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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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유리는 헬레니즘 시대의 기술을 계승하여 발전한 유리 제조 기술을 의미한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유리가 비싸고 희귀한 재료였지만, 기원전 1세기 중반 유리 불기 기술의 발명과 로마 제국의 번영을 통해 유리 용기의 생산량과 사용이 증가했다. 유리 불기 기술은 제조 효율을 높여 유리 용기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모자이크, 창유리, 다양한 색상의 유리를 활용한 장식 기법도 발전했다. 로마 유리는 서아시아, 아프가니스탄, 인도, 중국 등지로 수출되었으며, 2세기 초에 절정에 달했다. 유리 제조 기술은 코어 및 로드 성형, 냉간 절삭, 유리 불기 등 다양한 기법을 사용했으며, 금 유리, 에나멜 유리, 유리 조각과 같은 장식 기법도 발전했다. 로마 유리는 착색제를 사용하여 다양한 색상을 냈으며, 폼페이 유적에서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사용된 유물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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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유리 | |
---|---|
개요 | |
![]() | |
재료 | 모래, 소다회, 석회, 금속 산화물 |
문화권 | 고대 로마 |
시대 | 고대 로마 시대 |
용도 | 장식품, 용기 |
특징 | 다색성, 무지개 빛깔 |
상세 정보 | |
정의 |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유리 제품으로, 표면에 무지개 빛깔의 광택이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
형성 과정 | 유리가 수 세기 동안 묻혀 있는 동안 습한 토양과 반응하여 표면에 여러 층의 얇은 막을 형성한다. 이 막은 빛의 간섭을 일으켜 무지개 빛깔을 낸다. |
색상 | 주로 파란색, 녹색, 주황색을 띠며, 빛의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상으로 보인다. |
발견 장소 | 로마 제국 전역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발견된다. |
보존 상태 | 유리 자체는 내구성이 좋지만, 표면의 막은 매우 얇고 약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
활용 | 장식용 액세서리, 그릇, 모자이크 타일 등에 사용되었다. |
추가 정보 | |
가치 | 독특한 아름다움과 희소성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
모조품 | 현대에도 로마 유리의 무지개 빛깔을 모방한 제품들이 생산되고 있다. |
2. 로마 유리 산업의 성장
로마의 유리 산업은 로마 공화정 말기부터 로마 제국 초기까지 급격하게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의 주요 요인은 다음과 같다.
- 기술 혁신: 유리 불기 기법의 발명은 유리 생산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 기술은 이전 방식보다 빠르고 효율적이었으며, 얇고 가벼운 유리 용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게 했다.
- 경제적 요인: 유리 불기 기술은 생산 비용을 절감시켜, 유리 제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전에는 사치품이었던 유리 용기가 일상 용품으로 자리 잡으면서 수요가 크게 늘었다.
- 정치적 안정: 팍스 로마나 시대의 안정은 경제 성장을 촉진하여 유리 산업 발전에도 기여했다.
- 제국의 확장: 로마 제국의 확장은 다양한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디자인과 기술 도입을 가능하게 했다.
이러한 요인들로 인해 서기 1세기 중반, 유리 용기는 귀한 상품에서 흔한 재료로 바뀌었다. "유리 술잔은 구리 동전으로 살 수 있었다"(Geographica|지리학la XVI.2)라는 기록처럼 유리 제품이 대중화되었다. 또한, 모자이크용 유리 테세라와 창유리가 처음 생산되었고, 용광로 기술 발전으로 용융 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1][9]
로마 유리는 서아시아에서 인도, 중국까지 수출되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로마 유리는 광저우의 1세기 초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남중국해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5][6]
2. 1. 배경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리 세공의 역사가 발전하고 고고학적 문화에서 유리의 비중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서기 1세기 초 로마 세계에는 유리를 지칭하는 라틴어가 없었다.[1] 하지만, 늦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이르러 로마에서는 주로 헬레니즘 시대의 기술과 양식을 사용하여 유리가 생산되었다. 대부분의 제조 기술은 시간이 오래 걸렸고, 초기 제품은 두꺼운 벽의 용기였으며, 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점과 원료 유리의 생산을 위해 나트론을 수입하는 비용이 합쳐져 유리의 사용이 제한적이었고, 유리는 비싸고 지위가 높은 재료로 여겨졌다.
공화정 시대에는 유리 산업이 비교적 작은 수공예 산업이었다. 하지만 서기 1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이용 가능한 유리 용기의 양과 다양성이 극적으로 증가했다.[1] 이는 공화정 시대 말 로마의 영향력이 급증한 직접적인 결과였으며, 내전 수십 년 후에 이어진 팍스 로마나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하에서 일어난 국가의 안정화에 기인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유리는 이미 서아시아(예: 파르티아 제국)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쿠샨 제국으로, 그리고 중국의 한나라까지 이동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로마 유리는 광저우의 1세기 초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남중국해를 통해 유입되었다.[5][6]
서기 1세기 동안 유리 생산에 새로운 주요 기술이 도입되었다.[7] 유리 불기는 유리 세공업자들이 훨씬 얇은 벽을 가진 용기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각 용기에 필요한 유리의 양을 줄였다. 유리 불기는 다른 기술보다 훨씬 빨랐으며, 용기는 마무리가 덜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 원자재 및 장비의 추가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초기에는 초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이전 기술이 지배적이었지만,[8] 서기 1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불기 기술이 이전 기술을 대체했다.[1]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로 생산 비용이 절감되었고, 유리는 사회의 더 넓은 계층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용 가능해졌다. 서기 1세기 중반에 이르러 유리 용기는 귀중하고 지위가 높은 상품에서 흔히 사용되는 재료로 바뀌었다. "유리 술잔은 구리 동전으로 살 수 있었다"(스트라보, 지리학 XVI.2). 이러한 성장은 또한 모자이크를 위한 최초의 유리 테세라의 생산과 최초의 창유리 생산을 가져왔으며,[1] 용광로 기술이 향상되어 처음으로 용융 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9] 동시에 제국의 확장은 사람들의 유입과 문화적 영향력의 확장을 가져와 동양의 장식 양식이 채택되었다.[1] 따라서 이 기간 동안 로마 유리 산업에서 일어난 변화는 세 가지 주요 영향, 즉 역사적 사건, 기술 혁신 및 동시대 유행의 결과로 볼 수 있다.[1] 또한 여러 형태와 기술이 도출된 도자기 산업에서 개발된 유행과 기술과도 관련이 있다.[1]
2. 2. 발전 요인
기원전 1세기 중반, 유리 불기 기법이 동지중해 연안에서 발명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로, 이전의 주형 제작이나 연마 작업이 필요 없어 유리 제조 효율을 크게 높였다.1세기 초에는 틀에 유리를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는 녹인 유리를 틀에 부어 형태를 만드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도 발전했다.
