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런스 알마타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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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런스 알마타데마는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로, 고대 로마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그림으로 유명하다. 안트베르펜 왕립 예술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후, 1870년 영국으로 귀화하여 영국에서 주로 활동했다. 알마타데마는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 특히 대리석과 같은 물질의 표현으로 '대리석 화가'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에 큰 인기를 누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클로비스의 아이들의 교육》,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 《모세의 발견》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영화에도 영감을 주었으며, 20세기 모더니즘의 부상으로 한동안 잊혀졌으나, 1960년대 이후 재평가되어 고전적 주제를 다룬 주요 화가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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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런스 알마타데마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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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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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우렌스 알마 타데마 |
출생 | 1836년 1월 8일 |
출생지 | 네덜란드 연합 왕국 드론립 |
사망 | 1912년 6월 25일 |
사망지 | 독일 제국 비스바덴 |
국적 | 네덜란드, 영국 |
분야 | 회화 |
사조 | 아카데미 미술 |
배우자 | 마리-폴린 그레생-두물랭 드 부아지라르 (1863년 결혼, 1869년 사별) 로라 테레사 알마-타데마 (1871년 결혼, 1909년 사별) |
자녀 | 로렌스 알마-타데마 안나 알마-타데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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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 | |
훈장 | 메리트 훈장 |
회원 | 왕립 아카데미 회원 왕립 수채화 협회 회원 |
2. 생애
프리슬란트주의 한 마을에서 태어나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왕립예술원(Royal Academy of Fine Arts Antwerpeng)에서 학업을 마쳤다.[55] 초기에는 헨드릭 레이스의 조수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
1863년 신혼여행으로 방문한 이탈리아의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유적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이후 고대사, 특히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의 생활상을 주제로 한 그림을 주로 그리게 되었다.[56][57]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여 런던에 정착했고,[55] 이후 영국에서 주로 활동하며 공민권(denizenshipeng)을 얻었다. 1871년에는 영국 화가 로라 테레사 알마-타데마와 재혼했다.
영국에서 알마타데마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76년 영국 왕립 아카데미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879년 정회원이 되었다.[58] 그의 작품은 화려한 색채와 고고학적 정확성을 바탕으로 한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로 당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1899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1906년에는 고대 건축, 장식, 풍속 등을 정확하게 묘사한 공로로 영국 왕립 건축 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57]
1912년 독일 비스바덴에서 위궤양 치료 중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알마타데마는 1836년 1월 8일 네덜란드 북부 프리슬란트주의 드론레이프 마을에서 태어났다.[2] 그의 성씨 '타데마'는 '타데의 아들'을 의미하는 오래된 프리지아어 부칭이며, '로렌스'와 '알마'라는 이름은 그의 대부에게서 따온 것이다.[3] 그는 마을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피터 질테스 타데마(1797–1840)와 어머니 힌케 디르크스 브라우어(1800–1863)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자녀 중 막내였고, 어머니에게는 세 번째 자녀였다. 아버지에게는 이전 결혼에서 얻은 세 아들이 있었다. 로렌스 위로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난 형제와 누이 아르체(1834–1876)가 있었는데, 그는 누이와 각별한 사이였다.
1838년, 가족은 아버지의 공증인 일이 더 번창할 수 있는 인근 도시 레우와르던으로 이사했다.[2] 그러나 로렌스가 네 살 때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는 로렌스와 누이, 그리고 이복형 세 명을 포함한 다섯 자녀를 홀로 키우게 되었다. 예술적 소양을 지녔던 어머니는 아이들 교육 과정에 그림 수업을 포함시켰고, 이복형들을 가르치던 지역 미술 교사에게 로렌스도 함께 배우도록 하여 첫 미술 교육을 받게 했다.
