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치 요시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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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우치 요시히로는 스오를 거점으로 규슈, 야마구치 등을 지배한 유력 다이묘였다. 남조 세력 격퇴에 기여하여 나가토, 부젠 등의 슈고직을 받았으며,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보좌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요시미쓰와의 갈등으로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와 연합하여 반란(오에이의 난)을 일으켰으나 패배하여 사망했다. 그는 뛰어난 무인이자 문화인이었으며, 조선과 교류하며 백제 부흥을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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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치 요시히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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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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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시대 | 남북조 시대 - 무로마치 시대 |
출생 | 엔분 원년/쇼헤이 11년 (1356년) |
사망 | 오에이 6년 12월 21일 (1400년1월 17일) |
개명 | 손타로 (孫太郎, 유년기 이름) → 요시히로 |
별칭 | 오우치노스케 (大内介) 고세키지 도노 슈잔 닌지쓰 (香積寺殿秀山仁実) 또는 슈잔 짓코 (秀山實公) 바이소 도지쓰 (梅窓道實) |
묘소 |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호네이 산 루리코지 |
관위 | 종4위 상 스오노곤노스케, 스오노스케, 사쿄노곤노다이부 |
막부 | 무로마치 막부 스오・나가토・이와미・부젠・이즈미・기이 슈고 |
주군 | 아시카가 요시미쓰 |
씨족 | 오우치 씨 |
부모 | 아버지: 오우치 히로요 |
형제 | 요시히로, 모, 미쓰히로, 모, 히로마사, 모리미, 히로시게, 히로토, 미치토모, 이에히로, 딸 (쇼니 후유자네 실), 딸 (오토모 치카요 실), 딸 (무나카타 우지시게 실) |
자녀 | 모치요, 모치모리, 노리히로 |
2. 생애
2. 1. 가독 상속과 세력 확대
오우치 요시히로는 아버지 히로요 대에 남조에서 무로마치 막부로 귀순한 스오를 거점으로 하는 유력한 슈고 다이묘였다.[2][3][4] 1371년 규슈 단다이 이마가와 료슌을 도와 규슈에서 남조 세력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워 1374년 나가토와 부젠 국의 슈고직에 임명되었다.[5] 1375년 지쿠젠 국 세진산 전투에서 이마가와 군이 열세에 몰렸을 때, 요시히로는 사졸을 격려하며 분전하여 기쿠치·마쓰우라·지바 연합군을 크게 격파했다.[6][7] 1380년 아버지 히로요가 사망하고, 그 전후로 동생 오우치 미쓰히로와 가독 상속을 둘러싼 내분(고랴쿠 내전)을 일으켰으나, 1381년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지원을 받아 승리하고 가독을 이었다.[15]무로마치 막부는 슈고 다이묘들의 연합정권으로 쇼군의 권력은 취약했다.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권력 강화를 위해 유력 슈고 다이묘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다. 1379년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실각시키고(고랴쿠 정변), 1389년 도키 야스유키를 토벌했다(도키 야스유키의 난). 1391년에는 야마나 씨를 분열시켜 몰락시켰다(메이토쿠의 난).
요시히로는 요시미쓰의 정책에 협력하여 메이토쿠의 난에서 선봉으로 출진, 1391년 12월 30일 우치노에서 고바야시 요시시게를 일기토로 쓰러뜨리는 무공을 세웠다.[19] 이 공으로 1392년 와카사 국과 기이 국의 슈고직을 받아 동생과 합쳐 6개국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20][3][21][22] 1393년 요시미쓰는 요시히로에게 아시카가 쇼군가에 준하는 대우를 인정하는 어내서를 발행했다.[23] 요시히로는 1389년 요시미쓰의 이쓰쿠시마 참배를 수행하고 환대하는 등 충절을 다했으며, 1395년 요시미쓰가 출가하자 그를 따라 출가했다. 또한 1379년에는 고려의 요청으로 왜구와 싸워 경상도까지 추격하기도 했으며, 1395년 조선과 직접 통교를 시작했다.
