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찰루키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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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찰루키아 왕조는 6세기의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와 혈통을 공유한다는 설이 있으며, 973년 타일라파 2세가 라슈트라쿠타를 격퇴하고 찰루키아 통치를 재건하면서 서부 데칸 지역을 지배했다. 이후 촐라 제국과의 경쟁, 왕위 계승 분쟁, 봉신들의 반란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1189년 세우나 왕조에 의해 멸망했다. 칸나다어를 주로 사용했으며, 건축, 문학, 사회,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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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찰루키아 왕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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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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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명 | 인도 |
현지 이름 | 서찰루키아 제국 |
존속 기간 | 973년 ~ 1189년 |
지위 | 제국 |
수도 | 칼야니 |
공용어 | 칸나다어 |
민족 | 칸나다인 |
종교 | 힌두교 |
정부 형태 | 군주제 |
위치 | 중부 인도 |
정치 | |
지도자 칭호 | 마하라자 |
초대 지도자 | 타일라파 2세(957년 ~ 997년) |
주요 지도자 | 비크라마디티야 6세(1076년 ~ 1126년) |
마지막 지도자 | 소메슈바라 4세(1184년 ~ 1189년) |
역사 | |
이전 | 라슈트라쿠타 |
이후 | 세우나 왕조 |
2. 역사
서찰루키아 왕조의 역사는 왕들이 남긴 수많은 칸나다어 비문[8][9]과 란나의 칸나다어 작품 가다 유다(982), 빌하나의 산스크리트어 작품 비크라만카데바 카리탐(1120) 등 당대 문학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10][11]
서찰루키아 왕조는 10세기 중반 라슈트라쿠타 왕조의 봉신이었던 타일라파 2세가 독립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서부 데칸 지역의 강자로 성장하여 촐라 제국과 패권을 다투었으며, 12세기 후반까지 약 200여 년간 존속했다.
11세기에는 벵기 지역을 둘러싸고 촐라 제국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라자라자 1세와 라젠드라 1세 시대에 강성해진 촐라 제국은 서찰루키아의 영토를 위협했고, 서찰루키아는 촐라의 침략을 막고 벵기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크라마디티야 6세 통치 시기(1076년 ~ 1126년)는 서찰루키아 왕조의 전성기였다. 그는 촐라 제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고, 북쪽과 남쪽의 여러 세력을 복속시켜 넓은 영토를 다스렸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겨, 그의 통치 기간은 "찰루키아 비크라마 시대"라고 불린다.
그러나 비크라마디티야 6세 사후, 서찰루키아 왕조는 점차 쇠퇴했다. 봉신들의 반란과 호이살라, 세우나 왕조 등 새로운 세력의 등장으로 제국 규모는 축소되었다. 결국 1189년, 소메슈바라 4세가 세우나 왕조에 의해 축출되면서 서찰루키아 왕조는 멸망했다.
2. 1. 기원과 초기 역사
서찰루키아 왕조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초기 기록은 957년, 서찰루키아가 라슈트라쿠타의 봉신이었던 타일라파 2세의 통치 기간에 나타난다. 그는 현재 카르나타카 주 비자푸르 구 타르다바디를 다스렸다.[12][13]한 가지 이론은 서찰루키아 왕들이 6세기의 유명한 바다미 찰루키아 왕조와 같은 혈통에 속했다는 것이다.[14][15] 이는 서찰루키아 왕들이 초기 찰루키아 왕들이 사용하던 칭호와 이름을 사용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그러나 다른 증거들은 그들이 초기 찰루키아와는 무관한 별개의 혈통이었음을 시사한다.[16]
967년경, 바나바시의 찰루키아 왕 차티가데바가 지역 카담바 족장들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 반란은 성공하지 못했다.[17] 하지만 이 사건은 그의 후계자인 타일라파 2세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몇 년 후, 타일라파 2세는 973년 중앙 인도의 파라마라 왕조가 라슈트라쿠타의 수도 마니야케타를 침입하여 혼란을 일으킨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18][19] 그는 찰루키아 통치를 다시 확립하고 라슈트라쿠타를 격퇴했다. 타일라파 2세는 수도를 만야케타로 옮기고 파라마라와 다른 경쟁자들을 정복하여 나르마다 강과 퉁가바드라 강 사이의 땅을 지배함으로써 서부 데칸의 찰루키아 제국을 공고히 했다.[20] 그러나 일부 비문에 따르면 마이소르 영토의 발라감베는 1042년 소메슈바라 1세가 통치할 때까지 권력의 중심지였을 수도 있다.[21]
2. 2. 촐라 제국과의 경쟁
11세기, 서찰루키아 왕조와 촐라 제국은 벵기(오늘날 안드라프라데시 주 해안) 지역의 비옥한 강 계곡들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이 지역은 크리슈나 강과 고다바리 강 사이에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라자라자 1세와 그의 아들 라젠드라 1세 시대에 촐라 제국은 강성해졌고, 서강가 왕조를 복속시켜 카르나타카 남부의 찰루키아 영토 일부를 차지했다.[22]벵기의 동찰루키아는 서찰루키아의 친척이었지만, 촐라 왕조와의 혼인을 통해 촐라의 영향력이 커졌다. 이는 서찰루키아에게 불리했기 때문에, 서찰루키아는 벵기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사티야슈라야 왕은 벵기에 대한 통제력이 약했지만, 콘칸과 구자라트 등 북쪽 영토를 지키고 촐라의 침략을 막아냈다. 1007년, 촐라 황태자 라젠드라 1세는 서찰루키아를 침략하여 비자푸르 지역의 도누르에서 사티야슈라야 왕과 전투를 벌였다. 다르와드의 사티아스라야 비문에 따르면, 90만 명의 촐라 군대가 서찰루키아 제국을 침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22]
사티야슈라야의 후계자 자야심하 2세는 1020년경 벵기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촐라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22] 1024년, 자야심하 2세는 파라마라 왕조와 야다바 왕조의 반란을 진압했다.[22]
