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히 츠빙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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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울리히 츠빙글리는 1484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종교 개혁가이다. 그는 16세기 스위스 연방의 불안정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용병 제도와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아 종교 개혁 사상을 형성했다. 츠빙글리는 사목 활동을 시작으로 취리히 대성당 설교자로 활동하며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며 개혁 운동을 펼쳤다. 그는 성찬에 대한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재세례파와 갈등을 겪었으며, 마르부르크 회의에서 루터와 성찬에 대한 이견을 확인했다. 츠빙글리는 67개 신조를 통해 자신의 신학을 제시하고 로마 가톨릭교회와 대립했으며,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전사했다. 츠빙글리는 성경 중심의 신학을 강조하고 사회 개혁을 추구했으며, 그의 사상은 하인리히 불링거와 장 칼뱅에게 이어져 스위스 개혁 교회와 개신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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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츠빙글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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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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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울리히 츠빙글리 |
출생일 | 1484년 1월 1일 |
출생지 | 빌트하우스, 생갈 수도원장 보호령 |
사망일 | 1531년 10월 11일 |
사망지 | 카펠, 취리히 주, 스위스 서약 동맹 |
직업 | 목사 신학자 |
배우자 | 안나 라인하르트 (1524년 4월 2일 결혼) |
시대 | 르네상스 |
교단 및 운동 | 개혁교회 츠빙글리주의 |
주요 관심사 | 기독교 예배 구원론 성례 |
주요 사상 | 기념설 성상 파괴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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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 |
학력 | 빈 대학교 바젤 대학교 |
기타 | |
로마자 표기 | Huldrych Zwingli |
인용 |
2. 역사적 배경
15세기와 16세기 유럽의 불안정한 정치 환경 속에서, 스위스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사실상 독립적인 상태였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스위스 외교 정책을 결정지었으며, 밀라노 공국, 사보이 공국, 교황령 등 주변 강대국들과의 경쟁과 분쟁은 스위스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 용병 제도는 논쟁의 대상이었으며, 종교 세력들은 젊은 스위스 남성들을 해외 전쟁에 보내는 것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했다.[13]
울리히 츠빙글리 시대의 스위스 연방은 13개 주(州)와 제휴 지역 및 공동 영지로 구성되었다. 현대 스위스가 연방 정부 하에 운영되는 것과 달리, 13개 주 각각은 내정과 외교를 거의 독립적으로 수행하였다. 각 주는 연방 내외에서 자체 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상대적 독립성은 종교 개혁 시대에 여러 주가 서로 다른 종파 진영으로 나뉘면서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예를 들어 1440년부터 1446년까지의 취리히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영토와 자원을 얻으려는 경쟁으로 군사적 야망이 더욱 커졌다.[12]
15세기와 16세기 유럽의 넓은 정치 환경 또한 불안정했다. 수세기 동안 연방의 강력한 이웃 국가인 프랑스와의 관계가 스위스의 외교 정책을 결정지었다. 명목상으로 연방은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였다. 그러나 1499년 슈바벤 전쟁에 이르는 일련의 전쟁을 통해 연방은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다. 밀라노 공국, 사보이 공국, 교황령과 같은 두 개의 대륙 강국과 소규모 지역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고 싸우면서 연방에 광범위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 기간 동안 용병 연금 제도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츠빙글리 시대의 종교 세력들은 주 당국을 부유하게 하기 위해 주로 젊은 스위스 남성을 해외 전쟁에 보내는 것의 장점에 대해 격렬하게 논쟁했다.[13]
