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보 기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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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보 기요시는 1935년 군마현에서 태어나, 1971년 8명의 여성을 살해하여 체포된 일본의 연쇄 살인범이다. 그는 과거에도 강간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으며, 1973년 사형이 선고되어 1976년 집행되었다. 오쿠보 사건은 여러 영화, 드라마, 소설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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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보 기요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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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본명 | 오쿠보 기요시 |
출생일 | 1935년 1월 17일 |
출생지 | 일본 군마현 |
사망일 | 1976년 1월 22일 |
사망 장소 | 일본 도쿄도 도쿄 구치소 |
사망 원인 | 교수형 |
별칭 | 군마현의 스탈린 |
국적 | 일본 |
범죄 정보 | |
범행 기간 | 1971년 3월 31일 - 1971년 5월 10일 |
범행 장소 | 군마현 |
범죄 유형 | 연쇄 살인, 강간 |
피해자 수 | 8명 |
유죄 판결 | 강간 치상죄, 강간죄, 살인죄, 사체 유기죄 |
형벌 | 사형 |
체포일 | 1971년 5월 14일 |
2. 약력
오쿠보 기요시는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혼혈이었고, 어린 시절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2]
1955년 7월 12일 여성을 강간하고, 같은 해 12월 26일 다른 여성을 강간하려다 실패하여 체포되었다. 1959년 12월 15일 가석방되었으나, 1960년 4월 16일 또 다른 여성을 강간하려다 실패했다. 1961년 5월 5일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두었으나, 1965년 6월 3일 한 남자를 협박하고, 1966년 12월 23일과 1967년 2월 24일 두 명의 여성을 강간하여 1967년 6월 7일 다시 수감되었다. 1971년 3월 3일 가석방되었다.[2]
2. 1. 출생과 유년 시절
오쿠보 기요시는 1935년 1월 17일 군마현 우스이군 야와타촌(현 다카사키시 야와타 지구)에서 3남 5녀 중 일곱 번째(셋째 아들)로 태어났다.[2] 어머니는 러시아인과 일본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었고, 오쿠보는 러시아인의 혈통을 1/4 가지고 있었다.오쿠보의 아버지는 국철 기관사였으나, 태평양 전쟁 이후 인원 정리로 해고되었다.[2][3] 둘째 형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아이들 앞에서도 성행위를 하는 등 성도착증이 있었다고 한다.[4]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후, 오쿠보는 "아이노코", "미국인의 피가 섞였다"는 등의 놀림을 받으며 따돌림을 당했다.[6]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초등학교, 중학교 교사들로부터 낮은 평가를 받았다.[7]
1946년 초등학교 6학년 때, 오쿠보는 어린 소녀를 보리밭으로 데려가 성기에 돌을 채워 넣는 폭행을 저질렀다.[8] 피해자 부모의 항의에 어머니는 처음에는 오쿠보의 현장 개입을 부인했고, 범인으로 지목되자 "의사 놀이에 눈을 부릅뜨는 일은 없다"며 아들을 옹호했다.[8]
중학교 시절에는 아버지의 암거래를 도왔다.[9] 1950년 중학교 졸업 후, 군마현립 다카사키 상업고등학교 야간 과정에 진학했지만 곧 자퇴했다.[10] 도쿄도 이타바시구의 전기점에서 일하다가 여자 목욕탕을 훔쳐본 혐의로 해고되었고,[10] 요코하마시의 누나 집에서 간다의 전기 학교에 다녔으나 창녀와의 문제로 귀향했다.[11]
1953년 4월, 부모의 도움으로 "세이코 덴키 상회"라는 라디오 수리 판매점을 열었지만, 기술 부족으로 실패하고 부품 절도로 체포되었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고 폐점했다.[11]
2. 2. 초기 범죄
1955년 7월 12일, 오쿠보 기요시는 대학생으로 위장하여 마에바시시에서 17세 여고생을 강간하여 체포되었다.[12] 초범으로 징역 1년 6개월, 집행유예 3년 판결을 받았으나,[12] 같은 해 12월 26일에 다시 강간 사건을 일으켰다. 피해자 저항으로 미수에 그쳤지만, 상해를 입혀 강간치상으로 기소되었다.[13] 이 사건으로 징역 2년의 실형 판결을 받아 초범 당시 형기를 더한 3년 6개월 징역으로 마쓰모토 소년 형무소에 수감되었다.[13]1959년 12월 15일, 형무소에서 모범수로 형기를 6개월 남기고 가석방되었다.[14] 그러나 1960년 4월 16일, 전학련 활동가로 변장하여 마에바시시에 거주하는 20세 여대생을 자택으로 데려가 강간하려 했으나, 피해자가 큰 소리를 질러 오쿠보 기요시의 양친에게 발각되어 미수에 그쳤다.[15] 이때도 합의로 불기소 처분되었다.[15]
1961년 5월 5일, 한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과 딸을 두었다. 1965년 6월 3일, 한 남자를 협박했고, 1966년 12월 23일과 1967년 2월 24일 두 명의 여성을 강간했다. 1967년 6월 7일, 그는 감옥에 갔다.
