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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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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연은 384년 모용수가 건국한 오호 십육국 시대의 선비족 국가이다. 전진의 붕괴를 틈타 독립한 모용수는 하북 지역을 장악하고 386년 황제에 즉위했다. 이후 적위, 서연을 멸망시키고 동진 세력을 축출하며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했으나, 북위와의 대립과 내분으로 쇠퇴했다. 398년 남연이 분열되고, 모용보와 모용성이 연이어 사망하며 혼란을 겪었다. 407년 모용희가 살해되고 모용운이 옹립되면서 멸망하고 북연이 건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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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암은 4세기 후반 후연의 장수로, 385년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용농에게 진압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백제군이 그의 반란에 연합하여 요서 지역을 점령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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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연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6국 시대 391년의 후연
391년의 후연
16국 시대 400년의 후연
400년의 후연
국명연 (燕)
통칭후연 (後燕)
역사
건국384년 1월
멸망409년 11월 6일
주요 사건중산을 수도로 지정 (386년 2월 8일)
모용수가 황제 칭호를 주장 (386년 2월 15일)
중산에서 철수 (397년 4월 27일)
모용희의 사망 (407년 9월 16일)
이전전진
이후북위
남연
북연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중산 (386년–397년)
용성 (397년–409년)
주요 지도자모용수 (384년–396년)
모용보 (396년–398년)
난한 (398년)
모용성 (398년–401년)
모용희 (401년–407년)
모용운 (407년–409년)
칭호황제
언어 및 민족
공용어중세 중국어
선비어
민족선비족
한족

2. 역사

전연전진에 의해 멸망한 뒤,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전진의 부견 휘하에서 복무하였다.[11] 383년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패배하자, 모용수는 이를 기회로 독립하기로 결심한다.[11] 부견을 설득하여 곁을 떠난 모용수는 하북의 으로 들어갔다.[11] 이때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낙양 근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위해 출진하였다.[11] 업성을 나선 모용수는 감시를 위해 수행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았으며 적빈의 군대도 흡수하였다.[11]

384년 정월, 모용수는 연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11] 모용수는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놓고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기주 대부분을 점령하였다.[11] 385년 부비가 업을 버리자,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11] 6월고구려고국양왕은 군사 4만 명을 내어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였다.[11] 모용수는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에 진주하게 하였으나,사마 학경(郝景)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요동현도를 함락당하고 남녀 1만 명이 사로잡혔다.[11] 겨울 11월에 후연의 모용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였다.[11] 유주기주의 유랑민들이 많이 투항해오자, 모용농은 범양 사람 방연(龐淵)을 요동 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위무하게 하였다.[11] 386년중산에 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383년,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비수대전에서 전진부견이 패배한 틈을 타 독립을 결심했다. 모용수는 부견을 설득하여 곁을 떠나 하북의 으로 들어갔고,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군대를 모으고 적빈의 군대까지 흡수하였다.[11]

384년 정월, 모용수는 연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11] 모용수는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1년 동안 공격하여 385년에 점령하고 기주 대부분을 차지하며 하북을 평정하였다.[11] 후연 건국 직후, 고구려고국양왕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갔다.[11] 그러나 같은 해 겨울 11월, 후연의 모용농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현도 2을 되찾았다.[11]

386년, 모용수는 중산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수독립하여, 384년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수는 전진부비가 지키는 을 놓고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기주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385년에 부비가 업을 버리자,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11] 386년중산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이후 후연은 392년정령족의 적위, 394년에 서연을 멸망시켰으며 동진 세력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385년 6월, 고구려고국양왕군사 4만 명을 내어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였다. 모용좌는 사마 학경(郝景)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구려의 군대가 그들을 쳐서 이기고, 요동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겨울 11월에 후연의 모용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 가서, 요동·현도 2을 다시 차지하였다.[11]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동진에게 대패하여 붕괴되자, 전연의 황족 출신으로 전진의 부견 휘하에 있던 모용수384년에 연(후연)을 건국하고 하북 지방을 장악하였다.[11] 386년에는 중산을 수도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이후 후연은 392년정령족의 적위를 멸망시키고, 394년에는 서연을 멸망시켰다.[11]

394년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 전투에서 대패하였으며, 이듬해 2차 정벌을 하였으나 도중에 모용수가 병사하였다.

396년 3월, 모용수는 쇠퇴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친정하여 북위군을 평성에서 격파하고 그곳을 평정했다. 그러나 4월, 귀환 도중에 모용수는 급병으로 진중에서 사망했다. 모용수의 사후 황태자 모용보가 황위를 계승했으나, 역량이 부족했던 모용보는 즉위 직후 북위의 침공을 받았다.