이러한 내부 및 외부 요인은 '조국'(patria|파트리아la)이라는 용어가 개별 주에 대한 언급을 넘어 의미를 갖기 시작한 연방 국가 의식의 부상에 기여했다. 동시에 보편적인 가치와 학문에 대한 강조("인문주의의 왕자"인 에라스무스 (1466~1536)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를 특징으로 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연방에 뿌리를 내렸다. 스위스 애국심과 인문주의가 합쳐진 이 환경에서 1484년 츠빙글리가 태어났다.[14]
3. 생애
이러한 내부 및 외부 요인들은 '조국'(patria|파트리아la)이라는 개념이 개별 주를 넘어선 의미를 갖기 시작하면서 연방 국가 의식의 부상에 기여했다. 동시에 르네상스 인문주의가 에라스무스 (1466~1536)와 같이 스위스에 뿌리를 내렸다. 이러한 스위스 애국심과 인문주의가 결합된 환경에서 1484년 츠빙글리가 태어났다.[14]
3. 1. 출생과 성장
1484년 1월 1일, 울리히 츠빙글리는 스위스 토겐부르크 자치주의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지역 유지였으며, 외할아버지는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였다.[15] 츠빙글리는 베젠의 학장으로 취임한 삼촌에게서 인문주의 교육을 받았다.[16]
그는 열 살 때 바젤에서 라틴어 문법, 음악, 변증학을 배웠고,[17] 1498년에는 베른에서 하인리히 뵐플린에게 배웠다. 1500년부터 2년 동안 비엔나에서 학문 활동을 하였고,[19] 1502년 바젤 대학교로 돌아와 성 마틴 대학에서 라틴어를 배웠다. 1506년에는 바젤 대학교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20]
3. 2. 사목 활동과 종교 개혁
1506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로 서품받은 츠빙글리는 글라루스에서 10년 동안 사목 활동을 했다. 그는 헬라어와 고대 로마의 철학 및 문학을 공부하며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와 서신을 교환하며 친분을 쌓았다.[138]
츠빙글리는 글라루스 연대의 군종 사제로서 이탈리아 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의 비참함을 경험했다. 그는 용병 제도에 반대하는 글을 발표했는데, 이는 에라스뮈스의 영향으로 상징적이고 풍자적인 내용이었다. 당시 그는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나 인문주의자에 가까웠다.[138]
1516년 츠빙글리는 아인지델른으로 옮겨 설교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주일 미사 시간에 면죄부의 해악성을 비판하고, 로마 교황청을 비방하는 설교를 했다. 일부 학자들은 1516년을 스위스 종교 개혁의 시작점으로 보기도 한다.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도전하고 성경의 권위를 강조했다. 그의 개혁안에는 용병 제도 반대와 같이 과격한 내용도 있어, 용병 제도로 생계를 유지하던 스위스 주민들과의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138]
당시 스위스 연방은 13개의 주와 제휴 지역, 공동 영지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 주는 내정과 외교에서 상당한 독립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종교 개혁 시기에 각 주가 서로 다른 종파로 나뉘면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12]
1522년 사순절 첫 금식 주일에 츠빙글리와 12명의 참가자들은 훈제 소시지 두 개를 나눠 먹으며 금식 규칙을 어겼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행동을 옹호하며 성경에 근거한 음식 규칙은 없으며, 이를 어기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소시지 사건'(Affair of the Sausages)으로 알려졌으며, 스위스 종교개혁의 시작으로 여겨진다.[40]
츠빙글리와 인문주의자 친구들은 1522년 7월 2일 주교에게 성직자의 독신 생활 의무를 폐지해 줄 것을 청원했다. 츠빙글리는 이미 안나 라인하르트(Anna Zwingli)라는 과부와 비밀리에 결혼한 상태였으며, 이들은 후에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42]
1519년 츠빙글리는 면죄부 판매 설교를 하던 베르날디노 산손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이 설교는 콘스탄츠 대주교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고, 산손은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해임되었다. 츠빙글리는 이때부터 가톨릭교회와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루터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츠빙글리는 "오직 성경"을 기독교 신앙의 기준으로 삼아 사회 변혁을 지향하는 개혁 운동을 시작했다.[40]