2. 3. 공갈 및 추가 강간
1962년 5월, 오쿠보는 전년에 알게 된 여성과 1년간 교제 후 결혼했다.[16] 결혼 전에는 가명과 허위 경력을 사용했고,[16] 신분을 밝힌 후에도 범죄 경력은 아내에게 숨겼다.[17] 1963년에는 장남이 태어났고,[18] 타니가와 이반(谷川伊凡)이라는 필명으로 시집 『송가』를 자비 출판했다. 1964년 9월, 아내 친족의 도움으로 자택에 우유 판매점을 열고 처음에는 열심히 일했다.[18]1965년 6월 3일, 우유병 2개를 훔치려던 소년의 형(동업자)에게 20000JPY을 갈취하고, 이후 합의서를 작성하게 되어 공갈 및 공갈 미수죄로 체포되었다.[17]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4년 형을 받았고, 범죄 경력이 아내에게 알려졌으며 우유 가게도 어려움을 겪었다.[17] 같은 해, 장녀가 태어났다.[17]
오쿠보는 결혼 후에도 자가용으로 여성들을 노렸지만,[17] 공갈 혐의로 체포된 후 다시 강간 사건을 일으켰다.[19] 1966년 12월 23일, 16세 여고생을 자동차에 태워 다카사키시 내에 세운 차 안에서 강간했다.[19] 1967년 2월 24일에는 20세 여자 단대생을 같은 장소에서 강간했다.[19] 이 사건으로 징역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19] 공갈 사건의 집행 유예도 취소되어 징역 4년 6개월 형을 받고[19] 후추 형무소에 복역했다.[20]
후추 형무소에서 오쿠보는 모범수로 행동하여 소장에게 4번이나 표창을 받았다.[21] 아내로부터 이혼 신청을 받았지만, 출소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만류했다.[21] 실내 장식품 판매 창업이라는 갱생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1971년 3월 2일 가석방되었다.[21]
3. 연쇄 살인
오쿠보 기요시는 1971년 3월부터 5월까지 약 두 달 동안 8명의 여성을 연쇄 살인했다. 그는 1955년 7월 12일 여성을 강간하여 체포되었고, 1959년 12월 15일 풀려났지만, 1960년 4월 16일에 다시 강간 미수 사건을 일으켰다. 1961년 5월 5일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으나, 1965년 6월 3일 협박, 1966년 12월 23일부터 1967년 2월 24일 사이 2명의 여성을 강간하여 1967년 7월 7일 다시 수감되었다.
