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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가운데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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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응가운데레는 카메룬 아다마와주에 위치한 도시로, 1835년 풀라니 지도자 아르도 뇨브디에 의해 건설되었다. 19세기에는 독일령 카메룬에 속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 응가운데레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열대 사바나 기후를 보이며, 므붐족과 풀라니족이 공존하는 지역이다. 주요 산업은 광업과 교통으로, 야운데에서 출발하는 철도가 종착하며, 주변 지역과 차드로 연결되는 도로와 공항이 있다. 인구는 약 100만 명으로 추산되며, 이슬람교와 기독교가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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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가운데레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Ngaoundéré
응가운데레의 거리 풍경
응가운데레의 거리 풍경
국가25px 카메룬
행정 구역 단위
아다마와 주
행정 구역 단위1
비나
면적 단위미터법
인구 (2023년)1200000
인구 관련 각주(인구 조사)
좌표7
해발 고도 (m)1212
기후Aw
지리
추가 정보 (일본어 위키)
응가운데레 대모스크
응가운데레 대모스크
인구 (2012년)195603

2. 역사

현대 응가운데레의 역사는 1835년경 풀라니족 지도자 아르도 뇨브디가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전에는 음붐족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풀라니족은 19세기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1882년에는 유럽 탐험가 에두아르트 로베르트 플레겔이 방문하기도 했다.[1][8]

1894년, 당시 지도자 아르도 무하마두 아보는 독일 제국보호령 협정을 체결했고, 이후 여러 유럽 열강 간의 협정을 통해 이 지역은 독일령 카메룬의 일부가 되었다.[1] 1901년 8월 20일, 독일군은 응가운데레를 점령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7월 29일에는 카메룬 전역의 일부로 영국군과 독일군 간의 응가운데레 전투가 벌어졌다.[1] 전쟁 후 독일이 패배하면서 이 지역은 프랑스령 카메룬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카메룬이 독립할 때까지 프랑스의 통치가 이어졌다.[1]

2. 1. 초기 역사

응가운데레의 라미다트


응가운데레 지역은 원래 음붐족의 터전이었으며, 이들이 초기 거주민이었다. 현대 응가운데레의 역사는 1835년경 풀라니족 지도자 아르도 뇨브디(Ardo Njobdi)가 현재의 도시를 건설하면서 시작되었다. 풀라니족은 이후 음붐족과 함께 이 지역을 다스렸으며, 이슬람 율법에 따라 음붐족은 보호받는 민족으로 여겨졌다. 응가운데레의 통치자인 라미도는 부계로는 초대 라미도인 아르도 뇨브디의 후손이어야 하고, 모계로는 음붐족의 후손이어야만 전체 주민을 대표하는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풀라니족은 19세기 내내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외부 세계와의 접촉도 있었다. 1882년에는 탐험가 에두아르트 로베르트 플레겔이 응가운데레를 방문했다.[1][8] 이후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과정에서 응가운데레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1894년, 당시 통치자 아르도 무하마두 아보(Ardo Muhammadu Abbo)는 독일 제국의 지리학자 지크프리트 파사르제와 보호령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독일, 영국, 프랑스 간의 추가적인 협정을 통해 이 지역은 공식적으로 독일의 세력권인 독일령 카메룬에 편입되었다.

1901년 8월 20일, 독일군은 주력 부대를 투입하여 응가운데레를 군사적으로 점령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응가운데레는 다시 전장이 되었다. 1915년 7월 29일, 카메룬 전역의 일부로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 응가운데레 전투가 벌어졌다. 전쟁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응가운데레를 포함한 이 지역은 카메룬이 독립할 때까지 프랑스령 카메룬의 일부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응가운데레 풍경

2. 2. 독일 식민지 시대

1882년 독일의 탐험가 에두아르트 로베르트 플레겔이 응가운데레를 방문했다.[1][8] 1894년에는 당시 지도자였던 아르도 무하마두 아보가 독일 탐험가 지크프리트 파사르제와 보호령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독일 제국, 대영 제국, 프랑스 간의 여러 협정을 통해 이 지역은 독일령 카메룬에 편입되었다.

1901년 8월 20일, 독일군은 주력 부대를 투입하여 응가운데레를 점령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7월 29일에는 카메룬 전역의 일부인 응가운데레 전투가 벌어져 영국군독일군이 교전하였다. 전쟁 후, 이 지역은 프랑스령 카메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프랑스 식민지 시대

