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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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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차비족은 고대 인도의 인도아리아계 부족으로, 곰을 뜻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갠지스 평원 동부에 위치했으며, 비데하 왕국을 정복하고 바이샬리를 수도로 삼아 가나상가(귀족 과두정치 공화국) 형태의 리차비 공화국을 건설했다. 밧지 연맹의 주도 세력으로서 정치적,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마가다국과의 갈등 끝에 멸망했다. 이후 굽타 제국과 혼인 동맹을 맺는 등 명맥을 유지했으며, 리차비 공화국은 7,707명의 라자로 구성된 의회, 가나무키야(수장), 평의회 등을 통해 운영되었다. 리차비 사회는 계급 사회였으며,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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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차비족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현지 이름리차비 공화국
지위밧지 연맹의 맹주국
수도바이샬리
위치비하르
데모님리차비인
민족인도아리아인
통용어베다 산스크리트어
프라크리트어
종교자이나교, 불교, 브라만교
정치 체제공화제(가나상가)
지도자
지도자 칭호가나무키야
지도자 이름체타카
역사
건국기원전 6세기
멸망기원전 468년
이전 국가비데하
이후 국가마가다
기타
프라크리트어𑀮𑀺𑀘𑁆𑀙𑀯𑀺
산스크리트어ঋक्षवी (리크사비)
지도
기원전 5세기 리차비족과 다른 가나상가들.
기원전 5세기 리차비족과 다른 가나상가들

2. 명칭

부족명 리차비(𑀮𑀺𑀘𑁆𑀙𑀯𑀺|리차비pra)는 "곰"을 의미하는 단어 '리차'(liccha)의 마가다 프라크리트어 파생어이다. 이 이름은 리치비(Licchivi), 레차비(Lecchavi), 리차이(Licchaī)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리차비라는 이름의 산스크리트어 형태는 곰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단어 '리크샤'(ऋक्ष|리크샤sa)에서 유래한 '리크샤비'(ऋक्षवी|리크샤비sa)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산스크리트어 형태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았고,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 모두 마가다 프라크리트어 형태인 '리차비'를 사용했다. 곰의 이름에서 유래한 부족명이라는 점에서 토템 신앙과 관련된 의미를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

3. 역사

리차비족의 수도인 바이샬리의 아난다 스투파.


석가모니의 사리를 안치한 스투파는 리차비족에 의해 바이샬리에 세워졌다.


리차비족은 대마가다 문화권 동부 갠지스 평원에 거주했던 인도아리아계 부족이다.[2][3][4] 이들의 영토는 북쪽으로 히말라야산맥, 동쪽으로 마하나디강, 남쪽으로 갠지스강, 서쪽으로 사다니라강과 접했으며, 갠지스강은 남쪽의 마가다 왕국과의 경계였다.

리차비족은 비데하 왕국의 영토를 정복하고 수도 미틸라를 일시적으로 점령하며, 약화된 비데하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수립했다. 이후 남쪽의 마가다 세력이 부상하자, 정치 중심지를 바이샬리로 옮겨 수도이자 본거지로 삼았다. 바이샬리를 중심으로 리차비족은 가나상가(귀족 과두 공화정) 형태의 공화국을 조직하고 옛 비데하 왕국 영토 내에서 주도적인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주변 부족들과 함께 밧지 연맹을 결성하고 이끌었다.

기원전 6세기, 리차비 공화국의 가나무키야(공화국 수장)는 체타카였으며, 그는 밧지 연맹 전체의 수장이기도 했다. 체타카의 여동생 트리샬라가 나야 공화국의 가나무키야 싯다르타와 결혼하여 자이나교의 제24대 티르탕카라마하비라를 낳았다. 체타카는 조카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이나교를 수용했고, 수도 바이샬리를 자이나교의 중요 거점으로 만들었다. 또한 여러 왕가와의 혼인 동맹을 통해 리차비족의 영향력을 넓혔다.

