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유럽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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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몽골의 유럽 원정은 13세기 몽골 제국이 동유럽과 중부 유럽을 침략한 일련의 군사 작전을 의미한다. 몽골 제국은 1230년대에 키예프 루스를 정복한 후, 폴란드, 헝가리, 보헤미아, 크로아티아, 오스트리아 등지로 진격했다. 교황청은 십자군을 조직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몽골군은 1241년 헝가리에서 모히 전투에서 승리하고, 레그니차 전투에서 폴란드군을 격파하는 등 초기에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1242년 오고타이 칸의 죽음과 기후 변화, 몽골군의 전략적 판단 등으로 인해 중앙 유럽에서 철수했다. 몽골군의 침략은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유럽을 침략했다. 몽골군의 전술과 유럽 군대의 대응, 화약 무기 사용 여부 등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몽골의 유럽 침략은 유럽의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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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7년부터 1240년까지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 제국이 키예프 루스를 침략하여 주요 공국들을 파괴하고 멸망시켜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두었으며, 이는 루스 사회, 경제,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쳐 모스크바 대공국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골의 유럽 원정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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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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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220년대–1240년대 |
장소 | 동유럽 북유럽 중앙유럽 캅카스 발칸 반도 |
영토 | 볼가 불가리아, 쿠만족, 알란, 키예프 루시 공국 정복 후 몽골 제국의 속국이 됨. 조지아 왕국 복속. 헝가리 왕국의 일부 지역이 일시적으로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음. 동유럽, 중앙유럽, 북캅카스는 반복적인 습격과 침략을 받음. |
결과 | 몽골의 승리: 수많은 유럽 정치 단체가 파괴, 정복 또는 습격당하고 조공을 바치도록 강요받음. 동유럽, 캅카스 및 중앙유럽 대부분 지역의 인구, 문화 및 정치 구조가 파괴됨. 중앙유럽에서 몽골군이 최종 철수 (1242년). |
교전 세력 | |
교전 1 | 키예프 루시 블라디미르-수즈달 키예프 공국 갈리치아-볼히니아 노브고로드 공화국 스몰렌스크 로스토프 투로프-핀스크 체르니고프 랴잔 페레야슬라블 쿠만족 (1223) 폴란드 왕국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마이센 변경백국 제2차 불가리아 제국 세르비아 왕국 쿠마니아 지원 세력: 오스트리아 공국 모라비아 변경백국 성전기사단 신성 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
교전 2 | 몽골 제국 |
2. 배경
(내용 없음)
2. 1. 몽골 제국의 팽창
몽골의 유럽 침공 전투 목록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2. 2. 유럽 침공의 배경
3. 키예프 루스 침공
몽골의 키예프 루스 침공은 1223년 칼카 강 전투에서 루스 군대를 격파하면서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정복은 1235년 오고타이 칸이 바투 칸에게 명령하면서 이루어졌다.[3][92] 바투 칸이 이끄는 몽골군은 1237년부터 루스 공국들을 차례로 공격하여 랴잔, 수즈달, 블라디미르 등 주요 도시들을 함락시켰으며,[3] 1240년 12월에는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파괴했다.[4][93] 이로써 몽골은 동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고 서쪽으로 진군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3. 1. 칼카 강 전투 (1223년)
1223년, 몽골군은 오늘날 마리우폴 근처 칼카 강 전투에서 약 5만 명의 키예프 루스 군대를 격파하고 거의 10년 동안 물러났다.3. 2. 몽골군의 재침공 (1237-1240년)
오고타이 칸은 1235년에 바투 칸에게 루스 정복을 명령했다.[3][92] 조치의 아들들과 사촌들인 몽케 칸과 구유크 칸이 포함된 주력 부대는 1237년 12월 랴잔에 도착했다. 랴잔은 항복을 거부했고, 몽골군은 도시를 약탈한 후 수즈달로 진격했다.[3] 많은 루스 군대가 패배했으며, 유리 2세는 1238년 3월 4일 시트 강 전투에서 전사했다.[3] 이후 몽골군은 블라디미르, 토르조크, 코젤스크와 같은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3]

몽골군은 이후 초원으로 방향을 돌려 킵차크인과 알란족을 궤멸시키고 크림 반도를 약탈했다. 바투는 1239년 키예프 루스로 돌아와 페레야슬라프와 체르니히우를 약탈했다.[4] 몽골군은 1240년 12월 6일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으며,[4] 수티예스크를 파괴하고 할리치와 볼로디미르-볼린스키를 정복했다.[4][93] 중앙유럽으로 진격하기 전에 바투 칸은 폴란드를 정찰하기 위해 소규모 부대를 보냈다. 첫 번째 부대는 폴란드군에게 격파되었으나, 다른 부대는 폴란드 군대를 격파하고 돌아왔다.[4][93]
4. 중앙 유럽 침공
유럽 공격은 수부타이가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그는 이 공격에서의 승리로 지속적인 명성을 얻었다. 다양한 루스 공국들을 파괴한 후, 수부타이는 폴란드와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동부까지 첩자를 보내 유럽 심장부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5] 유럽 왕국들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그는 바투 칸과 다른 두 명의 친족 왕자가 명목상 지휘하는 공격을 기획했다. 조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전체적인 지휘를 맡았지만, 수부타이는 현장에서의 전략가이자 실질적인 지휘관으로서 루스 공국 침공 당시 북부 및 남부 작전에 모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공격을 이끌었다.[6] 그는 또한 헝가리를 직접 공격하는 중앙 부대를 지휘했다. 몽골군은 여러 방면으로 나뉘어 중앙 유럽을 침공했는데, 카단이 이끄는 북부 부대는 폴란드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구유크 칸의 군대는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했다. 한편, 수부타이가 이끄는 본대는 헝가리에서 모히 전투를 통해 벨라 4세의 군대를 격파하며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투들의 작전 역시 수부타이가 계획했으며, 특히 모히 전투는 그의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4. 1. 폴란드 침공


