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노 아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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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노 아야코는 로마 가톨릭 신자이자 작가로, 소설, 에세이, 논픽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1950년대에 문단에 데뷔하여, 이후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일본재단 회장, 일본우정 사외이사, 교육 개혁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며 사회적으로도 활동했으며, 오키나와 전투 관련 논란, 아파르트헤이트 관련 발언 등으로 사회적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79년 바티칸 공로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일본예술원상, NHK방송문화상, 기쿠치 칸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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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노 아야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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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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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치다 치즈코 |
출생일 | 1931년 9월 17일 |
출생지 | 도쿄도 가쓰시카구 |
국적 | 일본 |
직업 | 작가 |
언어 | 일본어 |
학력 | 성심여자대학 문학부 영문학과 졸업 |
활동 기간 | 1951년 ~ 현재 |
장르 | 소설 · 수필 · 동화 · 번역 |
문학 경향 | 제삼의 신인 |
배우자 | 미우라 슈몬 |
자녀 | 미우라 타로 (장남) |
친척 | 미우라 이쓰오(시아버지) 미우라 아키코(며느리) |
주요 작품 | |
주요 작품 | 다마유라(たまゆら) 엔라이노 교쿠타치(遠来の客たち) 《멀리서 온 손님들》 (1954년) 《사탕 과자가 깨질 때》(1965년) 《타로 이야기 고교편》(1973년) 《허구의 집》(1974년) 《목마름의 정원》(1976년) 《신의 더러운 손》(1979년) 《천상의 푸름》(1990년) |
수상 | |
수상 | 일본예술원상 · 온시상 (1993년) 요시카와 에이지 문화상 (1997년) 기쿠치 칸상 (2012년) |
기타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명: 마리아 엘리자베스) |
공식 웹사이트 | 일본 우편 주식회사 보도자료 |
2. 생애
소노 아야코는 1931년 도쿄부에서 태어났다.[2][14]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 세례명은 마리아 엘리자베스이다. 세이신 여자대학 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문학 동인지 활동을 시작했으며,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일본어)에서 활동하며 훗날 남편이 되는 작가 미우라 슈몬을 만났다.[97][20] 1953년, 22세의 나이로 미우라 슈몬과 결혼했다.[2] 이듬해인 1954년, 단편 소설 遠来の客たち|엔라이노캬쿠타치일본어(멀리서 온 손님들)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후보에 오르며 23세에 문단에 데뷔했다.[2][97]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군이 접수한 하코네의 호텔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97][20]
문학사적으로는 엔도 슈사쿠, 야스오카 쇼타로, 요시유키 준노스케 등과 함께 제삼의 신인(第三の新人)으로 분류되며, 동시대의 기독교인 작가 미우라 아야코와 함께 'W 아야코'로 불리기도 했다.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하며 작가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장남은 문화인류학자 미우라 타로이며, 며느리는 에세이스트 미우라 아키코이다.[26] 대학 후배인 상황황후 미치코와는 남편 생전부터 부부 동반으로 교류하며 친분을 유지했다.[22][23][24][25]
작가 활동 외에도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재단 회장을 역임했으며,[27] 2009년 10월부터는 일본우정 사외이사를 맡았다.[13] 1979년 프로 에클레시아 에트 폰티피체 훈장을 받았고,[4] 2003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2000년에는 망명한 전 페루 대통령 알베르토 후지모리의 일본 체류를 돕기도 했다.[99][28]
보수적인 정치·사회적 견해를 적극적으로 피력하며 여러 차례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특히 2015년 산케이 신문 칼럼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긍정적으로 언급하며 일본의 이민자 정책 방향을 제시해 큰 비판을 받았다.[6][8][9]