'''체타카의 혼인 동맹'''
결혼 상대소속 국가/부족
프라바바티우다야나 왕신두-사우비라
파드마바티다디바하나 왕앙가
므리가바티사타니카 왕밧사 (아들: 우다야나)
시바프라디요타아반티
지예스타난디바르다나나야족 (쿤다가마, 마하비라의 형)
셀라나빔비사라마가다



리차비족은 말라족과 함께 카시-코살라 공화국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며, 두 말라 공화국은 리차비족이 이끄는 밧지 연맹에 가입했다. 코살라 왕국과도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때때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리차비족, 말라족, 샤카족 등은 그의 유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나, 리차비족에 종속되었던 비데하족과 나야족은 그러지 못했다. 이는 당시 리차비족의 강력한 위상을 보여준다. 리차비족의 이후 역사는 밧지 연맹의 운영, 마가다 왕국과의 갈등 및 패배, 그리고 그 이후의 존속 과정으로 이어진다.

3. 1. 밧지 연맹

리차비족은 옛 비데하 왕국 영토 내에서 주도적인 세력이 된 후, 밧지 연맹을 결성하고 이끌었다.[2][3][4] 비데하 공화국은 밧지 연맹의 중요한 회원국이었으나, 외교권은 리차비족에게 있었고 국내 행정에 대해서만 제한된 자치권을 가졌다. 나야족 역시 연맹의 회원국이었으며, 밧지 평의회가 국방 및 외교 문제를 담당하는 대신 내부 정책에서는 자치권을 유지했다.

밧지 연맹의 평의회는 총 18석으로 구성되었으며, 리차비족이 그중 절반인 9석을 차지하여 연맹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데하족은 나머지 의석 중 일부를 차지했다. 기원전 6세기경 리차비 공화국의 가나무키야(공화국 수장)였던 체타카는 밧지 연맹 전체의 수장이기도 했다. 체타카의 여동생 트리샬라가 나야 공화국의 가나무키야 싯다르타와 결혼한 것은 나야족의 지리적, 정치적 중요성과 싯다르타의 밧지 평의회 참여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두 말라 공화국 또한 외부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리차비족이 주도하는 밧지 연맹에 가입했다. 이들은 연맹 내 다른 부족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때때로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다. 비데하족이나 나야족과 달리, 말라족은 밧지 연맹 내에서도 독자적인 주권을 유지했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석가모니 입멸 후 그의 유해에 대한 소유권 주장에서도 드러나는데, 리차비족과 말라족은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리차비족에 종속되어 독자적 주권이 없었던 비데하족과 나야족은 그렇지 못했다.

3. 2. 마가다국과의 갈등

리차비족과 남쪽 이웃인 마가다 왕국의 관계는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는 바이샬리 공주 바사비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차비족과 마가다 사이에는 때때로 갈등이 발생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의 사리를 얻기 위해 말라족의 수도 쿠시나가라에서 경쟁하는 일이 있었고, 리차비족이 갠지스강을 건너 마가다 영토를 침공한 사례도 있었다. 이후 마가다 왕 빔비사라에 대한 리차비족의 심각한 침해 행위가 발생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완전히 악화되었다.

빔비사라를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아들 아자타샤트루의 통치 아래에서도 리차비족과 마가다의 적대 관계는 계속되었다. 리차비족은 아자타샤트루의 이복동생이자 앙가의 총독이었던 베할라(Vehalla)가 아자타샤트루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지원했다. 베할라는 빔비사라와 또 다른 리차비족 아내인 셀라나(Cellanā, 체타카의 딸) 사이의 아들이었다. 빔비사라는 아자타샤트루의 반역 음모가 발각된 후 그에 대한 총애를 잃고 베할라를 후계자로 지명했었다. 리차비족은 아자타샤트루가 왕위를 찬탈하자 베할라를 마가다 왕위에 앉히려 했고, 베할라가 그들의 수도 바이샬리를 반란의 근거지로 삼도록 허용했다.

베할라의 반란이 실패하고 그가 밧지 연맹의 수도인 바이샬리로 도망가자, 아자타샤트루는 밧지 연맹과 여러 차례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또한, 갠지스강의 코지가마(Kojigāma)에 위치한 마가다-리차비 공동 국경 초소 문제도 긴장을 고조시켰다. 리차비족이 주도하는 밧지 연맹이 이곳의 모든 귀중품을 가져가고 마가다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자타샤트루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밧지 연맹을 파괴하기로 결심했다. 다른 이유로는, 야심찬 제국 건설자였던 아자타샤트루가 당시 밧지 연맹의 일부였던 옛 마하비데하 왕국 영토를 탐냈다는 점도 있다. 더불어 군주제인 마가다와 공화제인 밧지 연맹 사이의 정치 체제 차이도 근본적인 적대감의 원인이었다. 이는 고대 스파르타아테나이, 또는 고대 마케도니아필리포스 2세와 아테나이 및 테바이 공화국 간의 관계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결국 아자타샤트루는 기원전 484년 밧지 연맹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밧지 연맹의 회원국인 비데하족, 나야족, 말라족을 위협했다. 전쟁 전에 리차비족의 수장 체타카는 리차비족과 말라족의 라자(Rāja, 왕 또는 지도자)들과 전쟁 협의를 진행했다. 이에 비데하족, 나야족, 말라족은 밧지 연맹 편에 서서 마가다에 맞서 싸웠다. 밧지 연맹의 군사력이 강했기 때문에 아자타샤트루는 정면 대결만으로는 승리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외교술과 내부 분열을 유도하는 음모를 사용했다.