1971년 3월 3일 가석방된 후, 오쿠보는 부모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마쓰다・패밀리아 로터리 쿠페를 구입하고[25] 이 차를 이용하여 여성들을 유인, 살해하기 시작했다. 오쿠보는 가석방 후, 아내와 함께 살기를 원했지만, 아내와 그의 가족들은 반대했고, 이러한 상황에 절망하여 범행을 결심했다고 진술했다.[24]
3. 1. 범행 수법
오쿠보는 베레모와 루바시카 차림으로 화가를 사칭하여 여성들을 헌팅하고, 자가용 차량으로 유인하는 수법을 사용했다.[26] 그는 흰색 마쓰다・패밀리아 로터리 쿠페를 몰고 다니며, 1971년 3월 31일부터 체포될 때까지 1개월 반 동안 하루 평균 170km를 달리면서 약 150명(확인된 것은 127명)의 여성에게 말을 걸었다.[26] 오쿠보의 차에 탄 여성은 약 30명이었고, 그 중 10여 명과 성관계를 가졌다.[26]오쿠보는 1971년 3월 31일부터 5월 10일 사이에 8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시체를 유기했다.[27]
사건 발생일 | 사건 발생 지점 | 피해자 (괄호 안은 당시 나이) | 가명 |
---|---|---|---|
1971년 3월 31일 | 군마현 다노군 | 여고생 (17) | A |
1971년 4월 6일 | 군마현 다카사키시 | 웨이트리스 (17) | B |
1971년 4월 17일 | 군마현 마에바시시 | 현청 임시 직원 (19) | C |
1971년 4월 18일 | 군마현 이세사키시 | 여고생 (17) | D |
1971년 4월 27일 | 군마현 마에바시시 | 여고생 (16) | E |
1971년 5월 3일 | 군마현 이세사키시 | 전전공사 직원 (18) | F |
1971년 5월 9일 | 군마현 후지오카시 | 회사원 (21) | G[75] |
1971년 5월 10일 | 군마현 마에바시시 | 무직 (21) | H |
피해자 8명에 대한 기소 죄명은 모두 "살인·시체 유기"였으며, G 사건에서는 강간죄가 추가되었다.[66] 또한, 1971년 4월 11일에는 군마현 도미오카시의 여자 사무원(당시 20세)을 강간하여 6일간의 부상을 입힌 사건으로 강간·강간치상 죄로 기소되었다.[66]
3. 2. 피해자
사건 발생일 | 사건 발생 지점 | 피해자 (괄호 안은 당시 나이) | 가명 | 피해자 상세 |
---|---|---|---|---|
1971년 3월 31일 | 군마현 다노군 | 여고생 (17) | A | 쓰다 미야코 |
1971년 4월 6일 | 군마현 다카사키시 | 웨이트리스 (17) | B | 오이카와 미에코 |
1971년 4월 17일 | 군마현 마에바시시 | 현청 임시 직원 (19) | C | 이다 치에코 |
1971년 4월 18일 | 군마현 이세사키시 | 여고생 (17) | D | 가와바타 세이코 |
1971년 4월 27일 | 군마현 마에바시시 | 여고생 (16) | E | 사토 아케미 |
1971년 5월 3일 | 군마현 이세사키시 | 전전공사 직원 (18) | F | 가와호 카즈요 |
1971년 5월 9일 | 군마현 후지오카시 | 회사원 (21) | G | 다케무라 레이코 |
1971년 5월 10일 | 군마현 마에바시시 | 무직 (21) | H | 다카노하시 나오코 |
오쿠보 기요시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8명에 대한 기소 죄명은 모두 "살인・시체 유기"이며, 다케무라 레이코 사건에서는 피해자를 강간했기 때문에 강간죄가 추가되었다[66]。 1971년 4월 11일에는 군마현 도미오카시의 여자 사무원 (당시 20세)을 강간하여 6일간의 부상을 입혔으며, 이 사건은 강간・강간치상 죄로 기소되었다[66]。
다케무라 레이코는 2008년 11월 29일 유튜브에 올라온 "Whitehouse - Why You Never Became A Dancer"라는 영상에 섬뜩하게 움직이는 이미지로 편집되어 사용되었다. 이 이미지는 2023년 레딧 게시물을 통해 오쿠보의 범죄에 관한 책에서 유래되었음이 밝혀졌다.[66]
3. 3. 수사 및 체포
