원과 같은 수익성이 좋은 직책을 맡았으며, 심지어 군대에 들어가 높은 지휘권의 자리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크샤트리야들은 지배층이었고, 그들의 음모와 호전성이 두 세기 동안의 내전을 야기했다. 코마티(바이샤)들은 번창하는 무역 공동체였다. 페누곤다(서부 고다바리)에 본부를 두고 17개의 다른 중심지에 지부를 둔 강력한 길드(나카람)로 조직되었으며, 정부에 공동 업무 대신(사마야만트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드라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구성했고 그들 중 몇몇 하위 카스트들이 있었다. 군대는 그들 중 대부분에게 직업을 제공했고 그들 중 일부는 사만타 라주와 만달리카의 지위를 얻었다.[1]

6. 종교

동찰루키아 왕조 시대에는 힌두교가 주류 종교였으며, 시바파비슈누파보다 더 우세했다. 사타바하나 시대에 비해 불교는 쇠퇴하였으나, 자이나교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숭앙받았다.[1][2]

6. 1. 힌두교의 번성

동찰루키아 왕국의 주류 종교는 힌두교였으며, 비슈누파보다 시바파가 더 우세했다. 체브롤루에 있는 마하세나 사원은 매년 자트라로 유명해졌는데, 자트라는 매년 신의 우상인 체브롤루에서 비자야와다까지 이어지는 행렬을 포함한다.[1] 일부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파라마 마헤스와라(황제)라고 선언했다. 불교 종교 중심지들은 결국 시바 순례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비자야디티야 2세, 유드다말라 1세, 비자야디티야 3세 및 비마 1세와 같은 동부 찰루키아 통치자들은 많은 사원들의 건설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무용수와 음악가와 같은 사원 설립들은 이 시기에 사원들이 종교적인 숭배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의 육성지였음을 보여준다.[2]

사타바하나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불교는 쇠퇴했다.[1] 승원들은 사실상 버려졌다. 스투파들에 있는 사리들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소수는 남아 있었을 것이고, 현장은 3천 명이 넘는 승려들이 살고 있는 대략 20개 이상의 불교 승원들을 주목했다.[2]

자이나교는 불교와 달리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숭앙되었다.[1] 이는 안드라 전역의 폐허가 된 마을에 있는 몇몇 버려진 이미지들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문들은 또한 자이나교 사원들의 건설과 군주들과 백성들로부터의 그들의 지원을 위한 땅의 교부금들을 기록하고 있다.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 비슈누바르다나 3세, 암마 2세와 같은 통치자들은 자이나교를 숭앙했다. 비말라디티야는 심지어 마하비라 교리의 명백한 추종자가 되었다. 비자야와다, 제누파두, 페누곤다(서부 고다바리), 무누고두가 이 시기의 유명한 자이나교 중심지들이었다.[2]

6. 2. 불교와 자이나교

동찰루키아 왕국에서 힌두교는 주류 종교였으며, 비슈누파보다 시바파가 더 우세했다. 체브롤루에 있는 마하세나 사원은 매년 자트라로 유명했는데, 자트라는 매년 신의 우상인 체브롤루에서 비자야와다까지 이어지는 행렬을 포함한다.[1] 일부 통치자들은 스스로를 파라마 마헤스와라(황제)라고 선언했다. 불교 종교 중심지들은 결국 시바 순례지로서 큰 명성을 얻었다. 비자야디티야 2세, 유드다말라 1세, 비자야디티야 3세, 비마 1세와 같은 동부 찰루키아 통치자들은 많은 사원들의 건설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무용수와 음악가와 같은 사원 설립들은 이 시기에 사원들이 종교적인 숭배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 육성지였음을 보여준다.[2]

사타바하나 시대에 지배적이었던 불교는 쇠퇴했다.[1] 승원들은 사실상 버려졌다. 스투파들에 있는 사리들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소수는 남아 있었을 것이고, 현장은 3천 명이 넘는 승려들이 살고 있는 대략 20개 이상의 불교 승원들을 주목했다.[2]

자이나교는 불교와 달리 계속해서 사람들 사이에서 숭앙되었다.[1] 이는 안드라 전역의 폐허가 된 마을에 있는 몇몇 버려진 이미지들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비문들은 또한 자이나교 사원들의 건설과 군주들과 백성들로부터의 그들의 지원을 위한 땅의 교부금들을 기록하고 있다.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 비슈누바르다나 3세, 암마 2세와 같은 통치자들은 자이나교를 숭앙했다. 비말라디티야는 심지어 마하비라 교리의 명백한 추종자가 되었다. 비자야와다, 제누파두, 페누곤다(서부 고다바리), 무누고두가 이 시기의 유명한 자이나교 중심지들이었다.[2]

7. 문화



동찰루키아 왕조 시대에는 종교, 문학,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화가 발전했다. 특히, 이 시기에 텔루구 문학이 크게 발전했다.

