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토 하루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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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토 하루오(1892-1964)는 일본의 소설가, 시인, 평론가, 번역가, 작사가로, 메이지 시대에 경향시를 쓰다가 다이쇼 시대에 소설가로 활동했다. 그는 다양한 장르에서 작품 활동을 했으며,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다자이 오사무 등 많은 문하생을 배출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소설 《전원의 우울》, 시집 《나의 1922년》, 평론 《근대 일본 문학의 전망》 등이 있으며, 다수의 교가와 시가, 번역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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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 하루오 (소설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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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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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사토 하루오 |
출생 | 1892년 4월 9일 |
출생지 | 일본 와카야마현 신구시 |
사망 | 1964년 5월 6일 |
사망지 | 일본 도쿄도 |
직업 | 소설가, 시인 |
국적 | 일본 |
언어 | 일본어 |
학력 | |
출신 학교 |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중퇴 |
문학 활동 | |
장르 | 소설, 시, 수필, 번역, 단가 |
사조 | 주지주의, 탐미파, 예술 시파 |
영향 | 마사오카 시키 |
영향을 준 인물 | 다자이 오사무 |
주요 작품 | 스페인 개 집 (1914년, 소설) 전원의 우울 (1919년, 소설) 순정 시집 (1921년, 시집) 도시의 우울 (1922년, 소설) 따분함 독본 (1926년, 수필집) 차진집 (1929년, 번역시집) 아키코 만다라 (1954년, 소설) |
데뷔 작품 | 바람 (1908년) |
수상 | |
수상 내역 | 요미우리 문학상 (1953년, 1955년) 문화 훈장 (1960년) 사후 종3위 추서, 은배 한 조 (1964년) |
기타 정보 | |
필명 | 사토 조메이 사타코 |
묘소 | 교토 지온인과 도쿄도 분쿄구 덴츠인 |
2. 경력
1910년 게이오기주쿠 대학부 문학과예과에 입학하여 나가이 가후에게 배웠다.[4] 1909년부터 『스바루』, 『미타 문학』에 서정시, 경향시를 발표하여 주목받았고,[5] 1911년에는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대역사건으로 처형되었을 당시의 심정을 담은 시 「어리석은 자의 죽음」을 발표하여 평가받았다.[5]
1919년 『전원의 우울』, 1921년 『순정시집』을 발표하며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널리 인정받았다.[4] 1930년에는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아내 치요를 양도받는 '세이진 양도 사건'으로 화제가 되었다.[6]
1935년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이 되었고,[6] 1948년부터 일본예술원 회원을 역임했다.[8] 1960년 문화훈장을 수훈하고, 1961년 신구시 명예 시민이 되었다.[9] 1964년 5월 6일 라디오 프로그램 녹음 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9]
2. 1. 학생 시절
1898년 4월에 신구 제1심상소학교 (단카쿠 소학교)에 입학했다. 와카야마현립 신구중학교 재학 중, 사토 조메이라는 필명으로 교우회지에 「오라바 籠」을 발표했다. 1908년에는 『구마노 실업신문』에 단가 6수를 게재하고, 『묘조』에 「바람」이라는 제목으로 투고하여 이시카와 타쿠보쿠의 선에 들었다. 와가이 히코타로가 주재하는 「하마후유」의 동인이 되어, 「마차·식당」 (단가·시)을 발표했다. 이때 아버지 병원을 일시 폐쇄하고, 홋카이도도카치국나카가와군에서 농장을 경영했다. 『취미』, 『문고』, 『신성』, 『구마노 신보』에 단가와 가론을 잇따라 발표하고, 1909년 『스바루』 창간호에 단가를 발표하여 이쿠타 초코, 요사노 히로시, 이시이 하쿠테이를 알게 되었고, 동맹 휴교 사건의 주모자로 간주되어 무기 정학을 명령받았다.1910년 졸업 후 상경하여 이쿠타 초코를 사사하고, 요사노 히로시의 신시사에 들어갔다. 여기서 호리구치 다이가쿠를 알게 되었고, 호리구치와 함께 제1고등학교 입시에 응시했지만, 시험을 중도에 포기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부 문학과예과에 입학한다. 문학과에서는 나가이 가후에게 배우고, 우에카타 가츠조를 알게 된다. 구보타 만타로와는 견원지간이었지만, 가후 사후 밝혀진 『단장정일기』에 제자인 구보타와 하루오를 중상하는 내용이 쓰여 있었기 때문에 화해했다.