1971년 3월 31일부터 5월 10일 사이 오쿠보 기요시는 8명의 여성을 살해했다. 5월 13일, 21세 여성이 실종되자 그녀의 오빠는 직접 수색에 나섰다. 그는 오쿠보를 찾아냈고, 경찰은 1971년 5월 14일 그를 체포했다.[33]G(21세 여성)가 행방불명된 후, G의 형은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직원과 지인들로 수색대를 결성하고 경찰과 연락하며 독자적인 수색을 시작했다.[28] G의 형은 후지오카 시내에서 G가 사용하던 자전거를 발견했고, 그 장소에서 오쿠보가 자전거를 장갑으로 만지는 것을 목격했다. (지문을 지우려는 의도로 추정[29]) 수상하게 여긴 G의 형이 말을 걸자 오쿠보는 자동차를 타고 도주했지만, G의 형은 차종과 번호를 기억해 경찰에 알리고 자동차 판매점에 조회하여 오쿠보의 신원을 파악했다.[31]
수색대는 경찰의 지도를 받으며 5월 12일부터 자동차 70대로 본격적인 수색을 시작했고, 13일 저녁 카 체이스 끝에 오쿠보를 붙잡아 경찰에 넘겼다.[32] G의 실종 사건 수사를 담당했던 군마현 경찰후지오카 경찰서로 신병이 인도되었고, 14일에 G에 대한 음란 목적 유인 혐의로 체포되었다.[33]
당시 경찰은 오쿠보 체포에 대한 물증이 없어 구류 기한을 넘길 가능성도 있었지만, 15일 강간 피해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고, 대면 확인 결과 오쿠보가 범인임을 지목하여 강간 치상 혐의로 재체포되었다.[34] 오쿠보는 강간 치상 혐의는 인정했지만, G의 살해는 자백하면서도 시체 유기 장소는 경찰에 대한 복수라며 밝히지 않았다.[35] 이후, 경찰은 피해자 전원의 시신을 발견하기까지 약 80일을 소요했다.[26]
5월 21일, 하리나 호수 근처에서 행방불명되었던 A의 유해가 발견되었지만,[36] 오쿠보는 A의 살해를 인정하지 않았다.[37] 수사 본부는 오쿠보가 자작시를 썼다는 점에 착안,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작품을 낭독하고 심경을 이야기하게 하는 방식으로 설득했다.[38] 5월 26일, 오쿠보는 G의 살해와 시체 유기를 자백했고, 27일 현장 검증에서 오쿠보가 진술한 장소에서 G의 유해가 발견되어 강간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체포되었다.[39][40] 그러나 다른 살인에 대해서는 "가을까지는 말하지 않겠다"라며 묵비했다.[41]
6월 4일, 오쿠보는 A의 살해를 자백했다.[42] 경찰은 취조 외에도 오쿠보의 행적과 접촉한 여성 확인,[43] 오쿠보의 자가용에 남겨진 피해 여성의 모발 및 체모 검출[44] 등 주변 수사를 진행하고, 오쿠보에게 행방불명 여성의 사진을 보여주며 관계 유무를 물었다.[45] 오쿠보는 단편적인 진술을 시작했지만, 핵심 부분은 "경찰이나 부모·형에 대한 반항"을 이유로 거부했다.[46]
6월 24일, 경찰은 반장인 경부 1명만으로 취조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47] 오쿠보는 7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수사관의 태도에 따라 시체 유기 장소를 알려줄지 결정하겠다고 말했다.[47] 경부는 대부분의 조건을 거부했지만, 자신이 쓴 "시"를 읽자 오쿠보는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두 가지 조건만 받아들인다면 피해자 1명의 유기 현장으로 안내하겠다고 말했다.[48] 수사 본부는 "보도 관계자를 동행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수용, 6월 27일 새벽 하리나마치 내 오쿠보가 진술한 장소에서 D의 유해가 발견되었다.[49]
이후 오쿠보는 다시 진술을 거부하고 제멋대로인 조건을 제시했다.[50] 7월 13일, "보도진을 동행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E, F와 다른 남성(허위)의 유기 장소를 안내하겠다고 했지만, 말을 바꿔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51]
