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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집단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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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시리아 집단학살은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에서 발생한 아시리아인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을 일컫는다. 이 용어는 '세이포'로도 불리며,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아람인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기독교 공동체를 대상으로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의 민족주의와 종교적 갈등이 심화되면서, 아시리아인들은 강제 이주, 학살, 재산 몰수 등의 피해를 입었다.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을 동원하여 아시리아인 거주 지역을 공격하고, 저지대와 고지대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로 인해 수십만 명의 아시리아인이 사망하고, 생존자들은 이라크, 시리아, 코카서스 등지로 흩어져 정착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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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집단학살
일반 정보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의 지도
제1차 세계 대전 중 오스만 제국
위치오스만 제국 (현재의 튀르키예, 시리아, 이라크)
기간1915년-1919년
대상아시리아인, 시리아 정교회 신자
유형집단 학살, 대량 학살, 강제 이주, 인종 청소
사망자 수250,000명
가해자오스만 제국군, 쿠르드족 부족
동기반기독교 정서
명칭
시리아어(사이파)
의미(칼)

2. 용어

'수르요'(Suryoyo) 또는 '수르요예'(Suryoye)라는 내부어에 대한 영어 번역은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없다. '아시리아인', '시리아인', '아람인', '칼데아인'과 같은 용어의 선택은 종종 정치적 성향에 따라 결정된다. 동방 교회는 고대 아시리아에서 유래된 정체성을 처음으로 채택했다. 시리아 정교회는 1952년부터 '아시리아인' 대신 '시리아인' 사용을 공식적으로 거부했지만, 모든 시리아 정교회가 아시리아 정체성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오스만 제국은 종교에 따라 조직되었기 때문에, 오스만 관리들은 민족성보다는 종교적 소속에 따라 인구를 지칭했다. 따라서, 역사가 데이비드 건트에 따르면, "'아시리아 집단 학살'이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아시리아인들이 역사적으로 사용해 온 신 아람어에서는 1915년부터 '세이포'(Sayfo) 또는 '세이포'(Seyfo)(세이포/ܣܝܦܐsyr)로 알려졌는데, 이는 10세기부터 '멸망' 또는 '소멸'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부 아시리아인들이 사용하는 다른 용어로는 '나크바(nakba)'(아랍어로 '재앙')와 '페르만(firman)'(터키어로 '명령', 아시리아인들이 공식 칙령에 따라 살해되었다고 믿었기 때문) 등이 있다.

3. 배경

현재 아시리아인, 칼데아인, 아람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상부 메소포타미아 출신이며 역사적으로 아람어를 사용했으며 이들의 조상은 기원후 1세기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시리아 기독교의 첫 번째 주요 이교사산 제국의 기독교인들이 로마 제국의 공식적인 종교로부터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동방교회를 형성했던 4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시리아 전례(훗날 시리아 정교회)는 로마 통치자들에 의해 신학적 차이로 박해를 받았지만, 동방 교회와는 분리된 채로 남아 있었다. 시리아 기독교의 분열은 제국 간의 정치적 분열과 성직자들 간의 개인적인 적대감에 의해 촉발되었다.

십자군 전쟁과 몽골의 침공으로 중동 기독교 사회는 황폐해졌다. 16세기17세기에 각각 칼데아 가톨릭교회와 시리아 가톨릭교회는 동방교회와 시리아 정교회에서 분리되어 가톨릭교회와 완전상통되었다. 다른 교회들은 모두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 오스만 제국의 아시리아인 ====

오스만 제국밀레트에서 민족이 아닌 종교적 교파를 인정했는데, 여기에는 시리아 정교회(야쿠빌레르), 동방 교회(네스토리우스파), 칼데아 가톨릭 교회(켈다닐레르)가 포함되었다. 19세기까지 이들은 아르메니아 밀레트의 일부였다. 오스만 제국의 아시리아인들은 국가의 통제를 피해 외딴 산간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러한 원격성은 아시리아인들이 징병과 세금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내부적인 차이를 굳히고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과 유사한 집단 정체성의 출현을 저지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인들과 달리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상업의 불균형한 부분을 통제하지 못했고, 인근 적대국에서도 인구가 많지 않았다.

전쟁 전 아시리아인의 인구는 정확하게 추산되지 않았지만, 50만~6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아시리아인이 다수를 차지한 마을은 디야르베키르 지방(빌라예트)의 미디야트뿐이었다. 시리아 정교회 교인들은 투르 압딘으로 알려진 미디야트 주변의 구릉성 농촌 지역에 집중되어 거의 100개의 마을에 살면서 농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했다. 시리아 정교회 문화는 마르딘 인근의 모르 가브리엘과 데일자파란 두 수도원이 중심이었다. 샨르우르파, 하르푸트, 아디야만 등의 마을에도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투르 아브딘의 시리아인 인구와는 달리 이들 시리아인 중 다수는 비아람어를 사용했다.

쿠드샤니에 기반을 둔 동방 교회 총대주교 아래 아시리아 부족들은 오스만-페르시아 국경에 인접한 투르 압딘 동쪽의 하카리 산맥을 지배했다. 하카리는 산이 매우 많아 봉우리가 4,000m에 달하고 가파른 협곡으로 분리되어 있다. 많은 지역은 산비탈을 깎아 만든 오솔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아시리아 부족들은 쿠르드족의 동맹국들을 대신해 서로 싸우기도 했다. 동쪽에는 페르시아 우르미아호의 서쪽 해안가에서 동방의 교회가 시작되었고, 바로 북쪽에는 살라마스에 칼데아인의 거주지가 있었다. 비틀리스 지방의 시이르트 주변(투르 압딘의 북동쪽과 하카리의 북서쪽, 하카리보다 산이 적은 곳)에는 칼데아인의 거주지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칼데아인은 오늘날 이라크에서 남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 아시리아-칼데아 대표단이 제출한 전쟁 전 아시리아 인구 비율.


==== 갈등 악화 ====

쿠르드족과 아시리아인은 서로 잘 융합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융합은 폭력, 약탈, 여성 납치 및 강간, 인질 잡기, 가축 절도, 강도, 약탈, 마을 방화 및 만성적인 불안 상태를 동반했다. 아시리아인들이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화 및 근대화 시도와 충돌했다. 아시리아인을 겨냥한 최초의 대량 폭력 사태는 1840년대 중반 쿠르드족 에미르 베디르 칸이 하카리와 투르 압딘을 초토화하여 수천 명을 죽인 사건이었다. 부족 간 분쟁에서 폭력의 대부분은 상대 부족의 보호를 받는 기독교 마을을 향했다.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에게 현대식 무기를 지급하여 러시아와 싸우게 했다. 전쟁 후 쿠르드족이 무기를 반환하지 않자, 구식 무기에 의존하던 아시리아인들은 불리한 입장에 놓였고 폭력은 증가했다. 1880년대에는 정부에 충성하는 쿠르드족 부족으로 구성된 하미디예가 결성되어 민간 및 군사 법률에서 면제되어 처벌받지 않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쿠르드족 샤이크 형태의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은 아시리아인과 무슬림 쿠르드족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895년 디야르베키르 학살에서 많은 아시리아인들이 사망했다.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 이후, 아시리아인들은 새 정부가 반기독교 이슬람주의를 중단할 것이라고 희망했지만, 폭력은 더욱 악화되었다. 1908년, 12,000명의 아시리아인들이 바르와리의 쿠르드족 에미르에 의해 리잔 계곡에서 추방되었다. 오스만 당국이 쿠르드족의 공격을 막지 못하자, 동방교회 총대주교 마르 시문 19세 베냐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러시아 제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1900년경 바즈 마을 하카리에 위치한 마타 크타타

3. 1. 오스만 제국의 아시리아인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에서 민족이 아닌 종교적 교파를 인정했는데, 여기에는 시리아 정교회(야쿠빌레르), 동방 교회(네스토리우스파), 칼데아 가톨릭 교회(켈다닐레르)가 포함되었다. 19세기까지 이들은 아르메니아 밀레트의 일부였다. 오스만 제국의 아시리아인들은 국가의 통제를 피해 외딴 산간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다. 이러한 원격성은 아시리아인들이 징병과 세금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내부적인 차이를 굳히고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과 유사한 집단 정체성의 출현을 저지하기도 했다. 아르메니아인들과 달리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오스만 상업의 불균형한 부분을 통제하지 못했고, 인근 적대국에서도 인구가 많지 않았다.