1894년, 당시 응가운데레를 다스리던 풀라니족 지도자 아르도 무하마두 아보(Ardo Muhammadu Abbo)는 독일 제국의 탐험가 지크프리트 파사르제(Siegfried Passarge)와 보호령 협정을 체결했다.[1] 이후 독일 제국, 대영 제국, 프랑스 제3 공화국 사이의 추가적인 협정을 통해 이 지역은 공식적으로 독일의 세력권인 독일령 카메룬에 편입되었다.[1] 1901년 8월 20일, 독일군은 주력 부대를 동원하여 응가운데레(당시 독일어 표기: Ngaundere)를 점령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 카메룬 전역이 벌어지면서 응가운데레는 다시 한번 역사의 무대가 되었다. 1915년 7월 29일, 이곳에서 영국군독일군 사이에 응가운데레 전투가 벌어졌다.[1] 이 전투는 영국, 프랑스, 벨기에 연합군이 독일령 카메룬을 공략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교전 중 하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응가운데레를 포함한 카메룬 지역은 승전국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응가운데레는 프랑스령 카메룬에 속하게 되었으며, 카메룬이 독립을 맞이할 때까지 프랑스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1]

3.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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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기후

응가운데레는 열대 사바나 기후 (쾨펜 기후 구분 ''Aw'')를 보인다.[9][10][11]

응가운데레의 기후 (1961년~1990년, 극값 1928년~현재)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역대 최고 기온 °C (°F)36°C38°C39°C39°C38°C33°C37.4°C30.5°C32°C37°C35°C36°C39°C
평균 최고 기온 °C (°F)30.1°C31.6°C32.1°C30.6°C28.9°C27.4°C26.2°C26.2°C27°C28.5°C29.6°C30°C29°C
일평균 기온 °C (°F)20.5°C22.2°C24.1°C24.1°C23.1°C22.1°C21.5°C21.5°C21.7°C22.1°C20.9°C20.4°C22°C
평균 최저 기온 °C (°F)10.9°C12.8°C16.1°C17.7°C17.4°C16.9°C16.7°C16.8°C16.4°C15.8°C13.6°C10.7°C15.2°C
역대 최저 기온 °C (°F)4°C7°C8.3°C12.5°C11°C11°C11.5°C12°C12°C9.2°C6.7°C6°C4°C
평균 강수량 mm (인치)0.8mm1.1mm39.2mm136.6mm183.9mm226.6mm268.6mm279.6mm236.9mm117.7mm5.7mm0mm1496.7mm
평균 강수일수 (≥ 1.0 mm)0041419212423231510144
평균 상대 습도 (%)33304472778183828175554763
월평균 일조시간286.4258.7235.4195.5195.4165.7128.0127.8139.0184.0264.1291.42,471.4
출처 1: NOAA,[9] Meteo Climat (극값)[10]
출처 2: 독일 기상청 (습도, 1954–1967)[11]


4. 인구



19세기 풀라니족의 침략 이전에는 음붐족이 이 지역의 초기 거주민이었다. 1835년경 응가운데레가 건설된 이후, 풀라니족은 음붐족과 함께 이 지역을 통치해 왔으며, 음붐족은 이슬람 율법에 따라 보호받는 민족으로 여겨졌다. 응가운데레의 통치자인 라미도는 부계로는 초대 라미도 아르도 은조브디(Ardo Njobdi)의 후손이어야 하고, 모계로는 음붐족의 후손이어야 지역 전체 인구를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

아다마와주에서 가장 큰 도시인 응가운데레는 북쪽의 디(Díi), 동쪽의 메인가가 지역에서 온 그바야족(Gbaya), 서쪽의 페레(Pere) 등 주변 농촌 지역에서 많은 정착민들을 끌어들였다. 특히 1973년 철도가 완공된 이후 인구가 크게 증가했으며, 이 증가분의 상당수는 아다마와주 외부에서 유입된 인구였다. 이러한 인구 구성의 변화는 유서 깊은 모스크 인근에 위치하며 주로 지역 상인들이 활동하는 그랑 마르셰(Grand Marché, 대시장)와, 도시 북서쪽에 위치하며 카메룬 남부 지역 출신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프티 마르셰(Petit Marché, 소시장)의 규모 차이에서 나타난다.

응가운데레 인구 추이
연도인구 (추산)
2005년약 200,000명
2018년약 1,000,000명


4. 1. 종교



응가운데레에는 이슬람교 사원을 비롯하여 기독교 교회와 사원 등 다양한 예배 장소가 존재한다. 인구의 약 60%는 무슬림이며, 이들은 이슬람 율법의 계율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인구의 30% 이상은 기독교도로, 루터교회, 가톨릭교회, 침례교, 성공회 등 여러 교파로 나뉜다.

로마 가톨릭교회교구인 응가운데레 교구가 있으며, 현재 주교는 에마뉘엘 아보이다. 종교 간의 대립이 만성적으로 존재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난 10년 동안 이슬람 극단주의의 영향을 짐작하게 하는 심각한 사건은 발생하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기혼 여성은 종교와 관계없이 머리를 가리는 의상을 착용했지만, 히잡은 최근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요즘은 이슬람 여성 중 히잡 착용을 선호하는 사람도 간혹 보이지만, 부르카 등을 착용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5. 경제

응가운데레의 경제는 주로 교통 요충지로서의 역할과 광물 자원에 기반한다. 카메룬 남부와 북부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로서, 철도와 도로를 통해 남부의 과일과 생활 잡화, 북부 및 차드의 면화와 등이 활발히 운송되어 지역 경제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또한, 인근 지역에는 풍부한 보크사이트가 매장되어 있어 광업 부문의 잠재력이 주목받고 있다.