몽골의 유럽 공격은 수부타이가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그는 다양한 루스 공국들을 파괴한 후 폴란드와 헝가리, 오스트리아 동부까지 첩자를 보내 유럽 심장부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5] 조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전체적인 지휘를 맡았으나, 실제 현장에서의 전략과 지휘는 수부타이가 담당했다.[6]
몽골군은 세 개의 군대로 나뉘어 중앙 유럽을 침공했는데, 이 중 카단이 이끄는 북부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했다. 키예프를 약탈한 후,[9] 바투 칸은 폴란드로 일부 병력을 보내 루블린을 파괴하고 수적으로 열세였던 폴란드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차르나 한차 강변의 폴라니에츠에 도달하여 그곳에 야영지를 세웠다.[10] 그곳에서 크라쿠프의 보이보드가 이끄는 소수의 폴란드 기사들이 몽골군을 기습 공격했다. 폴란드군은 초반에 기습의 이점을 살려 많은 몽골 병사를 살해하는 데 성공했지만, 몽골군이 폴란드군의 실제 수적 열세를 파악하고 재정비하여 반격하자 결국 패배했다. 이 패배에는 초기 성공 후 약탈에 정신이 팔린 폴란드 기사들의 행동도 일부 영향을 미쳤다.[10]
폴란드 침공의 결정적인 전투는 1241년 레그니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실롱스크 공작이자 폴란드 대공인 헨리 2세가 이끄는 분열된 폴란드와 그 동맹국 연합군은 카단이 이끄는 몽골군에게 크게 패배했으며, 헨리 2세 자신도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레그니차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카단의 몽골 군대는 헝가리로 이동하여 수부타이가 이끄는 본대와 합류했고, 1241년 4월 11일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의 벨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
몽골군은 1241년 여름 동안 헝가리 평원을 휩쓸었고, 1242년 초에는 달마티아와 모라비아까지 세력을 확장했으나,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왕자들이 새로운 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몽골 본국으로 철수했다.[8]
4. 2.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침공
(작성할 내용 없음)4. 3. 헝가리 침공
수부타이는 유럽 공격을 계획하고 실행했으며, 이 공격에서의 성공으로 큰 명성을 얻었다. 다양한 루스 공국들을 정복한 후, 그는 폴란드, 헝가리, 그리고 오스트리아 동부 지역까지 첩자를 파견하여 유럽 심장부에 대한 공격을 면밀히 준비했다.[5] 유럽 왕국들의 상황을 파악한 수부타이는 바투 칸과 다른 두 명의 왕족이 명목상 지휘하는 공격을 기획했다. 조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전체적인 지휘를 맡았지만, 실제 현장에서의 전략 수립과 지휘는 수부타이가 담당했으며, 그는 루스 공국 침공 당시 북부와 남부 작전 모두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6]수부타이는 헝가리를 직접 공격하는 중앙 부대를 이끌었다. 한편, 카단이 지휘하는 북부 부대는 레그니차 전투에서 폴란드 연합군을 격파했고, 귀위크 칸의 군대는 트란실바니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이 승전하는 동안 수부타이는 헝가리 평원에서 본대와 합류를 기다렸다. 모든 부대가 집결한 몽골군은 사요강으로 이동하여 1241년 모히 전투에서 벨러 4세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작전 역시 수부타이가 직접 계획했으며, 이는 그의 군사적 경력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4. 3. 1. 크로아티아 침공
중세 시대에 크로아티아 왕국은 헝가리 왕국과 개인 연합 관계에 있었으며, 당시 왕은 벨라 4세였다.[28][29][30]1241년 모히 전투에서 몽골군에게 패배한 벨라 4세는 오늘날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로 피신했다. 이에 바투 칸은 카단에게 약 2만 명의 병력을 주어 벨라 4세를 추격하게 했다. 몽골군의 주요 목표는 영토 정복보다는 벨라 4세를 생포하는 것이었다. 당시 자그레브는 제대로 요새화되어 있지 않아 몽골군의 침략을 막아내지 못하고 파괴되었으며, 자그레브 대성당도 불탔다.[31] 이후 벨라 4세는 자그레브의 그라데츠 지역에 1242년 금인칙서를 내려 방어 시설 강화를 명했고, 시민들은 성벽과 탑을 건설했다.[32]

몽골군은 자그레브에서 판노니아를 거쳐 달마티아까지 벨라 4세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1242년 3월, 카단이 이끄는 몽골군은 크로아티아의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다. 클리스 요새는 견고하게 방어되고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은 말에서 내려 인근 절벽을 기어오르는 방식으로 공격해야 했다. 크로아티아 수비군은 몽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혔고, 이에 격분한 몽골군은 성내로 진입하여 격렬한 백병전을 벌이며 많은 전리품을 약탈했다. 그러나 벨라 4세가 요새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몽골군은 클리스 요새 공격을 포기하고 스플리트와 트로기르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나누었다.[33]
벨라 4세는 크로아티아 귀족들과 트로기르, 랍과 같은 달마티아 도시들의 도움으로 몽골군의 추격을 피해 도망칠 수 있었다. 반면 스플리트 시는 벨라 4세를 돕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군에게 패배한 후 몽골군은 후퇴했고,[32] 일부 역사가들은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지역의 험준한 산악 지형이 몽골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크로아티아 군의 매복 공격으로 큰 손실을 입었다고 설명한다.[32] 결과적으로 크로아티아의 많은 지역이 몽골군에 의해 약탈되고 파괴되었지만, 몽골군은 크로아티아를 장기간 점령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 벨라 4세는 자신을 도운 크로아티아 도시들과 귀족들에게 상을 내렸다.
