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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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행비둘기는 북아메리카에 서식했던 멸종된 비둘기 종이다. 수컷은 청회색 머리와 장밋빛 아랫면, 암컷은 옅은 갈색 등을 특징으로 하는 성적 이형성을 보였다. 철새였으며, 여름에는 뉴욕주와 오대호 주변에서, 겨울에는 멕시코만 연안에서 번식했다. 18세기에는 50억 마리에 달했으나, 19세기 들어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개체수가 급감하여 1914년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마지막 개체인 마사가 죽으면서 멸종되었다. 현재는 DNA 분석을 통한 복원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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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비둘기 - [생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멸종 | 1914년 |
학명 | Ectopistes migratorius |
명명자 | (Linnaeus, 1766) |
이명 | Columba migratoria Linnaeus, 1766 Columba canadensis Linnaeus, 1766 Ectopistes migratoria Swainson, 1827 |
보존 상태 (IUCN 3.1) | EX (멸종) |
보존 상태 (TNC) | GX |
![]() | |
분류 | |
계 | 동물계 |
문 | 척삭동물문 |
강 | 조강 |
목 | 비둘기목 |
과 | 비둘기과 |
속 | Ectopistes (리ョコウバト속) |
형태 | |
크기 | 390~410 mm |
날개 길이 | 380~400 mm |
생태 | |
속도 | 100 km/h |
기타 | |
학문적 정보 | †Ectopistes Swainson 1827 (passenger pigeon) https://paleobiodb.org/classic/checkTaxonInfo?taxon_no=67689&is_real_user=1 |
참고 문헌 | Charles C. Mann, 1491: New Revelations of the Americas Before Columbus, Alfred A. Knopf, New York, 2005, pp. 315–318, chapter=The Artificial Wilderness, ISBN 1-4000-4006-X W. F. Henninger, A Preliminary List of the Birds of Middle Southern Ohio, The Wilson Bulletin, 14(3):77–93, 1902, https://www.jstor.org/stable/4153807, ISSN 0043-5643 |
2. 형태와 생태
여행비둘기는 성적 이형성을 보였다. 수컷의 머리와 윗면은 청회색, 아랫면은 장밋빛이었고, 머리 부분과 등은 청회색, 가슴은 포도색, 배는 흰색이며, 부리는 검고 다리는 적색이었다.[171][172] 목 아래쪽과 가슴은 짙은 분홍색-rufous를 띠었으며, 아래쪽으로 갈수록 옅은 분홍색으로 변하고, 배와 꼬리 덮개 깃털은 흰색으로 변했다. 꼬리 덮개에도 검은 반점이 몇 개 있었다. 부리는 검은색이었고, 발과 다리는 밝은 산호색 빨강이었다. 좁은 자줏빛-빨간색 눈테두리로 둘러싸인 carmine-빨간색 홍채를 가지고 있었다.[32] 암컷은 수컷보다 색상이 수수하며, 등은 옅은 갈색, 배는 회색이었다.[172] 이마, 머리, 목덜미에서 scapular까지 회갈색이었고, 목 측면의 깃털은 수컷보다 iridescence가 적었다. 목 아래쪽과 가슴은 황갈색 회색을 띠다가 배와 꼬리 덮개에서 흰색으로 발달했다. 상체는 더 갈색을 띠고 하체는 수컷보다 옅은 황갈색과 덜 루푸스였다.[38][32] 날개와 꼬리는 날카롭고 길었으며, 부리부터 꼬리까지의 전체 길이는 약 40cm 정도였다.[171][178][179][172]
이름 그대로 철새인 비둘기로, 여름의 번식지는 뉴욕에서 오대호 주변에 걸쳐 있었고, 월동지는 멕시코만 연안이 주였다.[178][179] 이동 속도는 시속 약 96km에 달했다.[171] 나무 한 그루에 많은 무리가 떼지어 번식하며,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위스콘신주의 번식지 약 2,200km2에 1억 3,600만 마리가 확인된 예도 있다.[171] 1810년에 켄터키주의 번식지 무리에서 22억 3,000만 마리 이상으로 추정된 기록도 있다.[171] 굵은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기도 했으며, 횃대 아래에는 눈처럼 분비물이 쌓였다고 한다.[171] 조류 박물화가 존 제임스 오듀본은 1838년의 일기에, 머리 위를 통과하는 여행비둘기의 무리가 3일 밤낮 동안 계속 날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71]
2. 1. 몸 색상
여행비둘기는 머리 부분과 등은 청회색, 가슴은 포도색, 배는 흰색이며, 부리는 검고 다리는 적색이다.[171][172] 수컷의 머리와 윗면은 청회색, 아랫면은 장밋빛이었다.[171][172] 암컷은 수컷보다 색상이 수수하며, 등은 옅은 갈색, 배는 회색이었다.[172] 날개와 꼬리는 날카롭고 길었으며, 몸 전체 길이는 약 40cm 정도였다.[171][178][179][172]여행비둘기는 크기와 색상에서 성적 이형성을 보였다. 목 아래쪽과 가슴은 짙은 분홍색-rufous를 띠었으며, 아래쪽으로 갈수록 옅은 분홍색으로 변하고, 배와 꼬리 덮개 깃털은 흰색으로 변했다. 꼬리 덮개에도 검은 반점이 몇 개 있었다. 부리는 검은색이었고, 발과 다리는 밝은 산호색 빨강이었다. 좁은 자줏빛-빨간색 눈테두리로 둘러싸인 carmine-빨간색 홍채를 가지고 있었다.[32] 성체 암컷은 수컷보다 약간 작았고, 전체적으로 수컷보다 더 칙칙했으며, 이마, 머리, 목덜미에서 scapular까지 회갈색이었고, 목 측면의 깃털은 수컷보다 iridescence가 적었다. 목 아래쪽과 가슴은 황갈색 회색을 띠다가 배와 꼬리 덮개에서 흰색으로 발달했다. 상체는 더 갈색을 띠고 하체는 수컷보다 옅은 황갈색과 덜 루푸스였다.[38][32]
이름 그대로 철새인 비둘기로, 여름의 번식지는 뉴욕에서 오대호 주변에 걸쳐 있었고, 월동지는 멕시코만 연안이 주였다.[178][179]
2. 2. 이동 습성
여행비둘기는 철에 따라 이동하는 새로, 여름의 번식지는 뉴욕에서 오대호 주변이었고, 월동지는 멕시코만 연안이었다.[178][179] 이동 속도는 시속 약 96km에 달했다.[171] 나무 한 그루에 많은 무리가 떼지어 번식하며,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위스콘신주의 번식지 약 2,200km2에 1억 3,600만 마리가 확인된 예도 있다.[171] 1810년에 켄터키주의 번식지 무리에서 22억 3,000만 마리 이상으로 추정된 기록도 있다.[171] 굵은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기도 했으며, 횃대 아래에는 눈처럼 분비물이 쌓였다고 한다.[171] 조류 박물화가 존 제임스 오듀본은 1838년의 일기에, 머리 위를 통과하는 여행비둘기의 무리가 3일 밤낮 동안 계속 날았다고 기록하고 있다.[171]3. 멸종
18세기 북아메리카 전역에는 50억 마리로 추정되는 여행비둘기가 서식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흑인, 빈곤층, 노예를 위한 식용, 사료, 깃털 채취 목적으로 남획이 이루어져 개체수가 급감했다. 당시 자본가들은 여행비둘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 여행비둘기 고기를 기차로 수송하는 운송업을 하기도 했다. 막대한 개체수 때문에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지로 인해 여행비둘기 보호는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았다.
여행비둘기 고기는 매우 맛있다고 알려져, 총, 새그물, 막대기를 사용해 많은 사람들이 포획을 실시했으며, 비둘기 사냥은 미 서부에서의 금 채취, 곡식 투기 등으로 벼락부자가 된 졸부에게는 일종의 '스포츠'였다. 여행비둘기 포획을 전문으로 하는 사냥꾼에 의해 조직적이고 대규모에 걸친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3만 마리를 사냥 대회에서 이기려고 죽인 사냥꾼도 있었다. 미국의 졸부들과 사냥꾼들은 여행비둘기를 생명을 가진 동물로서 존중하지 않고 놀이를 위한 장난감으로 여겼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보다 더 집중적인 방법으로 여행비둘기를 사냥했다.[121] 1565년 1월,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도니에르는 포트 캐롤라인 근처에서 몇 주 만에 약 10,000마리의 비둘기를 사냥했다고 기록했다.[113][114] 19세기 초, 상업적 사냥꾼들은 도시 시장에서 식량으로, 심지어 돼지 사료로 팔기 위해 새를 그물로 잡고 총으로 쏘기 시작했다.[118][135] 비둘기 고기가 인기를 얻자 상업적인 사냥이 엄청난 규모로 시작되었다.[118]
나그네비둘기는 너무 쉽게 쏘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아마추어 사냥꾼도 한 번의 산탄총 발사로 쉽게 6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119][120] 19세기 후반에는 수천 마리의 나그네비둘기가 스포츠 사격 산업에 사용하기 위해 잡혔다.[121][124] 비둘기는 트랩 사격과 같은 사격 토너먼트에서 살아있는 표적으로 사용되었다.[121][124] 한 대회에서 상품을 타려면 30,000마리의 새를 죽여야 했다.[73]
인간은 나그네비둘기를 잡고 죽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물, 터널 그물, 미끼 비둘기, 술에 적신 곡물 등이 사용되었다.[125][126][121][128][129][131] 둥지 군집에서 사냥하는 것도 흔한 방법이었으며, 심지어 나무를 잘라내거나 불을 질러 새끼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132][121][159][133] 유황을 태워 새들을 질식시키기도 했다.[134]
19세기 중반까지 철도와 전신 시스템은 비둘기 사냥을 상업화하는 데 기여했다.[135][124] 1874년에는 최소 600명이 비둘기 덫 사냥꾼으로 고용되었으며, 그 수는 1881년까지 1,200명으로 증가했다.[136][138] 비둘기는 너무 많이 잡혀서 1876년까지 죽은 비둘기 선적은 운송 비용을 회수할 수 없었다.[138] 나그네비둘기는 농업 해충으로 간주되기도 했다.[124]
1870년대에 들어서 여행비둘기의 개체수 감소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21][34][95] 특히 1874년과 1878년에 수백만 마리의 새가 대규모로 둥지를 틀고 학살된 이후 감소가 두드러졌다.[21][34][95] 1878년 미시간주 페토스키에서 마지막 대규모 둥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거의 5개월 동안 매일 5만 마리의 새가 죽었다.[21][34][95] 살아남은 성체들은 다른 곳에 둥지를 트려 했지만, 전문 사냥꾼들에게 번번이 죽임을 당했다.[95]
1856년 베네딕트 앙리 레부일은 여행비둘기의 운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유럽인 유입에 따른 생활 방식 변화로 인해 이 새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95]
여행비둘기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지만, 실효성이 없었다.[95] 1857년 오하이오 주 의회에 제출된 보호 법안은 "놀라울 정도로 다산"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141] 1870년대에 사격 사냥에 대한 대중의 항의가 있었지만, 학살을 막지는 못했다.[141] 미시간주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법적 조치가 통과되었지만 무시되었다.[124][137]
19세기 북아메리카에서 백인 인구가 급증하고, 전보 등의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졌다.[174] 또한, 식용, 사료, 깃털 채취를 위한 남획이 이루어져 개체수가 급감했다.[178][179] 북아메리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을 배려했지만,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은 그렇지 않았다.[173]
여행비둘기는 작은 집단에서는 번식할 수 없고, 번식기에 1년에 1개의 알만 낳는 습성이 있어 개체수 회복이 어려웠다.[175][176] 농업을 위한 산림 면적 축소로 서식지와 먹이(도토리, 밤, 블루베리 등)가 감소한 것도 멸종의 원인이었다.[171][178][179]
1906년 사냥을 마지막으로 야생 여행비둘기는 자취를 감췄다.[178][179][177] 야생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둥지와 알은 1895년 미니애폴리스 근처에서 수집되었다. 루이지애나에서 마지막 야생 개체는 1896년 애도비둘기 무리에서 발견되어 사냥당했다.[95] 1901년 3월 12일 일리노이주 오크포드 근처에서 수컷 한 마리가 죽임을 당해 박제되었고, 일리노이주 데카터의 밀리킨 대학교에 안치되었다.[142] 1902년 4월 3일 인디애나주 로렐 근처에서 수컷 한 마리가 총에 맞아 박제되었지만, 이후 파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142]
수년 동안 마지막으로 확인된 야생 여행비둘기는 1900년 3월 24일 오하이오주 파이크 카운티의 세전츠 근처에서 프레스 클레이 사우스워스라는 소년이 BB탄총으로 암컷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34][143] "Buttons"라는 별명이 붙은 이 표본은 오하이오 역사 협회에 기증되었다.[34][143] 조류학자 알렉산더 웨트모어는 1905년 4월 캔자스주 인디펜던스 근처에서 한 쌍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144][145] 1907년 5월 18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여행비둘기로 추정되는 무리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146][147] 1910년, 미국 조류학자 연맹은 둥지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3,000달러의 보상금을 제안했다.[148][149]
