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올드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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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버트 올드리치는 1918년 로드아일랜드에서 태어나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 중퇴하고, 1941년 RKO에 입사하여 영화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장 르누아르, 찰리 채플린 등 유명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1953년 《빅 리거》로 감독 데뷔했다. 이후 《아파치》, 《베라 크루즈》, 《키스 미 데들리》, 《무엇이 제인에게 일어났는가?》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며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호평을 동시에 얻었다. 1970년대에는 《롱기스트 야드》, 《허슬》 등 흥행작을 만들었으며, 1975년 미국 감독 조합 회장을 역임했다. 올드리치는 1983년 신부전으로 사망했으며, 그의 작품은 폭력적인 묘사와 사회 비판적인 주제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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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올드리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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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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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로버트 버지스 올드리치 |
출생 | 1918년 8월 9일 |
출생지 |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크랜스턴 |
사망 | 1983년 12월 5일 (65세) |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묘지 | 포레스트 론 메모리얼 파크 (할리우드 힐스) |
국적 | 미국 |
직업 | 영화 감독 프로듀서 각본가 |
활동 기간 | 1945년–1981년 |
가족 | |
배우자 | 해리엇 포스터 (1941년–1965년, 이혼) 시빌 지그프리드 (1966년–1983년) |
자녀 | 4명 (포스터와 함께) |
자녀 | 아델 알드리치 (딸) 윌리엄 알드리치 (아들) |
학력 | |
모교 | 버지니아 대학교 |
경력 | |
미국 감독 조합 (DGA) | 제15대 미국 감독 조합 회장 |
임기 시작 | 1975년 |
임기 종료 | 1979년 |
이전 | 로버트 와이즈 |
이후 | 조지 섀퍼 |
수상 |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은사자상 (1955, 《악덕》)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은곰상(감독상) (1956, 《가을의 왈츠》) |
주요 작품 | |
영화 | 《키스 미 데들리》 《악덕》 《가을의 왈츠》 《무슨 일이 제인에게?》 《조용히… 조용히, 달콤한 샤롯》 《불사조의 비상》 《특공대작전》 《죽음은 밤에 온다》 《와일드 어패치》 《롱기스트 야드》 《허슬》 《돌아오지 않는 강》 《캘리포니아 돌스》 |
기타 | |
관련 인물 | 베티 데이비스 조안 크로포드 |
2. 초기 생애
로드아일랜드주크랜스턴에서 1918년 8월 9일에 태어났다.[130] 조부는 넬슨 올드리치[131], 사촌은 넬슨 록펠러이다.[132]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다 중퇴했고, 1941년 RKO에 입사했다.[133] 장 르누아르, 찰리 채플린, 에이브러햄 폴론스키, 조지프 로지, 윌리엄 A. 웰먼 등의 조감독을 맡았다.[134]
=== 가족 ===
로버트 버지스 올드리치는 1918년 8월 9일 로드아일랜드주크랜스턴에서 "로드아일랜드의 올드리치"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7][130]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지스 올드리치(1871–1957)는 퍼터켓의 ''더 타임스'' 발행인이자 주 공화당 정치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8] 그의 어머니 로라 엘시(결혼 전 성씨는 로슨)는 뉴햄프셔 출신(1874–1931)으로, 올드리치가 13세 때 사망했다.[8]
그의 할아버지 넬슨 윌마스 올드리치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이자 예술 투자자였으며, 미국 상원에서 30년 동안(1881–1911) 공화당 의원으로 재직했다.[10][11] 언론으로부터 "국가의 총책임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연방 통화 정책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0][11][131]
올드리치의 여러 아버지 쪽 삼촌들은 투자 은행가, 건축가, 미국 하원 의원, 체이스 맨해튼 은행 회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의 고모 애비게일 그린 "애비" 올드리치는 존 D. 록펠러 2세와 결혼했으며, 현대 미술관 설립에 주요 인물이었다.[12] 넬슨 록펠러는 뉴욕 주지사를 4번 역임했으며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고, 록펠러의 네 형제는 이 감독의 사촌이었다.[12][13][132]
=== 교육 ===
로버트 올드리치는 가문의 전통과 기대를 따라 1933년부터 1937년까지 프로비던스의 모세 브라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4] 그곳에서 그는 육상 및 미식축구 팀의 주장을 맡았고, 졸업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평범한 성적으로 인해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올드리치는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15][16] 그는 스포츠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캠퍼스 클럽과 동아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대공황 동안, 청소년기의 올드리치는 1930년대 좌익 사회 및 정치 운동에 대한 동정심이 커지면서 가족의 "정치와 권력"의 정의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17][18] 올드리치의 올드리치-록펠러 우익 사회 및 정치적 성향에 대한 불만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금융 분야에서 그의 적성을 충분히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드리치는 학위를 받지 않고 대학교 4학년 때 자퇴함으로써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2. 1. 가족
로버트 버지스 올드리치는 1918년 8월 9일 로드아일랜드주크랜스턴에서 "로드아일랜드의 올드리치" 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났다.[7][130] 그의 아버지 에드워드 버지스 올드리치(1871–1957)는 퍼터켓의 ''더 타임스'' 발행인이자 주 공화당 정치의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8] 그의 어머니 로라 엘시(결혼 전 성씨는 로슨)는 뉴햄프셔 출신(1874–1931)으로, 올드리치가 13세 때 사망했다.[8]그의 할아버지 넬슨 윌마스 올드리치는 자수성가한 백만장자이자 예술 투자자였으며, 미국 상원에서 30년 동안(1881–1911) 공화당 의원으로 재직했다.[10][11] 언론으로부터 "국가의 총책임자"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연방 통화 정책 수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0][11][131]
올드리치의 여러 아버지 쪽 삼촌들은 투자 은행가, 건축가, 미국 하원 의원, 체이스 맨해튼 은행 회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그의 고모 애비게일 그린 "애비" 올드리치는 존 D. 록펠러 2세와 결혼했으며, 현대 미술관 설립에 주요 인물이었다.[12] 넬슨 록펠러는 뉴욕 주지사를 4번 역임했으며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 미국의 부통령을 지냈고, 록펠러의 네 형제는 이 감독의 사촌이었다.[12][13][132]
2. 2. 교육
로버트 올드리치는 가문의 전통과 기대를 따라 1933년부터 1937년까지 프로비던스의 모세 브라운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14] 그곳에서 그는 육상 및 미식축구 팀의 주장을 맡았고, 졸업반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평범한 성적으로 인해 예일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올드리치는 1937년부터 1941년까지 버지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15][16] 그는 스포츠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캠퍼스 클럽과 동아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대공황 동안, 청소년기의 올드리치는 1930년대 좌익 사회 및 정치 운동에 대한 동정심이 커지면서 가족의 "정치와 권력"의 정의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17][18] 올드리치의 올드리치-록펠러 우익 사회 및 정치적 성향에 대한 불만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금융 분야에서 그의 적성을 충분히 입증했음에도 불구하고, 올드리치는 학위를 받지 않고 대학교 4학년 때 자퇴함으로써 아버지에게 반항했다.
