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 (14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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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송수(147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했다. 사옹원 참봉, 제용감 부봉사, 형조 정랑 등을 거쳐 화순 및 영광 군수를 역임했으며, 중종반정 후 정국 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밀양부사 재임 중 발생한 사건으로 논란이 있었으나, 이후 정주목사를 거쳐 1517년 사망했다. 사후 병조참판에 증직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광주에 위치해 있다.
송수는 간성군수를 지낸 송유징(宋有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안현감 송관(宋觀)이고, 아버지는 생원 송윤은(宋胤殷)이며, 어머니는 호군 윤주(尹珠)의 딸 윤씨이다. 부인은 광주 이씨로 이극돈의 딸이다.
그의 사후 37년 뒤 부인 광주이씨가 죽자 광주군 중부면 복정리 음촌(陰村, 현 성남시 수정구 복정동 응달말) 이극돈의 묘역 근처에 부인 광주이씨와 합장되었다.[1] 뒤에 다시 그의 일가의 거주지 근처인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 하대원리(현,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동)에 장사하였다. 하대원동 근처에는 그의 일가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2. 생애
젊은 시절 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진출, 여러 관직을 거쳐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1516년(중종 10) 밀양부사에 제수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14일 밀양 속현 풍각현(豊角縣)에서 발생한 살인 사건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517년(중종 11년) 질환으로 밀양부사직을 사직하고 아들이 있던 합천으로 내려갔다가, 정주목사로 복직했으나 그해 9월 피부병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
송수(宋壽)는 간성군수를 지낸 송유징(宋有徵)을 증조부로, 부안현감을 역임하고 사후 통례원통례에 추증된 송관(宋觀)을 할아버지로 두었다. 아버지는 생원 송윤은(宋胤殷)이며, 어머니는 호군 윤주(尹珠)의 딸 윤씨이다. 아버지 송윤은은 생원이었으나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아버지 송관의 임지였던 전북 부안에서 별세하였다. 아버지 송윤은의 증 사복시정 및 증 승정원좌승지 직책은 훗날 송수의 장남 송맹경이 동지중추부사(종2품)에 오르면서 추증된 것이다.
부인은 광주 이씨로, 좌리공신(佐理功臣)이자 강원감사, 참판, 병조판서, 의정부좌찬성을 지낸 광원군(廣原君) 익평공(翼平公) 이극돈(李克墩)의 딸이다.
송수는 자신의 대에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에 처음으로 자리잡고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자리잡은 곳은 처가인 이극돈의 일가가 살던 동리 근처였다.
2. 2. 관직 생활
사마시에 합격한 뒤 약관에 관직에 올라 사옹원참봉, 제용감참봉, 경릉참봉 등을 거쳤다. 제용감 부봉사로 승진한 뒤 상서원, 의영고의 직장을 지냈고, 다시 주부로 개차되었다.
사헌부 감찰, 장례원 사평, 한성부판관 등을 거쳐 형조의 추천으로 형조정랑에 올랐다. 이후 상의원첨정을 거쳐 화순군 군수, 영광군 군수로 나갔는데, 지방관으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 후 정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재감, 선공감, 제용감의 부정을 거쳐 정주목사로 부임했으나, 외우(外憂)로 인해 사직하였다.
1516년(중종 10) 밀양부사에 제수되어 부임했다. 밀양부사로 근무 중이던 1516년 12월 14일 밀양의 속현인 풍각현(豊角縣)의 백성 박군효(朴君孝)가 자신의 아버지를 머리를 난타하여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송수가 이임한 후 1518년 뒤늦게 밝혀져 큰 문제가 되었다. 당시 밀양의 지방수령이었던 그에게도 지방관이라 하여 추죄 여론이 나타났다. 그러나 1517년(중종 11년) 12월 13일 경상도관찰사 김안국이 이미 죽은 고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여 추죄를 면하였다.
1517년(중종 11년) 질환으로 밀양부사직을 사직하고, 장수로 있는 아들의 합천별장으로 내려갔다. 다시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그해 9월 피부병으로 사망했다.
2. 3. 밀양부사 시절과 논란
1516년(중종 10) 송수는 밀양부사에 제수되어 부임했다. 밀양부사로 근무 중이던 1516년 12월 14일 밀양의 속현인 풍각현(豊角縣)의 백성 박군효(朴君孝)가 자신의 아버지를 머리로 난타하여 때려죽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1518년 뒤늦게 그의 사후에 이 사건이 밝혀져 큰 문제가 되었다. 사건 당시 밀양의 지방 수령이었던 그에게도 지방관이라 하여 추죄 여론이 나타났다.[1] 그러나 1517년(중종 11년) 12월 13일 경상도관찰사 김안국(金安國)이 이미 죽은 고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여 추죄를 면하였다.[1]
2. 4. 사망
1517년(중종 11년) 질환으로 밀양부사직을 사직하고, 아들이 장수로 있던 합천별장으로 내려갔다. 다시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그해 9월 피부병으로 사망하였다. 이두현산(理頭峴山)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3. 사후
사후 증직으로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가 추증되었다. 묘비문은 정사룡이 짓고, 글씨는 여성위 송인이 썼다.
4. 가족 관계
관계 이름 비고 할아버지 송관(宋觀) 아버지 송윤은 어머니 윤씨 호군 윤주(尹珠)의 딸 부인 광주 이씨(廣州 李氏) 1470년 ~ 1553년 8월 14일, 이극돈의 딸 장인 이극돈(李克墩) 1435년 ∼ 1503년 2월 27일 처조부 이인손(李仁孫) 처삼촌 이극배(李克培) 1422년 ~ 1495년 10월 처삼촌 이극감(李克堪) 이세좌(李世佐)의 아버지 관계 이름 비고 아들 송맹경(宋孟璟) 며느리 권씨 집의 권세형(權世衡)의 딸, 송맹경의 전처 손자 2명 요절 며느리 유씨(柳氏) 참봉 유형원(柳亨源)의 딸, 송맹경의 후처 손녀 여산 송씨(礪山 宋氏) 손녀사위 이용(李庸+戈) 1533년 - 1591년 1월 손녀 여산 송씨(礪山 宋氏) 손녀사위 윤탁연(尹卓然) 1538년 5월 15일 ~ 1594년 5월 28일 외증손 윤경원(尹慶元) 1560년 ~ 1592년 10월 18일, 임진왜란 때 순절 외증손 윤길원(尹吉元) 1560년 ~ ? 첩며느리 이름 미상 송맹경의 첩 서손자 송숭(宋崇) 아들 송숙경(宋叔璟) 며느리 양씨 목리 양숙(梁淑)의 딸 손자 송희민(宋希敏) 손자 송희성(宋希聖) 1543년 ~ ? 아들 송말경(宋末璟) 며느리 허씨 부윤 허광(許石+廣)의 딸 손자 송률(宋山+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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