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자키 켄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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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쿠자키 겐조는 1920년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태어난 인물로,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전후 사업 실패, 잦은 범죄 행위, 그리고 쇼와 천황에 대한 파칭코 구슬 발사 사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뉴기니 전선에서의 끔찍한 경험을 겪고, 전후에는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다양한 범죄를 저질렀다. 1969년에는 황거에서 쇼와 천황에게 파칭코 구슬을 발사하여 폭행죄로 처벌받았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선거에 출마하고, 다나카 가쿠에이 암살을 시도하는 등 논란을 일으켰다. 하라 카즈오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천황의 나체 군대는 진격한다'에 출연하여 그의 삶이 조명되기도 했다. 오쿠자키는 1997년 출소 후 2005년 사망했다.
1920년 효고현 아카시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후 생계를 위해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1] 1941년 일본 제국 육군에 징집되어 공병으로 복무했으며, 1943년 제2차 세계 대전의 격전지였던 뉴기니에 파견되었다. 참혹한 뉴기니 전역에서 부대는 거의 전멸했고, 오쿠자키는 부상과 굶주림, 상관의 폭행 등을 겪으며 극적으로 생존하여 1944년 연합군에 투항, 오스트레일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11][14] 이 전쟁 경험은 그의 이후 삶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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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생
1946년 귀국 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1951년 고베시에서 자동차 관련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1956년 금전 문제로 부동산업자를 살해하여 상해치사죄로 10년간 복역했다.[1] 수감 생활 중 천황제와 일본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게 되었고, 출소 후 반체제적 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황거 일반 참배 행사에서 쇼와 천황에게 파칭코 구슬을 발사한 사건(쇼와 천황 파칭코 저격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1976년 천황 일가의 사진을 이용한 포르노 전단을 제작, 살포한 황실 포르노 삐라 사건[3], 1981년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 살해 예비[6] 등 극단적인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표출하며 여러 차례 체포 및 수감되었다. 또한, 1977년과 1980년 참의원 선거, 1983년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5]
1982년부터 다큐멘터리 영화 감독 하라 카즈오와 함께 자신의 전쟁 경험과 전우들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추적하는 영화 `유키유키테 신군` 촬영에 참여했다. 영화 촬영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1983년 과거 뉴기니 전역 당시 부하 병사 사망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 믿는 전 상관의 아들에게 총격을 가해 살인미수죄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5][6]
1997년 만기 출소 후 1998년 영화 `신님이 사랑하는 놈`에 주연으로 출연하기도 했으나, 건강 악화로 조용한 말년을 보냈다. 2005년 6월 16일 고베시의 한 병원에서 다발성 장기 부전 증후군으로 8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전쟁의 참상과 트라우마, 그리고 일본 사회의 모순에 대한 극단적인 저항의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2. 1. 초기 생애 (1920-1940)
1920년 2월 1일 효고현 아카시시 오쿠라초 6초메에서 奥崎 俊三郎|오쿠자키 슌자부로일본어와 和賀|와가일본어 사이에서 태어났다.[1] 본적지는 효고현 미키시 구치요카와정전이다. 그의 가족은 대공황의 영향을 받았으며, 오쿠자키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10세부터 잡일을 시작했고, 이후 면포 도매상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다. 이 시기에 그는 기독교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1940년 징병 검사에서 갑종 합격하였다.
2. 2. 군 복무와 뉴기니 전역 (1941-1946)
1941년 3월 오카야마 연대에 이등병으로 입영하였고, 이후 중국 주장의 공병 부대로 전속되어 건설 임무와 중국군을 상대로 한 전투 임무를 간헐적으로 수행했다.
1943년 1월, 독립공병 제36연대 제2중대로 배속되었고, 같은 해 4월 당시 격전지였던 뉴기니의 한자만 해군 기지로 파견되었다. 그의 연대는 알렉시스하펜에 비행장을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건설은 몇 달 만에 완료되었음에도 일본군은 말라리아와 연합군의 폭격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1943년 12월, 부대는 알렉시스하펜 비행장을 포기하고 웨왁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후 홀란디아까지 밀려났다. 이 후퇴 과정은 "생존을 위한 길고 필사적인 투쟁"으로 묘사되며, 일본군은 이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연합군의 공격에 시달렸다.
