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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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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프레트 요들은 1890년 독일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도 군 복무를 이어갔다. 2차 세계 대전 중 독일 국방군 총사령부 작전 과장, 작전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입안하고,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정치위원 명령 등에 서명했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서 부상을 입었으며, 종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쟁 범죄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사후 명예 회복 소송에서 무죄가 선언되었으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번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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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요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0년의 알프레트 요들
1940년의 요들
출생 이름알프레트 요제프 페르디난트 요들
출생일1890년 5월 10일
출생지뷔르츠부르크, 바이에른 왕국, 독일 제국
사망일1946년 10월 16일
사망지뉘른베르크 감옥, 뉘른베르크, 바이에른, 연합군 점령 독일
사망 원인교수형
국적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배우자이르마 그레핀 폰 불리온(1913년 결혼, 1944년 사별)
루이제 폰 벤다(1945년 결혼)
친척페르디난트 요들(형)
알프레트 요들 서명
알프레트 요들 서명
군사 경력
복무 기간1910년 – 1945년
소속 군대독일 제국 육군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독일 육군
최종 계급상급대장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훈장기사 철십자 훈장
주요 보직
직책국방군 작전부장
임기 시작1939년 9월 1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13일
직책국방군 총장
임기 시작1945년 5월 13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23일
이전빌헬름 카이텔
이후폐지
전쟁 범죄 판결
범죄평화에 대한 죄 공모
침략 전쟁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재판뉘른베르크 재판
형벌사형
집행교수형 집행

2. 생애

뮌헨의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03년부터 포병 장교로 복무했으며, 1차대전 중에는 서부전선동부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참모 장교로 근무했다.[45]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도 군 복무를 이어갔으며, 공화국 말기에는 루트비히 베크의 후원으로 소령이 되었다. 1938년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작전 과장을 맡았고, 2차대전 직전 소장으로 승진했다. 전쟁 초기 덴마크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성공적으로 입안하여 대장으로 진급했다.

1941년 독소전쟁 개전 후 히틀러의 비합리적인 작전 지시에 반대하며 격론을 벌이기도 했으나, 상관인 빌헬름 카이텔과 함께 소련군 정치위원 사살을 용인하는 정치위원 명령과 연합군 특공대의 포로 자격을 박탈하는 특공대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서에 서명하는 등 전쟁 범죄에 연루되었다.[45]

1944년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 당시 현장에서 부상을 입었으나 반란군에 대한 신속한 조치를 취해 히틀러로부터 특별 상이 기장을 받았다. 베를린 공방전에도 참여했으나, 패전 직전 플렌스부르크되니츠 내각으로 피신했다.

이후 되니츠의 특명을 받아 항복 협상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실패하고, 1945년 5월 7일 프랑스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45] 이 서명은 소련의 공식 허가 부재로 임시 항복으로 간주되었고, 다음날 베를린에서 카이텔이 서명한 문서가 정식 항복 문서가 되었다.

항복 후 1945년 5월 23일 연합군에 의해 전쟁범죄자로 체포되어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군인 신분을 부정당하고 계급장이 제거되었으며,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는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련군 포로 학살 관여 등 모든 기소 항목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특히 소련 측의 강한 요구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총살형을 원했으나 기각되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1953년 뮌헨 법원에서 명예 회복 소송 결과 잠시 무죄가 선언되었으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번복되어 유죄 판결이 유지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알프레트 요들(Alfred Jodl)은 1890년 5월 10일,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었던 바이에른 왕국(Königreich Bayern) 뷔르츠부르크(Würzburg)에서 예비역 포병 대위 요하네스 요들(Johannes Jodl)과 농민의 딸 테레제 바움게르틀러(Therese Baumgärtler) 사이에서 태어났다.[5] 그는 다섯 형제 중 셋째였으며,[6] 로마 가톨릭 신자로 자랐으나 나중에 신앙을 버렸다.[1] 요들 가문은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집안이었고,[7] 그의 남동생 페르디난트 요들(Ferdinand Jodl) 역시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다.[8] 그의 삼촌은 빈 대학교(University of Vienna)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프리드리히 요들(Friedrich Jodl)이었다.