1914년 9월 1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마지막 여행비둘기 '마사'(Martha, 조지 워싱턴의 아내 마사의 이름을 땄다.)가 죽으면서 여행비둘기는 완전히 멸종했다.[171] 마사의 표본은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사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우리 안에서 일생을 보냈다.[171]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 중 하나인 신시내티 동물원은 1875년부터 여행비둘기를 길렀다.[150] 1909년, 신시내티 동물원에 있던 마사와 그녀의 두 수컷 동반자가 마지막으로 알려진 생존 여행비둘기가 되었다. 수컷 중 한 마리는 그해 4월경에 죽었고, 나머지 수컷인 조지는 1910년 7월 10일에 죽었다.[152] 마사는 멸종생물로서의 지위 때문에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녀의 짝을 찾는 사람에게 1,000달러의 보상금을 제공하면서 더 많은 방문객이 몰려들었다.[150][155] 마사는 1914년 9월 1일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우리 바닥에서 생명이 없는 채로 발견되었다.[37][156] 마사의 기념 동상은 신시내티 동물원 부지에 서 있다.[34][160]
여행비둘기의 고기는 매우 맛있다고 알려져 도시에서도 좋은 가격에 팔렸기 때문에, 총이나 막대기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획했다.[171]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여행비둘기의 고기를 식용으로 했지만,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에 대한 배려를 했다.[173]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은 무분별한 남획을 자행했다.[173] 19세기에 들어 통신 수단의 발달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지면서, 식용, 사료, 깃털 채취를 목적으로 한 남획으로 여행비둘기의 수는 급감했다.[174][178][179] 1878년 미시간주의 파토스키 산림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냥은 "파토스키 학살"이라고 불린다. 1890년대에는 그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고, 뒤늦게 보호가 시도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여행비둘기는 번식력이 약한 조류였으며, 작은 집단에서는 번식할 수 없고, 번식기는 1년에 1번이며, 1번의 산란 수는 1개뿐이었다.[175][176] 또한, 19세기 이후, 여행비둘기의 본래 서식지였던 삼림의 개발도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171][178][179]
이러한 여행비둘기의 표본에서 DNA를 추출하여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174]
최근 학계에서는 유럽인들의 출현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핵심종이었던 원주민들이 대거 사망하면서 생태계의 균형이 깨져 여행비둘기의 수가 과도하게 증가했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173] 이는 외래종이 아닌 토종 또한 생태계 교란으로 비정상적인 개체 수 변화를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여행비둘기는 그 수가 많지 않았으나 유럽인들의 출현을 계기로 대량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과도한 사냥으로 멸종했다는 것이다. 실제 발굴 사례를 보면, 원주민들은 아메리카들소를 주식으로 이용했고, 비둘기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을 배려했다.[173]
3. 1. 무분별한 남획
18세기 북아메리카 전역에는 50억 마리로 추정되는 여행비둘기가 서식했으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수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 흑인, 빈곤층, 노예를 위한 식용, 사료, 깃털 채취 목적으로 남획이 이루어져 개체수가 급감했다. 당시 자본가들은 여행비둘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 여행비둘기 고기를 기차로 수송하는 운송업을 하기도 했다. 막대한 개체수 때문에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지로 인해 여행비둘기 보호는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았다.여행비둘기 고기는 매우 맛있다고 알려져, 총, 새그물, 막대기를 사용해 많은 사람들이 포획을 실시했으며, 비둘기 사냥은 미 서부에서의 금 채취, 곡식 투기 등으로 벼락부자가 된 졸부에게는 일종의 '스포츠'였다. 여행비둘기 포획을 전문으로 하는 사냥꾼에 의해 조직적이고 대규모에 걸친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으며, 심지어 3만 마리를 사냥 대회에서 이기려고 죽인 사냥꾼도 있었다. 미국의 졸부들과 사냥꾼들은 여행비둘기를 생명을 가진 동물로서 존중하지 않고 놀이를 위한 장난감으로 여겼다.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원주민들보다 더 집중적인 방법으로 여행비둘기를 사냥했다.[121] 1565년 1월,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도니에르는 포트 캐롤라인 근처에서 몇 주 만에 약 10,000마리의 비둘기를 사냥했다고 기록했다.[113][114] 19세기 초, 상업적 사냥꾼들은 도시 시장에서 식량으로, 심지어 돼지 사료로 팔기 위해 새를 그물로 잡고 총으로 쏘기 시작했다.[118][135] 비둘기 고기가 인기를 얻자 상업적인 사냥이 엄청난 규모로 시작되었다.[118]
나그네비둘기는 너무 쉽게 쏘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아마추어 사냥꾼도 한 번의 산탄총 발사로 쉽게 6마리를 잡을 수 있었다.[119][120] 19세기 후반에는 수천 마리의 나그네비둘기가 스포츠 사격 산업에 사용하기 위해 잡혔다.[121][124] 비둘기는 트랩 사격과 같은 사격 토너먼트에서 살아있는 표적으로 사용되었다.[121][124] 한 대회에서 상품을 타려면 30,000마리의 새를 죽여야 했다.[73]
인간은 나그네비둘기를 잡고 죽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했다. 그물, 터널 그물, 미끼 비둘기, 술에 적신 곡물 등이 사용되었다.[125][126][121][128][129][131] 둥지 군집에서 사냥하는 것도 흔한 방법이었으며, 심지어 나무를 잘라내거나 불을 질러 새끼를 잡는 경우도 있었다.[132][121][159][133] 유황을 태워 새들을 질식시키기도 했다.[134]
19세기 중반까지 철도와 전신 시스템은 비둘기 사냥을 상업화하는 데 기여했다.[135][124] 1874년에는 최소 600명이 비둘기 덫 사냥꾼으로 고용되었으며, 그 수는 1881년까지 1,200명으로 증가했다.[136][138] 비둘기는 너무 많이 잡혀서 1876년까지 죽은 비둘기 선적은 운송 비용을 회수할 수 없었다.[138] 나그네비둘기는 농업 해충으로 간주되기도 했다.[124]
3. 2. 개체수 감소
1870년대에 들어서 여행비둘기의 개체수 감소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21][34][95] 특히 1874년과 1878년에 수백만 마리의 새가 대규모로 둥지를 틀고 학살된 이후 감소가 두드러졌다.[21][34][95] 1878년 미시간주 페토스키에서 마지막 대규모 둥지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거의 5개월 동안 매일 5만 마리의 새가 죽었다.[21][34][95] 살아남은 성체들은 다른 곳에 둥지를 트려 했지만, 전문 사냥꾼들에게 번번이 죽임을 당했다.[95]1856년 베네딕트 앙리 레부일은 여행비둘기의 운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며, 유럽인 유입에 따른 생활 방식 변화로 인해 이 새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했다.[95]
여행비둘기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 제정되기도 했지만, 실효성이 없었다.[95] 1857년 오하이오 주 의회에 제출된 보호 법안은 "놀라울 정도로 다산"하다는 이유로 기각되었다.[141] 1870년대에 사격 사냥에 대한 대중의 항의가 있었지만, 학살을 막지는 못했다.[141] 미시간주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법적 조치가 통과되었지만 무시되었다.[124][137]
19세기 북아메리카에서 백인 인구가 급증하고, 전보 등의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졌다.[174] 또한, 식용, 사료, 깃털 채취를 위한 남획이 이루어져 개체수가 급감했다.[178][179] 북아메리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을 배려했지만,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은 그렇지 않았다.[173]
여행비둘기는 작은 집단에서는 번식할 수 없고, 번식기에 1년에 1개의 알만 낳는 습성이 있어 개체수 회복이 어려웠다.[175][176] 농업을 위한 산림 면적 축소로 서식지와 먹이(도토리, 밤, 블루베리 등)가 감소한 것도 멸종의 원인이었다.[171][178][179]
3. 3. 멸종
1906년 사냥을 마지막으로 야생 여행비둘기는 자취를 감췄다.[178][179][177] 야생에서 마지막으로 기록된 둥지와 알은 1895년 미니애폴리스 근처에서 수집되었다. 루이지애나에서 마지막 야생 개체는 1896년 애도비둘기 무리에서 발견되어 사냥당했다.[95] 1901년 3월 12일 일리노이주 오크포드 근처에서 수컷 한 마리가 죽임을 당해 박제되었고, 일리노이주 데카터의 밀리킨 대학교에 안치되었다.[142] 1902년 4월 3일 인디애나주 로렐 근처에서 수컷 한 마리가 총에 맞아 박제되었지만, 이후 파괴되었다는 기록도 있다.[142]수년 동안 마지막으로 확인된 야생 여행비둘기는 1900년 3월 24일 오하이오주 파이크 카운티의 세전츠 근처에서 프레스 클레이 사우스워스라는 소년이 BB탄총으로 암컷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졌다.[34][143] "Buttons"라는 별명이 붙은 이 표본은 오하이오 역사 협회에 기증되었다.[34][143] 조류학자 알렉산더 웨트모어는 1905년 4월 캔자스주 인디펜던스 근처에서 한 쌍이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다.[144][145] 1907년 5월 18일,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여행비둘기로 추정되는 무리를 목격했다고 주장했다.[146][147] 1910년, 미국 조류학자 연맹은 둥지를 발견하는 사람에게 3,000달러의 보상금을 제안했다.[148][149]
1914년 9월 1일, 오하이오주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마지막 여행비둘기 '마사'(Martha, 조지 워싱턴의 아내 마사의 이름을 땄다.)가 죽으면서 여행비둘기는 완전히 멸종했다.[171] 마사의 표본은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마사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우리 안에서 일생을 보냈다.[171]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 중 하나인 신시내티 동물원은 1875년부터 여행비둘기를 길렀다.[150] 1909년, 신시내티 동물원에 있던 마사와 그녀의 두 수컷 동반자가 마지막으로 알려진 생존 여행비둘기가 되었다. 수컷 중 한 마리는 그해 4월경에 죽었고, 나머지 수컷인 조지는 1910년 7월 10일에 죽었다.[152] 마사는 멸종생물로서의 지위 때문에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녀의 짝을 찾는 사람에게 1,000달러의 보상금을 제공하면서 더 많은 방문객이 몰려들었다.[150][155] 마사는 1914년 9월 1일에 노환으로 사망했고, 우리 바닥에서 생명이 없는 채로 발견되었다.[37][156] 마사의 기념 동상은 신시내티 동물원 부지에 서 있다.[34][160]
여행비둘기의 고기는 매우 맛있다고 알려져 도시에서도 좋은 가격에 팔렸기 때문에, 총이나 막대기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획했다.[171]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여행비둘기의 고기를 식용으로 했지만,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에 대한 배려를 했다.[173]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들은 무분별한 남획을 자행했다.[173] 19세기에 들어 통신 수단의 발달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지면서, 식용, 사료, 깃털 채취를 목적으로 한 남획으로 여행비둘기의 수는 급감했다.[174][178][179] 1878년 미시간주의 파토스키 산림 지역에서 벌어진 대규모 사냥은 "파토스키 학살"이라고 불린다. 1890년대에는 그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고, 뒤늦게 보호가 시도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여행비둘기는 번식력이 약한 조류였으며, 작은 집단에서는 번식할 수 없고, 번식기는 1년에 1번이며, 1번의 산란 수는 1개뿐이었다.[175][176] 또한, 19세기 이후, 여행비둘기의 본래 서식지였던 삼림의 개발도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171][178][179]
이러한 여행비둘기의 표본에서 DNA를 추출하여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있다.[174]
3. 4. 핵심종 감소에 의한 대량 번식설
최근 학계에서는 유럽인들의 출현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핵심종이었던 원주민들이 대거 사망하면서 생태계의 균형이 깨져 여행비둘기의 수가 과도하게 증가했다는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173] 이는 외래종이 아닌 토종 또한 생태계 교란으로 비정상적인 개체 수 변화를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래 여행비둘기는 그 수가 많지 않았으나 유럽인들의 출현을 계기로 대량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과도한 사냥으로 멸종했다는 것이다. 실제 발굴 사례를 보면, 원주민들은 아메리카들소를 주식으로 이용했고, 비둘기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을 배려했다.[173]4. 분류