2. 2. 쇼군 요시미쓰와의 협력과 갈등
오우치 요시히로는 무로마치 막부에 귀순한 이후, 이마가와 사다요시(료슌)를 도와 규슈에서 남조 세력을 몰아내는 데 공을 세웠다.[2][3][4] 1372년에는 다자이후를 공략하고 아버지와 함께 귀국했다.[2][3][4] 1374년에는 나가토와 부젠의 수호직(守護職)에 임명되었다.[5] 1375년 치쿠젠 세진산 전투에서는 오쿠야마 나오토모등의 배하 무장들이 전사하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키쿠치(菊池) · 마쓰우라(松浦) · 지바(千葉) 연합군을 크게 격파했다.[6][7] 1377년 히젠 니나우치 전투와 히고 우스마 시라키하라 전투에도 참전하여 키쿠치 씨 일족 100명 이상을 전사시키는 활약을 했다.[9][10][11]무로마치 막부의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는 막부 권력 강화를 위해 꽃의 궁궐을 건설하고 직할군인 봉공중을 증강했다. 요시히로는 요시미쓰의 가신으로 충실히 일했으며, 1389년 요시미쓰의 이쓰쿠시마 참배를 수행하고 환대했다.[16] 이후 요시히로는 막정의 중추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기간 중 1379년에는 고려의 요청을 받아 왜구와 싸웠으나 고려군의 비협조로 패퇴하기도 했다.[17] 1395년에는 조선과 직접 통교를 시작했다.
요시미쓰는 유력 수호 다이묘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호소카와 요리유키를 실각시키고(강력의 정변), 토키 야스유키와 야마나 우지키요를 제거했다(토키 야스유키의 난, 메이토쿠의 난). 요시히로는 이러한 요시미쓰의 정책에 협력하여 메이토쿠의 난에서 선봉으로 활약, 고바야시 요시시게를 일기토로 쓰러뜨리는 무공을 세웠다.[19] 이 공으로 1392년 와카야마와 키이의 수호직을 받아 6개국을 다스리는 다이묘가 되었다.[20][3][21][22] 1393년에는 아시카가 쇼군가에 준하는 어내서를 받았다.[20][3][21][22]
1395년 요시미쓰가 출가하자 요시히로도 따라 출가했다.[23] 그러나 1397년 요시미쓰가 북산궁 조영에 인원 충당을 요구했을 때, 요시히로는 "무사는 궁시로 봉공하는 자"라며 거부하여 요시미쓰의 미움을 샀다. 같은 해 요시미쓰의 명령으로 소니 사다요시 토벌에 나섰으나 동생 만히로가 전사하고, 요시미쓰가 소니 씨 등에게 오우치 씨 토벌을 부추겼다는 소문이 돌면서 불만이 커졌다. 1398년 요시히로는 규슈로 출진하여 소니 가문을 토벌했다.
요시미쓰는 요시히로의 세력 확장을 우려하여 상경을 명령했지만, 요시히로는 따르지 않았다. 요시미쓰는 계속해서 요시히로를 압박하며 상경 명령을 내리는 등 도발했다. 이에 요시히로는 1399년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와 밀약을 맺고 거병을 준비했다.
2. 3. 오에이의 난과 최후
오우치 요시히로는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회유 시도에도 불구하고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와 밀통하여 거병, 사카이에 성채를 쌓고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것이 오에이의 난의 시작이다. 요시미쓰는 선승 젯카이 주신을 보내 항복을 권유했지만, 요시히로는 정중히 거절했다. 모반인이 된 요시히로는 자신의 장례와 49재를 미리 치르고, 스오에 있는 노모에게 유품을, 동생 모리하루에게는 고향 방비를 굳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요시히로는 5천(일설에는 3천) 군세를 이끌고 사카이에서 농성하며 미쓰카네의 원군을 기다렸다. 1399년 10월 13일(음력) 요시히로는 동생 히로시게와 함께 군을 이끌고 와카야마현 사카이시에 상륙하였다. 요시히로는 반막부 세력을 결집하고자 아시카가 미쓰카네, 이마가와 료슌, 도키 아키나오, 미야다 도키키요 등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대부분 요시미쓰에게 진압되었다.