1909년부터 『스바루』, 『미타 문학』에 서정시, 경향시를 발표하여 식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11년 1월 24일, 고토쿠 슈스이 등과 연루되어 동향 의사인 오이시 세이노스케가 대역사건의 피고로 처형되었는데, 그 당시의 심정을 그해 5월에 시 「어리석은 자의 죽음」으로 『스바루』에 발표하여 평가받았다.[5]
2. 2. 다이쇼 시대
1912년 (다이쇼 원년) 가을, 아오이토샤의 오다케 코키치를 통해 여동생 오다케 후쿠미를 알게 되었고,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한 시를 썼지만, 만성 불면증을 앓았다. 1913년 (다이쇼 2년)에 『흑요』의 동인이 되었고, 9월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를 중퇴했다. 잡지 『우리들』의 창간 발기인이 되었다. 이 무렵, 다카무라 코타로의 아틀리에에 다니며 초상화를 그려 받았다. 여름에 징병 검사를 받고 정종이 되었다. 12월에는 전 예술좌의 여배우 카와지 우타코 (엔도 사치코)와 동거하며, 산문시에 몰두하는 한편, 붓을 잡게 되어 제2회 "니카전"에 『자화상』과 『정물』 2점이 입선했다.[4]1917년 (다이쇼 6년) 가나가와현 츠즈키군나카자토촌 (현・요코하마시)으로 이사하여 전원 생활을 시작했다. 『병든 장미』를 집필하여 이듬해 『흑조』에 발표했다. 제3회 "니카전"에 『고양이와 여자의 그림』, 『여름 풍경』 2점이 입선했다. 에구치 칸, 쿠보 칸자부로 등과 함께 동인지 창간을 준비하여 『별자리』를 창간했으나 5월에 폐간되었다. 에구치 칸을 통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6월에는 타니자키 준이치로를 알게 되었다. 아쿠타가와의 출판 기념회 "라쇼몬의 회"에 참석하여 개회사를 하고, 제4회 "니카전"에 『우에노 정거장 부근』, 『정물』 2점이 입선했다.[4]
1919년 (다이쇼 8년) 『병든 장미』의 후반부를 덧붙인 『전원의 우울』을 완성하여 『중외』에 발표했다. 방대한 양의 평론을 발표하며 신진 작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1920년 (다이쇼 9년)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귀향했다. 6월부터 10월까지 대만과 중국 푸젠을 여행했고, 대만 거주 지인 히가시 시이치의 소개로 모리 우시노스케를 알게 되었다. 1921년 (다이쇼 10년) 『순정시집』을 발표하여 소설가, 시인으로서 널리 인정받았다. 『신청년』 등에 많은 추리 소설을 발표했고, 토미노자와 린타로를 알게 되었다. 타니자키 준이치로가 아내 치요에게 냉담한 것을 보고 동정심에서 사랑으로 바뀌어, 타니자키는 사토에게 아내를 넘겨주겠다고 했지만 번복하면서 타니자키와 교우를 끊었다. 이를 오다와라 사건이라고 한다. 실연의 아픔을 "꽁치의 노래"(시집 『나의 1922년』수록) 등에서 치요에 대한 사모를 노래했다.[4]
도쿄시 외 메구로 히카와에 있는 동생 나츠키 집에 동거하며, 이나가키 타루호, 에가와 우레오도 동거했다. 이듬해 아버지 토요타로가 환갑을 맞아 가독을 이었다. "도회의 우울"을 『부인공론』에 연재하고, 다카하시 신키치를 알게 되었다. 잡지 『월광』의 동인이 되어, 『요재지이』의 번역 "유적의 신", "벽색의 국화", 금고기관의 번역 "백화촌 이야기"를 다루었다. 중국 문학에 경도되어 장기 여행을 계획했지만 관동 대지진과 시마다 세이지로 사건으로 중지했다. 1924년 (다이쇼 13년) 귀향하여 약 1년 정도 고향에 머물렀다.[4]