오랜 전쟁 끝에 아자타샤트루는 기원전 468년경 밧지 연맹을 물리치고, 연맹 부족들의 영토를 마가다 왕국에 합병했다. 말라족은 마가다 제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내정에 있어서는 제한적인 자치권을 유지했다. 리차비족의 지도자 체타카는 패배 후 우물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밧지 연맹이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리차비족 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이들은 마가다의 통치 아래에서도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유지했으며, 그 증거로 리차비족 평의회가 마하비라의 죽음을 기념하는 축제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다.

3. 3. 멸망 이후

리차비족 출신의 굽타 황후 쿠마라데비와 초대 황제 찬드라굽타 1세는 그의 아들 사무드라굽타(Samudragupta, 350–380)의 주화에 그려져 있다.


마가다에게 패배한 뒤에도 리차비족은 수백 년 동안 뚜렷한 정치적, 민족적 실체로 살아남았으며, 마우리아 제국이 해체된 뒤에는 다시 세력을 키웠다. 이 시기에 리차비족의 신성한 수조인 아비세카포카라니는 성벽으로 둘러싸였고, 그 규모도 이전보다 커졌다.

리차비족은 굽타 제국 초기, 리차비 공주 쿠마라데비가 찬드라굽타 1세와 결혼하면서 마지막으로 역사 기록에 중요하게 언급된다. 이는 아들 사무드라굽타의 주화 명문을 통해 확인되는데, 그는 비문에서 자신을 '리차비-다우히트라'(리차비족의 외손자)라고 칭했다.

그러나 리차비족의 한 분파가 네팔 지역에서 리차비 왕국을 세움으로써, 이 시기 이후에도 그 명맥을 이어갔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4. 정치

리차비 공화국은 가나상가로 조직되었는데, 이는 국가의 최종 권력과 절대적 권위가 인구의 많은 부분에 공유되는 부족 공화정이었다.

4. 1. 의회

리차비족의 통치 기구는 7,707명의 라자(선출되지 않은 구성원)로 이루어진 의회였다. 리차비족 전체 인구는 20만에서 30만 명으로 추정되는데, 이 중 라자들이 국가의 주권을 가진 리차비 공화국 의회를 구성했다. 라자들은 크샤트리야 계급이었으며, 이는 고대 그리스의 귀족정과 유사한 형태였다. 신체 장애가 있거나 심각한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경우가 아니라면, 라자들은 평생 그 지위를 유지하며 자동으로 의회 구성원 자격을 가졌다. 이들은 바이샬리 의회에서 완전한 정치적 권리를 누렸으며, 권력은 이들 라자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되어 다수결 원칙에 따라 행사되었다.

라자의 지위는 아들에게 세습되었다. 라자의 아들은 '리차비쿠마라'("리차비의 왕자")라 불렸고, '우파라자'("부왕")라는 직함을 가졌다. 아버지가 병이나 다른 이유로 의회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우파라자인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참석할 수 있었다. 공식적인 라자 임명식은 매년 바이샬리 의회 기간에 열렸는데, 전년도에 사망했거나 나이가 많아 직무 수행이 어려운 라자의 아들이 그 뒤를 이었다. 이 의식은 '아비세카-포카라니'라는 신성한 수조에서 진행되었으며, 라자로 임명될 크샤트리야 가문의 대표자들이 신성한 목욕을 하는 절차를 포함했다. 이 수조는 리차비 통치자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리차비쿠마라는 우파라자이기는 했지만, 아버지를 대신하거나 자신이 직접 라자로 임명되지 않는 한 의회에서 투표권은 없었다.

