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위청 (전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위청은 전한 무제의 장군으로, 사생아 출신으로 미천한 신분에서 시작하여 흉노 정벌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대사마대장군에까지 올랐다. 흉노와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승리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데 기여했으며, 곽거병과 함께 흉노를 격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는 평양공주와 결혼했으나, 곽거병의 등장으로 군공과 인기가 곽거병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말년에는 정치에 관여하기보다는 군사 자문 역할을 수행했으며, 겸손한 태도로 주변의 존경을 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전한의 대장군 - 한신 (회음후)
    한신은 전한 초기의 군인이자 전략가로, 초한쟁란 시기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공헌했으나, 유방의 경계로 회음후로 강등된 후 모반 혐의로 여후에게 처형당했으며, 그의 삶은 토사구팽, 다다익선 등 고사성어와 관련되어 후대에 다양한 평가를 받는다.
  • 전한의 대장군 - 곽광
    곽광은 곽거병의 이복 동생으로, 한 무제의 신임을 받아 섭정하며 어린 소제를 보좌하고 한 선제를 옹립했으며, 훌륭한 통치 능력으로 존경받았으나 독재적인 통치 스타일과 족벌주의로 비판받기도 한다.
  • 전한의 거기장군 - 주아부
    주아부는 전한 문제와 경제 시대의 무장으로, 오초칠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고 강직한 성격으로 황제와 갈등을 겪다 옥사했다.
  • 전한의 거기장군 - 관영 (전한)
    관영은 전한 시대의 무장으로, 유방을 섬겨 진나라와 항우를 격파하고, 한나라 건국 후 진희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여씨의 난 때 유씨 가문을 지지하여 문제의 즉위에 기여한 인물이다.
위청 (전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위청 (衛青)
본명정청 (鄭青)
중경 (仲卿)
출생미상 (기원전 150년대 출생 추정)
출생지린펀, 산시 성
사망기원전 106년
사망지시안, 산시 성
배우자양신장공주
자녀위강
위불의
위등
아버지정계
어머니위씨
직업군인, 정치가
시호열후 (烈侯)
작위장평열후 (長平烈侯)

2. 생애

위청은 하급 관리 정계(鄭季)가 평양 이후 조시(의후 조참의 증손) 집에서 일하던 중 정계와 평양후의 노비 위온(衛媼)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평양후 집에서 가인으로 있다가 어려서 아버지에게 돌아갔으며, 원래 성은 정(鄭)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양 치는 일을 맡았으나, 본처 자식들에게 형제가 아닌 종 취급을 받았다. 장성한 후에는 평양후의 기사가 되어 그의 부인 평양공주를 모셨고, 훗날 평양공주와 결혼했다.

건원 2년(기원전 139년) 봄, 셋째 누나 위자부가 평양공주의 가수로 있다가 무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궁중으로 들어가면서 위청도 입궁해 건장궁에서 일하게 되었다. 무제의 황후 진황후는 아들이 없고 질투가 심했는데, 위자부가 임신하자 진황후의 어머니 대장공주(관도장공주)가 질투하여 위청을 잡아 가두고 죽이려 했다. 그러나 친구 기랑 공손오가 장사들과 함께 구출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무제는 위청을 건장감(建章監)·시중에 임명했다. 위청의 동복 형제들도 귀해져서 큰형 장군(長君)은 시중이 되었고, 큰누나 유(孺)는 태복 공손하의 아내가 되었으며, 둘째 누나 소아(少兒)의 애인 진장도 존귀해졌다. 위자부가 무제의 후궁이 되면서 위청과 동복 남동생 보광(步廣)은 성을 위(衛)로 고쳤고, 위자부가 부인이 되자 태중대부가 되었다.

위청은 사생아로 태어나 농노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정계는 평양현(平陽縣, 현대 린펀시 산시성)의 하급 관리였으며, 평양후 조수(曹壽)와 그의 아내 평양공주(무제의 누나)의 저택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정계는 위오(衛媪, "위 씨 여자")라는 하급 여자 종과 불륜을 저질렀고, 그 사이에서 '정청'이 태어났다. 아이는 아버지 집으로 보내졌으나,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버지와 계모에게 미움을 받고 아동 학대를 받으며 양치기로 살았다. 학대를 견디지 못한 정청은 십 대 초반에 어머니 곁으로 도망쳐 평양후의 저택에서 마부로 일했고, 이후 어머니의 성인 "위"를 채택하여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다.

