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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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융은 후한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로, 유학을 공부하고 경전에 주석을 달아 훈고학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등즐의 부름을 받았으나 거절하고 은거하거나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으며, 양기에게 아첨하는 등 정치적 부침을 겪었다. 학문적으로는 통유로 칭송받았으나, 정치적으로는 탁류에 속해 청류파에게 비판받았다. 그는 다양한 경전 주석서를 저술하고 노식, 정현 등 훌륭한 제자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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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9년 출생 - 후한 화제
후한 화제는 후한의 제4대 황제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두태후의 섭정을 받다가 환관의 도움으로 친정을 시작했지만, 환관 정치의 폐단과 강족의 반란으로 후한 쇠퇴의 조짐이 보였다. - 166년 사망 - 도상 (후한)
도상은 후한 말기 환관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치적을 쌓고 형주자사로서 반란 진압에 공을 세웠으나, 권력에 아부하고 부정부패를 저질렀다는 비판도 있는 관료이다. - 166년 사망 - 개루왕
개루왕은 백제의 제4대 국왕으로, 북한산성 축조로 국방력을 강화했으나 신라 반란자 수용으로 외교적 실패를 겪었으며 삼국사기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받았다. - 부풍 마씨 - 마식 (당나라)
마식은 당나라 중기의 인물로, 헌종 연간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문종 연간에 재상이 되었으나 환관과의 관계로 파면되어 절도사로 좌천되었다. - 부풍 마씨 - 마일제
마일제는 후한 말 유학자이자 관료로, 희평석경 편찬에 참여하고 동탁 집권 시 태위로 임명되었으며, 이각과 곽사 정권 하에서 태부와 녹상서사를 지내다 원술에게 모욕을 당하고 사망했다.
마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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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마융 |
자 | 계장(季長) |
출생지 | 우부풍(右扶風) |
사망 | 166년 |
시대 | 후한 |
분야 | 문학, 정치 |
저서 | |
주요 저서 | 장적부(長笛賦), 충경(忠經) |
2. 생애
경조 사람 지순(摯恂)이 벼슬하지 않고 남산(南山)에 은거하였는데, 학문으로 명성을 떨쳤다. 마융은 지순에게 사사하여 유학을 배웠고, 경전(經典)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후 지순의 딸과 혼인하였다.[10]
영초 2년(108년), 안제의 외척으로서 권력을 쥐고 있었던 대장군 등즐(鄧隲)의 사인(舍人)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무도와 한양으로 몸을 피하였으나 곤궁하게 살았다. 영초 4년(110년), 다시 등즐의 부름을 받아 교서랑(校書郞)이 되었고,[10] 동향인 반소에게 《한서》를 익혔다.[10]
당시 등즐과 등태후(鄧太后 ; 안제의 생모)가 함께 정무를 보았었는데, 문치만을 중시하고 무공을 무시하여 도적이 횡행했다. 마융은 등태후에게 〈광성송〉(廣成頌)이라는 표문을 올려 풍간해 미움을 받았다.[10]
원초 3년(116년), 형의 아들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 이 일로 등태후의 미움을 받아 면직되고 금고에 처해졌다.[10]
영녕 2년(121년), 등태후가 죽고 안제가 친히 정사를 돌보았다. 마융은 사면되어 다시 부름을 받았고, 한때 하간왕(河間王)의 신하가 되었으나 안제에게 발탁되어 조정으로 가 낭중(郞中)이 되었다.[10]
연광 4년(125년), 소제가 즉위하였다. 마융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고, 군의 공조(功曹)가 되었다. 순제 때인 양가 2년(133년)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의랑(議郞)이 되었다.[10]
마융은 대장군 양상(梁商)의 발탁을 받아 종사중랑(從事中郞)·무도의 현령이 되었다. 서강(西羌)이 난을 일으켰을 때 병력을 이끌고 이를 토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이후 양상의 뒤를 이은 양기가 전횡을 일삼자, 마융은 〈서제송〉(西第頌)을 지어 그에게 아첨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였다. 이 일로 청류파(淸流派)의 비난을 받았고, 양기가 태위 이고(李固)를 탄핵할 때에도 상주문을 작성해 주었다.[10]
환제 때 마융은 남군태수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양기의 미움을 받았고, 면직되어 도형에 처해졌다. 마융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10]
이후 다시 부름을 받아 의랑이 되었고, 동관(東觀)에서 저술을 담당하였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연희 9년(166년), 집에서 숨을 거두니 88세였다. 유언으로 장례를 간소히 치르도록 하였다.[10]