자야심하의 아들 소메슈바라 1세는 1042년경 수도를 칼야니로 옮겼다.[24][25] 촐라와의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벵기 왕위를 둘러싼 분쟁 속에서도 중요한 영토를 잃지는 않았다.[26][27] 1066년, 소메슈바라 1세의 아들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촐라 제국을 침공하여 수도 강가이콘다 촐라푸람까지 진격했으나 촐라에게 격퇴당했다.[28][29][30] 1068년, 소메슈바라 1세와 촐라 황제 비라라젠드라 촐라 사이의 비자야와다 전투에서 소메슈바라 1세와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패배하고 벵기를 빼앗겼다. 이후 소메슈바라 1세는 퉁가바드라 강에서 사망했다.[31][32][33]
소메슈바라 1세의 뒤를 이어 장남 소메슈바라 2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동생 비크라마디티야 6세와 갈등을 빚었다.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촐라 황제 비라라젠드라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했다. 1075년,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소메슈바라 2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1075-76년, 쿨로퉁가 1세의 촐라 통치 기간에 비크라마디티야 군대가 촐라 영토를 침입하면서 전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낭길리 전투에서 촐라 군대가 찰루키아 군대를 격파했다.[37][38]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1093년과 1118년에 촐라를 격파하고 벵기를 점령하여 동부 데칸에서 촐라의 영향력을 줄였다.[42][43][44][45]
2. 3.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통치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서찰루키아 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다. 그의 50년 통치는 카르나타카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찰루키아 비크라마 시대"라고 불릴 정도였다.[39][40][41]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즉위 전부터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1068년 이전에 왕자 신분으로 벵골을 침략하여 팔라 제국을 약화시켰고, 이는 훗날 벵골 지역에 세나 왕조와 바르만 왕조, 비하르 지역에 나야나데바 왕조와 같은 카르나타 왕조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34][35][36]
1068년 아버지 소메슈바라 1세가 사망하고 형 소메슈바라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형과 갈등을 겪었다. 그는 촐라 제국의 비라라젠드라 촐라와 동맹을 맺고, 그의 딸과 결혼하여 촐라와의 오랜 불화를 종식시켰다.[37] 이후 호이살라, 세우나, 항갈의 카담바 왕조 등 찰루키아 세력의 충성심을 얻어 1075년 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37]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촐라 제국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며 벵기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1093년과 1118년의 벵기 전투에서 승리하여 동부 데칸에서 촐라의 영향력을 줄이고, 카베리 강에서 나르마다 강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트리부바나말라"(삼계의 군주)라는 칭호를 얻었다.[42][43][44][45] 그는 또한 고아의 카담바 자야케시 2세, 실하라 보자, 야다바 왕 등 북쪽의 강력한 세력과 호이살라 비슈누바르다나 등 남쪽 세력을 성공적으로 통제했다.[42]
비크라마디티야 6세는 군사적 업적뿐만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학자들과 종교 센터를 지원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문학이 번성하여 칸나다어 및 산스크리트어 학자들이 그의 궁정을 빛냈다.[50][51] 카슈미르 출신 시인 빌하나는 그의 유명한 작품 "비크람만카데바 차리타"에서 비크라마디티야 6세를 찬미했다.[48][49]
2. 4. 쇠퇴와 멸망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통치는 서찰루키아 왕조의 전성기였지만, 그의 사후 왕조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1126년 비크라마디티야 6세가 사망한 후 수십 년 동안, 봉신들은 자치권과 영토 지휘권을 확장하며 제국의 규모는 꾸준히 감소했다.[51][53]1150년에서 1200년 사이, 찰루키아와 봉신들 사이에 많은 전투가 벌어졌다. 자가디카말라 2세와 타일라파 3세 시기에 벵기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고,[53] 타일라파 3세는 1149년 카카티야 왕조의 프롤라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나기도 했다.[53] 이 사건으로 서찰루키아의 위신은 크게 실추되었다. 호이살라와 세우나 왕조 역시 제국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호이살라의 나라심하 1세는 타일라파 3세를 패배시키고 죽였지만, 남칼라추리를 이기지는 못했다.[53]
1157년, 비할라 2세가 통치하던 남칼라추리 왕조가 칼랴니를 점령하고 20년 동안 통치하면서 찰루키아는 수도를 아니게리로 옮겨야 했다.[53][54] 칼라추리는 인도 중부에서 데칸 남부로 이주해온 사람들로, 스스로를 칼란자라푸라바라디사바라라고 불렀다.[55] 비할라 2세는 "마하부자발라 차크라바르티"(어깨와 팔이 튼튼한 황제)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찰루키아의 봉신이 아님을 선언했다.[57]
1183년, 소메슈바라 4세가 칼랴니를 탈환하며 제국을 되찾으려 했으나, 칼라추리 왕 산카마가 찰루키아 장군 나라심하에게 살해당하면서 실패했다.[54][56][58][59] 이 시기 호이살라의 비라 발랄라 2세는 찰루키아의 소메슈바라 4세와 세우나 왕조의 빌라마 5세를 물리쳤지만, 칼라추리를 상대로는 성공하지 못했다.[60] 세우나 왕조 역시 제국 확장을 시도했으나, 1183년 찰루키아 장군 바르마에게 패배했다가 1189년에 복수했다.[61]
결국 소메슈바라 4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1189년 세우나 통치자들에 의해 바나바시로 망명하면서 서찰루키아 왕조는 멸망했다. 이후 세우나 왕조와 호이살라는 크리슈나강 지역을 놓고 계속 전쟁을 벌였다.[62] 서부 데칸의 찰루키아와 타밀라캄의 촐라 제국이 멸망하고, 그 폐허 위에 봉신 왕국들이 세워지면서 데칸 지역은 100년 이상 혼란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63]
3. 행정
서찰루키아 왕권은 세습적이었으며, 왕에게 남성 후계자가 없는 경우 왕의 동생에게 왕위가 넘어갔다. 중앙 정부에는 마하프라다나(재상), 산디비그라히카, 다르마디카리(대법원장) 등의 주요 관직 외에도, 타데야단다야카(예비군 사령관)와 같이 특화된 기능을 가진 직책도 있었다. 모든 대신 직책에는 단다나야카(사령관)의 역할이 포함되어, 내각 구성원들이 행정 및 군사 훈련을 받았음을 보여주었다.[66]
왕국은 여러 주로 나뉘었고, 각 주의 이름에는 그 주가 관할하는 마을의 수가 포함되었다. 큰 지방은 만달라, 그 아래에는 나두, 캄파나(마을 묶음), 바다(마을) 순으로 더 작은 단위로 나뉘었다. 왕실 여성들도 나두와 캄파나를 통치했다.