한편, 벨라 4세와 마리아 라스카리나의 딸인 성 마가렛 (1242년 1월 27일 – 1271년 1월 18일)은 몽골 침략이 한창이던 1242년, 벨라 4세가 피신해 있던 클리스 요새에서 태어났다.[34]
4. 4. 오스트리아 침공
헝가리 정복은 몽골 군대가 빈을 침략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전 동유럽과 중유럽 국가에서의 작전과 유사한 전술을 사용하여, 몽골군은 먼저 소규모 부대를 출격시켜 빈 외곽의 고립된 정착지를 공격하여 주민들에게 공포와 혼란을 조성하려 했다.[36] 1241년, 몽골군은 빈 남쪽에 위치한 비너 노이슈타트와 인근 지역을 약탈했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공격의 주 대상이 되었고, 이전 침략과 마찬가지로 몽골군은 비교적 무방비 상태의 주민들에게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다. 빈 북쪽에 위치한 코르노이부르크시도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37]오스트리아 공국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이전에 올로모우츠에서 그리고 모히 전투 초반에 몽골군과 교전한 경험이 있었다. 헝가리와는 달리, 프리드리히 공작과 그의 기사단, 그리고 외국 동맹국들의 지도 아래 빈은 더 빠르게 전열을 정비하여 소규모 몽골 부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38][39] 전투 후, 공작은 몽골군이 300명에서 700명 이상을 잃은 반면, 오스트리아 방어군은 100명의 손실을 입었다고 추산했다.[40] 오스트리아 기사단은 또한 마르히강 경계의 데베니 지역에서 몽골군을 격파했다.[41] 이러한 초기 공격 실패 후, 나머지 몽골군은 대칸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유럽에서 퇴각했다.
4. 5. 불가리아 침공
바투 칸 군대의 일부는 헝가리에서 루테니아로 후퇴하는 과정에서 불가리아를 침략했다. 이 첫 번째 침공군은 차르 이반 아센 2세가 이끄는 불가리아군에게 패배했다.[42] 하지만 같은 해, 더 큰 규모의 몽골군이 다시 불가리아를 침공하여 약탈을 자행했다. 이 재침공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적다. 페르시아의 역사가 라시드 알 딘 하마다니는 불가리아의 수도였던 터르노보가 약탈당했다고 기록했지만, 이 기록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터르노보 약탈 소문은 널리 퍼져 팔레스타인의 바르 헤브라에우스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43] 불가리아 침략 사실 자체는 필리프 무케, 캉프레의 토마스, 몬테크로체의 리콜도와 같은 다른 동시대 사료에서도 언급된다.[44] 1253년의 한 동시대 문서에 따르면, 당시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칼리만 1세는 몽골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 신세였는데, 이는 아마도 1242년의 침략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결과로 추정된다.[45]5. 몽골군의 전술과 전략
몽골군은 전통적인 유럽식 백병전 위주의 기사 전투 방식과는 달리, 기동성을 활용하여 거리를 유지하고 수적 우위를 통해 공격하는 전술을 구사했다.[46] 이러한 전술적 차이로 인해 몽골군과 맞선 유럽 군대는 초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5. 1. 유럽 군대의 대응
전통적인 유럽식 백병전 기사 전투 방식은 몽골군에 맞서면서 참담한 결과를 맞이했다. 몽골군은 유럽 기사들과 거리를 유지하며 수적 우위를 활용해 효과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29권은 "몽골 침략군에 맞서 싸운 기사 전투는 1241년 레그니차 전투에서 폴란드군에게, 그리고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군에게 더욱 처참한 실패를 안겨주었다. 봉건 유럽이 중국과 모스크바 대공국의 운명을 겪지 않은 것은 전술적 역량 때문이 아니라 몽골 최고 통치자 오고타이의 예상치 못한 죽음과 그에 따른 몽골군의 동쪽 철수 때문이었다."라고 평가한다.[46]그러나 초기 몽골 침략과 이후의 습격 과정에서 중무장한 기사와 기병은 경무장 병력보다 몽골군을 상대로 더 효과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모히 전투에서 헝가리 경기병과 보병은 몽골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지만, 템플 기사단과 같은 중무장 기사들은 상대적으로 선전했다.[47] 레그니차 전투에서는 전투에 참여한 65명에서 88명 사이의 템플 기사단 중 기사 3명과 하사관 2명만이 전사하는 데 그쳤다.[48] 오스트리아 공작 휘하의 기사들 역시 빈 근처에서 벌어진 몽골과의 전투에서 비교적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39]
헝가리 국왕 벨라 4세는 호스피탈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헝가리에 대한 2차 몽골 침공에 대비하여 자체적으로 더 잘 무장된 지역 기사를 훈련시키는 등 방어 태세를 강화했다.[49] 유럽 정착지에 대한 몽골의 습격 이후 수십 년 동안 서방 군대, 특히 헝가리는 공성 무기에 대비한 더 견고한 요새를 건설하고 중기병 전력을 개선하는 등 몽골의 전술에 적응하기 시작했다.[50] 이후 몽골 제국이 분열된 후, 킵차크 칸국이 헝가리를 다시 침공했을 때, 헝가리는 헝가리의 라슬로 4세가 이끄는 기사 부대의 비중을 늘렸고, 서부 트란실바니아의 언덕에서 킵차크 칸국의 주력 군대를 빠르게 격파했다.[51]
또한, 이 시기 동유럽과 중부 유럽의 여러 국가들은 상호 적대 행위를 멈추고 연합하여 킵차크 칸국의 잔존 세력을 몰아내는 데 힘을 합쳤다.[52] 게릴라전과 끈질긴 저항 역시 많은 유럽인, 특히 크로아티아와 두르주케티아 주민들이 몽골의 영구적인 정착을 막고 그들을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3][54]
5. 2. 화약 무기 사용 논란
여러 자료에서는 몽골군이 모히 전투에서 유럽 군대를 상대로 다양한 형태의 화기 및 화약 무기를 사용했다고 언급한다. 여기에는 투석기를 이용한 폭탄 투척도 포함된다.[55][56][57] 케네스 워렌 체이스(Kenneth Warren Chase) 교수는 몽골이 화약과 관련 무기를 유럽에 도입했다고 평가했다.[58] 이러한 배경 속에서 유럽에서는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문헌상 화약 발명가로 여겨지는 신비한 인물 베르톨트 슈바르츠에 대한 전설이 나타나기도 했다.[59]6. 몽골군의 철수