3. 영화 경력
3. 1. RKO 픽처스: 1941–1943
23세의 올드리치는 RKO 픽처스에서 프로덕션 클럭(production clerk, 제작 사무 보조)으로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는 록펠러 가문과의 연줄을 통해 어소시에이트 프로듀서(associate producer, 공동 제작자)로 입사하라는 제안을 거절한 후였다.[23][24] 그는 1941년 5월 할리우드로 떠나기 직전에 어릴 적 소꿉친구였던 첫 번째 부인 해리엇 포스터와 결혼했다.[25] RKO는 할리우드 주요 스튜디오 중 규모가 가장 작았지만, 인상적인 감독 라인업(조지 큐커, 존 포드, 알프레드 히치콕, 하워드 혹스)과 영화 스타들(프레드 아스테어와 진저 로저스, 캐리 그랜트, 캐서린 헵번, 마르크스 형제)을 자랑했다. 올드리치는 26세의 오슨 웰스가 호평을 받은 ''시민 케인''(1941) 개봉 후 RKO와 6편의 영화 계약을 체결한 직후 업무를 시작했다.[26] 1941년 12월 미국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자 올드리치는 미국 육군 항공대 영화 부대에 입대했지만, 오래된 미식축구 부상으로 군 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아 곧바로 제대했다. 영화 스튜디오의 인력 부족으로 올드리치는 3류 또는 2류 조감독으로 임명되어 영화 제작의 기본을 배울 수 있었다.[27][28] 불과 2년 만에 그는 유명 감독들의 영화 24편에 참여했다. 로버트 스티븐슨 감독의 영화 ''파리의 잔다르크''(1942), 어빙 라이스 감독의 ''더 팰컨 테이크스 오버''(1942)와 ''빅 스트리트''(1942), 리처드 월리스 감독의 ''폭격기''(1943), 에드워드 드미트릭 감독의 ''떠오르는 태양 뒤에서''(1943) 등에서 제2 조감독을 맡았다.3. 2. 조감독: 1944–1952
로버트 올드리치는 RKO를 떠나 컬럼비아 픽처스, 유나이티드 아티스츠, 파라마운트 픽처스 등 여러 스튜디오에서 프리랜서로 일했다.[32] 그는 장 르누아르(《남부인》, 1945), 루이스 마일스톤(《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 1946), 윌리엄 A. 웰먼(《G.I. 조 이야기》, 1946), 조셉 로지(《더 프라울러》, 1951), 찰리 채플린(《라임라이트》, 1952) 등 유명 감독들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영화 제작의 다양한 측면을 배웠다.[32] 특히, 르누아르에게서는 "세트 위치와 분위기", 마일스톤에게서는 "사전 계획 촬영 기술", 웰먼에게서는 "액션 장면", 로지에게서는 "배우와의 소통의 중요성", 채플린에게서는 "카메라와 관객 사이의 시각적 공감대 형성"을 배웠다.[32]올드리치는 이 기간 동안 촬영 감독 조셉 비로크, 영화 편집자 마이클 루치아노, 음악 감독 프랭크 드 볼 등과 지속적인 협력 관계를 맺었다.[34][35] 또한, 버트 랭카스터, 잭 팔란스, 리 마빈, 에디 알버트, 리처드 재켈, 웨슬리 애디, 어니스트 보그나인, 찰스 브론슨 등, 주로 남성 배우들로 구성된, 그의 영화에 주연과 조연으로 출연하는 충성스러운 배우들을 기용했다.[34][35]
그는 레슬리 펜턴이 감독한 《패든 마이 패스트》(1945)와 앨버트 루빈이 감독한 《벨 아미의 은밀한 사생활》(1947)에도 참여했다. 올드리치는 여러 감독들의 강점과 약점 모두에서 배울 수 있었다.[33]
올드리치는 루이스 마일스톤과 다시 작업하여 ''붉은 조랑말''(1949)을 제작했고, 로이 델 루스의 ''레드 라이트''(1949), 리차드 월리스의 ''A Kiss for Corliss''(1949), 테드 테츠라프의 ''하얀 탑''(1950), 조셉 로지의 ''M''(1951)과 ''더 프라울러''(1951), 그리고 레이스의 ''뉴 멕시코''(1951)를 연출했다. 버트 랭커스터가 출연한 프랑스 외인 부대 액션 영화인 ''Ten Tall Men''(1951)에서 프로듀서 해럴드 헤치의 조감독을 맡았다. 그는 샘 스피겔의 ''내가 자라면''(1951)에서 제작 관리자로, 앤드류 L. 스톤의 ''The Steel Trap''(1952)에서 제작 관리자로 일했다. 헤치는 ''Ten Tall Men''에서의 올드리치와의 협업을 즐겼고, 프랭크 타슐린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더 퍼스트 타임''(1952)에서도 그를 기용했다. 올드리치는 찰리 채플린의 ''라임라이트''(1952)에서 조감독을 맡았다.[58] 그는 ''Abbott and Costello Meet Captain Kidd''(1952)의 조감독을 맡았다.