2. 1. 초기 생애
소노 아야코는 1931년[2] 도쿄부 남가쓰시키군 혼다정(현 가쓰시카구 다치이시)에서 태어났다.[14][15] 아버지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하고 야마토 고무제작소(大和護謨製作所) 전무이사를 지낸 마치다 에이지로(町田英治郎)였고[95][96][14], 어머니 키와는 야마토 고무제작소 창업자의 여동생이었다.[14] 유리카(幽里香)라는 언니가 있었으나 8살에 일찍 사망하여 사실상 외동딸처럼 자랐다.[16] 1934년, 가족은 오오모리구 덴엔초후로 이사했으며, 소노는 결혼 후에도 이곳에서 계속 살았다.[97]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 1948년 9월 26일 세례를 받았으며[20] 세례명은 마리아 엘리자베스이다.어머니의 희망에 따라 유치원부터 세이신 여자대학까지 일관된 교육을 받았다.[97] 초등학교 졸업 후에는 도쿄의 가톨릭 성심학교에 다녔다.[2]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가나자와로 피난하여 약 10개월간 지내며 이시카와현립 가나자와 사쿠라오 고등학교로 전학했고,[17][18] 근로동원령에 따라 히라노 화학공장(平野化学工場)에서 일하기도 했다.[97] 1946년 3월 도쿄로 돌아와 세이신 여자대학에 복학했다.[19]
어린 시절, 부모가 정해둔 데릴사위감이 있었으나 중학교 무렵 파혼되었다.[97] 이는 소노 본인의 의사와 맞지 않았던 점과 더불어,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가세가 기운 것도 원인이었다.[97] 전후 아버지는 미군에 접수되었던 하코네 미야노시타의 후지야 호텔 지배인으로 일하게 되었고,[97][20] 소노는 1948년 여름, 이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20] 이때의 경험은 훗날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후보에 오른 소설 遠来の客たち|엔라이노캬쿠타치일본어(멀리서 온 손님들)의 배경이 되었다.[97][20]
대학 시절, 나카가와 요이치가 주재하던 동인지 ラマンチャ|라만차일본어(1951년 5월)에 발표한 裾野|스소노일본어가 문학평론가 우스이 요시미의 눈에 띄었다.[97][20] 우스이의 소개로 제15차 『신사조』(新思潮) 동인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훗날 남편이 되는 미우라 슈몬을 만났다.[97][20] 동인지 발행 자금을 모으기 위해 아사히 방송에 콩트 등을 투고하기도 했다.[97][20] 1953년, 22세의 나이로 문학적 조언자였던 미우라 슈몬과 결혼했다.[97][2]
결혼 이듬해인 1954년, 평론가 야마가와 마사오의 추천으로 『미타 문학』에 발표한 단편 소설 遠来の客たち|엔라이노캬쿠타치일본어(멀리서 온 손님들)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후보에 오르면서 23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했다.[2][97][20] 이후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30대에는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창작 활동을 통해 극복해 나갔다.[98][21]
우스이 요시미는 소노 아야코와 아리요시 사와코 등 동시대 여성 작가들의 활약을 才女時代|사이조 지다이일본어(재능있는 여인들의 시대)라고 평했다. 문학사적으로 소노는 엔도 슈사쿠, 야스오카 쇼타로, 요시유키 준노스케, 고지마 노부오, 쇼노 준조, 콘도 케이타로, 아가와 히로유키, 남편 미우라 슈몬, 오누마 탄, 시마오 도시오 등과 함께 제3의 신인으로 분류된다. 같은 시기 활동한 기독교인 작가 미우라 아야코와 함께 'W 아야코'로 불리기도 했다.
2. 2. 결혼과 문단 데뷔
나카가와 요이치가 이끌던 동인지 『ラマンチャ일본어』에 1951년 5월 발표한 「裾野」가 우스이 요시미의 주목을 받았다.[3] 우스이의 소개로 동인지 『신사조』(新思潮일본어)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미래의 남편이 될 미우라 슈몬을 만났다.[3][2] 동인지 발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사히 방송에 콩트 등을 투고하기도 했다.22세였던 1953년, 문학적 조언자이기도 했던 미우라 슈몬과 결혼했다.[2] 이후 야마카와 마사오의 추천으로 『미타 문학』에 단편 소설 「遠来の客たち일본어」(멀리서 온 손님들)을 발표했다.[2] 이 작품으로 1954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후보에 오르면서 23세의 나이로 문단에 데뷔하게 되었다.[2] 이후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30대에는 불면증을 겪기도 했으나 『미륵』, 『무명비』 등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창작 활동을 통해 이를 극복해 나갔다.[21]
당시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우스이 요시미는 소노 아야코와 아리요시 사와코 등의 활약을 '재능있는 여인들의 시대'(才女時代일본어)라고 칭했다. 일본 문학사에서 소노 아야코는 엔도 슈사쿠, 야스오카 쇼타로, 요시유키 준노스케, 고지마 노부오, 쇼노 준조, 콘도 케이타로, 아가와 히로유키, 미우라 슈몬, 오누마 탄, 시마오 도시오 등과 함께 제3의 신인(第三の新人)으로 분류된다. 동시대 여성 기독교인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와 함께 'W 아야코'로 불리기도 했다.