락쿤디와 수디는 서찰루키아의 주요 조폐국이었다.
3. 1. 지방 통치
서찰루키아 왕조의 행정은 고도로 분권화되어 있었으며, 왕족과 알루파, 호이살라, 카카티야, 세우나, 남칼라추리 등 여러 부족 봉신들이 자치 지방을 다스렸다. 이들은 찰루키아 황제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며 충성을 맹세했다.[65]왕국은 여러 주로 나뉘었는데, 각 주의 이름에는 그 주가 관할하는 마을의 수가 포함되었다. 예를 들어 바나바시-12000은 12,000개의 마을을, 놀람바바디-32000은 32,000개의 마을을, 강가바디-96000은 96,000개의 마을을 관할했다. 큰 지방은 만달라라고 불렸고, 그 아래에는 나두, 캄파나(마을 묶음), 바다(마을) 순으로 더 작은 단위로 나뉘었다.
만달라는 왕실 구성원, 신뢰할 수 있는 봉신, 또는 고위 관료가 다스렸다. 타일라파 2세는 라슈트라쿠타 통치 기간 동안 타르다바디 지방을 책임지기도 했다. 만달라의 수장들은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이동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밤마나야라는 관리는 소메슈바라 3세 통치하에 바나바시-12000을 통치하다가 나중에 할라시게-12000으로 옮겨졌다. 왕실 여성들도 나두와 캄파나를 통치했다. 육군 지휘관들에게는 마하만달레슈와라라는 칭호가 주어졌고, 나두를 이끄는 사람들에게는 나두구벤다라는 칭호가 주어졌다.[67]
3. 2. 관직
중앙 정부에는 마하프라다나(재상), 산디비그라히카, 다르마디카리(대법원장) 등의 주요 관직이 있었다.[66] 타데야단다야카(예비군 사령관)와 같이 특화된 기능을 가진 직책도 있었지만, 모든 대신 직책에는 단다나야카(사령관)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어 내각 구성원들이 일반적인 행정 기술뿐만 아니라 육군 사령관으로서도 훈련받았음을 보여주었다.[66]3. 3. 화폐
서찰루키아에서는 칸나다 문자와 나가리 문자가 새겨진 펀치 마크 금화를 주조했는데,[68] 이는 뒷면에 여러 가지 다양한 펀치 마크가 새겨진 크고 얇은 금화였다. 이들은 보통 양식화된 사자, 칸나다어로 스리,[69] 창, 왕의 칭호, 연꽃 등 여러 가지 상징물을 가지고 다녔다. 자야심하 2세는 '스리 자야'를, 소메시바라 1세는 '트렐로카 말라'를, 소메슈바라 2세는 '부바네카 말라'를, 락슈미데바는 '스리 라샤'를, 자가데카말라 2세는 '스리 자가데'를 명각으로 사용했다. 서찰루키아의 봉신이었던 알루파 왕조에서는 칸나다 문자와 나가리 문자로 '스리 판디아 다남자야'를 새겨 동전을 주조했다.[70] 락쿤디와 수디는 서찰루키아의 주요 조폐국이었다. 그들의 가장 무거운 금화는 96낟알의 가다야나카였고, 드람마는 65낟알, 칼란주는 48낟알, 카스는 15낟알, 만자디는 2.5낟알, 악캄은 1.25낟알, 파나는 9.6낟알이었다.[71]
4. 사회
서찰루키아 시대에는 비라시바파가 부상하여 기존 힌두교 카스트 제도에 도전했다.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경제적 지위와 교육 수준에 따라 달랐으며, 왕실과 부유한 가정의 여성은 더 많은 자유를 누렸다.[72]
브라만은 지식과 지역 정의를 제공하는 특권층이었고, 종교와 학문 관련 직업에 종사하며 왕과 귀족의 후원을 받았다. 이들은 중립적인 중재자로 지역 문제 해결에 참여하기도 했다.[76]
식습관은 종교에 따라 달랐는데, 브라만, 자이나교도, 불교도, 시바교도는 채식주의를 따랐지만, 다른 지역 사회에서는 다양한 고기를 섭취했다. 시장에서는 가축뿐만 아니라 자고새, 토끼, 야생조류, 멧돼지 등 이국적인 고기도 판매되었다.[77]
사람들은 레슬링 경기(쿠스티)를 보거나 닭싸움, 숫양 싸움과 같은 동물 싸움을 관람하거나 도박을 통해 실내에서 즐길 거리를 찾았다. 경마는 인기 있는 야외 오락이었다.[78] 축제와 박람회가 자주 열렸고, 곡예사, 무용수, 극작가 및 음악가들로 구성된 순회 공연단의 오락이 종종 제공되었다.[79]
학교와 병원은 사원 근처에 지어졌고, 시장은 사람들이 모여 지역 문제를 논의하고 숙고하는 야외 마을 회관 역할을 했다. 경건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주된 기능인 합창단은 사원의 비용으로 유지되었다. 젊은 남성들은 힌두교 마타, 자이나교 팔리, 불교 비하라 등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합창단원으로 노래하도록 훈련받았다.[80]
4. 1. 카스트 제도와 여성의 지위
비라시바파의 부상은 혁명적이었으며 왕실의 지원을 받던 기존 힌두교 카스트 제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72] 이 시기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주로 경제적 지위와 교육 수준에 따라 달랐는데, 왕실과 부유한 도시 가정의 여성은 비교적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찰루키아 왕비 찬달라 데비와 칼랴니의 칼라추리 왕비 소발라 데비가 춤과 음악에 능했다는 기록 등 여성들이 예술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0명의 바차나 여성 시인들의 작품에는 바크티 운동에 헌신한 12세기 비라시바파 신비주의자 아카 마하데비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72] 현대 기록에 따르면 일부 왕실 여성은 행정 및 군사 업무에 관여했으며, 아카데비 공주(자야심하 2세의 누이)는 반항적인 봉건 세력과 싸워 물리치기도 했다.