3. 3. 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 1946–1948
로버트 올드리치는 엔터프라이즈 프로덕션에서 일하며 그의 수습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냈다.[36][37] 이 제작사는 미국 사회의 권위주의적 측면에 비판적인 사회 의식적인 주제를 다루는 독립 영화 제작자들을 위한 독특한 환경을 제공했다.[36][37]올드리치는 엔터프라이즈에서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에이브러햄 폴론스키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폴론스키는 1930년대 좌파 연합 운동의 주요 인물이었다. 그들은 억압적인 사회에 맞서 싸우는 개인의 투쟁을 다룬 영화들을 함께 만들었다.[38][39] 존 가필드가 주연을 맡은 ''바디 앤 소울''은 타락한 권투 선수가 갱스터에 맞서 자신을 구원하려는 이야기로, 올드리치에게 구조적, 주제적 측면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40] 이 영화는 자본주의를 구원할 수 없는 시스템으로 비판하며, 올드리치는 냉전 시대의 반동적인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도 1930년대의 진보적인 이상을 전달하는 지침으로 삼았다.[41][42][43]
1948년, 올드리치는 폴론스키, 가필드와 함께 필름 누아르 영화 ''악의 힘''에 참여했다. 이 영화의 시네마틱한 비주얼과 사운드는 훗날 올드리치의 영화 ''키스 미 데들리''와 ''황혼의 정의''에 영향을 주었다.[47][48]
엔터프라이즈에서 올드리치와 함께 일했던 많은 사람들이 HUAC의 조사를 받았고, 일부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투옥되기도 했다.[49][50] 올드리치는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적색 공포의 희생자들을 옹호했다.[49][50]
올드리치는 엔터프라이즈에서 루이스 마일스톤의 ''개선문''(1948)과 ''사소한 악덕은 없다''(1948),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 스탠리 크레이머 제작의 ''이것이 뉴욕이다''(1948), 막스 오퓔스의 ''잡히다''(1949) 등 다양한 영화의 조감독으로 일하며 경험을 쌓았다.
올드리치는 수습 기간 동안 영화 제작의 모든 요소를 자율적으로 통제하는 것과 창의적인 비전을 달성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깨닫고, 자신의 영화에 대한 완전한 통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51][52]
3. 4. 텔레비전: 1952–1954
1952년, 할리우드에서 감독 데뷔 기회를 얻지 못한 올드리치는 뉴욕으로 이주하여 텔레비전 업계에 합류했다.[53] 당시 텔레비전 산업은 황금기의 생방송 초창기였고, 제작자들은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인재를 영입하는 데 적극적이었다.[54][55] 올드리치는 텔레비전을 통해 영화 제작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얻은 영화적 기술과 개념을 새로운 매체에 적용할 기회를 얻었다.[56][57]올드리치는 당시 감독들이 최저 임금을 받았다고 회상하며, "감독 경험이 없거나 기회를 얻을 수 없는 사람들"만이 뉴욕에서 일했다고 말했다.[58] 월터 블레이크의 도움으로 프록터 앤드 갬블(Procter & Gamble)에 의해 앤솔로지 시리즈 ''닥터''(나중에 신디케이션에서 ''게스트''로 제목 변경)의 에피소드 연출을 맡게 되었다.[58][59] 이 시리즈는 워너 앤더슨이 주연을 맡은 초기 텔레비전 드라마였으며, 촬영 일정은 매우 빠듯했지만 올드리치는 리허설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출연자들을 안심시키고 효율적인 생방송을 이끌었다.[59][60]
''닥터'' 이후 올드리치는 할리우드로 돌아와 ''차이나 스미스'' 20편을 연출했으며, 댄 듀리에아가 출연했다. 또한 ''포 스타 플레이하우스''와 ''슐리츠 스타 플레이하우스(Schlitz Playhouse of Stars)''("The Pussyfootin' Rocks")의 감독 대역을 맡았다.[61][62]
올드리치는 초기 TV 산업을 "감독의 속성 과정"이라고 묘사했다.[63] 장편 영화 제작과는 달리, 텔레비전에서는 시리즈 전체의 품질이 중요했기 때문에, 올드리치는 2년 동안 자신의 영화에서 나중에 나타날 기술과 서사 기법을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었다.[63] 그는 영화적 구도와 구성을 사용하여 인물의 동기를 드러내고 대화를 강조하는 클로즈업을 활용하여, 에피소드에 세련된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같은 외관을 부여했다.[63] 올드리치는 텔레비전을 예술 형식으로 폄하하지 않았고, 단지 "빠듯한 일정과 준비 시간 부족"을 아쉬워했다.[63][64]
3. 5. 장편 영화 감독
1951년 12월, 어빙 앨런은 앨버트 브로콜리와 함께 워릭 프로덕션을 설립했다고 발표했으며, 로버트 올드리치와 함께 ''감마 피플''을 제작할 예정이었다.[65] 1952년 8월, 앨런은 올드리치가 자신의 각본으로 겨울에 유럽에서 촬영될 ''감마 피플''을 연출하며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할 것이라고 발표했다.[66] 그러나 이 영화는 몇 년 동안 제작되지 않았고, 올드리치는 스토리 작업에만 참여했다.올드리치는 허버트 베이커가 올드리치와 ''쏘 디스 이즈 뉴욕''에서 함께 작업한 인연으로 MGM에 그를 추천하면서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MGM은 저예산 야구 영화인 ''빅 리거''(1953)를 위해 스포츠 경력이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다.[58][68]
이 영화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고, 올드리치는 텔레비전으로 돌아가 ''포 스타 플레이하우스''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그는 장편 영화 제작에 대한 열정을 유지하며, ''월드 포 랜섬''(1954)이라는 저예산 액션 영화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 영화는 댄 듀리야를 포함하여 ''차이나 스미스''와 동일한 세트와 출연진을 많이 사용했다.
해럴드 헤치트와 버트 랭커스터가 《세계가 위험에 빠졌을 때》를 보았고, 그들은 올드리치를 고용하여 랭커스터가 아파치 전사로 출연하는 첫 번째 컬러 영화인 서부극 《아파치》(1954)를 감독하게 했다. 이 영화는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통해 배급되었으며, 600만 달러를 벌어들이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71]
헤치트와 랭커스터는 올드리치를 다시 기용하여 게리 쿠퍼와 랭커스터가 출연하는 서부극 《베라 크루즈》(1954)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아파치》보다 흥행에 더 성공하여 90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올드리치를 감독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했다.[71]
이 영화들의 성공으로 올드리치는 자신의 회사인 어소시에이츠 앤 올드리치를 설립하고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대신 올드리치는 A. I. 베제리데스가 미키 스필레인의 소설을 각색하고, 랄프 미커가 마이크 해머 역을 맡은 ''키스 미 데들리''(1955)를 제작하고 연출했다. 가학적인 폭력을 묘사하는 데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73][74]
올드리치와 그의 회사는 이후 클리포드 오데츠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빅 나이프''(1955)를 제작했다. 올드리치는 잭 팔란스가 연기한 영화 배우가 로드 스테이거의 폭압적인 할리우드 제작자에게 반항하는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를 연출하고 제작했다.