1903년부터 1910년까지 뮌헨(München)에 있는 바이에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5][9] 1910년 졸업 후 제4 바이에른 야포연대에 사관후보생(Fähnrich|페른리히de)으로 입대했으며,[10][6] 1912년 10월 28일 소위(Leutnant|로이트난트de)로 정식 임관했다.[9][11][12] 1913년 9월, 슈바벤(Schwaben)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인 이르마 폰 불리온 백작 영애(Irma Gräfin von Bullion)와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신분 차이를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두 사람은 이를 무릅쓰고 결혼했다.[13] 요들은 이후 사별하고 1944년 재혼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제10 바이에른 야포병 연대(이후 제19 바이에른 야포병 연대로 개칭) 소속으로 서부 전선에 참전했다.[5][4] 그는 전투 중 두 차례 부상을 입었으며,[5] 1914년 11월 용감한 행동으로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6년 1월에는 중위(Oberleutnant|오버로이트난트de)로 진급했다.[9] 1917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Gemeinsame Armee) 제72 야포병 연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잠시 동부 전선에서 복무했다.[5][9] 1918년에는 다시 서부 전선으로 돌아와 참모 장교로 근무했다.[5] 전쟁 기간 동안 1급 철십자 훈장과 전상 훈장 흑장을 추가로 수여받았다.[9] 1918년 독일 제국이 패전한 후에도 축소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가방위군(Reichswehr)에 남아 직업 군인으로 계속 복무했다.

2. 2.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병력 규모가 10만 명으로 제한된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선발되어 군 복무를 이어갔다.[11]

1919년 6월에는 제22경포병연대 중대장이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제21포병연대로 자리를 옮겼다.[9] 1921년 7월부터 1922년 10월까지 뮌헨의 제7사단에서 참모 교육을 받았으며,[5][9] 1921년 9월에는 대위로 진급했다.[9] 이후 1922년 10월부터 1923년 10월까지 란츠베르크에 위치한 제7산악포병연대 제3대대에서 근무했다.[9] 이 시기, 국가사회주의 성향의 상관이었던 Konstantin Hierl|콘스탄틴 히어를de 대령을 깊이 존경했으며,[11] 아돌프 히틀러의 존재를 알게 되어 그를 영웅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14] 그러나 히어를이 육군 사령관 한스 폰 제크트 대장과의 갈등으로 군을 떠나게 되자, 요들도 국가사회주의 운동과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11]

1923년 10월 1일부터 1924년 10월 1일까지 베를린 대학교에 파견되어 참모 훈련을 받았다.[5][9] 1924년 10월부터 1927년 10월까지는 뮌헨 제7사단 참모로 근무했고,[9] 이후 1928년 10월까지 란츠베르크의 제7산악포병연대 포병중대 지휘관을 맡았다.[9] 1928년 10월부터 1932년 6월까지는 다시 제7사단 참모부에서 교관으로 활동했다.[9]

1931년 2월 1일에 소령으로 진급했다.[9] 1932년 6월부터는 국방성( Reichswehrministerium|라이히스베어미니스테리움de )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사실상의 참모본부 역할을 하던 병무국(Truppenamt) 작전과에 배속되었다.[9]

1933년 1월 30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 총리로 임명하자, 요들은 히틀러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15]

2. 3. 나치 독일 시기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독일 국총리로 임명된 후, 요들은 열렬한 히틀러 신봉자가 되었다.[15] 1933년 10월 1일에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1934년 11월부터 1935년 6월까지 터키군에 파견되었다.[9] 1935년 7월부터 국방성 국군국(Wehrmachtamt) 국토방위과(Landesverteidigung) 과장이 되어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 휘하에서 국방 계획 입안에 종사했으며,[5][4] 같은 해 8월 1일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9]