1241년 헝가리 대평원에서 겨울을 보낸 몽골군은 1242년 3월 말 갑작스럽게 철수를 시작했다. 이 갑작스러운 철수의 정확한 원인은 오늘날까지도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나,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62][63][64][65][66]
몽골군의 철수 배경에는 다양한 설명이 존재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가설은 1241년 12월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새로운 대칸을 선출하기 위한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칭기스 칸의 후손인 왕자들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60] 그러나 당시 몽골 제국의 통신 속도를 고려할 때 오고타이의 사망 소식이 1242년 3월까지 유럽 원정군에게 전달되었을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61][62][63] 다른 요인으로는 당시 헝가리 지역의 기후 변화가 지목된다. 1242년 초 춥고 습한 날씨로 인해 헝가리 대평원이 습지화되면서 기마 군단의 기동성이 저하되고 말의 목초지가 부족해졌다는 것이다.[64][66] 또한, 유럽에서의 군사 작전이 예상보다 큰 비용과 병력 손실을 초래했고, 점령지에서의 저항과 쿠만족의 반란 등 군사적, 정치적 어려움도 철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65] 바투 칸과 구유크 칸 사이의 정치적 갈등[67] 등 몽골 내부의 권력 투쟁 역시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70]
결과적으로 몽골군은 1242년 중반 중앙 유럽에서 완전히 철수했으며, 이후 바투 칸의 사망과 베르케 칸의 이슬람 개종 및 훌라구 칸과의 대립 등 내부 사정으로 인해 대규모 유럽 원정은 재개되지 않았다.[71]
6. 1. 오고타이 칸의 죽음
1241년 동안 몽골군의 대부분은 헝가리 대평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1242년 3월 말 철수를 시작했다. 이 철수의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는 1241년 12월 11일 오고타이 칸의 사망이 꼽힌다. 오고타이 칸은 사냥 중 과음으로 5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몽골 제국의 왕자들이 새로운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교황 인노첸시오 4세의 사절로 몽골 궁정을 방문했던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의 기록에서 뒷받침된다. 그는 몽골군이 이러한 이유로 철수했다고 기록했으며, 신이 라틴 기독교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대칸을 죽게 했다고 덧붙였다.[60] 그러나 스테판 포우는 칸의 사망 소식이 몽골 본국에서 중앙 유럽까지 전달되려면 최소 3개월 이상이 걸렸을 것이며, 이는 겨울철 이동의 어려움을 고려할 때 1242년 3월까지 도착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카르피니 자신이 1246년 키이우에서 몽골까지 이동했을 때, 선거식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 밤낮으로 말을 갈아타며 "대단한 속도"로 이동했음에도 5개월이 걸렸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61]몽골 제국의 일 칸국의 공식 역사를 편찬한 라시드 알딘은 그의 저서에서 몽골군이 철수를 시작할 당시 오고타이 칸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명시적으로 기록했다.[62] 그는 몽골 제국의 공식 연대기인 ''알탄 데프테르''를 참조하여 역사를 서술했으며, 존 앤드루 보일은 라시드 알딘의 중앙 유럽 철수 관련 기록이 철자법 등을 근거로 볼 때 몽골의 원 기록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했다.[63]
오고타이 칸의 죽음 외에도 다른 철수 원인들이 제기된다. 연륜 연대기 분석 결과, 1242년 헝가리 지역은 이전의 따뜻하고 건조한 여름과 달리 춥고 습한 기후로 변했다는 주장이 있다. 이로 인해 헝가리 대평원이 습지화되면서 유목민인 몽골 기병대의 기동성이 떨어지고 말들이 먹을 목초지가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64][66] 또한, 몽골의 유럽 침공은 많은 비용이 들었지만 점령한 지역에서 얻은 전리품이 적었고, 여러 도시의 포위 공격에 실패했으며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많은 병력을 잃었다. 유럽 전선에 병력이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쿠만족의 반란(이를 진압하기 위해 바투가 돌아가 약 1년을 보냄)도 철수의 요인이 되었을 수 있다.[65]
잭 웨더포드는 몽골군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은 지형에 도달했기 때문에 침공을 멈췄다고 주장한다. 목초지 부족과 습한 해안 기후가 몽골 활의 성능을 저하시켰다는 것이다.[68] 그러나 몽골은 남송이나 인도와 같이 인구가 밀집되고 습한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반론이 있다. 서유럽의 지형은 몽골군에게 익숙하지 않은 숲과 성이 많았고, 유럽의 중기병이 반격할 기회를 제공했을 수 있다. 존 키건은 유럽이 더 많은 식량 잉여와 더 큰 말을 보유하여 군사적으로 유리했다고 보았다.[69]
일부 역사가들은 바투가 모히 전투 이후 더 이상 진격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멈췄다고 본다.[70] 그는 이미 루스 지역의 정복지를 확보하는 데 주력했으며,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몽골 제국의 권력 투쟁에 참여하기 위해 귀환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수부타이의 소환 역시 몽골군에게 큰 손실이었다.

오고타이 칸 사후, 그의 아들 구유크와 주치의 아들 바투 사이에는 1241년부터 1248년까지 거의 공개적인 적대 관계가 형성되었다. 이 기간 동안 몽골 제국은 오고타이의 미망인 토레게네 카툰이 섭정을 맡았는데, 그녀는 아들 구유크를 대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바투는 쿠릴타이 참석을 거부하고 유럽에 머물며 대칸 선출을 지연시켰다.[67] 구유크가 1248년 사망했을 때, 그는 바투를 만나 자신의 권위를 인정받게 하려던 참이었다. 바투는 또한 할리치-볼히니아 공국의 다닐로 갈리츠키와 갈등을 겪었으나, 1259년 베르케 치하에서 최종적으로 진압되었다.