[73][74] 비문은 사티(죽은 사람의 미망인이 남편의 장례식 장작더미에 몸을 던지는 관습)가 존재했지만 자발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75] 구원을 얻기 위한 의식적 죽음은 자이나교도들 사이에서 금식(살레카나)을 선호하는 반면, 다른 공동체의 사람들은 가시(슐라브라흐마)에 뛰어들거나 일식 때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선택했다.힌두교 카스트 제도에서 브라만은 지식과 지역 정의를 제공하는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이들은 무술로 성공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종교와 학문을 중심으로 한 직업에 종사했다. 브라만은 왕, 귀족, 부유한 귀족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학식을 갖춘 브라만에게 토지와 주택을 제공함으로써 특정 도시와 마을에 정착하도록 설득했다. 브라만 학자들은 부와 권력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으로 여겨졌고 그들의 지식은 지역 사회의 윤리적 행동과 규율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에 브라만 학자들의 이주는 왕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계산되었다. 또한 브라만은 중립적인 중재자(판차야트)로 활동하며 지역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76]
4. 2. 교육과 종교
비라시바파의 부상은 혁명적이었으며 왕실의 지원을 받던 기존 힌두 카스트 제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 시기에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주로 경제적 지위와 교육 수준에 따라 달라졌다. 왕실과 부유한 도시 가정의 여성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찰루키아 왕비 찬달라 데비와 칼랴니의 칼라추리 왕비 소발라 데비가 춤과 음악에 능했다는 기록 등 여성들이 예술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72] 30명의 바차나 여성 시인들의 작품에는 바크티 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잘 알려진 12세기 비라시바파 신비주의자 아카 마하데비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현대 기록에 따르면 일부 왕실 여성은 행정 및 군사 업무에 관여했으며, 아카데비 공주(자야심하 2세의 누이)는 반항적인 봉건 세력과 싸워 물리쳤다.[73][74]힌두교 카스트 제도에서 브라만은 지식과 지역 정의를 제공하는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브라만들은 무술로 성공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종교와 학문을 중심으로 한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왕, 귀족, 부유한 귀족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학식을 갖춘 브라만에게 토지와 주택을 제공함으로써 특정 도시와 마을에 정착하도록 설득했다. 브라만 학자들은 부와 권력과 무관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그들의 지식은 지역 사회의 윤리적 행동과 규율을 교육하고 가르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여겨졌기 때문에 브라만 학자들의 이주는 왕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 계산되었다. 또한 브라만은 중립적인 중재자(판차야트)로 활동하며 지역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76]
학교와 병원은 사원 근처에 지어졌다. 시장은 사람들이 모여 지역 문제를 논의하고 숙고하는 야외 마을 회관 역할을 했다. 경건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주된 기능인 합창단은 사원의 비용으로 유지되었다. 젊은 남성들은 힌두교 마타, 자이나교 팔리, 불교 비하라 등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합창단원으로 노래하도록 훈련받았다.[80] 이 기관들은 종교와 윤리에 대한 고급 교육을 제공했고 도서관(사라스티 반다라)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학습은 현지 언어와 산스크리트어로 전달되었다. 고등 교육 학교는 브라흐마푸리(또는 가티카 또는 아그라하라)라고 불렸다.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치는 일은 왕실의 후원을 받은 브라만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비문에는 가르치는 과목의 수가 4개에서 18개까지 다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1] 왕실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었던 네 가지 과목은 경제학(바르타), 정치학(단다니티), 베다(트라이), 철학(안빅시키)으로, 차나키야가 저술한 아르타샤스트라에 일찍이 언급되어 있는 과목들이다.

