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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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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는 선사 시대부터 시작하여 유럽인의 발견과 식민지 시대를 거쳐 연방으로 발전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은 약 5만 년 전부터 거주하며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켰으나, 유럽인들의 정착과정에서 질병, 갈등, 토지 수탈 등으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 1788년 시드니에 첫 함대가 도착하면서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가 건설되었고, 이후 여러 식민지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1901년 6개의 식민지가 연방을 결성하여 자치령이 되었고, 1,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경제 호황을 누렸으며, 백호주의를 폐지하고 다문화주의를 수용했다. 1970년대에는 사회 개혁과 경제 자유화가 이루어졌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발전시켰다. 2022년 앤서니 앨버니지가 총리로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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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지도 정보
역사
록 아트
노던 준주에서 발견된 록 아트
시대선사 시대 ~ 현재
위치오스트레일리아
주요 사건
선사 시대기원전 65,000년 ~ 기원전 40,000년: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이주 (논쟁 중)
1606년네덜란드 항해사 빌렘 얀스존의 오스트레일리아 상륙
1770년제임스 쿡 선장의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 탐험 및 영국 영토 선언
1788년영국인에 의한 뉴사우스웨일스 건설
1851년오스트레일리아 골드 러시 시작
1901년 1월 1일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출범
1914년 ~ 1918년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39년 ~ 1945년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45년국제 연합 창립 회원국 가입
1973년백호주의 폐지
2000년2000년 하계 올림픽 개최 (시드니)
이전 국가
통계
오스트레일리아 인구 밀도
오스트레일리아 인구 밀도 (2016년)
면적7,686,850 km²
인구25,499,884명 (2020년 기준)

2. 선사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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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두 국립공원 우비르의 암벽화로, 약 30,000년 전의 원주민 미술 증거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조상은 최후 빙기 동안, 지금의 동남아시아에서 육교와 짧은 해상 횡단을 통해 약 50,000년에서 65,000년 전에 지금의 호주 대륙으로 이동했다.[2][3][4][5][6] 이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으며, 종교 및 예술적 전통을 발전시켰다. 유럽인들과의 최초 조우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 인구는 약 350,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750,000명 정도였을 가능성도 있다. 뉴기니섬과 태즈메이니아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육지로 이어져있을 시기였으나 바다를 건너는 구간이 있었을 것이므로 이들을 역사상 가장 초기의 장거리 항해자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코라이아 남자가 불 의식에 착용한 머리 장식을 하고 있으며,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포레스트 강에서 촬영되었다. 원주민 호주인의 드림타임과 관련된 종교적 관습은 수만 년 동안 행해져 왔다.


아넘랜드의 마드제베베 암석 대피소는 호주에서 인간이 거주한 가장 오래된 장소일 것이다.[2][7]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골은 뉴사우스웨일스의 뭉고 호 유해로, 약 4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유적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 중 하나를 시사하며, 인간의 종교적 의례에 대한 초기 증거를 보여준다.[9]

루리자 남자가 얇은 방패 아래에서 큰 곡선형 부메랑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시연하고 있다(1920)


원주민 사회는 약 25명의 가족 그룹으로 구성되어 밴드와 클랜으로 조직되었으며, 각 클랜은 식량 채집을 위한 정의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클랜은 특정 언어와 지역과 관련된 부족 또는 국가에 속해 있었다. 유럽인과의 접촉 당시에는 약 600개의 부족 또는 국가와 250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다양한 방언과 함께 존재했다.[15][16] 이 시점의 원주민 인구 추정치는 30만에서 100만 명에 이른다.[17][18][19] 원주민 사회는 평등주의적이었으며, 공식적인 정부나 지도자가 없었다. 권위는 장로들에게 있었고, 집단적 결정은 일반적으로 장로들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파이어스틱 농법을 사용했고,[10][21] 어업을 했으며,[22] 반영구적인 쉼터를 지었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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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원주민은 독특한 예술 및 정신 문화를 개발했다. 원주민 암벽화는 3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 원주민 신화와 범신론적 틀에 따르면, 꿈은 조상의 토템 영적 존재가 창조 신화를 형성한 신성한 시대이며, 삶과 땅의 연속성을 보장한다.[31]

약 5만 년 전, 홍적세 말기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해수면이 낮았기 때문에 뉴기니 섬과 태즈메이니아 섬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 보르네오 섬은 아시아와 육지로 연결되어 순다랜드(Sundaland)의 일부를 구성했다. 이 때문에, 양자를 나누는 해역은 현재에 비해 좁았고, 항해도 비교적 쉬웠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이른바 애버리지니(indigenous people)는 이 무렵, 순다랜드에서 바다를 건너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애버리지니는 유전자 분석이나 두개골 측정한 결과, 넓은 의미의 몽골로이드에 속한다는 견해가 부상하여 오세아니아계 몽골로이드로 분류되게 되었다[591].

2. 1. 오스트레일리아 선주민 (애버리지니)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조상은 최후 빙기 동안, 지금의 동남아시아에서 육교와 짧은 해상 횡단을 통해 약 50,000년에서 65,000년 전에 지금의 호주 대륙으로 이동했다.[2][3][4][5][6] 이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으며, 종교 및 예술적 전통을 발전시켰다. 유럽인들과의 최초 조우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선주민 인구는 약 350,00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되었으나,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750,000명 정도였을 가능성도 있다. 뉴기니섬과 태즈메이니아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육지로 이어져있을 시기였으나 바다를 건너는 구간이 있었을 것이므로 이들을 역사상 가장 초기의 장거리 항해자들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아넘랜드의 마드제베베 암석 대피소는 호주에서 인간이 거주한 가장 오래된 장소일 것이다.[2][7]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골은 뉴사우스웨일스의 뭉고 호 유해로, 약 4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유적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 중 하나를 시사하며, 인간의 종교적 의례에 대한 초기 증거를 보여준다.[9]

원주민 사회는 약 25명의 가족 그룹으로 구성되어 밴드와 클랜으로 조직되었으며, 각 클랜은 식량 채집을 위한 정의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클랜은 특정 언어와 지역과 관련된 부족 또는 국가에 속해 있었다. 유럽인과의 접촉 당시에는 약 600개의 부족 또는 국가와 250개의 서로 다른 언어가 다양한 방언과 함께 존재했다.[15][16] 이 시점의 원주민 인구 추정치는 30만에서 100만 명에 이른다.[17][18][19] 원주민 사회는 평등주의적이었으며, 공식적인 정부나 지도자가 없었다. 권위는 장로들에게 있었고, 집단적 결정은 일반적으로 장로들의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들은 파이어스틱 농법을 사용했고,[10][21] 어업을 했으며,[22] 반영구적인 쉼터를 지었다.[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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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원주민은 독특한 예술 및 정신 문화를 개발했다. 원주민 암벽화는 35,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 원주민 신화와 범신론적 틀에 따르면, 꿈은 조상의 토템 영적 존재가 창조 신화를 형성한 신성한 시대이며, 삶과 땅의 연속성을 보장한다.[31]

약 5만 년 전, 홍적세 말기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은 해수면이 낮았기 때문에 뉴기니 섬과 태즈메이니아 섬을 포함하고 있었다. 자바 섬과 수마트라 섬, 보르네오 섬은 아시아와 육지로 연결되어 순다랜드(Sundaland)의 일부를 구성했다. 이 때문에, 양자를 나누는 해역은 현재에 비해 좁았고, 항해도 비교적 쉬웠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이른바 애버리지니(indigenous people)는 이 무렵, 순다랜드에서 바다를 건너 오스트레일리아에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애버리지니는 유전자 분석이나 두개골 측정한 결과, 넓은 의미의 몽골로이드에 속한다는 견해가 부상하여 오세아니아계 몽골로이드로 분류되게 되었다[591].

3. 유럽인의 오스트레일리아 발견과 탐험



제임스 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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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8년 스페인의 무적 함대가 패배하면서 쇠퇴한 스페인을 대신하여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 프랑스가 동양에서의 패권 다툼에 나섰다.

유럽인 항해자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처음 도달한 것은 1606년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Willem Janszoon)이 케ープ요크 반도 서쪽을 시인하고 상륙하여 주변 해안을 해도에 기록했다. 같은 해 스페인인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 (Luis Váez de Torres)가 뉴기니 섬 사이의 해협을 항해했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보지는 못했지만,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밝혀냈으며, 이 해협은 그의 이름을 따서 "토레스 해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616년에는 희망봉을 돌아 바타비아로 향하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장 디르크 하토흐(Dirk Hartog)가 오스트레일리아 서해안을 유럽인으로서 처음으로 보았고,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다르크 하토흐 섬에 상륙했다.

1606년에 네덜란드의 모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자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새로운 네덜란드' 라는 뜻의 '''뉴홀랜드'''(New Holland)로 명명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들에게 발견될 당시 약 100만명의 애버리진과 300여개의 부족 국가가 있었고 이들 사이에서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개의 방언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들은 드레만티메를 숭배한다.

네덜란드인 아벨 타스만 (Abel Janszoon Tasman)은 1642년 서해안을 돌아 남부에 도달하여 태즈메이니아 섬을 발견하고, 더 동진하여 뉴질랜드를 발견했다. 이후 식민지 시대에 타스만의 명명에 따라 전자는 "반 디멘스 랜드 (Van Diemen's Land) ", 후자는 "스테이튼 랜드 (Staten Land) "라고 불렸다.

1644년의 항해에서 타스만은 뉴기니 섬에서 토레스 해협을 종단하여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연안을 주항했다. 그러나 항해의 최대 목적인 유망한 무역 상품(향료 등)의 발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해적 윌리엄 댐피어 (William Dampier)가 17세기 말 서해안에 상륙했다. 댐피어의 보고를 받은 왕립 학회는 다시 조사선을 현지에 파견했다.

시대가 흘러 1766년, 영국은 제임스 쿡 (James Cook)을 선장으로 하는 관측대를 타히티 섬에 파견했다. 1769년 6월 3일, 예정대로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한 일행은 태평양을 남하했다. 10월 7일 뉴질랜드를 발견한 일행은 그곳을 탐험한 후 진로를 서쪽으로 바꿔 1770년4월 20일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에 도달했다. 4월 29일 시드니 남쪽에 위치한 보타니 만에 상륙했다.

쿡은 대륙의 동해안 일대를 국왕 조지 3세의 이름으로 영유한다고 선언하고, 이 땅을 "뉴 사우스 웨일스"라고 명명했다. 쿡이 영유를 선언한 범위는 현재의 뉴사우스웨일스 주보다 넓어, 현재의 빅토리아주, 퀸즐랜드주, 태즈메이니아주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결정적인 증거는 없지만, 1770년에 상륙한 제임스 쿡보다 150년 전에 야마다 나가마사가 먼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발견했다는 설이 있다[594]

3. 1. 네덜란드의 발견과 탐험

1606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박 ''뒤이프켄(Duyfken)''은 빌렘 얀스존(Willem Janszoon) 선장의 지휘 하에 오스트레일리아에 최초로 상륙했다.[32] 같은 해 루이스 바에스 데 토레스(Luís Vaz de Torres)는 토레스 해협을 항해했다.[33] 네덜란드 모험가들은 오스트레일리아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새로운 네덜란드' 라는 뜻의 '''뉴홀랜드'''(New Holland)로 명명했다.

1616년, 디르크 하토흐(Dirk Hartog)는 항로를 벗어나 서호주의 샤크 만 인근 섬에 상륙했다.[34] 1627년, 호주 남부 해안은 프랑수아 티센(François Thijssen)에 의해 발견되었고 피터 누이츠(Pieter Nuyt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36]

아벨 타스만, 반 디멘스 랜드를 발견한 최초의 유럽인, 현재 태즈메이니아로 알려짐


1642년,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은 반 디멘스 랜드(Van Diemen's Land)(나중에 태즈메이니아)와 뉴질랜드를 발견하고 피지를 목격했다.[37] 1644년, 타스만은 뉴기니 아래 북부 해안의 땅과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하여, 뉴 홀랜드 지도 제작에 기여했다.[37] 타스만의 항해 이후 네덜란드인들은 호주 북부와 서부 해안, 그리고 남부 및 남동부 태즈메이니아 해안의 거의 완전한 지도를 만들 수 있었다.[38]

3. 2. 영국과 프랑스의 탐험

1813년까지 유럽인들의 오스트레일리아 항해 경로


1606년에 네덜란드의 모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고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새로운 네덜란드' 라는 뜻의 '''뉴홀랜드'''(New Holland)로 명명했다.[39] 영국의 해적이자 탐험가인 윌리엄 댐피어는 1688년과 1699년에 뉴홀랜드 북서부 해안에 상륙했다.

1769년, 제임스 쿡 중위는 금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고 기록하기 위해 타히티로 항해했다. 그 후 뉴홀랜드의 동부 해안을 탐사하기로 결정하고, 1770년 4월 19일, ''Endeavour''호는 뉴홀랜드 동부 해안에 도착했고, 10일 후 보타니 만에 닻을 내렸다.[41] 쿡은 해안을 북쪽 끝까지 지도화했고, 1770년 8월 21일/22일 요크 곶 반도 서쪽 해안에 있는 포세션 섬에서 뉴홀랜드 동부 해안을 공식적으로 점유했다.[42] 쿡은 자신의 일기에 "우리 이전에는 어떤 유럽인도 뉴홀랜드의 이 동부 해안에 상륙한 적이 없고...''따라서 같은 규칙에 따라 대영 제국에 속한다''"라고 적었다.[43][44]

1772년 3월, 마르크-조제프 마리옹 뒤 프렌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반 디에멘 땅에 도착하여 원주민 태즈메이니아인과 조우했다.[45] 같은 해, 루이 알레노 드 생탈루아르가 이끄는 프랑스 원정대는 호주 서부 해안에 대한 주권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지만, 이를 식민지로 만들려는 시도는 없었다.[46]

4. 식민지 시대

영국의 죄수 폭증과 미국 독립 전쟁(1776년)으로 인해 영국은 1783년, 에버리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탑승한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대략 1/50도 안 되었지만, 1823~1824년 호주 대륙의 정확히 반을 차지했다. 한편, 태즈메이니아섬은 에버리진과 영국 식민지가 대치 중이었다. 다시 호주는 1825년 웨스턴오스트렐리아를 제외한 영토를 모두 식민지가 가져간다. 호주 지역에 있던 에버리진은 영국이 세운 Swan River Colony가 가져가면서 없어지고 만다. 그 Swan River Colony가 우리가 아는 웨스턴오스트렐리아가 된다. 테즈메이니아 섬의 에버리진은 영국이 세운 식민지가 가져 가면서 멸망한다. 1835년 영국이 그레이트-오스트렐리안-브라이트 연안에 세운 사우스오스트렐리아가 누에바 게일의 일부를 장악하게 된다. 1846년 누에바 게일의 북쪽을 지배하나 1년 뒤 (호주 첫 식민지)에 의해 멸망한다. 1851년 영국이 1850년 세운 빅토리아주가 출범한다. 태즈메이니아주는 1854년 빅토리아주에 동거하던 에우이카 스토카게가 빅토리아 주에 의해 쫓겨서 1856년 형성되었다. 같은 해 노드퍽 주가 생겼다. 1859년, 퀸즐랜드가 (호주 첫 식민지) 일부를 장악해 세워졌다. 1861년 사우스오스트렐리아 주가 웨스턴 오스트렐리아 주 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켰다. 1862년 사우스오스트렐리아 주가 현재의 노던 준주 쪽으로 영토를 확장시켰다. 1867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주는 현재의 노던 준주 지방을 장악했다. 1867년 (호주의 첫 식민지)는 뉴사우스웨일스주가 된다. 1883년 퀸즐랜드는 파푸아뉴기니 남부를 점령했다. 1884년 그 지역에 주가 생겼다. 1901년 모든 주가 모여 오스트레일리아를 형성하였다. 1911년 노던 준주오스트레일리아 수도 준주가 형성되었다. 1914년 호주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어느 정도 개발이 진척되자, 시드니 서쪽에 급사면을 맞대고 솟아 있는 동부 고지의 일부를 이루는 산들이 식민지의 전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산들을 넘어가는 길이 발견되고, 산지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농목의 적지에 개발의 손이 뻗쳤다. 이것은 골드 러시의 시대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주빅토리아주 일대에서 이 발견되었고,[603] 배서스트, 벤디고, 밸러랫 등에서 발견된 금을 찾아서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빅토리아주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 시작된 금광 시대는 중국부터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1850년의 40만 인구는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으로까지 증가하였다. 골드 러시 뿐만 아니라 양모 산업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는데, 1850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영국 수출 양모가 17,000톤이었던 것이 1879년에는 134,000톤으로 증가하였다.[603]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장사꾼도 모여들어 이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개 식민지 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통신과 운송 체계가 집중되면서 해안 도시들, 특히 시드니멜버른 등지의 발전이 두드러졌으며,[603] 1880년대 시드니와 멜버른의 근대적인 풍경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1890년대에 들어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인구의 3분의 2가 해안 도시를 따라 거주하였다.[603]