원래 변호사가 될 예정이었던 로렌스는 1851년, 15세의 나이에 결핵 진단을 받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남은 시간을 그림을 그리며 자유롭게 보낼 수 있도록 허락받았는데, 오히려 건강을 회복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화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3]
1852년, 그는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는 안트베르펜 왕립예술원에 입학하여 구스타프 와퍼스 밑에서 초기 네덜란드 미술과 플랑드르 미술을 공부했다. 아카데미에서 4년간 정식 학생으로 지내며 여러 상을 받았다. 1855년 말 아카데미를 떠나기 전, 그는 화가이자 교수인 루이(로드베이크) 얀 데 타이예의 조수가 되었다. 알마타데마는 아카데미에서 수강했던 역사 및 역사적 의상 강좌에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 데 타이예는 그에게 역사적 주제, 특히 메로빙거 왕조에 대한 관심을 심어준 책들을 소개해 주었다. 또한 데 타이예는 알마타데마에게 그림을 그릴 때 역사적 정확성을 추구하도록 격려했으며, 이는 훗날 알마타데마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

데 타이예는 알마타데마에게 고대 문명, 특히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1858년 작 '슬픈 아버지'(또는 '불리한 신탁', Opus X)와 1859년 작 '죽어가는 클레오파트라'(후에 파괴됨)에서 처음 드러난다. '슬픈 아버지'는 원래 더 큰 규모의 그림이었으나 후에 세 인물만 남도록 축소되었고,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요하네스버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의 다른 부분은 1869년에 수정되어 1871년 왕립 아카데미에서 '위대한 세소스티스의 대 궁재'라는 제목으로 전시되었다. 에드먼드 고스 경은 원본 그림에 대해 "알마타데마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이집트 그림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매우 흥미롭다"고 평가했다.[5] 알마타데마는 이집트 주제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고대인의 삶을 알기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아이들이 고대 역사에서 처음 배우는 것은 파라오의 궁정입니다. 예술과 과학의 근원을 찾으려면 이집트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했다.[6] 그의 초기 이집트 그림들은 존 가드너 윌킨슨 경의 《고대 이집트인의 풍습과 관습》(1837)과 같은 참고 서적을 면밀히 연구했음을 보여주는 정확한 사물과 배경 묘사를 특징으로 한다.
1858년 11월, 알마타데마는 데 타이예의 화실을 떠나 레우와르던으로 잠시 돌아갔다가, 다시 앤트워프로 가서 당시 벨기에에서 가장 명망 높은 화실 중 하나를 운영하던 얀 아우구스트 헨드릭 레이스 남작 밑에서 일하기 시작했다.[7] 레이스의 지도 아래 그는 첫 주요 작품인 《클로비스의 아이들의 교육》(1861)을 완성했다.

이 그림은 1861년 앤트워프에서 열린 예술 회의에 전시되어 비평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의 명성의 기초를 다졌다.[8] 레이스는 그림 자체는 기대 이상이라고 칭찬하면서도, 대리석 표현이 미흡하다며 마치 치즈 같다고 비판했다.[8] 알마타데마는 이 비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대리석과 다채로운 화강암을 묘사하는 기술을 연마하는 데 몰두했고, 결국 이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화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클로비스의 아이들의 교육》은 좋은 평가를 받아 벨기에의 레오폴드 1세에게 헌정되었다.[9]

알마타데마는 스승 레이스와 함께 앤트워프 시청 레이스 홀의 벽화 작업에도 참여하여 네덜란드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묘사했다. 1860년에는 위트레흐트 출신의 앵글로-네덜란드 예술가 가문인 돔메르센 가문과 친분을 맺었다.
2. 2. 벨기에에서의 활동
1852년, 알마타데마는 벨기에 앤트워프에 있는 앤트워프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구스타프 와퍼스의 지도 아래 초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미술을 공부했다. 아카데미에서 4년간 공부하며 여러 상을 받았고, 1855년 말에는 화가이자 교수인 루이(로드베이크) 얀 데 타이예의 조수가 되었다. 데 타이예는 알마타데마에게 역사와 역사적 의상에 대한 관심을 심어주었으며, 특히 메로빙거 왕조 시대를 묘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림에서 역사적 정확성을 중시하도록 가르쳤는데, 이는 알마타데마 작품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다.[5] 데 타이예의 영향으로 고대 이집트 문명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이는 초기 작품에 반영되었다.1858년 11월, 데 타이예의 화실을 떠나 얀 아우구스트 헨드릭 레이스 남작의 화실로 옮겼다.[7] 레이스의 지도 아래 알마타데마는 그의 첫 주요 작품인 ''''''《클로비스의 아이들의 교육》(1861)을 그렸다. 이 그림은 1861년 앤트워프 예술 의회에 전시되어 비평가와 예술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그의 명성의 기초를 다졌다.[8] 레이스는 그림 자체는 칭찬했지만, 대리석 묘사가 미흡하다고 지적했는데, 알마타데마는 이 비판을 계기로 대리석과 잡색 화강암 묘사 기술을 연마하여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렸다.[8] 그는 레이스와 함께 앤트워프 시청 레이스 홀의 벽화 작업에도 참여했다. 《클로비스의 아이들의 교육》은 좋은 평가를 받아 벨기에의 레오폴드 왕에게 헌정되었다.[9]
1862년, 알마타데마는 레이스의 화실을 떠나 독립적인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메로빙거 왕조를 주제로 삼았으나, 국제적인 관심을 끌지 못하자 더 인기가 많았던 고대 이집트의 삶을 주제로 전환했다.