전쟁 전 아시리아인의 인구는 정확하게 추산되지 않았지만, 50만~6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아시리아인이 다수를 차지한 마을은 디야르베키르 지방(빌라예트)의 미디야트뿐이었다. 시리아 정교회 교인들은 투르 압딘으로 알려진 미디야트 주변의 구릉성 농촌 지역에 집중되어 거의 100개의 마을에 살면서 농업이나 수공업에 종사했다. 시리아 정교회 문화는 마르딘 인근의 모르 가브리엘과 데일자파란 두 수도원이 중심이었다. 샨르우르파, 하르푸트, 아디야만 등의 마을에도 많은 인구가 살고 있었다. 투르 아브딘의 시리아인 인구와는 달리 이들 시리아인 중 다수는 비아람어를 사용했다.

쿠드샤니에 기반을 둔 동방 교회 총대주교 아래 아시리아 부족들은 오스만-페르시아 국경에 인접한 투르 압딘 동쪽의 하카리 산맥을 지배했다. 하카리는 산이 매우 많아 봉우리가 4,000m에 달하고 가파른 협곡으로 분리되어 있다. 많은 지역은 산비탈을 깎아 만든 오솔길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다. 아시리아 부족들은 쿠르드족의 동맹국들을 대신해 서로 싸우기도 했다. 동쪽에는 페르시아 우르미아호의 서쪽 해안가에서 동방의 교회가 시작되었고, 바로 북쪽에는 살라마스에 칼데아인의 거주지가 있었다. 비틀리스 지방의 시이르트 주변(투르 압딘의 북동쪽과 하카리의 북서쪽, 하카리보다 산이 적은 곳)에는 칼데아인의 거주지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칼데아인은 오늘날 이라크에서 남쪽으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다.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52dc91241_b9d4bae6.svg|thumb|1919년 파리 평화 회의에 아시리아-칼데아 대표단이 제출한 전쟁 전 아시리아 인구 비율.

]]

3. 2. 갈등 악화

쿠르드족과 아시리아인은 서로 잘 융합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융합은 폭력, 약탈, 여성 납치 및 강간, 인질 잡기, 가축 절도, 강도, 약탈, 마을 방화 및 만성적인 불안 상태를 동반했다. 아시리아인들이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중앙집권화 및 근대화 시도와 충돌했다. 아시리아인을 겨냥한 최초의 대량 폭력 사태는 1840년대 중반 쿠르드족 에미르 베디르 칸이 하카리와 투르 압딘을 초토화하여 수천 명을 죽인 사건이었다. 부족 간 분쟁에서 폭력의 대부분은 상대 부족의 보호를 받는 기독교 마을을 향했다.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동안 오스만 제국은 쿠르드족에게 현대식 무기를 지급하여 러시아와 싸우게 했다. 전쟁 후 쿠르드족이 무기를 반환하지 않자, 구식 무기에 의존하던 아시리아인들은 불리한 입장에 놓였고 폭력은 증가했다. 1880년대에는 정부에 충성하는 쿠르드족 부족으로 구성된 하미디예가 결성되어 민간 및 군사 법률에서 면제되어 처벌받지 않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쿠르드족 샤이크 형태의 정치적 이슬람의 부상은 아시리아인과 무슬림 쿠르드족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895년 디야르베키르 학살에서 많은 아시리아인들이 사망했다. 1908년 청년 튀르크 혁명 이후, 아시리아인들은 새 정부가 반기독교 이슬람주의를 중단할 것이라고 희망했지만, 폭력은 더욱 악화되었다. 1908년, 12,000명의 아시리아인들이 바르와리의 쿠르드족 에미르에 의해 리잔 계곡에서 추방되었다. 오스만 당국이 쿠르드족의 공격을 막지 못하자, 동방교회 총대주교 마르 시문 19세 베냐민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러시아 제국과 협상을 시작했다.

4. 제1차 세계 대전

페르시아 국경 지역인 테르가바르에서 온 아시리아 전사들


전쟁 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서로의 영토 내에서 적의 배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 위해 각 민족들을 포섭하려 했다. 오스만 제국은 코카서스 무슬림과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페르시아의 아시리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을 끌어들이려 했고,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족, 아시리아인에 주목했다. 전쟁 전에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과 타브리즈를 포함한 페르시아 북동부 지역을 통제했다.

다른 집단 학살과 마찬가지로, 세이포(Sayfo)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민족주의 부상은 경쟁적인 터키 민족주의, 쿠르드 민족주의, 이란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 운동으로 이어졌고, 이는 이미 아시리아인이 거주하는 분쟁 지역에서 폭력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했다. 역사학자 도널드 블록스햄은 오스만 제국 내 기독교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유럽 열강이 개입한 것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제국주의는 오스만 제국의 기독교도들을 보복 공격의 위험에 빠뜨렸다. 1912년과 1913년,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의 패배는 발칸 반도에서 무슬림 난민의 대규모 이주를 촉발했다.

청년당 정부는 제국에 불충하다고 여겨지는 인구로부터 몰수된 토지에 동부 아나톨리아에 난민을 재정착시키기로 결정했다. 기독교 인구의 추방과 인구가 감소한 지역에 무슬림의 재정착 사이에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었다. 인구 교체의 목표는 발칸 무슬림을 터키화하고 기독교 인구로부터 인식되는 내부 위협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비무슬림에 대한 폭력에 경도된 지역 정치인들과 함께 이러한 요인들은 집단 학살의 전제 조건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

청년당 정치인 엔베르 파샤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특수 조직을 설립했다. 그 구성원 중 많은 수가 그 임무를 위해 석방된 유죄 판결을 받은 범죄자였으며, 스파이와 파괴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오스만 제국은 1914년 7월 24일에 전면 동원을 명령했고, 그 직후 독일-오스만 동맹을 체결했다. 1914년 8월, 청년당은 아르메니아 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하여 전쟁 발생 시 아르메니아 혁명 연맹이 러시아에서 친오스만 반란을 일으키면 자치 아르메니아 지역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거절했다. Gaunt에 따르면, 유사한 제안이 8월 3일에 반의 마르 시문에게도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Qudshanis로 돌아온 후, 마르 시문은 추종자들에게 "터키에 대한 모든 의무를 엄격하게 이행하라"고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하카리(Hakkari)의 아시리아인들은 (다른 많은 오스만 제국의 신민들과 마찬가지로) 동원 중 오스만 군대에의 징병을 거부했고, 많은 이들이 8월에 페르시아로 도망쳤다. 그러나 마르딘에 있는 사람들은 징병을 받아들였다.

=== 저지대 아시리아인 학살 ===

1914년 8월, 국경 근처 9개 마을의 아시리아인들은 오스만 군대에 합류를 거부한 후 페르시아로 피난을 강요당했고 그들의 마을은 불탔다. 1914년 10월 26일,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며칠 전, 오스만 내무부 장관 탈라트 파샤는 반 주 (하카리를 포함) 주지사인 제브데트 베이에게 전보를 보냈다. 페르시아에서 계획된 오스만 공격에서 하카리 아시리아인의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탈라트는 페르시아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는 아시리아인들을 무슬림과 함께 서쪽으로 더 멀리 이주시키고 재정착시키라고 명령했다. 각 재정착지에는 20명 이상의 아시리아인이 살 수 없도록 하여 그들의 문화, 언어 및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파괴하도록 했다.

고트는 이 명령을 사이포의 시작으로 인용했다. 반 정부는 이 명령을 수행할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이행할 수 없다고 보고했으며, 11월 5일까지 예상된 아시리아인들의 불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1] 율라메르크와 가와르의 아시리아인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오스만 정규군은 그들의 명령 불복종에 대한 보복으로 하카리 전역의 아시리아 마을을 공격했다. 1914년 12월까지 이 사건에서 정부의 역할을 알지 못했던 아시리아인들은 반 주지사에게 항의했다.

바슈칼레 국경 마을의 오스만 수비대는 카즘 카라베키르가 지휘했고, 지역 특수 조직 지부는 외메르 나지/Ömer Nacitr가 지휘했다. 러시아군은 1914년 11월 바슈칼레와 사라이를 점령했고 며칠 동안 두 곳을 점령했다. 오스만군에 의해 재탈환된 후, 그 도시의 현지 기독교인들은 실제 협력과 비례하지 않게 협력자로 처벌받았다. 헌병대, 하미디예 불규칙군, 쿠르드 자원병으로 구성된 지역 오스만군은 고지대의 아시리아 부족을 공격할 수 없었고, 평원의 무장 불량한 기독교 마을에 대한 공격에 국한했다. 그 지역에서 온 난민들은 러시아군에게 "가와르와 바슈칼레의 거의 모든 남성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고 말했다. 1915년 5월, 바슈칼레에서 퇴각하는 오스만군은 시이르트로 이동하기 전에 수백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을 학살했다.