1926년 (다이쇼 15년) 하세가와 유키오가 문인으로서 동거하고, 타니자키 준이치로와 교우 관계를 부활시켰다. 4월에 3년간 장편 2작품을 쓰기로 하고, 키쿠치 칸, 우노 코지, 사토미 톤과 함께 호치 신문사 객원 기자가 되어 중국으로 여행했다. 10월에 마녀 사건 (야마와키 유키코)이 발생했고, 이 무렵 토미자와 우이오를 알게 되었다.[4]
2. 3. 쇼와 시대 (전쟁 전)
1927년(쇼와 2년) 고이시카와구 정(현 분쿄구 세키구치)으로 이사했으며, 개조사 강연 여행에 참가하여 규슈, 호쿠리쿠 지방을 돌고, 7월에 중국 여행을 했다. 여행 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부고를 들었다. 귀국 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전집' 편찬에 관여하고, 왕수초의 '양주십일기'를 번역 발표했다. 『평범』, 『문학』 창간에 참여했으며, 1929년(쇼와 4년) 호세이 대학예과 강사가 되어 작문을 담당했다. 재직 중 현재의 동 대학 교가를 작사했다. 다음 해 효고현무코군으로 이주했지만, 가벼운 뇌일혈을 앓아 시모사토로 귀향해 병을 치료했다.[6]1930년(쇼와 5년)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아내 치요를 양도받았다. 다니자키와 치요의 이혼 성립 후, 3인 연명으로 지인에게 인사장을 보내 '세이진 양도 사건'으로 신문 등에서 보도되어 반향을 일으켰다. 다니자키의 『갈대 갉아먹는 벌레』는 그 경위를 그린 것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그 전해에 치요를 와다 로쿠로(오쓰보 스나오)에게 양도하는 건에 대한 것이었다.
1931년(쇼와 6년) 잡지 『고토 타만』을 창간하고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루쉰의 번역 '고향', '고독자'를 다루었고, '위기'를 『개조』에 연재하기 시작했지만, 모델 문제로 중단되었다. 장남 호야가 탄생했고, 1933년(쇼와 8년) 호세이 대학을 사직했다. 이 해 나카타니 타카오를 알게 되었다. 다음 해 문예간화회가 창립되어 회원이 되었고, 와카야마현 명승지 답파 여행을 떠났다.
1935년(쇼와 10년) 아쿠타가와상이 제정되자 심사위원 11명 중 한 명이 되었다.[6] 일본문학진흥회 이사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러나 제1회 문예간화회상을 둘러싸고 논쟁하여 위원을 사임했다. 8월 다자이 오사무를 알게 되었다. 다음 해 문화학원 문학부장에 취임했다. 1937년 (쇼와 12년) 일본 낭만파 동인이 되었고, 7월 신일본문화의 회 설립에 참여하여 '신일본' 편집인이 되었다. 다음 해 5월 분게이슌주사 특파원으로 화북 방면에 출발했고, 9월 문학자 종군 해군반의 일원으로 중국에 갔다. 1940년 (쇼와 15년) 초대 하나야기 스미를 위해 '야쿠모 기 출운 아국'을 써서 가부키좌, 제국극장에서 상연했다. 10월 게이오기주쿠 특선 숙원이 되었다.