1863년 1월 3일 어머니가 사망했고, 같은 해 9월 24일 앤트워프 시청에서 프랑스 언론인의 딸인 Marie-Pauline Gressin-Dumoulin de Boisgirardfra와 결혼했다.[10] 부부는 세 자녀를 두었으나 장남은 일찍 사망했고, 두 딸 로렌스(1865–1940)와 안나(1867–1943)는 각각 문학과 미술 분야에서 활동했다.

알마타데마 부부는 이탈리아의 피렌체, 로마, 나폴리, 폼페이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특히 폼페이 유적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후 그의 작품 주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삶으로 확장되었다. 폼페이 방문은 수십 년간 그의 예술 활동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했다. 그는 폼페이에서 고고학자 주세페 피오렐리의 의뢰로 프레스코화를 복제하던 화가 제레미아 디산노를 만나 교류하며 고대 생활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12]
1864년 여름, 영향력 있는 미술상 어니스트 갬바트를 만났다. 갬바트는 알마타데마의 재능을 알아보고 24점의 그림을 주문했으며, 그의 작품을 런던에서 전시하도록 주선했다.[13] 1865년, 알마타데마는 브뤼셀로 이주했고, 레오폴드 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2. 3. 영국으로 이주
1869년 첫 아내 폴린이 사망하고 몇 달 후, 알마타데마는 건강 문제로 고통받기 시작했다. 벨기에 의사들이 병을 진단하지 못하자, 미술상 어니스트 갬바트는 그에게 영국 런던으로 가서 다른 의사의 진료를 받아볼 것을 권했다. 1869년 12월 런던에 도착한 알마타데마는 화가 포드 매독스 브라운의 집에 초대받았고, 그곳에서 당시 17세였던 로라 테레사 엡스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15]1870년 7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알마타데마는 유럽 대륙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로라 엡스를 향한 그의 마음과 더불어, 갬바트는 런던 이주가 그의 화가 경력에 유리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알마타데마는 훗날 이주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863년에 결혼한 프랑스 여성인 첫 번째 아내를 1869년에 잃었습니다. 런던에 대한 큰 애착을 항상 가지고 있었고, 그 전까지 제 작품이 구매자를 만났던 유일한 곳이었기에, 저는 대륙을 떠나 진정한 안식처를 찾은 영국에 정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870년 9월 초, 알마타데마는 어린 두 딸 로렌스와 안나, 그리고 누이 아르트예와 함께 런던에 도착했다. 그는 곧바로 로라 엡스와 연락하여 그녀에게 그림 수업을 해주기로 했다. 수업 도중 그는 로라에게 청혼했다. 당시 알마타데마는 34세, 로라는 18세였기에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나이 차이를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결국 서로를 더 알아갈 시간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두 사람은 1871년 7월에 결혼했다. 로라 역시 재능 있는 화가로 성장하여 결혼 후에도 명성을 얻었으며, 알마타데마의 여러 작품에 모델로 등장했다(대표작: ''암피사의 여인들'' (1887)).[16] 이 두 번째 결혼 생활은 자녀는 없었지만 행복하게 지속되었고, 로라는 로렌스와 안나에게 좋은 계모가 되어주었다.