12월 21일, 요시미쓰는 호소카와 요리모토, 아카마쓰 요시노리, 하타케야마 모토쿠니,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시바 요시마사, 시바 요시시게 등 3만여 병사를 이끌고 사카이를 공격했다. 오우치 군은 분전했지만, 요시미쓰는 화공 전술을 펼쳤고, 요새와 1만여 채의 민가가 소실되는 등 열세에 몰렸다. 결국 요시히로는 하타케야마 미쓰이에에게 죽임을 당했다. 향년 44세였다.
사카이에서 함께 농성하던 동생 히로시게는 항복 후 사면받아 오우치씨의 후계자가 되었으나, 스오에 남아있던 모리미와 가독 투쟁이 발발했다. 요시히로의 유해는 야마구치현 야마구치시 호네이산의 루리코지(瑠璃光寺)에 안장되었고, 모리하루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루리코지 5중탑(일본 국가문화재)을 건립했다. 초상화는 야마구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 조선과의 관계
오우치 요시히로는 1395년 조선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 통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대내전다다량(大內殿多多良)'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듬해 승려 통축(通笁)과 영림(永琳)을 보내 해적 단속과 포로 송환을 약속하고 대장경을 요구했다. 1397년에는 조선에서 '육주자사(六州刺使)' 혹은 '육주목(六州牧)'으로 불렸으며, 승려 영범(永範)·영확(永廓)을 보내 예물을 바쳤다. 1399년 조선의 정종에게 투구와 장검을 바치고, 자신을 "백제의 후손"이라 칭하며 토전(土田)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조선 조정은 도평의사사를 통해 백제 왕족의 계보를 찾았으나 실패했고, 임시로 온조의 후손인 고(高)씨(실제로는 부여씨)에게 토전 3백 결을 주기로 했다. 그러나 권근 등은 외국인에게 토전을 주는 것은 조공을 바치는 것과 같고, 백성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며 반대했다. 대신 요시히로가 요구했던 대장경판을 주자는 주장이 나왔다. 정종은 요시히로가 왜구 소탕의 대가가 아닌 본가의 계통을 밝혀달라고 요청한 것이라며 전주에 채지(采地)를 마련하라고 명했지만, 요시히로 측 사신이 계보만 적어주면 된다고 밝히고 신하들의 반대가 이어지자 토전 문제는 중지되었다. 이후 요시히로는 조선왕조실록에서 '고의홍(高義弘)'으로 표기되었다.
요시히로는 왜구를 토벌한 공을 인정받아 조선에 옛 백제 땅의 토전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나, 조선 조정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한반도의 조선, 중국 대륙의 명나라와 독자적인 무역을 전개했다. 원래 대외 교류는 규슈 단다이(규슈 탐제)인 이마가와 사다요시가 독점했지만, 그의 실각 이후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신임을 받던 요시히로가 막부의 교섭 창구가 되었다. 요시히로는 요시미쓰의 신임을 바탕으로 무역에서 유리한 입지를 구축했으며, 왜구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온 포로를 조선에 돌려보내고 대가로 고려 대장경을 조선에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역 독점 이권에 대한 문제로 요시미쓰와 요시히로는 외교 문제에서 대립이 심화되었다.