2. 3. 작가 활동
세이신 여자대학 문학부 영문학과를 졸업했다.나카가와 요이치가 주재하던 동인지 ラマンチャ|라만차일본어(1951년 5월)에 발표한 「裾野」가 우스이 요시미의 눈에 띄어, 그의 소개로 동인지 新思潮|신사조일본어에 참여하게 되었다.[3] 신사조 동인 활동 중 미래의 남편이 될 미우라 슈몬을 만났으며, 동인지 발행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아사히 방송에 콩트 등을 투고하기도 했다. 22세에 문학적 조언자 역할을 했던 미우라 슈몬과 결혼했다.[2]
23세 때 야마카와 마사오의 추천으로 『미타 문학』에 발표한 단편 소설 遠来の客たち|멀리서 온 손님들일본어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 후보에 오르면서 문단에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2] 이 작품은 하코네의 후지야 호텔에서 미군을 접대했던 아르바이트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97][20] 30대에는 불면증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나, 弥勒|미륵일본어, 無名碑|무명비일본어 등 새로운 방향의 작품 활동을 통해 이를 극복했다.[98][21]
작가이자 비평가인 우스이 요시미는 소노와 아리요시 사와코 등 당대 여성 작가들의 활발한 활동을 才女時代|사이조 시대일본어(재능있는 여인들의 시대)라고 칭했다. 일본 문학사에서 소노는 엔도 슈사쿠, 야스오카 쇼타로, 요시유키 준노스케, 고지마 노부오, 쇼노 준조, 콘도 케이타로, 아가와 히로유키, 남편 미우라 슈몬, 오누마 탄, 시마오 도시오 등과 함께 제삼의 신인(第三の新人)으로 분류된다. 동시대의 여성 기독교인 작가인 미우라 아야코와 함께 'W 아야코'로 불리기도 했다.
장남인 문화인류학자 미우라 타로를 모델로 한 太郎物語|타로 이야기일본어 시리즈를 집필했다.[26] 이 외에도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출간했으며, 주요 작품과 판매 부수는 다음과 같다.
- 誰のために愛するか|누구를 위해 사랑하는가일본어 (1970년, 278만 부)[29]
- 戒老録|계로록일본어 (1972년, 85만 부)[30]
- 太郎物語 高校編|타로 이야기 고등학교 편일본어 (1973년, 117만 부) 및 同 大学編|대학교 편일본어 (85만 부)[31]
- 虚構の家|허구의 집일본어 (1974년, 약 50만 부)[32]
- 幸福という名の不幸|행복이라는 이름의 불행일본어 (1975년, 60만 부)[33]
- 「いい人」をやめると楽になる|「착한 사람」을 그만두면 편해진다일본어 (1999년, 70만 부)[34]
- 老年の才覚|노년의 재능일본어 (2010년, 100만 부)[35]
- 人間にとって成熟とは何か|인간에게 성숙이란 무엇인가일본어 (2013년, 80만 부)[36]
- 人間の分際|인간의 분수일본어 (2015년, 30만 부)[37]
- 夫の後始末|남편의 뒤처리일본어 (2017년, 20만 부)[38]
1979년 프로 에클레시아 에트 폰티피체 훈장을 받았다.[4] 2003년에는 문화공로자로 선정되었다.