이러한 기술 발전의 요인은 다음과 같다.
- 로마 제국의 팽창: 기원전 4세기부터 영토를 확장해 온 로마는 삼두 정치를 거쳐 기원전 27년 제정 시대로 접어들었다. 헬레니즘 시대 주요 유리 생산지였던 시리아와 이집트가 기원전 1세기에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로마 유리는 제국의 기반 위에서 발전할 수 있었다.
- 유리 불기 기법의 발명: 유리 불기는 유리 세공업자들이 훨씬 얇은 벽을 가진 용기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각 용기에 필요한 유리의 양을 줄였다. 유리 불기는 다른 기술보다 훨씬 빨랐으며, 용기는 마무리가 덜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 원자재 및 장비의 추가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1]
- 틀 불기 기법의 개발: 1세기 초두에는 틀에 불어넣는 틀 불기의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녹인 유리를 틀에 흘려 넣어 성형하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 등도 발달했다.
- 헬레니즘의 영향: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장식, 이집트나 그리스의 종교적인 모티프가 사용되었다.
- 새로운 기술의 발전: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이용하여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생산되었다.
- 로마인의 선호: 로마인이 선호했던 모티프로는 새 등이 꼽힌다. 또한, 고급품으로 청색 바탕에 흰색 유리를 덮어 흰색 부분을 부조 조각한 "카메오 유리"도 생산되었다.
- 시돈의 영향: 시돈 근처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유리 그릇이 생산되었다. 명문은 제작자명이나 표어 등 다양했다.
- 새로운 경향: 1세기 후반부터 갈리아 (프랑스)나 게르마니아 (독일) 등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그린 "서커스 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출현했다. 또한,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 몰 장식의 활용: 불기법의 개발에 따라, 솜씨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고, 더욱 부풀리는 방법인 "몰 장식"이 다용되었다.
- 투명 유리의 보급: 투명 유리의 보급에 따라, 분말 상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녹여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이나, 에나멜 채색 및 콜드 페인팅도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로마 유리는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2. 3. 기술 발전과 영향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리 세공의 역사가 발전하고 고고학적 문화에서 유리의 비중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서기 1세기 초 로마 세계에는 유리를 지칭하는 라틴어가 없었다.[1] 하지만, 늦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이르러 로마에서는 주로 헬레니즘 시대의 기술과 양식을 사용하여 유리가 생산되었다. 대부분의 제조 기술은 시간이 오래 걸렸고, 초기 제품은 두꺼운 벽의 용기였으며, 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점과 원료 유리의 생산을 위해 나트론을 수입하는 비용이 합쳐져 유리의 사용이 제한적이었고, 유리는 비싸고 지위가 높은 재료로 여겨졌다.공화정 시대에는 유리 산업이 비교적 작은 수공예 산업이었다. 하지만 서기 1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이용 가능한 유리 용기의 양과 다양성이 극적으로 증가했다.[1] 이는 공화정 시대 말 로마의 영향력이 급증한 직접적인 결과였으며, 내전 수십 년 후에 이어진 팍스 로마나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하에서 일어난 국가의 안정화에 기인했다.[1]
서기 1세기 동안 유리 불기라는 새로운 주요 기술이 도입되었다.[7] 유리 불기는 유리 세공업자들이 훨씬 얇은 벽을 가진 용기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각 용기에 필요한 유리의 양을 줄였다. 유리 불기는 다른 기술보다 훨씬 빨랐으며, 용기는 마무리가 덜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 원자재 및 장비의 추가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초기에는 초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이전 기술이 지배적이었지만,[8] 서기 1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불기 기술이 이전 기술을 대체했다.[1]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로 생산 비용이 절감되었고, 유리는 사회의 더 넓은 계층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용 가능해졌다. 서기 1세기 중반에 이르러 유리 용기는 귀중하고 지위가 높은 상품에서 흔히 사용되는 재료로 바뀌었다. "유리 술잔은 구리 동전으로 살 수 있었다"(스트라보, 지리학 XVI.2). 이러한 성장은 또한 모자이크를 위한 최초의 유리 테세라의 생산과 최초의 창유리 생산을 가져왔으며,[1] 용광로 기술이 향상되어 처음으로 용융 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9] 동시에 제국의 확장은 사람들의 유입과 문화적 영향력의 확장을 가져와 동양의 장식 양식이 채택되었다.[1]
유리 제조는 서기 2세기 초에 절정에 달했으며, 모든 종류의 가정 환경에서 유리 제품이 사용되었다.[1] 불기 및 더 적은 정도의 주조의 주요 생산 기술은 로마 시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용기 유형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술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1] 2세기부터 양식이 점점 더 지역화되었으며,[1] 병과 연고병과 같은 닫힌 용기는 내용물의 거래의 부산물로 이동했으며, 많은 용기가 로마 액체 측정 기준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1]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불기법이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발명되어 급속도로 제국 내에 퍼졌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으며, 종래처럼 주형이나 마무리를 위한 연마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유리 제조의 효율을 현저하게 높였다. 1세기 초에는 틀에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녹인 유리를 틀에 흘려 넣어 성형하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 등도 발달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에 의한 장식, 이집트나 그리스의 종교적인 모티프가 꼽힌다. 한편, 새롭게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이용하여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의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생산되었다. 로마인이 선호했던 모티프로는 새 등이 꼽힌다. 또한, 고급품으로 청색 바탕에 흰색 유리를 덮어 흰색 부분을 부조 조각한 "카메오 유리"도 생산되었다.