칼 폰 린네는 1758년 자신의 저서 ''자연의 체계''에서 애도 비둘기와 여행 비둘기 모두에게 ''Columba macroura''라는 이명을 부여했는데, 이는 그가 이 둘을 같은 종으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5][6][7] 린네의 복합적인 설명은 그 이전 시대의 두 책에 실린 새들에 대한 기록을 인용했다. 그중 하나는 마크 케이츠비가 1731년부터 1743년까지 출판한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및 바하마 제도의 자연사''에 실린 여행 비둘기에 대한 설명으로, ''Palumbus migratorius''라고 언급되었고, 이 종의 초기 삽화(
윌리엄 존 스웨인슨은 1827년 날개 길이와 쐐기 모양 꼬리 등의 특징을 근거로 여행 비둘기를 ''Columba'' 속에서 새로운 단형 속인 ''Ectopistes''로 옮겼다.[8] 국제 동물 명명 규약 위원회(ICZN)는 1955년에 전권을 사용하여 ''macroura''는 애도 비둘기에, ''migratorius''는 여행 비둘기에 부여되는 특정 이름으로 지정했다.[7][11]
4. 1. 분류학적 위치
칼 폰 린네는 1758년 자신의 저서 ''자연의 체계''에서 애도 비둘기와 여행 비둘기 모두에게 ''Columba macroura''라는 이명을 부여했는데, 이는 그가 이 둘을 같은 종으로 간주했기 때문으로 보인다.[5][6][7] 린네의 복합적인 설명은 그 이전 시대의 두 책에 실린 새들에 대한 기록을 인용했다. 그중 하나는 마크 케이츠비가 1731년부터 1743년까지 출판한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및 바하마 제도의 자연사''에 실린 여행 비둘기에 대한 설명으로, ''Palumbus migratorius''라고 언급되었고, 이 종의 초기 삽화()가 함께 실렸다.[5] 린네는 1766년판 ''자연의 체계''에서 여행 비둘기에는 ''C. migratoria''라는 이름을, 애도 비둘기에는 ''C. carolinensis''라는 이름을 사용하며 ''C. macroura''를 대체했다.[5][6][7]윌리엄 존 스웨인슨은 1827년 날개 길이와 쐐기 모양 꼬리 등의 특징을 근거로 여행 비둘기를 ''Columba'' 속에서 새로운 단형 속인 ''Ectopistes''로 옮겼다.[8] 국제 동물 명명 규약 위원회(ICZN)는 1955년에 전권을 사용하여 ''macroura''는 애도 비둘기에, ''migratorius''는 여행 비둘기에 부여되는 특정 이름으로 지정했다.[7][11]
4. 2. 진화
여행비둘기는 비둘기과(Columbidae)에 속하는 새였다.[12] 이 속의 가장 오래된 화석은 플리오세 잔클레 기(약 530만 년 ~ 360만 년 전)의 요크타운 층 퇴적물에서 발견된 상완골이다.[12] 형태학적으로는 ''Zenaida'' 비둘기와 가장 가까운 친척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애도비둘기(''Z. macroura'')와 유사했다.[20][13] 일부 학자들은 애도비둘기를 ''Ectopistes''속으로 분류하기도 했다.[14] 여행비둘기는 북아메리카 중부 평원의 숲에 적응한 ''Zenaida'' 비둘기로부터 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21]


그러나 여행비둘기는 ''Zenaida''속의 종들과 달리 몸집이 크고, 얼굴 줄무늬가 없으며, 성적 이형성을 보이고, 무지개색 목 깃털과 작은 알 낳는 수를 가졌다는 특징이 있었다.[15][17][16] 2002년 고대 DNA 분석에서는 뻐꾸기 비둘기 속인 ''Macropygia''의 자매 분류군으로 밝혀졌으나,[15][17][16] 2010년 연구에서는 북아메리카 서부의 띠비둘기(''P. fasciata'')를 포함한 신세계 ''Patagioenas'' 비둘기와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16] 이들은 ''Turacoena'', ''Macropygia'' 및 ''Reinwardtoena'' 속에 속하는 동남아시아 종들과 관련이 있으며,[16] 여행비둘기의 조상이 태평양을 건너거나 베링기아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신세계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6] 2012년 핵 DNA 분석을 통해 ''Patagioenas'' 비둘기와의 관계가 재확인되었으며, 이 결과는 여행비둘기와 구세계 친척들의 조상이 신세계의 신열대구에서 기원했을 수 있음을 시사한다.[17]
2012년 DNA 연구에 따른 여행비둘기의 가장 가까운 친척들 사이의 위치를 나타내는 분기도는 다음과 같다.[17]
- ''Macropygia'' (뻐꾸기 비둘기)
- ''Reinwardtoena''
- ''Turacoena''
- ''Columba'' (구세계 비둘기)
- ''Streptopelia'' (비둘기 및 목도리비둘기)
- ''Patagioenas'' (신세계 비둘기)
- '''여행비둘기''' ('''''Ectopistes'''''')
여행비둘기 표본의 DNA는 오래되어 열화되고 조각화된 경우가 많아, 게놈 분석 및 조립 방법을 연구하는 데 활용되기도 한다.[18][19] DNA 샘플은 주로 박물관 새 가죽의 발가락 패드에서 채취한다.[18][19] 여행비둘기는 알려진 아종이 없었다.[20] 찰스 오티스 휘트먼의 조류 사육장에서 여행비둘기와 바바리 비둘기(''Streptopelia risoria'') 사이의 잡종이 발생했지만, 그 후손은 불임이었다.[21][22]
4. 3. 어원
속명 ''Ectopistes''는 "돌아다니는" 또는 "방랑하는"으로 번역되며, 종명 ''migratorius''는 철새 습성을 나타낸다.[23] 따라서 전체 이명은 "철새 방랑자"로 번역될 수 있다. 영어 일반명 "passenger pigeon"은 프랑스어 단어 ''passager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이는 덧없이 "지나가다"라는 뜻이다.[38][24] 비둘기가 현존했을 때, "passenger pigeon"이라는 이름은 "야생 비둘기"와 상호 교환적으로 사용되었다.[25] 18세기에는 뉴 프랑스(현재의 캐나다)에서는 ''tourte''로 알려졌지만, 유럽의 프랑스인들에게는 ''tourtre''로 알려졌다. 현대 프랑스어에서 이 새는 ''tourte voyageuse'' 또는 ''pigeon migrateur'' 등으로 알려져 있다.[26]아메리카 원주민의 알곤킨 어족에서는 비둘기를 레나페에서는 ''amimi'', 오지브웨에서는 ''omiimiioj'', Kaskaskia 일리노이에서는 ''mimiamia''라고 불렀다.[27][28][29] 모호크의 ''ori'temoh''와 초크토의 ''putchee nashobacho'' 또는 "잃어버린 비둘기"와 같은 이름도 있었다.[30] 세네카 족은 비둘기를 ''jahgowasee''라고 불렀는데, 이는 그들의 부족에게 식량 공급원이었기 때문에 "큰 빵"을 의미했다.[121] 포타와토미 족의 추장 사이먼 포카곤은 그의 사람들이 비둘기를 ''O-me-me-wogpot''라고 불렀고, 유럽인들이 이 새에 대한 원주민 이름을 채택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31]
4. 4. 형태적 특징
여행비둘기는 머리와 등 부분은 청회색을 띠고, 가슴은 포도색, 배는 흰색이다.[171][172] 부리는 검은색이며 다리는 적색이다.[171][172] 날개와 꼬리는 날카롭고 길었다. 몸 전체 길이는 약 40cm 정도였다.[171][178][179][172]여행비둘기는 크기와 색상에서 성적 이형성을 보였다.[40] 무게는 260g에서 340g 사이였다.[40] 수컷은 머리, 목덜미, 뒷목은 청회색을 띠었으며, 목 측면과 상부에는 밝은 청동색, 보라색, 황금색 녹색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 무지개빛 깃털이 있었다.[32] 등 위쪽과 날개는 옅거나 잿빛 회색에 올리브 갈색을 띠었고, 날개 아래쪽은 회갈색이었다. 허리 아래쪽과 엉덩이는 짙은 청회색, 꼬리 윗부분은 회갈색이었다.[38][32] 윗날개 덮개와 중간 날개 덮개 깃털은 옅은 회색에 끝 부분에 불규칙한 검은 반점이 있었다. 주 날개 깃털과 이차 깃털은 검은 갈색이며, 이차 깃털 바깥쪽에 좁은 흰색 가장자리가 있었다. 두 개의 중심 꼬리 깃털은 갈색 회색이고 나머지는 흰색이었다.[38][32] 꼬리 패턴은 비행 시 눈에 띄는 검은 반점이 있는 흰색 바깥쪽 가장자리로 뚜렷했다.[32] 목 아래쪽과 가슴은 짙은 분홍색-rufous를 띠었으며, 아래쪽으로 갈수록 옅은 분홍색으로 변하고, 배와 꼬리 덮개 깃털은 흰색으로 변했다. 꼬리 덮개에도 검은 반점이 몇 개 있었다. 좁은 자줏빛-빨간색 눈테두리로 둘러싸인 carmine-빨간색 홍채를 가지고 있었다.[32]
암컷은 수컷보다 약간 작고 칙칙했으며,[32] 등은 옅은 갈색, 배는 회색이었다.[172] 이마, 머리, 목덜미에서 scapular까지 회갈색이었고, 목 측면의 깃털은 수컷보다 iridescence가 적었다. 목 아래쪽과 가슴은 황갈색 회색을 띠다가 배와 꼬리 덮개에서 흰색으로 변했다. 상체는 더 갈색을 띠고 하체는 수컷보다 옅은 황갈색과 덜 루푸스였다. 날개, 등, 꼬리는 수컷과 유사했지만, 주 깃털의 바깥쪽 가장자리는 황갈색 또는 루푸스 황갈색으로 가장자리가 덮여 있었다.[38][32] 날개에는 수컷보다 더 많은 반점이 있었다.[40] 꼬리는 수컷보다 짧았고, 다리와 발은 더 옅은 빨간색이었다. 홍채는 주황색 빨강이었고, 회청색의 노출된 눈테가 있었다.[38]
어린 여행비둘기는 plumage가 성체 암컷과 유사했지만, 날개에 반점이 없었고 머리, 목, 가슴이 더 짙은 갈색 회색이었다. 날개 깃털에는 옅은 회색 프린지(흰색 끝이라고도 함)가 있어 비늘 모양을 띠었다. 이차 깃털은 옅은 가장자리가 있는 갈색-검정색이었고, tertial feathers에는 루푸스색이 칠해져 있었다. 주 깃털에도 루푸스 갈색이 칠해져 있었다. 목 깃털에는 무지개빛이 없었다. 다리와 발은 칙칙한 빨강이었고, 홍채는 갈색이었으며, 좁은 카민색 테두리로 둘러싸여 있었다.[38][32]
여행비둘기는 비행 시 속도, 지구력, 기동성에 신체적으로 적응했으며, 일반적인 바위비둘기와 같은 전형적인 비둘기 모양의 유선형 버전으로 묘사되었다. 날개는 매우 길고 뾰족했으며, 꼬리는 길고 쐐기 모양이었다. 몸은 가늘고 좁았고, 머리와 목은 작았다.[38][34][35] Robert W. Shufeldt는 1914년 수컷 골격을 검사했을 때 다른 비둘기와 조류의 osteology를 구별할 만한 점이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했지만, Julian P. Hume은 2015년 더 자세한 설명에서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언급했다. 비둘기의 특히 큰 가슴 근육은 강력한 비행을 나타냈다. coracoid 뼈는 조류의 크기에 비해 컸으며, 다른 비둘기보다 더 곧은 샤프트와 더 강력한 관절 끝을 가지고 있었다. 쇄골은 더 날카로운 V자 모양이었고 더 강력했으며, 관절 끝이 확장되었다. 견갑골은 길고 곧고 튼튼했고, distal 끝이 확대되었다. 흉골은 다른 비둘기보다 매우 크고 튼튼했다.[35][36][37]
4. 5. 울음소리
여행비둘기 무리가 내는 소리는 매우 커서 수 마일 밖에서도 들을 수 있었으며, 크고 거칠고 음악성이 없는 소리로 묘사되었다.[38][60][73] 꼬꼬, 지저귐, 구구거림 등으로 묘사되기도 했으며, 노래보다는 낮은 음의 연속으로 여겨졌다.[38][60][73] 둥지를 지을 때는 꽥꽥거리는 소리를, 짝짓기를 할 때는 종소리 같은 소리를 냈으며,[60][73] 먹이를 먹는 동안에는 경계 신호를 보내기도 했다.[38]1911년, 미국의 행동 과학자 월리스 크레이그는 C. O. 휘트먼이 사육한 여행비둘기를 관찰하여 몸짓과 소리를 기록했다.[60] 크레이그는 이 기록을 통해 야생에 남아있는 여행비둘기를 식별하고자 했다.[60] 그는 "켁" 소리가 다른 비둘기의 주의를 끌기 위한 것이며, "키-키-키-키" 또는 "테트! 테트! 테트!" 소리는 짝이나 다른 생물에게 보내는 신호라고 설명했다.[60] "키호"는 부드러운 구구거림으로, 짝에게 하는 소리였다.[60] 둥지를 짓는 여행비둘기는 최소 8개의 음을 연이어 내며 "키호"로 끝맺었다.[60] 암컷은 더 조용하고 소리를 드물게 냈다.[60] 크레이그는 크고 날카로운 목소리와 "퇴화된" 음악성이 인구 밀도가 높은 군집 생활의 결과라고 제안했다.[60][39]

5. 분포 및 서식지
여행비둘기는 로키 산맥 동쪽 대부분의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되었는데, 대평원에서 동쪽의 대서양 해안까지, 북쪽으로는 캐나다 남부, 남쪽으로는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북부까지, 주로 서식지인 동부의 온대 낙엽 활엽수림과 일치한다.[38][40] 이 새가 특정 나무와 지형을 선호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개체 수를 유지할 수 있다면 한 가지 유형에 국한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38][40] 원래 캐나다 동부 및 중부 남부 지역에서 미국 동부의 캔자스, 오클라호마, 미시시피, 조지아까지 번식했지만, 주요 번식 지역은 온타리오 남부와 오대호를 거쳐 애팔래치아 산맥 북쪽의 주까지였다.[42]
철새인 여행비둘기는 여름에는 뉴욕에서 오대호 주변에서 번식했고, 겨울에는 멕시코만 연안에서 주로 서식했다.[178][179] 아칸소, 테네시,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텍사스, 멕시코만, 플로리다 북부까지 겨울을 보냈지만, 때때로 남부 펜실베이니아와 코네티컷까지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무리를 지어 겨울을 났다.[42] 큰 늪지, 특히 오리나무가 있는 곳을 선호했으며, 늪지가 없으면 소나무가 있는 숲 지역이 선호되는 둥지였다.[42]
심한 겨울 동안 여러 서부 주, 버뮤다, 쿠바, 멕시코를 포함하여 정상적인 범위를 벗어난 곳에서도 발견되었다.[42][41][69]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에서도 길 잃은 새의 기록이 있었지만, 이 새들은 탈출한 포획된 새이거나 기록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38][42] 130개 이상의 나그네비둘기 화석이 캘리포니아의 라 브레아 타르 핏을 포함하여 미국 25개 주에서 발견되었다.[42][43][44]
6. 생태 및 행동
여행비둘기는 매우 사회적인 종으로, 유목 생활을 하며 먹이와 쉼터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했다.[38] 이동 속도는 시속 약 96km에 이르렀다고 한다. 나무 한 그루에 많은 무리가 떼지어 번식하며, 거대한 무리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위스콘신주의 영소지 약 2,200km2에 1억 3,600만 마리가 확인된 예도 있다.[38] 1810년에 켄터키주의 영소지의 무리에서 22억 3,000만 마리 이상으로 추정된 기록도 있다. 굵은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러지기도 했다고 한다.