어소시에이츠 앤 올드리치 컴퍼니는 두 번째 영화를 제작했는데, 이 역시 희곡을 바탕으로 했으며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를 통해 개봉되었으며, 잭 팔란스와 리 마빈이 출연한 ''어택''(1956)이었다.[75]
이 세 영화 중 어느 것도 흥행에 특별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훌륭한 평을 받았다. 특히 ''키스 미 데들리''는 프랑스에서 주요 컬트 영화가 되었다.[58] 올드리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생존에 어떤 선호를 줄 것인가, 아무도 보러 오지 않거나 소수의 사람들만 보러 올 수 있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료에 어떤 선호를 줄 것인가에 대해 더 냉소적이 되었다."고 말했다.[58]
어소시에이츠는 이 무렵 ''트라니'', ''킨더슈필'', ''포머로이를 위한 팟럭'', 돈 바이스의 ''대통령 후보'', ''추파로사 기계''를 포함한 수많은 프로젝트를 발표했다.[76][77]
어소시에이츠 앤 올드리치 컴퍼니는 다른 영화에 대한 자금 지원 및 배급을 제공하기 위해 확장했다. 유일한 결과는 UA를 위한 ''더 라이드 백''(1957)이었다.[78]
알드리치는 영화 《빅 나이프》와 《어택》을 제작하는 사이에 조앤 크로포드 주연의 멜로드라마 《가을 잎》(1956) (원제: 《우리의 방식》)을 연출했는데, 이 영화는 소규모 흥행에 성공했다.
올드리치는 워릭 프로덕션에서 영국에서 제작된 스릴러 영화 《감마 피플》(1956)의 원작 스토리를 작업했다.
1956년 7월 로버트 알드리치는 자신의 회사를 통해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컬럼비아와 2편의 영화 제작 계약을 체결했다. 첫 번째 영화는 《의류 정글》(1957)이 될 예정이었다. 그는 또한 존 오하라의 이야기 《이제 우리는 압니다》의 판권을 획득했다.
알드리치는 《의류》의 연출을 시작했지만 촬영 막바지에 해고되었고, 빈센트 셔먼이 그를 대신했다.
1957년 3월 알드리치는 크로포드와 함께 제작하고 싶었던 연극 《태양 속의 폭풍》을 영화로 만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며 컬럼비아를 고소했다. 이 사건은 다음 달에 합의되었다.
알드리치는 《킨더슈필》, 《포머로이》, 《스나이프 헌트》,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 《이제 우리는 압니다》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발표했지만,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
어소시에이츠와 알드리치는 《3시 10분 유마행》의 각본 판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이 프로젝트를 컬럼비아에 통째로 판매했다.
그는 이후 ''분노의 언덕''(1959), ''지옥으로의 10초''(1959), ''건 파이터''(1961), ''소돔과 고모라''(1962), ''무엇이 제인에게 일어났는가?''(1962), ''텍사스의 4인''(1963), ''떨면서 잠들다''(1964), ''피닉스호의 최후''(1965), ''특공대작전''(1967), ''달콤한 포옹''(1968), ''여인의 향기''(1968), ''타락한 영웅''(1970), ''상처투성이의 연가''(1971), ''울자나의 습격''(1972), ''북극의 제왕''(1973), ''롱기스트 야드''(1974), ''허슬''(1975), ''황혼의 정의''(1977), ''더 코어보이즈''(1977), ''프리스코 키드''(1979), ''캘리포니아 돌즈''(1981) 등을 감독했다.
3. 6. 유럽 활동
올드리치는 해머 필름 프로덕션과 세븐 아츠 프로덕션으로부터 팔란스와 제프 챈들러가 출연하는 영화 ''헬로 가는 10초''(Ten Seconds to Hell, 1959)의 각본 및 연출 제안을 받고 독일에서 촬영했다.[58] 그는 그곳에서 제9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심사위원장을 맡았다.[88]레온 유리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로버트 미첨이 출연한 분노의 언덕들(The Angry Hills, 1959) 제작을 위해 유럽에 머물렀다.[89] 이 영화는 레이먼드 스트로스가 MGM을 위해 그리스에서 제작했다. 올드리치는 베제리데스에게 영화 각본을 다시 쓰게 했지만, 스트로스가 그의 편집본을 재편집하여 불쾌한 경험을 했고, 영화는 손실을 입었다.[89]
앤서니 퀸 주연, 300만 달러 예산으로 유고슬라비아에서 ''타라스 불바''를 제작하려 했지만 진행되지 않았다. 로널드 덩컨의 남성 양성애에 관한 연극을 바탕으로 한 ''촉매''도 마찬가지였다.[90] 올드리치는 여러 번 ''타라스 불바''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결국 자신의 각본을 해럴드 헤흐트에게 팔아야 했고, 헤흐트는 올드리치 없이 1962년에 영화를 제작했다. 이 시기에 그가 개발한 다른 프로젝트로는 ''분노의 오디세이'', ''왼쪽 뱅크'', ''너무 늦은 영웅'' 등이 있다.[91]
할리우드로 돌아와 ''호텔 드 파리'' 에피소드 ("선댄스 리턴즈")와 ''
커크 더글러스와 록 허드슨이 출연하는 서부 영화 ''라스트 선셋(The Last Sunset, 1961)''을 연출했으며, 이 영화는 더글러스의 회사를 위해 유니버설에서 제작되었다.
이후 이탈리아로 돌아가 조셉 E. 레빈을 위해 성경 소재 대작 ''소돔과 고모라(Sodom and Gomorrah, 1962)''를 연출했다. 올드리치는 최종 영화를 폄하했으며, 이 영화는 6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였다.[58][93][94] 그는 존 밀스와 함께 ''철십자 훈장''을 만들려고 했지만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다.[92]
3. 7. 워너 브라더스와 20세기 폭스
1960년대에 올드리치는 워너 브라더스와 20세기 폭스에서 여러 편의 영화를 감독하며 상업적 성공과 비평적 호평을 동시에 얻었다.[58] 그는 베티 데이비스와 조앤 크로포드를 주연으로 한 ''제인의 말로''(1962)를 통해 상업적, 비평적 명성을 회복했다.[58] 이 영화는 5개의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랐고, 노년의 여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공포 영화의 하위 장르인 "사이코 비디"를 탄생시켰다.[58] 이 영화의 성공으로, 고딕적이고 캠프적인 감성을 가진 일련의 영화들이 이어졌고, 이러한 영화들은 퀴어 관객들에게 인기를 얻었다.[95]워너에서 올드리치는 프랭크 시나트라와 딘 마틴 주연의 코믹 서부극 ''4인의 텍사스''(1963)를 쓰고, 제작하고, 연출했다.[58] 이 영화는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올드리치는 시나트라와 함께 작업하는 것을 싫어했고, 그 결과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58] 이후 올드리치는 8편의 영화를 제작하는 1,400만 달러 규모의 프로그램을 발표했다.[96]
20세기 폭스에서 제작한 ''허쉬...허쉬, 스위트 샬롯''(1964)은 ''제인의 말로''의 속편 격으로, 베티 데이비스가 주연을 맡았다.[58] 조앤 크로포드가 하차하고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가 대신 출연한 이 영화는 전작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58]
이후 올드리치는 제임스 스튜어트, 리처드 애튼버러, 피터 핀치가 출연한 남성 위주의 액션 영화 ''피닉스의 비행''(1965)을 감독했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지만, 결국에는 수익을 냈다.[58]
3. 8. MGM과 올드리치 스튜디오
올드리치는 MGM을 통해 배급되고 케네스 하이먼의 세븐 아츠 프로덕션이 제작한 영화, ''특공대작전''(1967)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리 마빈, 찰스 브론슨, 어니스트 보그나인과 존 카사베츠가 출연한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97]올드리치는 핀치와 킴 노바크가 출연한 영화 ''릴라 클레어의 전설''(1968)을 MGM에서 제작하였으나, 비평과 상업적인 면에서 모두 실패했다.