한편 영국 식민지 총독은 가혹한 세금 및 결정을 내리고, 결국 1854년 유레카 감옥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유혈 봉기가 일어난다. 이를 유레카 봉기라고 한다. 현재 멜버른에 있는 유레카 타워는 이 유레카 봉기를 기념한 것이다.[604] 1855년 뉴사우스웨일스주, 빅토리아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태즈메이니아주가 자치 식민지가 되었으며 1859년에는 퀸즐랜드주가 뒤를 이었다.[603]

4. 1. 식민지 건설 계획 (1788년 이전)

1717년, 장피에르 퓨리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오늘날 남호주 지역을 식민지화하는 계획을 보냈으나, 회사는 "회사에 유용하거나 이익이 될 전망이 없고, 오히려 매우 확실하고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거부했다.[47] 1747년 이매뉴얼 보웬은 이 나라를 탐험하고 식민지화하는 것의 이점을 홍보했다.[48] 존 캘린더는 1766년에 영국이 남해 또는 테라 아우스트랄리스에 추방된 죄수들의 식민지를 건설하자는 제안을 내놓았다.[50]

미국 독립 전쟁 (1775–1783)으로 영국은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대부분을 잃었고, 대체 영토를 건설하는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영국은 1718년부터 1775년까지 약 50,000명의 죄수를 신세계로 이송했으며, 이제 그 대안을 찾고 있었다.[52][53] 1779년, 제임스 쿡과 함께 1770년 항해에 동행했던 조지프 뱅크스 경은 보타니 만을 형벌 식민지로 적합한 장소로 추천했다.[54] 뱅크스의 지도에 따라, 쿡과 함께 여행했던 미국의 왕당파 제임스 매트라는 1783년에 뉴사우스웨일스를 식민지화하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55] 매트라는 이 나라가 설탕, 면화, 담배 농장에 적합하며, 뉴질랜드 목재와 삼 또는 아마는 귀중한 상품이 될 수 있고, 태평양 무역의 기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56] 1784년 시드니 경 국무 장관과의 면담 후, 매트라는 정착민으로 죄수를 포함하도록 제안을 수정하여 "공공의 경제와 개인의 인도주의"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57]

1786년 8월, 영국 정부는 죄수를 보타니 만으로 보낼 의사를 발표했다.[59]

4. 2.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끄는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탑승한 제1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여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다.[63][64] 초기에는 대략 1/50도 안 되었지만, 1823~1824년 호주 대륙의 정확히 반을 차지했다. 아서 필립은 초대 뉴사우스웨일스 총독으로, 시드니 만을 '예외 없이 세계 최고의 항구'라고 묘사했다.[65]

아서 필립, 초대 뉴사우스웨일스 총독


''Founding of the settlement of Port Jackson at Botany Bay in New South Wales in 1788'' – Thomas Gosse


초기 정착은 어려움이 많았으나, 1791년부터 배의 정기적인 도착과 무역의 시작으로 상황이 개선되었다.[69] 필립 총독은 파라마타 지역을 개발하고, 죄수와 간수 외에 자유 인구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1792년 12월, 필립은 영국으로 떠났다.[69]

토마스 왓링의 시드니 코브 (원주민: ''와란'') 풍경, 1794–1796


필립이 떠난 후, 뉴사우스웨일스 군단 장교들은 럼주 무역을 독점하며 부를 축적했다.[72] 윌리엄 블라이 총독(1806-1808)은 이를 억제하려 했으나, 1808년 럼 반란으로 실각했다.[73][74]

총독 윌리엄 블라이


1810년 라클란 맥쿼리 총독은 개혁 정치를 통해 해방자를 중용하고, 시드니의 도시 계획, 도로, 부두, 교회 및 공공 건물 건설을 추진했다.[162][75] 블루마운틴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완공되어 서쪽으로 농업과 방목이 확장되었다.[162]

1850년 호주 남동부 지도


1820년대부터 스쿼터들이 무허가 목축업을 시작했고, 1844년에는 양모가 식민지 수출의 절반을 차지했다.[80][81] 1825년, 뉴사우스웨일스의 서쪽 경계가 동경 129°로 확장되어 현재의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 경계가 되었다.[82][68]

4. 3. 추가 식민지 설립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끈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여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를 건설한 이후[84][85],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여러 식민지가 추가로 설립되었다.

1803년, 필립 기들리 킹 총독은 프랑스의 정착을 막기 위해 반 디멘스 랜드(현재의 태즈메이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84][85] 1825년 12월, 반 디멘스 랜드는 뉴사우스웨일스에서 분리된 식민지가 되었고, 1856년에는 공식적으로 태즈메이니아로 이름이 변경되었다.[88]

1834년 본토의 포트 필립 내륙으로 반 디멘스 랜드의 목축업자들이 불법 점거를 시작하였고, 1836년 포트 필립은 공식적으로 뉴사우스웨일스의 구역으로 인정받고 정착이 시작되었다. 1837년에는 멜버른의 주요 정착지가 건설되었으며, 1851년, 포트 필립 구역은 빅토리아 식민지로 뉴사우스웨일스에서 분리되었다.[90][91]

멜버른 상륙, 1840; W. 리아르데의 수채화 (1840)


1826년, 뉴사우스웨일스 총독 랠프 달링은 프랑스가 서호주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것을 막기 위해 킹 조지 사운드에 군대를 파견했다.[92] 1827년, 에드먼드 로키어 소령은 대륙의 서쪽 3분의 1을 영국 식민지로 공식 합병했다.[92] 1829년에는 현재의 프리맨틀과 퍼스 부지에 스완 강 식민지가 설립되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죄수 없는 사유화된 식민지가 되었다.[93][94]

조지 피트 모리슨의 ''퍼스의 건국 1829''


1836년에는 에드워드 기번 웨이크필드가 개발한 "체계적 식민지화" 이론에 따라 남호주 주가 사적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설립되었다.[95][96][97] 죄수 노동은 금지되었으며, 애들레이드시는 교회, 공원 및 학교를 넉넉하게 제공하도록 계획되었다.[95][96][97]

1839년의 애들레이드. 남호주는 죄수 없이 자유 식민지로 설립되었다.


1824년에는 현재의 브리즈번 부지에 모튼 베이 형벌 식민지가 설립되었다.[100][101][102] 1842년, 형벌 식민지는 폐쇄되었고 이 지역은 자유 정착을 위해 개방되었다.[100][101][102] 1859년에는 퀸즐랜드 식민지가 선포되었다.[100][101][102]

브리즈번 (모튼 베이 정착지), 1835; H. 보우먼의 수채화

4. 4. 죄수와 식민지 사회

1788년에서 1868년 사이에 약 16만 1,700명의 죄수들이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 반디멘스 랜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로 이송되었다.[103] 이들은 영국 내 죄수 과밀 문제와 미국 독립 전쟁(1776년)으로 인한 유배지 상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었다. 죄수들은 건물 건설, 농업, 항해 등 다양한 기술을 보유하여 초기 식민지 건설에 기여했다.[104] 초기에는 정부 농장과 공공 사업에 투입되었으나, 1792년 이후에는 석방자를 포함한 사기업 고용주에게 배정되었다.[106] 석방자들에게는 소규모 토지와 1년치 식량이 제공되었고,[106] 일부 죄수들은 군 장교에게 배정되어 상업 기술을 습득하기도 했다.[107]

''블랙 아이드 수와 플리머스의 스위트 폴이 보터니 만으로 이송될 연인들과 작별하는 모습'' (1792년 런던에서 출판)


1821년까지 죄수, 석방자 및 그들의 자녀들은 경작지의 3분의 2, 소의 절반, 양의 3분의 1을 소유하며 경제 활동에 참여했다.[109] 그러나 1822년과 1823년 J. T. 비지(J. T. Bigge)의 개혁으로 죄수들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식량 배급이 삭감되고, 임금 노동 기회가 제한되었으며, 2차 처벌 장소가 설립되는 등 통제가 강화되었다.[111][112]

1831년부터는 토지 보조금 제도가 경매를 통한 토지 판매로 대체되었고, 그 수익금은 근로자 지원 이주 자금으로 사용되었다. 이로 인해 1821년부터 1850년까지 20만 명의 영국 이민자가 유입되었으나, 토지는 소수 부유층에게 집중되었다.[114] 이민자의 3분의 2는 정부 지원을 받았으며, 죄수 가족에게도 무료 통행료가 제공되었다.[115] 캐롤라인 치즘과 존 던모어 랭 등은 이주 지원을 위한 자선 활동을 펼쳤다.[116]

인도주의자 캐롤라인 치즘(Caroline Chisholm)은 여성 문제와 가족 친화적인 식민지 정책을 옹호하는 선구자였다.


여성 죄수는 전체의 약 15%를 차지했으며, 식민지 내 여성 부족으로 인해 남성보다 결혼 가능성이 높았다.[117] 초기 식민지 법원은 여성의 재산권을 보장했으며, 여성들은 사업과 농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전직 죄수 출신 기업가 메리 레이비와 농업가 엘리자베스 맥아더가 대표적인 성공 사례이다.[117]

사업가 엘리자베스 맥아더는 메리노 양모 산업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1830년대부터 지원 이주 프로그램은 여성과 가족 이주를 장려하여 식민지 내 성비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했다. 캐롤라인 치섬은 이주 여성을 위한 쉼터와 직업 중개소를 설립하고 농촌 정착을 지원했다.[119][120] 1830년에서 1850년 사이 여성 비율은 24%에서 41%로 증가했다.[121]

영국 성공회는 1820년 이전까지 유일하게 인정된 교회였으며, 리처드 존슨 (1788-1802년 수석 채플린)은 공공 도덕 개선과 보건, 교육에 힘썼다.[122] 사무엘 마스덴은 가톨릭과 아일랜드 죄수들을 비난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123]

|thumb|upright=1.4|1804년 시드니에서 일어난 캐슬 힐 반란을 묘사한 그림]

죄수의 약 4분의 1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가톨릭에 대한 차별과 아일랜드 죄수에 대한 의심은 1804년 캐슬 힐 반란으로 이어졌다.[124][125] 1820년에 가톨릭 채플린이 임명되기 전까지 가톨릭 사제는 임시로만 활동했다.[126]

1836년과 1837년 교회법에 따라 성공회, 가톨릭, 장로교, 감리교 등 4개 교단에 대한 국가 지원이 이루어졌다.[126] 자선 수녀회와 같은 자선 단체들은 병원, 고아원 등을 운영하며 사회 복지에 기여했다. 종교 단체들은 19세기 전반기 학교 교육의 주요 제공자였으며, 존 던모어 랭의 오스트레일리아 대학(1831년)이 대표적인 예이다.[129] 성 요셉 수녀회 등은 1850년대 이후에도 교육 활동을 지속했다.[130]

프랜시스 포크스가 그린 시드니 코브의 개략도(1788년). 북쪽은 오른쪽이다. 현재 만의 오른쪽 아래에는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가 건설되어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울타리 치기와 산업 혁명으로 인한 실업자 증가, 그리고 미국 독립으로 인한 유배지 상실 문제에 직면했다.[595] 이에 캐나다와 서아프리카 대신 뉴사우스웨일스를 새로운 유배지로 선택하고, 아서 필립을 초대 총독으로 임명하여 식민지 건설을 추진했다.

1787년 5월 13일, 포츠머스를 출발한 '''필립이 이끄는 제1함대'''는 1788년 1월 18일 보타니 만에 도착, 포트 잭슨 만 내 시드니 코브에 정착했다. 1월 26일은 오스트레일리아 데이로 기념된다. 이후 (1790년), (1791년)가 도착하며 개발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과의 충돌이 발생했다.

정착 초기, "뉴사우스웨일스 군단" 장교들은 공유지 사유화, 무역 독점 등으로 부를 축적했다. 영국은 이맨시피스트(형기를 마친 죄수)와 자유 이민에게 토지를 무상 제공하여 자영 농민 사회를 건설하려 했으나, 부의 편중으로 인해 실패했다.

4. 5. 대륙 탐험

1798년 ~ 1799년: 조지 배스와 매튜 플린더스가 태즈메이니아를 일주하며 섬임을 증명했다.[131] 1801년 ~ 1802년: 매튜 플린더스는 호주 최초 일주를 하였다. 이때, 호주 대륙에서 태어나 일주를 한 최초의 인물인 원주민 탐험가 벙가리가 배에 탑승했다.[131]

매튜 플린더스는 1801~02년에 호주를 최초로 성공적으로 일주했다.


''플린더스가 테라 오스트랄리스를 일주할 준비 -'' 1802년 7월


1813년, 그레고리 블랙스랜드, 윌리엄 로슨, 윌리엄 웬트워스가 블루마운틴을 횡단하였고, 곧 센트럴 테이블랜드로 가는 도로가 건설되었다.[132]

1824년, 해밀턴 휴메와 윌리엄 호벨은 포트 필립을 왕복하며 머레이 강과 많은 지류를 발견, 좋은 농지와 목초지를 발견했다.[133]

1828년 ~ 1829년: 찰스 스터트가 매쿼리 강, 달링 강, 머레이 강을 탐험했다.[134]

1830년대: 측량 총감 토마스 미첼 경은 이전 탐험들을 따라 일련의 탐험을 수행했다. 미첼은 세 명의 원주민 안내인을 고용했고 많은 원주민 지명을 기록했다. 1836년 머레이 강에서 원주민과의 폭력적인 충돌이 발생했다.[135][136]

1839년: 파울 에드문트 스트젤레키 백작이 호주 알프스에서 측량 작업을 수행했고, 코시치우슈코 산을 등반하여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명명했다.[137][138]

|thumb|upright=1.4|존 롱스태프, ''1861년 4월 21일 일요일 저녁, 버크, 윌스, 킹이 버려진 캠프인 쿠퍼스 크릭에 도착'']]

1840년대: 루드비히 라이하르트가 호주 북부 탐험을 이끌었으나, 1848년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륙을 횡단하려다 일행과 함께 실종되었다.[139]

1860년: 버크와 윌스는 대륙 남북 횡단에 실패하고 1861년에 사망했다.[141][142]

1862년: 존 맥두얼 스튜어트가 대륙 남북 횡단에 성공, 그의 탐험대는 호주 횡단 전신선 경로를 지도화했다.[143]

1870년대: 어니스트 자일스와 윌리엄 고스가 호주 중부를 탐험, 1872년 자일스는 카타 츄타를 발견, 1873년 고스는 울루루를 발견했다.[144][145]

1879년: 알렉산더 포레스트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북부 해안에서 횡단 전신선까지 트레킹하여 킴벌리 지역에서 목축에 적합한 토지를 발견했다.[143]

4. 6. 영국 정착이 원주민에게 미친 영향

영국 정착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에게 광범위하고 비극적인 영향을 미쳤다. 1788년 1월, 아서 필립이 이끈 첫 함대가 시드니에 도착하면서 영국인의 정착이 시작되었다.[146] 이들은 원주민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라는 지시를 받았지만,[147] 결과는 참혹했다.