10세기 라슈트라쿠타 제국이 서찰루키아에게 몰락한 것은 강가바디의 촐라 왕조가 서강가 왕조를 패배시킨 것과 동시에 자이나교에 큰 타격을 입혔다. 찰루키아 지역의 비라시바파와 호이살라 지역의 비슈누파 힌두교의 성장은 자이나교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 감소와 맞물렸지만, 후계 왕국들은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태도를 이어갔다.[92] 호이살라 지역에 있는 두 곳의 자이나교 예배 장소인 슈라바나벨라골라와 캄바다할리는 계속해서 후원을 받았다. 남인도에서 불교의 쇠퇴는 8세기 아디 샹카라의 아바이타 철학의 확산과 함께 시작되었다.[93] 서찰루키아 통치 기간 동안 남아 있던 유일한 불교 예배 장소는 담발과 발리가비뿐이었다.[94] 당시의 문헌과 비문에는 종교적 갈등에 대한 언급이 없어 종교적 전환이 순조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라시바 신앙의 기원은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12세기 바사반나와의 연관을 통해 이 운동이 성장했다.[95][96] 바사반나와 다른 비라시바파 성자들은 카스트 제도 없는 신앙을 전파했다. 바사바나는 바차나(Vachanas, 일종의 시)에서 간결한 칸나다어로 대중에게 호소하며 "일은 예배다"(카야카베 카일라사)라는 시를 썼다. 링가야트(시바의 보편적 상징인 링가 숭배자)로도 알려진 비라시바교도들은 의식에 대한 믿음과 환생 이론 등 사회의 많은 기존 규범에 의문을 제기하고 과부의 재혼과 미혼 고령 여성의 결혼을 지지했다.[97] 스리랑감의 비슈누파 수도원의 수장인 라마누자차리야는 호이살라 지역으로 가서 신행의 길(박티 마가)을 설파했다. 그는 나중에 아디 샹카라의 아바이타 철학에 대한 비평인 바다라야나 브라흐마수트라에 대한 주석인 스리바샤야를 저술했다.[98]
4. 3. 일상생활
비라시바파의 부상은 혁명적이었으며 왕실의 지원을 받던 기존 힌두 카스트 제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 시기에 여성의 사회적 역할은 주로 경제적 지위와 교육 수준에 따라 달라졌다. 왕실과 부유한 도시 가정의 여성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찰루키아 왕비 찬달라 데비와 칼랴니의 칼라추리 왕비 소발라 데비가 춤과 음악에 능했다는 기록 등 여성들이 예술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30명의 바차나 여성 시인들의 작품에는 바크티 운동에 헌신한 것으로 잘 알려진 12세기 비라시바파 신비주의자 아카 마하데비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72]힌두교 카스트 제도에서 브라만은 지식과 지역 정의의 제공자로서 특권적인 지위를 누렸다. 브라만들은 무술로 성공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종교와 학문을 중심으로 한 직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왕, 귀족, 부유한 귀족의 후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학식을 갖춘 브라만에게 토지와 주택을 제공함으로써 특정 도시와 마을에 정착하도록 설득했다. 또한 브라만은 중립적인 중재자(판차야트)로 활동하며 지역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76]
식습관과 관련하여 브라만, 자이나교도, 불교도 및 시바교도들은 엄격한 채식주의자였지만, 다른 지역 사회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고기를 섭취하는 것이 유행했다. 시장 상인들은 염소, 양, 돼지, 닭과 같은 가축의 고기와 자고새, 토끼, 야생조류, 멧돼지 등 이국적인 고기를 판매했다.[77] 사람들은 레슬링 경기(쿠스티)에 참석하거나 닭싸움, 숫양 싸움과 같은 동물 싸움을 관람하거나 도박을 통해 실내에서 즐길 거리를 찾았다. 경마는 인기 있는 야외 오락이었다.[78] 이러한 여가 활동 외에도 축제와 박람회가 자주 열렸으며 곡예사, 무용수, 극작가 및 음악가들로 구성된 순회 공연단의 오락이 종종 제공되었다.[79]
학교와 병원은 기록에 언급되어 있으며 사원 근처에 지어졌다. 시장은 사람들이 모여 지역 문제를 논의하고 숙고하는 야외 마을 회관 역할을 했다. 경건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주된 기능인 합창단은 사원의 비용으로 유지되었다. 젊은 남성들은 힌두교 마타, 자이나교 팔리, 불교 비하라 등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합창단원으로 노래하도록 훈련받았다.[80]
5. 경제
서찰루키아 왕조 시대에는 상업 조직이 발달하여 11세기에는 기업 형태가 일반화되었다. 거의 모든 예술과 공예는 길드로 조직되었고, 작업은 기업 단위로 이루어졌다. 기록에는 예술가, 조각가, 장인 개인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호이살라 통치 지역에서는 조각가들이 작품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기도 했다.[86]
5. 1. 농업과 조세 제도
농업은 서찰루키아 왕조의 주요 수입원이었으며, 토지와 농산물에 대한 세금을 통해 재정을 충당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을에 거주하며 쌀, 콩, 목화(건조 지역), 사탕수수(강우량이 충분한 지역) 등을 재배했고, 아레카와 베텔은 주요 환금 작물이었다.[82] 소작농들이 부유한 지주에게 반란을 일으킨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농민들의 생활 조건은 비교적 안정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농민들은 불만이 있을 때, 통치자의 관할 구역 밖으로 대량 이주하여 노동력을 통한 수입을 감소시키는 방식으로 저항했다.[82]서찰루키아 정부는 토지세 외에도 광업, 임산물, 교통 시설 이용에 대한 통행료, 세관, 전문 면허, 사법 벌금 등 다양한 세금 및 수수료를 징수했다.[83] 기록에 따르면 말, 소금, 금, 직물, 향수, 후추, 벼, 향신료, 빈랑잎, 야자잎, 코코넛, 설탕 등 다양한 상품에 세금이 부과되었다.[83] 토지세는 토지의 질과 농산물의 종류를 평가하는 빈번한 조사를 바탕으로 부과되었으며, 습지, 마른 땅, 황무지, 검은 토양, 붉은 토양 등 토지의 종류에 따라 세율이 다르게 적용되었다.[84]
농촌 지역에서는 '가분다'(관료) 또는 '고우다'라고 불리는 주요 인물들이 세금 징수와 민병대 양성을 담당했다. 이들은 '프라하 가분다'(인민 가분다)와 '프라부 가분다'(가분다들의 영주)라는 두 계층으로 나뉘었으며, 국가의 지명을 받아 세금을 징수하고 민병대를 양성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통치자 앞에서 인민들을 대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들은 토지 거래, 관개 시설 정비, 마을 세금 징수, 마을 의회 업무 등과 관련된 기록에 등장한다.[85]