올드리치는 135만 달러에 ''특공대작전''의 수익 분배 지분을 MGM에 매각하고, 이 돈으로 자신의 스튜디오인 올드리치 스튜디오(Aldrich Studios)를 설립했다.[98] 201 노스 옥시덴탈 대로(201 North Occidental Boulevard)에 위치한 이 시설은 1913년부터 메리 픽포드 영화를 제작하는 영화 스튜디오였으며, 최근에는 서더랜드 프로덕션(Sutherland Productions)의 기반이 되었다.[98] 올드리치는 그곳에서 《빅 나이프》를 제작했다.[98]
그는 "내 꿈은 항상 나만의 스튜디오를 갖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45년에 있었던 옛 엔터프라이즈 스튜디오를 제외하고는 스튜디오가 제대로 운영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엔터프라이즈의 모든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다고 느꼈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서 갖기를 바라는 느낌이다."[98]
이 스튜디오는 1968년 8월에 개장했다. 골드윈(Goldwyn)과 함께, 어소시에이츠 앤 올드리치(The Associates and Aldrich)는 할리우드에 스튜디오를 소유한 유일한 주요 독립 회사였다. 그는 그 후 몇 년 동안 그곳에서 자신의 영화를 제작할 것이다.[99]
3. 9. ABC 픽처스와의 갈등
로버트 올드리치는 특공대의 성공으로 ABC 픽처스(ABC Pictures)와 4편의 영화 계약을 맺었다.[100] 계약에는 ''조지 여사의 죽음'', ''그들 모두의 가장 위대한 어머니'', ''앨리스 이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너무 늦은 영웅''이 포함되었다.[100]베릴 리드와 수자나 요크가 출연한 ''조지 여사의 죽음''(1968)은 레즈비언 관계를 솔직하게 묘사하여 인기를 얻었지만, 높은 제작비로 손실을 보았다.[101] 올드리치는 ''앨리스 이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1969)를 제작했지만, 연출은 리 H. 카진이 맡았다. 이 영화는 ''아기와 제인''과 유사한 심리 스릴러였지만, 역시 손실을 보았다.[101]
올드리치는 장편 영화 제작 자금 모금을 위해 20분짜리 데모 영화 "그들 모두의 가장 위대한 어머니"(1969)를 제작했지만, ABC의 투자를 받지 못했다.[58]
ABC는 올드리치에게 ''특공대''와 비슷한 전쟁 영화 제작을 원했고, 올드리치는 ''너무 늦은 영웅''(1970)을 제작하고 연출했다.[91] 마이클 케인과 클리프 로버트슨이 출연하고 필리핀에서 촬영했지만, 이 영화는 ABC 필름 역사상 가장 큰 손실을 낸 영화 중 하나가 되었다.[101]
올드리치가 제작한 ''그리섬 갱''(1971)은 미스 블랜디시에게는 난초가 없다''를 각색한 작품으로, 스코트 윌슨과 킴 다비가 출연했다. 이 영화 역시 실패하여 ABC에 큰 손실을 안겼다.[101]
올드리치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에 관한 서부 영화 ''반란''과 학생 시위에 관한 ''더 무브먼트''를 제작하려 했지만, 제작되지 않았다.[103][104]
결국 올드리치와 ABC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소송으로 이어졌다. 올드리치는 ABC와 결별하고 자신의 스튜디오를 매물로 내놓았다.[106][58] 올드리치는 "지속적인 힘이 가장 중요하며, 특히 이 업계에서는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테이블에 머물고, 게임에 참여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58]
3. 10. 후기 작품
1970년대에 올드리치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감독했다. 그는 버트 랭카스터와 다시 만나 울자나의 습격(1972)을 만들었으나, 상업적으로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후 올드리치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58][107] 리 마빈과 어니스트 보그나인이 주연한 ''북극의 제왕''(1973)은 1930년대 철도 부랑자 이야기를 다룬 영화로,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최근 몇 년간 명성이 높아졌다.[107]버트 레이놀즈 주연의 ''롱기스트 야드''(1974)는 특공대작전 이후 올드리치의 가장 큰 성공작이었다.[108] 올드리치와 레이놀즈는 ''허슬''(1975)을 함께 만들었으며, 이 영화는 강렬한 경찰 드라마로 또 다른 흥행작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불화로 인해 더 이상 함께 작업하지 않았다.[109] 1975년 올드리치는 미국 감독 조합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올드리치는 로리마 프로덕션과 두 편의 영화 계약을 맺었다. 버트 랭커스터 주연의 ''황혼의 눈부심''(1977)과 조셉 왐보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합창단''(1977)을 만들었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진 와일더와 해리슨 포드가 출연한 서부극 프리스코 키드(1979)와 피터 포크가 출연한 여성 레슬링 영화 ...올 더 마블스(1981)이다.
4. 개인적인 삶
로버트 올드리치는 1941년 해리엇 포스터와 결혼하여 아델, 윌리엄, 알리다, 켈리 등 네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들은 모두 영화계에서 일했다.[113][114] 1965년 포스터와 이혼한 후, 1966년 패션 모델 시빌 지크프리트/Sybil Siegfried영어와 재혼했다.