경찰청은 지도관·조사관 파견, 현장 검증에 오쿠보를 동행시키지 않고 파노라마 사진이나 비디오로 확인, 오쿠보와 타협하지 않음, 신병을 마쓰이다 경찰서(현재의 안나카 경찰서 마쓰이다 분청사)로 이관하는 등의 방침을 전환했다.[52] 마쓰이다서 유치장에는 다른 구금자가 없어 오쿠보를 고립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7월 20일 F,[54] 21일 E,[55] 22일 B,[56] 29일 C와 H의 살해 및 시체 유기를 자백했고,[57] 5명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유해 발굴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심야에 이루어졌다.[58] H를 제외한 4명은 조성 중인 공업 단지 근처 좁은 범위에서 발견되었다.[58]
한편, 취조 중 오쿠보는 아내와 이혼했다.[59]
4. 재판 및 처형
오쿠보 기요시는 마에바시 지방 재판소에서 강간 치상죄, 강간죄, 살인죄, 사체 유기죄로 기소되어[1] 1973년 2월 22일 사형을 선고받았다.[64][60] 그는 항소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고, 1976년 1월 22일 도쿄 구치소에서 법무대신 이나바 오사무의 명령에 따라 사형이 집행되었다.[70][71][72] 사형 확정 후 2년 10개월 만의 집행은 당시 기준으로도 빠른 편이었다.[70][71] 집행 당일, 오쿠보는 일어설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사형수가 된 후, 오쿠보는 재판관과 변호사 등을 고소했지만 모두 불기소 또는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69] 1973년 4월 3일, 도쿄 구치소로 이감되었으며,[69] 같은 해 10월, 옥중 수기 『결별의 장 사형수·오쿠보 기요시 옥중 수기』를 출간하기도 했다.[70]
4. 1. 재판 과정
오쿠보 기요시는 마에바시 지방 재판소에서 열린 형사 재판에서 강간 치상죄, 강간죄, 살인죄, 사체 유기죄로 기소되었다[1]. 1971년 10월 25일 첫 공판에서 오쿠보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라며 기소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60].도쿄 치과 의과 대학 교수 나카타 오사무는 오쿠보에 대한 정신 감정을 실시했다[60]. 그 결과, 오쿠보는 정신병은 아니지만 성적 욕구가 강하고 자기 과시적이며 냉담한 이상 성격(정신병질)을 가졌다고 판단되었다[60].
오쿠보는 재판에서 자백을 번복하지 않겠다고 했지만[61], 이후 공판에서 사건과 관련 없는 친족과의 분쟁이나 권력 비판을 주장했다[64]. 그는 "어차피 사형이다"라며 변호인을 해임하고[71], 재판관 기피 신청을 하는 등 재판을 지연시키려는 행동을 반복했다[64]. 심지어 재판관 3명을 직권 남용죄로 고소하기도 했다[64].
판결 공판 당시에는 국선 변호인 마치다 시게 변호사가 오쿠보의 변호를 맡았다[62]. 마치다 변호사는 오쿠보에게 피해자와 유족에게 사죄하도록 설득했지만, 오쿠보는 끝까지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62]. 결국 이 흉악한 사건은 범행 동기가 밝혀지지 않은 채 마무리되었다[64].
1973년 2월 22일, 마에바시 지방 법원 형사부(미즈노 마사오 재판장)는 검찰 측의 구형대로 오쿠보 기요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64][60]. 미즈노 재판장은 판결 이유에서 오쿠보의 범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타인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돌보지 않는 반인간성이 현저하며, 자신의 욕망에 따라 젊은 여성들의 생명을 잇따라 빼앗았다.[64][66]
- "권력에 대한 반항"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자신을 미화하려는 태도를 보이며,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66]
- 현행 형벌 제도에 사형이 있는 이상, 사형으로 오쿠보에게 죄를 물을 수밖에 없다.[64][66]
오쿠보는 1973년 3월 7일 마에바시 형무소에서 지인과 면회했을 때 "항소할 마음은 없다"고 말했고[67], 1973년 3월 9일 항소 기한까지 도쿄 고등 법원에 항소하지 않아 1심의 사형 판결이 확정되었다[68].