5. 1. 광업

응가운데레 인근 지역에는 보크사이트 매장지가 있으며, 특히 미님, 마르탑 지역에 위치해 있다.[7]

응가운데레 산에서 바라본 풍경. 이 지역 인근에는 보크사이트가 매장되어 있다.

5. 2. 교통

응가운데레는 카메룬 남부와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이다. 야운데에서 오는 철도 노선의 종착역이며, 북부 도시 가루아, 마루아 및 이웃 나라 차드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으나 상태는 좋지 않다. 응가운데레 공항이 있으나 현재 정기 항공편 운항은 거의 없다.

5. 2. 1. 철도

야운데에서 출발하는 카메라일 철도는 이곳 응가운데레에서 끝나며, 응가운데레 중앙역은 항상 활기가 넘친다. 이 철도의 700km 연장선은 2015년에 승인되었다.[5] 응가운데레는 카메룬의 남부와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통 요충지 역할을 한다. 철도를 통해 남부에서는 바나나, 과일, 각종 생활 잡화 등이 북부로 운송되고, 북부 및 차드에서 생산된 면화와 아다마와 주의 축우 등이 남부로 보내진다.

카메룬 정부와 아프리카 개발 은행 그룹(AfDB)은 2017년 7월 19일 야운데에서, 응가운데레의 카메라일 종착역에서 차드까지 카메룬 철도를 연장하는 프로젝트의 타당성 연구에 대한 양해 각서(MOU)를 체결했다. 이는 카메룬 북부와 주변국 간의 연결성을 강화하려는 계획의 일환이다.

5. 2. 2. 도로

응가운데레는 카메룬의 남부와 북부를 잇는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다. 가루아, 마루아, 그리고 차드까지 이어지는 포장도로가 있지만, 도로 상태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일부 구간은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는 등 관리가 필요한 상태이다.

주요 운송 물품으로는 남부에서 오는 바나나, 과일 및 일반 상품이 있다. 북부에서는 면화(카메룬 북부 및 차드 산)와 아다마와주에서 오는 가 남쪽으로 운송된다.

5. 2. 3. 항공

응가운데레 공항은 1.6km 길이의 활주로를 갖추고 있어 보잉 737급 항공기의 이착륙이 가능하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에는 남쪽의 야운데두알라, 북쪽의 가루아, 그리고 차드은자메나로 주 몇 차례 항공편이 운항되었다. 그러나 경제 침체와 국영 항공사인 카메룬 항공의 쇠퇴로 인해 현재 이 공항의 항공편 운항은 거의 없다. 공항의 ICAO 코드는 FKKN이며, IATA 코드는 NGE이다.

6. 통신

응가운데레는 카메룬의 마이크로파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지만, 시스템의 신뢰성은 그다지 높지 않다. 풀라어 라디오 방송국인 사우투 린지일라는 이 도시에 위치해 있다.[6] 많은 사기업들이 양방향 위성 통신을 갖추고 있으며, 도시에 수많은 사이버카페가 있다.

7. 저명한 출신 인물


  • 오리올 동모, 육상 선수
  • 르네 필롬베, 작가
  • 리차드 투코, 축구 선수

참조

[1] 서적 Flegel, Eduard Robert
[2] 웹사이트 Ngaoundéré Climate Normals 1961–1990 ftp://ftp.atdd.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2015-03-08
[3] 웹사이트 Station Ngaoundéré http://meteo-climat-[...] Meteo Climat 2016-06-13
[4] 웹사이트 Klimatafel von Ngaounderé / Kamerun http://www.dwd.de/DW[...] Deutscher Wetterdienst 2016-06-13
[5] 웹사이트 Cameroon-Chad railway http://www.bollore-a[...] 2015-04-24
[6] 웹사이트 Découverte : Radio Sawtu Linjiila, 44 ans au service de l'évangélisation https://nordcameroun[...] 2010-04-16
[7] 간행물 African Business 2009-12
[8] 서적 Flegel, Eduard Robert
[9] 웹인용 Ngaoundéré Climate Normals 1961–1990 ftp://ftp.atdd.noaa.[...] 미국 해양대기청 2015-03-08
[10] 웹인용 Station Ngaoundéré http://meteo-climat-[...] Meteo Climat 2016-06-13
[11] 웹인용 Klimatafel von Ngaounderé / Kamerun http://www.dwd.de/DW[...] Deutscher Wetterdienst 201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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