영국에 정착한 후, 알마타데마는 자신의 이름을 Lourens Alma Tademanl에서 영어식인 ''Laurence Alma Tadema''로 바꾸었고, 나중에는 ''Lawrence''로 최종 변경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성 앞에 'Alma'를 붙여 전시 카탈로그 등에서 자신의 이름이 'T'가 아닌 'A' 항목에 오도록 했다.[3] 그는 실제로 성에 하이픈(-)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점차 '알마-타데마(Alma-Tadema)'로 불리는 것이 일반화되었다.[17]
알마타데마는 1870년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공민권(denizenship)을 등록했다.[55] 이는 완전한 시민권과는 다른 개념으로, 외국인에게 특정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이후 영국 미술계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입지를 다져나갔다. 1873년에는 영국 귀화인(denizen)으로 등록되었고, 1876년에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의 준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3년 뒤인 1879년에는 정회원이 되었다.[58]
2. 4. 빅토리아 시대의 화가
1870년 7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발발하자 알마타데마는 유럽 대륙을 떠나 런던으로 이주했다. 로라 엡스에 대한 그의 열정과, 그의 작품 구매자들이 주로 영국에 있었다는 점, 그리고 미술상 어니스트 갬바트의 조언 등이 런던행의 주요 이유였다. 그는 1870년 9월 초, 어린 두 딸과 누이 아르트예와 함께 런던에 도착했다.[15]
런던 도착 후 알마타데마는 로라 엡스에게 그림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곧 청혼했다. 로라의 아버지 조지 나폴레옹 엡스는 처음에는 나이 차이(알마타데마 34세, 로라 18세) 때문에 반대했지만, 서로를 더 알아갈 시간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했다. 두 사람은 1871년 7월에 결혼했다. 로라 역시 결혼 후 화가로서 명성을 얻었으며, 알마타데마의 작품에도 종종 등장했다(예: ''암피사의 여인들'' (1887)). 이 결혼은 자녀 없이 행복하게 지속되었고, 로라는 알마타데마의 두 딸에게 좋은 계모가 되었다.[16]
영국에 정착한 후 알마타데마는 자신의 이름을 ''Lourens Alma Tadema''에서 ''Laurence Alma Tadema''로, 나중에는 더 영어식인 ''Lawrence''로 바꾸었다. 또한 성의 일부인 ''Alma''를 이름 앞에 붙여 전시 목록 등에서 자신의 이름이 'T'가 아닌 'A' 항목에 오도록 했다. 비록 그 자신은 성에 하이픈(-)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알마-타데마(Alma-Tadema)'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3][17]

영국에서의 알마타데마의 경력은 성공적이었다. 그는 당대 가장 유명하고 수입이 많은 화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871년경에는 라파엘 전파의 주요 화가들과 교류하며 친구가 되었고, 이들의 영향을 받아 색채는 더 밝아지고 색조는 다양해졌으며 붓 터치는 가벼워졌다.
1872년부터 알마타데마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과 함께 작품 번호(Opus number)를 매기는 체계를 도입했다. 이는 1851년작 ''내 여동생 아르테의 초상''을 작품 I(Opus I)으로 시작하여, 사망 직전 완성한 ''콜로세움의 준비''에 작품 CCCCVIII(Opus 408) 번호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시스템은 위작을 방지하는 데 효과적이었다.[19]
1873년, 빅토리아 여왕은 특허장을 통해 알마타데마와 그의 아내 로라에게 영국 귀화인(denizen) 자격을 부여했다. 이는 영국 시민(British subject)에게 주어지는 일부 권리를 제한적으로 누릴 수 있는 신분이었다. 전년도에는 5개월 반 동안 유럽 대륙(브뤼셀, 독일, 이탈리아)을 여행하며 고대 유적을 다시 답사하고 관련 사진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후 작품 제작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1876년에는 로마에 스튜디오를 임대하기도 했다.