1938년 2월 블롬베르크 사건 이후 빌헬름 카이텔 포병대장을 총장으로 하는 국방군 최고사령부(OKW)가 신설되자, 히틀러의 신봉자로 알려진 요들은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국장에 임명되었다.[16] 그러나 1938년 10월부터 1939년 8월까지는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의 제44보병사단 포병사령관으로 잠시 전출되었다.[5][9] 1939년 4월 1일 소장으로 진급했고,[9]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23일 OKW 작전국장(1940년 서부전역 이후 작전부장으로 명칭 변경)으로 복귀하여[15] 처음으로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요들은 OKW 작전참모총장으로서 덴마크 침공과 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입안하고 작전을 지휘했다. 특히 1940년 4월 노르웨이 침공 당시 육군참모본부와 협의 없이 OKW 단독으로 작전을 진행하여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 등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15] 노르웨이 전투에서 나르비크에 상륙한 에두알트 디틀 부대의 보급로가 끊기자 히틀러는 철수를 고려했으나, 요들은 영국군 역시 취약하다며 철수에 반대하고 트론헤임을 통한 보급을 건의했다. 히틀러가 이를 받아들여 독일군은 노르웨이 전투에서 승리했다.[17] 이러한 작전 성공으로 요들은 1940년 7월 19일 두 계급 특진하여 대장으로 진급했다.[18] 그는 서부 전격전과 북아프리카 전투의 작전 기획에도 참여했으며, 프랑스 함락 이후 영국의 패배를 시간문제로 여겼다. 같은 해 12월 18일, 히틀러의 지령을 받아 바르바로사 작전 기획에 착수했다.

(앞줄, 왼쪽부터) 제국언론국장 오토 디트리히, 빌헬름 카이텔, 히틀러, 요들, 그리고 마르틴 보르만이 1940년 6월 펠젠네스트(Felsennest)의 총통지휘부에 있는 모습


1941년 독소전쟁 개전 후, 요들은 히틀러의 불합리한 작전 지시에 반대하며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1941년 6월 6일 소련군 정치장교에 대한 즉결 처형을 명령하는 정치위원 명령(코미사르 명령)과[45] 1942년 10월 28일 연합군 특공대 및 비정규 전투원의 포로 자격을 박탈하고 즉결 처형하도록 하는 특공대 명령(코만도 명령) 등 국제법과 교전 수칙을 위반하는 명령서에 서명했다.

1942년 9월 청색 작전(브라우 작전) 중, 히틀러의 명령을 따르지 않은 A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스트 원수를 독려하기 위해 캅카스 전선에 파견되었다.[19] 그러나 현지 상황을 보고 리스트 원수의 입장을 옹호하며 총통 명령 수행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하여 히틀러의 분노를 샀다.[20]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요들을 프리드리히 파울루스와 교체하려 했으나, 파울루스의 항복으로 무산되었다.[21]

1943년 1월 30일에는 황금 나치당원 배지를 수여받았고,[22] 같은 해 11월 8일 뮌헨에서 나치당 지도부 앞에서 동부 전선에서의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서부 방어를 위해 점령지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요새 건설과 군수 공장에 투입하도록 명령했다고 연설했다. 1944년 1월 30일 상급대장으로 진급했다.[23]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현장에 있다가 뇌진탕 등 경미한 부상을 입었으며, 반란군에 대한 신속한 초동 조치를 취한 공로로 히틀러로부터 특별 상이 기장을 받았다. 1945년 3월 7일, 1944년 4월 18일에 사망한 첫 부인 일마의 친구이자 육군총사령부 비서였던 루이제 카타리나 폰 벤다와 재혼했다.

1945년 5월 7일 랭스에서 빌헬름 옥세니우스와 한스-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 사이에 앉아 독일의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요들


전쟁 말기 베를린 공방전 때도 베를린에 남아 작전을 지휘했으나, 패전 직전 플렌스부르크되니츠 내각으로 피신했다. 1945년 5월 6일, 히틀러의 후임자 카를 되니츠로부터 철십자 훈장 기사십자장을 수여받았다.[3] 되니츠의 특명을 받아 동부전선의 잔류 부대가 서방 연합군에 항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휴전을 지연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나, 연합군에게 간파되었다.[2] 결국 1945년 5월 7일 프랑스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OKW를 대표하여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2][45] 이 서명은 소련의 공식 허가 부재로 임시 항복으로 간주되었고, 다음날 베를린에서 빌헬름 카이텔이 서명한 문서가 정식 항복 문서로 채택되었다. 5월 13일, 카이텔 원수가 체포된 후 요들은 그의 후임으로 OKW 총장이 되었다.[3] 항복 후 플렌스부르크에 머물렀으나, 5월 23일 연합군에 의해 내각 구성원 전체와 함께 체포되어 전쟁범죄자로 구속되었다.