=== 전쟁 준비 ===

마르 시문은 저지대 아시리아인 학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지대 부족들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우르미아의 러시아 영사관에서 아시리아 통역관으로 일하는 아가 페트로스를 통해 러시아 당국과 연락을 취했다. 시문은 1914년 12월, 아시리아인들을 오스만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마르딘에서 파견된 오스만 관리 메흐메드 셰피크 베이를 만나기 위해 바슈칼레로 갔다. 셰피크는 아시리아인들이 러시아 편에 서지 않고 오스만 정부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서면 약속을 대가로 보호와 돈을 약속했다. 부족장들은 제안을 고려했지만 거부했다.

1915년 1월, 쿠르드족은 쿠드샤니스에서 아시리아 부족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총대주교의 여동생인 수르마 다바이트 마르 시문은 다음 달 300명의 병사와 함께 쿠드샤니스를 떠났다. 1915년 초, 하카리 부족은 대규모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성과 아이들을 상부 티아리의 챔바 지역으로 보내고 전투 요원만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5월 10일, 아시리아 부족은 만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또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6월, 마르 시문은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갔다. 그는 모얀지크 (살마스 계곡)에서 표도르 체르노주보프 장군을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총대주교와 아가 페트로스는 6월 21일 직전에 살마스에서 러시아 영사 바실 니키틴을 만나기도 했지만, 약속된 러시아의 지원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라마르, 지루와 바즈 사이의 수파 두리그 협곡을 가로질러 북쪽을 바라보는 모습


5월, 아시리아 전사들은 반 공방전을 구원하기 위해 급파된 러시아 군대의 일부였으며, 모술 주지사 하이데르 베이에게 하카리 침략 권한이 주어졌다. 탈라트는 그에게 아시리아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하며 "우리는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이 민족 청소 작전은 엔베르, 탈라트, 오스만 군 및 민간 당국에 의해 조정되었다. 침략을 합법화하기 위해 율라메르크, 가와르, 셰민난 지역은 일시적으로 모술 주로 이관되었다. 오스만 군대는 특정 목표물에 대항하여 현지 쿠르드 부족과 합류했다. 쿠르드족의 오라마르 부족의 수토 아가는 동쪽에서 지루, 데즈, 바즈를 공격했다. 사이드 아가는 하부 티아리의 계곡을 공격했고, 이스마엘 아가는 상부 티아리의 챔바를 목표로 삼았으며, 상부 베르와르 에미르는 서쪽에서 아시타, 리잔 계곡, 하부 티아리를 공격했다.

=== 고지대 침공 ===

공동 포위 작전은 6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이 작전 초기에 여러 쿠르드 부족들이 질루 부족을 공격했으며, 역사적인 유물을 소장하고 있던 4세기 교회인 마르 자야가 파괴되었다. 줄라메르크와 모술에 주둔한 오스만 군대는 6월 23일 티아리를 공동 공격했다. 하이달은 먼저 아쉬타와 사레스피도 마을을 공격했고, 이후 터키인과 쿠르드인 3천 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티아리와 트쿠마 사이의 산길을 공격했다. 아시리아인들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생명과 탄약의 지속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침략자들이 보유한 독일제 소총, 기관총, 포병을 갖추지 못했다.

7월에 마르 시문은 말리크 코샤바와 야왈라 주교를 페르시아타브리즈로 보내 러시아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쿠르드 바르자니 부족은 오스만 군대를 지원하여 트쿠마, 티아리, 질루, 바즈를 초토화시켰다. 이 작전 기간 동안 오스만 군대는 포로를 잡지 않았다. 마르 시문의 형제 호르무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부하던 중 체포되었고, 6월 말 탈라트는 마르 시문이 항복하지 않으면 호르무즈의 목숨을 위협하여 아시리아 부족의 항복을 얻으려 했다. 아시리아인들은 거부했고, 호르무즈는 살해되었다.

수적으로 열세하고 무기가 부족했던 아시리아인들은 식량 없이 더 높은 산으로 후퇴했고, 그들의 집, 농장, 가축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9월까지 대부분이 했던 페르시아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러시아 군대에 합류했다. 1915년 전투 동안 아시리아인들의 유일한 전략적 목표는 방어였고, 오스만의 목표는 아시리아 부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귀환을 막는 것이었다.

4. 1. 하카리에서의 인종 청소

캡션 참조
남동부 아나톨리아 지도. 하카리는 지도 중앙 오른쪽, 아마디야 북쪽, 제지레에서 코샤브까지의 선 동쪽, 오스만-페르시아 국경 서쪽의 삼각형에 위치한 산악 지역이다.


=== 저지대 아시리아인 학살 ===

1914년 8월, 국경 근처 9개 마을의 아시리아인들은 오스만 군대에 합류를 거부한 후 페르시아로 피난을 강요당했고 그들의 마을은 불탔다. 1914년 10월 26일,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며칠 전, 오스만 내무부 장관 탈라트 파샤는 반 주 (하카리를 포함) 주지사인 제브데트 베이에게 전보를 보냈다. 페르시아에서 계획된 오스만 공격에서 하카리 아시리아인의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탈라트는 페르시아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는 아시리아인들을 무슬림과 함께 서쪽으로 더 멀리 이주시키고 재정착시키라고 명령했다. 각 재정착지에는 20명 이상의 아시리아인이 살 수 없도록 하여 그들의 문화, 언어 및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파괴하도록 했다.

고트는 이 명령을 사이포의 시작으로 인용했다. 반 정부는 이 명령을 수행할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이행할 수 없다고 보고했으며, 11월 5일까지 예상된 아시리아인들의 불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1] 율라메르크와 가와르의 아시리아인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오스만 정규군은 그들의 명령 불복종에 대한 보복으로 하카리 전역의 아시리아 마을을 공격했다. 1914년 12월까지 이 사건에서 정부의 역할을 알지 못했던 아시리아인들은 반 주지사에게 항의했다.

바슈칼레 국경 마을의 오스만 수비대는 카즘 카라베키르가 지휘했고, 지역 특수 조직 지부는 외메르 나지/Ömer Nacitr가 지휘했다. 러시아군은 1914년 11월 바슈칼레와 사라이를 점령했고 며칠 동안 두 곳을 점령했다. 오스만군에 의해 재탈환된 후, 그 도시의 현지 기독교인들은 실제 협력과 비례하지 않게 협력자로 처벌받았다. 헌병대, 하미디예 불규칙군, 쿠르드 자원병으로 구성된 지역 오스만군은 고지대의 아시리아 부족을 공격할 수 없었고, 평원의 무장 불량한 기독교 마을에 대한 공격에 국한했다. 그 지역에서 온 난민들은 러시아군에게 "가와르와 바슈칼레의 거의 모든 남성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고 말했다. 1915년 5월, 바슈칼레에서 퇴각하는 오스만군은 시이르트로 이동하기 전에 수백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을 학살했다.

=== 전쟁 준비 ===

마르 시문은 저지대 아시리아인 학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지대 부족들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우르미아의 러시아 영사관에서 아시리아 통역관으로 일하는 아가 페트로스를 통해 러시아 당국과 연락을 취했다. 시문은 1914년 12월, 아시리아인들을 오스만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마르딘에서 파견된 오스만 관리 메흐메드 셰피크 베이를 만나기 위해 바슈칼레로 갔다. 셰피크는 아시리아인들이 러시아 편에 서지 않고 오스만 정부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서면 약속을 대가로 보호와 돈을 약속했다. 부족장들은 제안을 고려했지만 거부했다.

1915년 1월, 쿠르드족은 쿠드샤니스에서 아시리아 부족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총대주교의 여동생인 수르마 다바이트 마르 시문은 다음 달 300명의 병사와 함께 쿠드샤니스를 떠났다. 1915년 초, 하카리 부족은 대규모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성과 아이들을 상부 티아리의 챔바 지역으로 보내고 전투 요원만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5월 10일, 아시리아 부족은 만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또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6월, 마르 시문은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갔다. 그는 모얀지크 (살마스 계곡)에서 표도르 체르노주보프 장군을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총대주교와 아가 페트로스는 6월 21일 직전에 살마스에서 러시아 영사 바실 니키틴을 만나기도 했지만, 약속된 러시아의 지원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5월, 아시리아 전사들은 반 공방전을 구원하기 위해 급파된 러시아 군대의 일부였으며, 모술 주지사 하이데르 베이에게 하카리 침략 권한이 주어졌다. 탈라트는 그에게 아시리아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하며 "우리는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이 민족 청소 작전은 엔베르, 탈라트, 오스만 군 및 민간 당국에 의해 조정되었다. 침략을 합법화하기 위해 율라메르크, 가와르, 셰민난 지역은 일시적으로 모술 주로 이관되었다. 오스만 군대는 특정 목표물에 대항하여 현지 쿠르드 부족과 합류했다. 쿠르드족의 오라마르 부족의 수토 아가는 동쪽에서 지루, 데즈, 바즈를 공격했다. 사이드 아가는 하부 티아리의 계곡을 공격했고, 이스마엘 아가는 상부 티아리의 챔바를 목표로 삼았으며, 상부 베르와르 에미르는 서쪽에서 아시타, 리잔 계곡, 하부 티아리를 공격했다.