츠빙글리는 취리히 시 참사회에 개혁 협력을 요청했고, 참사회는 이를 받아들였다. 츠빙글리는 성서에 근거가 없는 교회 제도의 폐지를 주장했다. 취리히 시는 가톨릭교회 지지파와 츠빙글리 지지파로 나뉘었으나, 결국 츠빙글리의 의견이 승리했다. 교황 제도와 성직 서열 제도는 부정되었고, 성상 파괴와 수도원 폐쇄가 이루어졌다. 츠빙글리는 사제 독신제도 폐지했다. 미사는 당분간 유지되었다.[40]
1525년 4월 13일 성목요일, 츠빙글리는 미사를 폐지하고 자신이 고안한 "주님의 만찬" 의식을 처음으로 거행했다. 이는 취리히 종교 개혁의 완성으로 여겨진다.[40]
3. 3. 취리히에서의 종교 개혁
1518년 취리히 대성당의 설교자로 임명된 츠빙글리는 종교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영향을 받아 성서 원전 연구에 몰두했으며, 주일 설교 내용을 성서와 교부들의 저서에만 근거하도록 했다. 1519년 면죄부 판매 설교자 베르나르디노 산손을 비판하는 설교를 하여 가톨릭교회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138]
1522년 사순절 금식 기간에 츠빙글리는 금식 규칙을 어기고 소시지를 먹는 사건을 옹호했다. 그는 성경에 근거하지 않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비판했으며, 소시지 사건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스위스 종교 개혁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40]
1523년 취리히 시의회는 두 차례의 공개 토론을 개최했다. 츠빙글리는 가톨릭교회 측과 논쟁하여 승리하고, 종교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했다.[44][45] 그는 ''슐루스레덴''(결론 진술 또는 67개 조항)에서 자신의 입장을 요약했다.[46][47]
1524년 안나 라인하르트와 결혼하여 사제 독신제를 비판하고, 성직자 결혼의 정당성을 주장했다.[42]
1525년 4월 13일 성목요일, 츠빙글리는 미사를 폐지하고 자신이 고안한 "주님의 만찬" 의식을 처음으로 거행하여 취리히 종교 개혁을 완성했다.[59]
츠빙글리는 급진 개혁파(재세례파)와의 갈등을 겪었다. 그는 유아 세례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성인 세례를 주장하는 재세례파를 비판하며, 취리히 시의회의 지원을 받아 이들을 추방했다.[64][65]
3. 4. 마르부르크 회의
1529년 10월, 헤센의 영주 필립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탄압에 맞서 개신교 연맹을 조직하고 교회 연합을 추진하기 위해 독일과 스위스의 종교개혁가들을 자신의 영지로 초청했다. 이 회의는 마르부르크에서 열렸으며, 츠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와 신학적 견해를 논의했으나, 성찬에 대한 입장 차이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츠빙글리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이해한 반면, 루터는 성찬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임재한다고 주장했다. (성찬 논쟁)[86]
독일에서는 루터와 필립 멜란히톤, 카스팔 쿠르키거, 요하네스 브렌츠, 유스투스 요나스와 안드레아스 오시안더가 참석하였고, 스위스에서는 츠빙글리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 마르틴 부처, 헤디오 등이 참석하였다.[84] 츠빙글리는 루터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초대에 응했지만, 루터는 회의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토론은 10월 1일부터 4일까지 열렸고, 그 결과는 15개의 ''마르부르크 조항''으로 발표되었다. 참가자들은 14개 조항에 동의했지만, 15번째 조항인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견해는 달랐다.[85] 츠빙글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이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다고 비판하며, 성찬은 단지 상징일 뿐이라고 주장했다.[81] 반면 루터는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다.[86]
이러한 차이로 인해 루터는 처음에 츠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89] 회담은 결렬되었고, 츠빙글리는 눈물을 흘리며 루터파와의 일치를 원한다고 말했다.[88]
4. 츠빙글리의 신학
츠빙글리의 신학은 성경에 기초하며, 성경을 영감받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고대의 범교회적 공의회나 교부들과 같은 인간의 문헌들보다도 성경의 권위를 높게 두었다.[99] 그는 유대교에 대한 공식 교회 신학을 고수했지만, 교황권과 그 군사력이 유대인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확신했다. 장 칼뱅과 함께 기독교 교회에서 유대인의 영향을 장기간 지속시켰고,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의 원리''를 옹호하여 루터의 반유대주의적 경향에 반대하고 종교 개혁 기간 동안 가톨릭에 더 가까이 다가섰다.