4. 2. 사형 선고 및 집행
마에바시 지방 법원은 1973년 2월 22일 오쿠보에게 사형(교수형)을 선고했다.[64][60] 그는 항소하지 않았고 1976년 1월 22일 처형되었다.[70][71][72] 보도에 따르면 그는 처형 당일 일어설 수 없었다고 한다.오쿠보 기요시는 형사 재판에서 강간 치상죄, 강간죄, 살인죄, 사체 유기죄로 기소되었다.[1] 1971년 10월 25일 마에바시 지방 재판소에서 열린 첫 공판에서 그는 "아무 말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하며[60] 기소 사실을 모두 인정했다.[64]
도쿄 치과 의과 대학 교수 나카타 오사무에 의해 정신 감정이 이루어졌는데,[60] "정신병은 아니지만 이상 성격(정신병질)으로, 성적, 색정적 항진을 동반한다"고 판정되었다.[60]
오쿠보는 "재판에서도 자백은 바꾸지 않겠다"고 단언했지만,[61] 제2·3회 공판에서 사건과 무관한 친족과의 다툼, 권력 비판을 하고,[64] "나는 어차피 사형이다"라고 변호인을 해임하거나,[71][64] "재판관 기피 신청" 등의 행위를 반복했다.[64] 급기야 1973년 1월 8일 논고 구형 공판 직전에는 재판관 3명을 직권 남용죄로 고소하기도 했다.[64]
1973년 2월 22일, 마에바시 지법 형사부(미즈노 마사오 재판장)는 검찰(마에바시 지방 검찰청) 측의 구형대로 오쿠보 기요시에게 사형 판결을 선고했다.[64][60] 미즈노 재판장은 판결 이유에서 다음과 같이 오쿠보의 범행을 단죄했다.[64]
- 타인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돌보지 않는 데에 현저한 반인간성이 인정되며,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젊은 여성의 생명을 잇따라 빼앗았다.[64][66]
- "권력에 대한 반항"이라고 표현하는 등 "자신의 잘못을 숨기고 자신을 미화하려는 허식에 찬 태도"를 취하여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66]
- 현행 형벌 제도에 사형이 있는 이상, 이것으로 피고인에게 임할 수밖에 없다.[64][66]
오쿠보는 1973년 3월 7일 마에바시 형무소에서 지인과 면회하며 "항소할 마음은 없다"고 말했고, 도쿄 고등 법원에 항소 신청을 할 수 있는 최종 기한인 1973년 3월 9일 오전 0시까지 항소하지 않아 제1심의 사형 판결이 그대로 확정되었다.[68]
사형수가 된 오쿠보는 재판관, 변호사 등을 고소했지만, 모두 불기소·기소 유예 처분되었고, 1973년 4월 3일 도쿄 구치소로 이송되었다.[69]
법무대신 이나바 오사무의 사형 집행 명령에 의해 오쿠보 기요시는 1976년 1월 22일 도쿄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70][71][72] 사형 확정으로부터 2년 10개월 후의 집행은 당시 일반 사형수와 비교해도 빠른 속도였다.[70][71]
5. 인물 및 평가
풍속사학자 시모카와 겐시는 오쿠보 기요시의 옥중 수기 '결별의 장'에 대해 "어려운 말을 많이 사용하며 국가 권력에 대한 반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천박하고 소년 같다"고 평가했다[73]。 오쿠보는 취조 중에 숫자 "3"을 싫어했으며, 경찰은 이를 이용해 그를 유치장 3호실에 수감하여 심리적으로 압박했다[74][52]。
5. 1. 성격 및 범행 동기
오쿠보 기요시는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러시아인과 일본인의 혼혈이었으며, 오쿠보는 러시아 혈통을 가졌다. 그는 어렸을 때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73]1955년부터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저지르기 시작했으며, 1971년 연쇄살인을 저지르기 전까지 여러 차례 강간 및 강간 미수, 협박 등으로 체포와 석방을 반복했다. 1961년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았지만, 결혼 생활 중에도 범죄는 계속되었다.[73]
1971년 3월부터 5월까지 8명의 여성을 연쇄 살해한 후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76년 처형되었다.[73]