397년 2월, 후연 내부에서 모용상과 모용보의 동생 모용린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분이 발생했다. 결국 12월, 모용보는 용성으로 천도하여 북위의 예봉을 피했다. 398년 1월, 모용보로부터 후연 남부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던 숙부 모용덕이 활대(滑臺, 현재의 허난성안양시활현)에서 연왕(燕王)을 칭하며 자립하여 남연을 세우면서 후연은 분열되었다. 2월, 모용보는 중산 탈환을 시도하다 북위군에게 대패했고, 5월에 용성에서 란한에게 살해되었다.

7월, 모용보의 서장자 모용성이 란한을 살해하고 장락왕(長樂王)으로 즉위하여 후연을 재흥했다. 모용성은 10월에 황제에 즉위했지만, 이 무렵 후연은 내분과 북위의 압력으로 요동과 요서를 지배하는 작은 나라로 몰락한 상태였다. 401년 7월, 모용성이 금군(禁軍)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숙부 모용희가 황태후 정씨에 의해 신천왕(新天王)으로 추대되었다. 후연은 북위의 외압을 계속 받았으며, 고구려·거란 원정을 반복하며 국력을 소모했다.

407년 7월, 모용희는 한인(漢人) 중위장군 풍발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풍발은 다음 황제로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옹립하고 국호를 연(북연)으로 했기 때문에, 후연의 멸망과 북연의 건국은 풍발 자신이 즉위한 409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383년, 전진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독립할 기회를 얻었다. 384년 정월, 모용수는 연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고, 385년에는 전진부비가 지키던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11] 386년에는 중산수도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385년 6월에는 고구려고국양왕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여, 요동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해 11월, 후연의 모용농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현도 2을 다시 차지하였다.[11]

392년에는 정령족의 적위, 394년에는 서연을 멸망시켰으며, 동진 세력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394년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에서 대패하였으며, 이듬해 2차 정벌을 하였으나 도중에 모용수가 병사하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396년 8월에 북위의 침공을 받았고, 수도 중산을 버리고 용성으로 천도하였다. 398년, 모용보는 영토 수복을 위해 진격하던 도중 반란군의 지도자 난한에게 살해되었다.

난한은 창려을 자칭하였으나, 곧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성이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은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 등 700여 의 땅을 탈취하였다. 401년에 모반으로 모용성이 죽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가 즉위하였다.

모용희는 402년404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 일대, 요서 일부, 유주 지방만리장성 일대까지 모두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받았다. 407년 고구려의 5만 대군이 6개의 을 점령하여 후연이 멸망 직전으로 가자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되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고운이 옹립됨으로써 후연은 멸망하고 북연이 성립되었다.

2. 1. 건국 배경

전연전진에 의해 멸망한 뒤,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전진의 부견 휘하에서 복무하였다.[11] 383년 비수대전에서 부견이 패배하자, 모용수는 이를 기회로 독립하기로 결심한다.[11] 부견을 설득하여 곁을 떠난 모용수는 하북의 으로 들어갔다.[11] 이때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낙양 근방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모용수는 토벌을 위해 출진하였다.[11] 업성을 나선 모용수는 감시를 위해 수행한 부비룡(苻飛龍)을 살해하고 군대를 모았으며 적빈의 군대도 흡수하였다.[11]

384년 정월, 모용수는 연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11] 모용수는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놓고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기주 대부분을 점령하였다.[11] 385년 부비가 업을 버리자,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11] 6월고구려고국양왕은 군사 4만 명을 내어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였다.[11] 모용수는 모용좌에게 명하여 용성에 진주하게 하였으나,사마 학경(郝景)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하고 요동현도를 함락당하고 남녀 1만 명이 사로잡혔다.[11] 겨울 11월에 후연의 모용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현도 2군을 다시 차지하였다.[11] 유주기주의 유랑민들이 많이 투항해오자, 모용농은 범양 사람 방연(龐淵)을 요동 태수로 삼아 이들을 불러 위무하게 하였다.[11] 386년중산에 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모용수 본인은 하북 일대를 지배하여 세력을 확립했지만, 형식적으로는 여전히 전진의 신하였고, 전 황제인 모용위가 아직 살아있었으며, 서연과의 관계, 그리고 부견에 대한 은혜 때문에 황제 즉위를 거부했지만 385년 8월 부견이 살해되자, 386년 1월에 중산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모용수는 선비족 전연의 창시자인 모용황의 아들이자 핵심적인 군사 장군이었다. 369년, 방두 전투에서 환온이 이끄는 동진의 침략을 격퇴하여 국가를 멸망에서 구했다. 그러나,섭정인 그의 삼촌 모용평은 그의 새로운 명성을 불안하게 여겨 그를 죽이려 했고, 모용수는 저족이 세운 전진으로 도망쳤다.