한편, 작가로서의 사회적 발언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중학교 교과 과정의 이차방정식 근의 공식에 대해, 자신이 “이차방정식을 풀지 않고도 살아왔다”, “사회에 나가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고 발언한 것이 알려져 비판을 받았다. 이러한 주장은 남편 미우라 슈몬이 교육과정심의회에서 관련 내용 삭제를 주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지적이 있다.[50] 또한 2015년 2월, 보수 성향의 산케이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며 일본의 이민자 정책 방향을 제시해 큰 비판을 받았다.[6][8][9] 해당 칼럼에서 소노는 고령화 사회의 간병 인력 부족 문제 해결을 위해 이민자 수용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백인이나 흑인과 같은 비아시아계 이민자는 일반 주민과 분리된 특별 구역에 거주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인종 차별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10][11]
2. 4. 사회 활동 및 논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재단 회장을 역임하며 사회복지와 개발도상국 지원에 주력했다.[27][4] 1979년에는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프로 에클레시아 에트 폰티피체 훈장을 받았고,[4] 해외 일본인 선교사 지원을 위한 NGO인 ‘일본 해외 선교사 지원 협회’(JOMAS: 海外宣敎師活動援助後援会|카이가이 센쿄시 가쓰도 엔조 고엔카이일본어)를 설립하기도 했다.[5] 2009년 10월에는 일본우정의 사외이사로 임명되었다.[13] 2000년에는 페루 대통령이었던 알베르토 후지모리가 망명 후 일본에 체류할 당시 자신의 집에 머물도록 도왔다.[99][28]소노 아야코는 여러 사회적 사안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드러내며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 오키나와 집단 자결 강요 부정 논란 ===
소노는 오키나와 전투 중 발생한 주민 집단 자결에 대해 일본군의 강요가 없었으며 오키나와 민중의 자발적 선택이었다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펼쳤다.[101] 그녀는 논픽션 『어떤 신화의 배경』(ある神話の背景일본어)을 통해, 집단 자결이 군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술한 『철의 폭풍』(鉄の暴風일본어)이나 오에 겐자부로의 『오키나와 노트』(沖縄ノート일본어) 등이 현지 취재 부족과 오류를 포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00] 이 책은 당시 자결 명령을 내린 것으로 지목된 우메자와 유우(梅澤裕) 전 소령과 아카마츠 대위(赤松大尉)[100] 유족이 오에 겐자부로와 이와나미 쇼텐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오에 겐자부로·이와나미 쇼텐 오키나와 전투 재판)을 제기하는 주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40]
2007년 일본 문부과학성은 해당 논란과 재판 계류 등을 이유로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서 일본군의 집단 자결 강제 관련 기술을 삭제하도록 검정 의견을 냈으나,[101] 오키나와현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11만 명 규모의 현민 대회 개최 등) 이후 '군의 관여' 등 일본군이 집단 자결에 연관되었다는 기술을 다시 포함시키는 것을 인정했다.[40] 관련 소송은 2011년 최고재판소에서 오에와 이와나미 쇼텐 측의 승소로 최종 확정되었으며, 판결에서는 소노의 저서가 아카마츠 대위 명령설을 뒤집거나 군의 관여를 부정할 객관적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40]
소노의 주장에 대해서는 여러 반론이 제기되었다. 『철의 폭풍』의 저자 중 한 명인 오오타 요시히로(大田良博)[41]는 소노가 자결 명령을 기록한 인물을 취재하지 않았고, 아카마츠의 주장에 담긴 부자연스러움을 문제 삼지 않았으며, 자신에게 불리한 정보(조선인 징용공 처우 등)는 의도적으로 누락했을 가능성을 지적했다.[41][48] 이에 소노는 오오타를 향해 "정신분열병일까"라고 비난하기도 했다.[41] 또한 소노는 오에 겐자부로가 사용한 '죄의 거괴'(罪の巨塊일본어, corpus delicti|코르푸스 델릭티la)라는 개념을 문자 그대로 '거대한 괴물 같은 죄인'으로 오독했다는 비판도 받았다.