=== 고지대 침공 ===

공동 포위 작전은 6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이 작전 초기에 여러 쿠르드 부족들이 질루 부족을 공격했으며, 역사적인 유물을 소장하고 있던 4세기 교회인 마르 자야가 파괴되었다. 줄라메르크와 모술에 주둔한 오스만 군대는 6월 23일 티아리를 공동 공격했다. 하이달은 먼저 아쉬타와 사레스피도 마을을 공격했고, 이후 터키인과 쿠르드인 3천 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티아리와 트쿠마 사이의 산길을 공격했다. 아시리아인들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생명과 탄약의 지속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침략자들이 보유한 독일제 소총, 기관총, 포병을 갖추지 못했다.

7월에 마르 시문은 말리크 코샤바와 야왈라 주교를 페르시아타브리즈로 보내 러시아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쿠르드 바르자니 부족은 오스만 군대를 지원하여 트쿠마, 티아리, 질루, 바즈를 초토화시켰다. 이 작전 기간 동안 오스만 군대는 포로를 잡지 않았다. 마르 시문의 형제 호르무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부하던 중 체포되었고, 6월 말 탈라트는 마르 시문이 항복하지 않으면 호르무즈의 목숨을 위협하여 아시리아 부족의 항복을 얻으려 했다. 아시리아인들은 거부했고, 호르무즈는 살해되었다.

수적으로 열세하고 무기가 부족했던 아시리아인들은 식량 없이 더 높은 산으로 후퇴했고, 그들의 집, 농장, 가축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9월까지 대부분이 했던 페르시아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러시아 군대에 합류했다. 1915년 전투 동안 아시리아인들의 유일한 전략적 목표는 방어였고, 오스만의 목표는 아시리아 부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귀환을 막는 것이었다.

4. 1. 1. 저지대 아시리아인 학살

1914년 8월, 국경 근처 9개 마을의 아시리아인들은 오스만 군대에 합류를 거부한 후 페르시아로 피난을 강요당했고 그들의 마을은 불탔다. 1914년 10월 26일, 오스만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기 며칠 전, 오스만 내무부 장관 탈라트 파샤는 반 주 (하카리를 포함) 주지사인 제브데트 베이에게 전보를 보냈다. 페르시아에서 계획된 오스만 공격에서 하카리 아시리아인의 충성심에 의문이 제기되었다. 탈라트는 페르시아 국경 근처에 살고 있는 아시리아인들을 무슬림과 함께 서쪽으로 더 멀리 이주시키고 재정착시키라고 명령했다. 각 재정착지에는 20명 이상의 아시리아인이 살 수 없도록 하여 그들의 문화, 언어 및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파괴하도록 했다.

고트는 이 명령을 사이포의 시작으로 인용했다. 반 정부는 이 명령을 수행할 병력 부족으로 인해 이행할 수 없다고 보고했으며, 11월 5일까지 예상된 아시리아인들의 불안은 현실화되지 않았다.[1] 율라메르크와 가와르의 아시리아인들은 체포되거나 살해되었고, 오스만 정규군은 그들의 명령 불복종에 대한 보복으로 하카리 전역의 아시리아 마을을 공격했다. 1914년 12월까지 이 사건에서 정부의 역할을 알지 못했던 아시리아인들은 반 주지사에게 항의했다.

바슈칼레 국경 마을의 오스만 수비대는 카즘 카라베키르가 지휘했고, 지역 특수 조직 지부는 외메르 나지/Ömer Nacitr가 지휘했다. 러시아군은 1914년 11월 바슈칼레와 사라이를 점령했고 며칠 동안 두 곳을 점령했다. 오스만군에 의해 재탈환된 후, 그 도시의 현지 기독교인들은 실제 협력과 비례하지 않게 협력자로 처벌받았다. 헌병대, 하미디예 불규칙군, 쿠르드 자원병으로 구성된 지역 오스만군은 고지대의 아시리아 부족을 공격할 수 없었고, 평원의 무장 불량한 기독교 마을에 대한 공격에 국한했다. 그 지역에서 온 난민들은 러시아군에게 "가와르와 바슈칼레의 거의 모든 남성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고 말했다. 1915년 5월, 바슈칼레에서 퇴각하는 오스만군은 시이르트로 이동하기 전에 수백 명의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을 학살했다.

4. 1. 2. 전쟁 준비

마르 시문은 저지대 아시리아인 학살에 대해 알게 되었고, 고지대 부족들이 다음 차례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우르미아의 러시아 영사관에서 아시리아 통역관으로 일하는 아가 페트로스를 통해 러시아 당국과 연락을 취했다. 시문은 1914년 12월, 아시리아인들을 오스만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마르딘에서 파견된 오스만 관리 메흐메드 셰피크 베이를 만나기 위해 바슈칼레로 갔다. 셰피크는 아시리아인들이 러시아 편에 서지 않고 오스만 정부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서면 약속을 대가로 보호와 돈을 약속했다. 부족장들은 제안을 고려했지만 거부했다.

1915년 1월, 쿠르드족은 쿠드샤니스에서 아시리아 부족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총대주교의 여동생인 수르마 다바이트 마르 시문은 다음 달 300명의 병사와 함께 쿠드샤니스를 떠났다. 1915년 초, 하카리 부족은 대규모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여성과 아이들을 상부 티아리의 챔바 지역으로 보내고 전투 요원만 남겨두기로 결정했다.

5월 10일, 아시리아 부족은 만나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전쟁(또는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6월, 마르 시문은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페르시아로 갔다. 그는 모얀지크 (살마스 계곡)에서 표도르 체르노주보프 장군을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총대주교와 아가 페트로스는 6월 21일 직전에 살마스에서 러시아 영사 바실 니키틴을 만나기도 했지만, 약속된 러시아의 지원은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5월, 아시리아 전사들은 반 공방전을 구원하기 위해 급파된 러시아 군대의 일부였으며, 모술 주지사 하이데르 베이에게 하카리 침략 권한이 주어졌다. 탈라트는 그에게 아시리아인들을 몰아내라고 명령하며 "우리는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라고 덧붙였다. 이 민족 청소 작전은 엔베르, 탈라트, 오스만 군 및 민간 당국에 의해 조정되었다. 침략을 합법화하기 위해 율라메르크, 가와르, 셰민난 지역은 일시적으로 모술 주로 이관되었다. 오스만 군대는 특정 목표물에 대항하여 현지 쿠르드 부족과 합류했다. 쿠르드족의 오라마르 부족의 수토 아가는 동쪽에서 지루, 데즈, 바즈를 공격했다. 사이드 아가는 하부 티아리의 계곡을 공격했고, 이스마엘 아가는 상부 티아리의 챔바를 목표로 삼았으며, 상부 베르와르 에미르는 서쪽에서 아시타, 리잔 계곡, 하부 티아리를 공격했다.

4. 1. 3. 고지대 침공

공동 포위 작전은 6월 11일에 시작되었다. 이 작전 초기에 여러 쿠르드 부족들이 질루 부족을 공격했으며, 역사적인 유물을 소장하고 있던 4세기 교회인 마르 자야가 파괴되었다. 줄라메르크와 모술에 주둔한 오스만 군대는 6월 23일 티아리를 공동 공격했다. 하이달은 먼저 아쉬타와 사레스피도 마을을 공격했고, 이후 터키인과 쿠르드인 3천 명으로 구성된 원정대가 티아리와 트쿠마 사이의 산길을 공격했다. 아시리아인들은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생명과 탄약의 지속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침략자들이 보유한 독일제 소총, 기관총, 포병을 갖추지 못했다.

7월에 마르 시문은 말리크 코샤바와 야왈라 주교를 페르시아타브리즈로 보내 러시아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쿠르드 바르자니 부족은 오스만 군대를 지원하여 트쿠마, 티아리, 질루, 바즈를 초토화시켰다. 이 작전 기간 동안 오스만 군대는 포로를 잡지 않았다. 마르 시문의 형제 호르무즈는 콘스탄티노플에서 공부하던 중 체포되었고, 6월 말 탈라트는 마르 시문이 항복하지 않으면 호르무즈의 목숨을 위협하여 아시리아 부족의 항복을 얻으려 했다. 아시리아인들은 거부했고, 호르무즈는 살해되었다.

수적으로 열세하고 무기가 부족했던 아시리아인들은 식량 없이 더 높은 산으로 후퇴했고, 그들의 집, 농장, 가축들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에게는 9월까지 대부분이 했던 페르시아로 도망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며 러시아 군대에 합류했다. 1915년 전투 동안 아시리아인들의 유일한 전략적 목표는 방어였고, 오스만의 목표는 아시리아 부족을 격파하고 그들의 귀환을 막는 것이었다.