2. 4. 종전 및 몰락

베를린 공방전 때도 베를린에 남아 작전을 지휘했으나, 패전 직전 플렌스부르크되니츠 내각으로 피신했다.[28]

1945년 5월 6일, 카를 되니츠 대통령의 명령으로 프랑스 랭스로 가서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항복 협상을 벌였다.[24] 되니츠는 가능한 한 항복 협상 시간을 끌어 최대한 많은 독일군 병사들이 소련군이 아닌 미국군이나 영국군 포로가 되도록 지시했다.[25] 요들은 되니츠의 특명을 받아 동부전선의 잔류 부대가 서방 연합군에 항복할 시간을 벌도록 휴전을 지연시키려 했으나, 연합군에게 간파되었다. 결국 5월 7일, 랭스의 연합군 사령부에서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를 대표하여 독일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25] 이 항복 문서는 즉시 발효되지 않고 48시간 후에 발효되었다.[25] 그러나 이 서명문은 소련 정부의 공식 허가를 얻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시 항복 문서로 취급되었고, 다음날 베를린에서 빌헬름 카이텔이 서명한 문서가 정식 항복 문서로 채택되었다.

1945년 5월 23일, 플렌스부르크 근처에서 영국군에 체포된 요들


항복 후 플렌스부르크의 되니츠 내각에 잔류했으나, 5월 23일 연합군에 의해 내각 구성원 전체가 체포되면서 전쟁범죄자로 구속되었다.[27] 요들은 이 체포에 동요했다고 전해진다.[28] 그는 다른 나치 고위 인사들과 함께 룩셈부르크의 바트 몬도르프 수용소로 보내졌다가,[28][29] 8월에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기 위해 뉘른베르크로 이송되었다. 이송 과정에서 미군 대령 버턴 앤드러스로부터 "너희들은 더 이상 군인이 아니다. 범죄자다."라는 선고와 함께 계급장을 강제로 제거당했다.[30]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요들은 평화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공모, 침략 전쟁의 계획, 개시 및 수행, 전쟁 범죄, 그리고 인도에 대한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주요 기소 사유는 코만도 명령과 코미사르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에 서명한 것, 그리고 소련군 포로 학살에 관여한 혐의 등이었다. 특히 1941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200만 명의 소련군 포로 중 최소 6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즉결 처형된 사실과 관련하여 요들은 책임을 추궁받았다. 요들은 "걷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걷지 않으려고 하는 자를 사살했을 뿐"이라고 변호했으나,[40] 수십만 명의 소련군 포로가 즉결 처형된 사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유대인을 포함한 덴마크 시민들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명령에 서명한 증거도 제시되었다.

재판 내내 요들은 자신은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하느님 앞에, 역사 앞에, 그리고 나의 국민 앞에"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나 프랑스 판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네 가지 기소 항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초 무기징역형이 거론되기도 했으나, 코미사르 명령 책임과 소련군 포로 학살 문제에 대해 소련 측이 강하게 사형을 주장하여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다. 요들은 상관이었던 카이텔과 마찬가지로 군인답게 총살형을 원했으나, 이 역시 소련 측 수석 판사 이오나 니키첸코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6년 10월 16일 처형 후 요들의 시신


1946년 10월 16일, 뉘른베르크 교도소에서 9번째로 교수형에 처해졌다.[39] 그의 마지막 말은 "나의 독일이여, 인사를 전합니다." (Ich grüße Dich, mein ewiges Deutschland|이히 그뤼세 디히, 마인 에비게스 도이칠란트de)였다고 전해진다.[40] 처형 시 그의 태도는 군인답게 당당했다고 한다.[40] 그의 유해는 다른 사형수 9명 및 자살한 헤르만 괴링의 유해와 함께 뮌헨의 오스트프리트호프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신나치즘에 의한 추모 장소화를 막기 위해 이자르 강의 지류인 벤츠바흐 강에 뿌려졌다.[41]

사후 1953년 2월 28일, 요들의 미망인이 제기한 명예 회복 소송에서 서독 뮌헨 법원은 "요들은 자신의 행동을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는 군사 작전으로만 제한했다"며 모든 기소 항목에 대해 무죄를 선언했다.[42] 그러나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같은 해 9월 3일 바이에른주 법무장관에 의해 무죄 판결이 취소되었다.[5] 이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3. 사후 논란

1953년, 요들의 미망인 루이제는 남편의 연금과 유산을 되찾기 위해 뮌헨에서 소송을 제기했다. 같은 해 2월 28일, 서독탈나치화 법원은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프랑스 측 판사였던 앙리 도네디외 드 바브르가 1949년 요들의 유죄 판결에 반대했던 점 등을 근거로, 요들의 국제법 위반 혐의에 대해 사후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미국 측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1953년 9월 3일, 바이에른 정치 해방 장관은 미국의 압력으로 인해 무죄 선고를 취소했다. 다만, 요들의 유산 상속 권리에 대한 무죄 판결의 효력은 유지되었다.