1941년 (쇼와 16년) 5월 문예총후운동을 위해 긴키 지방에 강연 여행을 했다.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의 문사 부대로서 중지 전선에 종군하고, 말레이 및 자바 남방 방면으로 시찰 여행을 떠났다. 같은 해 12월 24일 대정익찬회 주도로 개최된 '문학자 애국대회'에 참가해 회장에서 시를 낭독하는 등 시세에 따른 행동도 보였다.[7]
1945년 (쇼와 20년) 4월, 나가노현기타사쿠군히라네 촌 (현 사쿠시)으로 소개했다. 1951년 (쇼와 26년) 10월까지 그곳에 머물면서 '사쿠의 풀피리'를 묶었다.[8]
2. 4. 쇼와 시대 (전쟁 중)
1946년 (쇼와 21년)부터 문예지 『방촌』, 『풍류』, 『군상』, 『전기』, 『지상률』의 창간을 지원하고, 이듬해부터 매년 전국 각지를 여행한다. 1948년 (쇼와 23년)부터 일본예술원 회원, 미즈카미 타키타로 상 심사위원이 된다. 이듬해 생일 축하 모임 "봄날의 회" 제1회를 히비야 토토테이에서 개최하고, 아쿠타가와 상 부활에 따라 심사위원이 된다.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근대 일본 문학의 전망"을 개강하고, 이 무렵 닛쇼우 사건이 일어난다. 1950년 (쇼와 25년) 궁중 가회시에 참석, 『아사히 평론』에서 에드먼드 블랜든과 동서양의 시에 대해 대담한다. 이듬해 『미타 문학』 편집위원이 되고, 하순부터 오이라세 계류, 오소레산 방면으로 여행한다. 11월에 "신구 시가"를 작사하여 제정된다.1953년 (쇼와 28년) 아오모리현가미키타군도와다호마치에 "오이라세 계류의 부" 시비가 세워지고, 잡지 『마음』 동인이 된다. 이듬해 단 가즈오와 함께 규슈를 여행하고, 피난지인 사쿠에 별장 "견산거" 신축을 시작한다. 1956년 (쇼와 31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태양의 계절』을 둘러싸고 후나바시 세이이치와 응수한다. 이듬해 지요다구 10주년에 맞춰 "지요다구의 노래"를 작사하여 제정하고, 지바현조시시이누보자키 곶에 "이누보자키 곶 여정의 노래" 시비 건립. 40년 만에 철정에 "전원의 우울" 시대 옛 집을 방문한다.
1959년 (쇼와 34년) 궁중가회시에 소인으로 선임되어 참석. 와카야마현 나치에 "꽁치의 노래" 시비 건립. 기세이 본선 개통에 앞서 시승하고, 신구시로 귀향. 신구시 구마노 하야타마타이샤 사두에 "망향 오월가" 시비 건립. 『소설 나가이 가후전』에 대해 나카무라 미쓰오와 응수가 시작된다. 1960년 (쇼와 35년) 문화훈장 수훈. 나가노현 기타사쿠군 아사마마치에 "호반구음" 시비 건립. 1961년 (쇼와 36년) 1월 신구시 명예 시민이 되고, 5월 동궁어소에 초대되어 문학을 담론했다. 이듬해 아쿠타가와상 심사위원을 사임하고, 9월 야마구치현 "야마구치현민의 노래" (3대) 및 "야마구치시의 노래" (2대)를 작사하여 각각 제정된다[9]. 이듬해 이노우에 야스시를 데리고 홋카이도 여행을 떠나, 『홋카이 타임스』 석간에 "홋카이도 음행"을 12회 연재한다.