5. 아제르바이잔의 오스만 점령

1903년, 러시아는 페르시아에 31,700명의 아시리아인이 살고 있다고 추정했다. 쿠르드족 이웃들의 공격에 직면한 오스만-페르시아 국경 지역의 아시리아 마을들은 자위대를 조직했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에는 무장 상태가 양호했다. 1914년, 러시아에 대한 전쟁 선포 전에 오스만군은 페르시아로 국경을 넘어 기독교 마을을 파괴했다. 1914년 9월 말과 10월에 대규모 공격이 많은 아시리아 마을을 대상으로 했고, 공격자들은 우르미아에 접근했다.

오스만군의 공격으로 인해 국경을 따라 살던 수천 명의 기독교인들이 우르미아로 도망쳤다. 다른 사람들은 오스만 제국 쪽 국경에서 도망쳐 페르시아에 도착했다. 오스만 정부의 1914년 11월 지하드 선포는 오스만-페르시아 국경 지역에서 지하디스트 감정을 자극하여 지역 쿠르드족에게 오스만 편을 들도록 설득했다. 11월에 페르시아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교전 당사자들은 이를 존중하지 않았다.

러시아는 오스만군의 공격에 대항하여 현지 러시아군을 강화하기 위해 아시리아 및 아르메니아 의용군 부대를 조직했다. 아가 페트로스가 이끄는 아시리아인들은 연합국을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우르미아에서 행진했다. 아가 페트로스는 나중에 러시아 관리들로부터 그들의 지원에 대한 대가로 전쟁 후 독립 국가를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말했다. 반 지역의 오스만 불규칙군은 페르시아 국경을 넘어 페르시아의 기독교 마을을 공격했다.

이에 페르시아는 호이, 타브리즈, 우르미아에 있는 오스만 영사관을 폐쇄하고 수니파 무슬림을 추방했다. 오스만 당국은 수천 명의 하카리 아시리아인을 페르시아로 추방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농촌 마을에 재정착한 아시리아인들은 러시아로부터 무장했다. 러시아 정부는 아제르바이잔의 아시리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이 오스만군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오스만 침략으로 인해 이 지역 사회가 겪게 될 위험에 무관심했다.

1915년 1월 1일, 러시아는 갑작스럽게 병력을 철수했다. 제브데트, 카짐 카라베키르, 오메르 나지가 이끄는 오스만군은 반대 없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했다. 러시아군 철수 직후, 지역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상대로 포그롬을 저질렀고, 오스만군은 기독교 민간인도 공격했다. 12개 이상의 마을이 약탈당했으며, 대규모 마을 중에서는 굴파샨만이 온전하게 남았다. 만행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퍼져 많은 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이 러시아 코카서스로 도망치게 되었다. 우르미아 북쪽에 있는 사람들은 도망칠 시간이 더 많았다. 몇몇 추정에 따르면 약 10,000명 또는 15,000명에서 20,000명이 러시아로 국경을 넘었다. 러시아군에 자원했던 아시리아인들은 종종 남겨진 가족들과 분리되었다. 약 15,000명의 오스만군이 1월 4일 또는 5일까지 우르미아에 도착했고, 1월 8일에는 딜만에 도착했다.

People, livestock and wagons
러시아가 1915년 1월 철수한 후 코카서스로 피난하는 기독교인들

5. 1. 학살

1915년 2월, 오스만군은 러시아의 반격으로 후퇴하면서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의용군에게 책임을 돌리고 광범위한 아르메니아 반란을 상상하면서, 제브데트는 의용군 부대의 잠재적인 미래의 힘을 줄이기 위해 기독교 민간인 대량 학살을 명령했다. 일부 현지 쿠르드 부족은 살인에 참여했지만, 다른 부족은 기독교 민간인을 보호했다. 일부 아시리아 마을도 공격을 받자 무장 저항에 나섰다. 페르시아 외무부는 오스만 정부에 잔혹 행위에 항의했지만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See caption
파괴된 기독교 마을과 난민의 탈출 경로가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Sayfo 지도


많은 기독교인들은 러시아 철수 중에 도망갈 시간이 없었고, 20,000명에서 25,000명의 난민이 우르미아에 갇혔다. 거의 18,000명의 기독교인이 도시의 장로교와 라자르파 선교부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선교 단지를 공격하는 것을 꺼렸지만,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 2월에서 5월 사이 오스만군이 철수했을 때, 우르미아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대량 처형, 약탈, 납치, 강탈이 자행되었다. 라자르파 단지에서 100명 이상의 남자가 체포되었고, 테르가웨르의 주교 마르 딩카를 포함한 수십 명이 2월 23일과 24일에 처형되었다. 우르미아 근처에서 대규모 시리아 마을인 굴파샨이 공격을 받았고, 남자들은 살해되었으며, 여자와 아이들은 납치되어 강간당했다.

살마스 계곡에는 기독교인을 보호할 선교사가 없었지만, 일부 지역 무슬림들이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딜만에서 페르시아 총독은 400명의 기독교인에게 피난처를 제공했고, 그는 오스만군에게 남자들을 넘겨주어야 했고, 오스만군은 그들을 마을 광장에서 처형했다. 오스만군은 딜만 남쪽에 있는 마을인 하페반에 등록을 요구하여 기독교인들을 유인하고, 처형을 위해 마을로 끌려온 딜만의 저명인사들을 체포했다. 2월 이틀 동안 하페반에서 기독교인 남성 전체를 포함하여 700~800명이 살해되었다. 살해는 제브데트가 이끄는 오스만군과 심코 시카크가 이끄는 지역 셰카크 쿠르드족에 의해 저질러졌다.

4월, 오스만군 사령관 할릴 파샤가 로완두즈에서 증원군을 이끌고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했다. 할릴과 제브데트는 오스만군에서 복무하는 아르메니아인과 시리아인 병사의 살해를 명령했고, 수백 명이 살해되었다. 1915년 초 아제르바이잔에서 벌어진 몇 차례의 다른 대량 학살에서 수백 명의 기독교인이 살해되었고, 여성들은 납치 및 강간의 대상이 되었으며, 70개 마을이 파괴되었다. 5월과 6월, 코카서스로 피난한 기독교인들은 마을이 파괴된 것을 발견하고 돌아왔다. 아르메니아와 아시리아 의용군은 보복으로 무슬림을 공격했다. 페르시아에서 철수한 후, 오스만군은 패배에 대해 아르메니아인과 아시리아인을 비난하며 오스만 기독교인을 상대로 보복했다. 1915년 3월 중순, 페르시아에서의 오스만군의 잔혹 행위는 국제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고, 이는 5월 24일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이를 규탄하는 선언을 촉발했다. 1916년 영국 정부가 출판한 오스만군의 잔혹 행위에 대한 목격자 보고서 모음인 블루 북은 684페이지 중 104페이지를 아시리아인에게 할애했다.

6. 비틀리스의 도살자 대대

1914년 11월 전쟁 발발 직전, 쿠르드족 반란이 진압된 후, 통합진보위원회(CUP) 정부는 이전의 하미디예 연대에 대한 반대를 뒤집고 반란 진압을 위해 이들을 모집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군사적 징발은 약탈로 변질되었으며, 2월에는 노동대 모집병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15년 7월과 8월, 비틀리스에서 온 2,000명의 칼데아인과 시리아 정교회 신자들이 러시아군이 반에서 철수하면서 코카서스로 도망쳤다.

미소를 짓지 않는 젊은 여성
시이르트에서 알레포로 강제 이주를 살아남은 칼데아 가톨릭 여성 달릴라


전쟁 전, 시이르트와 주변 지역은 주로 칼데아 가톨릭 신자들이 거주하는 기독교인 거주지였다. 가톨릭 사제 자크 레토레/Jacques Rhétoré프랑스어는 시이르트 지역(산자크)에 60,000명의 기독교인이 살고 있으며, 여기에는 15,000명의 칼데아인과 20,000명의 시리아 정교회 신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추정했다. 시이르트의 폭력은 6월 9일, 아르메니아, 시리아 정교회, 칼데아 성직자들과 칼데아 주교 아다이 셰르를 포함한 저명한 주민들의 체포와 처형으로 시작되었다.

페르시아에서 후퇴한 후 제브데트는 반을 포위했고, 8,000명의 군인과 함께 6월에 비틀리스주로 진군했는데, 그는 이들을 "도살자 대대"()라고 불렀다. 이 군대의 시이르트 도착은 더 많은 폭력을 초래했다. 구청장(무타사리프) 세르피첼리 힐미 베이와 시이르트 시장 압둘 레사크는 살인을 지지하지 않아 교체되었다. 시이르트의 40명의 지역 관리들이 학살을 조직했다.