이 사건은 뉘른베르크 재판의 판결을 뒤집으려 한 서독 법원의 판단이 잘못되었는지(오심), 아니면 주권 국가의 사법적 판단에 미국이 개입한 월권 행위인지에 대한 논란을 남겼으나, 최종적으로 무죄 선고 번복 결정은 유지되었다.

4. 뉘른베르크 재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플렌스부르크 정부에 합류했으나, 1945년 5월 23일 연합군에 의해 내각 구성원 전체와 함께 체포되어 전쟁범죄자로 구속되었다.[45]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소련 측의 반대로 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군복의 계급장과 서훈 등이 모두 제거되었다.

요들은 침략 전쟁의 공모, 평화에 대한 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했으나, 소련군 정치위원에 대한 무차별 사살을 용인한 정치장교 명령과 연합군 특공대의 포로 자격 박탈 및 처형을 지시한 코만도 명령 등 국제법에 위배되는 명령서에 서명한 사실이 중요하게 다뤄졌다.[45] 특히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발생한 소련군 포로 대량 학살에 대한 책임 추궁과 함께 소련 측은 그의 사형을 강력히 주장했다.[45]

결국 모든 기소 항목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요들은 상관이었던 빌헬름 카이텔과 마찬가지로 군인으로서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으로 형이 집행되었다.[45]

4. 1. 기소 내용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구금 중인 요들(왼쪽)과 케이텔(오른쪽).


1945년 5월 23일,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영국군에 체포되어 캠프 애쉬캔으로 이송되었고,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의 국제군사재판소에 회부되었다.[3] 1945년 11월 20일 재판이 시작되었고, 요들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31]

  • 제1심리사항: 평화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공모
  • 제2심리사항: 침략 전쟁의 계획, 개시 및 수행
  • 제3심리사항: 전쟁 범죄
  • 제4심리사항: 인도에 대한 범죄


그에 대한 주요 혐의는 특정 종류의 포로를 체포 즉시 처형하도록 명령한 코만도 명령과 정치장교 명령에 서명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31] 특히 1941년 소련 포로에 대한 대량 학살 혐의가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당시 약 200만 명의 소련군 포로 중 최소 6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독일군의 즉결처분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31] 이에 대해 요들은 "걷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걷지 않으려고 하는 자들을 사살했을 뿐이다"라고 자신을 변호했으나, 수십만 명의 포로가 즉결 처형된 사실 앞에서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재판 중에는 불법 강제 추방과 처형 교사 혐의도 제기되었다. 유대인을 포함한 덴마크 시민들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명령에 그의 서명이 있었다는 증거가 제시되었다.[31] 또한 소련 측 증인으로 출석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소련 침공 작전 개시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피고로 빌헬름 카이텔과 함께 요들을 지목했다.[32]

요들은 재판 내내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무죄를 호소했고,[31] 그의 아내 루이제는 변호팀에 합류하여 연합군 검찰이 불리한 문서를 공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요들은 실제로 1933년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 관여했다는 일부 혐의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원은 조사된 증거를 바탕으로 그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프랑스 판사 앙리 도네디외 드 바브르의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31] 1946년 10월 1일, 네 가지 기소 항목 모두에 대해 유죄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은 "그의 행위는 군인으로서의 복종이라는 관념으로는 어떻게 해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명시했다.[34] 특히 소련 측은 코미사르 명령의 책임 등을 들어 사형을 강력히 주장했다.[31][34]

결국 요들에게는 사형이 선고되었고, 그는 판결에 강하게 반발하며 헤드폰을 벗어던지고 법정을 나섰다.[34] 요들은 상관이었던 카이텔과 마찬가지로 군인으로서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소련 측 수석 판사 이오나 니키첸코 육군 소장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31] 1946년 10월 16일, 계급장과 훈장이 모두 제거된 군복 차림으로 교수형에 처해졌다.[31] 그의 마지막 말은 Ich grüße Dich, mein ewiges Deutschland|나의 영원한 독일, 그대에게 경례를de 이었다고 전해진다.