2. 2. 후연의 건국

383년,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는 비수대전에서 전진부견이 패배한 틈을 타 독립을 결심했다. 모용수는 부견을 설득하여 곁을 떠나 하북의 으로 들어갔고, 정령족의 적빈(翟斌)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군대를 모으고 적빈의 군대까지 흡수하였다.[11]

384년 정월, 모용수는 연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11] 모용수는 전진의 부비가 지키는 업을 1년 동안 공격하여 385년에 점령하고 기주 대부분을 차지하며 하북을 평정하였다.[11] 후연 건국 직후, 고구려고국양왕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여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갔다.[11] 그러나 같은 해 겨울 11월, 후연의 모용농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현도 2을 되찾았다.[11]

386년, 모용수는 중산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전연의 마지막 황제 모용위장안에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연왕(燕王)의 칭호만을 사용했으나, 385년 모용위가 살해되고, 386년 모용수는 중산에서 황제를 칭했다.[11]

모용수는 392년 정령족의 적위를 멸망시키고, 394년에는 서연을 멸망시켰다.

2. 3. 전성기

383년, 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모용수독립하여, 384년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였다. 모용수는 전진부비가 지키는 을 놓고 1년 동안 공방전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기주 대부분을 점령하였다. 385년에 부비가 업을 버리자,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11] 386년중산수도를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이후 후연은 392년정령족의 적위, 394년에 서연을 멸망시켰으며 동진 세력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모용수는 동생 모용덕과 아들 모용린을 중추에 기용하여 내부를 다졌고, 392년 6월에는 적위를, 394년 8월에는 전연의 계승권을 두고 항쟁하던 동족 서연을 멸망시켰다. 더 나아가 동진과 싸워 산둥반도를 탈환하여, 서쪽은 산시에서 동쪽은 산둥·요동에 이르는 광대한 세력권을 구축하여, 한때의 전연을 능가하는 최대 판도를 형성했다.

385년 6월, 고구려고국양왕군사 4만 명을 내어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였다. 모용좌는 사마 학경(郝景)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고구려의 군대가 그들을 쳐서 이기고, 요동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겨울 11월에 후연의 모용농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 가서, 요동·현도 2을 다시 차지하였다.[11]

2. 4. 북위와의 대립과 쇠퇴

383년 비수대전에서 전진동진에게 대패하여 붕괴되자, 전연의 황족 출신으로 전진의 부견 휘하에 있던 모용수384년에 연(후연)을 건국하고 하북 지방을 장악하였다.[11] 386년에는 중산을 수도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이후 후연은 392년정령족의 적위를 멸망시키고, 394년에는 서연을 멸망시켰다.[11]

386년 이전, 후연은 서연에 대항하기 위해 선비족북위와 동맹을 맺었다. 처음에는 북위가 다른 부족에 대항하는 데 후연의 도움을 받았지만, 391년 7월, 모용수가 북위에 명마를 요구한 것을 거절하고, 북위가 서연에 접근하면서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항쟁 상태에 들어갔다. 모용수는 서연을 멸망시킨 후 395년 5월, 황태자 모용보에게 10만 병력을 주어 북위를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참합피 전투에서 후연군은 북위군에게 기습을 받아 궤멸적인 대패를 당했고, 이로 인해 후연과 북위의 세력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396년 3월, 모용수는 쇠퇴한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친정하여 북위군을 평성에서 격파하고 그곳을 평정했다. 그러나 4월, 귀환 도중에 모용수는 급병으로 진중에서 사망했다. 모용수의 사후 황태자 모용보가 황위를 계승했으나, 역량이 부족했던 모용보는 즉위 직후 북위의 침공을 받았다. 모용보는 북위가 주요 도시를 포위하고 보급이 떨어지면 물러날 것이라고 판단하고 병력을 중산에 집중시켰으나, 북위군은 중원을 빠르게 점령하고 점령 지역에 대한 통치를 확고히 했다.

397년 2월, 후연 내부에서 모용상과 모용보의 동생 모용린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분이 발생했다. 모용상은 9월에 모용린에게 멸망했지만, 이 내분을 틈타 북위는 10월에 모용린을 격파하고 중산을 평정했다. 결국 12월, 모용보는 용성으로 천도하여 북위의 예봉을 피했다. 이로 인해 후연은 중원의 영토를 완전히 상실했다. 398년 1월, 모용보로부터 후연 남부의 지배권을 위임받았던 숙부 모용덕이 활대(滑臺, 현재의 허난성안양시활현)에서 연왕(燕王)을 칭하며 자립하여 남연을 세우면서 후연은 분열되었다. 2월, 모용보는 중산 탈환을 시도하다 북위군에게 대패했고, 5월에 용성에서 란한에게 살해되었다.