옥중 수기인 『결별의 장』에 대해 풍속사학자 시모카와 겐시는 "(니체나 쇼펜하우어를 인용하는 등) 어려운 말을 많이 사용하며 (아나키즘에 공감하는 등) 국가 권력에 대한 반발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말이 어려운 것에 비해 천박하며, 그 외에 매우 센티멘털한 시를 장황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데, 이것이 36세의 남자가 쓴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정말 소년 같다"고 평가했다.[73]
취조 과정에서 오쿠보는 숫자 "3"을 싫어하는 모습을 보였고, 경찰은 이를 이용하여 그를 심리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74][52]
5. 2. 유사 사건과의 비교
조모 신문 기자 이가라시 게이스케는 본 사건으로부터 50년이 되는 2021년에 사건을 회고하는 연재 특집 기사를 집필했다.[75] 이가라시는 후쿠이 유키(정신과 의사)의 말을 인용하여 부속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2001년)의 사형수인 다쿠마 마모루(2004년에 사형 집행)와 자마 9명 살해 사건(2017년)의 사형수에 대해 언급하며, 양자와 오쿠보에게 공통점(반사회성 인격장애)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76]요미우리 신문은 도야마·나가노 연쇄 여성 유괴 살인 사건(1980년) 발생 당시, 이 사건의 가해 여성(1998년에 사형 확정, 여성 사형수)과 오쿠보의 공통점으로 다음을 들고 있다.[77]
- 피해자가 모두 젊은 여성이라는 점
- 허영심이 강하고, 복장이나 차 등에 돈을 쓰고, 교묘한 말로 피해자를 유혹하여 범행을 저지른다는 점
- 살해·시체 유기 현장이 인적이 드문 산속이라는 점
- 체포 후에 애매한 진술을 반복하며, 수사 기관을 농락하고 있다는 점
6. 오쿠보 기요시를 소재로 한 작품
1983년 8월 29일, 오쿠보 기요시 사건을 다룬 TV 드라마 大久保清の犯罪일본어가 제작되었으며, 기타노 다케시가 오쿠보 역을 맡았다.[1]
2008년 11월 29일, 유튜브에 "Whitehouse - Why You Never Became A Dancer"라는 영상이 올라왔다. 이 영상에는 화이트하우스의 노래와 함께 오쿠보 기요시의 피해자 중 한 명인 다케무라 레이코의 이미지가 편집되어 있었다. 2023년 레딧 게시물을 통해 이 이미지가 오쿠보의 범죄 관련 서적에서 나온 것이며, 영상 속 여성이 다케무라임이 밝혀졌다.[1]
소노 아야코의 소설 『천상의 푸름』(1988년 - 1990년, 마이니치 신문 연재)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했으나,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1990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단행본으로, 1993년 신초 문고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되었다.[1]
6. 1. 영화
- 1971년 7월, 본 사건을 소재로 한 핑크 영화 『일본 섹스 종단 동일본 편』(감독: 와타나베 마모루, 제작: 도쿄흥영)이 공개되었다. 오쿠보에 해당하는 '구보타 키요시'는 이마이즈미 히로시가 연기했다.[1]
- 1976년, 본 사건 외에 니시구치 아키라 사건 등을 재현한 옴니버스 영화 『전후 엽기 범죄사』(제작: 도에이)가 공개되었다. 오쿠보에 해당하는 '구보 키요이치'는 카와타니 타쿠조가 연기했다.[1]
- 1983년 8월 29일, 츠쿠바 아키라의 동명 서적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 『쇼와 46년 오쿠보 키요시의 범죄』(제작: TBS)가 방송되었다. 오쿠보 역은 비트 다케시가 맡았고, 프로듀서는 야기 야스오였다.[1]
- 1992년 후지 TV 『아내들의 극장』에서 소노 아야코의 소설 『천상의 푸름』이 방송되었다. 오쿠보에 해당하는 우노 후지오 역은 하쿠류가 연기했다.[1]
- 1994년 이노우에 유미코 각본으로 재 드라마화되어, NHK 위성 제2 텔레비전 『BS 서스펜스』에서 12월 12일 - 12월 15일 방송되었다. (종합 텔레비전에서는 1995년 5월 13일과 5월 20일 『토요 드라마』 시간대에 방송). 우노 후지오 역은 사토 코이치가 맡았으며, 1994년도(제10회) 문화청 예술 작품상을 수상했다.[1]
6. 2. 드라마
- 大久保清の犯罪일본어 (1983년 8월 29일 방영): 오쿠보 기요시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된 드라마로, 기타노 다케시가 오쿠보 역을 연기했다.[1]
- 일본 섹스 종단 동일본 편 (1971년 7월 개봉): 이 사건을 소재로 한 핑크 영화로, 이마이즈미 히로시가 오쿠보에 해당하는 '구보타 키요시' 역을 연기했다.