4. 2. 재판 과정 및 결과



1945년 5월 23일, 플렌스부르크 정부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영국군에 체포되어 캠프 애시캔으로 이송되었고, 이후 뉘른베르크 재판의 국제군사재판소에 회부되었다.[3] 소련의 반대로 재판 당시 군인으로 인정받지 못해 군복의 계급장과 서훈이 모두 강제로 제거되었다. 요들은 평화에 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한 공모, 침략 전쟁의 계획, 개시 및 수행, 전쟁 범죄, 그리고 인도에 대한 범죄 등 네 가지 혐의로 기소되었다.

주요 기소 사유는 특정 종류의 포로를 체포 즉시 처형하도록 명령한 특공대 명령과 소련군 정치위원에 대한 무차별 사살을 용인하는 정치위원 명령에 서명한 것과 관련이 있었다. 특히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군 포로에 대한 대량 학살에 관여한 혐의가 제기되었다. 당시 독일군은 1941년 6월부터 12월까지 약 200만 명의 소련군 포로를 잡았는데, 이 중 최소 60만 명이 사망했으며 상당수는 즉결 처분으로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요들은 "걷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걷지 않으려고 하는 자를 사살했을 뿐이다"라고 변명했으나[45], 수십만 명의 포로가 즉결 처형된 사실 때문에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얻기 어려웠다. 이 외에도 유대인을 포함한 덴마크 시민들을 나치 강제 수용소로 이송하는 명령에 서명하는 등 불법 강제 추방과 처형 교사 혐의도 추가되었다.

재판 중 소련 측 증인으로 파울루스가 출석하여[31] 소련 침공 작전 개시에 적극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카이텔과 함께 요들을 지목했다.[32] 요들은 재판 내내 군인으로서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무죄를 호소했지만[34],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아내 루이제는 남편의 변호팀에 합류하여 변론을 도왔다.[36]

1946년 10월 1일, 판결에서 "그의 행위는 군인으로서의 복종이라는 관념으로는 어떻게 해도 변명할 수 없습니다"라는 판결과 함께 네 가지 혐의 모두 유죄가 선고되었다.[34] 프랑스 판사 앙리 돈네디외 드 바브르는 일부 혐의에 대해 반대 의견을 냈으나, 최종 판결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특히 소련 측은 정치위원 명령의 책임과 포로 학살 혐의를 들어 강력하게 사형을 주장했고, 결국 사형이 선고되었다. 요들은 판결에 불만을 표하며 헤드폰을 벗어던지고 법정을 나섰다.[34]

요들은 상관이었던 카이텔과 마찬가지로 군인으로서 총살형을 요구했으나, 소련 측 수석 판사 이오나 니키첸코의 반대로 교수형으로 결정되었다. 요들 자신과 그의 아내 루이제는 아이젠하워, 몬트고메리, 윈스턴 처칠 등에게 사면을 탄원했지만[35][36], 10월 13일 감형 탄원은 최종 기각되었다.[37]

1946년 10월 16일, 뉘른베르크 교도소에서 리벤트로프, 카이텔, 칼텐브루너, 로젠베르크, 프랑크, 프리크, 슈트라이히어, 자우켈에 이어 9번째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39] 그의 마지막 말은 Ich grüße Dich, mein ewiges Deutschland|나의 영원한 독일, 당신에게 경례합니다de였다고 전해진다.[40] 그의 시신은 자살한 괴링을 포함한 다른 사형수 10명의 시신과 함께 뮌헨 외곽의 오스트프리트호프에서 화장되었고, 유골은 신나치주의자들이 매장지를 성역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자르 강의 지류인 콘벤츠 강에 뿌려졌다.[41]

요들 가문의 묘 (키엠제 섬 프라우엔키엠제)