이 시기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옥타비아누스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그의 아내 율리아를 만나는 장면을 그린 ''아그리파의 청중''(1876)이 있다. 한 후원자가 비슷한 주제를 의뢰하자, 그는 단순히 인물들을 돌아서게 하여 황제가 떠나는 모습을 그린 ''청중 후''를 제작하기도 했다. 1879년 6월 19일, 그는 왕립 예술원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3년 뒤인 1882년에는 런던의 그로스베너 갤러리에서 그의 작품 185점을 모은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1883년, 알마타데마는 다시 로마와 폼페이를 방문하여 이전 방문 이후 새롭게 발굴된 유적들을 연구했다. 이러한 답사는 그의 작품에 풍부한 영감을 제공했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고고학적 세부 묘사를 담아 비평가들로부터 '박물관 카탈로그 같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1888)는 방탕한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가 연회 도중 손님들을 장미 꽃잎으로 질식시키는 일화를 묘사한다.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알마타데마는 1887-1888년 겨울 동안 4개월에 걸쳐 매주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런던의 스튜디오로 장미를 배송받아 꽃잎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묘사했다고 전해진다.

이후에도 그는 ''현세의 낙원''(1891), ''무의식적인 경쟁자들''(1893), ''봄''(1894), ''콜로세움''(1896), ''카라칼라 욕장''(1899) 등 고대 로마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했다. 알마타데마는 고대사 그림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초상화, 풍경화, 수채화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으며, 직접 에칭 작업을 하기도 했다.
2. 5. 말년
알마타데마의 작품 활동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줄어들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건강상의 이유도 있었지만 1883년에 이사한 새 집을 장식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기도 했다.[2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80년대와 1890년대에도 계속 작품을 전시했으며, 1889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명예 훈장을 받았고, 1890년에는 옥스퍼드 대학교 연극 협회의 명예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897년 브뤼셀 국제 박람회에서는 그랑 골드 메달을 수상했다.[24] 1899년에는 영국에서 기사 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았는데, 이는 네덜란드 출신 예술가로는 여덟 번째로 이 영예를 얻은 것이었다.[60][24]그는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영국 부문 조직을 돕는 한편, 자신의 작품 두 점을 전시하여 그랑프리 디플로마를 받았다.[24] 또한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 박람회 개최를 도왔으며, 여기서 좋은 평을 받았다.[24] 이 기간 동안 알마타데마는 무대 디자인과 제작 활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많은 의상을 디자인했다.[24] 그는 또한 폼페이 또는 이집트 모티프를 본뜬 가구를 디자인하기 시작했으며, 삽화, 직물 및 액자 디자인에도 참여했다.[24] 1902년 말에는 이집트를 방문하기도 했다.[25]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은 그의 그림에도 영향을 미쳐, 직접 디자인한 가구나 여성 의상을 종종 작품에 통합했다.[24]
1903년부터 그가 사망할 때까지 알마타데마는 그림을 덜 그렸지만, "모세의 발견"(1904)과 같은 야심 찬 그림을 여전히 제작했다.[27][26] 1905년에는 메리트 훈장 (Order of Merit, OM)을 수훈했고,[61] 1906년에는 고대 건축물과 장식품, 생활과 풍토 등을 치밀하고 정확하게 그려낸 공적을 인정받아 영국 왕립 건축 학회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57]

1909년 8월 15일, 알마타데마의 아내 로라가 쉰일곱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28] 슬픔에 잠긴 과부는 두 번째 아내보다 3년도 채 살지 못했다.[28] 그의 마지막 주요 작품은 "콜로세움에서의 준비"(1912)였다.[28] 1912년 여름, 알마타데마는 딸 안나와 함께 위궤양 치료를 위해 독일 비스바덴의 카이저호프 스파를 방문했다.[29] 그는 1912년 6월 28일 그곳에서 일흔여섯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런던 성 바울 대성당의 지하 묘지에 묻혔다.
사후인 1975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블루 플라크가 런던 세인트 존스 우드의 44 그로브 엔드 로드에 설치되었다. 이곳은 알마타데마가 1886년부터 1912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30][31][32]
3. 작품 스타일
알마타데마의 작품은 꽃, 질감, 금속, 도자기, 특히 대리석과 같이 단단하고 반사되는 물질의 정교하고 사실적인 묘사가 두드러진다. 이 때문에 '대리석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스승 얀 아우구스트 헨드릭 레이스가 초기 작품 ''클로비스의 아이들의 교육''(1861)에서 대리석 표현이 미흡하다고 지적하자, 알마타데마는 이를 계기로 기술 연마에 매진하여 세계적인 수준의 대리석 및 잡색 화강암 묘사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8] 그의 작품에서는 옛 네덜란드 거장들에게서 볼 수 있는 뛰어난 기교와 화려한 색채 감각이 드러난다.