산수문 향로의 금도금 향로 (陝西省 역사 박물관) 위청에게 하사된 향로


위청은 한때 스승을 따라 감천궁(甘泉宮)을 방문했다가 을 찬 죄수를 만났는데, 그 죄수는 위청이 고귀한 신분이 되고 제후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위청은 매를 맞지 않는 것만으로도 운이 좋은 것이라며 농담으로 치부했다.

기원전 139년경, 평양공주가 가수 위자부를 무제에게 후궁으로 바친 후 위청은 건장영에서 기병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위자부가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임신하면서 위청에게 위기가 닥쳤다. 장공주 관도공주 유표는 자신의 딸 진교 황후의 총애를 빼앗긴 위자부에게 분노하여 위청을 납치해 죽이려 했다. 그러나 위청은 공손오가 이끄는 궁궐 경비병들에게 구출되었다. 무제는 위청을 건장영의 감찰(建章監, 최고 보안 책임자에 해당), 시중, 태중대부로 임명하여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만들고, 위자부를 부인(夫人, 황후 다음가는 후궁 지위)으로 만들고 그녀의 가족들에게 상을 내렸다. 이는 서한 정치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 중 하나인 위/곽 가문의 부상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무제는 위청에게서 훌륭한 기마술, 궁술, 용기, 뛰어난 전술적 직관, 지도력 등을 발견했다. 이후 수년 동안 위청은 무제의 가장 충성스러운 고문으로 신뢰받았다.

위청은 어린 시절부터 흉노 접경 지역인 북방에서 양을 쳐 흉노의 생활과 문화에 정통했다. 노예처럼 취급받고 학대를 받기도 했지만, "귀인의 상이 있어 장래에 출세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매를 맞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충분하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위청은 누이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고, 본인이 기사(騎射)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발탁되었다. 진황후 일족에게 납치되어 죽을 뻔했으나 친구 공손오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흉노 정벌에 차기장군으로 임명된 후, 흉노의 사정에 밝아 연전연승하며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 시 지역을 빼앗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대사마대장군까지 출세했으나 정치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사기에 따르면, 무제가 호족을 무제 능묘 주변으로 이주시킬 때 협객 곽해는 제외해야 한다고 조언한 정도였다.

대장군이 된 후 무제의 누이 평양공주와 결혼했다. 평양공주는 과거 위청을 하인으로 부렸고, 조시(조참의 증손)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음에도 이혼한 상태였다.

조카 곽거병이 등장하면서 인기와 군공을 넘겨주었지만, 곽거병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군의 제1인자 자리를 지켰다. 위청은 어린 시절 고생 덕분에 장군이 된 후에도 위세를 부리지 않고 무제의 눈치를 보며 독단적인 판단을 피했고, 병졸들에게도 격의 없이 대했다. 이광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껴 그의 아들 이감에게 칼로 공격당했음에도 침묵했다. 그러나 곽거병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이감을 살해했다. 조정과 세상의 인기는 곽거병이 더 높았다.

2. 1. 흉노 원정

원광 6년(기원전 129년), 한무제가 흉노와의 싸움을 다시 시작하면서 위청은 거기장군이 되어 흉노와 싸우러 상곡에서 출진했다. 이때 공손하운중에서, 공손오는 대군에서, 이광안문에서 각각 1만 기를 이끌고 출전했는데, 나머지 셋이 다 성과가 없거나 대패한 반면 위청만 홀로 공을 세워, 흉노의 후계자를 선정하는 회의인 용성회의가 벌어지는 땅 용성(籠城)까지 이르러 수백 명의 머리를 베었다. 이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7]