7월, 모용보의 서장자 모용성이 란한을 살해하고 장락왕(長樂王)으로 즉위하여 후연을 재흥했다. 모용성은 10월에 황제에 즉위했지만, 이 무렵 후연은 내분과 북위의 압력으로 요동과 요서를 지배하는 작은 나라로 몰락한 상태였다. 401년 7월, 모용성이 금군(禁軍)의 반란으로 살해되자, 숙부 모용희가 황태후 정씨에 의해 신천왕(新天王)으로 추대되었다. 후연은 북위의 외압을 계속 받았으며, 고구려·거란 원정을 반복하며 국력을 소모했다.

407년 7월, 모용희는 한인(漢人) 중위장군 풍발에게 살해되었다. 다만 풍발은 다음 황제로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을 옹립하고 국호를 연(북연)으로 했기 때문에, 후연의 멸망과 북연의 건국은 풍발 자신이 즉위한 409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 5. 내분과 멸망

383년, 전진부견이 비수대전에서 패배하자, 전연의 왕족이었던 모용수독립할 기회를 얻었다. 384년 정월, 모용수는 연에 즉위하여 후연을 건국하고, 385년에는 전진부비가 지키던 업을 점령하여 하북을 평정하였다.[11] 386년에는 중산수도로 정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11]

385년 6월에는 고구려고국양왕군사 4만 명을 이끌고 후연의 요동을 습격하여, 요동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다. 그해 11월, 후연의 모용농이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요동·현도 2을 다시 차지하였다.[11]

392년에는 정령족의 적위, 394년에는 서연을 멸망시켰으며, 동진 세력을 축출하고 산동반도 일대를 점령하였다. 394년 북위를 공격하였으나 참합피에서 대패하였으며, 이듬해 2차 정벌을 하였으나 도중에 모용수가 병사하였다.

모용수의 뒤를 이은 모용보396년 8월에 북위의 침공을 받았고, 수도 중산을 버리고 용성으로 천도하였다. 398년, 모용보는 영토 수복을 위해 진격하던 도중 반란군의 지도자 난한에게 살해되었다.

난한은 창려을 자칭하였으나, 곧 모용보의 아들 모용성에게 살해되었고, 모용성이 후연의 군주가 되었다. 모용성은 400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여 신성 등 700여 의 땅을 탈취하였다. 401년에 모반으로 모용성이 죽고 모용수의 아들 모용희가 즉위하였다.

모용희는 402년404년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요동 일대, 요서 일부, 유주 지방만리장성 일대까지 모두 상실하고 수도까지 위협받았다. 407년 고구려의 5만 대군이 6개의 을 점령하여 후연이 멸망 직전으로 가자 정변이 일어나 모용희가 살해되고 모용보의 양자 모용운(고운이 옹립됨으로써 후연은 멸망하고 북연이 성립되었다.

3. 고구려와의 관계

4. 역대 군주

묘호시호성과 이름재위 기간연호 및 기간
세조 (世祖)성무 (成武)모용수384년 ~ 396년연왕 (燕王) 384년 ~ 386년
건흥 (建興) 386년 ~ 396년
열종 (烈宗)혜민 (惠愍)모용보396년 ~ 398년영강 (永康) 396년 ~ 398년
란한398년청룡 (青龍) 398년
중종 (中宗)소무 (昭武)모용성398년 ~ 401년건평 (建平) 398년
장락 (長樂) 399년 ~ 401년
소문 (昭文)모용희401년 ~ 407년광시 (光始) 401년 ~ 406년
건시 (建始) 407년
혜의 (惠懿)모용운1
또는 고운1
407년 ~ 409년정시 (正始) 407년 ~ 409년
1 고운의 성은 황실에 입양되면서 모용씨로 바뀌었다. 고운을 후연의 군주로 간주하면 국가는 409년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407년에 멸망했을 것이다.



세조 성무제(모용수)는 모용황의 다섯째 아들이다. 열종 혜민제(모용보)는 모용수의 넷째 아들로 398년에 살해되었다. 중산에서 황제를 참칭한 개봉공(모용상)과 모용상을 살해하고 황제를 참칭한 조왕(모용린)은 397년에 살해되었다. 창려왕(란한)은 모용보를 살해하고 즉위하였으나, 398년에 살해되었다. 중종 소무제(모용성)는 모용보의 장남으로, 란한을 살해하고 즉위하였으나 401년에 살해되었다. 소문제(모용희)는 모용수의 막내 아들로, 407년에 사망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2] 서적 Zizhi Tongjian
[3]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4] 서적 Zizhi Tongjian
[5]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6]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7] 서적 Zizhi Tongjian
[8] 웹사이트 中央研究院網站 http://www.sinica.ed[...]
[9] 서적 Zizhi Tongjian
[10]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11] 서적 삼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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