그는 초기부터 작품 속 배경과 사물의 역사적, 건축적 정확성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35] 이를 위해 런던의 대영 박물관과 같은 박물관 소장품을 직접 보고 그리거나 관련 서적의 도판을 참고했으며, 이탈리아의 고대 유적지를 방문하여 수많은 사진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의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묘사하려 노력했다. 이러한 철저한 고증은 그의 그림에 생생함을 더했지만, 때로는 너무 많은 세부 요소를 담아 마치 박물관의 목록 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알마타데마는 완벽주의적인 성향을 지녀, 작품의 세부 묘사와 건축적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고 만족할 때까지 반복해서 그림을 수정했다. 그는 그림에 등장하는 꽃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유럽이나 아프리카 등지에서 직접 생화를 구해와 시들기 전에 빠르게 그리기도 했다. 이러한 진실성에 대한 집념은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일부 비평가들은 지나치게 세부 묘사에 집착한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때때로 수동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한다.[18]
1870년대 런던에 정착한 후 라파엘 전파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그의 화풍은 영향을 받아 팔레트가 밝아지고 색조가 다양해졌으며 붓 터치도 가벼워졌다. 그는 캔버스 가장자리를 갑작스럽게 잘라내거나 중간 배경을 생략하는 등 독창적인 구성 기법을 사용하기도 했다.[34] 이러한 특징들은 유럽 상징주의 화가들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며,[36] 특히 구스타프 클림트나 페르낭 크노프 등에게 고전적 모티프의 사용, 독특한 구성 방식, 숨겨진 의미를 암시하는 기법 등에서 영향을 미쳤다.
작품 관리를 위해 1872년부터 자신의 모든 작품에 고유 번호(Opus number)를 매기는 체계를 도입했는데, 이는 위작 방지에도 도움이 되었다.[19]
4. 주요 작품
알마타데마는 1872년부터 자신의 작품에 작품 번호(Opus number)를 매겨 관리했다. 1851년작 《내 여동생 아르테의 초상》을 작품 I(Opus I)으로 삼았고, 사망 직전 완성한 《콜로세움의 준비》는 작품 CCCCVIII(Opus 408)이었다. 이러한 체계는 위작 방지에 도움이 되었다.[19]
그의 주요 작품들은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일상생활, 특히 화려하고 이상화된 장면을 정교하고 고고학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대리석, 청동 등 다양한 질감 표현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대리석 화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대영 박물관 등 박물관 소장품을 연구하고, 폼페이 유적 등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역사적 정확성을 추구했다.[35] 그는 완벽주의자로, 만족스러울 때까지 작품을 수정했으며, 설정의 세부 사항과 건축선에 민감했다.
다음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 '''클로비스의 아이들의 교육''' (Opus XV, 1861): 헨드릭 레이스의 지도 아래 그린 첫 주요 작품으로, 메로빙거 왕조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앤트워프 예술 의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명성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8]
- '''이집트 체스 선수''' (Opus XVIII, 1865): 고대 이집트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미술상 어니스트 갬바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런던 진출의 발판이 되었다.[13]
- '''아그리파의 청중''' (Opus CLXI, 1876):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인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묘사한 작품이다.
- '''사포와 알카이오스''' (Opus CCXXI, 1881): 고대 그리스의 시인 사포와 알카이오스를 주제로 한 그림이다.
- '''테피다리움''' (Opus CCXXIX, 1881): 로마 목욕탕의 테피다리움(미온욕실)에서 스트리길을 들고 누워있는 여인을 묘사했다.
- '''암피사의 여인들''' (Opus CCLXXXVII, 1887): 포키스의 암피사 여인들이 델포이 신전에서 디오니소스 축제를 벌이는 모습을 그렸다. 아내 로라 테레사 알마-타데마가 모델로 등장한다.