알렉산더 슈람의 ''남호주 풍경'' (1850)은 독일 정착민들과 원주민들을 묘사한다

질병: 원주민들은 약 6만 년 동안 상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거의 없었다.[151] 1789년 4월에 발생한 천연두는 시드니 지역 원주민 인구의 약 절반을 사망하게 했다.[148][149][150] 이 외에도 홍역, 인플루엔자, 장티푸스, 결핵과 같은 질병이 원주민 사회에 높은 사망률을 초래했다.[152] 성병 또한 원주민 인구 감소의 요인이었으며, 1855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의 원주민 출산율을 약 40% 감소시켰다.[153] 1890년경에는 퀸즐랜드의 일부 지역에서 원주민 인구의 최대 50%가 성병에 영향을 받았다.[153]
갈등과 토지 수탈: 영국 정착민들은 영국 문명의 우월성과 그들이 "개선"한 토지에 대한 권리를 가정했기 때문에,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154] 1794년부터 1800년까지 정착민과 다루그족 사이에 격렬한 갈등이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26명의 정착민과 최대 200명의 다루그족이 사망했다.[158][159] 애핀 학살(1816년 4월)에서는 최소 14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다.[160][161] 1820년대 그레이트 디바이딩 산맥 너머로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위라주리족과의 갈등이 발생하여, 1822년부터 1824년까지 15~20명의 식민지 개척자가 사망하고, 15명에서 100명으로 추산되는 원주민이 사망했다.[163][164] 반 디멘스 랜드에서는 1824년 흑색 전쟁이 발발하여 약 200명의 정착민과 600~900명의 원주민 태즈메이니아인이 사망했다.[166][167] 1830년대 스완 강 식민지에서는 핀자라 학살로 인해 약 15명에서 30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다.[169][170] 1850년 이후, 원주민 경찰 부대와 새로운 총기의 사용으로 원주민 사상자 수가 더욱 증가했다. 갈등은 1840년대에 뉴사우스웨일스에서, 1860년부터 1880년까지 퀸즐랜드에서 특히 격렬했다. 코니스톤 학살(1928년)에서는 최소 31명의 원주민이 사망했다.[173]

|thumb|upright=1.4|left|약 1828-1830년경 반 디멘스 랜드에서 아서 중위 총독이 발행한 선언문으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을 위해 그림 형태로 영국 정의의 원칙을 설명한다. 태즈메이니아는 호주의 다른 영국 식민지보다 더 높은 수준의 갈등을 겪었다.[155]

|thumb|1876년 9월 퀸즐랜드 주 크린 크릭 인근 전투]]

|thumb|left|호주 원주민 경찰은 백인 장교의 지휘를 받는 원주민 기병으로 구성되었으며, 동부 호주, 특히 뉴사우스웨일스와 퀸즐랜드에서 원주민 부족을 '분산'시키는 데 주로 책임이 있었다.]]
동화와 보호 정책: 맥쿼리 총독은 원주민을 동화시키려 시도하여 토지 보조금, 원주민 농장, 원주민 학교를 설립했지만, 1820년대에 이르러 실패했다.[179][180][181] 1839년, 국경 분쟁이 격화되면서 원주민 보호관이 임명되었으나, 1857년까지 비용 문제와 목표 달성 실패로 폐쇄되었다.[182][183] 1825년, 뉴사우스웨일스 주 총독은 레이크 매쿼리에 원주민 기독교 선교를 위해 1만 에이커를 기증했다.[184]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1860년부터 1894년까지 116개의 원주민 보호 구역이 설립되었다. 빅토리아 원주민 보호 위원회(1869년 설립)는 빅토리아 원주민의 고용, 교육 및 거주지를 규제할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으며, 1886년 "혼혈" 원주민을 선교 활동과 보호 구역에서 배제할 권한을 얻었다.[186]

5. 자치에서 연방으로

1901년 1월 1일, 6개의 식민지 주는 영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고, 각각의 식민지 주는 연방주로 자리매김하였다.[604][603] 1942년 10월 9일 외교권과 국방권을 얻은 독립국이 되었으며 1986년 3월 3일 독자적인 헌법이 마련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국민들 약 40만 명 정도가 참전하였고 그중 약 6만 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다. 현재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NZAC, 앤잭, Australia & New Zealand Army Corps)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제1차 세계 대전(61,928명 전사), 제2차 세계 대전(39,400명 전사), 한국 전쟁(339명 전사), 베트남 전쟁(520명 전사)에 참전하였다.

5. 1. 식민지 자치 정부와 골드 러시

1842년 영국은 뉴사우스웨일스에 제한적인 대표 정부를 부여했다. 1850년에는 뉴사우스웨일스 모델을 기반으로 한 반선거 입법 평의회를 반 디멘스 랜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및 새롭게 창설된 빅토리아 식민지에 부여했다.[195] 1851년 뉴사우스웨일스주빅토리아주 일대에서 이 발견되면서,[603]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금광 발견은 호주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 1851년 43만 명이었던 인구가 1861년에는 117만 명으로 급증하였다.[197][198] 특히 중국인의 증가는 서양 출신자들에게 위협으로 비춰졌고, 이는 백호주의 강화로 이어졌다.

1854년 유레카 감옥에서 광산 노동자들의 유혈 봉기인 유레카 봉기가 일어났다.[604] 이는 노동자의 권리 확대로 이어져,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동 운동의 원점으로 여겨진다. 왕립 위원회 조사 후, 월간 면허는 소지자에게 투표권과 금광에 거주지를 건설할 권리를 부여하는 더 저렴한 연간 광부 권리로 대체되었다.[201][202]

1855년 뉴사우스웨일스주, 빅토리아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태즈메이니아주가 자치 식민지가 되었으며, 1859년에는 퀸즐랜드주가, 1890년에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가 자치 정부를 수립했다.[603][204] 비밀 투표는 1856년 태즈메이니아, 빅토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서 채택되었고, 이후 다른 주들로 확산되었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는 1856년에 하원에 대한 보편적 남성 참정권을 도입했고, 다른 주들도 점차 남성 보통 선거권을 도입했다. 퀸즐랜드주는 1885년에 원주민 남성의 투표를 배제했다.[205] 여성 참정권은 1895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 처음 획득했다.[207]

1860년 ~ 1890년은 장기 호황의 시기였다. 금은 호주의 최대 수출품이었고, 양모 산업도 급격히 성장했다.[603] 정부 부문은 기반 시설에 많은 투자를 했고, 철도의 확장은 밀 벨트 개발을 자극했다.[212][213] 1880년대에 호주 인구의 절반이 도시에 거주하면서 호주는 영국, 미국 및 캐나다보다 더 도시화되었다.[215] 1870년에서 1890년 사이에 호주의 1인당 평균 소득은 미국의 1인당 평균 소득보다 50% 이상 높았다.[216]

1856년 시드니와 멜버른의 건설 노동자들은 세계 최초로 8시간 노동일을 쟁취했다. 1880년대에는 노동 조합이 성장하여 숙련도가 낮은 노동자들에게까지 확산되었다.[219] 1890년대 경제 불황은 노동 운동을 강화시켰고,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결성으로 이어졌다. 1890년 해상 파업의 패배는 노동조합들이 정당을 결성하도록 이끌었다.

5. 2. 민족주의 성장과 연방 운동

1880년대 후반, 호주 식민지 거주자 대다수는 호주 출생이었지만, 90% 이상이 영국 및 아일랜드 혈통이었다.[228] 호주 원주민 협회는 대영 제국 내 호주 연방을 위해 캠페인을 벌였고, 호주 문학과 역사를 장려했으며, 1월 26일을 호주의 국경일로 지정하도록 로비했다.[229]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호주인들이 영국 "인종"의 구성원으로서 공통의 피를 공유한다고 믿었다.[230] 헨리 파크스는 1890년에 "우리 모두에게는 핏줄이라는 진홍색 실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의 위대한 호주 국민으로 단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231]

소수의 민족주의자들은 통일된 호주의 기반으로 공유된 "영국성"보다는 독특한 호주 정체성을 강조했다. ''The Bulletin''과 같은 급진적인 잡지와 앤드류 잉글리스 클라크와 같은 일부는 공화주의자였으며, 다른 이들은 영국 군주에게 형식적인 역할만 부여하는 완전 독립적인 호주를 지지했다.[232]

통일된 호주는 일반적으로 백호주의와 관련이 있었다. 1887년, ''The Bulletin''은 구세계의 종교적, 계급적 분열을 뒤로하고 떠난 모든 백인 남자가 호주인이라고 선언했다.[233] 백호주의는 저렴한 아시아 노동력의 배제를 의미했으며, 이는 노동 운동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234] 1855년, 빅토리아 식민지 정부는 중국인이 빅토리아에 입국할 때 과세하는 이주 제한을 실시했다. 퀸즐랜드는 1877년에 "중국인 이민 제한법"을, 뉴사우스웨일스는 1896년에 "유색 인종 제한 및 단속법"을 제정했다. 1901년 제정된 연방 헌법 제51조에는 이민 제한 권리와 유색 인종 대상 특별법 제정 권리를 연방이 갖는다고 명기되었다.

독특한 호주 화풍의 기원은 종종 하이델베르크 학교 운동과 관련이 있으며, 톰 로버츠의 ''양털 깎기''(1890)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증가하는 민족주의적 정서는 독특한 호주 예술과 문학의 발달과 관련이 있었다. 아서 스트리튼, 프레데릭 맥커빈, 톰 로버츠와 같은 하이델베르크 학교의 예술가들은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유럽 인상주의자들의 예시를 따랐다. 그들은 호주 풍경의 빛과 색채를 포착하고 "도시의 혼합된 삶과 역 및 부시의 특징적인 삶"에서 독특함과 보편성을 탐구했다.[235]

부시 발라드 시인 반조 패터슨은 호주의 비공식 국가로 여겨지는 "왈칭 마틸다"(1895)를 포함한 다수의 고전 작품을 썼다.


1890년대에 헨리 로슨, 반조 패터슨 및 ''The Bulletin''과 관련된 다른 작가들은 부시 생활의 본질과 독립, 금욕주의, 남성적 노동, 평등주의, 반권위주의 및 동료애의 주제를 탐구하는 시와 산문을 제작했다. 주인공은 종종 양털 깎이, 경계 기수 및 유랑 부시 노동자였다. 다음 10년 동안 로슨, 패터슨 및 스틸 루드, 마일스 프랭클린, 조셉 퍼피와 같은 다른 작가들은 독특한 국가 문학을 창조하는 데 기여했다. 패터슨의 발라드 "스노위 강에서 온 남자"(1890)는 인기를 얻었고, 그의 노래 "왈칭 마틸다"(c. 1895)의 가사는 많은 호주인들에게 비공식 국가가 되었다.[236]

성장하는 민족주의 정서는 식민지 간 관세 장벽으로 인한 경제적 비효율성, 서비스 중복, 단일 국내 시장 부재에 대한 비즈니스 우려와 일치했다.[237] 또한 독일과 프랑스의 야망에 대한 식민지적 우려는 연방 호주 방위군과 단일 표준 철도망 구축에 대한 영국의 압력으로 이어졌다.[238] 1885년에 오스트랄라시아 연방 의회가 결성되었지만, 권한이 거의 없었고 뉴사우스웨일스주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는 가입을 거부했다.[239]

헨리 파크스 경이 1890년 3월 1일 멜버른에서 열린 연방 회의에서 첫 번째 결의안을 전달하고 있다


연방의 장애물은 뉴사우스웨일스주와 빅토리아주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는 소규모 식민지의 두려움이었다. 특히 퀸즐랜드주는 백호주 정책을 선호했지만 사탕수수 산업에서 남태평양 섬 주민 노동자에 대한 예외를 유지하고자 했다.[240] 또 다른 장벽은 뉴사우스웨일스주의 자유 무역 정책이 빅토리아주와 다른 식민지에서 지배적인 보호 무역주의 정책과 상충한다는 것이었다. 헨리 파크스는 연방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그의 1889년 텐터필드 연설은 대의를 위한 지지를 모으는 데 중요했다.[241]

1891년, 전국 오스트랄라시아 회의가 시드니에서 열렸지만, 경제 침체와 식민지 의회 반대로 진전이 지연되었다.[242] 시민 연방 동맹이 결성되었으며, 1893년 7월 코로와 회의에서 직접 선출된 대표가 있는 헌법 회의와 제안된 헌법 승인을 위한 국민 투표를 포함하는 연방 계획을 개발했다. 조지 리드는 "코로와 계획"을 지지했고, 1895년에 다른 총리의 과반수를 설득하여 채택하게 했다.[243]

퀸즐랜드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는 1897년과 1898년에 회의를 개최한 헌법 회의에 대표자를 보냈다. 이 회의는 영국 왕실 아래 연방 국가의 연방 정부를 위한 헌법 초안을 작성했다.[244] 1898년 국민 투표 결과 빅토리아주,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주, 태즈메이니아주에서 헌법에 대한 압도적인 다수가 찬성했지만,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는 과반수를 얻지 못했다.[245] 다른 식민지 총리들은 뉴사우스웨일스주에 여러 양보를 했고, 1899년에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를 제외한 모든 식민지에서 추가 국민 투표가 실시되어 모두 찬성표가 나왔다.[246]

1900년 3월, 에드먼드 바턴과 알프레드 디킨을 포함한 대표단이 런던으로 파견되었다. 영국 정부와의 협상 끝에, 연방 법안은 1900년 7월 5일 제국 의회를 통과했고, 7월 9일에 왕실 승인을 받았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주는 이후 새로운 연방에 가입하기로 투표했다.[247] 1901년 1월 1일, 6개의 식민지 주는 영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고, 각각의 식민지 주는 연방주로 자리매김하였다.[604][603]

6. 연방에서 전쟁까지 (1901년 ~ 1914년)

1901년 1월 1일, 6개의 식민지 주는 영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고, 각각의 식민지 주는 연방주로 자리매김하였다.[604][603] 총독인 호프턴 경에 의해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이 선포되었고, 에드먼드 바튼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 총리로 선서했다.[247] 최초의 연방 선거는 1901년 3월에 실시되었으며, 보호주의 정당이 자유 무역 정당에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고,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ALP)은 3위를 차지했다. 노동당은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양보를 제공하는 정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바튼의 보호주의자들은 앨프레드 디킨을 법무장관으로 하여 정부를 구성했다.[248]

에드먼드 바튼 (왼쪽), 초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 앨프레드 디킨, 제2대 총리


|섬네일|왼쪽|1901년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 의회 개회|300x300px]]

새로운 오스트레일리아 의회가 통과시킨 최초의 법 중 하나는 1901년 이민 제한법이었다. 백호주의 정책의 핵심인 이 법은 아시아 이민자들을 배제하기 위해 유럽 언어의 필기 시험을 사용했는데, 이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생활 수준과 다수 영국 문화에 위협이 된다고 여겨졌다.[249][250] 1902년 정부는 연방 관할 구역에서 여성 참정권을 도입했지만, 동시에 원주민들은 주 관할 구역에서 이미 투표권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참정권에서 제외했다.[253]

|섬네일|백호주의 정책 시행은 새로운 의회의 첫 번째 행위 중 하나였다. 사진: 멜버른 펀치 (1888년 5월경)]]

정부는 수입에 대한 관세를 도입하여 세수를 늘리고 오스트레일리아 산업을 보호했다.[254] 1905년 7월, 디킨은 노동당의 지원을 받아 보호주의 정부를 구성했다. 새로운 정부는 일련의 사회 개혁과 오스트레일리아 산업에 대한 관세 보호가 "공정하고 합리적인" 임금 제공과 연계될 "신보호"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노사 관계 법안에 대한 이견으로 1904년 4월 디킨의 보호주의 정부가 붕괴되었고, 크리스 왓슨 총리 하에 최초의 국가 노동당 정부가 임명되었다. 왓슨 정부는 4월에 붕괴되었고, 조지 리드 총리 하의 자유 무역 정부는 주 간의 산업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연방 조정 및 중재 법원을 위한 법안을 성공적으로 도입했다.[255] 1907년 수확기 사건에서, 조정 및 중재 법원의 H. B. 히긴스는 아내와 세 자녀를 부양하는 남성 가장의 필요에 기초한 기본 임금을 설정했다. 1914년까지 연방 정부와 모든 주에서 산업 분쟁을 해결하고 임금과 조건을 고정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256][257]