1세기 후반부터 갈리아 (프랑스)나 게르마니아 (독일) 등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그린 "서커스 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출현했다. 또한,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불기법의 개발에 따라, 솜씨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고, 더욱 부풀리는 방법인 "몰 장식"이 다용되었다. 또한, 투명 유리의 보급에 따라, 분말 상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녹여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이나, 에나멜 채색 및 콜드 페인팅도 성행하게 되었다.
2. 4. 지역적 확산과 교역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리 세공의 역사가 발전하고 고고학에서 유리의 비중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서기 1세기 초 로마에는 유리를 지칭하는 라틴어가 없었다.[1] 하지만, 늦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이르러 로마에서는 주로 헬레니즘 시대의 기술과 양식을 사용하여 유리가 생산되었다. 대부분의 제조 기술은 시간이 오래 걸렸고, 초기 제품은 두꺼운 벽의 용기였으며, 상당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이러한 점과 원료 유리의 생산을 위해 나트론을 수입하는 비용이 합쳐져 유리의 사용이 제한적이었고, 유리는 비싸고 지위가 높은 재료로 여겨졌다.공화정 시대에는 유리 산업이 비교적 작은 수공예 산업이었다. 하지만 서기 1세기 초 수십 년 동안 이용 가능한 유리 용기의 양과 다양성이 극적으로 증가했다.[1] 이는 공화정 시대 말 로마의 영향력이 급증한 직접적인 결과였으며, 내전 수십 년 후에 이어진 팍스 로마나와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하에서 일어난 국가의 안정화에 기인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유리는 이미 서아시아(예: 파르티아 제국)에서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의 쿠샨 제국으로, 그리고 중국의 한나라까지 이동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발견된 최초의 로마 유리는 광저우의 1세기 초 무덤에서 발견되었으며, 표면적으로는 남중국해를 통해 유입되었다.[5][6]

서기 1세기 동안 유리 생산에 새로운 주요 기술인 유리 불기가 도입되었다.[7] 유리 불기는 유리 세공업자들이 훨씬 얇은 벽을 가진 용기를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고, 각 용기에 필요한 유리의 양을 줄였다. 유리 불기는 다른 기술보다 훨씬 빨랐으며, 용기는 마무리가 덜 필요했기 때문에 시간, 원자재 및 장비의 추가 절감 효과를 가져왔다. 초기에는 초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시대에 이전 기술이 지배적이었지만,[8] 서기 1세기 중후반에 이르러 불기 기술이 이전 기술을 대체했다.[1]
이러한 요인들의 결과로 생산 비용이 절감되었고, 유리는 사회의 더 넓은 계층에서 다양한 형태로 이용 가능해졌다. 서기 1세기 중반에 이르러 유리 용기는 귀중하고 지위가 높은 상품에서 흔히 사용되는 재료로 바뀌었다. "유리 술잔은 구리 동전으로 살 수 있었다"(스트라보, 지리학 XVI.2). 이러한 성장은 또한 모자이크를 위한 최초의 유리 테세라의 생산과 최초의 창유리 생산을 가져왔으며,[1] 용광로 기술이 향상되어 처음으로 용융 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9] 동시에 제국의 확장은 사람들의 유입과 문화적 영향력의 확장을 가져와 동양의 장식 양식이 채택되었다.[1]

유리 제조는 서기 2세기 초에 절정에 달했으며, 모든 종류의 가정 환경에서 유리 제품이 사용되었다.[1] 불기 및 더 적은 정도의 주조의 주요 생산 기술은 로마 시대의 나머지 기간 동안 사용되었으며, 용기 유형의 변화는 있었지만 기술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1] 2세기부터 양식이 점점 더 지역화되었으며,[1] 증거에 따르면 병과 연고병과 같은 닫힌 용기는 내용물의 거래의 부산물로 이동했으며, 많은 용기가 로마 액체 측정 기준에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1] 옅고 무색의 유리에 장식적인 부가물로 유색 유리의 사용도 증가했으며, 금속 용기는 유리 용기의 형태에 계속 영향을 미쳤다.[1] 콘스탄티누스의 개종 이후, 유리 공장은 이교도 종교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에서 기독교 종교 이미지를 묘사하는 것으로 더 빠르게 전환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동방 유리 산업이 활력을 되찾았으며, 서부 지방에 로마 군단이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침체를 막는 데 크게 기여했다.[1] 4세기 중반에는 금형 불기가 드물게 사용되었다.[1]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불기법이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발명되어 급속도로 제국 내에 퍼졌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으며, 종래처럼 주형이나 마무리를 위한 연마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유리 제조의 효율을 현저하게 높였다. 1세기 초에는 틀에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녹인 유리를 틀에 흘려 넣어 성형하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 등도 발달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에 의한 장식, 이집트나 그리스의 종교적인 모티프가 꼽힌다. 한편,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이용하여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의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생산되었다. 로마인이 선호했던 모티프로는 새 등이 꼽힌다. 고급품으로 청색 바탕에 흰색 유리를 덮어 흰색 부분을 부조 조각한 "카메오 유리"도 생산되었다.