5. 2. 상업과 무역
서찰루키아 왕조 시대에는 상업과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상인들은 길드라는 강력한 조직을 구성하여 정치적 분쟁에 영향을 받지 않고 활동했다. 이들의 유일한 위협은 먼 곳으로 이동할 때 도적떼를 만나는 것이었다.[87]당시 존재했던 강력한 남인도 상인 길드로는 마니그라맘, 나가라타르, 안주반남 등이 있었다. 지역 길드는 나가람, 이웃 왕국의 상인들은 나나데시라고 불렸다. 그 중에서도 아이야볼레푸라(오늘날 아이홀)의 500 스바미(아인누루바르) 길드는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이 컸으며, 육지와 바다를 통해 광범위한 무역을 수행하여 제국의 대외 무역에 크게 기여했다.[87][88] 이들은 무역 의무(Vira Banjudharma)를 철저히 보호했으며, 황소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다.[88]
부유한 무역업자들은 수출입 세금을 납부하여 왕실 재정에 기여했다. 아이홀레 스바미의 칙령에 따르면, 체라, 판디아, 말레야(말레이시아), 마가다, 카우샬리, 사우라슈트라, 쿠룸바, 캄보자(캄보디아), 라타(구자라트), 파라사(페르시아), 네팔 등과 무역 관계를 맺었다.[89] 이들은 육로와 해로를 통해 귀중한 돌, 향신료, 향수, 장뇌 등을 거래했다. 특히 다이아몬드, 라피스 라줄리, 오닉스, 토파즈, 카벙클, 에메랄드 등 보석 사업이 번성했다. 카다멈, 사프란, 정향 등의 향신료와 백단, 베델리엄, 머스크, 사향, 장미 등의 향수도 주요 교역품이었다. 이러한 상품들은 대량으로 판매되거나 길거리에서 행상을 통해 거래되었다.[89]
서찰루키아 왕조는 남인도 서해안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10세기에는 중국, 동남아시아, 아바스 칼리파국과 광범위한 무역 관계를 맺었다. 12세기에는 중국 함대가 인도 항구를 드나들었다. 송나라로의 수출품에는 직물, 향신료, 약용 식물, 보석, 상아, 코뿔소 뿔, 흑단, 장뇌 등이 있었다. 이러한 상품들은 도파르와 아덴 등 서쪽 항구에도 도착했으며, 최종 목적지는 페르시아, 아라비아, 이집트였다.[90]
페르시아 만 동쪽 해안의 시라프는 번성한 무역 중심지였으며, 서찰루키아 제국의 상인들을 포함한 국제적인 상인들이 이곳을 찾았다. 시라프에서 인도 상인들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그들을 위해 별도의 식탁 접시가 마련될 정도였다.[91] 시라프는 알로에 나무, 향수, 백단향, 조미료 등을 수입했다. 남인도로 가장 비싸게 수입된 품목은 아라비아 말이었는데, 이 무역은 아랍인과 지역 브라만 상인들이 독점했다. 13세기 여행자 마르코 폴로는 인도의 기후와 토양 조건 때문에 말 사육이 성공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90]
6. 언어
서찰루키아 시대에는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가 사용되었다. 칸나다어는 주로 비문에 사용되었으며, 전체 비문의 90%를 차지한다고 알려져 있다.[106][107] 특히 비크라마디티아 6세는 칸나다어 비문을 많이 남겼다.[108] 이중 언어 비문의 경우, 제목, 계보 등은 산스크리트어로, 토지 정보 등은 칸나다어로 작성하여 지역 주민들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110] 비문 외에도 '밤샤발리스'라고 불리는 연대기들은 왕조들의 역사적인 세부사항들을 제공하기 위해 쓰였다. 칸나다어로는 세속적인 주제에 대한 글이 인기를 얻었으며, 산스크리트어로는 시, 문법, 소설, 드라마 등 다양한 분야의 작품이 쓰였다.[111][112]
6. 1. 칸나다어
현지 언어 칸나다어는 주로 서찰루키아 비문에서 사용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비문의 90%가 칸나다어로 되어 있고 나머지는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106][107] 12세기 이전의 다른 어떤 왕보다 비크라마디티아 6세가 남긴 칸나다어 비문이 많으며,[108] 인도 고고학 조사국의 역사가들이 이 중 많은 비문을 해독하고 번역했다.[11] 비문은 일반적으로 비(실라샤사나) 또는 동판(타마라샤사나)에 새겨져 있었다. 이 시기에는 칸나다어가 문학과 시의 언어로서 성장했는데, 그 원동력은 신과의 친밀감을 '바차나'라는 단순한 가사의 형태로 표현한 비라시바파들의 경건한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09] 행정적 차원에서는 토지 교부금과 관련된 위치와 권리를 기록하는 데 이 지역 언어가 사용되었다. 이중 언어 비문이 작성되었을 때 제목, 계보, 왕의 기원 신화 및 축복을 나타내는 섹션은 일반적으로 산스크리트어로 작성되었다. 칸나다어는 토지, 경계, 지방 당국의 참여, 수증자의 권리와 의무, 세금과 부담금, 증인 등 수여 조건에 대한 정보를 기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이를 통해 지역 주민들이 모호함 없이 내용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110]비문 외에도, '밤샤발리스'라고 불리는 연대기들은 왕조들의 역사적인 세부사항들을 제공하기 위해 쓰여졌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글에는 시, 문법, 어휘집, 매뉴얼, 수사학, 오래된 작품에 대한 해설, 산문 소설 및 드라마가 포함되었다. 칸나다어에서는 세속적인 주제에 대한 글이 인기를 얻었다. 잘 알려진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111][112]
작가 | 작품 | 설명 |
---|---|---|
나가바르마 1세 | 찬돔부디 | 산문 |
나가바르마 1세 | 카르나타카 카담바리 | 산문 |
란나 | 란나칸다 | 사전 |
자가달라 소마나타 | 카르나타카-칼야나카라카 | 의학 서적 |
스리다라차리야 | 자타카틸라카 | 초기 점성술 서적 |
찬드라라자 | 마다나카틸라카 | 에로틱한 책 |
차분다라야 2세 | 로카파카라 | 백과사전 |
6. 2. 산스크리트어
밤샤발리스라고 불리는 연대기들은 왕조들의 역사적인 세부사항들을 제공하기 위해 쓰여졌다. 산스크리트어로 된 글에는 시, 문법, 어휘집, 매뉴얼, 수사학, 오래된 작품에 대한 해설, 산문 소설 및 드라마가 포함되었다.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나가바르마 1세가 쓴 찬돔부디와 카르나타카 카담바리라는 산문, 란나가 쓴 란나칸다라는 사전이 있다.[111][112]7. 문학
서찰루키아 시대는 칸나다어와 산스크리트어 문학 활동이 활발했던 시기이다.[113] 칸나다 문학의 황금기에,[114] 자이나교 학자들은 티르탕카라들의 일대기를 썼고 비라시바파 시인들은 바차나라는 시를 통해 신에 대한 친밀감을 표현했다. 브라만 작가들의 초기 작품은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바가바타, 푸라나, 베다 등 서사시 위주였다. 세속 문학 분야에서는 로맨스, 연애시, 의학, 어휘, 수학, 점성술, 백과사전 등의 주제가 처음으로 쓰였다.[117][111]