1964년 (쇼와 39년)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시학"을 개강하고, 호리구치 다이가쿠와 함께 "밀로의 비너스전"을 본다. 5월 6일 저녁 무렵 아사히 방송 "일주일 자서전" 라디오 프로그램 5월 20일 방송 예정분을 자택 서재에서 녹음 중, "나는 다행히…"라는 말을 한 직후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2. 5. 쇼와 시대 (전쟁 후)
1946년부터 문예지 『방촌』, 『풍류』, 『군상』, 『전기』, 『지상률』 창간을 지원하고, 이듬해부터 매년 전국 각지를 여행했다. 1948년부터 일본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미즈카미 타키타로 상 심사위원을 맡았다. 1950년 궁중 가회시에 참석, 『아사히 평론』에서 에드먼드 블랜든과 동서양 시에 대해 대담했다. 1953년 아오모리현 도와다호마치에 "오이라세 계류의 부" 시비가 세워졌다. 1956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태양의 계절』을 두고 후나바시 세이이치와 논쟁을 벌였다. 1959년 궁중 가회시에 소인으로 선임되어 참석했다. 1960년 문화훈장을 받았고, 1961년 신구시 명예 시민이 되었다. 1964년 5월 6일, 라디오 프로그램 녹음 중 심근 경색으로 사망했다. 사후 1964년 도쿄 올림픽 개회식에서 그가 작사한 "올림픽 도쿄 대찬가"가 불렸다.3. 인물
사토 하루오는 다이쇼 시대에 소설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종군하여 전쟁을 찬미하는 시를 남겼으며, 전후에는 B급 전범으로 기소된 지인 등을 변호했다.[10] 일본문학보국회 이사였기 때문에, 전쟁 협력자 중 한 명으로 비난받았으나, "저는 민족 감정을 대표하여 시작된 전쟁에서 이기도록 협력했을 뿐입니다."라고 답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와는 친구였으며, 아쿠타가와로부터의 편지가 남아있다.[10] 1926년에 보내진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는 아쿠타가와의 수필집 표지를 그려준 것에 대한 감사와 소설 '요바'를 실패작이라고 단정한 사토의 논평에 대해 "처음 읽었을 때는 불쾌했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읽을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10]
사토 하루오는 속칭 문하생 3천 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는데, 이부세 마스지, 다자이 오사무, 단 가즈오, 요시유키 준노스케, 이나가키 타루호, 류린지 오, 시바타 렌자부로, 나카무라 신이치로, 고미 야스스케, 엔도 슈사쿠, 야스오카 쇼타로, 고야마 고레오 등 유명 작가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쿠타가와상 선정을 둘러싼 다자이 오사무와의 갈등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끔찍이 보살폈지만, 자신을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즉시 교분을 끊는 등, 흑백논리적인 경향이 있었다.
미시마 유키오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는 하루오의 집에 드나들었으나, 미시마가 장편 소설 『도적』(1948년)의 서문을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의뢰한 것을 하루오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아 소원해졌다. 단 가즈오는 가와바타 집에 놀러 가도 술이 나오지 않아 곤란해하던 중, 하루오의 집에서 술을 넉넉하게 대접받고 감격하여 제자를 자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들 사토 마사야는 심리학자로,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오랫동안 교편을 잡았으며, 국제 행동분석학회 회장, 게이오기주쿠 대학 명예교수·테이쿄 대학 문학부 교수, 세이사 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조카인 동양사학자 다케다 류지[11]는 다니자키의 친딸 아유코와 결혼했다. 또 다른 조카 치에코는 시인 미요시 타츠지와 결혼했지만, 미요시가 스승인 하기와라 사쿠타로의 여동생 아이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했다.
『신초』 편집장 사이토 주이치에게 원고가 반려된 이후, 사이토 및 신초샤와 인연을 끊었다. 사토 하루오는 자신을 "지나(중국) 취미 애호가 정도"라고 겸손했지만, 다케우치 요시미는 하루오의 중국론에 영향을 받았다.[12] 다자이 오사무의 『광대의 꽃』, 『허구의 봄』은 사토가 명명했다.
아쿠타가와상 창설 첫 해에 이시카와 타츠조의 『창맹』이 수상하고 다자이 오사무의 데뷔작 『역행』은 차석이 되자, 다자이는 이에 불만을 품고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항의문을 보내거나 사토에게 내년 수상을 간청하는 등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13] 이시하라 신타로의 『태양의 계절』이 자신의 의사와 달리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을 때 격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H상"(현 H씨상)이 창설되었을 때에는 기금 출자자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매년 11월 3일 문화의 날에 신구시 주최로 '필공양'이 행해지고 있다.
4. 주요 작품
사토 하루오는 소설, 시, 평론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다음은 그의 주요 작품 목록이다.