츠빙글리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다른 자료들을 사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지만, 그의 해석 원리는 합리주의적 인문주의 교육과 성경에 대한 개혁된 이해에서 비롯된다.[100] 그는 재세례파와 같은 구절의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고, ''친절한 주석''(1527)에서 설명하는 방법인 수사법[101]과 비유를 사용했다. 그가 효과적으로 사용한 두 가지 비유는 세례와 할례, 그리고 성찬식과 유월절 사이의 비유였다.[102] 그는 즉각적인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이면의 목적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며, 성경 구절들을 서로 비교했다.
일반 사람들에게 "성례전"이라는 단어는 죄로부터 양심을 해방시키는 고유한 힘이 있는 신성한 행위를 의미했기에, 츠빙글리는 이 단어를 거부하고 "서약"을 의미하는 "sacramentum"을 사용했다.[103]
츠빙글리는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았지만, 루터와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그는 루터가 교황에 대항하여 취한 입장에 동의했고,[107]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이자 숭배자였다.[108]
츠빙글리는 세례를 하나님과의 계약의 표징으로 보았으며, 구약의 할례를 대체하는 것으로 주장했다.[104] 성찬식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한 번만 희생을 행했다고 주장하며, 성찬식을 "희생의 기념"이라고 해석했다.[105] 그는 요한복음 6장 63절("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을 핵심 구절로 제시하며, 화체설과 루터의 견해에 반박했다.[106] 성경 해석과 성찬에 대한 이해는 츠빙글리가 루터와 합의에 이르지 못한 주요 원인이었다.
4. 1. 성경
성경은 츠빙글리의 신학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는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츠빙글리는 교부나 교회의 전통보다 성경의 권위를 최우선으로 여겼다.[99] 그는 정경 복음서들 간의 차이점을 인정하면서도, 성경의 영감과 함께 인간적인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였다.[55]츠빙글리는 성경 구절의 문자적 해석을 거부하고, 수사법[101]과 비유를 사용하여 해석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그는 세례와 할례, 성찬식과 유월절 사이의 비유를 효과적으로 사용했다.[102] 또한, 성경 구절의 문맥과 목적을 이해하고, 성경 구절들을 서로 비교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츠빙글리는 "성례전"이라는 단어 대신 "서약"을 의미하는 "sacramentum"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103] 그는 세례를 하나님과의 계약의 표징으로 보았으며, 구약의 할례를 대체하는 것으로 주장했다.[104]
성찬식에 대해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한 번만 희생을 행했다고 주장하며, 성찬식은 "희생의 기념"이라고 해석했다.[105] 그는 요한복음 6장 63절("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을 핵심 구절로 제시하며, 화체설과 루터의 견해에 반박했다.[106]
츠빙글리의 신학은 그의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의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1566)에 계승되어 개혁 교회의 신앙 고백으로 정립되었다.[55]
4. 2. 세례
츠빙글리는 유아세례를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언약의 표징으로 이해하며 옹호했다.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은 것처럼,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다고 보았다. 칼뱅 역시 이와 동일한 견해를 가졌다.[64]츠빙글리의 세례관은 재세례파와의 갈등을 일으켰다. 재세례파는 유아세례를 반대하고 성인세례를 주장했으며, 콘라트 그레벨과 펠릭스 만츠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츠빙글리는 재세례가 불필요하다고 강하게 주장했다.[64] 그는 세례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담은 다음 작품들을 남겼다.