로마 공화국 초기 파트리키만이 정치 권력을 독점했던 것처럼, 리차비 공화국에서도 크샤트리야가 아닌 계층(브라만, 바이샤 등)은 기본적으로 정치적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뛰어난 인물에게는 정치적 권리가 부여되어 고위직에 임명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가다 출신 장관 바사카라는 바이샬리에서 판사가 되었고, 동료들의 질투로 비데하에서 망명한 칸다 장관은 리차비군의 세나파티(장군)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비데하 출신 사칼라 장관도 바이샬리로 이주하여 저명한 시민이 되었고 나야카(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사칼라의 딸 바사비는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와 결혼하기도 했다. 정치적 권리가 없는 일반 주민들은 불만이나 고충이 있을 경우 직접 의회나 평의회에 호소해야 했다.

리차비 의회는 입법, 행정, 사법 기능이 분리되지 않고 통합되어 있었다. 법적 사건을 재판하고,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가나무키야와 군 사령관인 세나파티를 선출하는 등 국가의 중요한 의사 결정을 담당했다. 이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불레, 로마의 정무관, 게르만족의 씽(Thing)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했다.

평상시 의회 전체 회의는 매년 봄 축제 기간에 한 번 열려 중요 안건을 다루었으며, 특별한 군사적, 사회적, 경제적 사안이 있을 때만 임시 회의가 소집되었다. 일상적인 행정 업무는 수도 바이샬리와 주요 도시에 위치한 '산타가라'(Santhāgāra|산타가라pi)라는 회의 장소에서 소규모 라자 그룹이 더 자주 모여 처리했다. 산타가라는 정치 기구일 뿐 아니라 초기 베다 시대의 사바(Sabha)처럼 종교적, 사회적 활동의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의회 운영을 위해 여러 관리가 선출되었는데, '아사나판냐파카'(Āsanapaññāpaka|아사나판냐파카pi, "의석의 규제자")는 의석 배정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의회 회의는 북소리로 소집되었다. 산타가라에 모인 라자들은 '살라카'(salākā|살라카pi)라는 나무 조각을 사용하여 투표했다. 투표 행위 자체는 '찬다'(chanda|찬다pi), 즉 "자유로운 선택"이라고 불렸다. 투표 관리를 위해 '살라카가하파카'(Salākāgāhāpaka|살라카가하파카pi, "나무 조각 수집가")라는 중요한 직책이 있었는데, 정직하고 공정하다고 알려진 인물이 선출되었다. 후보자는 그 직책을 수락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받아야 했고, 제안자는 의회의 승인을 구해야 했다. 후보 지지자는 침묵으로, 반대자는 발언으로 의사를 표시했으며, 다른 후보를 제안할 수도 있었다. 의사 진행에는 정족수가 필요했다.

정족수 확인은 '가나푸라카'(gaṇapūraka|가나푸라카pi)라는 관리가 담당했다. 그는 의원들에게 회의 개최를 알리고 참석 인원을 파악하여 정족수 충족 여부를 확인하는 역할을 했다. 가나푸라카는 자원하거나 평의회에 의해 임명되었다.

선거가 있을 때, 아사나판냐파카는 선거 진행을 선언하고 의원들은 후보를 추천하며 살라카를 분배받아 투표했다. 이때 가나푸라카는 참석자 수를 세어 정족수가 채워졌는지 확인했다.

4. 2. 가나무키야

가나무키야는 리차비 공화국의 최고 책임자인 최고 라자로서, 국가의 수장이자 최고 재판관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바이샬리 의회에서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일반적으로 10년에서 15년 사이로 제한되었다.

가나무키야는 총회에 속한 7,707명의 라자 중에서 선출되었다. 선출 과정은 아사나판냐파카가 선거 실시를 공표하면 의원들이 후보로 이름을 올리고, 살라카(투표패)가 배부된 후 가나푸라카가 참여자를 세어 정족수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가나무키야 선출의 주요 기준으로는 나이, 정치적 지혜, 인격, 전투에서의 용맹함, 의회에서의 웅변 능력, 그리고 시민들 사이에서의 인기도 등이 고려되었다.