오쿠자키는 이 패주 과정에서 상관에게 폭행당하고 식량을 빼앗겼으며, 오른손과 오른발에 적의 총탄을 맞아 부상을 입고 오른손 새끼손가락을 잃었다. 극도로 쇠약해진 그는 동료 병사들과 점차 고립되었는데, 이는 그의 "괴팍한" 반권위주의적 행동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944년 7월 18일, 10개월간의 후퇴 끝에 홀란디아 인근 서뉴기니 덴타에서 연합군의 식량을 훔치려다 발각되자, "GI, Come gun!" (미군이여, 나를 쏴라)이라고 외치며 투항했다.[11] 그는 오스트레일리아군의 포로가 되었으며, 포로 번호는 148715였다.[11]
그의 연대는 1,100명에서 1,200명에 달하는 병력 중 오쿠자키를 포함해 단 6명에서 30여 명만이 살아남았고, 소속 중대 350명 중에서는 단 2명만이 생존했을 정도로 처참한 피해를 입었다. 오쿠자키의 최종 계급은 상등병이었다.[2]
체포된 후 오쿠자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오스트레일리아 헤이(Hay)의 제8 포로 수용소에서 병원 요리사로 일하며 지냈다.[11] 1946년 3월 일본으로 귀환하는 배에 올랐다. 당시 호주 당국은 귀환선에 신선한 채소와 육류를 대량으로 실어주었으나, 선내 급식이 매우 부실하자 선원들이 식량을 횡령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오쿠자키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단신으로 선장실로 찾아가 선장을 폭행하고 이발용 가위로 찔렀다.[11] 그러나 폭행 피해자인 선장이 자신의 횡령 사실이 드러날 것을 우려하여 사건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오쿠자키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귀국할 때까지 배에서는 풍족한 식량이 배급되었고, 그때까지 눈에 띄지 않던 오쿠자키는 귀환병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떠올랐다.[11][14]
2. 3. 전후 활동과 범죄 (1947-1969)
1947년 3월, 미키시의 공화제작소에 취직했다. 같은 해 5월에는 제작소의 사감(寮母)이었던 이시지 시즈미(石地シズミ)와 결혼했다. 1951년 고베시 효고구에 썬전지공업소(サン電池工業所)를 개업하여 배터리 판매, 중고차 판매 및 자동차 수리업을 운영했다.
1956년, 오쿠자키는 점포 임대차 관련 금전 문제로[1] 브로커 행세를 하며 자신의 투자를 가로챈 사기꾼 延原 一男|노부하라 카즈오일본어를 공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1] 이 사건으로 상해치사죄로 기소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오쿠자키의 변호사는 유죄를 인정하고 반성하여 형량을 낮출 것을 권유했지만, 오쿠자키는 이를 거부했다.
이후 10년간 오사카 구치소에서 독방 생활을 하며 일본의 법률 및 정치 시스템, 그리고 전후 일본 민주주의에서 천황제의 역할에 대해 점차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의 정치적 견해는 "유토피아적 아나키즘과 막연한 기독교적 종교 관념의 혼합"으로 발전했다. 수감 중에도 법무대신에게 사형 제도 중단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내고, 자위대가 위헌이라고 주장하며 천황제 폐지를 요구하는 소송을 시도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1969년, 황거의 일반 참배 행사 중 쇼와 천황을 향해 파칭코 구슬을 발사하는 사건(쇼와 천황 파칭코 저격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일로 폭행죄로 징역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2. 4. 쇼와 천황 파칭코 저격 사건 (1969)
1966년 8월 출소 후 자동차 배터리 사업을 하던 오쿠자키는 자신의 트럭에 쇼와 천황이 전범이라는 내용과 반군국주의, 반권위주의 슬로건을 담은 현수막을 달기 시작했다. 1968년 12월 무렵, 그는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천황을 상대로 한 "비폭력적" 행동을 구상했다. 쇼와 천황에게 파칭코 구슬을 쏘는 계획을 세웠는데, 이는 천황에게 거의 맞지 않거나 가벼운 상처만 입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체포된 후 법정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주장하고 군주제를 폐지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쿠자키는 "히로히토를 죽이는 것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면서도, "히로히토는 수십만 명의 일본인을 전쟁에서 죽음으로 몰아넣은 죄로 사형을 받아야 마땅하며", "그것이 진정한 평화, 자유, 행복을 가져다준다면" 천황 살해도 불사하겠다고 밝혔다.
1969년 1월 2일, 황거에서 신년 일반참하가 6년 만에 열렸을 때, 오쿠자키는 약 26.5m 떨어진 곳에서 발코니에 서 있던 쇼와 천황을 향해 직접 만든 새총으로 파칭코 구슬 세 개를 발사했다. 구슬은 모두 천황의 발치, 발코니에 맞았을 뿐 천황은 다치지 않았다. 오쿠자키는 경찰의 주의를 끌기 위해 "야마자키, 천황을 피스톨로 쏴라!"라고 외쳤다. (야마자키는 뉴기니 전투에서 사망한 그의 전우 이름이다.) 그는 다시 천황을 향해 구슬 한 개를 더 쏘았으나 이 역시 빗나갔다. 경찰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군중 속에서 범인을 즉시 식별하지 못했지만, 오쿠자키는 이후 현장에서 사복 경찰에게 체포되어 자수한 형태가 되었다. 쇼와 천황이나 그의 가족이 공격을 즉시 인지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언론은 오쿠자키를 편집성 인격 장애와 기억 상실을 겪는 살인 전과자로 묘사했으며, 마이니치 신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국 신문은 그의 전쟁 경험을 언급하지 않았다. 오쿠자키는 정신병원에 2개월간 수용된 후 재판을 받을 능력이 있다고 판단되었다.