이 시기에는 의학에 관한 여러 작품이 제작되었는데, 그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것은 자갓달라 소마나타의 《카르나타카 칼리아나 카라카》이다.[125]
7. 1. 칸나다어 문학

서찰루키아 시대는 칸나다어 문학의 황금기로, 티르탕카라들의 일대기를 다룬 자이나교 문학과 바차나(Vachana) 시를 통해 신에 대한 친밀감을 표현한 비라시바파 문학이 발전했다. 30명의 여성 시인을 포함해 거의 300명에 가까운 바차나카라(바차나 시인)가 기록되었다.[115][116]
칸나다 학자들 중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란나, 문법가 나가바르마 2세 등이 있다. 란나는 "칸나다 문학의 3대 보석" 중 하나로,[118] 타일라파 2세로부터 "시인의 황제"(카비 차크라바티)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의 작품 중 《사하사비마 비자얌》(또는 《가다 유다》)은 쿠루크셰트라 전쟁에서 비마와 두료다나의 곤봉 결투를 서술한 작품이다.[119] 그는 또한 993년에 자이나교의 제2대 티르탕카라 아지타나타의 생애를 묘사한 《아지타 푸라나》를 썼다.[120][121]
나가바르마 2세는 시, 운율, 문법, 어휘 분야에서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그의 작품 중 《카비야발로카나》(시학), 《카르나타카-바샤부샤나》(문법), 《바스투코사》(어휘집) 등이 중요하다.[124]
이 시기에는 바차나라고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칸나다어 시 문학이 발전했다. 바차나는 신비주의자들이 신에 대한 헌신을 표현한 시들이다. 대표적인 바차나 시인으로는 바사반나, 아카 마하데비, 알라마 프라부, 찬나바사바나, 싯다라마가 있다.[126]
7. 2. 산스크리트어 문학
카슈미르 출신 시인 빌하나는 산스크리트어로 18칸토의 시(마하카비야) 비크라마디티야 차리타를 지었다. 이 시는 그의 후원자인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삶과 업적을 서사시 형식으로 묘사하며, 소메슈바라 2세를 몰아내고 찰루키아 왕좌에 오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127]바스카라 2세(1114년생)는 이 시기에 활동한 인도의 위대한 수학자로, 싯단타 시로마니라는 저서를 남겼다.
소메슈바라 3세(1129)가 지은 마나솔라사 또는 아빌라시타르타 친타마니는 사회 모든 부문을 대상으로 한 초기 산스크리트어 백과사전이다. 의학, 마법, 수의학, 보석과 진주의 가치 평가, 요새화, 회화, 음악, 게임, 오락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128] 이 책은 당시 해당 주제에 대한 지식 수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이정표 역할을 한다.[129] 소메슈바라 3세는 아버지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전기인 비크라만-카브유다야도 저술했는데, 이는 카르나타카의 지리와 사람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포함하는 역사적인 산문 서술이다.[130]
산스크리트 학자 비즈나네슈와라는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궁정에서 미탁샤라를 저술하여 법률 문헌 분야에서 유명해졌다. 이 작품은 초기 저작을 바탕으로 한 법학 논문(야즈나발키야에 대한 해설)으로, 현대 인도 대부분 지역에서 수용되었다. 나중에 영국인 콜브룩이 상속 관련 부분을 영어로 번역하여 영국령 인도 법원 시스템에서 통용되었다.[131]
당시 음악 및 악기와 관련된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는 상기타 추다마니, 상기타 사마야사라, 상기타 라트나카라가 있다.[132]
8. 건축
서찰루키아 시대는 데칸 건축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설계된 건축물은 8세기의 바다미 찰루키아 건축물과 13세기에 대중화된 호이살라 건축물 사이의 개념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133][134] 서찰루키아의 예술은 그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주 가다그구의 퉁가바드라강-크리슈나강 도압 지역에 지은 화려한 사원들의 수를 따서 "가다그 양식"이라고도 불린다.[135] 이 왕조의 사원 건설 활동은 12세기에 성숙기에 이르렀고, 카르나타카주 중부에 지어진 100개 이상의 사원들로 절정에 달했다.[136][137] 사원 외에도, 왕조의 건축물은 의식 목욕 장소로 사용되었던 화려한 계단식 우물(푸슈카르니)로 잘 알려져 있으며, 그 중 일부는 라쿤디에 잘 보존되어 있다. 이 계단식 우물 설계는 나중에 호이살라와 비자야나가라 제국에 의해 수 세기 동안 통합되었다.[138][159]
8. 1. 주요 건축물

서찰루키아 시대는 데칸 건축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설계된 건축물은 8세기의 바다미 찰루키아 건축물과 13세기에 대중화된 호이살라 건축물 사이의 개념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133][134] 서찰루키아의 예술은 때때로 그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주 가다그구의 퉁가바드라강-크리슈나강 도압 지역에 지은 화려한 사원들의 수를 따서 "가다그 양식"이라고 불린다.[135]
서찰루키아 왕조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 라쿤디의 카시비스베바라 사원[139][140]
- 담발의 도다 바사파 사원[141][142]
- 쿠루바티의 말리카르주나 사원[140][143]
- 바갈리의 칼레스바라 사원[143][144]
- 하베리의 싯데스바라 사원[145][146]
- 안니게리의 암르테스바라 사원[147]
- 이타기의 마하데바 사원[148][149]: 12세기에 지어진 이 사원은 장식적인 디테일의 절묘한 예시로, 벽, 기둥, 탑에 있는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들은 찰루키아의 문화에 대한 많은 부분을 보여준다. 사원 외부의 한 비문은 그것을 "사원들의 황제" (데발라야 차크라바르티)라고 부르며, 비크라마디티야 6세의 군대 지휘관인 마하데바에 의해 지어졌다고 한다.[152][153]
- 쿠바투르의 카이타바라 사원[150]
- 발리가비의 케다레쉬바라 사원: 1060년에 지어진 이 사원은 과도기적인 찰루키아-호이살라 건축 양식의 한 예이다.[154][155]