노동당의 기반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 조합 운동이었는데, 이는 1901년 10만 명 미만에서 1914년 50만 명 이상으로 성장했다.[258] 1905년, 노동당은 연방 차원에서 "인종 순수성 유지에 기반한 오스트레일리아 정서 배양"과 "독점의 집단적 소유"를 포함하는 목표를 채택했다.[260]

|섬네일|8시간 노동제를 지지하는 행진, 조지 스트리트, 시드니, 1909년 10월 4일]]

1906년 12월 선거 이후 디킨의 보호주의 정부가 권력을 유지했지만, 1908년 노령 연금 및 새로운 보호 관세에 대한 법안이 통과된 후 노동당은 정부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 11월 앤드류 피셔는 두 번째 노동당 총리가 되었다. 이에 반해 야당은 반노동 연합을 결성했고, 디킨은 1909년 6월 총리가 되었다.[261]

1910년 5월 선거에서 노동당은 양원에서 과반수를 차지했고, 피셔는 다시 총리가 되었다. 노동당 정부는 누진 토지세(1910), 장애 연금(1910) 및 출산 수당(1912)을 포함한 일련의 개혁을 도입했다. 정부는 연방 은행(1911)을 설립했지만, 독점 국유화와 연방 무역 및 상업 권한 확대를 위한 국민 투표는 1911년과 1913년에 부결되었다. 연방 정부는 1911년에 노던 준주에 대한 책임을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인수했다.[262][263] 정부는 국방 지출을 늘리고, 이전 정부가 도입한 강제 군사 훈련 시스템을 확장하고,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을 창설했다.[264][265][266]

새로운 연방 자유당은 1913년 5월 선거에서 승리했고, 전 노동당 지도자 조셉 쿡이 총리가 되었다. 쿡 정부가 연방 공무원에서 노동 조합원의 특혜를 폐지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의회가 이중 해산되었다. 노동당은 1914년 9월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고, 피셔가 다시 취임했다.[267]

전쟁 전 시기에는 인구와 경제가 강력하게 성장했다. 경제는 75% 성장했으며, 농촌 산업, 건설, 제조업 및 정부 서비스가 선두를 달렸다.[268] 인구는 1901년 400만 명에서 1914년 50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10년부터 1914년까지 30만 명에 육박하는 이민자들이 도착했는데, 모두 백인이었고 거의 모두 영국에서 왔다.[269]

7.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8월 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자, 이 선전 포고는 자동적으로 영국의 모든 식민지와 자치령을 포함하게 되었다.[270] 이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였다. 전쟁에 대한 국민적 열기는 높았고, 양대 정당 모두 영국에 2만 명의 호주군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271][272] 1903년 국방법은 징집병의 해외 파병을 금지했기에, 새로운 지원병 부대인 호주 제국군(AIF)이 창설되었다.[271][272]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과 함께 연합국 측에 서서 참전했다. 7월 31일 "마지막 한 사람, 마지막 한 실링까지 (our last man and our last shilling)" 영국과 함께 싸워야 한다고 호소한 노동당 당수 앤드루 피셔총리에 취임하여 해군을 파견하여 남태평양의 독일 영토를 점령했다.[597]

AIF는 호주 뉴질랜드 육군단(ANZAC)에 통합되어 갈리폴리 전역에 참전했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8,141명의 전사자를 내는 큰 손해를 입었지만, 작전 결행일인 4월 25일은 이후 앤잭 데이(ANZAC Day)로 기념되었다.[276][598]

1916년, AIF의 5개 보병 사단은 서부 전선으로 파견되었다. 프롬멜 전투에서 AIF는 24시간 만에 5,533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는 호주 군사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단일 전투였다.[279] 1917년 11월, 5개의 호주 사단은 호주 군단으로 통합되었고, 1918년 5월에는 호주 장군 존 모나시가 지휘권을 인수했다. 호주 군단은 1918년 독일 춘계 공세를 저지하고 그 해 8월 연합군의 반격에 크게 관여했다.[281]

이집트의 호주 병사들 (1914년, 연대 마스코트인 캥거루와 함께)


중동에서는 호주 경마병 여단이 1916년 8월 로마니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18년에는 팔레스타인을 지나 시리아까지 진격하여 10월 31일 오스만 제국의 항복을 이끌어냈다.[282]

1918년 11월 11일 전쟁이 끝날 때까지, 324,000명의 호주인이 해외에서 복무했다. 사상자는 60,000명의 사망자와 150,000명의 부상자를 포함하며, 이는 연합군 중 가장 높은 사상률이었다.[283]

국내에서는 1914년 10월, 피셔 노동당 정부가 전쟁 예방법을 도입하여 전쟁 수행에 협력하였다.[284] 빌리 휴즈가 1915년 10월 피셔를 수상으로 교체한 후, 반독일 동맹이 결성되었고, 7,000명의 독일인 및 기타 "적대 외국인"이 전쟁 기간 동안 수용소로 보내졌다.[287][285]

|섬네일|1919년 빌리 휴즈 수상]]

군 입대도 감소하여 1915년 최고 월 35,000명에서 1916년 월 6,000명으로 감소했다.[291] 해외 파병을 위한 징병제 도입은 1916년 10월 징병 국민투표와 두 번째 국민투표에서 모두 부결되었다.

파리 강화 회의에는 윌리엄 휴즈총리가 전권 대표로 참가했다. 태평양의 구 독일령 제도 귀속에 대해서는 일본과 격렬하게 다툰 끝에, 적도를 사이에 두고 북쪽을 일본이, 남쪽을 오스트레일리아가 C식 위임통치령으로 확보하는 것으로 타결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독일령 뉴기니에 대한 특별 국제 연맹 위임 통치를 획득하여 무역과 이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297] 또한 일본이 제안한 인종 평등안(국제 연맹 규약에 인종 차별 철폐 조항 삽입)에 대해 캐나다와 함께 반대하여 이를 저지했다.[297] 베르사유 조약의 서명국이자 국제 연맹의 정회원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는 주권 국가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298]

8. 전간기 (1919년 ~ 1939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빌리 휴즈 총리는 구 자유당과 노동당의 분리 세력으로 구성된 국민당을 이끌었다.[299] 스페인 독감으로 약 12,000명의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사망했다.[299]

존 플린 목사,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의 창립자


선구적인 비행사 찰스 킹스포드 스미스 경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에 영향을 받아 1920년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이 결성되었다.[300][301] 같은 해 농본주의를 내세운 컨트리당(국민당)이 결성되었다.[302] 1923년 빅토리아 경찰 파업을 비롯한 산업 분쟁이 계속되었고,[303] 1927년 오스트레일리아 노동조합 협의회(ACTU)가 설립되었다.

1920년대 영화 산업은 쇠퇴하였고,[305][306] 1928년 존 플린 목사에 의해 로열 플라잉 닥터 서비스가 설립되었다.[315]

스탠리 브루스는 1923년에 총리가 되었고, 1925년 연설에서 "사람, 돈, 시장이 오스트레일리아의 필수 요구 사항"이라고 말했다.[307] 1920년대 이민 캠페인으로 거의 30만 명의 영국인이 오스트레일리아로 이주했다.[308] 귀환 군인을 토지에 정착시키려는 계획은 대체로 실패했다.[309] 주 정부와 연방 정부는 1920년대에 해외에서 막대한 차입을 했고, 1928년 대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310] 제국 특혜에도 불구하고 영국과의 무역 수지 균형은 달성되지 못했고, 밀과 양모가 오스트레일리아 전체 수출의 3분의 2 이상을 차지했다.[311]

오스트레일리아는 운송 및 통신의 새로운 기술을 수용했다. 1929년에는 500,000대의 자동차와 트럭이 있었다.[312] 콥 앤드 코는 1924년에 문을 닫았다.[313] 1920년 콴타스가 설립되었다.[314] 찰스 킹스포드 스미스 경은 1928년 태평양 횡단을 완료했다.[316]

조지 5세와 각국 총리들.


1926년 제국 회의에서 영국 제국 지도자들은 1926년 발푸어 선언을 통해 영국 제국의 도미니언을 정의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1942년까지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비준하지 않았다.[317] 1986년 오스트레일리아법은 영국 의회와 오스트레일리아 주 간의 모든 잔존 관계를 제거했다.

1929년 월가 대폭락 이전부터 호주 경제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323] 1927년 경제가 둔화되면서 제조업이 위축되고 실업률이 증가했다.[323]

1929년 호주 연방 선거에서 호주 노동당이 압승을 거두었고, 제임스 스컬린이 총리가 되었다. 다양한 위기 해결 "계획"이 제안되었고,[324] 1931년 6월 연방 및 주 정부는 "주 총리 계획"을 수락했다.[325] 뉴사우스웨일스 주 총리 잭 랭은 이 계획을 거부했고, 1932년 총독에 의해 해임되었다.[326]

1931년 5월 연합 호주당이 창설되었고, 1931년 호주 연방 선거에서 조셉 라이언스가 이끄는 연합 호주당이 승리했다.[327] 라이언스 정부는 대공황으로부터의 회복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329] 임금 인하가 시행되었고 산업 관세 보호가 유지되었으며, 1930년대 동안 농업에서 제조업으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호주의 실업률은 1932년에 29%로 정점을 찍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다.[330][331] 실업률은 지역, 연령, 성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333] 지방 지역에서는 밀작지대의 소규모 농부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335]

돈 브래드먼과 파 라프와 같은 스포츠 스타들의 성공은 대공황 시대에 호주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켰다.[336][337]

연방 결성 이후 원주민 관련 업무는 주 정부의 관할이었지만, 1911년부터 연방 정부가 노던 준주의 원주민을 관할했다. 보호 구역 및 선교 활동이 이루어졌고,[340] 혼혈 원주민 아동 격리 정책이 지속되었다.[341] 1937년 회의에서 혼혈 원주민의 백인 사회로의 생물학적 동화 정책이 지지되었다.[344]

9. 제2차 세계 대전

1901년 1월 1일, 6개의 식민지 주는 영연방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고, 각각의 식민지 주는 연방주로 자리매김하였다.[604][603] 1942년 10월 9일 외교권과 국방권을 얻은 독립국이 되었으며 1986년 3월 3일 독자적인 헌법이 마련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국민들 약 40만 명 정도가 참전하였고 그중 약 6만 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다. 현재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단(ANZAC, 앤잭, Australia & New Zealand Army Corps)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나라는 제1차 세계 대전(61,928명 전사), 제2차 세계 대전(39,400명 전사), 한국 전쟁(339명 전사), 베트남 전쟁(520명 전사)에 참전하였다.

1941년 로버트 멘지스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1930년대 후반까지 국방은 호주인들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37년 선거에서 양당 모두 중국의 일본의 공격과 유럽의 독일의 공격이 증가하는 상황에서 국방비 지출 증가를 옹호했다. 그러나 국방비 지출을 어떻게 배분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연합 오스트레일리아당 정부는 "제국 방위 정책"에서 영국과의 협력을 강조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싱가포르의 영국 해군 기지와 영국 해군 전투 함대였으며, "필요할 경우 이를 사용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347] 전간기 국방비 지출은 이러한 우선순위를 반영했다. 1921년부터 1936년까지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에 총 4천만 파운드, 호주 육군에 2천만 파운드,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공군(1921년 창설, 세 부대 중 "가장 젊은")에 6백만 파운드가 지출되었다. 1939년, 2척의 중순양함과 4척의 경순양함을 포함한 해군은 전쟁에 가장 잘 대비된 부대였다.[348]

인도양에서 1941년 11월 해전에서 손실된 경순양함


태평양에서 일본의 의도를 두려워한 멘지스는 도쿄와 워싱턴에 독립적인 대사관을 설립하여 사태 전개에 대한 독립적인 조언을 받았다.[349] 개빈 롱은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야당이 제조 능력 확충과 육군 및 왕립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에 대한 더 많은 강조를 통해 더 큰 국가 자립을 촉구했으며, 존 라바락 육군 참모총장도 이를 옹호했다고 주장한다.[350] 1936년 11월, 노동당 지도자 존 커틴은 "영국 정치가들이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할 능력, 심지어 준비성에 의존하는 것은 호주의 국방 정책을 세우기에는 너무 위험한 위험이다"라고 말했다.[351] 존 로버트슨에 따르면, "일부 영국 지도자들도 자국이 동시에 일본과 독일과 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것은... 1937년 제국 회의와 같은 호주와 영국의 국방 계획자 회의에서 솔직하게 논의된 적이 없었다".[352]

1939년 9월까지 호주 육군은 3,000명의 정규군으로 구성되었다.[353] 토머스 블라미 소장이 주도한 1938년 말의 징병 캠페인은 예비 민병대를 거의 8만 명으로 증가시켰다.[354] 전쟁을 위해 창설된 첫 번째 사단은 제2차 AIF의 제6사단으로 지정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서류상으로 5개의 민병대 사단과 제1차 AIF가 있었다.[355]

파푸아뉴기니의 밀른 만에 있는 호주군. 호주 육군은 1942년 8월~9월 밀른 만 전투에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 제국 육군에 처음으로 패배를 안겨주었다.


1945년 6월 파푸아뉴기니 웨왁 근처에서 작전을 펼치는 호주 경기관총 팀


1939년 9월 3일, 로버트 멘지스 총리는 전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영국이 독일에 선전 포고를 했고, 그 결과 호주 또한 전쟁에 돌입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356] 호주는 6년간의 세계적인 분쟁에 참여하여 토브룩 공방전, 뉴기니 전역 등 다양한 장소에서 전투를 벌였다. 국내에서는 일본의 공격으로 시드니 항에 소형 잠수함 공격이 가해졌고, 노던 준주의 수도인 다윈과 그 인근 지역에 매우 심한 공습이 가해졌다.[357]

제2차 호주 제국군과 지역 방어를 위한 시민 민병대가 조직되었고, 싱가포르 방어 시설을 증강하지 못한 영국에 대해 불안감을 느낀 멘지스는 유럽에 군대를 투입하는 데 신중했다. 1940년 6월 말까지 프랑스, 노르웨이, 덴마크, 저지대가 나치 독일에 함락되었고 영국은 그들의 자치령과 함께 고립되었다. 멘지스는 연방 권한을 강화하고 징병제를 도입하면서 "총력전"을 요구했다.[358]

1941년 1월, 멘지스는 싱가포르 방어의 취약성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영국으로 갔고, 블리츠 기간 동안 런던에 도착한 멘지스는 윈스턴 처칠의 영국 전쟁 내각에 초대되었다. 일본의 위협이 임박하고 호주 육군이 그리스 전투와 크레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채 호주로 돌아온 멘지스는 전쟁 내각을 구성하기 위해 노동당에 다시 접근했지만,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의회 과반수를 채우지 못한채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존 커틴이 총리로 취임했고,[349] 8주 후, 일본은 진주만 공격을 감행했다.

북아프리카 토브룩에서 순찰하는 제2/13 보병 대대. (AWM 020779). 1941년 토브룩 공방전에서 호주 수비대는 전쟁 발발 이후 히틀러의 기갑 사단의 진격을 처음으로 막아냈다.


1940년부터 1941년까지 호주군은 제2차 세계 대전 지중해 및 중동 전역에서 컴퍼스 작전, 토브룩 공방전, 그리스 전역, 크레타 전투, 시리아-레바논 전역, 엘 알라메인 제2차 전투를 포함하여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슬리 모스헤드 중장이 지휘하는 약 14,000명의 호주 군대가 1941년 4월부터 8월까지 리비아 토브룩에서 에르빈 롬멜 장군의 독일-이탈리아 군대에 포위되었다. 나치 선전가 로드 호 호는 수비수를 '쥐'라고 조롱했는데, 이는 군인들이 아이러니하게 칭찬으로 받아들인 용어였다: "토브룩의 쥐".[359] 이집트와 수에즈 운하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이 포위 공격으로 독일군의 진격이 처음으로 중단되었다.