원삭 원년(기원전 128년) 가을, 3만 명을 이끌고 안문에서 출진해 수천 명을 베었다. 그러나 이때에 흉노가 쳐들어와 요서태수를 죽이고 어양태수도 무찔러 어양을 노략질하고 어양군에 주둔한 위위·재관장군 한안국도 무찔렀으며, 안문에서도 사람을 죽이고 약탈했다.[7][8][9][10] 원삭 2년(기원전 127년), 이식과 함께 흉노 원정을 맡아 이식은 에서, 자신은 운중에서 출진했다. 서쪽으로 고궐(高闕)[11]에 이르러 황하 이남의 허타오 지역을 흉노로부터 빼앗았고, 더 나아가 농서에 이르렀으며, 포로 수천 명·가축 수십만 마리를 얻었으며, 흉노의 두 왕 백양왕(白羊王)·누번왕(樓煩王)을 패주시켰다. 이 승리로 획득한 허타오 지역에 한나라는 삭방군을 설치했다. 위청은 공적으로 인해 3,800호를 받아 장평에 봉해졌고, 휘하 교위인 소건장차공도 공적으로 인해 각각 평릉후·안두후에 봉해졌다. 소건을 시켜 삭방성을 쌓았다.

원삭 5년(기원전 124년) 봄, 위청은 거기장군으로서 다시 흉노 원정의 대장을 맡아[7] 3만 기를 이끌고 고궐에서 출진했다. 위청이 거느린 여섯 장군 중 위위·유격장군 소건, 좌내사·강노장군 이저, 태복·기장군 공손하, 대·경거장군 이채 넷은 삭방에서 출진했고, 대행·장군 이식, 안두후·장군 장차공은 우북평에서 출진했다. 우현왕은 한나라 군대가 오지 못하리라고 여기고 술에 취해 있었기에, 한나라 군대는 밤을 틈타 우현왕을 포위했고, 우현왕은 애첩 한 명과 친위군 수백 기만 거느리고 포위망을 빠져나가 달아났다. 경거교위 곽성(郭成) 등이 쫓아갔으나 잡지 못했다. 우현왕의 비왕(裨王) 십여 명과 남녀 만 오천여 명, 가축 수천백만 마리를 얻고 돌아왔다. 도중 국경 요새에 이르러 무제의 사자를 만나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모든 장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무제는 위청의 아들 위항의춘후에, 위불의음안후에, 위등을 발간후에 봉했다.

원삭 6년(기원전 123년) 봄, 합기후·중장군 공손오, 태복·좌장군 공손하, 흡후·전장군 조신, 위위·우장군 소건, 낭중령·후장군 이광, 우내사·강노장군 이저와 함께 정양에서 십여 만 기를 거느리고 출진해 수천 급을 베고 돌아왔다. 한 달여 지나 다시 정양에서 출진해 만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그러나 조신과 소건이 3천여 기를 거느리고 흉노 선우와 맞닥뜨려 싸워 조신은 흉노에 투항하고 소건은 모든 군사를 잃고 홀로 달아났다.

원수 4년(기원전 119년), 표기장군 곽거병과 함께 출진했다. 각각 거느린 기병만 5만 명씩에, 개인 물품을 지고 가는 군마만도 총 14만 필, 보급을 맡은 보병은 수십만 명에 달한 이 원정은, 흉노에게 투항한 조신의 조언을 받아들인 선우가 고비 사막 북쪽에 있으면 한나라 군대가 거기까지는 오지 못할 것이라고 계획한 것을 부수기 위함이었다. 원래는 곽거병이 정양에서 출진해서 선우와 싸우기로 했는데, 포로가 선우가 동쪽에 있다고 해서 무제는 곽거병을 동쪽의 대군에서 출진하고 위청이 서쪽의 정양에서 출진하게 했다. 용감한 병사들도 곽거병에게 배속시켰다. 위청은 낭중령·전장군 이광, 태복·좌장군 공손하, 주작도위·우장군 조이기, 평양공후·후장군 조양[12]을 거느렸다.