시돈 근처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유리 그릇이 생산되었다. 명문은 제작자명이나 표어 등 다양했다.
1세기 후반부터 갈리아 (프랑스)나 게르마니아 (독일) 등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그린 "서커스 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출현했다.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불기법의 개발에 따라, 솜씨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고, 더욱 부풀리는 방법인 "몰 장식"이 다용되었다. 투명 유리의 보급에 따라, 분말 상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녹여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이나, 에나멜 채색 및 콜드 페인팅도 성행하게 되었다.
3. 생산
로마 제국에서 유리는 초기에는 사치품이었으나, 생산 기술의 발전과 제국의 확장으로 점차 대중화되었다.
기원전 1세기, 로마는 헬레니즘 세계의 유리 생산 기술을 흡수했지만, 당시에는 유리를 지칭하는 라틴어조차 없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정 말기에 헬레니즘 기술과 양식을 바탕으로 유리 생산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제조 기술과 원료(나트론) 수입 비용으로 인해 유리는 여전히 비싸고 귀한 재료였다.
서기 1세기 초, 로마의 영향력 확대, 팍스 로마나, 아우구스투스 통치 하의 안정은 유리 산업의 성장을 촉진했다. 유리 용기의 양과 다양성이 크게 증가했으며, 로마 유리는 서아시아, 쿠샨 제국, 심지어 중국 한나라까지 전파되었다.
이 시기에 유리 불기 기술이 도입되어 생산 비용이 절감되고 유리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유리 불기는 얇은 벽의 용기를 빠르게 생산할 수 있게 해주었고, 마무리 작업도 덜 필요했다. 초기에는 이전 기술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1세기 중후반에는 유리 불기 기술이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기술 발전과 제국의 확장으로 유리는 더 이상 사치품이 아니었고, 사회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재료가 되었다. 1세기 중반에는 유리 용기가 흔해졌고, 유리 술잔은 구리 동전으로 살 수 있을 정도였다. 또한, 모자이크용 유리 테세라와 창유리 생산도 시작되었다.
2세기 초에는 유리 제조가 절정에 달했고, 가정에서 다양한 유리 제품이 사용되었다. 이후에도 불기 및 주조 기술은 계속 사용되었으며, 지역별로 다양한 양식이 나타났다. 4세기 중반에는 금형 불기가 드물게 사용되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불기법이 발명되어 제국 내에 빠르게 퍼졌다. 이는 획기적인 기술로, 주형이나 연마가 필요 없어 유리 제조 효율을 크게 높였다. 1세기 초에는 틀 불기 기법과 주조 기법, 틀 누름 매달기 기법 등도 개발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장식과 이집트, 그리스의 종교적 모티프가 사용되었다. 주조 기법과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통해 다양한 색상의 용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생산되었다. 로마인들은 새 등의 모티프를 선호했으며, 고급품으로는 카메오 유리도 제작되었다. 시돈 근처에서는 제작자명이나 표어가 새겨진 유리 그릇이 생산되었다.
1세기 후반, 갈리아(프랑스)와 게르마니아(독일) 등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그린 "서커스 컵"이 등장했다.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유리가 선호되었다. 불기법의 발달로 몰 장식이 활용되었고, 투명 유리의 보급에 따라 채색, 에나멜 채색, 콜드 페인팅 기법도 성행했다.
3. 1. 구성 성분
로마 유리는 규소와 소다를 주성분으로 하여 만들어졌다.[7] 유리의 재료는 형성제, 융제, 안정제, 불투명화제 또는 착색제로 분류할 수 있다.- 형성제: 유리의 주성분은 모래(석영)였으며, 약간의 알루미나(일반적으로 2.5%)와 최대 8%의 석회를 포함했다.[4]
- 융제: 규소의 융점을 낮추기 위해 소다가 사용되었다.[10] 소다의 주요 공급원은 나트론이었다.
- 안정제: 석회 또는 마그네시아와 같은 안정제가 필요했다. 석회는 해변 모래의 석회질 입자를 통해 유리에 들어갔다.[17]
로마 유리는 약 1%에서 2%의 염소를 함유하고 있는데,[5] 이는 소금(NaCl) 첨가 또는 나트론의 오염 물질 때문으로 추정된다.