가 1941년 11월 독일 순양함 ''코르모란''과의 HMAS 시드니 격침 전투에서 전원 사망하면서 전쟁은 호주로 더욱 가까워졌다.

1941년 12월 8일 (동부 호주 시간) 하와이의 미국 해군 기지인 진주만이 공격받았고, 싱가포르를 방어하기 위해 파견된 영국 전함 와 순양전함 는 곧 격침되었다. 1941년 12월 27일 커틴은 "호주가 전통적인 유대 관계나 영국과의 친족 관계에 대한 어떤 고통도 없이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라고 발표했다.[361]

연합군 태평양 사령관인 미국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와 존 커틴 총리


영국령 말라야는 빠르게 붕괴되었고, 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에서 약 15,000명의 호주 군인이 전쟁 포로가 되었다. 커틴은 "호주를 위한 전투"가 뒤따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2월 19일, 다윈은 공습을 겪었고, 이후 19개월 동안 호주는 거의 100번의 공습을 받았다.

1943년 태국의 타르사우에서 네덜란드 및 호주 전쟁 포로. 22,000명의 호주인이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고, 8,000명이 전쟁 포로로 사망했다.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1942년 3월 필리핀의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호주와 함께 태평양 방어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커틴은 호주 군대를 맥아더 장군의 지휘하에 두는 데 동의했고, 맥아더는 "남서 태평양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 커틴은 이로써 호주의 외교 정책의 근본적인 변화를 주도했다. 맥아더는 1942년 3월 멜버른으로 사령부를 옮겼고, 미국 군대가 호주에 집결하기 시작했다. 1942년 5월 말, 일본 소형 잠수함이 시드니 항 공격으로 시드니 항에서 숙박선을 격침시켰다. 1942년 6월 8일, 두 척의 일본 잠수함이 시드니 동부 교외와 뉴캐슬 시를 잠시 포격했다.[362]

호주를 고립시키기 위해 일본은 호주의 뉴기니 준주의 포트모르즈비에 해상 침공을 계획했지만,1942년 5월, 미국 해군은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과 교전하여 공격을 중단시켰다.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이 효과적으로 패배했고, 일본 육군은 북쪽에서 모어즈비에 대한 육상 공격을 시작했다.[131] 1942년 7월부터 11월까지 호주군은 코코다 트랙을 통해 도시로의 일본의 시도를 격퇴했다. 1942년 8월 밀른 만 전투는 연합군이 일본 육군에 처음으로 승리한 전투였다.

호주 군인들이 1943년 뉴기니 카이아피트 전투에서 획득한 일본 국기를 전시하고 있다.


한편,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은 연합군을 이집트로 밀어 넣었다. 1942년 7월부터 11월까지 호주 제9사단은 엘 알라메인 제1차 전투와 엘 알라메인 제2차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는 북아프리카 전역의 흐름을 연합군에게 유리하게 바꾸었다.[363]

1942년 11월부터 1943년 1월까지의 부나-고나 전투는 뉴기니 전역의 1945년까지 이어진 씁쓸한 마지막 단계를 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1943~44년 파푸아와 뉴기니에서의 공세는 호주군이 수행한 단일 최대 규모의 연결된 작전이었다.[364] 1943년 5월 14일, 호주 병원선 ''센토르''는 퀸즐랜드 해안에서 일본의 습격자들에 의해 침몰되었고, 간호 인력을 제외한 268명이 사망하여 일본에 대한 여론을 더욱 격분시켰다.[365][366]

호주 전쟁 포로는 이 시기에 태평양 전역에서 심각한 학대를 겪었다. 1943년, 2,815명의 호주 전쟁 포로가 일본의 버마-태국 철도를 건설하다 사망했다.[367] 1944년, 일본군은 2,000명의 호주 및 영국 전쟁 포로에게 산다칸 죽음의 행진을 가했는데, 생존자는 6명뿐이었다. 이는 전쟁에서 호주인에게 가해진 최악의 단일 전쟁 범죄였다.[368]

맥아더는 호주 군대를 필리핀과 일본으로의 주요 진격에서 대거 제외했고, 보르네오에서 일본 기지에 대한 상륙 공격을 주도하는 것은 호주에 맡겨졌다. 커틴은 공직의 압박으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전쟁이 끝나기 몇 주 전에 사망하여 벤 치플리로 교체되었다.

호주의 700만 명의 전시 인구 중 거의 100만 명의 남녀가 6년간의 전쟁 기간 동안 군에서 복무했다. 39,700명 이상이 전쟁 포로로 사망했고, 이 중 약 8,000명이 일본의 포로로 사망했다.[369]

호주 여성들은 여성 군 부대에 입대하거나 노동력에 참여함으로써 전쟁 노력에 기여하도록 권장되었다.


다윈 폭격(1942년 2월 19일). 1942~43년 호주 공습으로 수백 명의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1940~1945년 사이에 호주 해역에서의 추축국 해상 활동으로 선박 운송이 위협받았다.


호주 민간인들은 긴축 조치, 배급, 노동 통제 조치가 모두 전쟁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시행되었다.[370] 호주 민간인들은 방공호를 파고, 민방위 및 응급 처치 훈련을 받았으며, 호주 항구와 도시에는 대공 방어 및 해상 방어가 갖춰졌다.[371]

호주 경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372] 전쟁 비용은 1939~1940년 4% 지출에 비해 1943~44년에는 GDP의 37%에 달했다.[373] 1939년에서 1945년까지 총 전쟁 지출은 29억 4,900만 파운드였다.[374]

1942년 호주 선전 포스터. 호주는 1942년 초 호주령 뉴기니 침공과 싱가포르 함락 이후 대일본제국의 침략을 두려워했다.


1941년 10월에 구성된 존 커틴의 커틴 노동당 정부가 "호주 경제, 국내 및 산업 생활 전반의 완전한 개정"에 대한 책임을 주로 졌다.[375] 연료, 의류 및 일부 식품에 대한 배급이 도입되었고 크리스마스 휴가가 단축되었고 "브라운 아웃"이 도입되었으며 일부 대중 교통이 축소되었다. 1941년 12월부터 정부는 다윈과 북부 호주에서 모든 여성과 어린이를 대피시켰으며, 일본이 진격하면서 10,000명 이상의 난민이 동남아시아에서 도착했다.[376] 1942년 1월에 인력 관리국이 설립되어 "모든 방위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호주인들을 가능한 최선의 방식으로 조직화"했다.[375] 산업 전쟁 조직부 장관인 존 데드먼은 이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정도의 긴축과 정부 통제를 도입하여 "산타클로스를 죽인 남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1942년 5월에 호주에서 통일된 세법이 도입되어 주 정부의 소득세 통제가 종료되었다. "이 결정의 중요성은 전쟁 기간 동안 내려진 다른 어떤 결정보다 컸으며, 연방 정부에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고 주의 재정적 자율성을 크게 감소시켰다."[377]

전쟁으로 인해 제조업이 크게 성장했다. "1939년에는 기계 공구를 생산하는 호주 회사가 세 곳뿐이었지만, 1943년에는 100곳이 넘었다."[378] 1939년에는 전선 항공기가 거의 없었지만, RAAF는 1945년까지 4번째로 큰 연합군 공군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호주에서 면허하에 여러 항공기가 제작되었으며, 특히 보퍼트와 보파이터가 있었지만 대부분의 항공기는 영국에서 왔고 나중에는 미국에서 왔다.[379] 1942년 4개월 만에 설계 및 제작된 부메랑 전투기는 일본이 진격하면서 호주가 처한 절박한 상황을 강조했다.

호주는 또한 사실상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직접적인 전쟁 생산에 종사하는 상당한 여성 인력을 창출했다. 1939년에서 1944년 사이에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의 수는 171,000명에서 286,000명으로 증가했다.[380] 전 총리 조셉 라이언스의 미망인인 데임 에니드 라이언스는 1943년 호주 하원에서 선출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으며, 1945년에 결성된 로버트 멘지스의 새로운 중도 우파 호주 자유당에 합류했다. 같은 선거에서 도로시 탠지는 호주 상원에 선출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1939년 9월 1일, 유럽에서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로버트 멘지스 수상은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참전으로 호주도 자동적으로 전쟁 상태에 들어섰다고 표명했다. 즉시 영국 측에 서서 참전을 결정하고, 먼저 중동·지중해 연안에, 다음으로 북아프리카 지역에 지원병을 파견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진주만 공격을 감행하자, 존 커틴 수상은 일본에 대한 선전 포고를 했다. 일본군은 버마(현 미얀마)와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차례로 공략했고, 특히 1942년 2월 15일의 싱가포르 함락은 호주에 충격을 주었다. 본토의 위기에 직면한 호주는 중동의 병력을 회수했다. 고전하는 영국은 호주에 충분한 지원을 할 여유가 없었고, 실망한 호주 국민 사이에서는 미국에 의존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42년 3월, 필리핀에서 탈출한 더글러스 맥아더가 호주로 건너와 서남태평양 연합군 최고 사령관으로서 전쟁을 지휘했다. 1942년은 호주의 대외 정책의 주축이 영국에서 미국으로 전환되는 획기적인 해가 되었다.

일본군은 1942년 2월부터 7월까지 다윈, 브룸, 타운즈빌 등 대륙 북부 폭격을 반복했고, 5월에는 특수 잠수정을 이용하여 시드니 항을 공격했다. 또한, 미국과 호주 사이의 해상 수송로를 탈취하여 호주와 휴전에 돌입하는 미호 차단 작전도 발동되었지만,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점차 열세에 놓인 일본군은 "전진"을 강요받았고, 본토 상륙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대일본제국 해군에 의해 호주 북부 해안 지역 점령이 계획되었다)。

10. 전후 호황 (1945년 ~ 1972년)

경 로버트 멘지스가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은 1949년 벤 치플리의 노동당 정부를 꺾고 집권하여, 농촌 기반의 국민당과 연립한 자유당은 1972년까지 모든 연방 선거에서 승리했다.[381] 멘지스 정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군사 지원 요청에 응답, 카평 및 마량산과 같은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1,5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339명이 사망했다.[382]

경 로버트 멘지스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자유당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을 금지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83] 그러나 블라디미르 페트로프의 망명과 같은 사건은 멘지스 정부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노동당은 격렬한 분열을 겪으며 민주 노동당(DLP)이 등장했다. DLP는 1974년까지 상원에서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남았다.[384]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1954년 왕실 순방에서 와가 와가에서 양을 검사하고 있다.


멘지스 시대는 경제 호황과 사회 변화의 시기였다. 로큰롤 음악이 인기를 얻었고, 슬림 더스티는 "술집 없는 술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국제 음악 차트 히트를 기록했다.[386] 오스트레일리아 영화는 자체 콘텐츠를 거의 제작하지 않았지만, 영국과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칩스 래퍼티와 피터 핀치가 출연하는 성공적인 서사시를 제작했다.

1954년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한 전후 이민자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까지 오스트레일리아의 인구는 1,000만 명에 달했고, 가장 인구가 많은 도시는 시드니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벤 치플리 노동당 정부는 대규모 유럽 이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390] 이민은 많은 남부 및 중부 유럽인을 오스트레일리아로 데려왔고, 스노위 산맥 계획과 같은 정부 지원 프로그램에서 일자리를 찾았다.[392] 스노위 산맥 수력 발전 계획은 1949년부터 1974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30개국 이상에서 온 10만 명의 고용을 필요로 했다.[393] 1945년에서 1985년 사이에 약 420만 명의 이민자가 도착했으며,[394] 오스트레일리아 인구는 1959년에 1,000만 명에 도달했다.

투뭇 3 발전소는 스노위 산맥 수력 발전 계획(1949–1974)의 일환으로 건설되었다.


1958년, 로버트 멘지스 정부는 1958년 이민법을 통과시켜 백호주의를 사실상 종식시켰다.[395][396] 멘지스는 군주제 및 영연방과의 유대를 지지했지만, 미국과의 동맹을 공식화하고 일본과의 전후 무역을 시작하여 일본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 파트너가 되었다.[389]

1965년 멘지스가 은퇴하고 해럴드 홀트가 총리직을 이어받았으나, 홀트는 1967년 익사했다. 존 고턴과 윌리엄 맥마흔이 그 뒤를 이었다.

1949년부터 1972년까지의 멘지스 시대는 원주민 호주인의 시민권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1962년 "연방 선거법"으로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의 투표권에 대한 제한이 해체되었고, 1967년 국민투표를 통해 원주민 문제에 대한 책임을 연방 정부로 이관하고 호주 헌법에서 차별적 조항을 삭제했다.[412] 1971년, 네빌 보너가 최초의 원주민 상원의원이 되었다.[412]

총리 해럴드 홀트와 1967년 국민투표를 앞둔 원주민 권리 운동가들


원주민임을 밝힌 최초의 연방 의원인 자유당 상원의원 네빌 보너


1950년대 초, 멘지스 정부는 호주를 미국 및 영국과 함께 하는 "삼중 동맹"의 일부로 여겼다.[417] 호주는 한국 전쟁과 말라야 비상 사태에 군대를 파견했고, 수에즈 위기 당시 영국을 지원한 유일한 영연방 국가였다.[420] 영국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이 더욱 중요해졌고, 1962년 미국은 노스웨스트 케이프에 해군 통신 기지를 설립했다.[422][423] 1962년, 호주 육군 고문들이 남베트남 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해럴드 홀트와 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1963년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만났다.


1951년 서명된 앤저스 안보 조약과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 조약은 호주가 냉전에서 미국의 동맹국임을 보여주었다.[426][427] 1960년대에 영국이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려 하면서 호주는 영국과의 역사적 유대가 쇠퇴하는 것을 보았다.

RAAF 수송 비행 베트남의 인원과 항공기가 1964년 8월 남베트남에 도착했다.


1965년, 호주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남베트남에 병력을 파견했다.[429] 1968년까지 누이닷에 있는 제1호주 기동 부대(1ATF) 기지에는 약 8,000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432] 해럴드 홀트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며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호주는 LBJ와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34]

1966년 선거에서 자유-국민당 연립 정부는 압도적인 다수로 재선되었지만, 전쟁은 점차 인기를 잃었다. 1970년, 호주 전역에서 모라토리엄 행진이 열렸고, 1971년 11월 제1호주 기동 부대는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베트남에서 호주의 군사 주둔은 1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432]

10. 1. 멘지스와 자유당 지배

경 로버트 멘지스가 이끄는 오스트레일리아 자유당은 1949년 벤 치플리의 노동당 정부를 꺾고 집권하여, 농촌 기반의 국민당과 연립한 자유당은 1972년까지 모든 연방 선거에서 승리했다.[381] 멘지스 정부는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군사 지원 요청에 응답, 카평 및 마량산과 같은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 오스트레일리아군은 1,500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며, 그중 339명이 사망했다.[382]

한국 전쟁 기간 동안, 자유당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을 금지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83] 그러나 블라디미르 페트로프의 망명과 같은 사건은 멘지스 정부에 유리하게 작용했고, 노동당은 격렬한 분열을 겪으며 민주 노동당(DLP)이 등장했다. DLP는 1974년까지 상원에서 영향력 있는 세력으로 남았다.[384]

멘지스 시대는 경제 호황과 사회 변화의 시기였다. 로큰롤 음악이 인기를 얻었고, 슬림 더스티는 "술집 없는 술집"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최초의 국제 음악 차트 히트를 기록했다.[386] 오스트레일리아 영화는 자체 콘텐츠를 거의 제작하지 않았지만, 영국과 할리우드 스튜디오는 칩스 래퍼티와 피터 핀치가 출연하는 성공적인 서사시를 제작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벤 치플리 노동당 정부는 대규모 유럽 이민 프로그램을 시작했다.[390] 이민은 많은 남부 및 중부 유럽인을 오스트레일리아로 데려왔고, 스노위 산맥 계획과 같은 정부 지원 프로그램에서 일자리를 찾았다.[392] 스노위 산맥 수력 발전 계획은 1949년부터 1974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30개국 이상에서 온 10만 명의 고용을 필요로 했다.[393] 1945년에서 1985년 사이에 약 420만 명의 이민자가 도착했으며,[394] 오스트레일리아 인구는 1959년에 1,000만 명에 도달했다.