- ''Baptism, Rebaptism, and Infant Baptism''(1525)
- ''A Reply to Hubmaier''(1525)
- ''A Refutation''(1527)
- ''Questions Concerning the Sacrament of Baptism''(1530)
1524년 8월 15일, 취리히 시의회는 모든 신생아에게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그레벨과 비밀리에 협의했지만, 1524년 말 시의회는 공식적인 논의를 요구했다. 논의가 결렬되자 츠빙글리는 ''Wer Ursache gebe zu Aufruhr''(소요를 일으키는 자)를 출판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64] 1525년 1월 17일 공개 토론에서 시의회는 츠빙글리를 지지했고, 자녀에게 세례를 거부하는 사람은 취리히를 떠나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월 21일 그레벨과 게오르크 블라우록은 최초의 재세례파 성인 세례를 집례했다.[65]
1526년 3월 7일, 취리히 시의회는 재세례를 금지하고 위반 시 사형에 처할 수 있다는 명령을 발표했다.[67] 츠빙글리는 이 명령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지만, 반대하지도 않았다. 펠릭스 만츠는 이 명령을 어기고 재세례를 행하다 체포되어 1527년 1월 5일 림마트 강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최초의 재세례파 순교자가 되었다.[68][69]
츠빙글리는 "성례전"이라는 단어 대신 세례를 서약으로 보았다. 그는 세례의 물에 죄를 씻는 능력이 있다는 가톨릭 신앙을 비판하고, 세례는 하나님과의 계약의 표징이며, 구약의 할례를 대체한다고 주장했다.[104]
4. 3. 성찬
루터는 성만찬을 통해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교제하며, 이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빵과 포도주에 임재한다고 보았다(공재설).[86] 반면 츠빙글리는 성찬을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이해했다.[105] 그는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하늘에 있기 때문에, 그의 인성이 빵과 포도주에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86]이러한 성찬에 대한 견해 차이는 1529년 마르부르크 종교회의에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합의를 이루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츠빙글리는 루터를 설득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루터는 회의에서 별 소득이 없을 것이라 예상했다.[83] 회의 결과, 참가자들은 15개 조항 중 14개에는 동의했지만,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15번째 조항에서는 의견이 갈렸다.[85]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빵과 포도주 "안에, 함께, 아래에" 존재한다고 본 반면,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기호)와 그리스도의 몸(의미하는 대상) 사이에는 하늘과 땅만큼의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86] 결국 루터는 츠빙글리와 그의 추종자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89]
4. 4. 국가
츠빙글리는 교회와 국가가 모두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아래 하나라고 보았다. 그의 사상은 바세르 교회(물의 교회)에 있는 동상에서 잘 나타나는데, 그는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칼을 쥐고 있다.[73]5. 67개 신조
1523년 취리히 시의회 공개 토론에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 작성한 67개 신조는 츠빙글리 신학의 핵심을 담고 있다.[139] 츠빙글리는 성경만이 최종적인 권위를 갖는다는 전제에 근거하여, 신조의 초반 15개 조항에 복음의 본질, 그리스도의 중보, 교회의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고, 후반에서는 교황, 미사, 면죄부 등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행을 비판하였다.[139]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을 "거짓 사도"요(55조), "시몬과 발람의 동료이며, 사탄의 화신"이라고 칭하였다(56조).[139]
또 사제의 결혼을 금지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셨거나 금하지 않은 모든 것이 선하므로, 모든 인간에게 허락된 결혼을 사제에게 금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라고 서술하여 교황청의 독신주의를 비판했다(29조). 그는 또 "고해성사가 죄를 용서받는 수단일 수 없고, 단지 도움을 구하는 것'이며(52조), "면죄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 고안해 낸 사악한 제도"라고 하였다(55조).[139]
1523년 1월 29일에 열린 제1차 취리히 종교 논쟁에는 약 600명의 참가자가 모였다.[44][45] 주교는 그의 대리 총감독인 요하네스 파브리가 이끄는 대표단을 보냈다. 츠빙글리는 ''슐루스레덴''(결론 진술 또는 67개 조항)에서 자신의 입장을 요약했다.[46][47] 시의회는 츠빙글리가 설교를 계속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다른 모든 설교자들은 성경에 따라서만 가르쳐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49][50]
6. 최후
1531년 10월 11일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츠빙글리가 이끄는 1500여 명의 취리히 군대는 8000여 명의 산림 자치주 군대와 교전하였으나 패배했다. 츠빙글리를 포함한 개신교 목사 25명, 의회의원 26명이 전사하였다. 가톨릭교회 측은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 츠빙글리에게 고해성사를 권유했으나, 츠빙글리는 이를 거부하고 시신이 4등분되는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 가톨릭교회 측은 츠빙글리의 시체를 조각내어 불태우고 그 재를 공중에 뿌리며 승리를 자축하였다.[142] 츠빙글리는 47세의 나이로 종교 개혁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을 완수하고 개혁을 확고하게 만드는 과업을 취리히의 하인리히 불링어와 주네브의 칼뱅 등 다음 세대 개혁자들에게 넘겨주었다.