바투는 몽케 칸이 1251년 대칸으로 선출된 후에야 킵차크 칸국과 몽골 제국 중앙 정부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1255년 서방 원정을 재개할 준비를 했지만, 곧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역시 아버지의 계획을 실행하기 전에 사망했고, 바투의 동생 베르케가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되었다. 이슬람으로 개종한 베르케는 유럽 침공보다는 성지를 공격하는 사촌 훌라구 칸을 견제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이슬람 세계의 정신적 중심지인 아바스 칼리파조를 파괴한 훌라구의 행동에 분노했다. 이집트의 맘루크는 베르케가 무슬림이며 훌라구와 적대 관계라는 것을 알고 도움을 요청하며 동맹 관계를 맺었다.[71]
킵차크 칸국과 맘루크는 모두 튀르크계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킵차크 칸국은 주치가 받은 4,000명의 몽골 병사를 기반으로 형성되었지만, 휘하 병력의 대부분은 몽골에 복속된 튀르크인이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튀르크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베르케는 샤머니즘을 믿는 훌라구보다 무슬림 튀르크계인 맘루크에게 더 큰 동질감을 느꼈다. 훌라구가 맘루크가 지배하는 성지를 공격하려 하자, 베르케는 훌라구를 북쪽에서 공격하여 캅카스 지역에서 전쟁(1262년)을 벌였다. 이로 인해 훌라구는 성지 공격을 포기하고 북쪽의 영토 방어에 집중해야 했다. 결국 킵차크 칸국은 유럽 대신 남쪽과 동쪽의 상황에 집중하게 되었고, 베르케는 훌라구와의 전쟁 자금 마련을 위해 1259년과 1265년에 유럽에 소규모 원정군을 보냈을 뿐, 대규모 유럽 침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6. 2. 기후 변화설
몽골군 철수의 또 다른 원인으로는 당시 헝가리 지역의 기후 변화가 지목된다. 나이테 기록을 분석한 결과, 1242년경 헝가리 지역은 이전의 따뜻하고 건조했던 여름과 달리 기온이 떨어지고 강수량이 증가하면서 춥고 습한 기후로 변화한 것으로 나타났다.[64]이러한 급격한 기후 변화는 헝가리 대평원의 초원을 범람시키고 광범위한 지역을 습지대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말을 핵심 전력으로 삼는 유목민인 몽골 기병대에게는 치명적인 조건이었다. 습지화된 지형은 기병대의 기동성을 크게 떨어뜨렸고, 말들이 먹을 풀이 있는 목초지를 찾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군대의 야영 및 주둔에도 큰 어려움을 초래했다. 따라서 악화된 기후와 환경 조건이 몽골군의 추가적인 서쪽 진격을 막고 철수를 결정하게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64][66]
역사가 잭 웨더포드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서유럽으로 더 나아갈수록 몽골군에게 익숙한 초원 지대가 줄어들고, 습한 해안 기후가 주력 무기인 몽골 활의 성능을 저하시키는 등 지형과 기후 조건이 불리해졌기 때문에 침략을 멈췄다고 주장한다.[68]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몽골이 송나라 남부나 인도와 같이 훨씬 습하고 인구가 밀집된 지역에서도 성공적으로 전쟁을 수행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6. 3. 기타 요인
오고타이 칸의 죽음 외에도 몽골군의 철수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는 여러 요인들이 제기된다.일 칸국의 역사가 라시드 알딘은 자신의 저서에서 몽골군이 철수를 시작할 당시 오고타이의 죽음을 알지 못했다고 명시적으로 기록했다.[62] 이는 몽골 공식 기록에 접근하여 저술한 내용으로, 존 앤드루 보일은 라시드 알딘의 설명이 몽골 기록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한다.[63] 따라서 오고타이의 죽음이 철수의 유일하거나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른 유력한 설명 중 하나는 기후 변화이다. 나무 나이테 분석 결과, 1242년경 헝가리 지역은 이전의 따뜻하고 건조한 여름과 달리 춥고 습한 기후로 변했다.[64] 증가한 강수량은 헝가리 평원을 거대한 늪지대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는 기마 군단의 기동성을 제한하고 말에게 필수적인 목초지를 감소시켰을 것이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유목민인 몽골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 철수를 재촉했을 수 있다.[66]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어려움이 있었다. 몽골군은 유럽 침략 과정에서 비용이 많이 들고 성과가 적은 포위 공격을 반복했으며, 예상보다 적은 전리품을 얻는 데 그쳤다. 또한, 유럽 세력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65] 유럽 전선에 병력이 넓게 분산되어 있었고, 내부적으로는 쿠만족의 반란이 일어나 바투가 이를 진압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투입해야 했다.[65] 역사가 잭 웨더포드는 몽골군의 진격이 목초지가 부족하고 습한 해안 기후가 몽골 활의 성능을 저하시키는 등 지형적 불리함에 직면하면서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68]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몽골은 이미 인구가 밀집되고 습한 기후의 송나라 남부 지역을 성공적으로 정복한 경험이 있으며, 서유럽의 영토는 몽골이 익숙한 지역보다 더 많은 숲과 성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 중기병이 반격할 기회가 있었다. 또한 아바르족과 초기 헝가리인의 스텝 전술에도 불구하고, 두 민족 모두 9세기와 10세기에 서방 국가에 의해 패배했지만, 몽골에 의해 정복된 많은 국가도 이전에 스텝 전술에 성공적으로 대항했다. 헝가리의 상당수의 중요한 성과 도시들도 강력하고 악명 높은 몽골의 포위 전술에 저항했다.