1831년 미국의 박물학자이자 예술가인 존 제임스 오듀본은 그의 저서 ''조류 전기(Ornithological Biography)''에서 1813년에 관찰한 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무리들은 하늘을 검게 만들 정도로 밀집되어 있었다. 무리는 바람이 부는 조건에서는 지상에서 1.0m에서 400m 높이까지 다양했다. 이러한 이동하는 무리들은 일반적으로 꼬이고 물결치는 좁은 열을 이루었고, 거의 모든 상상할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41] 숙련된 비행사인 여행비둘기는 이동 중에 평균 100km/h의 속도를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새는 날개가 몸에 가까워질수록 속도를 증가시키는 빠르고 반복적인 날갯짓으로 날았다. 그것은 열린 공간을 통과하는 것처럼 숲을 통과하는 데 똑같이 능숙하고 빨랐다. 무리는 또한 앞의 비둘기를 따라가는 데 능숙했으며, 포식자를 피하기 위해 함께 방향을 틀었다. 착륙할 때 비둘기는 착륙 직전에 날개를 반복적으로 퍼덕이다가 들어 올렸다. 비둘기는 땅 위에 있을 때 어색했으며, 경계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움직였다.[45]
여행비둘기는 모든 육상 조류 중에서 가장 사회적인 종 중 하나였다.[75] 인구의 절정에 30억에서 50억 마리로 추정되어 지구상에서 가장 많은 수를 가진 새였을 수 있으며, 연구자 알리 W. 쇼거는 미국 전체 육상 조류 개체수의 25~40%를 차지한다고 믿었다.[46] 1866년, 온타리오 남부의 한 무리는 1.5km 너비, 500km 길이로, 통과하는 데 14시간이 걸렸으며 35억 마리 이상의 새가 있었다고 묘사되었다.[48]
공동 숙박 종인 여행비둘기는 쉼터를 제공하고 엄청난 개체수를 무기한 유지할 수 있는 충분한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숙박 장소를 선택했다. 한 숙박 장소에서 보낸 시간은 인간의 박해 정도, 기상 조건 또는 기타 알려지지 않은 요인에 따라 달라졌을 수 있다. 숙박 장소는 몇 에이커에서 260km2 이상으로 크기와 범위가 다양했다. 일부 숙박 지역은 다음 해에도 재사용되었고, 다른 지역은 한 번만 사용되었다.[38] 여행비둘기는 너무 많은 수로 숙박하여 두꺼운 나무 가지조차 그 압력으로 부러졌다. 새들은 숙박하기 위해 서로의 등에 자주 쌓였다. 그들은 발을 숨기는 웅크린 자세로 쉬었다. 그들은 가슴 중앙의 깃털로 부리를 가린 채 꼬리를 45도 각도로 유지한 채 잠을 잤다.[45] 똥은 숙박 장소 아래에 0.3m 이상 깊이로 축적될 수 있었다.[60]
비둘기가 경계하게 되면, 몸과 꼬리에 맞춰 머리와 목을 뻗은 다음 원을 그리며 머리를 끄덕이는 경우가 많았다. 다른 비둘기에게 화가 났을 때, 위협적으로 날개를 올렸지만, 여행비둘기는 실제로 싸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둘기는 얕은 물에서 목욕을 했고, 그 후 차례로 옆으로 누워 반대쪽 날개를 들어 건조시켰다.[45]
여행비둘기는 하루에 적어도 한 번, 일반적으로 새벽에 호수, 작은 연못, 시냇물에 부리를 완전히 담가 마셨다. 비둘기는 물에 접근하기 위해 서로 위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고, 필요한 경우 종은 물 위에 착륙하여 마실 수 있었다.[60] 자연 사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날씨였으며, 매년 봄 많은 개체들이 너무 일찍 북쪽으로 이주한 후 얼어 죽었다. 사육 상태에서 여행비둘기는 최소 15년 동안 살 수 있었고; 마지막으로 알려진 살아있는 여행비둘기인 마르타는 죽었을 때 적어도 17세였고 29세까지 살았을 수도 있다. 야생 비둘기가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문서화되지 않았다.[78]
이 새는 콜럼버스 이전 시대 북미 동부의 숲 구성에 중요한 생태학적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여행비둘기가 생존해 있는 동안 숲은 흰 참나무가 지배했다. 이 종은 가을에 발아하여 봄 번식기 동안 씨앗을 거의 쓸모없게 만들었고, 반면 붉은 참나무는 비둘기가 먹어 치운 봄에 도토리를 생산했다. 여행비둘기의 씨앗 소비가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붉은 참나무가 우세하게 되었다. 숙박 장소에 존재하는 엄청난 양의 똥으로 인해 비둘기가 떠난 후 몇 년 동안 식물이 거의 자라지 않았다. 또한, 이러한 장소에 쌓인 인화성 잔해(나무에서 부러진 팔다리와 배설물로 죽은 잎과 같은)는 산불의 빈도와 강도를 모두 증가시켜, 화재 내성 종인 버 참나무, 검은 참나무, 흰 참나무가 붉은 참나무와 같은 화재에 덜 내성이 있는 종보다 우세하게 되어, 여행비둘기 멸종 이후 동부 숲의 구성 변화(정착 이전 숲에서 흰 참나무, 버 참나무 및 검은 참나무가 우세하게 나타나 오늘날 붉은 참나무의 "극적인 확장")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 있다.[61]
여행비둘기 무리의 많은 수로 인해, 그들이 생산한 배설물은 장기 숙박 장소에서 지표면 식생을 파괴하기에 충분했으며, 생태계에 많은 양의 영양분을 추가했다. 이로 인해—그들의 집단적인 무게로 나무 가지가 부러지고 소비한 열매의 양 때문에—여행비둘기는 동부 숲의 구조와 그곳에 존재하는 종의 구성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된다.[61]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일부 생태학자들은 여행비둘기를 핵심종으로 간주했으며,[49] 그들의 거대한 무리의 소멸은 생태계에 큰 격차를 남겼다.[63]
== 먹이 ==
여행비둘기는 계절에 따라 먹이를 달리했다. 가을, 겨울, 봄에는 주로 너도밤나무 열매, 도토리, 밤 등을 먹었고, 여름에는 블루베리, 포도, 체리, 뽕나무, 자리공, 산딸기와 같은 열매와 부드러운 과일을 주로 먹었다.[38][69][70] 번식기에는 지렁이, 애벌레, 달팽이 등 무척추동물도 섭취했으며, 경작된 곡물, 특히 메밀이나 염분도 섭취했다.[38][69][70]
열매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대량으로 발생하며, 연달아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여행비둘기는 대규모 무리를 지어 끊임없이 이동했다.[21][38] 이들이 변동적인 식량원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뛰어난 시력과 비행 능력이 넓은 지역을 탐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1][38]
여행비둘기는 수만, 수십만 마리의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았는데, 잎, 흙, 눈을 부리로 뒤집으며 먹이를 찾았다.[38][69] 무리 뒤에 있는 새들이 무리 앞으로 날아가 잎과 풀을 떨어뜨리는 모습은 마치 구르는 것 같았다고 묘사된다.[38][69] 이들은 사회적 신호를 사용하여 풍부한 식량원을 식별했으며, 낮에는 개방된 땅에서 먹이를 찾고 밤에는 잠자리로 돌아왔다.[41][69] 하루에 100~130km를 규칙적으로 이동했고, 어떤 비둘기는 160km까지 이동하기도 했다.[38][61]
여행비둘기는 매우 탄력적인 입과 목, 그리고 아래 부리의 관절을 가지고 있어 도토리를 통째로 삼킬 수 있었다. 모이주머니는 오렌지 크기 정도로 확장될 수 있었으며, 최소 17개의 도토리, 28개의 너도밤나무 열매, 11개의 옥수수 알갱이, 100개의 단풍나무 씨앗 등을 담을 수 있었다.[38][69][61][71] 먹이를 먹은 후에는 가지에 앉아 근육질의 모래주머니를 이용해 소화했다.[38][69][61][71] 하루에 약 100g의 도토리를 먹고 소화할 수 있었으며, 30억 마리의 여행비둘기는 하루에 210,000,000L의 식량을 소비했다.[61][72]
== 번식 ==
공동 번식을 하는 비둘기인 여행비둘기는 잠자는 장소를 찾는 것 외에도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38][46] 둥지 기간은 약 4~6주 정도 지속되었다. 무리는 남쪽 위도에서는 3월경에, 북쪽 지역에서는 그보다 조금 늦게 둥지 지역에 도착했다.[38][46] 비둘기는 장소에 대한 충실도가 없어 매년 다른 장소에서 둥지를 트는 경우가 많았다.[78] 둥지 군락의 형성은 비둘기가 번식지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일반적으로 3월 말, 4월 또는 5월에 이루어졌다.[74]
"도시"라고 알려진 군락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모양이 길고 좁았다.[38] 기록된 가장 큰 둥지 지역은 1871년 위스콘신 중부에 있었는데, 약 2,200km2를 덮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둥지를 튼 새의 수는 약 1억 3,600만 마리로 추정되었다.[38]
구애는 둥지 군락에서 이루어졌다.[75] 수컷은 날개를 휘저으며 암컷 근처에서 "케크" 소리를 냈다. 그런 다음 수컷은 나뭇가지를 꽉 잡고 날개를 위아래로 격렬하게 펄럭였다. 수컷이 암컷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머리를 높이 들고 암컷을 가리키며 횃대에서 암컷에게 기대었다.[45] 암컷이 받아들이면 수컷에게 다시 기대었다.[75] 짝짓기를 할 준비가 되면 암컷과 수컷은 서로 애무했다. 암컷이 수컷의 부리를 물고 잠시 흔들었다가 서로 옆에 서서 재빨리 떨어지는 빌링을 했다.