이 외에도 서찰루키아는 사원 건설 활동의 초기 단계 동안, 바다미와 아이홀레에 사원들을 지었는데, 예를 들어 말리카르주나 사원, 옐람마 사원, 부탄타 사원 그룹이 그 예이다.[156][157]
사원들의 비마나(신사 위의 탑)는 초기 찰루키아의 평범한 계단식 양식과 호이살라의 장식적인 마무리 사이의 세부적인 절충안이다.[134] 서찰루키아 건축가들은 선반으로 돌린 (조정된) 기둥들의 발전과 후대의 호이살라 사원들에서 매우 인기 있는 성어인 비누석(염소성 편석)을 기본적인 건물과 조각 재료로 사용했다. 그들은 그들의 조각들에 장식용 키르티무카(귀면와)의 사용을 대중화했다. 호이살라 왕국의 유명한 건축가들은 발리가비와 같은 장소의 원주민들인 찰루키아 건축가들을 포함했다.[158] 예술적인 벽 장식과 일반적인 조각적인 성어는 드라비다 건축이었다.[159] 이 양식은 때때로 인도 건축에서 주목할 만한 전통들 중 하나인 카르나타 드라비다라고 불린다.[160]
8. 2. 건축 양식
서찰루키아 시대는 데칸 건축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기 동안 설계된 건축물은 8세기의 바다미 찰루키아 건축물과 13세기에 대중화된 호이살라 건축물 사이의 개념적인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133][134] 서찰루키아의 예술은 때때로 그들이 오늘날 카르나타카주 가다그구의 퉁가바드라강-크리슈나강 도압 지역에 지은 화려한 사원들의 수를 따서 "가다그 양식"이라고 불린다.[135]
사원들의 비마나(신사 위의 탑)는 초기 찰루키아의 평범한 계단식 양식과 호이살라의 장식적인 마무리 사이에서 세부적인 절충을 이루었다.[134] 서찰루키아 건축가들은 선반으로 돌린 (조정된) 기둥을 발전시키고, 후대의 호이살라 사원들에서 매우 인기 있는 성어인 비누석(염소성 편석)을 기본적인 건물과 조각 재료로 사용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조각들에 장식용 키르티무카(귀면와)를 널리 사용했다. 호이살라 왕국의 유명한 건축가들은 발리가비와 같은 장소의 원주민들인 찰루키아 건축가들을 포함했다.[158] 예술적인 벽 장식과 일반적인 조각적인 성어는 드라비다 건축이었다.[159] 이 양식은 때때로 인도 건축에서 주목할 만한 전통들 중 하나인 카르나타 드라비다라고 불린다.[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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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lukyas of Kaly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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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006 Kamat's Potpourri
2006-12-24
[109]
서적
Kannada enjoyed patronage from royalty, influential Jains and the [[Lingayat]] movement of Virashaivas
2003
[110]
서적
However by the 14th century, bilingual inscriptions lost favour and inscriptions became mostly in the local language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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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other two gems are [[Adikavi Pampa]] and [[Sri Ponna]]
1955
[119]
서적
A composition written in a mixed prose-verse style is called Champu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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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is also is in ''Champu'' style and was written at the request of [[Attimabbe]], a pious widow of general Nagavarma who promoted the cause of Jai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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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Rice (1921), p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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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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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Nagavarma II was the teacher (''guru'') of another noteworthy scholar [[Janna]] who later adorned the court of [[Hoysala Empire]]
1955
[125]
서적
Narasimhachar (1988), p.63
[126]
서적
Vachanas are disconnected paragraphs ending with a name attributed to lord [[Shiva]] or one of his forms. The poems teach the valuelessness of riches, rituals and book learning and the spiritual privileges of worshipping Shiva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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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par (2003),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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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ita Ratnakara'' being written in the court of feudatory [[Seuna]] king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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