- '''헬리오가발루스의 장미''' (Opus CCXCI, 1888): 로마 황제 엘라가발루스가 연회에서 손님들을 장미 꽃잎으로 질식시키는 장면을 그린 대표작 중 하나이다. 정확한 묘사를 위해 겨울 동안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매주 장미를 공수받았다.
- '''봄''' (Opus CCCXXVI, 1894): 고대 로마의 봄 축제를 화려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감성을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 '''콜로세움''' (Opus CCCXXXII, 1896): 고대 로마의 상징적인 건축물인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 '''카라칼라 욕장''' (Opus CCCLVI, 1899): 로마 황제 카라칼라가 세운 거대한 공중 목욕탕을 그린 작품이다.
- '''은색 즐겨찾기''' (Opus CCCLXXIII, 1903): 지중해를 배경으로 대리석 테라스에 앉아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여인들을 그렸다. 빛나는 대리석과 푸른 바다의 대비가 돋보인다.[33]
- '''모세의 발견''' (Opus CCCLXXVII, 1904): 성서 속 모세의 이야기를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화려하게 재현한 대작이다.
이 외에도 《프레데군트와 프라텍스타투스 주교의 임종》(1864), 《바쿠스에게 바치는 헌사》(1889), 《무의식적인 경쟁자들》(1893), 《바람직한 위치》(1895), 《가장 좋아하는 관습》(1909)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또한 초상화, 풍경화, 수채화 작업과 에칭 제작에도 참여했다.
5. 평가 및 영향
알마타데마는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 활동하며 고대 로마와 이집트의 일상을 정교하고 고고학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여 당대에 큰 상업적 성공과 명성을 누렸다.[19] 그의 작품은 이상화된 과거를 보여주며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의 부상과 함께 그의 전통적 화풍은 비판받으며 잊혀 갔고, 작품 가치도 하락했다.[41] 1960년대 이후 빅토리아 시대 미술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작품은 고고학적 정확성과 기술적 완성도를 인정받아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46] 특히 그의 정교한 고대 세계 묘사는 후대 할리우드 영화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D. W. 그리피스의 ''인톨러런스''(1916)부터 세실 B. 데밀의 ''십계''(1956),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글래디에이터''(2000)에 이르기까지 여러 영화 속 고대 장면의 시각적 모델이 되었다.[41][42][43] 현재 그는 19세기 영국의 중요한 고전주의 화가로 평가받는다.
5. 1. 당대의 평가
알마타데마는 빅토리아 시대에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중 한 명이었으며,[39] 에드윈 헨리 랜드시어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재정적으로도 가장 성공한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영국으로 이주한 후 그의 경력은 지속적인 성공의 연속이었고, 당시 가장 유명하고 수입이 많은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으며 부와 명예를 얻었다. 1873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영국 귀화인으로 인정받았고, 1879년에는 왕립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1883년 런던 그로스베너 갤러리에서는 그의 작품 185점을 모아 대규모 회고전이 열릴 정도로 높은 명성을 누렸다.그의 성공은 60년 이상 대중이 원하는 바를 정확히 파악하고 충족시킨 데 있었다. 고전 시대를 배경으로 아름다운 인물들을 정교하게 묘사한 그의 그림, 특히 눈부신 햇살 아래 하얀 대리석 건축물을 배경으로 한 고대 로마의 풍경은 관객들에게 사치스럽고 이국적인 세계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는 완벽주의적인 태도로 작품 제작에 몰두했으며, 동시에 뛰어난 사업 감각을 지녀 19세기 가장 부유한 예술가 중 한 명이 되었다. 알마타데마는 작품의 예술성만큼이나 경제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24]
특히 그의 그림을 복제한 판화에 대한 저작권은 때때로 원본 그림 자체보다 더 큰 수익을 안겨주었다. 예를 들어, 한 그림과 판권이 1874년에 화상 어니스트 갬바트에게 10000GBP에 팔렸으며, 1880년대에는 작품 가격이 보통 2000GBP에서 3000GBP 사이였고, 1900년대에는 최소 세 작품이 5250GBP에서 6060GBP 사이에 팔릴 정도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다.[40]