[43][44][45][46] 야마자키 유키타로(山崎行太郎)는 소노가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한 토야마 마사토시(当山昌敏)를 야나가 교과서 재판에서 모른다고 위증했으며, 소노가 근거로 삼은 『진중 일기』(陣中日誌일본어) 역시 2차 자료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 외에도 소노는 게라마 제도의 섬 이름을 외우기 쉽게 만든다며 현지 주민 입장에서 조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노래(慶良間 ケラケラ、阿嘉ンベー、座間味やがれ、まあ渡嘉敷|게라마 게라케라, 아칸베, 자마미 야가레, 마 와카시키일본어)를 만들거나,[47] "오키나와는 폐쇄 사회"라고 발언하고, 학교에서의 히노마루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2016년에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 반대 시위대에 대한 경찰의 '토인(土人)' 발언을 옹호하며 "모든 사람은 어딘가의 토인"이라는 칼럼을 써 물의를 빚었다.[49]
=== 교육 관련 논란 ===
소노는 교육 분야에서도 논란이 되는 발언과 활동을 이어갔다. 중학교 필수 과정이었던 이차 방정식의 근의 공식에 대해 "사회에 나가서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102] 이는 남편 미우라 슈몬이 교육과정심의회에서 관련 내용을 필수에서 제외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이 있다.[50] 수학자 오카베 츠네하루(岡部恒治) 등은 이러한 주장에 대해 학력 저하를 우려하며 반박했다.[102] 소노 자신도 나카소네 야스히로 정권 시절 유토리 교육 도입에 관여한 임시교육심의회 위원이었으며,[50] 2013년에는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의 교육재생실행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103][51] 위원 시절 산케이 신문 칼럼에서 체벌 교사와 하시모토 도루 당시 오사카 시장을 동시에 비판했다가 하시모토로부터 "교육 현장에서 떠나라"는 강한 반발을 사기도 했다.[104][105][52][53] 또한 정부 교육 개혁 국민 회의 위원 시절에는 "가상현실은 악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113][114]
=== 재해 피해자들에 대한 발언 논란 ===
자연재해 피해자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 부족한 발언으로도 여러 차례 비판을 받았다. 대형 태풍 피해자들에게 "하룻밤 정도의 일로 왜 그렇게 피난자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것인가", "피난은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옷을 여러 장 껴입은 뒤 자는 게 당연하다", "도시락 등도 돌릴 필요 없다"고 말했으며,[106][54] 니가타현 주에쓰 지진 피해자들에게는 "피난소에서 구호 물자를 기다리는 피난자라니 어리광이 심하다", "피난할 때 침구를 메고 뛰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했다.[107][55] 2011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 사고와 관련해서는 도쿄전력의 책임을 부정하며 "방사선이 강한 곳에 노인들이 가면 좋지 않은가. 나도 가겠다. 오히려 건강해져서 돌아올지도 모르잖아. (웃음)" 등의 발언을 해 큰 논란을 일으켰으나,[108][56] 실제로 후쿠시마를 방문하지는 않았다. 이후에도 "이재민이나 고령자 등 '약자'로 불리는 사람들의 어리광을 당연한 것처럼 봐주는 사회는 불안하다"고 발언했다.[109][57]
=== 인종차별 논란 ===
2015년 2월, 산케이 신문 칼럼에서 일본의 고령화에 따른 간병 인력 부족 문제를 언급하며 외국인 노동자 수용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긍정적인 사례처럼 언급하며 "백인, 흑인 등 비아시아계 이민자들은 일반 주민과 분리된 특별 구역에 거주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인종차별이라는 거센 비판을 받았다.[6][8][9][10][11][110]
=== 기타 정치적·사회적 발언 논란 ===
- 1973년 칠레 쿠데타 당시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좌익으로 규정하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군부 독재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였다.[111]
- 야스쿠니 신사 문제에 대해서는 대체 추모 시설 건립에 찬성하면서도, 개인적으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으며 2007년 6월에는 리덩후이 전 대만 총통의 참배에 남편 미우라 슈몬과 동행하기도 했다.[112]
-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로서 인공임신중절에 반대하며, 베이비박스 설치는 지지하는 입장을 밝혔다.
3. 작품 목록
소노 아야코는 소설, 수필, 논픽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주요 작품은 각 하위 섹션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는 그 외 그림책과 공저 목록을 소개한다.