존 키건은 유럽이 더 많은 식량 잉여를 통해 더 나은 작전을 수행하고 더 큰 말을 갖는 이점이 있었다고 생각했다.[69]
몽골 내부의 정치적 상황 역시 중요한 변수였다. 일부 역사가들은 바투가 모히강에서 멈춘 이유가 처음부터 서유럽 깊숙이 진격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70] 그는 새로 정복한 루스 지역의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했을 수 있다. 오고타이 칸 사후 본격화된 대칸 계승 분쟁은 바투가 권력을 주장하기 위해 몽골로 급히 돌아가게 만들었고, 이는 그의 서방 확장을 종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유능한 전략가 수부타이의 소환은 몽골 군대가 정신적 지도자와 주요 전략가를 잃게 만들었다. 실제로 1241년부터 1248년까지 바투와 오고타이의 아들 구유크 사이에는 거의 공개적인 전쟁 상태에 가까운 심각한 갈등이 존재했으며, 오고타이의 미망인 토레게네 카툰은 아들 구유크를 대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67] 이러한 내부 불안정은 몽골 제국의 서방 확장을 지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바투는 또한 그의 통치 말년에 할리치-볼히니아 공국의 통치자 다닐로 갈리츠키와의 문제에 직면했다. 다닐로는 금장 호르데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쳤고 1254년에 일부 몽골 공격을 격퇴했으나, 결국 1259년 베르케가 호르데를 통치할 때 패배했다. 바투 칸은 몽케 칸이 대칸으로 선출된 1251년에야 대칸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군대를 서쪽으로 돌릴 수 있었지만, 1255년 유럽 침략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뒤를 이었으나 아버지와 수부타이의 유럽 침략 계획을 실행할 만큼 오래 살지 못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바투의 동생 베르케가 킵차크 칸국의 칸이 되었다.
베르케는 이슬람으로 개종했으며, 유럽 침략보다는 성지를 황폐하게 만드는 사촌 훌라구 칸을 막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이슬람 세계의 영적 지도자인 아바스 칼리파조를 파괴한 훌라구의 행동에 경악했다.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베르케가 무슬림이고 그의 사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첩을 통해 알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와 그의 칸국과의 관계를 소중히 유지했다. 두 세력 모두 튀르크인 출신이었다.[71] 맘루크의 많은 사람들은 튀르크계였고 베르케의 칸국 또한 거의 완전히 튀르크계였다. 징기스칸의 장남 조치는 출생 논란이 있었고, 칸국을 시작하기 위해 4,000명의 몽골 전사만 받았다. 그의 전사들은 사실상 몽골에 복종한 튀르크인이었다. 따라서 칸국은 문화적으로 튀르크적이었고, 몽골 샤머니즘 훌라구와 그의 무리보다 무슬림 튀르크 맘루크 형제들과 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71] 따라서 훌라구 칸이 맘루크가 지배하는 성지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위해 군대를 집결하기 시작했을 때, 맘루크는 신속하게 베르케 칸에게 호소했고, 베르케는 사촌을 상대로 군대를 보내 북쪽에서 자신의 영토를 방어하도록 강요했다.
훌라구는 1262년까지 자신의 영토로 돌아갔지만, 그의 패배를 복수할 수 있는 대신, 1263년 캅카스 이북에서의 침략 시도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은 후 베르케 칸과 대결하기 위해 북쪽으로 향해야 했다. 베르케 칸이 그를 북쪽으로 유인하고 성지에서 멀리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킵차크 칸국은 유럽을 침략하지 않았고 대신 남쪽과 동쪽을 감시했다. 베르케는 단지 훌라구와의 전쟁을 위해 필요한 전리품을 수집하기 위해 1259년과 1265년에 두 번 비교적 가벼운 습격으로 유럽에 군대를 보냈다.
7. 몽골 침공의 영향
몽골 침공 당시 유럽은 교황청과 신성 로마 제국 간의 심각한 정치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72] 이러한 내부 분열은 외부의 위협인 몽골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어려움을 초래하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73]
7. 1. 정치적 영향

몽골의 침입 당시 유럽은 내부적인 정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교황청은 이베리아와 중동에서의 십자군 발동을 우선시했으며, 1238년에는 그루지야의 몽골 방어 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오히려 키예프 루스에 대한 십자군을 선포하기도 했다. 이는 키예프 루스가 발칸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한편,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프리드리히 2세는 이탈리아를 제국에 통합하려 시도하며 교황과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었다. 교황 그레고리 9세와 그의 후임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를 네 번이나 파문하고 그를 적그리스도로 규정하며 폐위시키려 했다.[72]
이러한 상황 속에서 1240년대 기독교 세계의 군사적 노력은 이미 5개의 십자군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이 중 몽골을 직접 겨냥한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헝가리의 벨러 4세가 몽골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교황에게 요청했을 때, 교황청은 오히려 신성 로마 제국 황제에 대항하는 십자군 참여를 설득하려 했다. 결국 교황 그레고리 9세는 몽골에 대한 십자군을 약속했고, 1241년 중반 소규모 십자군 결성을 승인했지만, 그해 8월 교황이 사망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몽골과 싸우기 위해 모금된 자원은 1241년 9월, 독일 귀족들이 프리드리히 2세의 아들 콘라트 4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호엔슈타우펜 왕가에 대한 십자군과 싸우는 데 사용되었다.[73] 즉, 유럽 내부의 정치적 대립이 외부의 거대한 위협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방해했던 것이다.