사후 1953년 2월 28일, 요들의 미망인이 제기한 명예 회복 소송 결과, 뮌헨 법원은 요들이 국제법을 위반하지 않는 군사 작전으로만 자신의 행동을 제한했다고 판단하여 모든 기소 항목에 대한 무죄를 선언했다.[42] 그러나 이는 뉘른베르크 재판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미국 정부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결국 같은 해 9월 3일 바이에른주 법무장관이 무죄 판결을 취소했다.[5] 이를 두고 미국의 월권 행위인지 서독의 오심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무죄 선언을 번복한 결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이후 바이에른의 프라우엔키엠제에 있는 가족 묘소에 그를 기리는 십자가가 세워졌으나, 이 또한 논란이 되어 2018년 지방 의회에서 제거 명령이 내려졌다가 2019년 법원에서 가족이 이름을 제거하는 조건으로 묘소 유지 권리를 인정받았다.

5. 평가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작전부장으로서 히틀러카이텔에 이어 사실상 OKW의 3인자 역할을 수행하며 육해공군 작전 조정을 담당했다.[4] 그는 덴마크와 노르웨이 침공 계획을 입안하는 등 주요 작전에 깊이 관여했으며, 특히 노르웨이 전투에서는 히틀러의 철수 명령에 반대하고 보급 계획을 건의하여 독일의 승리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7] 서부 전격전과 북아프리카 전투 작전 기획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그의 군사적 능력과는 별개로,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은 무겁게 평가된다. 그는 소련군 정치장교에 대한 무차별 사살을 용인하는 정치위원 명령과 연합군 특공대의 포로 자격 박탈 및 즉결 처형을 지시하는 코만도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서에 직접 서명했다. 또한 점령지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요새 건설과 군수 공장에 종사시키도록 명령했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1942년 브라우 작전 중에는 현지 부대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히틀러의 무리한 명령 수행이 어렵다는 보고를 하여 히틀러의 분노를 사기도 했지만,[20] 이는 그의 전쟁 범죄 책임을 면하게 하지는 못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 회부되어 전쟁범죄자로 기소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소련 측의 반대로 군복의 계급장과 훈장이 모두 제거되었으며, "군인으로서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특히 소련 측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그가 소련군 포로 대량 학살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강하게 추궁했다. 당시 약 200만 명의 소련군 포로 중 최소 60만 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상당수가 독일군의 즉결 처형으로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들은 "걷지 못하는 자가 아니라 걷지 않으려고 하는 자를 사살했을 뿐이다"라고 자신을 변호했으나, 당시 수십만 명의 소련군 포로가 즉결처형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소련 측은 강하게 사형을 주장해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총살형을 원했으나 소련측 수석 판사인 이오나 니키첸코 육군소장의 반대로 결국 계급장과 서훈, 훈장이 달리지 않은 군복 차림으로 교수형으로 집행되었다.

사후인 1953년 뮌헨 법원에서 그의 미망인이 제기한 소송 결과 잠시 무죄가 선언되기도 했으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곧 번복되었다. 이는 당시 서독의 사법권과 연합국의 영향력을 둘러싼 논란을 낳았지만, 최종적으로 무죄 선언 번복 결정은 유지되었다. 그의 지능 지수(IQ)는 127로 측정된 바 있다.[44]

참조

[1] 논문 Henry Gerecke and the Saints of Nuremberg 2021-02-08
[2] 서적 The End; Germany 1944–45 Penguin
[3] 웹사이트 After the Battle: The Flensburg Government https://www.39-45.or[...] Battle of Britain International Ltd. 2005-05-02
[4] 서적
[5] 웹사이트 Biographie: Alfred Jodl, 1890-1946 http://www.dhm.de/le[...] Deutsches Historishes Museum 2019-03-01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웹사이트 Alfred Jodl https://web.archive.[...] 2019-03-01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36] 서적 パーシコ 下巻
[37] 서적 パーシコ 下巻
[38] 서적 パーシコ 下巻
[39] 서적 マーザー
[40] 서적 マーザー
[41] 서적 パーシコ 下巻
[42] 서적 ヴィストリヒ
[43] 웹사이트 Detention report of Alfred Jodl, Chief of the Armed Forces High Command, 22/06/1945 - Yad Vashem Photo Archive http://collections.y[...] 2019-03-01
[44] 서적 第三帝国の演出者 ヘルマン・ゲーリング伝 下 早川書房 1977
[45] 논문 Henry Gerecke and the Saints of Nuremberg 20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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