3. 2. 유리 제조
로마 시대의 유리 제조는 이슬람 황금 시대와 비잔틴 유리 시대와 비교해 볼 때 중요한 산업이었음이 분명하다. 로마 시대 말기에는 특수화된 가마 내부의 탱크에서 유리가 대량으로 생산되었으며, 베트 셰아림에서 발견된 8톤의 유리 덩어리가 이를 보여준다.[17] 이러한 작업장에서는 단일 가마 소성으로 수 톤의 원료 유리를 생산할 수 있었으며, 이는 몇 주가 걸릴 수 있었다. 하나의 주요 작업장에서 여러 개의 2차 유리 가공 현장에 원료 유리를 공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7] 원료 유리 생산은 비교적 소수의 작업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17] 이곳에서 유리가 대량으로 생산된 다음 덩어리로 부서졌다.[11]창유리의 경우에만 국지적인 유리 제조에 대한 증거가 제한적이다. 플리니우스의 박물지 (36, 194)는 서기 1세기 중반에 용융 유리가 처음 사용된 증거[9] 외에도 유리 생산의 확장과 함께 1세기 초중반에 가마 기술이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유리 제조 작업장의 위치는 대량으로 필요한 연료, 유리의 주요 구성 요소인 모래, 그리고 플럭스 역할을 하는 소다회(natron)의 세 가지 주요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다. 로마 유리는 와디 엘 나트룬(Wadi El Natrun)에서 얻은 소다회에 의존했으며, 그 결과 로마 시대의 유리 제조 작업장은 동부 지중해의 해안 지역에 국한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17] 이는 그들이 생산한 무색 또는 자연색 유리의 거래를 용이하게 했으며, 로마 제국 전역의 유리 가공 현장에 도달했다.[17]
로마 유리 제조 시설에 대한 고고학적 증거가 부족하여 생산 모델에 대한 증거로 화학적 조성이 사용되었으며,[15] 생산의 분할은 모든 변동이 원료 유리 제조의 차이와 관련이 있음을 나타낸다.[17] 로마가 플럭스로 와디 엘 나트룬에서 얻은 소다회에 의존했기 때문에[12] 대부분의 로마 유리에서 대체로 균질한 조성이 나타났다.[13] 주요 분석 결과가 발표되었음에도 불구하고,[14] 서로 다른 분석 방법으로 생성된 화학 분석 결과의 비교는 최근에야 시도되었으며,[15][16] 로마 유리 조성에 약간의 변화가 있지만, 이 시대에 의미 있는 조성 그룹을 설정하기는 어려웠다.[17]
3. 3. 재활용
로마 작가 스타티우스와 마르티알리스는 깨진 유리의 재활용이 유리 산업의 중요한 부분이었음을 시사하며, 이 시기 가정 유적지에서 비교적 큰 유리 조각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인다.[7] 서방 제국에서는 깨진 유리의 재활용이 빈번하고 광범위했다는 증거가 있으며,[13] 깨진 유리 제품이 원료 유리로 다시 녹이기 전에 지역 현장에 집중되었다는 증거도 있다. 동방 제국에서는 재활용된 로마 유리가 파르티아 도자기의 유약에 사용되었다는 증거가 있다.[18][19] 조성 측면에서, 반복적인 재활용은 착색제로 사용된 금속의 높은 수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20]3. 4. 유리 가공
유리 제조와 비교하여, 제국 전역의 여러 지역에서 유리 가공에 대한 증거가 발견된다. 유리 가공은 제조 과정과 달리 훨씬 낮은 온도와 훨씬 적은 연료를 필요로 했다. 이로 인해, 그리고 제국의 확장으로 인해 기원전 1세기 말까지 로마, 캄파니아, 포 계곡[7]에 유리 가공장이 생겨났으며, 주조 용기와 함께 새로운 불어 제작 용기를 생산했다. 이탈리아는 이 시기에 밝은 색상의 용기를 가공하고 수출하는 중심지였으며,[21] 생산은 서기 1세기 중반에 정점을 찍었다.[5]서기 1세기 초에서 중반에 걸쳐 제국의 성장은 무역로를 따라 유리 가공장을 설립하는 결과를 낳았고, 쾰른 및 기타 라인란트 지역은 제국 시대부터 중요한 유리 가공장이 되었으며,[7] 시리아 유리가 이탈리아까지 수출되었다.[23] 이 기간 동안 용기의 형태는 작업장마다 달랐으며, 라인란트와 프랑스 북부와 같은 지역에서는 남쪽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를 생산했다.[7] 이 산업의 성장은 서기 3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그리피넨시스(Colonia Claudia Agrippinensis)의 현장들은 상당한 확장을 경험한 것으로 보이며,[22] 3세기와 4세기 초에는 알프스 북부의 생산자들이 이탈리아 북부와 알프스 너머의 지역으로 수출을 했다.[23]
아퀼레이아와 같은 유리 가공장은 유리 가공 전통의 확산[22]과 용기로 빈 유리 제품을 사용한 재료의 무역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23] 그러나 4세기[22]와 5세기에는[5] 이탈리아의 유리 작업장이 주를 이루었다.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불기법이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발명되어 급속도로 제국 내에 퍼졌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으며, 종래처럼 주형이나 마무리를 위한 연마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유리 제조의 효율을 현저하게 높였다.
넓은 의미에서는 불기법 중 하나이지만, 1세기 초두에는 틀에 불어넣는 틀 불기의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녹인 유리를 틀에 흘려 넣어 성형하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 등도 발달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에 의한 장식, 이집트나 그리스의 종교적인 모티프가 꼽힌다. 한편, 새롭게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이용하여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의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생산되었다. 로마인이 선호했던 모티프로는 새 등이 꼽힌다. 또한, 고급품으로 청색 바탕에 흰색 유리를 덮어 흰색 부분을 부조 조각한 "카메오 유리"도 생산되었다.
시돈 근처에서는 명문이 새겨진 유리 그릇이 생산되었다. 명문은 제작자명이나 표어 등 다양했다.
1세기 후반부터 갈리아 (프랑스)나 게르마니아 (독일) 등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그린 "서커스 컵"이라고 불리는 것이 출현했다. 또한,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것을 선호하게 되었다.
불기법의 개발에 따라, 솜씨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고, 더욱 부풀리는 방법인 "몰 장식"이 다용되었다. 또한, 투명 유리의 보급에 따라, 분말 상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녹여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이나, 에나멜 채색 및 콜드 페인팅도 성행하게 되었다.