한 달 동안 이어진 학살 동안, 기독교인들은 거리나 (약탈당한) 집에서 살해되었다. 시이르트의 칼데아 교구는 희귀한 필사본을 포함하여 파괴되었다. 학살은 비틀리스 주지사 압둘할리크 렌다, 경찰서장, 시장 및 기타 저명한 지역 주민들에 의해 조직되었다. 시이르트에서의 살인은 ''체테''에 의해 저질러졌고, 주변 마을들은 쿠르드족에 의해 파괴되었다. 많은 지역 쿠르드족 부족들이 연루되었다. 베네수엘라 용병 라파엘 데 노갈레스에 따르면, 학살은 러시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패배에 대한 복수로 계획되었다고 한다. 데 노갈레스는 CUP가 다른 증인들을 제거했기 때문에 할릴이 자신을 암살하려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가능한 한 빨리 시이르트를 떠나 시리아와 아르메니아 여성과 아이들의 강제 이주 행렬을 지나쳤다.

캡션을 참조하십시오
와디 와웰라 협곡에서 칼데아인 학살을 묘사한 레오나르도 데 망고의 1920년 그림


시이르트에서 400명만이 강제 이주되었고, 나머지는 무슬림에 의해 살해되거나 납치되었다. 이주민들(남자들은 처형되었으므로 여성과 아이들)은 시이르트에서 마르딘 방향으로 서쪽으로 또는 모술 방향으로 남쪽으로 강제로 행진해야 했고, 경찰의 공격을 받았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안, 그들의 옷을 포함한 소지품은 지역 쿠르드족과 터키인에 의해 도난당했다. 따라갈 수 없는 사람들은 살해되었다. 매력적으로 보이는 여성들은 경찰이나 쿠르드족에 의해 납치되어 강간당하고 살해되었다. 쿠르드족의 공격과 강도 행위가 벌어진 장소 중 하나는 마르딘 북동쪽의 사우로 카자에 있는 와디 와웰라 협곡이었다. 마르딘에 도달한 이주민은 없었고, 원래 7,000~8,000명 중 50~100명의 칼데아인만이 모술에 도착했다. 시이르트의 세 개의 아시리아 마을—덴타스, 피로제, 그리고 헤르테빈—은 사이포에서 살아남아, 주민들이 이주한 1968년까지 존재했다.

시이르트를 떠난 후 제브데트는 비틀리스로 이동하여 6월 25일에 도착했다. 그의 군대는 남자들을 죽였고, 여성과 소녀들은 터키인과 쿠르드족에게 노예로 잡혔다. 시리아 정교회는 비틀리스주에서 주로 쉬르반과 가르잔에서 8,500명의 손실을 추산했다.

7. 디야르바키르

1914년에서 1915년 겨울 동안 디야르바키르 지방의 기독교인들의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성 에프라임 교회가 파괴되었고, 디야르바키르 근처 카라바쉬 시리아 마을 출신의 젊은 남성 4명이 탈영 혐의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처형에 항의한 시리아인들은 경찰에게 곤봉으로 구타당했고, 그 중 두 명은 사망했다. 3월에는 많은 비무슬림 군인들이 무장 해제되어 도로 건설 노동대로 보내졌고, 가혹한 조건, 학대, 그리고 개별적인 살인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3월 25일, 청년 투르크당 창립 멤버인 메흐메트 레시드가 디야르바키르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반 아르메니아 폭력 기록 때문에 이 자리에 선택된 레시드는 30명의 특별 조직 구성원(주로 체르케스인)을 데려왔고, 이들은 석방된 죄수들과 합류했다. 많은 지방 관리들(카이마캄 및 지방 총독)은 레시드의 명령에 따르기를 거부했고, 결국 1915년 5월과 6월에 교체되었다. 쿠르드족 연맹은 시리아 고객을 살해하도록 허용하는 대가로 보상을 받았다. 정부 동맹(예: 밀리 및 데크슈리)이 이에 따랐고, 반 청년 투르크당 1914년 베디르한 반란을 지지했던 많은 이들이 기독교인 학살이 그들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기 때문에 입장을 바꾸었다. 라만 부족은 레시드의 열렬한 집행자였지만, 헤베르칸 지도부의 일부는 기독교인을 보호했다. 이것은 레시드의 집단 학살을 제한했고, 투르 아브딘에서 저항의 거점이 살아남도록 했다. 정부에 의해 박해받은 야지디의 일부는 기독교인을 도왔다. 디야르바키르의 살해자들은 일반적으로 지역 지도자들이 조직한 자원 봉사자였고, 자유 계약 가해자들은 약탈물을 분배했다. 일부 여성과 어린이들은 지역 쿠르드족 또는 아랍인 가족에게 납치되었다.

6월, 디야르바키르 시에서는 수천 명의 아르메니아인과 수백 명의 시리아인(모든 성직자 포함)이 체포되어 추방되었고 학살되었다. 비란셰히르 카자에서는 마르딘 서쪽에서 1915년 5월 말과 6월에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되었다. 시리아인들은 살해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잃었고 일부는 8월에 마르딘으로 추방되었다. 총 178개의 디야르바키르 인근 시리아 마을이 파괴되었고, 대부분의 주민들이 학살당했다.

== 비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에 대한 표적 ==

레시드의 지도 아래, 디야르베키르 지역에서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와 그리스 가톨릭 신자 등 반(反) 기독교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레시드는 중앙 정부의 뜻에 반하여 디야르베키르의 모든 기독교인에게 박해를 확대하려 하였고, 관련 정보를 통신에서 숨겼다. 레시드와 그의 마르딘 부관 베드리 베이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을 아르메니아인으로 분류하여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레시드는 쿠르드족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디야르베키르의 기독교인을 무슬림 정착민으로 대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이 쿠르드족에 의해 재정착되었다.

역사가 우우르 위밋 웅고르는 디야르베키르에서 "민병대가 개입한 학살의 대부분은 레시드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자크 레토레 신부는 디야르베키르 지역의 시리아 정교회가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자의 92%,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의 97%에 비해 인구의 72%를 잃었다고 추산했다.

독일 외교관들은 오스만 제국의 추방이 아르메니아인 외의 다른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독일 정부에 항의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교황청도 이에 항의했다. 1915년 7월 12일 탈라트 파샤는 레시드에게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취해진 조치는 다른 기독교인에게 절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보를 보냈으나, 시리아 기독교인을 학살하거나 학살에 반대하는 오스만 관리들을 암살한 레시드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1916년에는 앙카라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탈라트의 전보는 학살에 대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반대에 대한 대응으로 보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시행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가해자들은 7월 초에 아르메니아인과 시리아인을 분리하기 시작하여 전자를 살해했다. 그러나 시리아인의 살해는 8월과 9월에 재개되었다.

== 마르딘 지역 ==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한 옛 미디아트
2013년의 옛 미디아트


투르 아브딘에서 일부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멸절 시도에 맞서 싸웠다. 이는 오스만 관리들에게 반역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은 학살 피해자들을 반란군으로 보고했다. 미디아트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곳에서의 학살 소식을 듣고 저항을 고려했지만, 지역 시리아 정교회는 처음에는 이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6월 21일, 100명의 남성(대부분 아르메니아인과 개신교도)이 체포되어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키는 자백을 강요받고 고문당한 후 도시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정교회는 공포에 휩싸였다. 지역 주민들은 무기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고 정부 청사를 공격했으며, 전신선을 끊었다. 지역 아랍 및 쿠르드 부족들이 기독교인을 공격하기 위해 징집되었다. 수백 명의 기독교인을 죽인 격렬한 시가전 끝에 8월 초에 도시가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은 더 방어하기 쉬운 이와르도로 동쪽으로 도망쳤고, 그곳은 지역 야지디교도의 식량 지원을 받아 성공적으로 버텼다.

1915년 6월, 미디아트 ''카자''의 많은 시리아인들이 학살당했고, 다른 사람들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한 달 전, 지역 부족과 라만족은 미디아트에서 제지레로 가는 길에 있는 아자흐(오늘날의 이딜) 근처의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아자흐로 도망쳤다. 마을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을 받았고, 공격자들은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아자흐에서 더 많은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로 시리아 정교회인 마을은 당국의 요구에 따라 가톨릭과 개신교도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아자흐는 처음에는 8월 17일 또는 18일에 공격을 받았지만, 방어자들은 다음 3주 동안 이 공격과 그 이후의 공격을 격퇴했다.