5. 죽음과 유산
로버트 올드리치는 1983년 12월 5일, 로스앤젤레스의 한 병원에서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할리우드 힐스에 있는 포레스트 론 묘지에 묻혔다.[115]
영화 평론가 존 패터슨은 2012년에 그의 경력을 "냉소적이고, 마초적이며 염세적인, 주먹질을 좋아하는 감독"으로 요약하며, "부패와 악을 용감하게 묘사했고, 그의 경력 내내 폭력의 한계를 밀어붙였다"고 평가했다.[116] 그의 영화 제작 스타일은 거칠고 조잡했지만, 항상 생생하고 활력이 넘쳤다고 덧붙였다.[116]
가디언의 존 패터슨은 2012년 올드리치를 "지금은 사망한 지 거의 30년이 되었지만, 그의 작품 세계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는 훌륭한 감독"이라고 평했다.[116] 일본 영화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는 올드리치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117]
FX 미니시리즈 페드: 베트와 조안에서 올드리치는 영국 출신 배우 알프레드 몰리나가 연기했다.
6.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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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제목 | 비고 |
---|---|---|
1953 | 빅 리거 | 감독 |
1954 | 월드 포 랜섬 | 감독 |
1954 | 아파치 | 감독 |
1954 | 베라 크루스 | 감독 |
1955 | 키스 미 데들리 | 감독, 제작 |
1955 | 빅 나이프 | 감독, 제작 |
1956 | 오텀 리브스 | 감독 |
1956 | 공격 | 감독, 제작 |
1959 | 앵그리 힐스 | 감독 |
1959 | 지옥까지 10초 | 감독, 각본 |
1961 | 마지막 일몰 | 감독 |
1962 | 소돔과 고모라 | 감독 |
1962 | 제인의 말로 | 감독, 제작 |
1963 | 포 포 텍사스 | 감독, 각본 |
1964 | 허쉬...허쉬, 스윗 샬롯 | 감독, 제작 |
1965 | 피닉스 | 감독, 제작 |
1967 | 특공대작전 | 감독 |
1968 | 라일라 클레어의 전설 | 감독, 제작 |
1968 | 조지 수녀의 살해 | 감독, 제작 |
1970 | The Greatest Mother of Them All | 감독, 단편 |
1970 | 불타는 전장 | 감독, 각본 |
1971 | 그리솜 갱단 | 감독, 제작 |
1972 | 울자나스 레이드 | 감독 |
1973 | 북극의 제왕 | 감독 |
1974 | 터치 다운 | 감독 |
1975 | 허슬 | 감독, 제작 |
1977 | 미합중국 최후의 날 | 감독 |
1977 | 콰이어보이 | 감독 |
1979 | 프리스코 키드 | 감독 |
1981 | 캘리포니아 돌스 | 감독 |
6. 1. 감독
로버트 올드리치는 1953년 《빅 리거》로 감독 데뷔를 하였다. 이후 《월드 포 랜섬》(1954), 《아파치》(1954), 《베라크루스》(1954)를 감독하였다. 1955년에는 《키스 미 데들리》의 감독과 제작을 맡았고, 《악덕》의 감독과 제작을 맡았다. 1956년에는 《낙엽》의 감독과 제작을, 《어택》의 감독을 맡았다.1957년 《가먼트 정글》의 감독을 맡았고, 1959년에는 《분노의 언덕》, 《지옥으로의 10초》의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1961년 《건 파이터》, 1962년 《소돔과 고모라》, 《무엇이 제인에게 일어났는가?》의 감독과 제작을 맡았다. 1963년 《텍사스의 4인》의 감독과 각본을 맡았다.
1964년 《떨면서 잠들다》의 감독과 제작을, 1965년 《피닉스호의 최후》의 감독과 제작을 맡았다. 1967년 《특공대작전》, 1968년 《달콤한 포옹》와 《여인의 향기》의 감독과 제작을 맡았다. 1969년에는 《무엇이 앨리스에게 일어났는가?》의 제작을 맡았다.
1970년 《타락한 영웅》의 감독, 각본, 원안, 제작을 맡았다. 1971년 《상처투성이의 연가》의 감독과 제작을, 1972년 《울자나의 습격》, 1973년 《북극의 제왕》, 1974년 《롱기스트 야드》의 감독을 맡았다. 1975년 《허슬》의 감독과 제작을 맡았다.
1977년 《황혼의 정의》와 《더 코어보이즈》의 감독을 맡았다. 1979년 《프리스코 키드》, 1981년 《캘리포니아 돌즈》의 감독을 맡았다. 1969년에는 단편 영화 《''가장 위대한 어머니''》의 감독을 맡았다.
TV 시리즈로는 《''차이나 스미스''》(1952), 《''슐리츠 플레이하우스 오브 스타스''》(1952), 《''더 닥터''》(1952-1953), 《''포 스타 플레이하우스''》(1953-1954), 《''호텔 드 파리''》(1959), 《''어드벤처 인 파라다이스''》(1959)의 연출을 맡았다.
6. 2. 제작
로버트 올드리치는 1953년 《빅 리거》로 감독 데뷔를 하였다. 1954년에는 《월드 포 랜섬》을 감독했는데, 일부 크레딧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아파치》와 《베라 크루스》를 감독했다.1955년에는 《키스 미 데들리》의 감독과 프로듀서를 맡았으며, 일부 크레딧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빅 나이프》의 감독과 프로듀서를 맡았다. 1956년에는 《가을 잎》과 《어택》의 감독을 맡았고, 《어택》은 프로듀서도 겸했다.
1959년, 올드리치는 《텐 세컨즈 투 헬》의 감독, 각본을 맡았고 일부 크레딧을 받지 못했다. 같은 해 《성난 언덕》의 감독을 맡았다. 1961년에는 《더 라스트 선셋》, 1962년에는 《소돔과 고모라》와 《무슨 일이 베이비 제인에게 일어났는가?》의 감독을 맡았고, 《무슨 일이 베이비 제인에게 일어났는가?》는 프로듀서도 겸했다.
1963년 《4 포 텍사스》의 감독, 프로듀서, 각본을 모두 맡았다. 1964년 《허쉬... 허쉬, 스위트 샬롯》의 감독과 프로듀서를, 1965년 《피닉스의 비행》의 감독과 프로듀서를 맡았다. 1967년 《더 더티 더즌》의 감독을, 1968년 《릴라 클레어의 전설》과 《조지 자매의 살해》의 감독과 프로듀서를 맡았다.