- 전후 엽기 범죄사 (1976년 개봉): 이 사건 외에 니시구치 아키라 사건 등을 다룬 옴니버스 영화로, 카와타니 타쿠조가 오쿠보에 해당하는 '구보 키요이치' 역을 연기했다.
- 쇼와 46년 오쿠보 키요시의 범죄 (1983년 8월 29일 방영): 츠쿠바 아키라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로, TBS에서 제작되었다. 비트 다케시가 오쿠보 역을, 야기 야스오가 프로듀서를 맡았다.[6]
- 천상의 푸름 (1992년 드라마): 소노 아야코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로, 후지 TV '아내들의 극장'에서 방영되었다. 하쿠류가 오쿠보에 해당하는 우노 후지오 역을 연기했다.
- 천상의 푸름 (1994년 드라마): 이노우에 유미코 각본으로 재 드라마화되어 NHK BS에서 방영되었다. 사토 코이치가 우노 후지오 역을 맡았으며, 1994년도 문화청 예술 작품상을 수상했다.
6. 3. 소설
다음은 오쿠보 기요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소설 및 영상 작품 목록이다.- 1971년 7월, 핑크 영화 『일본 섹스 종단 동일본 편』(감독: 와타나베 마모루, 제작: 도쿄흥영)이 공개되었다. 오쿠보에 해당하는 '구보타 키요시' 역은 이마이즈미 히로시가 연기했다.
- 1976년, 영화 『전후 엽기 범죄사』(제작: 도에이)가 공개되었다. 이 영화는 오쿠보 기요시 사건 외에 니시구치 아키라 사건 등을 재현한 옴니버스 형식이다. 오쿠보에 해당하는 '구보 키요이치' 역은 카와타니 타쿠조가 연기했다.
- 1983년 8월 29일, 텔레비전 드라마 『쇼와 46년 오쿠보 키요시의 범죄』(제작: TBS)가 방송되었다. 츠쿠바 아키라의 동명 서적을 원작으로 하며, 오쿠보 역은 비트 다케시가, 프로듀서는 야기 야스오가 맡았다.
- 소노 아야코의 소설 『천상의 푸름』(1988년 - 1990년, 마이니치 신문 연재)은 본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지만, 직접적인 묘사는 없다. 1990년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단행본으로, 1993년 신초 문고에서 문고판으로 출간되었다.
- * 1992년 『아내들의 극장』(후지 TV)에서 드라마화되었으며, 오쿠보에 해당하는 우노 후지오 역은 하쿠류가 연기했다.
- * 1994년 이노우에 유미코 각본으로 다시 드라마화되어 『BS 서스펜스』(NHK 위성 제2 텔레비전)에서 12월 12일 - 12월 15일 방송되었다. 종합 텔레비전에서는 1995년 5월 13일과 5월 20일 『토요 드라마』 시간대에 방송되었다. 우노 후지오 역은 사토 코이치가 맡았으며, 1994년도(제10회) 문화청 예술 작품상을 수상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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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久保は問う~女性連続殺人から50年(1)怨嗟 遺族「思い出したくない」 半世紀経てなおやり場ない無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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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久保は問う~女性連続殺人から50年(3)素行 親の訴えにも自供拒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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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久保は問う~女性連続殺人から50年(4)虚無 人間不信 侮辱ばか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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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久保清に死刑 前橋地裁が判決 "他に道なし…"と "欲望のままに犯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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死刑でも娘は戻らぬ 大久保判決 目を押える遺族たち 鬼か…大久保うす笑い "人間じゃない"の声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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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久保事件の判決要旨 許されぬ"反人間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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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久保の死刑確定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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