1531년 10월 9일, 5개 주는 기습적으로 취리히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내부 분쟁으로 인해 취리히의 동원이 느렸고, 10월 11일, 배치가 미흡했던 3500명의 병력이 카펠 근처에서 প্রায় 두 배나 되는 5개 주의 군대와 조우했다. 츠빙글리를 포함한 많은 목사들이 병사들 사이에 있었다. 전투는 1시간도 채 지속되지 않았고, 츠빙글리는 취리히 군대의 500명 사상자 중 한 명이었다.[94]
츠빙글리는 자신을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군인, 조국 연방의 수호자, 그리고 지난 12년 동안 살았던 도시 취리히의 지도자로 여겼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47세의 나이에 그리스도나 연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취리히를 위해 죽었다.[95]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사람들은 츠빙글리가 최근에 이렇게 죽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의 오류가 만연했다면, 우리는 멸망했을 것이고, 우리 교회도 함께 멸망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그것은 항상 교만한 백성이었습니다. 다른 자들, 즉 가톨릭교도들도 아마 우리 주 하나님에 의해 처리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96]
에라스무스는 "우리는 츠빙글리와 외콜람파디우스 두 설교자의 죽음으로 큰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놀라운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위대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입니다."라고 썼다.[97] 외콜람파디우스는 11월 24일에 사망했다. 에라스무스는 또한 "벨로나가 그들을 편들었다면, 우리는 모두 끝장났을 것입니다."라고 썼다.[98]
7. 저서
츠빙글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과 재세례파의 도전에 맞서 여러 저서를 남겼다.[141]
- 1524년: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을 발표하여 가톨릭 교회의 오류를 지적했다.
- 1525년: 《세례에 대하여》(of Baptism), 《재세례와 유아세례에 관하여》(Of Rebaptism and Infant Baptism), 《주의 만찬에 관하여》, 《신앙 주해》 등을 저술했다.
- 1526년: 《하나님 말씀의 명확함과 확실함 또는 능력에 관하여》에서 성령의 조력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141]
- 1530년: 《믿음에 관하여》(Fidei ratio)를 저술했다.
츠빙글리의 저작들은 ''Zwingliverein''과 ''Theologischer Verlag Zürich''의 협력으로 1995년에 4권의 선집으로 출판되었다.[131][132]
권 | 주요 작품 |
---|---|
1권 | Pestlied (1519/20, "페스트 노래"), Die freie Wahl der Speisen (1522, "음식에 대한 선택과 자유"), Eine göttliche Ermahnung der Schwyzer (1522, "슈비츠 주민들에게 보내는 엄숙한 권고"), Die Klarheit und Gewissheit des Wortes Gottes (1522, "하나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 Göttliche und menschliche Gerechtigkeit (1523, "신적 정의와 인간 정의"), Wie Jugendliche aus gutem Haus zu erziehen sind (1523, "좋은 가정에서 자란 청소년들을 교육하는 방법"), Der Hirt (1524, "목자"), Eine freundschaftliche und ernste Ermahnung der Eidgenossen (1524, "츠빙글리의 연방 서한"), Wer Ursache zum Aufruhr gibt (1524, "폭동의 원인을 제공하는 자들") |
2권 | Auslegung und Begründung der Thesen oder Artikel (1523, "논제 또는 조항의 해석과 정당화") |
3권 | Empfehlung zur Vorbereitung auf einen möglichen Krieg (1524, "전쟁 준비 계획"), Kommentar über die wahre und die falsche Religion (1525,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논평") |
4권 | Antwort auf die Predigt Luthers gegen die Schwärmer (1527, "헛된 열정에 대한 루터의 설교에 대한 반박"), Die beiden Berner Predigten (1528, "베른 설교"), Rechenschaft über den Glauben (1530, "신앙에 대한 설명"), Die Vorsehung (1530, "섭리"), Erklärung des christlichen Glaubens (1531, "기독교 신앙에 대한 설명") |
전체 21권으로 구성될 예정인 전집은 ''Zwingliverein''이 ''Institut für schweizerische Reformationsgeschichte''와 협력하여 진행 중이다. 1~6권(''Werke'')은 츠빙글리의 신학적, 정치적 저술, 에세이, 설교 등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여 1991년에 완료되었다. 7~11권(''Briefe'')은 서한, 12권(''Randglossen'')은 츠빙글리가 책의 여백에 쓴 주석, 13권 이후(''Exegetische Schriften'')는 성경 주석이다. 13권과 14권은 출판되었고, 15권과 16권은 준비 중이며, 17권부터 21권까지는 신약 성경을 다룰 계획이다.