4. 양식
로마 시대 초기에는 유리 제조 기술이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을 받아 강렬한 색상과 모자이크 패턴이 특징이었다. 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새로운 고색 줄무늬 식기가 등장했다. 이 시기에는 지역에 따라 유리의 스타일이 다르게 나타났는데, 1세기 초의 반투명 유색 고급 식기는 '서양' 기원이 뚜렷한 반면, 후기 무색 고급 식기는 더 '국제적'이었다.[8]
기원전 1세기 중반, 시리아와 이집트 등 헬레니즘 시대 주요 유리 생산지가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로마 유리는 로마 제국을 기반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유리 불기 기법이 발명되어 제국 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는 획기적인 기술 혁신으로, 유리 제조의 효율성을 크게 높였다.[1]
1세기 초에는 틀에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과 녹인 유리를 틀에 흘려 넣어 성형하는 주조 기법 등이 개발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장식과 이집트나 그리스의 종교적인 모티프가 사용되었다. 한편, 주조 기법을 통해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가 생산되었다. 로마인들은 새와 같은 모티프를 선호했으며, 고급품으로는 청색 바탕에 흰색 유리를 덮어 부조 조각한 카메오 유리도 생산되었다.[1] 시돈 근처에서는 제작자명이나 표어가 새겨진 명문 유리 그릇이 생산되었다.
1세기 후반,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등지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그린 "서커스 컵"이 등장했다.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유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불기법의 발달과 함께 몰 장식이 활용되었고, 투명 유리의 보급에 따라 분말 형태의 색 유리를 이용한 채색 기법, 에나멜 채색, 콜드 페인팅 등이 성행했다.
5. 제작 기법
로마 시대의 유리 제작 기술은 헬레니즘 시대의 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했으며, 특히 기원전 1세기 중반 유리 불기 기법의 발명은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유리 불기는 이전의 주형 제작이나 연마 작업 없이 빠르게 유리 용기를 만들 수 있게 해 주었고, 이는 유리 생산량 증가와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유리가 대중화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21]
기원전 1세기 말, 로마의 영향력 확대, 팍스 로마나 도래, 아우구스투스 통치 하의 국가 안정화는 유리 산업 발전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1] 로마 유리는 서아시아에서 쿠샨 제국, 한나라까지 전파되었으며, 광저우의 1세기 초 무덤에서는 남중국해를 통해 유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로마 유리가 발견되기도 했다.[5][6]
1세기 초에는 틀에 유리를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 녹인 유리를 틀에 부어 형태를 만드는 주조 기법, 틀 누름 매달기 기법 등이 개발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장식과 이집트, 그리스의 종교적 주제가 사용되었다. 또한, 주조 기법과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통해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가 생산되었으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인기를 끌었다. 로마인들은 새와 같은 주제를 선호했으며, 고급품으로는 카메오 유리가 제작되었다. 시돈 근처에서는 제작자 이름이나 표어가 새겨진 유리 그릇이 생산되기도 했다.
1세기 후반에는 갈리아(프랑스)나 게르마니아(독일) 등에서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묘사한 "서커스 컵"이 등장했으며, 투명한 유리가 선호되기 시작했다. 유리 불기 기법의 발달과 함께, 자유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는 "몰 장식"이 자주 사용되었다. 투명 유리의 보급으로 분말 형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섞어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 에나멜 채색, 콜드 페인팅도 유행했다.
5. 1. 코어 및 로드 성형 용기
장인들은 금속 막대에 진흙과 짚 덩어리를 고정하여 심을 만들고, 그 심을 액체 유리에 담그거나 심 위에 액체 유리를 끌어올려 용기를 만들었다.[7] 유리가 식은 후 심을 제거하고, 손잡이, 테두리 및 밑면을 추가했다. 이 용기들은 비교적 두꺼운 벽, 밝은 색상, 그리고 대조되는 색상의 지그재그 패턴이 특징이며, 크기는 작은 연고 또는 향수 용기로 제한되었다.[7] 이 초기 기술은 슬럼핑 및 유리 주조 용기가 더 일찍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1세기에 인기를 유지했다.[1]5. 2. 냉간 절삭 용기
이 기술은 보석의 대체품으로서 유리의 기원과 관련이 있다. 석재 및 조각된 보석 기술을 차용하여 장인들은 원시 유리 블록 또는 두꺼운 성형된 유리 블랭크로부터 다양한 소형 용기를 생산할 수 있었으며,[7] 여기에는 두 가지 이상의 색상으로 된 카메오 유리와 케이지 컵(일부 논쟁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전히 절단 방식으로 장식되었다고 생각한다)이 포함된다.5. 3. 유리 불기: 자유 불기 및 몰드 불기 용기
기원전 1세기 중반에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유리 불기법이 발명되어 급속도로 로마 제국 내에 퍼졌다. 이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이었으며, 종래처럼 주형이나 마무리를 위한 연마가 필요 없었기 때문에 유리 제조의 효율을 현저하게 높였다.[21]넓은 의미에서는 불기법 중 하나이지만, 1세기 초두에는 틀에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녹인 유리를 틀에 흘려 넣어 성형하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 등도 발달했다.
1세기 후반부터 갈리아(프랑스)나 게르마니아(독일) 등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그린 "서커스 컵"이 출현했다.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유리를 선호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불기법의 개발에 따라, 자유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고, 더욱 부풀리는 방법인 "몰 장식"이 다용되었다. 또한, 투명 유리의 보급에 따라, 분말 상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녹여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이나, 에나멜 채색 및 콜드 페인팅도 성행하게 되었다.