7. 2. 이후의 몽골-유럽 관계
1241년 동안 몽골군의 대부분은 헝가리 평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1242년 3월 말 철수를 시작했다. 이 철수의 가장 유력한 원인으로는 1241년 12월 11일 오고타이 칸의 사망이 꼽힌다. 오고타이 칸은 사냥 중 과음으로 56세에 사망했으며, 이로 인해 몽골의 왕자들이 새로운 대칸 선출을 위한 쿠릴타이에 참석하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는 것이다. 이는 조반니 다 피안 델 카르피네의 기록에서도 확인되는데, 그는 몽골 궁정을 방문한 후 몽골군이 이러한 이유로 철수했다고 기록했다.[60] 그러나 카르피니의 기록에 따르면 사신이 몽골에서 중앙 유럽까지 소식을 전달하는 데 최소 3개월 이상 걸렸을 것이며, 칸의 사망 소식이 3월에 도착했다면 겨울 동안 약 3개월이 걸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카르피니 자신이 1246년에 더 짧은 거리를 이동했을 때도 5개월이 걸렸다는 점을 고려하면[61], 오고타이 칸의 사망 소식이 철수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몽골 일 칸국의 역사가 라시드 알딘 하마다니는 그의 저서에서 몽골군이 철수를 시작할 당시 오고타이 칸의 사망 사실조차 몰랐다고 명시적으로 기록했다.[62] 라시드 알딘은 몽골 제국의 공식 역사서인 ''알탄 데프테르''를 참고하여 저술했기 때문에 그의 기록은 신빙성이 높다고 평가받는다.[63]
다른 가설로는 기후 변화가 있다. 연륜 연대기 분석 결과, 1242년경 헝가리 지역의 기후가 춥고 습하게 변하면서 초원이 습지화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기마 군단의 기동성과 말의 목초지를 감소시켜 몽골군의 철수를 재촉했을 수 있다.[64][66]
또한, 몽골 침략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도 철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유럽의 견고한 성들을 공략하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모되었고, 얻는 전리품은 적었으며, 저항 또한 완강했다. 몽골군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병력 손실을 입었으며, 유럽 전선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었고, 쿠만족의 반란까지 겹쳤다.[65] 일부 학자들은 유럽의 지형과 기후가 몽골군에게 불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숲이 많고 성이 밀집한 서유럽 지형과 습한 해안 기후가 몽골 활의 성능을 저하시켰다는 것이다.[68] 그러나 몽골군이 인구가 밀집하고 습한 남중국을 정복했다는 점을 들어 이 주장을 반박하는 의견도 있다. 유럽의 중기병 역시 몽골군에게 위협적인 존재였다. 존 키건은 유럽이 더 많은 식량 잉여를 통해 더 크고 강한 말을 보유할 수 있었던 점이 이점으로 작용했다고 분석했다.[69]
일부 역사가들은 바투 칸이 처음부터 더 이상 서쪽으로 진격할 의도가 없었으며, 루스 지역의 지배권을 확보하는 데 주력했다고 보기도 한다.[70] 오고타이 칸의 사망 이후 몽골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 역시 유럽 원정 중단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특히 바투 칸과 오고타이 칸의 아들 구유크 칸 사이의 갈등(1241–1248)은 제국의 분열 양상까지 보였다. 구유크의 어머니이자 섭정이었던 토레게네 카툰은 아들을 대칸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두 세력 간의 긴장은 구유크가 바투를 압박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사망(1248)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바투는 킵차크 칸국의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했으며, 할리치-볼히니아 공국의 다닐로 갈리츠키가 반기를 들자 이를 진압하기도 했다(1259년 베르케 칸 대에 최종 진압). 바투는 몽케 칸이 대칸으로 선출된(1251) 이후에야 서방 원정을 재개할 여유를 가졌으나, 1255년 원정 준비 중 사망했다.[67]
바투의 뒤를 이은 동생 베르케 칸은 유럽 침략보다는 일 칸국의 훌라구 칸을 견제하는 데 더 관심을 두었다. 베르케는 이슬람교로 개종했으며, 사촌인 훌라구가 이슬람 세계의 중심지인 아바스 칼리파조를 파괴하고 성지를 침략하는 것에 격분했다.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 역시 튀르크계가 다수였고, 킵차크 칸국 또한 대부분 튀르크계 인물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71] 베르케는 맘루크와 연대하여 훌라구를 견제했다. 훌라구가 맘루크를 공격하려 하자, 베르케는 훌라구의 북쪽 영토를 공격하여 그의 군대를 분산시켰다(1262-1263). 이로 인해 킵차크 칸국은 유럽 대신 남쪽과 동쪽의 상황에 집중하게 되었다. 베르케가 유럽으로 보낸 군대는 1259년과 1265년, 훌라구와의 전쟁에 필요한 전리품을 확보하기 위한 비교적 소규모의 습격뿐이었다.
1280년대에는 몽골 제국 내의 내전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킵차크 칸국이 다시 유럽 침공을 시도했다. 때로는 이를 통칭하여 "유럽에 대한 2차 몽골 침략", "중앙 및 남동 유럽에 대한 2차 타타르-몽골 침략",[74] 또는 "중앙 유럽에 대한 2차 몽골 침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75]
- 폴란드 침공:
- 1259년, 베르케 칸의 명령으로 부룬다이, 노가이 칸, 탈라부가가 이끄는 2만 명(2개 투멘)의 몽골군이 리투아니아를 약탈한 후 폴란드를 공격했다.[76] 이 공격으로 루블린, 시에라츠, 산도미에시, 자비호스트, 크라쿠프, 비톰 등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베르케는 폴란드를 점령하거나 정복할 의도는 없었다. 이 약탈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4세는 호르데에 대항하는 십자군을 조직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 1287년에는 탈라부가와 노가이 칸이 이끄는 침공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노가이(1만 명의 기병)와 탈라부가(2만 명의 몽골 및 루테니아 병력)가 각각 이끄는 총 3만 명(3개 투멘)의 군대가 소폴란드를 습격하여 크라쿠프 북쪽에서 합류할 계획이었다. 루블린, 마조비아, 시에라츠는 성공적으로 약탈당했지만, 몽골군은 산도미에시와 크라쿠프를 점령하는 데 실패했고, 도시 공격 시도 중 막대한 사상자를 내며 격퇴당했다. 탈라부가의 주력 부대는 레셰크 2세 공작에게 워구프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러한 심각한 좌절 이후, 탈라부가는 약탈 부대와 다시 합류하여 이미 획득한 전리품과 함께 폴란드를 탈출했다. 노가이의 부대는 크라쿠프 공격 중 손실을 입은 후 도시 북쪽과 남쪽의 땅을 약탈하기 위해 분산되었다. 한 부대는 스타리 송치 전투에서 폴란드인과 헝가리 동맹군에게 기습을 받아 패배했고, 다른 부대들은 현지인들과의 교전 중 피해를 입었다. 스타리 송치에서의 패배 후, 노가이의 부대는 모두 루테니아로 후퇴했다.[77]