온라인에서 이용 가능한 구판 독일어/라틴어 판본과 영어 번역본은 원문 소스에 링크와 함께 제시되어 있다.
8. 유산
츠빙글리는 인문주의자이자 학자였으며, 헤센의 필립과 같은 통치자들과 그의 회중의 평범한 사람들 모두와 쉽게 소통했다.[115] 그는 엄격하고 고지식한 개혁가라는 명성과는 달리 뛰어난 유머 감각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글에는 풍자적인 우화, 패러디, 말장난을 사용했다.[116]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사회적 의무에 대해 더 의식적이었고, 대중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정부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117]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118]
1531년 12월, 츠빙글리의 후계자로 하인리히 불링거가 선출되었다. 불링거는 츠빙글리를 예언자이자 순교자로 옹호하며 그의 정통성에 대한 의심을 없앴다. 불링거의 주도 아래 스위스 연방의 고백적 분열은 안정되었고,[119] 개혁된 도시들과 주들을 결집시켜 카펠 전투에서 패배에서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츠빙글리가 근본적인 개혁을 시행했다면, 불링거는 그것들을 통합하고 개선했다.[120]
학자들은 츠빙글리가 역사에 미친 영향을 평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츠빙글리파"의 정의에 대한 합의가 없고, 츠빙글리파는 그의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 아래에서 발전했으며, 츠빙글리가 불링거와 장 칼뱅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흡하다.[121] 불링거는 츠빙글리의 대부분의 교리적 견해를 채택했고, 여러 번 자신의 신학을 요약했는데, 가장 잘 알려진 예로 1566년의 제2 헬베티쿠스 고백서가 있다. 한편 장 칼뱅은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이어받았다.[122] 칼뱅은 성찬에 대해 츠빙글리와 의견이 달랐지만, 1549년 불링거와 칼뱅은 교리적 차이를 극복하고 ''취리히 합의''(Zürich Consensus)를 만들었다. 그들은 성찬이 단순히 식사의 상징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지만, 루터파의 견해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찬 요소와 연합되어 있다는 견해는 거부했다. 이러한 화해를 통해 칼뱅은 스위스 개혁 교회와 전 세계에서 그의 역할을 확립했다.[123][124]
스위스 개혁 교회는 츠빙글리를 창시자로 여긴다. 19세기 RCUS 역사가 J.I. 굿에 따르면, 학자들은 츠빙글리파가 왜 더 널리 퍼지지 않았는지에 대해 추측한다.[125] 비록 츠빙글리의 신학이 개혁 신학의 최초 표현으로 간주되지만 말이다.[126]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츠빙글리의 유산은 오늘날 개혁 교회들의 기본적인 고백에 남아 있다.[127] 그는 종종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에 이어 "종교개혁의 세 번째 인물"로 불린다.[128]
2019년 스위스 감독 Stefan Haupt|슈테판 하우프트de는 개혁가의 경력을 다룬 스위스 독일어 영화 ''츠빙글리''를 발표했다.[129] 이 영화는 스위스 독일어로 제작되었으며 프랑스어와 영어 자막이 제공된다.
2019년은 존 칼빈 대학교에서 열린 회의와 함께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이 시작되었고, 츠빙글리의 삶과 영향에 대한 재검토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높아졌다. 예를 들어 영화 ''츠빙글리'', 브루스 고든의 저서 ''츠빙글리: 하나님의 무장한 예언자'' 및 토마스 퀸 마라벨로의 기사 "스위스 종교개혁 500주년: 츠빙글리가 스위스를 어떻게 변화시켰고 오늘날에도 계속 영향을 미치는가" 등이 있다.[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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