제목 | 발표 연도 | 비고 |
---|---|---|
스페인 개의 집(西班牙犬の家) | 1914년 | |
전원의 우울(田園の憂鬱) | 1919년 | 이와나미 문고, 신초 문고 등에서 출간 |
도회의 우울 | 이와나미 문고, 신초 문고 등에서 출간 | |
오키누와 그의 형제 | 1919년 | |
아름다운 마을 | 1920년 | |
환등 단편집 | 1921년 | |
남방 기행 샤먼 채방 책 | 1922년 | |
잘린 꽃 | 1922년 | |
장미와 진주 동화 희곡 | 1922년 | |
꽃과 열매와 가시 | 1922년 | |
나의 1922년 시문집 | 1923년 | |
쓸쓸함 | 1923년 | |
이 세 가지 것 | 1923년 | |
나그네 | 1924년 | |
이태백 | 1924년 | |
모춘 삽화 | 1924년 | |
사토 하루오 시집 | 1926년 | |
창이 열리다 | 1926년 | |
메뚜기의 대여행 | 1926년 | |
지루함 독본 | 1926년 | |
여계선기담 | 1926년 | 쇼가쿠칸, 중공 문고 등에서 출간 |
염세가의 생일 | 1928년 | 이와나미 문고에서 출간 |
문예 일석화 | 1928년 | |
신들의 희롱 | 1929년 | |
갱생기 | 1930년 | |
마음이 거만한 여자 | 1931년 | |
시집 마녀 | 1931년 | |
무사시의 소녀 | 1932년 | |
비너스의 살인 용의자 | 1933년 | |
한담 반일 | 1934년 | |
진중의 수금 삼림 태랑이 일로 전쟁 종군 기념 시가집 노래 일기에 관한 찰기 | 1934년 | |
술과 술 문예 걸작 선집 | 1935년 | |
관무량수경 불교 성전을 말하다 총서 제4권 | 1935년 | |
국수담 법연상인 별전 | 1936년 | |
산인 우기 수필집 | 1936년 | |
구마노지 | 1936년 | |
FOU 그림책 | 1936년 | |
안개사 | 1936년 | |
세상은 여러 가지 이야기 | 1936년 | |
지나 인도 단편집 | 1936년 | |
고금저언·방장기 | 1937년 | |
날다람쥐의 책자 수필집 | 1937년 | |
동천홍 신시집 | 1938년 | |
타출의 작은 망치 | 1939년 | |
전선 시집 | 1939년 | |
비이다아 마이야아 | 1940년 | |
고향 | 1940년 | |
살구 열매를 주는 딸 | 1941년 | |
풍운 | 1941년 | |
시나노 여우 | 1941년 | |
나의 여동생의 기록 | 1941년 | |
지나 잡기 | 1941년 | |
소배 여력집 | 1942년 | |
지일초 시선 | 1942년 | |
대동아 전쟁 | 1943년 | |
야마다 나가마사 | 1943년 | |
수연 소기 | 1943년 | |
영재 잡기 | 1943년 | |
아리마 하루노부 | 1943년 | |
환경 | 1943년 | |
봉공 시집 | 1944년 | |
서유기 | 1944년 |
이 외에도 다수의 작품이 있으며, 다음은 주요 전집 및 작품집 목록이다.