1958년, 로버트 멘지스 정부는 1958년 이민법을 통과시켜 백호주의를 사실상 종식시켰다.[395][396] 멘지스는 군주제 및 영연방과의 유대를 지지했지만, 미국과의 동맹을 공식화하고 일본과의 전후 무역을 시작하여 일본이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 파트너가 되었다.[389]

1965년 멘지스가 은퇴하고 해럴드 홀트가 총리직을 이어받았으나, 홀트는 1967년 익사했다. 존 고턴과 윌리엄 맥마흔이 그 뒤를 이었다.

1949년부터 1972년까지의 멘지스 시대는 원주민 호주인의 시민권에서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1962년 "연방 선거법"으로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의 투표권에 대한 제한이 해체되었고, 1967년 국민투표를 통해 원주민 문제에 대한 책임을 연방 정부로 이관하고 호주 헌법에서 차별적 조항을 삭제했다.[412] 1971년, 네빌 보너가 최초의 원주민 상원의원이 되었다.[412]

1950년대 초, 멘지스 정부는 호주를 미국 및 영국과 함께 하는 "삼중 동맹"의 일부로 여겼다.[417] 호주는 한국 전쟁과 말라야 비상 사태에 군대를 파견했고, 수에즈 위기 당시 영국을 지원한 유일한 영연방 국가였다.[420] 영국의 영향력이 감소하면서 미국과의 동맹이 더욱 중요해졌고, 1962년 미국은 노스웨스트 케이프에 해군 통신 기지를 설립했다.[422][423] 1962년, 호주 육군 고문들이 남베트남 군을 훈련시키기 위해 파견되었다.

1951년 서명된 앤저스 안보 조약과 동남아시아 조약 기구(SEATO) 조약은 호주가 냉전에서 미국의 동맹국임을 보여주었다.[426][427] 1960년대에 영국이 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려 하면서 호주는 영국과의 역사적 유대가 쇠퇴하는 것을 보았다.

1965년, 호주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여 남베트남에 병력을 파견했다.[429] 1968년까지 누이닷에 있는 제1호주 기동 부대(1ATF) 기지에는 약 8,000명의 병력이 배치되었다.[432] 해럴드 홀트는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며 린든 B. 존슨 대통령에게 "호주는 LBJ와 함께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434]

1966년 선거에서 자유-국민당 연립 정부는 압도적인 다수로 재선되었지만, 전쟁은 점차 인기를 잃었다. 1970년, 호주 전역에서 모라토리엄 행진이 열렸고, 1971년 11월 제1호주 기동 부대는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베트남에서 호주의 군사 주둔은 1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500명 이상이 사망하고 2,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432]

11. 개혁과 반동 (1972년 ~ 1996년)

고프 휘틀람의 노동당 정부는 1972년 12월, 23년 만에 집권하여 복지 확대, 교육 개혁, 외교 정책 변화 등 상당한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436] 복지 혜택 및 지급률 증가, 전국적인 건강 보험 제도 도입, 이혼법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1975년 중반까지 2년 만에 학교에 대한 연방 지출이 3배로 증가했으며, 연방 정부는 고등 교육 자금을 지원하여 학비를 폐지했다.[436]

외교 정책에서 신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우선시하여 백호주의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으며,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436] 징병제가 폐지되었고, 베트남에 남아 있던 호주 군대가 철수했으며, '여왕 폐하 만세'에서 '어드밴스 오스트레일리아 페어'로 국가가 변경되었고, 대영 제국의 훈장 제도는 오스트레일리아 훈장으로 대체되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공식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여왕으로 불리게 되었다.[436] 휘틀럼은 동독, 폴란드와의 국교도 정상화하여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ANZUS를 안전 보장의 기조로 삼는 방침은 유지했다.[436] 반공 성격이 짙었던 SEATO에서는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오스트레일리아는 '미들 파워'로서의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436] 능력 중시의 이민 선발 결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계 이민이 확대되었다.[436]

원주민 문제에서 정부는 원주민의 경제, 사회 및 정치 문제에 대한 자기 결정 정책을 도입했다.[437] 3년 동안 원주민 서비스에 대한 연방 지출은 2,300만 달러에서 1억 4,100만 달러로 증가했다.[437] 휘틀람 정부는 토지 권리에 대한 왕립 위원회를 설립했고, 그 결과에 기초한 법안은 1976년 프레이저 정부에 의해 1976년 원주민 토지 권리법으로 제정되었다.[437]

고프 휘틀람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 (1973년). 휘틀람 정부는 상당한 개혁을 단행했지만, 논란 속에 해임되었다.


그러나 휘틀람 정부는 상원을 장악하지 못해 많은 법안이 거부되거나 수정되었고, 1974년 5월 선거에서 노동당이 과반수 미만으로 재선된 후에도 상원은 정치적 의제에 걸림돌로 남았다.[438] 정부 지출 증가, 급격한 임금 인상, 상품 가격 급등, 제1차 OPEC 석유 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불안정해졌고, 1974년 말 실업률은 전후 최고치인 3.6%에 도달했으며,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17%에 달했다.[438] "메디뱅크(Medibank)"라고 칭하는 건강 보험 제도의 창설과 대학 수업료 무료화는 세출의 대폭적인 증가를 초래하여 국가 재정을 압박했다.[438]

1974~75년 정부는 호주 광물 및 에너지 자원의 개발을 위한 주(state) 개발 자금으로 40억 달러 규모의 해외 차관 협상을 시작했다.[439] 렉스 코너 장관은 파키스탄의 차관 중개인과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고, 짐 케언스 재무장관은 이 문제에 대해 의회를 속였다.[439] 차관 사건 이후 야당인 자유-국가당 연합은 정부의 무능함을 주장하며 정부가 새로운 선거를 약속할 때까지 상원에서 정부의 예산안 통과를 지연시켰다.[439] 휘틀람은 이를 거부했고, 1975년 11월 11일 존 커 총독에 의해 그의 정부가 해임되면서 교착 상태는 끝났다. 야당 지도자 말콤 프레이저가 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439] 연방 총독이 헌법 제64조를 근거로 수상을 해임하고, 야당 당수를 임시 수상으로 임명한 사건은 헌법 논쟁으로 발전했지만, 휘틀람은 헌법에 따라 수상직을 사퇴했다.[439] 12월의 총선 결과, 자유당・국민 지방당 연합이 노동당에 큰 차이로 상하 양원을 제압하여, 프레이저가 정권을 장악했다.[439]

1975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자유-국민당 연합이 압승을 거두면서 맬컴 프레이저가 총리직을 유지했다. 연합 정부는 1977년과 1980년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프레이저는 당시까지 두 번째로 장기간 재임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되었다.[440] 프레이저 정부는 행정 능력과 경제적 긴축 정책을 옹호했다.[441]

맬컴 프레이저와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1977년).


경제 분야에서 프레이저 정부는 예산 삭감과 임금 억제를 중심으로 한 "인플레이션과의 싸움 우선" 전략을 따랐다.[442] 복지 혜택은 제한되었고, 보편적 의료 시스템은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학생 1인당 대학 자금 지원은 삭감되었다.[442]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에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 1979년의 두 번째 석유 파동은 상품 가격의 급등과 실질 임금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악화된 인플레이션을 증가시켰다.[442] 국제적인 경기 침체, 자원 붐의 붕괴,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의 심각한 가뭄으로 실업률이 증가했다.[442] 정부는 1982년 예산에서 케인스주의적 적자 지출로 대응했지만, 1983년에는 실업률과 연간 인플레이션 모두 10%를 초과했다.[442]

프레이저 정부는 휘틀럼 정부의 토지 권리 법안을 거의 변경 없이 제정하고 이민을 늘렸으며 인도차이나 난민을 재정착시켰다.[441] 다문화주의를 장려하고 1978년에는 다문화 방송국인 특별 방송 서비스(SBS)를 설립했다.[441] 외교 정책에서 정부는 노동당의 중국 및 인도네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미국과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했으며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통치에 반대했다.[441]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둘러싸고 미소가 대립하는 등, 세계는 '신냉전'이라고 불리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프레이저는 소련의 인도양 진출 움직임에 대항하여, 국내 해군 기지를 미군에게 사용하게 하는 등 반소(反蘇)를 축으로 하는 대미 관계 강화에 힘썼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고 짐바브웨 독립을 지지하는 등, 영국 연방 내 문제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ASEAN 국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베트남 난민을 대량으로 수용했던 것이 보여주듯이, ASEAN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APEC) 설립을 제창하는 등, 제3세계 발전을 주도하는 국가로서 자국을 위치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환경 정책에는 프레이저 섬과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의 자원 개발 금지, 카카두 국립공원 조성, 고래잡이 금지가 포함되었다.[441] 그러나 정부는 1982년 태즈메이니아의 프랭클린 댐 건설을 막기 위해 연방의 권한을 사용하기를 거부했고, 댐에 반대하는 풀뿌리 운동은 영향력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환경 운동의 출현에 기여했다.[441]

내정에서는 전 정권이 남긴 과제인 인플레이션 억제에 힘쓰며 긴축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때 경기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제2차 석유 파동이 발생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실시한 결과, 다시 물가가 상승세로 돌아섰다. 1980년 10월 선거에서는 노동당에 밀려, 1981년 4월에는 후계자로 여겨지던 노사 관계 장관 피콕(Andrew Peacock)이 반기를 들었다 (1982년 10월, 상공 장관으로 재입각). 구심력이 약화된 프레이저는 1983년 3월 5일, 야당 노동당의 내분을 틈타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권 유지를 꾀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총사퇴에 몰렸다. 1983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연합 정부는 새로운 지도자 밥 호크를 내세운 노동당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442]

밥 호크가 1987년 소련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만나는 모습. 호크는 최장수 노동당 총리가 되었다.


노동당 정부(1983년~1996년)는 밥 호크와 폴 키팅 총리 시절, 경제 자유화와 규제 완화,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호크 정부는 정부, 기업, 노동 조합, 비정부 기구 대표들이 참여하는 "정상 회담"을 통해 주요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컨센서스 정치를 추진했다.[443] 노동 조합과의 협약을 통해 사회적 혜택 증가를 대가로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했고, 복지 지급액을 늘리고 저소득층에 집중했다. 퇴직 혜택 제도(슈퍼애뉴에이션)를 확대하고, 새로운 보편적 건강 보험 제도인 메디케어를 도입했다.[443] 폴 키팅 재무부 장관은 케인스 경제학에서 벗어나 호주 달러 변동 환율제 도입, 자본 시장 규제 완화, 외국 은행과의 경쟁 허용 등 규제 완화 및 미시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감독했다.[444] 기업 규제 및 경쟁 정책을 간소화하고, 수입 관세를 줄였으며, 여러 정부 기업을 민영화했다. 고등 교육 시스템을 재구조화하고 확장하면서 학생 대출 및 "분담금" 형태의 수수료를 재도입했다. (HECS).[445]

호주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 중 1988년 5월에 열린 새 국회의사당 개관식.


정부는 환경 보호를 위해 태즈메이니아의 프랭클린 댐 건설 중단, 자빌루카의 새로운 우라늄 광산 금지, 카카두 국립공원의 세계 유산 등재 제안 등을 추진했다.[443] 외교 정책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걸프 전쟁에서 유엔군에 해군 함선과 군대를 지원했다.[443][447] 1986년 호주법을 통해 영국 법적 권한의 마지막 잔재를 제거했고, 1988년 호주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브리즈번에서 세계 엑스포 88이 개최되었고, 캔버라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이 개관되었다.[448]

폴 키팅이 1992년 12월 10일 레드펀 공원 연설을 하고 있다.


경제 성장, 실업률 감소, 밥 호크의 인기로 1984년, 1987년, 1990년에 재선되었으나, 1990년 경기 침체로 1991년 말 실업률이 10% 이상으로 치솟았다. 폴 키팅은 1991년 12월 총리가 되었다.[443] 키팅 정부는 경제 회복을 위해 "하나의 국가" 일자리 창출 패키지를 발표하고, 기업 및 개인 세금 감면을 입법화했다. 1992년 실업률은 11.4%로 호주 대공황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자유-국민 야당은 1993년 선거를 위해 상품 및 서비스세 도입을 포함하는 경제 개혁 계획을 제안했으나, 키팅은 세금 반대 캠페인을 펼쳐 1993년 3월 재선되었다.[449]

키팅 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를 강화하고, 원주민 화해와 호주 공화국을 추구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 등과 협력하여 APEC의 역할을 증대시켰다.[450] 원주민 화해 위원회를 설립하고, 마보 판결에 따라 원주민 토지 소유권법을 도입했다.[451] 1993년, 호주가 공화국이 되는 방안을 검토하기 위해 공화국 자문 위원회를 설립하고, 가족 수당과 고용주 의무 기여금이 있는 슈퍼애뉴에이션 보장을 도입했다.[452]

호크 정부 하에서 연간 이민자 수는 1984-85년 54,500명에서 1989-90년 12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키팅 정부는 이민자 수를 줄이고 불법 이민자에 대한 의무 구금을 도입하여, 1992-93년에 이민은 67,900명으로 감소했다.[453][553]

외채, 인플레이션, 실업률이 높은 가운데, 키팅은 1996년 선거에서 존 하워드에게 패배했다.[454][455]

11. 1. 휘틀럼 정부 (1972년 ~ 1975년)

고프 휘틀람의 노동당 정부는 1972년 12월, 23년 만에 집권하여 복지 확대, 교육 개혁, 외교 정책 변화 등 상당한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436] 복지 혜택 및 지급률 증가, 전국적인 건강 보험 제도 도입, 이혼법 자유화가 이루어졌고, 1975년 중반까지 2년 만에 학교에 대한 연방 지출이 3배로 증가했으며, 연방 정부는 고등 교육 자금을 지원하여 학비를 폐지했다.[436]

외교 정책에서 신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을 우선시하여 백호주의를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했으며,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했다.[436] 징병제가 폐지되었고, 베트남에 남아 있던 호주 군대가 철수했으며, '여왕 폐하 만세'에서 '어드밴스 오스트레일리아 페어'로 국가가 변경되었고, 대영 제국의 훈장 제도는 오스트레일리아 훈장으로 대체되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공식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 여왕으로 불리게 되었다.[436] 휘틀럼은 동독, 폴란드와의 국교도 정상화하여 사회주의 국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의 세계 전략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도 ANZUS를 안전 보장의 기조로 삼는 방침은 유지했다.[436] 반공 성격이 짙었던 SEATO에서는 단계적으로 철수하여, 오스트레일리아는 '미들 파워'로서의 독자적인 외교를 모색하기 시작했다.[436] 능력 중시의 이민 선발 결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계 이민이 확대되었다.[436]

원주민 문제에서 정부는 원주민의 경제, 사회 및 정치 문제에 대한 자기 결정 정책을 도입했다.[437] 3년 동안 원주민 서비스에 대한 연방 지출은 2,300만 달러에서 1억 4,100만 달러로 증가했다.[437] 휘틀람 정부는 토지 권리에 대한 왕립 위원회를 설립했고, 그 결과에 기초한 법안은 1976년 프레이저 정부에 의해 1976년 원주민 토지 권리법으로 제정되었다.[437]