흉노의 선우 이지사선우는 조신의 계책을 따라 한나라 군대가 멀리 행군해 피곤하게 하고자 고비 사막 북쪽으로 물러나서 진을 치고 한나라 군대를 기다렸다. 위청의 군대는 국경 요새를 나와 천 리를 가서 선우의 진을 발견했다. 위청은 병거의 일종인 무강거로 진영을 둥글게 에워싸고 5천 기병을 출진시키니, 흉노도 1만 기병으로 맞섰다. 마침 날이 저물고 자갈을 포함하는 모래바람이 크게 일어 양측이 서로 보지 못하니, 한나라 군대는 양익을 벌려 선우를 포위했다. 선우는 불리하다고 판단해 친위 기병 수백 기만 거느리고 탈출해 서북쪽으로 달아났다.[7] 양측이 서로 얽혀 싸워 죽인 수효가 비슷했는데, 흉노 포로가 선우가 달아났다고 알려줘 밤에 날랜 기병을 보내 동틀 때까지 200여 리를 추격했으나 선우를 잡지 못했다. 흉노 군은 뿔뿔히 달아났고, 한나라는 흉노 군 만 9천여 명[7][13]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전안산(闐顔山)[14]의 조신성(趙信城)[15]에 이르러 흉노의 군량을 먹었고, 하루 후 남은 군량은 불사르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광과 조이기의 군대를 따로 동쪽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길라잡이도 없이 행군하다가 흉노와의 교전에는 참여하지도 못하고 고비 사막 남쪽으로 본대가 내려오고서야 합류했다. 이는 무제가 이광이 운수가 사나워서 같이 가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 밀명을 내렸기 때문인데, 이광과 조이기의 군대를 만나자 이광과 조이기에게 왜 늦었는지를 묻고 무제에게 보고하려 했다. 이광이 대답하지 않자 직접 이광의 막부로 가서 이광을 꾸짖었고, 이광은 치욕을 느껴 자살했다.

한나라의 확장. 위청의 흉노 정벌은 붉은 화살표로 표시됨.

2. 2. 모베이 전투 (漠北之戰)

한나라 무제는 곽거병이 하서 회랑에서 성공적인 작전을 수행한 이후, 흉노고비 사막 북쪽으로 몰아내었다. 흉노는 황량한 사막이 한나라 군대가 넘기 어려운 자연 장벽이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기원전 119년, 무제는 이러한 역경에 도전하여 사막을 가로지르는 대규모 원정 작전을 시작했다.[4] 이 전투에서 무제는 흉노의 공격에 대한 통상적인 반격 패턴을 깨고 고비 사막 북쪽의 흉노 본부를 상대로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다. 이 원정은 역사상 모베이 원정("사막 북쪽 원정")으로 알려져 있다. 위청과 곽거병은 각각 5만 명의 기병과 10만 명의 보병/전차병으로 구성된 두 개의 주요 군단을 지휘했다.[5]

위청의 지휘 아래에는 공손하, 조식기, 조상, 그리고 노련하지만 매우 열정적인 이광을 포함한 네 명의 다른 장군이 있었다. 무제가 이광에게 약속한 배정(그가 선봉을 지휘하게 될)과 달리, 무제는 이광의 "불운"의 악명 높은 역사 때문에 중요한 임무에 이광을 배정하지 말라고 위청에게 은밀히 말했다. 위청은 군대가 이미 출발한 후 이광의 부대를 조식기의 부대와 합병하여 황량한 지역을 통과하는 동쪽 측면 공격로를 택하도록 명령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위청은 최근에 칭호를 박탈당한 그의 오랜 친구 공손오에게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고 다시 승진할 기회를 주기 위해 이렇게 했다. 그러나 전장군(前將軍, 즉 이광)과 우장군(右將軍, 즉 조식기)을 측면 기동에 투입하는 것은 위청의 전형적인 전술적 배치 중 하나였다. 이는 123년의 덜 성공적인 원정에서 각각 전장군과 우장군이었던 조신과 소건을 배치한 이전 사례에서 입증되었다.