- 『사토 하루오 전집』 (전 12권, 고단샤, 1966년 - 1970년)
- 『정본 사토 하루오 전집』 (전 36권・별권 2, 린센 서점, 1998년 - 2001년)
5. 번역
원제 | 저자 | 출판사 | 출판 연도 | 비고 |
---|---|---|---|---|
피노치오 인형의 모험 | 콜로디 | 개조사 | 1925년 | |
차진집 지나 역조 명원 시초 | 무사시노 서원 | 1929년 | 「차진집·포르투갈 문」, 코단샤 문예 문고·현대 일본의 번역, 1994년[1], 「옥적보」도 수록 | |
평요전 | 나관중 | 세계 대중 문학 전집 개조사 | 1929년 | 치쿠마 문고 (상하), 1993년 |
현대어 서학 전집 제9권 서학 치산물·부상 근대 염은자·신가소기 | 춘추사 | 1933년 | ||
목죽집 | 춘양당 | 1933년 | ||
포르투갈 문 | 마리아나 다케무라 | 서방 | 1934년 | 실제로는 귤러그 백작, 인문 서원, 1949년 이후 신판 |
고이즈미 야쿠모 초기 문집 첨탑 등반기 | 백수사 | 1934년 | 복각·고분사, 1996년 | |
루쉰 선집 | 마스다 와타루 공역 | 이와나미 문고 | 1935년 | 마스다에 의해 개역 |
흡혈귀 | 바이런 | 야마모토 서점 | 1936년 | 당시 바이런의 작품이라고 여겨졌지만 실제 집필자는 존 폴리도리[2] |
백화촌 이야기 「고금 기관」 권 제8 | 야마모토 서점 | 1936년 | ||
마르코 폴로와 소년들 | 르 앙드레 켄트 | 동화 춘추사 | 1941년 | |
호구전 지나 장편 소설 | 명교중인 | 오쿠가와 서방 | 1942년 | |
부생육기 | 심복, 마츠에 시게오 공역 | 이와나미 문고 | 1947년 | 마츠에에 의해 개역 |
옥적보 지나 시선 | 도쿄 출판 | 1948년 | ||
수호전 | 주오코론샤 | 1952년 - 1953년 | 제1-9권, 실제로는 무라카미 지교에 의한 번역 | |
신·십팔사략 이야기 | 오쿠노 신타로·마스다 와타루 공편 | 가와데 서방 | 1956년 - 1958년 | 전 13권, 별권 2, 번역자 대표 |
가죽을 입은 비너스 | 자허 마조흐 | 다이닛폰 유벤카이 코단샤 | 1957년 | |
수난화 | 하이네 | 다이가도 | 1963년 |
6. 작사
학교명 |
---|
호세이 대학 |
게이오기주쿠 보통부 |
도호 중학교·고등학교 |
아오모리현립 삼본기 고등학교 |
군마현립 도미오카히가시 고등학교 |
군마 공업 고등전문학교 |
군마현립 다테바야시 고등학교 |
군마현립 시부카와 고등학교 |
고후 시립 고후 상업 고등학교 |
나가노현 아즈미카와 고등학교 |
나가노현 우에다 소메야가오카 고등학교 |
아이치현립 고마키 고등학교 |
미에현립 기모토 고등학교 |
후쿠이현립 다케후 고등학교 |
와카야마현립 구마노 고등학교 |
와카야마현립 신구 고등학교 |
시마네현립 마스다 고등학교 |
후쿠오카현립 메이젠 고등학교 |
신구 시립 미도리가오카 중학교 |
도코로자와 시립 기타 초등학교 |
메구로구립 제8중학교 |
노래 제목 |
---|
야마구치현민의 노래 (3대) |
지요다구 노래 |
분쿄구 노래 |
와카야마시 시가 |
신구시 노래 |
고야정의 노래 |
야마구치시의 노래 (2대, 2005년 폐지)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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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Refracted Modernity: Visual Culture and Identity in Colonial Taiwan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Hawaii Press
[2]
서적
The Fantastic in Modern Japanese Literature: The Subversion of Modernity
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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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12-28
[3]
뉴스
Haruo Sato's lush, gloomy landsc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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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04
[4]
웹사이트
読売文学賞
https://info.yomiu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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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6
[5]
서적
日本文学 第22巻
日本文学協会
[6]
기타
第一回は無名作家・石川達三の「蒼眠」
中外商業
1935-08-11
[7]
뉴스
文壇・詩壇・歌壇の三百五十人が参加
東京朝日新聞
1937-01-19
[8]
학술논문
佐藤 春夫「佐久の草笛」における佐久方言
信州短期大学
2007
[9]
기타
2代目「山口市の歌」は2005年(平成17年)の新設合併に伴い廃止。
[10]
웹사이트
芥川の内面伝える手紙発見 佐藤春夫宛て、深い交友
https://web.archive.[...]
共同通信
2022-07-30
[11]
기타
1908年2月11日、父・西浦綱一と母・竹田保子の間に生まれる。
[12]
서적
大正幻影
筑摩書房
[13]
서적
発見!意外に知らない昭和史―誰かに話したくなるあの日の出来事194
東京書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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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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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miuri Shimbun
2018-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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