동찰루키아 왕들은 왕국에 널리 퍼진 시바파의 영향으로 대규모 사원 건설에 힘썼다. 비자야디티야 2세는 108개의 사원을 건설했고, 윳다말라 1세는 비자야와다에 카르티케야 사원을 건립했다. 비마 1세는 드라크샤라마와 찰루키아 비마바람(사말코트)에 사원을 세웠으며, 라자라자 나렌드라는 칼리딘디(서고다바리)에 세 개의 기념 사원을 건설했다. 동찰루키아 왕조는 팔라바와 찰루키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건축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판차라마 사원(특히 드라크샤라마 사원)과 비카볼루 사원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비카볼루의 골링게스바라 사원에는 아르다나리스바라, 시바, 비슈누, 아그니, 차문디, 수리야 등 다양한 신들의 조각상이 있다.

7세기에는 동찰루키아가 건설한 암바푸람 석굴 사원이 있는데, 암바푸람과 아다비네칼람 구릉에 5개의 자이나교 석굴들이 만들어졌다.[10][11]

7. 1. 텔루구 문학의 발전

이 시기에 초기 텔루구 문학이 정점에 이르렀다. 자야심하 1세의 비파를라 비문과 망기 유바라자의 락슈미푸람 비문은 서기 7세기에 발견된 동찰루키아 최초의 텔루구어 비문들이다.[8]

초기 동찰루키아의 구리 판 보조금은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되었지만 알라단카람 판과 같은 몇몇 헌장은 부분적으로 산스크리트어로, 부분적으로 텔루구어로 작성되었다.[8]

텔루구어 시는 9세기 후반 비자야디티야 3세의 육군 참모총장 판다랑가의 아단키, 칸두쿠르, 다르마바람 비문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11세기 이전의 문학 작품들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난나야는 11세기 중반 라자 나렌드라의 시인 겸 변호사였다. 박식한 학자였던 그는 베다, 샤스트라스, 고대 서사시에 정통했고 마하바라타텔루구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8개 국어에 능했던 나라야나 바타는 그의 노력을 도왔다. 비록 미완성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텔루구어 문학의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7. 2. 칸나다어와 텔루구어 문학의 교류

초기 텔루구 문학은 이 시기에 정점에 이르렀다. 자야심하 1세의 비파를라 비문과 망기 유바라자의 락슈미푸람 비문은 서기 7세기에 발견된 동찰루키아 최초의 텔루구어 비문들이다.[8] 초기 동찰루키아의 구리 판 보조금은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되었지만 알라단카람 판과 같은 몇 가지 헌장은 부분적으로 산스크리트어로, 부분적으로 텔루구어로 작성되었다.[8]

텔루구어 시는 9세기 후반 비자야디티야 3세의 육군 참모총장 판다랑가의 아단키, 칸두쿠르, 다르마바람 비문에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11세기 이전의 문학 작품들은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난나야는 11세기 중반 라자 나렌드라의 시인 겸 변호사였다. 박식한 학자였던 그는 베다, 샤스트라스, 고대 서사시에 정통했고 마하바라타텔루구어로 번역하는 일에 착수했다. 8개 국어에 능했던 나라야나 바타는 그의 노력을 도왔다. 비록 미완성되었지만, 그의 작품은 텔루구어 문학의 걸작으로 찬사를 받고 있다.

동찰루키아 왕조의 창시자인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는 찰루키아 왕인 풀라케신 2세의 형제였다. 그러므로 찰루키아인들은 카르나타카와 안드라 국가들을 모두 통치했고 텔루구어도 후원했다. 이것은 칸나다 문학과의 밀접한 관련성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시대의 많은 텔루구어 작가들은 칸나다 난나야-바타의 바라타에 칸나다 작품들의 고유한 1박자인 아크카라를 포함한다. 같은 1박자는 유다말라의 베즈와다 비문에서도 발견된다. 또 다른 비문은 난나야-바타의 바라타 구성을 도왔던 나라야나-바타가 칸나다 시인이었고 그의 기여로 1053년 라자라자 나렌드라에게 마을을 하사받았다고 주목한다. 칸나다 시인 아디카비 팜파와 나가바르마 1세도 벵기 출신의 가문 출신이다.[9]