'''그림책'''
- 小さなケイと大きなケン|쇼우사나 케이토 오오키나 켄일본어 (작은 케이와 큰 켄), 슈에이샤, 1962년
- イエスさまにおべんとうをあげた子|이에스사마니 오벤토오 아게타 코일본어 (예수님께 도시락을 드린 아이), 성문사, 1975년
- 天のおかあさまマリア|텐노 오카아사마 마리아일본어 (하늘의 어머니 마리아), 성문사, 1975년
'''공저'''
- 新編 人生の読本|신펜 진세이노 도쿠혼일본어 (신편 인생의 책) 전12권, 에토 준 공편저, 분게이슌주, 1971-72년
- 愛の黎明|아이노 레이메이일본어 (사랑의 여명), 미우라 슈몬, 엔도 슈사쿠 공저, 요미우리 신문, 1976년
- 何のための教育か|난노 타메노 쿄이쿠카일본어 (무엇을 위한 교육인가), 무라이 스케나가 공저, 고단샤, 1978년
- 聖パウロの世界を行く|세이 파우로노 세카이오 유쿠일본어 (성 바오로의 세계를 가다) (편저), 고단샤, 1982년
- 別れの日まで 東京-バチカン往復書簡|와카레노 히마데 도쿄-바치칸 오우후쿠 쇼칸일본어 (이별의 날까지: 도쿄-바티칸 왕복 서간), 시리에다 마사유키 공저, 고단샤, 1983년 (후에 신초문고)
- 生と死を考える|세이토 시오 칸가에루일본어 (삶과 죽음을 생각하며), 알퐁스 데켄 공편저, 슌슈샤, 1984년
- 旅立ちの朝に 愛と死を語る往復書簡|타비다치노 아사니 아이토 시오 카타루 오우후쿠 쇼칸일본어 (떠남의 아침에: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왕복 서간), 알퐁스 데켄 공저, 가도카와 쇼텐, 1985년 (후에 신초문고)
- ギリシアの神々|기리시아노 카미가미일본어 (그리스의 신들), 타나베 아키라 공저, 고단샤, 1986년 (후에 문고)
- ギリシアの英雄たち|기리시아노 에이유타치일본어 (그리스의 영웅들), 타나베 아키라 공저, 고단샤, 1990년 (후에 문고)
- 雪原に朝陽さして 函館트라피스트 수도원 神父との往復書簡|세츠겐니 아사히 사시테 하코다테 토라피스토 슈도인 신부토노 오우후쿠 쇼칸일본어 (설원에 아침 해가 비추어: 하코다테 트라피스트 수도원 신부와의 왕복 서간), 타카하시 시게유키 공저, 쇼가쿠칸, 1991년 (후에 라이브러리)
- 大声小声|오오고에 코고에일본어 (큰소리 작은소리), 우에사카 후유코 공저, 고단샤, 1992년
- 親子、別あり|오야코, 와카레 아리일본어 (부모 자식, 이별 있음), 미우라 타로 공저, PHP 연구소, 1993년 (후에 문고)
- 大声小声 もうひとこと|오오고에 코고에 모우 히토코토일본어 (큰소리 작은소리 또 한마디), 우에사카 후유코 공저, 고단샤, 1993년
- ギリシア人の愛と死|기리시아진노 아이토 시일본어 (그리스인의 사랑과 죽음), 타나베 아키라 공저, 고단샤, 1995년 (후에 문고)
- 湯布院の月|유후인노 츠키일본어 (유후인의 달), 사카야 토요미츠 공저, 마이니치 신문, 1998년
- 人はみな「愛」を語る 結婚のかたち・人生のかたち・幸せのかたち|히토와 미나 「아이」오 카타루 켓콘노 카타치・진세이노 카타치・시아와세노 카타치일본어 (사람들은 모두 「사랑」을 말한다: 결혼의 모습, 인생의 모습, 행복의 모습), 미우라 슈몬 공저, 세이슌 출판사, 1999년
- 聖書の土地と人びと|세이쇼노 토치토 히토비토일본어 (성서의 땅과 사람들), 미우라 슈몬, 카와야타니 타츠히코 공저, 신초문고, 2001년
- なぜ日本人は成熟できないのか|나제 니혼진와 세이주쿠 데키나이노카일본어 (왜 일본인은 성숙할 수 없는가), 클라인 타카코 공저, 카이류샤, 2003년
- 愛のために死ねますか|아이노 타메니 시네마스카일본어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유키 아키토 공저, 추케이출판, 2008년
- 老いの愉しみ 対談|오이노 타노시미 타이단일본어 (노년 즐거움 대담), 우에사카 후유코 공저, 카이류샤, 2009년 (冬子と綾子の「老いの愉しみ」人生|후유코토 아야코노 「오이노 타노시미」 진세이일본어 (후유코와 아야코의 '노년 즐거움' 인생)으로 아사히문고 발간)
- いまを生きる覚悟|이마오 이키루 카쿠고일본어 (지금을 사는 각오), 클라인 타카코 공저, 치치출판, 2012년
- 愛に目覚める生き方|아이니 메자메루 이키카타일본어 (사랑에 눈뜨는 삶), 미우라 슈몬 공저, 세이슌신쇼 PLAY BOOKS, 2013년