마흐무트 카밀 파샤 장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엔베르는 11월에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제3군, 제4군, 제6군의 일부와 막스 에르빈 폰 쇼이프너리히터와 외메르 나지가 지휘하는 터키-독일 원정군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후자는 타브리즈 공격에서 방향을 전환했다. 아자흐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스만 관료들은 (증거 없이) 아르메니아 반군이 "지역의 무슬림 인구를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공격에 회의적이었던 쇼이프너는 독일인들의 참여를 금지했다. 독일 장군 콜마어 프라이어헤어 폰 데어 골츠와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대사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재상에게 독일의 저항 진압 지원 요청을 알렸다. 독일은 오스만 측이 독일이 반기독교 만행을 시작했다고 암시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방어자들은 11월 13-14일 밤에 오스만 군대를 기습 공격했고, 이는 마을 주민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저항을 종식시키는 휴전(독일의 로비)으로 이어졌다. 1915년 12월 25일, 오스만 정부는 "모든 시리아인을 추방하는 대신" "현재 위치에 가두어야 한다"고 포고했다. 이 시점에서 투르 아브딘의 대부분은 저항했던 마을과 수도원에서 피난처를 찾은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폐허가 되었다. 다른 시리아인들은 남쪽으로, 현재의 시리아와 이라크로 도망쳤다.

== 투르 압딘 ==

투르 아브딘에서 일부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멸절 시도에 맞서 싸웠다. 이는 오스만 관리들에게 반역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은 학살 피해자들을 반란군으로 보고했다. 미디아트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곳에서의 학살 소식을 듣고 저항을 고려했지만, 지역 시리아 정교회는 처음에는 이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6월 21일, 100명의 남성(대부분 아르메니아인과 개신교도)이 체포되어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키는 자백을 강요받고 고문당한 후 도시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정교회는 공포에 휩싸였다. 지역 주민들은 무기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고 정부 청사를 공격했으며, 전신선을 끊었다. 지역 아랍 및 쿠르드 부족들이 기독교인을 공격하기 위해 징집되었다. 수백 명의 기독교인을 죽인 격렬한 시가전 끝에 8월 초에 도시가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은 더 방어하기 쉬운 이와르도로 동쪽으로 도망쳤고, 그곳은 지역 야지디교도의 식량 지원을 받아 성공적으로 버텼다.

1915년 6월, 미디아트 ''카자''의 많은 시리아인들이 학살당했고, 다른 사람들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한 달 전, 지역 부족과 라만족은 미디아트에서 제지레로 가는 길에 있는 아자흐(오늘날의 이딜) 근처의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아자흐로 도망쳤다. 마을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을 받았고, 공격자들은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아자흐에서 더 많은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로 시리아 정교회인 마을은 당국의 요구에 따라 가톨릭과 개신교도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아자흐는 처음에는 8월 17일 또는 18일에 공격을 받았지만, 방어자들은 다음 3주 동안 이 공격과 그 이후의 공격을 격퇴했다.

마흐무트 카밀 파샤 장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엔베르는 11월에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제3군, 제4군, 제6군의 일부와 막스 에르빈 폰 쇼이프너리히터와 외메르 나지가 지휘하는 터키-독일 원정군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후자는 타브리즈 공격에서 방향을 전환했다. 아자흐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스만 관료들은 (증거 없이) 아르메니아 반군이 "지역의 무슬림 인구를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공격에 회의적이었던 쇼이프너는 독일인들의 참여를 금지했다. 독일 장군 콜마어 프라이어헤어 폰 데어 골츠와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대사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재상에게 독일의 저항 진압 지원 요청을 알렸다. 독일은 오스만 측이 독일이 반기독교 만행을 시작했다고 암시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방어자들은 11월 13-14일 밤에 오스만 군대를 기습 공격했고, 이는 마을 주민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저항을 종식시키는 휴전(독일의 로비)으로 이어졌다. 1915년 12월 25일, 오스만 정부는 "모든 시리아인을 추방하는 대신" "현재 위치에 가두어야 한다"고 포고했다. 이 시점에서 투르 아브딘의 대부분은 저항했던 마을과 수도원에서 피난처를 찾은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폐허가 되었다. 다른 시리아인들은 남쪽으로, 현재의 시리아와 이라크로 도망쳤다.

7. 1. 비 아르메니아 기독교인에 대한 표적

레시드의 지도 아래, 디야르베키르 지역에서는 그리스 정교회 신자와 그리스 가톨릭 신자 등 반(反) 기독교인 학살이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레시드는 중앙 정부의 뜻에 반하여 디야르베키르의 모든 기독교인에게 박해를 확대하려 하였고, 관련 정보를 통신에서 숨겼다. 레시드와 그의 마르딘 부관 베드리 베이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모든 기독교인을 아르메니아인으로 분류하여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레시드는 쿠르드족에 대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디야르베키르의 기독교인을 무슬림 정착민으로 대체할 계획을 세웠으나, 실제로는 이 지역이 쿠르드족에 의해 재정착되었다.

역사가 우우르 위밋 웅고르는 디야르베키르에서 "민병대가 개입한 학살의 대부분은 레시드의 직접적인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자크 레토레 신부는 디야르베키르 지역의 시리아 정교회가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자의 92%,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의 97%에 비해 인구의 72%를 잃었다고 추산했다.

독일 외교관들은 오스만 제국의 추방이 아르메니아인 외의 다른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독일 정부에 항의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교황청도 이에 항의했다. 1915년 7월 12일 탈라트 파샤는 레시드에게 "아르메니아인에 대해 취해진 조치는 다른 기독교인에게 절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고 전보를 보냈으나, 시리아 기독교인을 학살하거나 학살에 반대하는 오스만 관리들을 암살한 레시드에 대해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고, 1916년에는 앙카라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탈라트의 전보는 학살에 대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반대에 대한 대응으로 보내졌을 가능성이 있으며, 시행될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가해자들은 7월 초에 아르메니아인과 시리아인을 분리하기 시작하여 전자를 살해했다. 그러나 시리아인의 살해는 8월과 9월에 재개되었다.

7. 2. 마르딘 지역



투르 아브딘에서 일부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멸절 시도에 맞서 싸웠다. 이는 오스만 관리들에게 반역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은 학살 피해자들을 반란군으로 보고했다. 미디아트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곳에서의 학살 소식을 듣고 저항을 고려했지만, 지역 시리아 정교회는 처음에는 이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6월 21일, 100명의 남성(대부분 아르메니아인과 개신교도)이 체포되어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키는 자백을 강요받고 고문당한 후 도시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정교회는 공포에 휩싸였다. 지역 주민들은 무기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고 정부 청사를 공격했으며, 전신선을 끊었다. 지역 아랍 및 쿠르드 부족들이 기독교인을 공격하기 위해 징집되었다. 수백 명의 기독교인을 죽인 격렬한 시가전 끝에 8월 초에 도시가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은 더 방어하기 쉬운 이와르도로 동쪽으로 도망쳤고, 그곳은 지역 야지디교도의 식량 지원을 받아 성공적으로 버텼다.

1915년 6월, 미디아트 ''카자''의 많은 시리아인들이 학살당했고, 다른 사람들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한 달 전, 지역 부족과 라만족은 미디아트에서 제지레로 가는 길에 있는 아자흐(오늘날의 이딜) 근처의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아자흐로 도망쳤다. 마을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을 받았고, 공격자들은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아자흐에서 더 많은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로 시리아 정교회인 마을은 당국의 요구에 따라 가톨릭과 개신교도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아자흐는 처음에는 8월 17일 또는 18일에 공격을 받았지만, 방어자들은 다음 3주 동안 이 공격과 그 이후의 공격을 격퇴했다.

마흐무트 카밀 파샤 장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엔베르는 11월에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제3군, 제4군, 제6군의 일부와 막스 에르빈 폰 쇼이프너리히터와 외메르 나지가 지휘하는 터키-독일 원정군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후자는 타브리즈 공격에서 방향을 전환했다. 아자흐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스만 관료들은 (증거 없이) 아르메니아 반군이 "지역의 무슬림 인구를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공격에 회의적이었던 쇼이프너는 독일인들의 참여를 금지했다. 독일 장군 콜마어 프라이어헤어 폰 데어 골츠와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대사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재상에게 독일의 저항 진압 지원 요청을 알렸다. 독일은 오스만 측이 독일이 반기독교 만행을 시작했다고 암시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방어자들은 11월 13-14일 밤에 오스만 군대를 기습 공격했고, 이는 마을 주민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저항을 종식시키는 휴전(독일의 로비)으로 이어졌다. 1915년 12월 25일, 오스만 정부는 "모든 시리아인을 추방하는 대신" "현재 위치에 가두어야 한다"고 포고했다. 이 시점에서 투르 아브딘의 대부분은 저항했던 마을과 수도원에서 피난처를 찾은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폐허가 되었다. 다른 시리아인들은 남쪽으로, 현재의 시리아와 이라크로 도망쳤다.