존 제임스 오듀본은 여행비둘기의 구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둥지는 짝을 이룬 직후에 지어졌으며 건설하는 데 2~4일이 걸렸다. 암컷은 둥지 위에 앉아 날개를 펄럭여 둥지 자리를 선택했다. 그런 다음 수컷은 일반적으로 나뭇가지인 둥지 재료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암컷의 등 위로 건네주었다. 그런 다음 수컷은 더 많은 둥지 재료를 찾으러 갔고 암컷은 자신 아래에 둥지를 지었다. 둥지는 지상 2.0에서 20.1m 사이, 일반적으로 4.0m 이상에서 지어졌으며, 70~110개의 나뭇가지를 엮어 알이 쉽게 보일 수 있는 헐렁하고 얕은 그릇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이 그릇은 일반적으로 더 가는 나뭇가지로 덮였다. 둥지의 너비는 약 150mm, 높이는 약 61mm, 깊이는 약 19mm였다. 둥지를 지탱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무에 둥지가 있었고, 한 나무에 50개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한 헴록에는 317개의 둥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둥지는 나무 줄기에 가까운 튼튼한 가지에 놓였다.[38][73][76] 양쪽 모두 둥지를 돌보았기 때문에, 짝은 둥지를 트는 동안 일부일처제를 유지했다.[45]
일반적으로 알은 비둘기의 서식지 전역에서 4월 첫 2주 동안 낳아졌다.[74] 각 암컷은 둥지가 완성되자마자 또는 거의 완성되자마자 알을 낳았다. 둥지가 완성되지 않은 경우 비둘기는 때때로 땅에 알을 낳아야 했다.[77] 정상적인 산란 수는 단일 알인 것으로 보이지만, 동일한 둥지에서 두 개의 알이 보고된 경우도 있어 이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다.[38] 때때로 다른 암컷이 다른 암컷의 둥지에 알을 낳아 두 개의 알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79] 알은 흰색이고 타원형이며 크기는 평균 40mm x 34mm였다.[76] 양쪽 부모는 12~14일 동안 알을 품었다. 수컷은 아침부터 오후 중반까지, 암컷은 나머지 시간 동안 알을 품었다.[38][77]
부화 시 새끼(또는 어린 비둘기)는 눈이 멀고 노란색의 털과 같은 솜털로 드문드문 덮여 있었다.[77] 새끼는 빠르게 발달하여 14일 이내에 부모만큼의 무게가 되었다. 이 양육 기간 동안 양쪽 부모는 새끼를 돌보았으며, 수컷은 낮 동안, 암컷은 다른 시간 동안 돌보았다. 새끼들은 부화 후 처음 며칠 동안 크롭 밀크 (부모 새의 곡물에서 생산되는 커드와 유사한 물질)만 먹었다. 성체 음식은 3~6일 후에 점차적으로 도입되었다. 13~15일 후 부모는 새끼에게 마지막으로 먹이를 주고 둥지 지역을 ''집단적으로'' 떠났다. 새끼는 1~2일 동안 둥지에서 울부짖은 후 둥지에서 기어 나와 땅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움직이고 장애물을 피하며 근처의 성체에게 먹이를 구걸했다. 날개를 펴는 데는 3~4일이 더 걸렸다.[38][79] 전체 둥지 주기는 약 30일 동안 지속되었다.[73] 여행비둘기는 첫 해에 성적으로 성숙하여 이듬해 봄에 번식했다.[79]
== 천적 및 기생충 ==
아메리카족제비( ''Neogale vison''), 긴꼬리족제비( ''Neogale frenata''), 아메리카담비( ''Martes americana''), 미국너구리( ''Procyon lotor'') 등은 여행비둘기의 알과 새끼를 잡아먹는 포식자였다.[75] 올빼미, 매,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는 새끼와 성체 비둘기를 모두 사냥했고, 회색늑대( ''Canis lupus''), 여우( ''Urocyon cinereoargenteus'' 및 ''Vulpes vulpes''), 보브캣( ''Lynx rufus''), 아메리카흑곰( ''Ursus americanus''), 퓨마( ''Puma concolor'')는 부상당한 성체나 땅에 떨어진 새끼를 잡아먹었다.[75] ''Accipiter'' 속의 매와 송골매는 비둘기를 쫓아 사냥했으며, 쿠퍼매( ''Accipiter cooperii'')는 "위대한 비둘기 매"로 불릴 정도로 여행비둘기를 성공적으로 사냥했다.[75]
이러한 포식자들에도 불구하고, 번식 둥지의 거대한 규모는 개별 비둘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전체 무리에 미치는 피해는 적었다.[75] 둥지를 떠난 직후의 새끼들은 날 수 있을 때까지 포식자에게 취약했지만, 땅에 있는 새끼들의 수가 워낙 많아 극히 일부만 희생되었다.[38][121] 이러한 포식자 포화는 여행비둘기의 사회적 습성과 집단 번식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38][121]
여행비둘기에게서 두 종류의 이가 기록되었다. ''Columbicola extinctus''는 원래 여행비둘기에게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9년 띠비둘기에서 발견되면서 공동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종이다.[81][82] ''Campanulotes defectus''는 여행비둘기 고유종으로 생각되었으나, 현재는 호주에 생존하는 ''Campanulotes flavus''의 오염된 표본으로 여겨진다.[82] 야생 비둘기가 질병이나 기생충으로 인해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78]
6. 1. 먹이
여행비둘기는 계절에 따라 먹이를 달리했다. 가을, 겨울, 봄에는 주로 너도밤나무 열매, 도토리, 밤 등을 먹었고, 여름에는 블루베리, 포도, 체리, 뽕나무, 자리공, 산딸기와 같은 열매와 부드러운 과일을 주로 먹었다.[38][69][70] 번식기에는 지렁이, 애벌레, 달팽이 등 무척추동물도 섭취했으며, 경작된 곡물, 특히 메밀이나 염분도 섭취했다.[38][69][70]열매는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대량으로 발생하며, 연달아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여행비둘기는 대규모 무리를 지어 끊임없이 이동했다.[21][38] 이들이 변동적인 식량원을 어떻게 찾아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뛰어난 시력과 비행 능력이 넓은 지역을 탐사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1][38]
여행비둘기는 수만, 수십만 마리의 무리를 지어 먹이를 찾았는데, 잎, 흙, 눈을 부리로 뒤집으며 먹이를 찾았다.[38][69] 무리 뒤에 있는 새들이 무리 앞으로 날아가 잎과 풀을 떨어뜨리는 모습은 마치 구르는 것 같았다고 묘사된다.[38][69] 이들은 사회적 신호를 사용하여 풍부한 식량원을 식별했으며, 낮에는 개방된 땅에서 먹이를 찾고 밤에는 잠자리로 돌아왔다.[41][69] 하루에 100~130km를 규칙적으로 이동했고, 어떤 비둘기는 160km까지 이동하기도 했다.[38][61]
여행비둘기는 매우 탄력적인 입과 목, 그리고 아래 부리의 관절을 가지고 있어 도토리를 통째로 삼킬 수 있었다. 모이주머니는 오렌지 크기 정도로 확장될 수 있었으며, 최소 17개의 도토리, 28개의 너도밤나무 열매, 11개의 옥수수 알갱이, 100개의 단풍나무 씨앗 등을 담을 수 있었다.[38][69][61][71] 먹이를 먹은 후에는 가지에 앉아 근육질의 모래주머니를 이용해 소화했다.[38][69][61][71] 하루에 약 100g의 도토리를 먹고 소화할 수 있었으며, 30억 마리의 여행비둘기는 하루에 210,000,000L의 식량을 소비했다.[61][72] 더 바람직한 음식이 나오면 먹이주머니에서 음식을 역류시킬 수도 있었다.[73] 2018년 연구에 따르면 여행비둘기의 식단 범위는 입의 크기 때문에 특정 크기의 씨앗으로 제한되었으며, 역류나 죽음을 통해 씨앗을 퍼뜨렸을 수 있다.[62]
6. 2. 번식
공동 번식을 하는 비둘기인 여행비둘기는 잠자는 장소를 찾는 것 외에도 새끼를 낳아 기르기에 적합한 장소를 찾는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38][46] 둥지 기간은 약 4~6주 정도 지속되었다. 무리는 남쪽 위도에서는 3월경에, 북쪽 지역에서는 그보다 조금 늦게 둥지 지역에 도착했다.[38][46] 비둘기는 장소에 대한 충실도가 없어 매년 다른 장소에서 둥지를 트는 경우가 많았다.[78] 둥지 군락의 형성은 비둘기가 번식지에 도착한 지 몇 달이 지나서야, 일반적으로 3월 말, 4월 또는 5월에 이루어졌다.[74]"도시"라고 알려진 군락의 규모는 매우 컸으며, 모양이 길고 좁았다.[38] 기록된 가장 큰 둥지 지역은 1871년 위스콘신 중부에 있었는데, 약 2,200km2를 덮는 것으로 보고되었으며, 둥지를 튼 새의 수는 약 1억 3,600만 마리로 추정되었다.[38] 이 새들은 서식 범위의 가장자리에서는 광대한 번식 군락을 형성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65]
구애는 둥지 군락에서 이루어졌다.[75] 수컷은 날개를 휘저으며 암컷 근처에서 "케크" 소리를 냈다. 그런 다음 수컷은 나뭇가지를 꽉 잡고 날개를 위아래로 격렬하게 펄럭였다. 수컷이 암컷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머리를 높이 들고 암컷을 가리키며 횃대에서 암컷에게 기대었다.[45] 암컷이 받아들이면 수컷에게 다시 기대었다.[75] 짝짓기를 할 준비가 되면 암컷과 수컷은 서로 애무했다. 암컷이 수컷의 부리를 물고 잠시 흔들었다가 서로 옆에 서서 재빨리 떨어지는 빌링을 했다. 수컷은 암컷의 등에 올라타 교미한 후 부드러운 꿀꿀거림과 때로는 더 많은 애무가 이어졌다.[75]
존 제임스 오듀본은 여행비둘기의 구애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사육 조류를 관찰한 후, 왈라스 크레이그는 이 종이 다른 비둘기보다 덜 돌진하고 뽐내는 것을 발견했고, 짧은 빌링 동안 음식이 옮겨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따라서 오듀본의 묘사가 다른 비둘기와의 유추뿐만 아니라 상상력에 부분적으로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39][45]
둥지는 짝을 이룬 직후에 지어졌으며 건설하는 데 2~4일이 걸렸다. 이 과정은 군락 내에서 매우 동기화되었다.[74] 암컷은 둥지 위에 앉아 날개를 펄럭여 둥지 자리를 선택했다. 그런 다음 수컷은 일반적으로 나뭇가지인 둥지 재료를 신중하게 선택하여 암컷의 등 위로 건네주었다. 그런 다음 수컷은 더 많은 둥지 재료를 찾으러 갔고 암컷은 자신 아래에 둥지를 지었다. 둥지는 지상 2.0에서 20.1m 사이, 일반적으로 4.0m 이상에서 지어졌으며, 70~110개의 나뭇가지를 엮어 알이 쉽게 보일 수 있는 헐렁하고 얕은 그릇을 만들었다. 그런 다음 이 그릇은 일반적으로 더 가는 나뭇가지로 덮였다. 둥지의 너비는 약 150mm, 높이는 약 61mm, 깊이는 약 19mm였다. 둥지는 다른 많은 새의 둥지에 비해 조잡하고 부실하다고 묘사되었지만, 둥지가 만들어졌던 장소에서 여러 해 전에 둥지의 잔해가 발견될 수 있었다. 둥지를 지탱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나무에 둥지가 있었고, 한 나무에 50개 이상이 있는 경우도 있었으며, 한 헴록에는 317개의 둥지가 있는 것으로 기록되었다. 둥지는 나무 줄기에 가까운 튼튼한 가지에 놓였다. 일부 기록에서는 둥지 지역 아래의 땅이 모든 나뭇가지가 동시에 수집되어 깨끗하게 쓸린 것처럼 보였다고 언급하지만, 이 지역은 또한 똥으로 덮여 있었다.[38][73][76] 양쪽 모두 둥지를 돌보았기 때문에, 짝은 둥지를 트는 동안 일부일처제를 유지했다.[45]
일반적으로 알은 비둘기의 서식지 전역에서 4월 첫 2주 동안 낳아졌다.[74] 각 암컷은 둥지가 완성되자마자 또는 거의 완성되자마자 알을 낳았다. 둥지가 완성되지 않은 경우 비둘기는 때때로 땅에 알을 낳아야 했다.[77] 정상적인 산란 수는 단일 알인 것으로 보이지만, 동일한 둥지에서 두 개의 알이 보고된 경우도 있어 이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다.[38] 때때로 다른 암컷이 다른 암컷의 둥지에 알을 낳아 두 개의 알이 있는 경우도 있었다.[79] 알은 흰색이고 타원형이며 크기는 평균 40mm x 34mm였다.[76] 알을 잃으면 비둘기는 일주일 안에 대체 알을 낳을 수 있었다.[77] 전체 군락이 폭풍으로 인해 원래의 군락을 포기한 후 다시 둥지를 트는 것으로 알려졌다.[78] 양쪽 부모는 12~14일 동안 알을 품었다. 수컷은 아침부터 오후 중반까지, 암컷은 나머지 시간 동안 알을 품었다.[38][77]
부화 시 새끼(또는 어린 비둘기)는 눈이 멀고 노란색의 털과 같은 솜털로 드문드문 덮여 있었다.[77] 새끼는 빠르게 발달하여 14일 이내에 부모만큼의 무게가 되었다. 이 양육 기간 동안 양쪽 부모는 새끼를 돌보았으며, 수컷은 낮 동안, 암컷은 다른 시간 동안 돌보았다. 새끼들은 부화 후 처음 며칠 동안 크롭 밀크 (부모 새의 곡물에서 생산되는 커드와 유사한 물질)만 먹었다. 성체 음식은 3~6일 후에 점차적으로 도입되었다. 13~15일 후 부모는 새끼에게 마지막으로 먹이를 주고 둥지 지역을 ''집단적으로'' 떠났다. 새끼는 1~2일 동안 둥지에서 울부짖은 후 둥지에서 기어 나와 땅으로 날아가 그곳에서 움직이고 장애물을 피하며 근처의 성체에게 먹이를 구걸했다. 날개를 펴는 데는 3~4일이 더 걸렸다.[38][79] 전체 둥지 주기는 약 30일 동안 지속되었다.[73] 군락이 성공적인 둥지 트기 후에 다시 둥지를 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78] 여행비둘기는 첫 해에 성적으로 성숙하여 이듬해 봄에 번식했다.[79]
알프레드 러셀 월리스는 1858년의 역사적인 논문 종의 다양성을 형성하려는 경향에 관하여; 자연적 수단에 의한 다양성과 종의 영속성에 관하여에서, 여행비둘기를 다른 대부분의 새보다 적은 수의 알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성공적인 종의 예로 사용했다.