정치가로서는 탁류(濁流)에 속하였으며, 친척 조기마저도 만남을 거절하는 등 청류파로부터 경멸을 받았다.[11] 그러나 학자로서는 평판이 대단히 높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용모가 뛰어나고 박학하였기 때문에 '''통유'''(通儒)라 일컬어졌다.[10] 그의 제자로는, 노식, 정현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학문
마융은 경조 사람 지순(摯恂)에게 유학을 배우고 경전을 연구하였으며, 지순의 딸과 혼인하였다.[10] 영초 2년(108년), 안제의 외척 대장군 등즐(鄧隲)에게 징발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무도와 한양으로 피신하여 곤궁하게 살았다.[10] 영초 4년(110년) 등즐의 부름을 받아 교서랑(校書郞)이 되었고,[10] 동향인 반소에게 《한서》를 익혔다.[10]당시 등즐과 등태후(鄧太后)가 정무를 보았는데, 마융은 등태후에게 〈광성송〉(廣成頌)을 올려 풍간해 미움을 받았다.[10] 원초 3년(116년), 형의 아들의 상으로 귀향했다가 등태후의 미움을 받아 면직되고 금고에 처해졌다.[10]
영녕 2년(121년), 등태후 사후 안제가 친정하면서 사면되어 낭중(郞中)이 되었다.[10] 연광 4년(125년) 소제 즉위 후 고향으로 돌아가 군의 공조(功曹)가 되었다가, 순제 때인 양가 2년(133년)에 다시 의랑(議郞)으로 중앙에 복귀하였다.[10]
마융은 양상의 발탁으로 종사중랑(從事中郞)과 무도 현령이 되었으나, 서강(西羌) 토벌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이후 양기에게 아첨하는 태도를 보여 청류파의 비난을 받았고, 양기가 태위 이고를 탄핵할 때 상주문을 작성해 주었다.[10]
환제 때 남군태수가 되었으나 양기의 미움을 사 면직되고 도형에 처해졌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의랑이 되어 동관(東觀)에서 저술을 담당하다 병으로 그만두었다.[10]
연희 9년(166년), 88세로 사망하였으며, 유언으로 장례를 간소히 치르도록 하였다.[10] 정치가로서는 탁류(濁流)에 속하여 청류파로부터 경멸받았으나,[11] 학자로서는 '''통유'''(通儒)라 칭송받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다.[10] 그의 제자로는 노식, 정현이 있다.
2. 2. 관직 생활과 정치적 부침
마융은 경조 사람 지순(摯恂)에게 유학을 배우고 경전을 연구했으며, 지순의 딸과 혼인하였다.[10] 영초 2년(108년), 안제의 외척 대장군 등즐(鄧隲)의 부름을 받았으나 응하지 않고 무도와 한양으로 피신했다.[10] 영초 4년(110년)에 다시 등즐의 부름을 받아 교서랑(校書郞)이 되었고,[10] 반소에게 《한서》를 배웠다.[10]등즐과 등태후가 문치만을 중시하고 무공을 무시하여 도적이 횡행하자, 마융은 등태후에게 〈광성송〉(廣成頌)을 올려 풍간해 미움을 받았다.[10] 원초 3년(116년), 형의 아들의 상을 당하여 귀향한 일로 등태후의 미움을 받아 면직되고 금고에 처해졌다.[10]
영녕 2년(121년), 등태후가 죽고 안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마융은 사면되어 낭중(郞中)이 되었다.[10] 연광 4년(125년), 소제 즉위 후 고향으로 돌아갔고, 순제 때인 양가 2년(133년)에 다시 의랑(議郞)이 되었다.[10]
마융은 양상의 발탁으로 종사중랑(從事中郞)·무도 현령이 되었으나, 서강(西羌) 토벌 주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이후 양기에게 아첨하는 태도를 보여 청류파의 비난을 받았고, 양기가 태위 이고를 탄핵할 때 상주문을 작성해 주었다.[10]
환제 때 남군태수가 되었으나 양기의 미움을 받아 면직되고 도형에 처해졌다.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다시 의랑이 되어 동관(東觀)에서 저술에 전념하다 병으로 그만두었다.[10]
연희 9년(166년), 88세로 사망했으며, 유언으로 장례를 간소히 치르도록 하였다.[10] 정치가로서는 탁류(濁流)에 속해 청류파로부터 경멸을 받았으나,[11] 학자로서는 '''통유'''(通儒)라 불릴 만큼 평판이 높았다.[10]
2. 3. 양기와의 관계와 논란
마융은 경조윤 사람 지순에게 유학을 배웠고,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다. 지순의 딸과 혼인하였다.[10] 영초 2년(108년), 안제의 외척 등즐(鄧隲)에게 징발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무도와 한양으로 피신했다. 영초 4년(110년) 등즐의 부름을 받아 교서랑이 되었고,[10] 반소에게 《한서》를 익혔다.[10]원초 3년(116년), 형의 아들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는데, 이 일로 등태후의 미움을 받아 면직되고 금고에 처해졌다.[10] 영녕 2년(121년), 등태후가 죽고 안제가 친정을 시작하자 사면되어 낭중이 되었다.[10] 연광 4년(125년), 소제 즉위 후 고향으로 돌아갔고, 순제 때인 양가 2년(133년)에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의랑이 되었다.[10]
마융은 대장군 양상의 발탁을 받아 종사중랑, 무도 현령이 되었다. 서강이 난을 일으켰을 때 병력을 이끌고 이를 토벌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 이후 양상의 뒤를 이은 양기에게 아첨하는 태도를 보여 청류파의 비난을 받았다.[10] 양기가 태위 이고를 탄핵할 때 상주문을 작성해 주었다.[10]