사막을 건넌 후, 위청의 군대는 예상치 않게 한나라 군대를 매복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선우 이지사선우의 주력 부대와 마주쳤다. 긴 여정으로 인해 수적으로 열세이고 피로했지만, 위청은 기병 반격과 함께 고리 모양으로 배치된 중장갑 전차로 만들어진 궁술 방어로 흉노의 기병 돌격을 격퇴할 수 있었다. (이 방어는 악비를 포함한 많은 후대 중국 전술가에 의해 기병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방어 중 하나로 평가받을 것이다.) 한나라 군대는 해 질 녘까지 지속되는 교착 상태를 성공적으로 유지했고, 이때 모래 폭풍이 전장을 덮쳤다. 먼지로 인한 시야 부족의 순간을 이용하여 위청은 교착 상태를 깨고 기병으로 양면 측면 공격을 시작했다. 이미 한나라 진지에 대한 하루 동안의 실패한 공격으로 지쳐 있던 흉노는 어둠 속에서 들이닥치는 한나라 군인을 보고 사기를 잃고 도주했다. 이 결정적인 포위 공격은 선우의 전선을 무너뜨리고, 그를 거의 사로잡아 그의 부대를 완전히 궤멸시키고, 그 과정에서 1만 명 이상의 흉노 병사를 죽였다. 한나라 군대는 현대의 울란바토르 지역까지 추격하여 흉노의 요새 조신성(趙信城)을 파괴한 후 약 19,000명의 적을 사살하고 승리했다.[7][13] 이치사 선우는 소수의 병력으로 도망쳐 수일 동안 부족과의 연락이 두절되었으며, 그의 일족이 그의 죽음을 추정하고 새로운 선우를 임명할 때까지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한나라에게 좁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승리였다. 흉노는 크게 약화되어 황량한 북부 고비 사막으로 모여들었고(인구 감소로 이어짐), 다음 10년 동안 남쪽으로 약탈할 수 없었다. 다음 주요 흉노의 침략은 한나라가 멸망한 후 약 400년 뒤 동진 때에야 발생했다.

이광과 조이기의 군대를 따로 동쪽으로 보냈는데, 이들은 길라잡이도 없이 행군하다가 흉노와의 교전에는 참여하지도 못하고 고비 사막 남쪽으로 본대가 내려오고서야 합류했다. 이는 무제가 이광이 운수가 사나워서 같이 가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여겨 밀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이광과 조이기의 군대를 만나자 위청은 이광과 조이기에게 왜 늦었는지를 묻고 무제에게 보고하려 했다. 이광이 대답하지 않자 직접 이광의 막부로 가서 이광을 꾸짖었고, 이광은 치욕을 느껴 자살했다.

2. 3. 정치 활동 및 평가

위청은 누이 위자부가 무제의 총애를 받고, 본인도 기사(騎射)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발탁되었다. 진황후 일족에게 납치되어 죽을 뻔했으나 친구 공손오의 도움으로 구출되었다. 흉노 정벌에 차기장군으로 임명된 후, 흉노의 사정에 밝아 연전연승하며 내몽골 자치구 바옌나오얼 시 지역을 빼앗는 등 큰 공을 세웠다. 대사마대장군까지 출세했으나 정치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사기에 따르면, 무제가 호족을 무제 능묘 주변으로 이주시킬 때 협객 곽해는 제외해야 한다고 조언한 정도였다.

대장군이 된 후 무제의 누이 평양공주와 결혼했다. 평양공주는 과거 위청을 하인으로 부렸고, 조시(조참의 증손)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음에도 이혼한 상태였다.

조카 곽거병이 등장하면서 인기와 군공을 넘겨주었지만, 곽거병이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군의 제1인자 자리를 지켰다. 위청은 어린 시절 고생 덕분에 장군이 된 후에도 위세를 부리지 않고 무제의 눈치를 보며 독단적인 판단을 피했고, 병졸들에게도 격의 없이 대했다. 이광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껴 그의 아들 이감에게 칼로 공격당했음에도 침묵했다. 그러나 곽거병은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이감을 살해했다. 조정과 세상의 인기는 곽거병이 더 높았다.