6. 3. 천적 및 기생충
아메리카족제비( ''Neogale vison''), 긴꼬리족제비( ''Neogale frenata''), 아메리카담비( ''Martes americana''), 미국너구리( ''Procyon lotor'') 등은 여행비둘기의 알과 새끼를 잡아먹는 포식자였다.[75] 올빼미, 매, 독수리와 같은 맹금류는 새끼와 성체 비둘기를 모두 사냥했고, 회색늑대( ''Canis lupus''), 여우( ''Urocyon cinereoargenteus'' 및 ''Vulpes vulpes''), 보브캣( ''Lynx rufus''), 아메리카흑곰( ''Ursus americanus''), 퓨마( ''Puma concolor'')는 부상당한 성체나 땅에 떨어진 새끼를 잡아먹었다.[75] ''Accipiter'' 속의 매와 송골매는 비둘기를 쫓아 사냥했으며, 쿠퍼매( ''Accipiter cooperii'')는 "위대한 비둘기 매"로 불릴 정도로 여행비둘기를 성공적으로 사냥했다.[75]이러한 포식자들에도 불구하고, 번식 둥지의 거대한 규모는 개별 비둘기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고, 전체 무리에 미치는 피해는 적었다.[75] 둥지를 떠난 직후의 새끼들은 날 수 있을 때까지 포식자에게 취약했지만, 땅에 있는 새끼들의 수가 워낙 많아 극히 일부만 희생되었다.[38][121] 이러한 포식자 포화는 여행비둘기의 사회적 습성과 집단 번식의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38][121]
여행비둘기에게서 두 종류의 이가 기록되었다. ''Columbicola extinctus''는 원래 여행비둘기에게만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9년 띠비둘기에서 발견되면서 공동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던 종이다.[81][82] ''Campanulotes defectus''는 여행비둘기 고유종으로 생각되었으나, 현재는 호주에 생존하는 ''Campanulotes flavus''의 오염된 표본으로 여겨진다.[82] 야생 비둘기가 질병이나 기생충으로 인해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78]
7. 인간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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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비둘기는 일부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게 종교적인 역할을 했다. 와이앤도트족(또는 휴런족)은 죽은 자의 축제 때 12년마다 죽은 자의 영혼이 여행비둘기로 변하고, 그 비둘기를 사냥하여 먹는다고 믿었다.[92] 호청크족은 여행비둘기를 족장의 새라고 여겼으며, 족장이 잔치를 열 때마다 제공되었다.[93] 세네카족은 흰색 비둘기가 여행비둘이 집단의 족장이며, 비둘기가 군집으로 둥지를 트는 유일한 새이기 때문에 새들의 회의에서 세네카족에게 몸을 바쳐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믿었다. 세네카족은 감사의 표시로 비둘기 춤을 개발했다.[93]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도 여행비둘기의 고기를 식용으로 했지만,[171] 원주민들은 비둘기의 번식기에는 비둘기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에 대한 배려를 지켰으며, 필요 이상으로 여행비둘기를 죽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북아메리카로 이주하여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백인들은 그러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는, 백인들의 손으로 멸종 직전에 몰린 아메리카 들소나 프롱혼 등 다른 북아메리카 토착 야생 동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다만, 19세기의 여행비둘기 수는 비정상적이었고, 백인의 이주로 원주민의 인구가 급감하면서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진 결과 급증했다는 주장도 있다[173]).
홀로세 시대 대부분 동안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 사용 방식이 숲의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2008년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 방화의 정기적인 사용, 쓸모없는 나무의 환상 박피, 선호하는 나무를 심고 가꾸는 행위는 열매, 도토리, 또는 과일을 생산하지 않는 여러 종의 나무 개체수를 억제하는 반면, 이를 생산하는 많은 나무 종의 개체수를 증가시켰다. 또한, 숲 바닥의 낙엽을 태워 음식물이 나무에서 떨어진 후 더 쉽게 찾을 수 있게 되었다.[86] 일부에서는 이러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 사용 방식이 여행비둘기를 포함한 다양한 동물 종의 개체수를 증가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는 먹이를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했기 때문이다.[87][88][89] 반면에, 북아메리카 원주민이 여행비둘이를 사냥하고 일부 종류의 열매와 도토리에 대해 경쟁함으로써 여행비둘이의 개체수를 억제했다는 주장도 있다.[90] 2017년 여행비둘이 DNA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개체수 감소와 이후 멸종 이전에 2만 년 동안 여행비둘이 개체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으며, 2016년 고대 북아메리카 원주민 DNA 연구에 따르면 북아메리카 원주민 개체수가 약 1만 3천~1만 6천 년 전부터 60배 증가하는 급격한 확장을 겪었다. 이 두 연구가 모두 옳다면, 북아메리카 원주민 개체수의 큰 변화가 여행비둘이 개체수 크기에 뚜렷한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이다. 이는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활동이 여행비둘이 개체수 크기에 미치는 순 효과가 중립적임을 시사한다.[55][91]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는 1534년 항해 중에 여행비둘기에 대해 최초로 보고한 유럽인이었다.[94] 그 후 사무엘 드 샹플랭과 코튼 매더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이 새를 관찰하고 기록했다. 초기 기록 대부분은 엄청난 수의 비둘기, 그로 인한 어두워진 하늘, 그리고 엄청난 양의 사냥된 비둘기에 대해 언급한다(1771년 보스턴 시장에서 5만 마리의 비둘기가 팔렸다고 한다).[95] 초기 식민지 개척자들은 비둘기의 대규모 비행이 불운이나 질병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둘기가 정상적인 서식지 밖에서 겨울을 보낼 때, 일부는 "병약한 여름과 가을"을 보낼 것이라고 믿었다.[96] 18세기와 19세기에 비둘이의 다양한 부위가 약효가 있다고 여겨졌다. 피는 눈 질환에 좋고, 가루로 만든 위 내벽은 이질 치료에 사용되었으며, 똥은 두통, 복통, 무기력증을 포함한 다양한 질병을 치료하는 데 사용되었다.[97] 거위 깃털만큼 오래가지 않았지만, 여행비둘이의 깃털은 침구에 자주 사용되었다. 비둘기 깃털 침대가 매우 인기가 있어 한때 생제롬 (퀘벡)에서는 모든 지참금에 비둘기 깃털로 만든 침대와 베개가 포함되었다. 1822년 뉴욕주 쇼토쿼 카운티의 한 가족은 이 목적으로 하루에 4,000마리의 비둘기를 죽였다.[98]
여행비둘이는 많은 중요한 초기 박물학자들의 글과 삽화에 등장했다. 마크 케이츠비의 1731년 삽화는 이 새에 대한 최초의 출판물이며, 일부 후대 평론가에 따르면 다소 조잡하다. 이 판화의 기초가 된 원본 수채화는 1768년 영국 왕실이 케이츠비의 나머지 수채화와 함께 구매했다. 박물학자 알렉산더 윌슨과 존 제임스 오듀본은 모두 대규모 비둘기 이동을 직접 목격했으며, 관련된 새의 총수를 추론하려는 시도를 담아 상세한 설명을 발표했다. 여행비둘이에 대한 가장 유명하고 자주 재현되는 그림은 오듀본의 삽화(손으로 채색한 아콰틴트)로, 1827년에서 1838년 사이에 출판된 그의 책 ''The Birds of America''에 수록되어 있다. 오듀본의 그림은 예술적 품질로 칭찬을 받았지만, 과학적 부정확성으로 비판받았다. 윌리스 크레이그와 R. W. 슈펠트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비둘기들이 서로 위에 올라타서 부리를 맞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지만, 대신 나란히 있을 것이고, 수컷이 암컷에게 먹이를 전달하며, 수컷의 꼬리는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크레이그와 슈펠트는 대신 미국 예술가 루이스 아가시즈 퓨어테스와 일본 예술가 K. 하야시의 삽화를 이 새의 더 정확한 묘사로 인용했다.[99][95][101][102] 여행비둘이의 삽화는 종종 박제된 새를 보고 그려졌으며, 찰스 R. 나이트는 생생한 종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진지한" 예술가이다. 그는 적어도 두 번, 1903년에 생존해 있는 비둘이가 있는 세 개의 조류 사육장 중 하나에서 새를 그렸고, 1914년 이전에 마지막 개체인 마사를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그렸다.[39][100]
이 새는 많은 유명 작가와 예술가에 의해 글(시, 노래와 소설)로 묘사되었고, 삽화로 그려졌으며, 현재에도 예술 작품으로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어 월턴 포드의 2002년 그림 ''Falling Bough''와 국립 예술 훈장 수상자 존 A. 루스벤의 2014년 신시내티 벽화는 마사의 사망 100주년을 기념한다.[100] "Project Passenger Pigeon" 아웃리치 그룹은 멸종 100주년을 이용하여 인간이 유발한 멸종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21세기의 관련성을 인식했다. 여행비둘기는 덜 알려진 북아메리카의 다른 위협받는 새들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기 위한 "기함종"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제안이 있었다.[107]
|thumb|upright|1870년경 맹인 미끼 비둘기와 함께 야생 조류를 유인하는 덫 사냥꾼 앨버트 쿠퍼]]
|thumb|left|1829년 제임스 패티슨 코크번의 캐나다의 비둘기 그물]]
여행비둘기의 고기는 매우 맛있다고 알려져 도시에서도 좋은 가격에 팔렸기 때문에, 총이나 막대기를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포획했다.[171]
19세기에 들어 북아메리카에서 백인의 인구가 급증하고, 전보 등의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졌으며,[174] 식육이나 사료, 솜이불의 재료가 되는 깃털 채취를 목적으로 한 무제한적인 남획이 이루어진 결과, 불과 수십 년 만에 여행비둘기의 수는 급감했다.[178][179]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여전히 엄청난 수가 있어서 검토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여행비둘기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고, 밀렵이 끊이지 않았다.[171] 새끼까지 남획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1878년, 미시간주의 파토스키 산림 지역에서 10억 마리에 가까운 여행비둘기가 발견되었다. 그 시점에서 이 수가 무리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그러나 사람들은 학살을 저질렀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파토스키 학살'''"이라고도 불리는 사태가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 그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고, 드디어 보호도 시도했지만, 이미 늦었다.