- 트라키아 침공: 베르케 칸의 치세 동안에는 트라키아에 대한 약탈도 있었다. 1265년 겨울, 불가리아 차르 콘스탄틴 티흐는 발칸에서 비잔틴 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몽골의 개입을 요청했다. 노가이 칸은 2만 명의 기병(두 개의 ''투멘'')으로 구성된 몽골군을 이끌고 비잔틴 동부 트라키아 영토를 공격했다. 1265년 초,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는 몽골군과 맞섰지만, 그의 소규모 부대는 사기가 매우 낮았고 빠르게 패주했다. 그들 대부분은 도망치다가 베였다. 미하일은 제노바 선박을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후퇴해야 했고, 노가이의 군대는 트라키아 전체를 약탈했다. 이 패배 이후, 비잔틴 황제는 킵차크 칸국과 동맹을 맺고, 그의 딸 에우프로시네 팔레올로기나를 노가이와 결혼시켰다. 미하일은 또한 킵차크 칸국에 조공으로 많은 귀중한 직물을 보냈다.[78] 트라키아는 또한 우즈베크 칸의 통치 기간인 1324년과 1337년에 약탈을 겪었다.[79]
- 불가리아 침공: 차르 이반 아센 2세의 계승자들인 칼리만 아센 1세의 섭정은 킵차크 칸국에 세금을 납부하기로 결정했다. 1271년 노가이 칸은 킵차크 칸국의 봉신이었던 불가리아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다. 불가리아는 14세기 초까지 킵차크 칸국의 봉신이었다. 불가리아는 1274년, 1280년, 1285년에 몽골의 침략을 다시 받았다. 1278년과 1279년 차르 이바일로가 불가리아 군대를 이끌고 몽골의 습격을 격퇴했지만, 실리스트라에서 포위되었다.[80] 3개월간의 포위 공격 이후, 그는 다시 한번 몽골 정예 부대를 돌파하여 다뉴브강 북쪽으로 후퇴시켰다. 1280년 비잔티움 제국이 조장한 반란으로 이바일로는 많은 지원을 받지 못했고, 몽골에게 살해되기 전에 도움을 요청하며 노가이 칸의 진영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차르 게오르기 1세는 테오도르 스베토슬라프의 통치로 몽골의 위협이 마침내 끝날 때까지 몽골의 봉신이 되었다.
- 헝가리 침공:

1285년 노가이 칸은 탈라부가와 함께 헝가리를 침략했다. 노가이는 트란실바니아를 성공적으로 약탈하는 군대를 이끌었다. 레긴, 브라쇼브, 비스트리차와 같은 도시들은 약탈당하고 유린되었다. 그러나 북부 헝가리에서 주력 군대를 이끌던 탈라부가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폭설에 가로막혔고, 침략군은 페슈트 인근에서 헝가리의 라슬로 4세의 왕실 군대에 의해 격파되었으며, 귀환 중에 세케이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81] 노가이 자신의 부대도 심각한 사상자를 냈다. 이후의 침략과 마찬가지로, 몽골군은 쉽게 격퇴되었고 침략군의 상당수를 잃었다. 그 결과는 1241년 침략과는 매우 대조적이었는데, 이는 주로 헝가리의 벨라 4세의 개혁 때문이었다. 이 개혁에는 군사 전술의 발전과 가장 중요한 점으로 석조 성의 광범위한 건설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1241년 헝가리 왕국의 패배에 대한 대응이었다. 헝가리에 대한 몽골의 실패한 공격은 골든 호드의 군사력을 크게 감소시켰고 헝가리 국경에 대한 분쟁을 중단하게 했다.[75][82]
- 세르비아 침공:

1291년, 몽골-불가리아 동맹군은 세르비아를 침공했으며, 세르비아의 왕 스테판 우로시 2세 밀루틴은 몽골 군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노가이 칸이 친히 금장 호르데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겠다는 위협에 직면하여, 세르비아 왕은 노가이 칸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노가이 칸이 보복 원정을 이끌 위협을 가하자 추가적인 적대 행위를 막기 위해 그의 아들을 인질로 보냈다.
14세기 중반에 이르러 중앙 및 동유럽에 대한 킵차크 칸국의 지배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여러 유럽 왕국들은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킵차크 칸국 자체로부터 새로운 영토를 확보하려는 목적으로 몽골이 지배하는 지역으로 다양한 침공을 시작했다. 조지 5세 국왕의 지도 하에 조지아 왕국은 자국 영토에서 조지아의 지배력을 회복했으며 심지어 몽골의 손에서 트레비존드 제국을 빼앗았다.[85]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킵차크 칸국 내의 내분을 틈타 독자적인 침략을 시작하여 청수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키예프 공국과 같은 킵차크 칸국의 영토를 드네프르강까지 정복했지만, 보르스클라강 전투에서 패배한 후 진격이 저지되었다.[86][87] 모스크바 대공국 역시 많은 루스 영토를 되찾기 시작하여 결국 러시아 차르국으로 발전했다. 1345년에는 헝가리 왕국이 주도하여 몽골 영토로 침공군을 파견하여 몰다비아가 될 지역을 점령했다.[88]
이 시점에 일부 서유럽 군대도 정복된 몽골 영토에서 몽골군과 마주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자니베크 휘하의 몽골군이 크림 반도의 카파를 포위했을 때, 제노바 공화국 군대의 구원군이 도착하여 몽골군을 격파하고 15,000명의 병사를 죽였으며 공성 무기를 파괴했다. 1년 후, 제노바군은 이 지역의 몽골 항구를 봉쇄하여 자니베크가 협상하도록 강요했고, 1347년에는 제노바인들이 아조프해의 타나에 식민지를 재건하는 것을 허용했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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