환제 때 남군태수가 되었으나 양기의 미움을 받아 면직되어 도형에 처해졌다. 마융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0] 이후 다시 부름을 받아 의랑이 되었고, 동관에서 저술을 담당하였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연희 9년(166년)에 사망했다.[10]
정치가로서는 탁류(濁流)에 속하였으며, 친척 조기마저도 만남을 거절하는 등 청류파로부터 경멸을 받았다.[11] 그러나 학자로서는 평판이 매우 높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용모가 뛰어나고 박학하였기 때문에 '''통유'''(通儒)라 일컬어졌다.[10]
2. 4. 말년과 죽음
마융은 친척 조기마저도 만남을 거절하는 등 청류파로부터 경멸을 받았다.[11] 그러나 학자로서는 평판이 대단히 높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용모가 뛰어나고 박학하였기 때문에 '''통유'''(通儒)라 일컬어졌다.[10] 제자로는 노식, 정현이 있다.환제 때 마융은 남군태수가 되었으나, 양기의 미움을 받아 면직되어 도형에 처해졌다. 마융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10] 이후 다시 부름을 받아 의랑이 되었고, 동관(東觀)에서 저술을 담당하였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연희 9년(166년), 집에서 숨을 거두니 88세였다. 유언으로 장례를 간소히 치르도록 하였다.[10]
3. 학문적 업적과 영향
마융은 경전에 주석을 달고 훈고학을 연구했다. 《삼전이동》(三傳異同), 《효경주》(孝經注), 《논어주》(論語注), 《시경주》(詩經注), 《상서주》(尙書注), 《삼례주》(三禮注), 《열녀전주》(列女傳注), 《노자주》(老子注), 《회남자주》(淮南子注), 《이소주》(離騷注)를 저술했다. 『삼전이동(三伝異同)』, 『효경』주, 『논어』주, 『시경』주, 『상서』주, 『삼례(三礼)』주, 『열녀전』주, 『노자』주, 『회남자』주, 『이소』주 등의 저작을 남겼다. 마융은 경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삼전이동》(三傳異同), 《효경주》(孝經注), 《논어주》(論語注), 《시경주》(詩經注), 《상서주》(尙書注), 《삼례주》(三禮注), 《열녀전주》(列女傳注), 《노자주》(老子注), 《회남자주》(淮南子注), 《이소주》(離騷注) 등을 저술하여 경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삼전이동(三伝異同)』, 『효경』주, 『논어』주, 『시경』주, 『상서』주, 『삼례(三礼)』주, 『열녀전』주, 『노자』주, 『회남자』주, 『이소』주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힌다.
3. 1. 경전 주석과 훈고학
마융은 경전에 주석을 달고 훈고학을 연구했다. 《삼전이동》(三傳異同), 《효경주》(孝經注), 《논어주》(論語注), 《시경주》(詩經注), 《상서주》(尙書注), 《삼례주》(三禮注), 《열녀전주》(列女傳注), 《노자주》(老子注), 《회남자주》(淮南子注), 《이소주》(離騷注)를 저술했다. 『삼전이동(三伝異同)』, 『효경』주, 『논어』주, 『시경』주, 『상서』주, 『삼례(三礼)』주, 『열녀전』주, 『노자』주, 『회남자』주, 『이소』주 등의 저작을 남겼다.3. 2. 교육 활동과 제자 양성
마융은 경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삼전이동》(三傳異同), 《효경주》(孝經注), 《논어주》(論語注), 《시경주》(詩經注), 《상서주》(尙書注), 《삼례주》(三禮注), 《열녀전주》(列女傳注), 《노자주》(老子注), 《회남자주》(淮南子注), 《이소주》(離騷注) 등을 저술하여 경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삼전이동(三伝異同)』, 『효경』주, 『논어』주, 『시경』주, 『상서』주, 『삼례(三礼)』주, 『열녀전』주, 『노자』주, 『회남자』주, 『이소』주 등은 그의 대표적인 저술로 꼽힌다.4. 평가
마융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후한서』 권 90에 기록되어 있다.
마융은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종합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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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 긍정적 평가
마융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후한서』 권 90에 기록되어 있다.4. 2. 부정적 평가
마융은 학문적으로 뛰어나고 많은 제자를 양성했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4. 3. 종합적 평가
wikitable종합적 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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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2]
서적
Houhanshu
[3]
서적
Houhanshu
[4]
서적
Orthodoxy In Late Imperial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0
[5]
서적
Cai Zhonglang Ji
[6]
서적
Houhanshu
[7]
서적
Houhanshu
[8]
서적
東観漢記
[9]
서적
마융집
[10]
서적
후한서 마융전
:zh:後漢書/卷60上
[11]
서적
후한서 권64 열전54
:zh:後漢書/卷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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