1970년 《투 레이트 더 히어로》의 감독, 프로듀서, 각본을 맡았다. 1971년 《그리섬 갱》의 감독과 프로듀서를, 1972년 《울자나의 습격》의 감독을, 1973년 《노스 폴의 황제》의 감독을 맡았다. 1974년 《더 롱기스트 야드》의 감독을, 1975년 《허슬》의 감독과 프로듀서를 맡았다.
1977년 《트와일라잇의 마지막 빛》과 《더 코어보이즈》의 감독을 맡았다. 1979년 《프리스코 키드》, 1981년 《...올 더 마블스》의 감독을 맡았다.
그는 또한 1951년 ''스타의 슐리츠 플레이하우스''의 "The Pussyfootin' Rocks" 에피소드, 1952년 ''차이나 스미스''의 "Straight Settlement", "Shanghai Clipper" 에피소드, ''더 닥터''의 "Blackmail", "The Guest", "A Tale of Two Christmases", "Take the Odds" 에피소드, ''포 스타 플레이하우스''의 "The Squeeze", "The Witness", "The Hard Way", "The Gift", "The Bad Streak" 에피소드, 1959년 ''호텔 드 파리''의 "Sundance Returns" 에피소드, ''어드벤처스 인 파라다이스''의 "The Black Pearl", "Safari at Sea" 에피소드 등 다수의 텔레비전 시리즈 에피소드를 감독했다.
6. 3. 각본
로버트 올드리치는 다음 영화들의 각본을 썼다.- 빅 리거 (1953)
- 월드 포 랜섬 (1954)
- 아파치 (1954)
- 베라 크루스 (1954)
- 키스 미 데들리 (1955)
- 빅 나이프 (1955)
- 오텀 리브스 (1956)
- 공격 (1956)
- 지옥까지 10초 (1959)
- 앵그리 힐스 (1959)
- 마지막 일몰 (1961)
- 소돔과 고모라 (1962)
- 제인의 말로 (1962)
- 포 포 텍사스 (1963)
- 허쉬...허쉬, 스윗 샬롯 (1964)
- 피닉스 (1965)
- 특공대작전 (1967)
- 라일라 클레어의 전설 (1968)
- 조지 수녀의 살해 (1968)
- The Greatest Mother of Them All (1970, 단편)
- 불타는 전장 (1970)
- 그리솜 갱단 (1971)
- 울자나스 레이드 (1972)
- 북극의 제왕 (1973)
- 터치 다운 (1974)
- 허슬 (1975)
- 미합중국 최후의 날 (1977)
- 콰이어보이 (1977)
- 프리스코 키드 (1979)
- 캘리포니아 돌스 (1981)
1963년작 《포 포 텍사스》와 1970년작 불타는 전장에서는 감독과 각본을 동시에 맡았다. 1959년 영화 《지옥까지 10초》에서는 감독과 공동 각본(크레딧에는 없음)을 맡았다. 1955년 영화 키스 미 데들리에서는 공동 각본(크레딧에는 없음)을 맡았다.
1956년 영화 《감마 피플》에서는 스토리를 썼다.
6. 4. 조감독
로버트 올드리치는 1940년대 초부터 영화계에서 일하며, 수많은 영화에서 조감독을 맡았다. 1942년 《파리의 잔 다르크》를 시작으로, 《G.I. 조의 이야기》(1945),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1946), 《바디 앤 소울》(1947), 《개선문》(1948), 《악의 힘》(1948), 《라임라이트》(1952) 등 여러 작품에 참여했다.1950년대에도 조감독 경력을 이어갔다. 《빅 리거》(1953), 《월드 포 랜섬》(1954), 《아파치》(1954), 《베라 크루스》(1954), 《키스 미 데들리》(1955), 《빅 나이프》(1955) 등 다수의 영화에 참여했다.
이후 1960년대와 1970년대에도 《소돔과 고모라》(1962), 《제인의 말로》(1962), 《허쉬...허쉬, 스윗 샬롯》(1964), 《피닉스》(1965), 《특공대작전》(1967), 《불타는 전장》(1970) 등 여러 영화에서 조감독으로 활동했다.
6. 5. 기타
로버트 올드리치는 영화 감독, 프로듀서, 각본가로 활동했다.연도 | 제목 | 크레딧 | ||
---|---|---|---|---|
감독 | 프로듀서 | 각본가 | ||
1953 | 빅 리거 | O | X | X |
1954 | 월드 포 랜섬 | 일부 | O | X |
1954 | 아파치 | O | X | X |
1954 | 베라 크루즈 | O | X | X |
1955 | 키스 미 데들리 | O | O | 일부 |
1955 | 빅 나이프 | O | O | X |
1956 | 가을 잎 | O | X | X |
1956 | 어택 | O | O | X |
1959 | 텐 세컨즈 투 헬 | O | 일부 | O |
1959 | 성난 언덕 | O | X | X |
1961 | 더 라스트 선셋 | O | X | X |
1962 | 소돔과 고모라 | O | X | X |
1962 | 무슨 일이 베이비 제인에게 일어났는가? | O | O | X |
1963 | 4 포 텍사스 | O | O | O |
1964 | 허쉬... 허쉬, 스위트 샬롯 | O | O | X |
1965 | 피닉스의 비행 | O | O | X |
1967 | 더 더티 더즌 | O | X | X |
1968 | 릴라 클레어의 전설 | O | O | X |
1968 | 조지 자매의 살해 | O | O | X |
1969 | 무슨 일이 앨리스에게 일어났는가? | X | O | X |
1970 | 투 레이트 더 히어로 | O | O | O |
1971 | 그리섬 갱 | O | O | X |
1972 | 울자나의 습격 | O | X | X |
1973 | 노스 폴의 황제 | O | X | X |
1974 | 더 롱기스트 야드 | O | X | X |
1975 | 허슬 | O | O | X |
1977 | 트와일라잇의 마지막 빛 | O | X | X |
1977 | 더 코어보이즈 | O | X | X |
1979 | 프리스코 키드 | O | X | X |
1981 | ...올 더 마블스 | O | X | X |
연도 | 제목 | 크레딧 |
---|---|---|
1942 | 파리의 잔 다르크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2 | 더 팔콘 테이크스 오버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2 | 빅 스트리트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3 | 봄바디어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3 | 라이징 선의 배후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3 | 레이디 테이크스 어 챈스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3 | 어드벤처스 오브 어 루키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3 | 갱웨이 포 투모로우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3 | 루키스 인 버마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4 | 액션 인 아라비아 | 세컨드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5 | G.I. 조의 이야기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5 | 남부인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5 | 패든 마이 패스트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6 | 마사 아이버스의 이상한 사랑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7 | 벨 아미의 개인적인 문제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7 | 바디 앤 소울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8 | 개선문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8 | 그래서 이것이 뉴욕이야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8 | 노 마이너 바이스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8 | 악의 힘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9 | 잡혔다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9 | 레드 포니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49 | 레드 라이트 | 어시스턴트 디렉터: 세컨드 유닛 |
1949 | 코리스에게 키스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0 | 내가 자라면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0 | 화이트 타워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1 | 남자와 음악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1 | M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1 | 뉴 멕시코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1 | 더 프라울러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2 | 더 퍼스트 타임 | 공동 프로듀서 |
1952 | 라임라이트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2 | 애보트와 코스텔로가 캡틴 키드를 만나다 | 어시스턴트 디렉터 |
1956 | 감마 피플 | 스토리 |
1957 | 의류 정글 | 원작 감독 |
1969 | 그들 모두의 가장 위대한 어머니 | 단편 영화, 감독 및 프로듀서 |
1978 | 너무 많은 셰프 | 프로듀서 |
그는 또한 텔레비전 시리즈에서도 감독으로 참여했다.