그러나 휘틀람 정부는 상원을 장악하지 못해 많은 법안이 거부되거나 수정되었고, 1974년 5월 선거에서 노동당이 과반수 미만으로 재선된 후에도 상원은 정치적 의제에 걸림돌로 남았다.[438] 정부 지출 증가, 급격한 임금 인상, 상품 가격 급등, 제1차 OPEC 석유 파동으로 인해 경제가 불안정해졌고, 1974년 말 실업률은 전후 최고치인 3.6%에 도달했으며, 연간 인플레이션율은 17%에 달했다.[438] "메디뱅크(Medibank)"라고 칭하는 건강 보험 제도의 창설과 대학 수업료 무료화는 세출의 대폭적인 증가를 초래하여 국가 재정을 압박했다.[438]

1974~75년 정부는 호주 광물 및 에너지 자원의 개발을 위한 주(state) 개발 자금으로 40억 달러 규모의 해외 차관 협상을 시작했다.[439] 렉스 코너 장관은 파키스탄의 차관 중개인과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고, 짐 케언스 재무장관은 이 문제에 대해 의회를 속였다.[439] 차관 사건 이후 야당인 자유-국가당 연합은 정부의 무능함을 주장하며 정부가 새로운 선거를 약속할 때까지 상원에서 정부의 예산안 통과를 지연시켰다.[439] 휘틀람은 이를 거부했고, 1975년 11월 11일 존 커 총독에 의해 그의 정부가 해임되면서 교착 상태는 끝났다. 야당 지도자 말콤 프레이저가 임시 총리로 임명되었다.[439] 연방 총독이 헌법 제64조를 근거로 수상을 해임하고, 야당 당수를 임시 수상으로 임명한 사건은 헌법 논쟁으로 발전했지만, 휘틀람은 헌법에 따라 수상직을 사퇴했다.[439] 12월의 총선 결과, 자유당・국민 지방당 연합이 노동당에 큰 차이로 상하 양원을 제압하여, 프레이저가 정권을 장악했다.[439]

11. 2. 프레이저 정부 (1975년 ~ 1983년)

1975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자유-국민당 연합이 압승을 거두면서 맬컴 프레이저가 총리직을 유지했다. 연합 정부는 1977년과 1980년 선거에서도 승리하여 프레이저는 당시까지 두 번째로 장기간 재임한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되었다.[440] 프레이저 정부는 행정 능력과 경제적 긴축 정책을 옹호했다.[441]

경제 분야에서 프레이저 정부는 예산 삭감과 임금 억제를 중심으로 한 "인플레이션과의 싸움 우선" 전략을 따랐다.[442] 복지 혜택은 제한되었고, 보편적 의료 시스템은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학생 1인당 대학 자금 지원은 삭감되었다.[442] 그러나 1980년대 초반에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다. 1979년의 두 번째 석유 파동은 상품 가격의 급등과 실질 임금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악화된 인플레이션을 증가시켰다.[442] 국제적인 경기 침체, 자원 붐의 붕괴,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동부의 심각한 가뭄으로 실업률이 증가했다.[442] 정부는 1982년 예산에서 케인스주의적 적자 지출로 대응했지만, 1983년에는 실업률과 연간 인플레이션 모두 10%를 초과했다.[442]

프레이저 정부는 휘틀럼 정부의 토지 권리 법안을 거의 변경 없이 제정하고 이민을 늘렸으며 인도차이나 난민을 재정착시켰다.[441] 다문화주의를 장려하고 1978년에는 다문화 방송국인 특별 방송 서비스(SBS)를 설립했다.[441] 외교 정책에서 정부는 노동당의 중국 및 인도네시아와의 우호 관계를 지속하고 미국과의 악화된 관계를 회복했으며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의 백인 소수 통치에 반대했다.[441]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둘러싸고 미소가 대립하는 등, 세계는 '신냉전'이라고 불리는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프레이저는 소련의 인도양 진출 움직임에 대항하여, 국내 해군 기지를 미군에게 사용하게 하는 등 반소(反蘇)를 축으로 하는 대미 관계 강화에 힘썼다. 또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비판하고 짐바브웨 독립을 지지하는 등, 영국 연방 내 문제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ASEAN 국가들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베트남 난민을 대량으로 수용했던 것이 보여주듯이, ASEAN과의 관계를 중시하며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 (APEC) 설립을 제창하는 등, 제3세계 발전을 주도하는 국가로서 자국을 위치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환경 정책에는 프레이저 섬과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의 자원 개발 금지, 카카두 국립공원 조성, 고래잡이 금지가 포함되었다.[441] 그러나 정부는 1982년 태즈메이니아의 프랭클린 댐 건설을 막기 위해 연방의 권한을 사용하기를 거부했고, 댐에 반대하는 풀뿌리 운동은 영향력 있는 오스트레일리아 환경 운동의 출현에 기여했다.[441]

내정에서는 전 정권이 남긴 과제인 인플레이션 억제에 힘쓰며 긴축 정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때 경기가 호전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 제2차 석유 파동이 발생했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 재정 지출을 실시한 결과, 다시 물가가 상승세로 돌아섰다. 1980년 10월 선거에서는 노동당에 밀려, 1981년 4월에는 후계자로 여겨지던 노사 관계 장관 피콕(Andrew Peacock)이 반기를 들었다 (1982년 10월, 상공 장관으로 재입각). 구심력이 약화된 프레이저는 1983년 3월 5일, 야당 노동당의 내분을 틈타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권 유지를 꾀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총사퇴에 몰렸다. 1983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연합 정부는 새로운 지도자 밥 호크를 내세운 노동당에게 큰 표 차이로 패배했다.[442]

11. 3. 노동당 정부 (1983년 ~ 1996년)



노동당 정부(1983년~1996년)는 밥 호크와 폴 키팅 총리 시절, 경제 자유화와 규제 완화,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호크 정부는 정부, 기업, 노동 조합, 비정부 기구 대표들이 참여하는 "정상 회담"을 통해 주요 문제에 대한 합의를 도출하는 컨센서스 정치를 추진했다.[443] 노동 조합과의 협약을 통해 사회적 혜택 증가를 대가로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했고, 복지 지급액을 늘리고 저소득층에 집중했다. 퇴직 혜택 제도(슈퍼애뉴에이션)를 확대하고, 새로운 보편적 건강 보험 제도인 메디케어를 도입했다.[443] 폴 키팅 재무부 장관은 케인스 경제학에서 벗어나 호주 달러 변동 환율제 도입, 자본 시장 규제 완화, 외국 은행과의 경쟁 허용 등 규제 완화 및 미시 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감독했다.[444] 기업 규제 및 경쟁 정책을 간소화하고, 수입 관세를 줄였으며, 여러 정부 기업을 민영화했다. 고등 교육 시스템을 재구조화하고 확장하면서 학생 대출 및 "분담금" 형태의 수수료를 재도입했다. (HECS).[445]

정부는 환경 보호를 위해 태즈메이니아의 프랭클린 댐 건설 중단, 자빌루카의 새로운 우라늄 광산 금지, 카카두 국립공원의 세계 유산 등재 제안 등을 추진했다.[443] 외교 정책에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아시아 태평양 경제 협력체(APEC)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0년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후 걸프 전쟁에서 유엔군에 해군 함선과 군대를 지원했다.[443][447] 1986년 호주법을 통해 영국 법적 권한의 마지막 잔재를 제거했고, 1988년 호주 건국 200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했다. 브리즈번에서 세계 엑스포 88이 개최되었고, 캔버라에 새로운 국회의사당이 개관되었다.[448]

경제 성장, 실업률 감소, 밥 호크의 인기로 1984년, 1987년, 1990년에 재선되었으나, 1990년 경기 침체로 1991년 말 실업률이 10% 이상으로 치솟았다. 폴 키팅은 1991년 12월 총리가 되었다.[443] 키팅 정부는 경제 회복을 위해 "하나의 국가" 일자리 창출 패키지를 발표하고, 기업 및 개인 세금 감면을 입법화했다. 1992년 실업률은 11.4%로 호주 대공황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자유-국민 야당은 1993년 선거를 위해 상품 및 서비스세 도입을 포함하는 경제 개혁 계획을 제안했으나, 키팅은 세금 반대 캠페인을 펼쳐 1993년 3월 재선되었다.[449]

키팅 정부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과의 정치, 경제적 관계를 강화하고, 원주민 화해와 호주 공화국을 추구했다.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대통령 등과 협력하여 APEC의 역할을 증대시켰다.[450] 원주민 화해 위원회를 설립하고, 마보 판결에 따라 원주민 토지 소유권법을 도입했다.[451] 1993년, 호주가 공화국이 되는 방안을 검토하기 위해 공화국 자문 위원회를 설립하고, 가족 수당과 고용주 의무 기여금이 있는 슈퍼애뉴에이션 보장을 도입했다.[452]

호크 정부 하에서 연간 이민자 수는 1984-85년 54,500명에서 1989-90년 120,000명 이상으로 증가했다. 키팅 정부는 이민자 수를 줄이고 불법 이민자에 대한 의무 구금을 도입하여, 1992-93년에 이민은 67,900명으로 감소했다.[453][553]

외채, 인플레이션, 실업률이 높은 가운데, 키팅은 1996년 선거에서 존 하워드에게 패배했다.[454][455]

12. 세계화 시대의 오스트레일리아 (1996년 ~ 2022년)

존 하워드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로 재임했으며, 이는 멘지스 이후 두 번째로 긴 재임 기간이다.[456] 1996년 3월, 하원 선거에서 승리한 자유당의 존 하워드가 13년 만에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했다. 하워드는 재정 재건을 위해 교육·복지 예산을 삭감했고, 나아가 소비세 도입도 추진했다.

하워드 정부는 포트아서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의 총기 규제를 전국적으로 강화했다.[456] 1996년 노동 관계 개혁을 통해 개인 계약과 기업별 교섭을 장려했으며, 2006년에는 워크초이스 법안을 도입하여 소규모 사업체의 고용 해고를 쉽게 만들었다. 1998년 선거에서 상품 및 서비스세(GST)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2000년 7월에 시행했다.[456] 그러나 이로 인해 1998년 선거에서 여당은 상원에서 과반수를 잃었다.

폴린 핸슨과 원 네이션 당의 반이민 정책에 대응하여 엘리트와 정치적 올바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치를 강조했다.[457][458] 초기에는 이민 수용 규모를 줄이고 다문화 사무소를 폐지했지만,[459] 이후 이민 수용 규모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숙련 노동자를 선호했다. 1999년부터 보트를 통한 불법 입국자가 급증하자 태평양 해결책을 도입하여 불법 이민자를 나우루와 파푸아뉴기니의 구금 시설로 이송했다.[460]

원주민 문제에서는 "실질적인 화해" 정책을 추구하며 원주민 교육, 건강, 고용 및 주택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96년 Wik Peoples 대 퀸즐랜드 고등 법원 판결에 대응하여 원주민 토지 소유권을 제한하기 위해 원주민 토지 소유권 법률을 개정했다. 2007년에는 어린이는 신성하다 보고서 발표 후 노던 테리토리 개입을 시작했다.[461]

오스트레일리아 주도 연합 INTERFET during the 동티모르 위기 (1999–2002)


솔로몬 제도 분쟁 (1999–2003)에 대응한 오스트레일리아 주도 다국적군.
RAMSI 작전 (2003–2017)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민주주의 및 국가 건설에 대한 최대의 노력이 되었다.


1999년 오스트레일리아는 동티모르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민주주의와 독립을 지원했다.[464] 부건빌 자치구에서 벨 이시 작전 (1998–2003), RAMSI 작전 (2003-2017), 2006년 동티모르 위기 등 평화 유지 및 안정화 작전에도 참여했다.[464]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하워드 정권은 사마와에 1,400명 규모의 부대를 주둔시켰고, 아프가니스탄에도 약 800명의 부대를 파견하여 대미 협조 자세를 분명히 했다.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이후 국가 안보 위원회와 추가 대테러 법률이 제정되었다.[456]

외교 정책은 "아시아 우선, 그러나 아시아만이 아니다"라는 정책을 옹호하며,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오스트레일리아-미국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465] 싱가포르 및 태국과도 무역 협정을 체결했으며,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교토 의정서 비준은 거부했다.[465] 2007년 3월 방일한 하워드는 "일·호주 안전 보장 협력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경제는 1990년대 초 경기 침체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기록적인 고용 증가와 낮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중국은 일본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의 두 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연립 정부는 정부 자산 매각 수익과 함께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미래 기금에 투자했다.[467]

2007년 2007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노동당에 패배하며 하워드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한 두 번째 현직 총리가 되었다.[468]

케빈 러드줄리아 길라드가 이끈 노동당 정부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집권했다. 러드 정부는 교토 의정서를 비준하고, 원주민 아이들을 가족에게서 격리시킨 것에 대해 호주 원주민에게 사과했다.[469] 글로벌 금융 위기와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대응하여 750억 호주 달러 규모의 경제 부양책을 시행, 호주는 경기 침체를 피한 몇 안 되는 선진 경제 국가 중 하나였다.[470]

케빈 러드줄리아 길라드 2006년 모습. 길라드는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배출권 거래제 (ETS)를 제안했지만, 상원에서 두 번 부결되었다. 코펜하겐에서 열린 UN 기후 변화 회의 실패 후, ETS는 2013년까지 연기되었고, 노동당은 녹색당에게 일부 지지율을 잃었다.[471] 자원 초과 이윤세 제안은 퀸즐랜드와 서호주에서 노동당 지지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472]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2021) 중 호주 특수 부대가 철수를 기다리고 있다.


나우루 처리 센터와 임시 보호 비자를 폐지했지만, 2009년부터 보트를 통한 불법 입국이 급증했다. 토니 애보트는 "보트를 막을" 것을 약속했다.[473][474]

2010년 6월, 여론 조사에서 야당에 뒤처지고 러드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줄리아 길라드가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474] 2010년 8월 연방 선거 이후, 길라드는 호주 녹색당과 세 명의 무소속 의원의 지지를 받아 소수 노동당 정부를 구성했다.[476] 길라드 정부는 국가 광대역 네트워크, 탄소 가격 책정 제도, 광업세, 국가 장애 보험 제도, 학교 자금 지원 개혁을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다.[476] 망명 신청자 처리를 위해 말레이시아와 합의했지만, 고등 법원에서 무효화되었다. 정부는 마누스 섬과 나우루에 해상 처리 센터를 다시 열었다.[477]

지도력에 대한 추측이 커지고 정부의 여론 조사가 좋지 않자, 2013년 6월 러드가 총리로 복귀하여 탄소세를 배출권 거래제로 대체하고, 보트를 통해 불법으로 도착하는 사람들이 호주에 정착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478] 2013년 9월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했다.[479]

토니 애벗, 맬컴 턴불, 스코트 모리슨 총리 시기의 자유-국민 연립 정부는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를 통치했다.[486][493] 이 기간 동안 보수적인 정책 기조가 유지되었으며, 특히 이민 정책이 강화되었다. 주권 국경 작전을 통해 보트 난민 유입을 억제하고, 임시 보호 비자를 재도입하는 등 강경한 정책이 시행되었다.[480][481]

경제적으로는 중국, 대한민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경제 교류를 확대했다.[482] 이라크 내 이슬람 국가(ISIL)에 대한 국제 군사 개입에 참여하여 공습 및 특수 부대 파병, 이라크 군 훈련을 제공했다.[482]

그러나 2014년 예산안은 선거 공약 위반 논란으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48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탄소세와 광업세를 폐지하는 데 성공했다.[482] 한편,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에 대한 기사 작위 수여는 내각 승인 없이 결정되어 논란을 일으켰다.[484][485]

맬컴 턴불 정부는 국가 혁신 및 과학 어젠다를 발표하고 법인세 삭감을 추진했지만, 2016년 총선에서 하원 과반수를 간신히 확보하는 데 그쳤다.[487] 이후 국민 우편 투표를 거쳐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488]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난민 교환 협정을 체결하여 마누스 섬과 나우루에 구금된 난민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489] 그러나 남중국해 문제, 오스트레일리아 국내 정치에 대한 외국의 영향력, 5G 통신망 구축에 중국 기업 참여 배제 등으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490] 한편, 미국, 일본, 인도와 함께 쿼드 안보 대화를 부활시키고,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CPTPP)에 서명하는 등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491][492]

스코트 모리슨 정부는 파리 협정 준수를 약속하면서도 에너지 가격 인하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펼쳤다.[495] 인도네시아-호주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IA-CEPA)을 체결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이어갔다.[496] 2019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후, 원주민의 헌법적 인정과 "의회 연설"을 요구하는 울루루 성명에 대한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497]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9년 만에 경제 침체를 겪었다.[498] 정부는 외국인 입국 금지, 국가 내각 구성, 경제 봉쇄 조치 등을 통해 위기에 대응했다.[499][500][501][502] 대규모 경제 부양책과 보건 대책을 시행하여 실업률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503][502][504][505]

2021년에는 영국과 자유 무역 협정 체결에 합의하고, 미국, 영국과 함께 오커스(AUKUS) 안보 파트너십을 체결했다.[506][507] 오커스(AUKUS)를 통해 핵 추진 잠수함 기술을 획득하기로 하면서 프랑스와의 디젤-전기 잠수함 계약을 취소하여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507][508][509]

AUKUS founders
오커스(AUKUS)의 창립자인 스콧 모리슨, 영국의 보리스 존슨 총리,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

12. 1. 하워드 정부 (1996년 ~ 2007년)

존 하워드는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로 재임했으며, 이는 멘지스 이후 두 번째로 긴 재임 기간이다.[456] 1996년 3월, 하원 선거에서 승리한 자유당의 존 하워드가 13년 만에 노동당으로부터 정권을 탈환했다. 하워드는 재정 재건을 위해 교육·복지 예산을 삭감했고, 나아가 소비세 도입도 추진했다.