7. 2. 1. 투르 압딘



투르 아브딘에서 일부 시리아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멸절 시도에 맞서 싸웠다. 이는 오스만 관리들에게 반역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은 학살 피해자들을 반란군으로 보고했다. 미디아트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곳에서의 학살 소식을 듣고 저항을 고려했지만, 지역 시리아 정교회는 처음에는 이를 지지하는 것을 거부했다. 6월 21일, 100명의 남성(대부분 아르메니아인과 개신교도)이 체포되어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키는 자백을 강요받고 고문당한 후 도시 밖에서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시리아 정교회는 공포에 휩싸였다. 지역 주민들은 무기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하고 정부 청사를 공격했으며, 전신선을 끊었다. 지역 아랍 및 쿠르드 부족들이 기독교인을 공격하기 위해 징집되었다. 수백 명의 기독교인을 죽인 격렬한 시가전 끝에 8월 초에 도시가 진압되었다. 생존자들은 더 방어하기 쉬운 이와르도로 동쪽으로 도망쳤고, 그곳은 지역 야지디교도의 식량 지원을 받아 성공적으로 버텼다.

1915년 6월, 미디아트 ''카자''의 많은 시리아인들이 학살당했고, 다른 사람들은 언덕으로 도망쳤다. 한 달 전, 지역 부족과 라만족은 미디아트에서 제지레로 가는 길에 있는 아자흐(오늘날의 이딜) 근처의 기독교 마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방어가 가능했기 때문에 아자흐로 도망쳤다. 마을들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공격을 받았고, 공격자들은 가장 남쪽에 있는 마을 중 하나인 아자흐에서 더 많은 준비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주로 시리아 정교회인 마을은 당국의 요구에 따라 가톨릭과 개신교도를 넘겨주는 것을 거부했다. 아자흐는 처음에는 8월 17일 또는 18일에 공격을 받았지만, 방어자들은 다음 3주 동안 이 공격과 그 이후의 공격을 격퇴했다.

마흐무트 카밀 파샤 장군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엔베르는 11월에 반란 진압을 명령했다. 제3군, 제4군, 제6군의 일부와 막스 에르빈 폰 쇼이프너리히터와 외메르 나지가 지휘하는 터키-독일 원정군이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후자는 타브리즈 공격에서 방향을 전환했다. 아자흐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 오스만 관료들은 (증거 없이) 아르메니아 반군이 "지역의 무슬림 인구를 잔혹하게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공격에 회의적이었던 쇼이프너는 독일인들의 참여를 금지했다. 독일 장군 콜마어 프라이어헤어 폰 데어 골츠와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대사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재상에게 독일의 저항 진압 지원 요청을 알렸다. 독일은 오스만 측이 독일이 반기독교 만행을 시작했다고 암시할 것을 우려하여 거절했다. 방어자들은 11월 13-14일 밤에 오스만 군대를 기습 공격했고, 이는 마을 주민들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저항을 종식시키는 휴전(독일의 로비)으로 이어졌다. 1915년 12월 25일, 오스만 정부는 "모든 시리아인을 추방하는 대신" "현재 위치에 가두어야 한다"고 포고했다. 이 시점에서 투르 아브딘의 대부분은 저항했던 마을과 수도원에서 피난처를 찾은 가족들을 제외하고는 폐허가 되었다. 다른 시리아인들은 남쪽으로, 현재의 시리아와 이라크로 도망쳤다.

8. 여파

8. 1. 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폭력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군이 철수하면서 하카리 지역 아시리아인들의 귀환이 불투명해졌다. 약 5,000명의 아시리아 및 아르메니아 민병대가 이 지역을 감시했지만, 권력을 남용하고 무슬림을 살해하기도 했다.

1918년 2월부터 7월까지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민족 폭력에 휩싸였다. 2월 22일, 우르미아에서 무슬림과 페르시아 총독이 기독교 민병대에 대항하여 봉기했으나, 아가 페트로스가 이끄는 기독교인들에게 잔혹하게 진압당했다. 3월 16일, 마르 시문과 그의 경호원들은 쿠르드족 수장 심코 시카크에 의해 살해되었고, 아시리아인들은 보복으로 페르시아 관리와 주민들을 살해했다. 쿠르드족은 종교와 민족에 관계없이 기독교인을 학살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6월 살마스와 7월 초 우르미아에서 기독교인 학살이 발생했고, 많은 아시리아 여성들이 납치되었다.

1918년 7월 오스만 제국이 침공하자, 아제르바이잔의 기독교 민병대는 오스만 군대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수만 명의 오스만 및 페르시아 아시리아인들은 하마단으로 피신했고, 오스만 침공 이후 토마 아우도 칼데아 대주교를 포함한 기독교인 살해와 우르미아 약탈이 뒤따랐다. 1919년 5월 24일, 페르시아에서 또 다른 반기독교 학살이 발생했다.

Assyrian refugees, with meager food
1915년 말 우르미아 인근의 티아리와 투흐마 출신 아시리아 난민들

8. 2. 이라크로의 추방

하마단으로 가는 동안 아시리아인들은 쿠르드 불규칙 부대의 괴롭힘을 받았고 일부는 과로로 사망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이다라바드 근처에서 사망했고, 오스만 군대와 쿠르드 불규칙 부대가 샤힌 데즈 산길 근처에서 매복하여 5,000명이 더 사망했다. 1918년 10월, 15,000명의 아르메니아인과 35,000명의 아시리아인이 바쿠바 (바그다드 근처) 난민 캠프에 재정착했다. 캠프의 상황은 열악했고, 약 7,000명의 아시리아인이 그곳에서 사망했다.

1920년, 바쿠바의 캠프는 폐쇄되었고 아시리아인들은 북쪽 미단으로 보내졌다. 약 4,500명의 아시리아인들이 이라크 북부의 두호크와 아크레 근처에 재정착했다. 그들은 위임 통치 이라크를 통치하는 영국을 위해 군인으로 일했지만, 영국은 아시리아인들을 더 안전한 지역으로 재정착시키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위임 통치가 끝난 후, 아시리아인들은 1933년 시멜 학살에서 살해되었다. 학살 이후, 프랑스는 24,000명에서 25,000명의 아시리아인이 시리아 북동부의 하부르 강을 따라 재정착하는 것을 허용했다. 다른 아시리아인들은 코카서스, 러시아, 또는 레바논으로 추방되었고, 소수는 미국, 캐나다, 남아메리카, 그리고 유럽으로 이민했다.

8. 3. 터키의 아시리아인

1915년 이후 하카리에는 수천 명의 아시리아인이 남아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 다른 아시리아인들이 돌아왔다. 영국군의 지원을 받은 아가 페트로스(Agha Petros)는 1920년 티아리(Tyari)와 트쿠마(Tkhuma)에서 아시리아인들을 이끌었으나, 바르와리 족장 라시드 베크(Rashid Bek)와 터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1924년 카즘 카라베키르(Kazim Karabekir)가 지휘하는 터키군에 의해 남아있는 아시리아인들은 다시 쫓겨났고, 산악 지역은 인구가 감소했다. 시이르트(Siirt)에는 이슬람화된 시리아인(주로 여성)들이 남겨졌고, 쿠르드화 (또는 아랍화)된 후손들이 여전히 그곳에 살고 있다.

생존자들은 재산을 잃고 토지 없는 농업 노동자가 되었고, 나중에는 도시의 하층민이 되었다. 인구가 감소한 기독교 마을에는 쿠르드족이나 코카서스 출신 무슬림들이 재정착했다. 학살 기간과 그 이후, 150개 이상의 교회와 수도원이 파괴되거나 모스크 등으로 개조되었다. 많은 필사본과 문화 유물이 파괴되었다.

1923년 이후, 지방 정치인들은 1915년 학살의 영향을 받지 않은 시리아 공동체(예: 아다나, 우르파 또는 아디야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반기독교 캠페인을 벌였다. 많은 사람들이 재산을 포기하고 시리아로 도망가 알레포, 카미실리 또는 하부르 지역에 정착해야 했다. 터키 민족주의자들과 교류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정교회가 전쟁 중에 박해를 받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을 포함하여, 시리아 정교회 총대주교청은 1924년 터키에서 추방되었다.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그리스인과 달리 아시리아인은 1923년 로잔 조약에서 소수 민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남은 인구는 쿠르드족 아가들에게 굴복하며 살았고, 이주를 강요하는 괴롭힘과 학대를 받았다. 터키 법은 도망친 사람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시민권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터키에 남아있는 많은 아시리아인들은 쿠르드족 아가로부터 재산을 재구매하거나 터키 시민권을 잃을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상당수의 아시리아인들은 1980년대까지 투르 압딘에 계속 살았다. 일부 학자들은 터키에서 아시리아인에 대한 지속적인 배제와 괴롭힘을 세이포의 연장선으로 묘사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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