3. 말년

기원전 119년의 원정 이후, 위청은 더 이상 직접적인 전투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수도 장안에 남아 군사 및 정치 문제에 대해 자문하는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의 이중 역할을 수행했다. 그럼에도 한나라 군대 내에서 위청의 지위는 그를 국가의 저명한 인물로 만들었고, 존경과 질투, 적대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무제의 숙부인 회남왕 유안은 오랫동안 군사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었는데, 위청을 제거해야 할 주요 정치적 장애물로 여겼다.[6]

위청은 기원전 106년에 사망했으며, 흉노 점령지에 있었던 노산의 모양을 본떠 지어진 대형 묘에 묻혔다. 이 묘는 기원전 117년에 사망한 그의 조카 곽거병의 묘와, 훗날 한 무제의 묘와 연결되었다. 위청은 자신의 일족이 멸망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막내아들 위등(衛登)과 증손자 유병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으며, 기원전 91년의 정치적 혼란 동안 그의 누이인 위 황후와 조카 유거의 비극적인 운명을 겪었다.[6]

4. 가계

위청은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 정계(鄭季)가 평양후 조씨(의후 조참의 증손) 집에서 일할 때, 정계와 평양후의 노비였던 위온(衛媼)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났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돌아갔으나, 본처 자식들에게 형제가 아닌 종 취급을 받으며 양 치는 일을 했다. 장성한 후에는 평양후의 기사가 되어 평양공주를 모셨다. 훗날 평양공주와 결혼했다.

건원 2년(기원전 139년), 셋째 누나 위자부가 평양공주의 가수로 있다가 무제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입궁하면서, 위청도 입궁하여 건장궁에서 일하게 되었다. 무제의 황후 진황후의 어머니 대장공주(관도장공주)가 위청을 잡아 죽이려 했으나, 친구 공손오가 구출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이후 무제에 의해 건장감(建章監)·시중에 임명되었다. 위청의 동복 형제들도 귀해졌고, 위자부가 무제의 후궁이 되면서 위청과 동복 남동생 보광(步廣)도 위(衛)씨로 성을 고쳤다. 위자부가 부인이 되자 태중대부가 되었다.

위청은 사생아로 태어나 농노 가문 출신이었다. 아버지 정계는 산시성 린펀시 평양현(平陽縣)의 하급 관리였으며, 평양후(平陽侯) 조수(曹壽)와 그의 아내 평양공주 (무제의 누나)의 저택에서 일했다. 그곳에서 정계는 위오(衛媪)라는 하급 여자 종과 불륜을 저질렀고, 그들의 사이에서 '정청'이라는 아들이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집으로 보내졌으나 사생아라는 이유로 아동 학대를 받으며 양치기로 살아야 했다. 십 대 초반에 어머니 곁으로 도망쳐 평양후의 저택에서 마부로 일했고, 이후 어머니의 성인 "위"를 채택하여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었다.[1]

관계이름비고
어머니위온(衛媼)
아버지정계(鄭季)
맏이 이복 형위장군(衛長君)
맏이 이복 누이위군유(衛君孺) (위유(衛孺))공손하의 아내
손위 누이위소아(衛少兒)곽거병의 어머니, 진장의 아내
손위 누이위자부유거의 어머니, 한 무제의 황후, 기원전 91년 자살, 추존 위사후(衛思后)
손아래 이복 남동생위보(衛步)
손아래 이복 남동생위광(衛廣)
아내평양공주한 무제의 맏 누이
아들위강(衛伉)장평후(長平侯), 기원전 91년에 처형됨
아들위불의(衛不疑)음안후(陰安侯)
아들위등(衛登)발간후(發干侯)
조카공손경성(公孫敬聲)위군유의 아들, 기원전 91년에 처형됨
조카곽거병 (霍去病)위소아의 아들
조카유거위자부의 아들, 한 무제의 맏아들이자 황태자, 반란 실패 후 기원전 91년 자살
조카딸위장공주(衛長公主) (당리공주(當利公主))
조카딸주의공주(諸邑公主)기원전 91년 처형
조카딸양석공주(陽石公主)기원전 91년 처형


5.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2] 문서
[3]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https://books.google[...] Routledge
[4]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5] 서적 The Empire of the Steppes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6] 웹사이트 古代同志导读:汉武帝-金日磾 http://test.www.feiz[...]
[7] 문서 사기
[8] 문서 사기
[9] 문서 사기
[10] 문서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사기
[17] 문서 사기
[18]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