7. 1. 아메리카 원주민과의 관계
여행비둘기는 일부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에게 종교적인 의미를 지녔다. 와이앤도트족(휴런족)은 12년마다 열리는 죽은 자의 축제 때 죽은 자의 영혼이 여행비둘기로 변한다고 믿었으며[92], 호청크족은 여행비둘기를 족장의 새로 여겨 잔치 때마다 제공했다.[93] 세네카족은 흰색 비둘기가 여행비둘이 집단의 족장이며, 비둘기 춤을 통해 감사를 표했다.[93]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여행비둘기를 식량으로 이용했지만[171],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을 존중하며 필요 이상으로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주해 온 백인들은 이러한 배려 없이 무분별한 남획을 자행했다.[173]
2008년 연구에 따르면, 홀로세 시대 대부분 동안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토지 사용 방식은 숲의 구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방화, 환상 박피, 선호하는 나무 심기 등은 특정 나무 종의 개체수를 조절하고 숲 바닥의 낙엽을 태워 먹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했다.[86] 이는 여행비둘기를 포함한 다양한 동물 종의 개체수 증가에 기여했을 수 있다.[87][88][89] 그러나 원주민의 사냥과 식량 경쟁이 여행비둘이 개체수를 억제했다는 주장도 있다.[90] 2017년 여행비둘기 DNA 연구에 따르면 19세기 개체수 감소 이전 2만 년 동안 개체수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2016년 고대 북아메리카 원주민 DNA 연구에 따르면 원주민 개체수는 약 1만 3천~1만 6천 년 전부터 급격히 증가했다. 이 두 연구 결과는 원주민의 활동이 여행비둘이 개체수에 미치는 순 효과가 중립적임을 시사한다.[55][91]
7. 2. 유럽인들의 기록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전, 여행비둘기는 북아메리카 원주민과 공존했다.[83][84][85] 2008년 연구에 따르면, 원주민의 토지 사용 방식이 숲의 구성에 영향을 미쳐 여행비둘기를 포함한 다양한 동물 종의 개체수를 증가시켰다는 주장이 있다.[86][87][88][89] 반면, 원주민의 사냥이 여행비둘이 개체수를 억제했다는 주장도 있다.[90] 2017년 DNA 연구에 따르면, 여행비둘이 개체수는 2만 년 동안 안정적으로 유지되었고, 2016년 연구에서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개체수가 1만 3천~1만 6천 년 전부터 급증했다. 이 두 연구 결과는 원주민의 활동이 여행비둘이 개체수에 미치는 영향이 중립적이었음을 시사한다.[55][91]일부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은 여행비둘기를 종교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와이앤도트족은 죽은 자의 영혼이 여행비둘기로 변한다고 믿었고,[92] 세네카족은 어린 비둘기를 사냥하기 전에 낡은 비둘기에게 조개 화폐와 브로치를 바쳤다.[92] 호청크족은 여행비둘기를 족장의 새라고 여겼다.[93] 세네카족은 흰색 비둘기가 여행비둘이 집단의 족장이라고 믿었으며, 감사의 표시로 비둘기 춤을 개발했다.[93]
자크 카르티에는 1534년 항해 중 여행비둘기를 최초로 보고한 유럽인이었다.[94] 사무엘 드 샹플랭, 코튼 매더 등도 이 새를 관찰하고 기록했는데, 초기 기록 대부분은 엄청난 수의 비둘기와 그로 인한 어두워진 하늘, 대량 사냥에 대해 언급한다.[95] 초기 식민지 개척자들은 비둘기의 대규모 비행이 불운이나 질병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96] 18세기와 19세기에는 비둘기의 다양한 부위가 약효가 있다고 여겨져 눈 질환, 이질, 두통, 복통, 무기력증 등의 치료에 사용되었다.[97] 깃털은 침구에 자주 사용되었으며, 생제롬 (퀘벡)에서는 모든 지참금에 비둘기 깃털 침대와 베개가 포함될 정도였다.[98] 1822년 뉴욕주 쇼토쿼 카운티의 한 가족은 침구 제작을 위해 하루에 4,000마리의 비둘기를 죽이기도 했다.[98]
여행비둘기는 마크 케이츠비의 1731년 삽화를 포함하여 많은 초기 박물학자들의 글과 삽화에 등장했다. 알렉산더 윌슨과 존 제임스 오듀본은 대규모 비둘기 이동을 직접 목격하고 상세한 설명을 발표했다. 오듀본의 ''The Birds of America''에 수록된 삽화는 예술적 품질로 칭찬받았지만, 과학적 부정확성으로 비판받았다.[99][95] 루이스 아가시즈 퓨어테스와 일본 예술가 K. 하야시의 삽화가 더 정확한 묘사로 인용된다.[99][101][102] 찰스 R. 나이트는 생생한 종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예술가이다.[39][100]
여행비둘기는 시, 노래, 소설 등 다양한 예술 작품에 묘사되었으며, 멸종 이후에도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고 있다. 월턴 포드의 ''Falling Bough''(2002)와 존 A. 루스벤의 신시내티 벽화(2014)는 마사의 사망 100주년을 기념하는 작품이다.[100] "Project Passenger Pigeon"은 멸종 100주년을 맞아 인간이 유발한 멸종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 여행비둘기를 다른 위협받는 새들에 대한 인식을 확산하기 위한 "기함종"으로 사용하자는 제안을 했다.[107]
7. 3. 사냥과 상업적 이용
18세기에는 북아메리카 전 지역에 50억 마리의 여행비둘기가 서식했으며, 최대 1조 마리까지 추산되어 세계에서 가장 수가 많은 새였다고도 한다.[171] 하지만 19세기에 흑인, 빈곤층, 노예들을 위한 식용, 사료, 깃털 채취를 위한 남획으로 수가 급감했다.[171] 당시 자본가들은 여행비둘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 여행비둘기 고기를 기차로 수송하는 운송업을 하기도 했다.[171] 그러나 막대한 개체수 때문에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여행비둘기 보호는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았다.[171]여행비둘기 고기는 매우 맛있었다고 전해져, 총이나 새그물, 막대기를 사용해 많은 사람들이 포획을 실시했으며, 비둘기 사냥은 미 서부에서의 금 채취, 곡식 투기 등으로 벼락부자가 된 졸부에게는 일종의 '스포츠'였다.[171] 그래서 여행비둘기 포획을 전문으로 하는 사냥꾼에 의해 조직적이고 대규모에 걸친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다.[171] 심지어는 3만 마리를 사냥 대회에서 이기려고 죽인 사냥꾼도 있었다고 한다.[171] 미국의 졸부들과 사냥꾼들은 여행비둘기를 생명을 가진 동물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놀이를 위한 장난감으로 여겼던 것이다.[171]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비둘기를 먹었고, 번식지 근처 부족들은 때때로 비둘기 근처로 이주하여 어린 새끼들을 먹고 밤에는 긴 막대기로 죽였다.[109] 많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어른 비둘기를 함부로 건드리지 않고 어린 새끼들만 먹었는데, 어른 비둘기들이 번식지를 떠날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10] 어떤 부족에서는 어른 비둘기를 괴롭히는 행위를 범죄로 여겼다.[110] 고고학적 증거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식민지화 이전에 비둘기를 자주 먹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112]
유럽인들이 나그네비둘기를 사냥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1565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프랑스 탐험가 르네 로도니에르는 포트 캐롤라인 근처에서 몇 주 만에 약 10,000마리의 비둘기를 사냥했다고 기록했다.[113][114] 유럽 식민지화 이후, 나그네비둘기는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더 지속 가능한 방식보다 더 집중적인 방법으로 사냥되었다.[121] 19세기 초, 상업적 사냥꾼들은 도시 시장에서 식량으로, 심지어 돼지 사료로 팔기 위해 새를 그물로 잡고 총으로 쏘기 시작했다. 비둘기 고기가 인기를 얻자, 상업적인 사냥이 엄청난 규모로 시작되었다.[118][135]
|thumb|left|1829년 제임스 패티슨 코크번의 캐나다의 비둘기 그물]]
나그네비둘기는 너무 쉽게 쏘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사냥감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아마추어 사냥꾼도 한 번의 산탄총 발사로 쉽게 6마리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119][120] 특히 둥지에서 산탄총의 두 총신을 모두 사용하여 61마리의 새를 죽일 수 있었다.[119][120] 사냥꾼들은 조준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쏘기만 하면 많은 비둘기를 잡을 수 있었다.[121] 비둘기는 정면으로 쏘기 어려워서 사냥꾼들은 일반적으로 무리가 머리 위로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쏘았다.[122]
|thumb|upright|1870년경 맹인 미끼 비둘기와 함께 야생 조류를 유인하는 덫 사냥꾼 앨버트 쿠퍼]]
인간은 나그네비둘기를 잡고 죽이기 위해 다양한 다른 방법을 사용했다. 그물은 나그네비둘기가 들어가도록 지지해 놓고, 입구를 지지하는 막대기를 떨어뜨려 20마리 이상의 비둘기를 안에 가두었다.[125] 터널 그물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었으며, 특히 큰 그물은 한 번에 3,500마리의 비둘기를 잡을 수 있었다.[126] 미끼 또는 "미끼 비둘기"(눈꺼풀을 꿰매어 눈을 멀게 한 경우도 있음)는 의자에 묶여 있었다. 비둘기 무리가 지나갈 때 끈을 당겨 미끼 비둘기가 땅에 떨어지게 하여 먹이를 찾은 것처럼 보이게 하고, 무리를 덫으로 유인했다.[121][128][129] 또 다른 포획 방법은 둥지 군집에서 사냥하는 것이었다.[132] 심각한 방법은 비둘기가 둥지를 튼 나무 밑동에 불을 지르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도망가고 어린 새끼들은 땅에 떨어졌다.[159][133] 유황은 때때로 둥지를 튼 나무 아래에서 태워 새들을 질식시켜 약해진 상태로 나무에서 떨어졌다.[134]
19세기 중반까지 철도는 비둘기 사냥꾼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었다.[135] 1860년대에 광범위한 전신 시스템이 도입되어 미국 전역의 통신이 개선되어 비둘기 무리의 소재에 대한 정보를 더 쉽게 퍼뜨릴 수 있었다.[124] 철도가 개통된 후 뉴욕주 플래츠버그는 1851년에만 180만 마리의 비둘기를 대도시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며, 가격은 한 다스당 31~56센트였다.[135] 19세기 후반까지 나그네비둘기 거래는 상업화되었다.[136] 대규모 위탁 판매소는 연중 비둘기 무리를 따라다니는 덫 사냥꾼(이하 "피저너")을 고용했다.[136] 1874년에는 최소 600명이 비둘기 덫 사냥꾼으로 고용되었으며, 그 수는 1881년까지 1,200명으로 증가했다.[138]
19세기 후반에는 수천 마리의 나그네비둘기가 스포츠 사격 산업에 사용하기 위해 잡혔다.[121][124] 비둘기는 특수 덫에서 새를 통제된 방식으로 풀어주는 "트랩 사격"과 같은 사격 토너먼트에서 살아있는 표적으로 사용되었다.[121][124]
8. 멸종 원인과 보존 노력
'''멸종 원인'''
18세기에는 북아메리카 전 지역에 50억 마리, 최대 1조 마리까지 서식했다고 추정되는 여행비둘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흑인, 빈곤층, 노예들을 위한 식용, 또는 사료와 깃털 채취를 위해 남획되어 수가 급감했다.[178][179] 당시 자본가들은 여행비둘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 고기를 기차로 수송하는 운송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대한 개체수 때문에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보호는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았다. 여행비둘기 고기는 매우 맛있어서 총이나 새그물, 막대기를 사용해 많은 사람들이 포획했으며, 이는 미 서부의 졸부들에게 일종의 '스포츠'로 여겨졌다. 전문 사냥꾼들은 조직적이고 대규모에 걸친 학살을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3만 마리를 사냥 대회에서 이기려고 죽인 사냥꾼도 있었다. 이들은 여행비둘기를 생명이 아닌 놀이를 위한 장난감으로 여겼다.[171]
1870년대에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무리를 지어 살았던 여행비둘기는 1890년대에 들어 사냥꾼들이 통신을 이용하여 정보를 주고받아 사냥을 했기 때문에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뒤늦게 법으로 보호가 시도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작은 집단에서는 번식할 수 없는 습성과 한 번에 1개의 알만 낳는 특성 때문에 개체수 회복은 불가능했다. 농업을 위한 산림 면적 축소로 인해 서식지와 먹이인 도토리, 밤, 블루베리 등이 감소한 것도 멸종의 원인이었다.