5. 4. 기타 제작 기법
기원전 1세기 중반,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유리 불기 기법이 발명되어 로마 제국 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는 획기적인 기술로, 이전처럼 주형을 사용하거나 연마할 필요가 없어 유리 제조 효율을 크게 높였다.1세기 초에는 유리를 틀에 불어넣는 틀 불기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는 녹인 유리를 틀에 부어 형태를 만드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도 발달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장식, 이집트나 그리스의 종교적 주제가 사용되었다. 한편, 새롭게 개발된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통해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생산되었다. 로마인들은 새와 같은 주제를 선호했다. 또한, 고급품으로는 푸른색 바탕에 흰색 유리를 덧씌워 흰색 부분을 부조로 조각한 "카메오 유리"도 제작되었다.
시돈 근처에서는 제작자 이름이나 표어 등 다양한 명문이 새겨진 유리 그릇이 생산되었다.
1세기 후반부터 갈리아(프랑스)나 게르마니아(독일) 등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묘사한 "서커스 컵"이 등장했다. 또한,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유리가 선호되기 시작했다.
유리 불기 기법이 개발되면서, 솜씨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고, 더욱 부풀리는 방법인 "몰 장식"이 자주 사용되었다. 또한, 투명 유리가 보급되면서 분말 형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섞어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이나, 에나멜 채색 및 콜드 페인팅도 유행했다.
6. 장식 기법
기원전 1세기 중반, 동지중해 연안부에서 유리를 입으로 불어서 만드는 불기법이 발명되어 로마 제국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이는 획기적인 기술로, 이전의 주형이나 연마 작업 없이도 유리를 만들 수 있어 생산 효율을 크게 높였다. 1세기 초에는 틀에 유리를 불어 넣어 모양을 만드는 틀 불기 기법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는 녹인 유리를 틀에 부어 성형하는 주조 기법이나 틀 누름 매달기 기법도 발달했다.
헬레니즘 시대의 영향으로 모자이크 기법을 이용한 장식과 이집트, 그리스의 종교적인 문양이 나타났다. 또한, 주조 기법과 틀 누름 매달기 기법을 활용하여 에메랄드 그린, 페르시안 블루, 피콕 블루 등 다채로운 색상의 용기, 특히 용골 모양의 그릇이 생산되었다. 로마인들은 새와 같은 문양을 선호했으며, 고급품으로는 푸른색 바탕에 흰색 유리를 덧씌워 흰색 부분을 부조 조각한 "카메오 유리"도 제작되었다. 시돈 근처에서는 제작자명이나 표어 등 다양한 명문이 새겨진 유리 그릇이 생산되었다.
1세기 후반, 갈리아(프랑스)와 게르마니아(독일) 등지에서는 전차 경주나 검투사 시합을 묘사한 "서커스 컵"이 등장했다. 1세기 말경부터는 투명한 유리가 선호되기 시작했다. 불기법이 개발되면서, 솜씨 불기 도중에 요철이 있는 틀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기고 부풀리는 "몰 장식"이 많이 사용되었다. 투명 유리가 보급되면서 분말 형태의 색 유리를 물이나 기름에 녹여 용기에 채색하는 기법, 에나멜 채색, 콜드 페인팅도 유행했다.
6. 1. 주조 유리 패턴


슬럼핑에 사용되는 유리 시트는 단색 또는 여러 색상의 유리로 제작하거나 '모자이크' 조각으로 제작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물건의 생산은 나중에 현대적인 지팡이 공예 및 밀레피오리 기술로 발전했지만 눈에 띄게 다르다. '모자이크' 유리의 6가지 주요 패턴은 다음과 같다:[7]
- '''꽃무늬 (밀레피오리) 및 나선형 패턴:''' 유색 유리 막대를 묶어 가열하고 녹여서 단일 조각으로 만든 후, 단면으로 잘라 그 결과로 만들어진 원반을 함께 융합하여 복잡한 패턴을 만들었다. 또는 대조되는 색상의 두 유리 조각을 융합한 다음, 뜨거운 상태에서 유리 막대에 감아 나선형 패턴을 만들 수도 있었다.[7] 이 단면을 잘라서 평평한 판으로 융합하거나 일반 유리에 융합할 수도 있었다.
- '''대리석 및 얼룩덜룩한 패턴:''' 일부는 녹는 동안 유리판의 슬럼핑 과정에서 원래 패턴의 왜곡을 통해 형성된다.[7] 그러나 생산자들은 교대로 색상의 나선형 및 원형 패턴을 사용하여 사도닉스와 같은 자연석의 외관을 의도적으로 모방할 수 있었다.[1] 이는 기원 1세기의 유적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되는 유리 공예품 중 하나인 기둥 몰딩 그릇에서 가장 자주 발생한다.[7]
- '''레이스 패턴:''' 유색 유리 조각을 함께 융합하기 전에 대조되는 색상의 유리 실로 꼬았다. 이는 초기 시대에 인기 있는 방법이었지만 기원 1세기 중반에는 유행이 지난 것으로 보인다.[7]
- '''줄무늬 패턴:''' 단색 및 레이스 유리의 길이를 함께 융합하여 선명한 줄무늬 디자인을 만들었는데, 이는 기원 1세기 말에 레이스 패턴 기술에서 발전한 기술이다.[1]
여러 색상의 용기 생산은 기원 1세기 중반 이후 감소했지만 얼마 동안 계속 사용되었다.[7]
6. 2. 금 유리 (Gold glass)

금 샌드위치 유리 또는 금 유리는 헬레니즘 유리에서 개발되어 3세기에 부활한 기술이다. 이 기술은 디자인이 있는 금박 층을 용융된 두 층의 유리 사이에 고정하는 방식이다. 훨씬 더 큰 디자인도 소수 존재하지만, 생존한 약 500개의 대부분은 로마 카타콤에서 무덤을 표시하고 장식하기 위해 모르타르에 눌러 사용된 와인 잔이나 유리의 잘린 바닥인 라운델이다. 대부분은 4세기에 제작되었으며 5세기까지 이어졌다. 대부분은 기독교적이지만, 많은 이교도와 소수의 유대교적이며, 예술적으로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그들의 도상학은 많이 연구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훨씬 더 적은 수의 3세기 초상화는 금 위에 안료를 칠하여 훌륭하게 제작되었다. 같은 기술은 로마에서 1세기에 금 테세라를 사용하여 모자이크를 만들기 시작했고, 5세기에는 종교적 모자이크의 표준 배경이 되었다.[25]
6. 3. 기타 장식 기법
로마 시대에는 에나멜 유리와 유리 조각을 포함한 다양한 기법이 사용되었다.7. 테세라 및 창유리
서기 1세기 중반, 유리 용기는 귀하고 지위가 높은 상품에서 흔히 사용되는 재료로 바뀌었다. 이와 동시에 모자이크를 위한 최초의 유리 테세라와 최초의 창유리가 생산되기 시작했는데,[1] 이는 용광로 기술이 향상되어 처음으로 용융 유리를 생산할 수 있게 된 덕분이었다.[9]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깨진 유리 조각이나 유리 막대가 모자이크에 사용되었지만, 1세기 초에는 테세라(tesserae)라고 알려진 작은 유리 타일이 모자이크용으로 특별히 제작되었다.[1] 이 타일은 주로 노란색, 파란색, 녹색 계열이었으며, 분수 아래나 강조용으로 사용되었다.