7. 3. 건축

왕국에 널리 퍼진 시바파 관습 때문에, 동찰루키아 왕들은 대규모로 사원들을 건설했다. 비자야디티야 2세는 108개의 사원들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다. 윳다말라 1세는 비자야와다에 카르티케야 사원을 세웠다. 비마 1세는 유명한 드라크샤라마와 찰루키아 비마바람(사말코트) 사원들을 건설했다. 라자라자 나렌드라는 칼리딘디(서고다바리)에 세 개의 기념 사원들을 세웠다. 팔라바와 찰루키아 전통 이후, 동부의 찰루키아인들은 판차라마 사원(특히 드라크샤라마 사원)과 비카볼루 사원들에서 볼 수 있는 그들만의 독립적인 건축 양식들을 발전시켰다. 비카볼루에 있는 골링게스바라 사원은 아르다나리스바라, 시바, 비슈누, 아그니, 차문디, 수리야와 같은 풍부하게 조각된 신들의 조각들을 포함한다.[10][11]

드라크샤라의 비메스바라 사원


암바푸람 석굴 사원은 7세기 동찰루키아가 건설한 자이나교 석굴 사원으로, 서기 7-8세기 동안 암바푸람과 아다비네칼람 구릉에 총 5개의 자이나교 석굴들이 건설되었다.[10][11]

8. 역대 군주

이름재위 기간
쿠브자 비슈누바르다나 1세624년 ~ 641년
자야심하 1세641년 ~ 673년
인드라 바타라카673년 (7일)
비슈누바르다나 2세673년 ~ 682년
망기 유바라자682년 ~ 706년
자야심하 2세706년 ~ 718년
코킬리718년 ~ 719년
비슈누바르다나 3세719년 ~ 755년
비자야디티야 1세 바타라카755년 ~ 772년
비슈누바르다나 4세772년 ~ 808년
비자야디티야 2세808년 ~ 847년
칼리 비슈누바르다나 5세847년 ~ 849년
구나가 비자야디티야 3세와 그의 두 형제 : 유바라자 비크라마디티야 1세 및 윳다말라 1세849년 ~ 892년
비마 1세 드로나르주나892년 ~ 921년
비자야디티야 4세 콜라비간다921년 (6개월)
암마 1세 비슈누바르다나 6세921년 ~ 927년
비자야디티야 5세 베타927년 (15일)
타다파927년 (1개월)
비크라마디티야 2세927년 ~ 928년 (11개월)
비마 2세928년 ~ 929년 (8개월)
윳다말라 2세929년 ~ 935년
비마 3세 비슈누바르다나 7세935년 ~ 947년
암마 2세 비자야디티야 6세947년 ~ 970년
다나르나바970년 ~ 973년
자타 초다 비마973년 ~ 999년
샤크티바르만 1세 찰루키아칸드라999년 ~ 1011년
비말라디티야1011년 ~ 1018년
라자라자 나렌드라 1세 비슈누바르다나 8세1018년 ~ 1061년
샤크티바르만 2세1061년 ~ 1063년
비자야디티야 7세1063년 ~ 1068년, 1072년 ~ 1075년
라자라자 2세1075년 ~ 1079년
비라촐라 비슈누바르다나 9세1079년 ~ 1102년


참조

[1] 서적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https://books.google[...] New Age International 1999
[2] 서적 South Indian Coins https://books.google[...] Asian Educational Services 1991
[3] 서적 Epigraphia Indica https://books.google[...] Manager of Publications 1987
[4] 서적 Sculptural Heritage of Andhradesa https://books.google[...] Booklinks Corporation 1975
[5] 서적 History and culture of the Andhras https://archive.org/[...] Komarraju Venkata Lakshmana Rau Vijnana Sarvaswa Sakha, Telugu University 1995
[6] 서적 Rashtrakutas And Their Times https://archive.org/[...] Digital Library of India
[7] 서적 New themes in Indian history: art, politics, gender, environment, and culture Black & White 2007
[8] 저널 SIGNIFICANCE OF THE EASTERN CHALUKYAN INSCRIPTIONS http://shodhganga.in[...] 2019-04-00
[9] 서적 History of Kannada Literature: Readership Lectures https://archive.org/[...] Asian Educational Services 2016-09-13
[10] 뉴스 Ancient Jain temple cries for attention https://www.thehindu[...] The Hindu 2021-07-16
[11] 웹인용 Jain sculpture of Mahavira at Vijayawada http://www.bl.uk/onl[...] British Library 202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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