여행비둘기 멸종의 주요 원인은 대규모 사냥, 서식지 감소, 그리고 매우 사회적인 생활 방식이었다. 산림 벌채는 농업과 도시 확장을 위한 토지 확보와 목재, 연료 수요로 인해 발생했다. 1850년부터 1910년 사이에 약 728,000 km2의 토지가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동부 북아메리카의 넓은 삼림 지대는 야생 동물을 지원했지만, 여행비둘기의 개체군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격렬한 사냥과 산림 벌채의 결합된 효과는 "전격전"으로 언급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크고 무의미한 인간이 유도한 멸종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121][49][124] 무리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개체수는 종 번식에 필요한 임계값 이하로 감소했다.[161] 이는 앨리 효과의 한 예이다.[162]
2014년 유전학 연구에서는 인간 등장 전에도 개체수 변동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며, 개체수가 주기적으로 회복되었음을 시사했다. 이러한 감소 중 하나가 1800년대 인간의 사냥이 심화된 시기와 일치했을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이 종의 급격한 멸종을 초래했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와 유사한 시나리오는 같은 기간 동안 로키산맥 메뚜기(Rocky Mountain locust, ''Melanoplus spretus'')의 급격한 멸종을 설명할 수도 있다.[49] 또한 개체수가 줄어든 후 소수의 새나 단독으로 활동하는 새가 적합한 먹이 지역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졌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1]
북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여행비둘기의 고기를 식용으로 했지만,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에 대한 배려를 지켰으며, 필요 이상으로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주하여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백인들은 그러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는 아메리카 들소나 프롱혼 등 다른 북아메리카 토착 야생 동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173]
특히 19세기에 들어 북아메리카에서 백인의 인구가 급증하고, 전보 등의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졌으며,[174] 식육이나 사료, 솜이불의 재료가 되는 깃털 채취를 목적으로 한 무제한적인 남획이 이루어진 결과, 불과 수십 년 만에 여행비둘기의 수는 급감했다.[178][179]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여전히 엄청난 수가 있어서 검토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여행비둘기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고, 밀렵이 끊이지 않았다.[171] 새끼까지 남획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1878년, 미시간주의 파토스키 산림 지역에서 10억 마리에 가까운 여행비둘기가 발견되었으나 사람들은 학살을 저질렀고, 이는 "파토스키 학살"이라고도 불린다.
1906년에 사냥꾼에게 사살된 것을 마지막으로, 야생 개체는 모습을 감췄다.[178][179][177] 1908년에는 7마리, 1910년 8월에는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암컷 마사만 남게 되었다.[171][178][179] 마사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우리 안에서 일생을 보냈고, 1914년 9월 1일 오후 1시, 노쇠로 사망하여 여행비둘기는 멸종했다.[171] 마사의 표본은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표본에서 DNA를 추출하여 여행비둘기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174]
'''보존 노력'''
19세기 후반, 여행비둘기의 멸종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당시에는 멸종 개념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고, 엄청난 수의 비둘기 떼 때문에 감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95] 1856년 베네딕트 앙리 레부일은 여행비둘기의 운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었다.[95] 1870년대에 들어서 새의 감소가 눈에 띄게 나타났고, 특히 1878년 미시간주 페토스키에서 대규모 둥지가 만들어진 후, 거의 5개월 동안 매일 5만 마리의 새가 죽는 학살이 벌어졌다.[21][34][95]
이러한 마지막 둥지가 만들어질 무렵, 여행비둘기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지만, 명확하지 않고 시행하기 어려워 효과가 없었다.[95] H. B. 로니는 비둘기 보호 캠페인을 벌였지만 저항에 부딪혔고, 상황의 심각성을 과장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95] 1857년 오하이오 주 의회에 여행비둘기 보호 법안이 제출되었지만, 상원 특별 위원회는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141] 1870년대에 사격 사냥에 대한 대중의 항의가 터져 나왔지만, 학살을 막는 데는 효과가 없었다. 미시간주와 펜실베이니아주에서 법적 조치가 통과되었지만 무시되었다.[124][137]
1890년대 중반까지 여행비둘기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으며,[95] 19세기 이후, 본래 서식지였던 삼림 개발과[171][178][179] 전보 등의 통신 수단 발달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지면서,[174] 남획으로 인해 개체수가 급감했다.[178][179] 1906년 사냥꾼에게 사살된 것을 마지막으로 야생 개체는 사라졌다.[177] 1914년9월 1일 오후 1시,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마지막 생존 개체인 암컷 마사가 노쇠로 사망하면서 여행비둘기는 멸종했다.[171] 마사의 표본은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8. 1. 멸종 원인
18세기에는 북아메리카 전 지역에 50억 마리, 최대 1조 마리까지 서식했다고 추정되는 여행비둘기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흑인, 빈곤층, 노예들을 위한 식용, 또는 사료와 깃털 채취를 위해 남획되어 수가 급감했다.[178][179] 당시 자본가들은 여행비둘기를 돈벌이 수단으로 여겨 고기를 기차로 수송하는 운송업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대한 개체수 때문에 멸종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보호는 진지하게 검토되지 않았다. 여행비둘기 고기는 매우 맛있어서 총이나 새그물, 막대기를 사용해 많은 사람들이 포획했으며, 이는 미 서부의 졸부들에게 일종의 '스포츠'로 여겨졌다. 전문 사냥꾼들은 조직적이고 대규모에 걸친 학살을 자행했으며, 심지어는 3만 마리를 사냥 대회에서 이기려고 죽인 사냥꾼도 있었다. 이들은 여행비둘기를 생명이 아닌 놀이를 위한 장난감으로 여겼다.[171]1870년대에 조금씩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무리를 지어 살았던 여행비둘기는 1890년대에 들어 사냥꾼들이 통신을 이용하여 정보를 주고받아 사냥을 했기 때문에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뒤늦게 법으로 보호가 시도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작은 집단에서는 번식할 수 없는 습성과 한 번에 1개의 알만 낳는 특성 때문에 개체수 회복은 불가능했다. 농업을 위한 산림 면적 축소로 인해 서식지와 먹이인 도토리, 밤, 블루베리 등이 감소한 것도 멸종의 원인이었다.
여행비둘기 멸종의 주요 원인은 대규모 사냥, 서식지 감소, 그리고 매우 사회적인 생활 방식이었다. 산림 벌채는 농업과 도시 확장을 위한 토지 확보와 목재, 연료 수요로 인해 발생했다. 1850년부터 1910년 사이에 약 728,000 km2의 토지가 농경지로 개간되었다. 동부 북아메리카의 넓은 삼림 지대는 야생 동물을 지원했지만, 여행비둘기의 개체군을 유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격렬한 사냥과 산림 벌채의 결합된 효과는 "전격전"으로 언급되었으며, 역사상 가장 크고 무의미한 인간이 유도한 멸종 중 하나로 평가되었다.[121][49][124] 무리의 크기가 줄어들면서 개체수는 종 번식에 필요한 임계값 이하로 감소했다.[161] 이는 앨리 효과의 한 예이다.[162]
2014년 유전학 연구에서는 인간 등장 전에도 개체수 변동이 자연적으로 발생했으며, 개체수가 주기적으로 회복되었음을 시사했다. 이러한 감소 중 하나가 1800년대 인간의 사냥이 심화된 시기와 일치했을 수 있으며,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이 종의 급격한 멸종을 초래했을 수 있다고 제시했다. 이와 유사한 시나리오는 같은 기간 동안 로키산맥 메뚜기(Rocky Mountain locust, ''Melanoplus spretus'')의 급격한 멸종을 설명할 수도 있다.[49] 또한 개체수가 줄어든 후 소수의 새나 단독으로 활동하는 새가 적합한 먹이 지역을 찾는 것이 더 어려워졌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1]
|upright|thumb|left|마사(Martha) (스미소니언 박물관)(Smithsonian Museum), 2015]]
여행비둘기의 멸종은 보존 운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다른 많은 종들이 멸종되는 것을 막는 새로운 법률과 관행을 낳았다.[34] 여행비둘기의 급격한 감소는 멸종 위기에 처한 동물 개체군의 멸종 위험에 대한 후기 평가 방법에 영향을 미쳤다. 국제 자연 보전 연맹(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IUCN)은 개체수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멸종 "위험"으로 선언된 종의 사례에서 여행비둘기를 예로 사용했다.[140]
1906년에 사냥꾼에게 사살된 것을 마지막으로, 야생 개체는 모습을 감췄다.[178][179][177] 1908년에는 7마리, 1910년 8월에는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암컷 마사만 남게 되었다.[171][178][179] 마사는 동물원에서 태어나 우리 안에서 일생을 보냈고, 1914년 9월 1일 오후 1시, 노쇠로 사망하여 여행비둘기는 멸종했다.[171] 마사의 표본은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러한 표본에서 DNA를 추출하여 여행비둘기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174]
북아메리카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여행비둘기의 고기를 식용으로 했지만, 번식기에는 사냥을 삼가는 등 자연에 대한 배려를 지켰으며, 필요 이상으로 죽이지 않았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유럽에서 이주하여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백인들은 그러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는 아메리카 들소나 프롱혼 등 다른 북아메리카 토착 야생 동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173]
특히 19세기에 들어 북아메리카에서 백인의 인구가 급증하고, 전보 등의 통신 수단이 발달하면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졌으며,[174] 식육이나 사료, 솜이불의 재료가 되는 깃털 채취를 목적으로 한 무제한적인 남획이 이루어진 결과, 불과 수십 년 만에 여행비둘기의 수는 급감했다.[178][179]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여전히 엄청난 수가 있어서 검토되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여행비둘기의 수는 계속 줄어들었고, 밀렵이 끊이지 않았다.[171] 새끼까지 남획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1878년, 미시간주의 파토스키 산림 지역에서 10억 마리에 가까운 여행비둘기가 발견되었으나 사람들은 학살을 저질렀고, 이는 "파토스키 학살"이라고도 불린다.
8. 2. 보존 노력
19세기 후반, 여행비둘기의 멸종 가능성이 제기되었지만, 당시에는 멸종 개념이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고, 엄청난 수의 비둘기 떼 때문에 감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95] 1856년 베네딕트 앙리 레부일은 여행비둘기의 운명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었다.[95] 1870년대에 들어서 새의 감소가 눈에 띄게 나타났고, 특히 1878년 미시간주 페토스키에서 대규모 둥지가 만들어진 후, 거의 5개월 동안 매일 5만 마리의 새가 죽는 학살이 벌어졌다.[21][34][95]이러한 마지막 둥지가 만들어질 무렵, 여행비둘기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제정되었지만, 명확하지 않고 시행하기 어려워 효과가 없었다.[95] H. B. 로니는 비둘기 보호 캠페인을 벌였지만 저항에 부딪혔고, 상황의 심각성을 과장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95] 1857년 오하이오 주 의회에 여행비둘기 보호 법안이 제출되었지만, 상원 특별 위원회는 보호가 필요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141] 1870년대에 사격 사냥에 대한 대중의 항의가 터져 나왔지만, 학살을 막는 데는 효과가 없었다. 미시간 주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법적 조치가 통과되었지만 무시되었다.[124][137]
1890년대 중반까지 여행비둘기는 거의 완전히 사라졌으며,[95] 19세기 이후, 본래 서식지였던 삼림 개발과[171][178][179] 전보 등의 통신 수단 발달로 효율적인 사냥이 가능해지면서,[174] 남획으로 인해 개체수가 급감했다.[178][179] 1906년 사냥꾼에게 사살된 것을 마지막으로 야생 개체는 사라졌다.[177] 1914년9월 1일 오후 1시,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사육되던 마지막 생존 개체인 암컷 마사가 노쇠로 사망하면서 여행비둘기는 멸종했다.[171] 마사의 표본은 현재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9. 종의 부활 가능성
현재 전 세계 여러 기관에 최소 1,532개의 여행비둘기 가죽(16개의 골격 포함)이 흩어져 존재한다.[165][33] 이러한 표본의 유전 물질을 사용하여 여행비둘기를 부활시키려는 제안이 있었다.[170] 2003년, 피레네 아이벡스는 복제되어 다시 살아난 최초의 멸종 동물이었으나, 폐 결함으로 7분 만에 사망했다.[170][166]
여행비둘기 복제의 어려움은 박물관 표본의 DNA가 열과 산소 노출로 인해 오염되고 파편화되었다는 점이다.[170] 미국의 유전학자 조지 M. 처치는 서로 다른 표본의 DNA 단편을 짜맞춰 여행비둘기 유전체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170] 그는 이러한 유전자를 줄기 세포에 접합하고, 이를 바위 비둘기의 난자와 정자 세포로 변형시켜 여행비둘기 정자와 알을 가진 바위 비둘기를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자손은 여행비둘기의 특징을 가지며, 멸종된 종의 고유한 특징을 선호하도록 더욱 번식될 것이라고 예상했다.[170][167][168] 미국의 비영리 단체 리바이브 & 리스토어는 현재 이 아이디어를 추진하고 있다.[169]
그러나 멸종된 종을 복원하는 아이디어는 여러 비판에 직면해 있다.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현재 위협받는 종과 서식지 보존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보존 노력이 덜 시급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된다. 여행비둘기의 경우, 사회성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부활에 성공할 만큼 충분한 새를 만들기 어려울 수 있으며, 재도입에 충분한 적절한 서식지가 남아 있는지 불분명하다.[170][167] 또한, 복제된 여행비둘기를 키울 어미 비둘기는 어린 새끼를 키우는 방식이 다른 종에 속할 것이라는 문제점도 제기된다.[17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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