4. 평가
오우치 요시히로는 뛰어난 무장이자 기골이 있는 장수였다고 전해진다. 가도(歌道)에도 뛰어나 종석(宗碩)과 교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후습유와가집(新後拾遺和歌集)』의 작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의 문화인이기도 했다. 응영(應永) 6년 11월에는 와카야마현(和泉国)의 구 남조 계열 영주인 와다(和田)씨에게 안두장(安堵状)을 내렸는데(「와다문서(和田文書)」), 이는 응영의 난(應永の乱)을 앞두고 발급한 것이지만 북조(北朝) 연호로 작성했고 군세 촉구를 나타내는 문구를 넣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와다씨에게 화를 미치지 않고 지증문서(支證文書)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생각된다. 응영의 난은 기이(紀伊)국, 이시미(石見)국의 국인(國人)의 이반 등으로 패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수호가 애썼던 국인·지시(地侍)을 어느 정도 동원할 수 있었기에 발생한 이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의홍(義弘)의 뛰어난 영국 경영의 이면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4. 1. 긍정적 평가
오우치 요시히로는 뛰어난 무장이자 기골이 있는 장수였다고 전해진다. 가도(歌道)에도 뛰어나 종석(宗碩)과 교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후습유와가집(新後拾遺和歌集)』의 작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의 문화인이기도 했다. 응영(應永) 6년 11월에는 와카야마현(和泉国)의 구 남조(南朝) 계열 영주인 와다(和田)씨에게 안두장(安堵状)을 내렸는데, 이는 응영의 난(應永の乱)을 앞두고 발급한 것이지만 북조(北朝) 연호로 작성했고 군세 촉구를 나타내는 문구를 넣지 않았다. 이것은 나중에 와다씨에게 화를 미치지 않고 지증문서(支證文書)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였다고 생각된다. 응영의 난은 기이(紀伊)국, 이시미(石見)국의 국인(國人)의 이반 등으로 패배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당시의 수호가 애썼던 국인·지시(地侍)을 어느 정도 동원할 수 있었기에 발생한 이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의홍(義弘)의 뛰어난 영국 경영의 이면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4. 2. 부정적 평가
오우치 요시히로는 뛰어난 무장이자 기골이 있는 장수였다고 전해진다. 가도(歌道)에도 뛰어나 종석(宗碩)과 교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신후습유와가집(新後拾遺和歌集)』의 작자로 이름을 올릴 정도의 문화인이기도 했다. 응영(應永) 6년 11월에는 와카야마현(和泉国)의 구 남조(南朝) 계열 영주인 와다(和田)씨에게 안두장(安堵状)을 내렸는데(「와다문서(和田文書)」), 이는 응영의 난(應永の乱)을 앞두고 발급한 것이지만 북조(北朝) 연호로 작성했고 군세 촉구를 나타내는 문구를 넣지 않았다. 이는 나중에 와다씨에게 화를 미치지 않고 지증문서(支證文書)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그의 나름의 배려였다고 생각된다. 응영의 난은 최종적으로 기이(紀伊)국, 이시미(石見)국의 국인(國人)의 이반 등으로 패배했다고 말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의 수호가 애썼던 국인·지시(地侍)을 어느 정도 동원할 수 있었기에 발생한 이반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며, 오히려 의홍(義弘)의 뛰어난 영국 경영의 이면이라고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5. 기타
남조(南朝)와의 중개 및 화목(和睦) 알선을 통해 남북조 통일에도 힘썼다는 속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를 보여주는 일차 사료는 고사하고, 시대적으로 가까운 이차 사료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요시히로가 중개했다는 설은 무로마치 시대의 군기물 『응영기』나 근세의 『남방기전』에 나오지만, 둘 다 사료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모리 시게아키에 따르면, 오우치 요시히로는 원중 8년/명덕 2년(1391년)의 명덕의 난의 은상으로 기이 국·와카야마현의 수호가 되었으므로 남조와의 이해관계가 많았을 것이고, 따라서 의만(義満)이 등장하기 전의 사전 협상 등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5. 1. 오우치 요시히로가 등장하는 작품
- 후루카와 가오루(古川薰) 작 《화염의 탑 - 소설 오우치 요시히로 -》(炎の塔 小說大內義弘) 문예춘추(文藝春秋), 1980년
5. 2. 일화
오우치 요시히로는 뛰어난 무인으로서 기골이 장대한 무장이었다고 전한다. 가도(歌道)에 뛰어나 소세키(宗碩)와도 교류가 있었고 그의 작품이 『신후습유화가집』(新後拾遺和歌集)에 수록되기도 했다. 남조(南朝)와의 중개 및 화목(和睦) 알선을 통해 남북조 통일에도 힘썼다는 속설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이를 보여주는 일차 사료는 고사하고, 시대적으로 가까운 이차 사료조차 현존하지 않는다. 요시히로가 중개했다는 설은 무로마치 시대의 군기물 『응영기』나 근세의 『남방기전』에 나오지만, 둘 다 사료로서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모리 시게아키에 따르면, 오우치 요시히로는 원중 8년/명덕 2년(1391년)의 명덕의 난의 은상으로 기이 국·와카야마현의 수호가 되었으므로 남조와의 이해관계가 많았을 것이고, 따라서 의만(義満)이 등장하기 전의 사전 협상 등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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