같은 시기에 최초의 창유리도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1] 초기 창유리는 모래나 돌 위에 놓인 나무 틀에 거친 캐스팅 방식으로 제작되었으나,[1] 3세기 후반부터는 머프 공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머프 공정은 불어서 만든 원통을 옆으로 잘라 평평하게 펴서 판을 만드는 방식이다.[26]
8. 화학 및 색상
로마 유리의 색상은 다양한 화합물을 첨가하여 만들어졌다. 처리되지 않은 유리의 자연적인 색상은 '청록색'을 띠는데, 이는 산화철(II) (FeO) 성분 때문이다. 많은 초기 로마 시대 유물들이 이 '청록색'을 띠고 있다.[7]
로마 시대에는 산화 망간이나 안티몬을 첨가하여 무색 유리를 생산했다.[1] 이 과정은 산화철(II)을 산화철(III)으로 산화시키는데, 산화철(III)은 노란색을 띠지만 착색 효과가 훨씬 약하여 유리가 무색으로 보이게 한다. 망간을 탈색제로 사용하는 것은 로마 시대에 발명된 것으로, 제국 시대에 처음 언급되었다. 이전에는 안티몬이 풍부한 광물이 사용되었다.[1] 그러나 안티몬은 망간보다 더 강력한 탈색제로 작용하여 더 진정한 무색 유리를 생성했다. 이탈리아와 북유럽에서는 안티몬 또는 안티몬과 망간의 혼합물이 3세기까지 사용되었다.[27]
황은 탄산나트륨의 오염 물질로 유리에 유입되어 녹색을 띠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 철-황 화합물의 형성은 호박색을 생성한다.[1]
다음은 로마 유리에 사용된 착색제와 그에 따른 색상, 제련 조건 등을 정리한 표이다.
착색제 | 함량 | 설명 | 용광로 조건 |
---|---|---|---|
산화철(II) (FeO) | 청록색은 처리되지 않은 유리의 일반적인 자연 색상 | ||
산화철(III) (Fe2O3) | 산화철(II)을 산화철(III)으로 산화시켜 무색으로 만듬 | ||
철–황 화합물 | 0.2%-1.4% S[1] 0.3% Fe | 황은 탄산나트륨의 오염 물질로 유입, 철-황 화합물은 호박색 생성 | 환원성 |
망간 (연망간석 등) | 약 3%[5] | 산화성[5] | |
구리 | 2%–13%[1] | 자연적인 청록색은 구리 첨가로 강화. 구리는 반투명한 파란색에서 더 어둡고 진한 녹색으로 변화 | 산화성[1] |
납 | 납 첨가는 구리에 의해 생성된 녹색을 어둡게 함[1] | ||
코발트 | 0.1%[1] | 강렬한 착색 | |
이집트 청색[1] | |||
구리, 납 | >10% Cu 1% – 20% Pb[1] | 강력한 환원 조건에서 구리는 산화제일구리 형태로 침전, 갈색에서 피처럼 붉게. 납은 침전과 광채 촉진. 4, 5세기 이후 대륙에서 생산[29] | 강력한 환원성 |
안티몬 (황안광 등) | 1–10%[1] | 안티몬은 유리 매트릭스의 석회와 반응, 안티몬산칼슘 결정체를 침전시켜 불투명도가 높은 흰색 생성[1] | 산화성 |
안티몬 및 납 (빈드하임광 등)[1] | 납파이로안티몬산염의 침전은 불투명한 노란색 생성. 모자이크 및 다색 조각에 사용[1] |
9. 폼페이 유적에서 본 로마 유리
폼페이 유적에서는 출토된 유리 그릇과 벽화에 그려진 유리 그릇, 두 가지 방법으로 로마 유리를 알 수 있다. 폼페이에서 출토된 유리 그릇은 동서로 뻗은 포르투나 거리에서만 항아리 250점, 컵 30점, 접시 4점, 대형 컵 6점에 달한다. 출토된 유리 그릇에는 고급품도 있고 일용품도 있다. 벽화에서는 과일이 담긴 사발이나 고블렛, 액체가 담긴 스키포스(양손잡이 잔)나 항아리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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