1970년 1월 시작된 공판은 새로운 일본국 헌법 하에서 천황이 직접 관련된 첫 재판이었으나, 쇼와 천황의 피해자 증언이나 진술서는 제출되지 않았다. 재판 중 피해자인 히로히토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천황'이라는 용어만 사용되었다. 오쿠자키는 공판 중 성기를 노출하고 검사에게 소변을 뿌렸으며 판사에게 침을 뱉는 등 기행을 벌였다.[15][13] 그는 일본국 헌법 제1조(천황의 지위에 관한 조항)가 위헌이라고 주장하고 쇼와 천황에 대한 반대 심문을 요청했으나 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1970년 6월 8일, 법원은 오쿠자키에게 폭행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오쿠자키와 검찰 양측 모두 도쿄 고등재판소에 항소했다. 10월 7일, 고등재판소는 1심 판결을 유지했지만, 재판 전후 구금 기간(1년 6개월)을 고려하여 오쿠자키를 즉시 석방했다. 그는 최고재판소에 상고했으나, 1971년 4월 1일 기각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전에는 없었던 황거 발코니에 방탄 유리가 설치되었다.[15]
2. 5. 황실 포르노 삐라 사건 (1976)
1976년, 오쿠자키 켄조는 『우주인의 성서!?』라는 책을 자비출판했다. 이 책을 선전할 목적으로, 그는 포르노 사진에 쇼와 천황을 비롯한 천황 일가의 사진을 콜라주하거나 천황을 묘사한 포르노 만화가 담긴 삐라 약 3,000장을 제작했다.[3] 오쿠자키는 이 삐라들을 도쿄의 긴자, 시부야, 신주쿠 보행자 천국이나 백화점 옥상 등지에서 살포했다. 이 사건은 황실 포르노 삐라 사건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오쿠자키는 전국 지명 수배 명단에 올랐다. 이후 사이타마현에서 과거 독립공병 제36연대 시절 전우였던 전 하사관의 집을 방문하던 중 사이타마현경에게 발견되어 후카야 경찰서에 체포되었다.[16] 그는 외설물반포 등의 죄 혐의로 기소되어 도쿄 구치소에서 1년 2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4][1]
수감 중이던 1977년, 오쿠자키는 제1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의 전국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5] 그는 1978년 4월에 출소했다.[5]
2. 6. 선거 출마와 다나카 가쿠에이 살해 미수 (1977-1983)
1977년, 오쿠자키는 수감 중 제11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전국구에 출마하여 '신군 신문'을 발행했으나 낙선했다.[4][1] 그는 1978년 4월에 출소했다. 1980년에는 제12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 전국구에 다시 입후보했지만 역시 낙선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선거 광고 게재를 거부한 아사히 신문사 사장 와타나베 세이키의 습격을 계획했으나, 연말 텔레비전 뉴스에서 당시 자민당 최대 파벌인 목요 클럽의 송년회를 보고 목표를 변경했다. 그는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를 "천황에게 통하는 사회의 악인"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표적으로 삼았다.
1981년에는 '다나카 가쿠에이를 죽이기 위해 기록한다'라는 제목의 책을 자비로 출판했으며, 다나카 전 총리에 대한 살인 예비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으나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6] 이후 오쿠자키는 자가용차 2대(토요타 마크 II, 다이하쓰 하이제트)를 이용해 거리 선전 활동과 자서전 홍보를 이어갔다.
1982년부터는 하라 카즈오 감독과 함께 다큐멘터리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 촬영을 시작했다. 1983년 3월, 하라 감독 등과 서뉴기니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단독으로 파푸아뉴기니를 방문하여 위령 활동을 했다.
1983년 12월에는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당시 효고 1구에서 입후보했으나 다시 낙선했다.[5]
2. 7. 영화 출연과 만년 (1987-2005)
1982년부터 다큐멘터리 영화 `천황의 군대는 진군한다`의 촬영이 시작되었고, 하라 카즈오 감독과 함께 서뉴기니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이 영화는 뉴기니 전역에서 사망한 두 명의 전우들의 운명을 조사하는 과정을 담았다.[7] 영화는 이들이 상관의 식인 행위 가담을 거부했기 때문에 처형되었다는 암시를 담고 있다. 오쿠자키는 이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을 바탕으로, 부하들을 살해했다고 의심되는 전 중대장 등 3명에 대한 복수 살해를 결심했다.