- ''스타의 슐리츠 플레이하우스'' (1951) - 1개 에피소드
- ''차이나 스미스'' (1952) - 2개 에피소드
- ''더 닥터'' (1952) - 4개 에피소드
- ''포 스타 플레이하우스'' (1952) - 5개 에피소드
- ''호텔 드 파리'' (1959) - 1개 에피소드
- ''어드벤처스 인 파라다이스'' (1959) - 2개 에피소드
몇몇 프로젝트는 제작되지 않았다.
- ''반란'' (1960년대 후반)
- ''더 크라우디드 베드'' (1970년대 초)
- ''그들 모두의 가장 위대한 어머니'' (1969)
- ''명예의 분노'' (1970년대)
- ''커피, 티, 오어 미?'' (1970년대 초)
7. 수상 및 후보
로버트 올드리치는 다양한 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수상하고 후보에 올랐다.[118][119][120][121][122][123][124][125]
연도 | 협회 | 상 | 부문 | 작품 | 결과 |
---|---|---|---|---|---|
1955 | 카이에 뒤 시네마 | 톱 10 목록 | 최우수 영화 | 빅 나이프 | 3위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은사자상 | 최우수 감독 | 빅 나이프 | 수상 | |
1956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파시네티상 | 최우수 외국 영화 | 어택 | 수상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은곰상(감독) | 최우수 감독 | 가을 잎/Autumn Leaves영어 | 수상 | |
1982 | 호치 영화상 | 최우수 국제 영화 | ...올 더 마블스 | 수상 |
연도 | 협회 | 상 | 부문 | 작품 | 결과 |
---|---|---|---|---|---|
1955 | 카이에 뒤 시네마 | 톱 10 목록 | 최우수 영화 | 키스 미 데들리 | 10위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황금사자상 | 최우수 영화 | 빅 나이프 | 후보 | |
1963 | 칸 영화제 | 황금종려상 | 최우수 작품 |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베이비 제인?》 | 후보 |
미국 감독 조합 | DGA상 | 영화 부문 뛰어난 감독상 |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베이비 제인?》 | 후보 | |
1965 | 로렐상 | 골든 로렐상 | 제작-감독 | 6위 | |
1967 | 로렐상 | 골든 로렐상 | 제작-감독 | 6위 | |
1968 | 미국 감독 조합 | DGA상 | 영화 부문 뛰어난 감독상 | 특공대 작전 | 후보 |
1968 | 로렐상 | 골든 로렐상 | 제작-감독 | 4위 | |
1970 | 로렐상 | 골든 로렐상 | 제작-감독 | 10위 |
1956년, 제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고엽』)
7. 1. 수상
로버트 올드리치는 다양한 영화제에서 여러 상을 수상하고 후보에 올랐다.[118][119][120][121][122][123][124][125] 1955년에는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키스 미 데들리''와 ''빅 나이프''로 최우수 영화 톱 10 목록에 선정되었으며,[118]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빅 나이프''로 은사자상(최우수 감독)을 수상하고 황금사자상 후보에 올랐다.[119] 1956년에는 ''어택''으로 파시네티상(최우수 외국 영화)을 수상했다.[120][121] 같은 해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가을 잎''으로 은곰상(최우수 감독)을 수상했다.[122]1963년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베이비 제인?》으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올랐고,[123] 미국 감독 조합 DGA상(영화 부문 뛰어난 감독상) 후보에도 올랐다.[124] 1968년에는 ''특공대 작전''으로 다시 한번 DGA상 후보에 올랐다.[124]
로렐상에서는 1965년, 1967년, 1968년, 1970년에 골든 로렐상(제작-감독) 후보에 올랐다.[125] 1982년에는 호치 영화상에서 ''...올 더 마블스''로 최우수 국제 영화상을 수상했다.
1956년, 제6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다.(『고엽』)
7. 2. 후보
wikitable연도 | 협회 | 상 | 부문 | 작품 | 결과 | 참고 |
---|---|---|---|---|---|---|
1955 | 카이에 뒤 시네마 | 톱 10 목록 | 최우수 영화 | 키스 미 데들리 | 10위 | [118] |
빅 나이프 | 3위 | |||||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 황금사자상 | 최우수 영화 | 후보 | [119] | ||
은사자상 | 최우수 감독 | 수상 | ||||
1956 | 파시네티상 | 최우수 외국 영화 | 어택 | 수상 | [120][121] | |
베를린 국제 영화제 | 은곰상 | 최우수 감독 | 가을 잎 | 수상 | [122] | |
1963 | 칸 영화제 | 황금종려상 | 최우수 작품 | 《무슨 일이 있었는가, 베이비 제인?》 | 후보 | [123] |
미국 감독 조합 | DGA상 | 영화 부문 뛰어난 감독상 | 후보 | [124] | ||
1968 | 특공대 작전 | 후보 | ||||
1965 | 로렐상 | 골든 로렐상 | 제작-감독 | rowspan="4" | 6위 | rowspan="5" align="center"|[125] |- | 1967 | 6위 |- | 1968 | 4위 |- | 1970 | 10위 |- | 1982 | colspan="2"|호치 영화상 | 최우수 국제 영화 | ''...올 더 마블스'' | '''수상''' |} 참조
[1]
웹사이트
The Truculent Cinema of Robert Aldrich
https://mubi.com/not[...]
2023-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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