하워드 정부는 포트아서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오스트레일리아의 총기 규제를 전국적으로 강화했다.[456] 1996년 노동 관계 개혁을 통해 개인 계약과 기업별 교섭을 장려했으며, 2006년에는 워크초이스 법안을 도입하여 소규모 사업체의 고용 해고를 쉽게 만들었다. 1998년 선거에서 상품 및 서비스세(GST)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2000년 7월에 시행했다.[456] 그러나 이로 인해 1998년 선거에서 여당은 상원에서 과반수를 잃었다.

폴린 핸슨과 원 네이션 당의 반이민 정책에 대응하여 엘리트와 정치적 올바름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오스트레일리아의 가치를 강조했다.[457][458] 초기에는 이민 수용 규모를 줄이고 다문화 사무소를 폐지했지만,[459] 이후 이민 수용 규모는 꾸준히 증가했으며, 숙련 노동자를 선호했다. 1999년부터 보트를 통한 불법 입국자가 급증하자 태평양 해결책을 도입하여 불법 이민자를 나우루와 파푸아뉴기니의 구금 시설로 이송했다.[460]

원주민 문제에서는 "실질적인 화해" 정책을 추구하며 원주민 교육, 건강, 고용 및 주택 개선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96년 Wik Peoples 대 퀸즐랜드 고등 법원 판결에 대응하여 원주민 토지 소유권을 제한하기 위해 원주민 토지 소유권 법률을 개정했다. 2007년에는 어린이는 신성하다 보고서 발표 후 노던 테리토리 개입을 시작했다.[461]

[[File:Australian_soldiers_arrive_at_Honiara,_Solomon_Islands_in_July_2003.jpg|thumb|left|200px|솔로몬 제도 분쟁 (1999–2003)에 대응한 오스트레일리아 주도 다국적군.
RAMSI 작전 (2003–2017)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민주주의 및 국가 건설에 대한 최대의 노력이 되었다.

1999년 오스트레일리아는 동티모르에 유엔군을 파견하여 민주주의와 독립을 지원했다.[464] 부건빌 자치구에서 벨 이시 작전 (1998–2003), RAMSI 작전 (2003-2017), 2006년 동티모르 위기 등 평화 유지 및 안정화 작전에도 참여했다.[464] 이라크 전쟁을 지지한 하워드 정권은 사마와에 1,400명 규모의 부대를 주둔시켰고, 아프가니스탄에도 약 800명의 부대를 파견하여 대미 협조 자세를 분명히 했다. 2002년 발리 폭탄 테러 이후 국가 안보 위원회와 추가 대테러 법률이 제정되었다.[456]

외교 정책은 "아시아 우선, 그러나 아시아만이 아니다"라는 정책을 옹호하며,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 오스트레일리아-미국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했다.[465] 싱가포르 및 태국과도 무역 협정을 체결했으며, 중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교토 의정서 비준은 거부했다.[465] 2007년 3월 방일한 하워드는 "일·호주 안전 보장 협력에 관한 공동 선언"에 서명했다.

경제는 1990년대 초 경기 침체 이후 지속적으로 성장하여 기록적인 고용 증가와 낮은 실업률을 기록했다. 중국은 일본에 이어 오스트레일리아의 두 번째로 큰 무역 파트너가 되었다. 연립 정부는 정부 자산 매각 수익과 함께 국가 부채를 줄이기 위해 미래 기금에 투자했다.[467]

2007년 2007년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선거에서 노동당에 패배하며 하워드는 자신의 지역구에서 낙선한 두 번째 현직 총리가 되었다.[468]

12. 2. 노동당 정부 (2007년 ~ 2013년)

케빈 러드줄리아 길라드가 이끈 노동당 정부는 2007년부터 2013년까지 집권했다. 러드 정부는 교토 의정서를 비준하고, 원주민 아이들을 가족에게서 격리시킨 것에 대해 호주 원주민에게 사과했다.[469] 글로벌 금융 위기와 세계적인 경기 침체에 대응하여 750억 호주 달러 규모의 경제 부양책을 시행, 호주는 경기 침체를 피한 몇 안 되는 선진 경제 국가 중 하나였다.[470]

기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배출권 거래제 (ETS)를 제안했지만, 상원에서 두 번 부결되었다. 코펜하겐에서 열린 UN 기후 변화 회의 실패 후, ETS는 2013년까지 연기되었고, 노동당은 녹색당에게 일부 지지율을 잃었다.[471] 자원 초과 이윤세 제안은 퀸즐랜드와 서호주에서 노동당 지지율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472]

나우루 처리 센터와 임시 보호 비자를 폐지했지만, 2009년부터 보트를 통한 불법 입국이 급증했다. 토니 애보트는 "보트를 막을" 것을 약속했다.[473][474]

2010년 6월, 여론 조사에서 야당에 뒤처지고 러드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줄리아 길라드가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다.[474] 2010년 8월 연방 선거 이후, 길라드는 호주 녹색당과 세 명의 무소속 의원의 지지를 받아 소수 노동당 정부를 구성했다.[476] 길라드 정부는 국가 광대역 네트워크, 탄소 가격 책정 제도, 광업세, 국가 장애 보험 제도, 학교 자금 지원 개혁을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다.[476] 망명 신청자 처리를 위해 말레이시아와 합의했지만, 고등 법원에서 무효화되었다. 정부는 마누스 섬과 나우루에 해상 처리 센터를 다시 열었다.[477]

지도력에 대한 추측이 커지고 정부의 여론 조사가 좋지 않자, 2013년 6월 러드가 총리로 복귀하여 탄소세를 배출권 거래제로 대체하고, 보트를 통해 불법으로 도착하는 사람들이 호주에 정착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478] 2013년 9월 선거에서 야당이 승리했다.[479]

12. 3. 자유-국민 연립 정부 (2013년 ~ 2022년)

토니 애벗, 맬컴 턴불, 스코트 모리슨 총리 시기의 자유-국민 연립 정부는 2013년부터 2022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를 통치했다.[486][493] 이 기간 동안 보수적인 정책 기조가 유지되었으며, 특히 이민 정책이 강화되었다. 주권 국경 작전을 통해 보트 난민 유입을 억제하고, 임시 보호 비자를 재도입하는 등 강경한 정책이 시행되었다.[480][481]

경제적으로는 중국, 대한민국, 일본 등 아시아 국가들과의 자유 무역 협정을 체결하여 경제 교류를 확대했다.[482] 이라크 내 이슬람 국가(ISIL)에 대한 국제 군사 개입에 참여하여 공습 및 특수 부대 파병, 이라크 군 훈련을 제공했다.[482]

그러나 2014년 예산안은 선거 공약 위반 논란으로 인해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483]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탄소세와 광업세를 폐지하는 데 성공했다.[482] 한편,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에 대한 기사 작위 수여는 내각 승인 없이 결정되어 논란을 일으켰다.[484][485]

맬컴 턴불 정부는 국가 혁신 및 과학 어젠다를 발표하고 법인세 삭감을 추진했지만, 2016년 총선에서 하원 과반수를 간신히 확보하는 데 그쳤다.[487] 이후 국민 우편 투표를 거쳐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488]

외교적으로는 미국과 난민 교환 협정을 체결하여 마누스 섬과 나우루에 구금된 난민들이 미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했다.[489] 그러나 남중국해 문제, 오스트레일리아 국내 정치에 대한 외국의 영향력, 5G 통신망 구축에 중국 기업 참여 배제 등으로 인해 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490] 한편, 미국, 일본, 인도와 함께 쿼드 안보 대화를 부활시키고, 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CPTPP)에 서명하는 등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491][492]

스코트 모리슨 정부는 파리 협정 준수를 약속하면서도 에너지 가격 인하에 중점을 두는 정책을 펼쳤다.[495] 인도네시아-호주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IA-CEPA)을 체결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이어갔다.[496] 2019년 총선에서 재집권에 성공한 후, 원주민의 헌법적 인정과 "의회 연설"을 요구하는 울루루 성명에 대한 후속 조치를 발표했다.[497]

2020년에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9년 만에 경제 침체를 겪었다.[498] 정부는 외국인 입국 금지, 국가 내각 구성, 경제 봉쇄 조치 등을 통해 위기에 대응했다.[499][500][501][502] 대규모 경제 부양책과 보건 대책을 시행하여 실업률을 낮추는 데 주력했다.[503][502][504][505]

2021년에는 영국과 자유 무역 협정 체결에 합의하고, 미국, 영국과 함께 오커스(AUKUS) 안보 파트너십을 체결했다.[506][507] 오커스(AUKUS)를 통해 핵 추진 잠수함 기술을 획득하기로 하면서 프랑스와의 디젤-전기 잠수함 계약을 취소하여 외교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507][508][509]

13. 현재 (2022년 ~)

13. 1. 앨버니지 정부 (2022년 ~)

앤서니 앨버니지, 제31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리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플래티넘 주빌리 기간 중인 2022년 6월 4일, 연방 경비대를 사열하고 있다.


2022년 5월 23일, 앤서니 앨버니지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새 총리로 취임했다. 선거에서 스콧 모리슨의 보수 정부를 꺾은 앨버니지의 노동당은 거의 10년 만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첫 노동당 정부를 구성했다.[510]

2021년에 시작된 글로벌 인플레이션 급증이 계속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인플레이션율은 2022년 말에 7.5%로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이는 32년 만에 최고치였다. 2023년 11월까지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준비 은행은 금리를 4.35%로 인상했는데, 이는 12년 만에 최고치였다.[511]

의회에 원주민의 목소리에 대한 국민투표가 2023년 10월 14일에 실시되었고 전국적으로 부결되었다.[512] Yes23 캠페인 공동 의장 레이첼 퍼킨스는 "이 결과에 대해 슬퍼하고 그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숙고하기 위해" 침묵의 한 주를 촉구했다.[513]

2022년 10월, 앨버니지 정부는 전 정권인 모리슨 정권이 발표한 이스라엘에 대한 서예루살렘 수도 인정을 철회[601]했다.

14. 사회와 문화 (1960년대 이후)

1960년대는 호주 원주민 권리 신장에 중요한 시기였다.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제도민 발전 연방 위원회와 같은 원주민 단체 및 활동가들은 변화를 요구했고, 사회는 이를 수용했다.[514] 1962년, 멘지스 정부는 원주민에게 연방 선거 투표권을 부여했다.[517] 1965년, 퀸즐랜드는 원주민에게 주 투표권을 부여한 마지막 주가 되었다.[518] 찰스 퍼킨스는 차별과 불평등을 폭로하기 위해 프리덤 라이드를 조직했다.[520] 1967년 국민투표를 통해 오스트레일리아 헌법이 변경되어 모든 호주 원주민이 전국 인구 조사에 포함되고 연방 의회가 그들을 위해 입법할 수 있게 되었다.[522] 1972년, "원주민 텐트 대사관"이 캔버라 국회의사당 잔디밭에 세워져 토지 권리, 과거 토지 손실에 대한 보상, 자기 결정 등 여러 요구 사항을 발표했다.[531] 고프 휘틀럼 정부는 원주민의 자기 결정 정책을 추진하고,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법률을 통과시켰으며, 노던 준주의 토지 권리에 대한 왕립 위원회를 설립했다.[437] 마보 사건 판결 이후, 키팅 정부는 원주민 토지 소유권 청구를 규제하기 위해 법을 통과시키고 재판소를 설립했다.[534] 2019년 3월까지, 원주민 토지 소유권 재판소는 375개의 원주민 공동체가 호주 대륙의 39%에 대해 원주민 토지 소유권을 확립했다고 결정했다.[535]

리오넬 로즈 초상화
리오넬 로즈, 1968년 올해의 호주인


테니스 1위 이본 굴라공은 1971년 올해의 호주인이었다.


원주민 예술가, 운동선수, 음악가에 대한 대중의 찬사도 증가했다. 권투 선수 리오넬 로즈와[524] 테니스 선수 이본 굴라공 콜리가[527] 올해의 호주인으로 선정되었다. 네빌 보너는 호주 원주민 최초의 연방 의원이 되었다.[528] 2016년, 애덤 자일스는 주 또는 준주 정부를 이끄는 최초의 호주 원주민이 되었다.[530]

컨트리 자유당의 애덤 자일스는 2016년 노던 준주 수석 장관이 되면서 주 또는 준주 정부를 이끄는 최초의 호주 원주민이 되었다.


1960년대 여성 운동의 영향으로, 1966년 호주 공무원에서의 "결혼 금지"가 폐지되었고, 1969년과 1972년 동일 임금 결정, 1973년 유급 출산 휴가 도입, 1984년 연방 성 차별 금지법 및 1986년 적극적 조치법 제정 등의 변화가 있었다.[543] 1973년에는 미혼모 혜택이 도입되었고, 가족법 1975는 무과실 이혼을 도입했다.[541]

2008년의 여성 경찰관


1960년대 백호주의 정책이 점차 해체되고 1973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정부는 다문화주의 정책을 개발했다.[548] 1978년 이주민 서비스에 대한 갈발리 보고서는 "모든 사람은 편견이나 불이익 없이 자신의 문화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장려해야 합니다."라고 권고했다.[548] 1989년, 밥 호크 정부는 "다문화 호주를 위한 국가 의제"를 발표했다.[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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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ption2 = 블랙타운의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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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ption1 = 시드니의 민족적으로 다양한 교외 지역인 카브라마타의 파이 라우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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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까지 호주 인구의 30%가 해외에서 태어났으며, 세계 거의 모든 국가에서 태어난 이민자들을 포함한다.[556]

1960년대와 1970년대는 예술에 대한 정부 지원이 증가하고 오스트레일리아 예술 작품이 번성하는 시기였다. 고턴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예술 위원회 등을 설립했고,[557] 휘틀람 정부는 오스트레일리아 위원회를 설립했다.[558] 1973년, 패트릭 화이트는 문학 부문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이 되었다.[562]

존 고턴 1970년. 총리로서 고턴은 오스트레일리아 영화에 대한 정부 지원을 활성화했다.


패트릭 화이트: 1973년, 문학 부문 노벨상을 수상한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인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에 오스트레일리아 경제와 사회의 세계화, 제트 여행 및 인터넷의 발전은 오스트레일리아 예술과 문화에 영향을 미쳤던 "거리의 횡포"를 대체로 극복했다.[56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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