- この世の偽善 人生の基本を忘れた日本人|코노 요노 기젠 진세이노 키혼오 와스레타 니혼진일본어 (이 세상의 위선: 인생의 기본을 잊은 일본인), 김미령 공저, PHP 연구소, 2013년
- 人間の眼力 アラブから学ぶ「人生の読み手」になる方法|닌겐노 간리키 아라부카라 마나부 「진세이노 요미테」니 나루 호우호우일본어 (인간의 안목: 아랍으로부터 배우는 「인생의 독자」가 되는 방법), 요시무라 사쿠지 공저, 고단샤, 2014년
- 「死に方」の覚悟|시니카타노 카쿠고일본어 (「죽는 법」의 각오), 콘도 마코토 공저, 베스트셀러즈, 2014년 (한국어판 제목: 《「목숨」과 「보람」 사이》)
- 響きあう対話 文学と宗教、そして生きること|히비키아우 타이와 분가쿠토 슈쿄, 소시테 이키루 코토일본어 (공명하는 대화: 문학과 종교, 그리고 사는 것), 오카이 타카시 공저, 교세이출판, 2014년
- 夫婦のルール|후우후노 루-루일본어 (부부의 룰), 미우라 슈몬 공저, 고단샤, 2014년
3. 1. 소설
주요 장편소설로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타마유라` (たまゆら|일본어): 남녀의 허무주의적인 일상을 묘사한 작품이다.
- `사탕과자가 부서질 때` (砂糖菓子が壊れるとき|일본어): 마릴린 먼로를 모델로 하였으며, 와카오 아야코 주연으로 영화화되었다.[12]
- `무명비` (無名碑|일본어): 다고쿠라 댐과 아시아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기술자들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 `상처 입은 갈대` (傷ついた葦|일본어): 가톨릭 신부의 삶을 매우 건조한 문체로 묘사한 작품이다.
- `허구의 집` (虚構の家|일본어): 가정 폭력을 묘사한 베스트셀러 작품이다.
- `타로 이야기` (太郎物語|일본어): 작가의 아들 타로를 주인공으로 한 청춘 소설이다. 고등학교 편, 청춘 편(대학 편) 등이 있다.
- `신의 더러운 손` (神の汚れた手|일본어, 영어 번역 제목: ''The Watcher from the Shore''): 산부인과 의사를 주인공으로 낙태와 생명의 존엄을 주제로 한 대표작이다.
- `천상의 푸른색` (天上の青|일본어, 영어 번역 제목: ''No Reason for Murder''): 오쿠보 기요시의 연쇄 여성 폭행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극한의 사랑을 그린 범죄 소설이다.
- `광왕 헤로데` (狂王ヘロデ|일본어): 베들레헴의 유아 학살로 알려진 유대의 왕 헤로데 대왕의 일생을 "아나"(구멍)라는 이름의 벙어리 루트 연주자의 시점에서 그린 작품이다.
- `애가` (哀歌|일본어): 르완다의 투치족 학살을 목격한 수녀의 경험을 그린 작품이다.
- `기적` (奇蹟|일본어, 영어 번역 제목: ''Miracles: A Novel''): 폴란드와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성 막시밀리안 콜베에게 귀속되는 기적을 추구하는 여행 소설이다.
- `긴 어두운 겨울` (長い暗い冬|일본어): 걸작으로 인정받아 여러 문집에 수록되었으며, 공포소설 명작으로 자주 소개된다.
- `낙엽의 소리` (落葉の声|일본어):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죽음을 묘사하였다.
- `다다미가와` (只見川|일본어):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갈라진 사랑을 노래하였다.

그 외 장편소설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제목 (원제) | 출판사/문고 | 비고 | ||||
---|---|---|---|---|---|---|---|
1957 | `여명` ({{lang|ja|黎明|} | }) || 대일본웅변회강담사, 이후 PHP문고, 도쿠마문고 ||
연도 | 제목 (원제) | 출판사/문고 | 비고 |
---|---|---|---|
1955 | `멀리 온 손님들` ({{lang|ja|遠来の客たち|} | }) || 筑摩書房, 후에 각우문고, 나루세쇼보(198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