선출된 가나무키야는 의회를 주재하며 공화국의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권력은 우파라자(부왕), 세나파티(총사령관), 반다가리카(재무관)와 분담되었다. 우파라자는 가나무키야처럼 임기가 정해져 있었으나, 세나파티는 종신직이었고, 반다가리카는 비교적 임기가 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3. 평의회

실질적으로 의회의 입법, 집행, 사법 기능은 상원과 유사한 작은 기관인 리차비 평의회가 수행했다. 평의회는 의회의 내부 기관으로, 리차비족의 8대 씨족이 의원 중에서 선출한 9명의 라자(가나무키야 1명, 아타쿨리카 8명)로 구성되었다. 아타쿨리카 선출 방식은 가나무키야와 유사했을 수 있지만, 각 씨족별로 후보를 추천하고 독립적으로 선거를 치렀을 가능성이 있다. 당선된 후보자들은 봄 축제 기간 동안 아비셰카-포카라니에서 전통 의식으로 목욕하고 기름 부음을 받아 봉헌되었다.

평의회는 리차비 공화국의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모였으며, 그 활동에 대해 의회에 책임을 져야 했다. 평의회는 공화국의 계획과 정책을 담당했고,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리차비 총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또한 공화국의 연례 총회 의제 준비, 우파라자(부왕) 봉헌, 기타 중요 문제 처리, 공석인 직위 충원 준비 등의 임무도 수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사법 기능은 8명의 아타쿨리카가 담당했으며, 가나무키야는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급 기관에서 유죄가 인정된 범죄자는 아타쿨리카의 재판을 거쳐 유죄 판결 시 세나파티(군 사령관)에게 넘겨졌다.

평상시에는 리차비 평의회가 의회의 긴급 회의 소집 없이도 공화국의 행정을 큰 어려움 없이 수행했다. 그러나 마가다와의 전쟁과 같은 비상 시기에는 평의회와 일반 의회가 더 자주 만났으며, 평의회는 의회와 자주 협의했다. 이는 포에니 전쟁이나 로마-그리스 전쟁 당시 로마 원로원의 권력과 위신이 증가한 것과 유사하게, 비상사태와 전쟁이 지속되면서 의회의 결정이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의회가 모든 정부 영역에서 최고의 권한을 가졌고, 평의회의 역할은 의회의 요구와 명령을 이행하는 것으로 축소되었다.

5. 사회

(내용 없음 -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아 해당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5. 1. 여성의 지위

리차비 공화국의 여성들은 바이샬리에서 시민권을 갖지 못했고, 주로 주부의 역할에 머물렀다. 여성들은 사회생활에 참여했지만, 정치 집회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

선출된 궁녀 암바팔리는 리차비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여성이었고, 평생 동안 리차비 공화국의 아내(나가라바두)로 선정되었다. 리차비족은 봄 축제 동안 암바팔리를 기렸다.

6. 군사

리차비족은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는 밧지 동맹의 군대이기도 했으며, 이를 통해 부상하던 마가다의 세력에 대항할 수 있었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군인들은 바이샬리에서 자신의 농장을 경작하거나 즐거워했다.

7. 종교

리차비족은 당대 주요 종교였던 자이나교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특히 자이나교의 발전과 확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기원전 6세기경 리차비 공화국과 밧지 연맹의 수장이었던 체타카자이나교의 제24대 티르탕카라마하비라의 외삼촌이었다. 마하비라는 리차비족과 혈연으로 얽힌 나야족 출신으로, 그의 어머니 트리샬라는 체타카의 여동생이었다. 체타카는 조카인 마하비라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자이나교를 수용했으며, 리차비족의 수도인 바이샬리자이나교의 중요한 중심지로 만들었다. 또한 체타카의 딸 중 한 명인 수지예스타는 자이나교 여승이 되기도 했다. 체타카는 여러 왕가와의 혼인 동맹을 통해 자이나교가 북부 남아시아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데 기여했다.

리차비족은 불교와도 관련이 깊었다. 석가모니가 사망한 후, 리차비족은 말라족, 샤카족 등과 함께 석가모니의 유해(사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이는 당시 리차비족이 불교 공동체 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참조

[1] 저널 Licchavi-Dauhitra https://www.jstor.or[...] 1972
[2] 저널 Cultural Remnants of the Indigenous Peoples in the Buddhist Scriptures https://www.research[...] 2022-06-04
[3] 서적 Bronkhorst, J. (2007). Greater Magadha, Studies in the culture of Early India, p. 6. Leiden, Boston, MA: Brill. http://dx.doi.org/10[...]
[4] 서적 A History of Ancient and Early Medieval India: From the Stone Age to the 12th Century Pearson Longma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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