1983년 12월, 중의원 선거에 효고 1구에서 입후보한 직후, 전 중대장 村本 政雄|무라모토 마사오jpn(전시 성씨는 古清水|고시미즈jpn)의 집을 찾아가 응대하러 나온 그의 장남 村本 和憲|무라모토 카즈노리jpn에게 개조 권총을 발사하여 부상을 입혔다.[5][6] 이 사건으로 오쿠자키는 살인미수죄 등으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았다.[6]
히로시마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1986년 9월, 아내 シズミ|시즈미jpn가 사망했다.[6] 형이 확정된 후 구마모토 형무소를 거쳐 1993년 6월 조노 의료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97년 8월 후추 형무소에서 만기 출소했다.[9]
출소 후인 1998년에는 영화 `신님이 사랑하는 놈`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만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혼자 살았다. 2004년 8월 자택에서 쓰러져 입원했으며, 2005년 6월 16일 고베시 내 병원에서 다발성 장기 부전 증후군으로 사망했다. 향년 85세였다.[2] 사망 직전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바보 자식(빠가야로)"이라고 소리쳤다고 보도되었으나, 그의 지원자들은 입원 중에 "모두 수고하십니다(모두, 좋게 해줍니다)"라고 말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오쿠자키 사후 그의 집은 철거되어 현재는 주차장이 되었다. 하라 카즈오 감독에 따르면 오쿠자키와 아내 시즈미, 오쿠자키의 어머니가 묻힌 묘소(고베시 오타니 묘원 내) 역시 철거되어 빈터로 남아있다.
3. 저서
출판 연도 제목 출판사 ISBN 1972년 ヤマザキ、天皇を撃て!일본어 (야마자키, 천황을 쏴라!) 삼일서방 / 신천사 ISBN 4787787187 1976년 宇宙人の聖書!? 天皇ヒロヒトにパチンコを撃った犯人の思想・行動・予言일본어 (외계인의 성경!?: 천황 히로히토에게 파칭코를 쏜 범인의 사상·행동·예언) 선서점 1981년 田中角栄を殺すために記す 人類を啓蒙する手段として일본어 (다나카 가쿠에이를 죽이기 위해 기록하다: 인류를 계몽하는 수단으로서) 선서점(발행)·유분사(발매) 1983년 殺人論 国家・権力者・法律の犠牲者に捧げる殺人者の贈物일본어 (살인론: 국가·권력자·법률의 희생자에게 바치는 살인범의 선물) 선서점 1987년 ゆきゆきて「神軍」の思想일본어 (유키유키테 신군(神軍)의 사상) 신천사 ISBN 4787787179 1988년 非国民奥崎謙三は訴える ゆきゆきて、神軍の凱歌일본어 (비국민 오쿠자키 겐조가 호소한다 : 유키유키테 신군(神軍)의 개선가) 신천사 ISBN 4787788140 1995년 奥崎謙三服役囚考 あいまいな、宇宙の私일본어 (오쿠자키 겐조 복역 죄수 고찰: 애매하지 않은, 우주의 나) 신천사 ISBN 4787795147
4. 출연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神軍平等兵・戦歴
https://www.loft-prj[...]
2021-11-20
[2]
뉴스
訃報:奥崎謙三さん85歳=「ゆきゆきて、神軍」に出演
https://www.mainichi[...]
2005-06-26
[3]
웹사이트
A lone voice
https://www.scmp.com[...]
2021-11-20
[4]
웹사이트
"The Emperor's Naked Army March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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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0
[5]
웹사이트
昭和天皇パチンコ狙撃事件
http://www.maroon.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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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AV media
The Emperor's Naked Army Marches On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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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Hara Kazuo and his "Renegade Cin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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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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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olence of Privacy: A Conversation with Kazuo H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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ゆきゆきて「神軍」の思想
https://www.shins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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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奥崎謙三
http://www.jmdb.ne.j[...]
2021-11-20
[11]
서적
日本人捕虜 白村江からシベリア抑留まで 上
原書房
[12]
뉴스
こんどは皇族ポルノ パチンコ事件の奥崎つかまる
朝日新聞
1976-04-29
[13]
서적
天皇家の50年
[14]
서적
日本人捕虜 白村江からシベリア抑留まで 上
原書房
[15]
서적
天皇家の50年
[16]
뉴스
こんどは皇族ポルノ パチンコ事件の奥崎つかまる
朝日新聞
1976-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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