하지만 그의 작품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했다. 때때로 그림 속에 너무 많은 고고학적 세부 묘사를 담아 일부 비평가들은 마치 박물관의 유물 목록 같다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또한 알마타데마는 후기 인상주의, 포비즘, 입체주의, 미래주의와 같은 당대의 새로운 미술 사조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의 제자였던 존 콜리어는 알마타데마의 예술이 마티스, 고갱, 피카소와 같은 모더니즘 화가들의 예술과는 양립하기 어렵다고 언급하기도 했다.[41] 이러한 보수적인 태도는 훗날 모더니즘이 예술계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그의 명성이 급격히 하락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은 그를 "19세기의 최악의 화가"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5. 2. 사후 평가
알마타데마의 말년에는 후기 인상주의, 포비즘, 입체주의, 미래주의와 같은 새로운 예술 사조가 부상했으나, 그는 이 모든 경향을 싫어했다. 그의 제자였던 존 콜리어는 알마타데마의 예술이 마티스, 고갱, 피카소의 예술과 조화될 수 없다고 언급했다.[41]그의 사후, 20세기 모더니즘이 부상하면서 알마타데마의 예술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점차 잊혀 갔다. 존 러스킨은 그를 "19세기의 최악의 화가"라고 혹평했으며, 한 비평가는 그의 그림이 "버번 비스킷 상자를 장식할 만큼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평가 속에서 그는 거의 반세기 동안 미술사에서 잊힌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알마타데마의 작품은 영국 미술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으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그는 고고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고대 세계의 모습을 세심하고 정확하게 시각화하려 노력했던 19세기 주요 고전주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재평가받고 있다.
그의 작품 가격 또한 극적인 변화를 겪었다. 빅토리아 시대 미술 시장의 전반적인 붕괴와 함께 그의 작품 가격은 급락했지만, 1960년대 이후 다시 상승세를 보였다. 예를 들어,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모세의 발견''(1904)은 1904년 5250GBP에 판매되었으나, 1960년에는 252GBP에도 구매자를 찾지 못했다.[49] 그러나 199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이 그림은 175만파운드에 팔렸고, 2010년 11월 4일 소더비 뉴욕 경매에서는 3590만달러에 낙찰되어 빅토리아 시대 화가 작품 중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다.[50] 2011년 5월에는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만남: 기원전 41년''이 같은 경매장에서 2920만달러에 판매되었다.[51]
알마타데마에 대한 재평가는 1962년 뉴욕의 미술상 로버트 아이작슨이 50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44][45] 1960년대 후반 빅토리아 시대 그림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나면서 그의 작품은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46] 미국의 유명 방송인이었던 앨런 펀트는 알마타데마의 명성이 가장 낮았던 시기에 그의 작품 35점을 수집했는데, 1973년 펀트 컬렉션이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나오면서 알마타데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47][48]
알마타데마의 세심한 고고학적 연구에 기반한 고대 로마 시대의 삶과 건축물 묘사는 후대 영화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D. W. 그리피스 감독의 ''인톨러런스''(1916)를 비롯하여 ''벤허''(1926), ''클레오파트라''(1934), 그리고 특히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1956)와 같은 여러 할리우드 영화에서 그의 그림을 고대 세계를 재현하는 시각적 모델로 활용했다.[41] 영화 ''십계''의 공동 작가였던 제시 라스키 주니어는 데밀 감독이 세트 디자이너들에게 알마타데마 그림의 판화를 보여주며 작업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비교적 최근의 영화인 아카데미상 수상작 ''글래디에이터''(2000)의 로마 모습과 ''나니아 연대기''(2005)에 등장하는 케어 파라벨 성의 내부 디자인 역시 알마타데마의 그림에서 주요한 영감을 얻었다.[42][43]
그의 작품 중 ''테피다리움''(1881)은 2006년에 출간된 책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그림 1001점''에 포함되었다. 리버풀 국립 박물관의 미술관장 줄리안 트루어즈는 이 그림을 "절묘하게 그려진 작품... 빅토리아 시대 누드화에서는 보기 드문 강렬한 에로틱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평가했다.[52]
5. 3. 한국에서의 수용
(내용 없음 - 원본 소스에 해당 섹션에 대한 정보가 없습니다.)6.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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