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군 (1661년)
1. 개요
의원군 이희는 인조의 증손으로, 1661년에 태어나 1722년에 사망한 조선 후기의 왕족이다. 1667년 의원정에 봉해지고 1676년 숙종에게 경학을 강론하여 1등을 하여 의원군에 책봉되었다. 경신환국으로 파직되어 유배를 가기도 했지만, 여러 차례 사면과 복권을 거쳐 관직에 복귀했다. 그는 학문에도 능하여 《오례집설》, 《사례찬설》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아들인 안흥군 이숙을 헌신적으로 가르친 일화로도 유명하다. 사후에는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묘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이름 | 의원군 |
|---|---|
| 원래 이름 | 의원군(義原君) |
| 작위 | 군(君) 승헌대부(承憲大夫) 흥록대부(興祿大夫) |
| 본명 | 이혁(李爀) |
| 별칭 | 자(字)는 매중(晦仲), 호(號)는 근독당(謹獨堂) |
| 시호 | 문정(文貞) |
| 출생일 | 1661년 6월 13일 |
| 출생지 | 조선 한성부 낙산 동쪽 복녕군 사저 |
| 사망일 | 1722년 11월 12일 |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복창군 가통 사저 |
| 매장지 | 경기도 광주 |
| 종교 | 유교(성리학) |
| 배우자 | 본실 군부인 안동 권씨 첩실 광성 김씨 |
|---|---|
| 왕가 | 조선 왕조 전주 이씨 |
| 왕조 | 조선 왕조 |
| 아버지 | 복창군(양부) 복녕군(생부) |
| 어머니 | 군부인 창원 황씨(양모) 군부인 양천 허씨(생모) |
| 친인척 | 권덕광(장인), 인평대군(조부) 등 |
| 자녀 | 슬하 3남, 차남 안흥군(安興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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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출신 -
정경심
정경심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가석방된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대학교수였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1661년 출생 -
카를로스 2세 (스페인)
카를로스 2세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혼으로 인한 건강 문제와 후계자 부재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야기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말을 가져온 스페인 국왕이다. -
1661년 출생 -
김주신
김주신은 조선 후기 문신으로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의 아버지이며, 순안현령으로 선정으로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고, 인원왕후가 왕비가 된 후 영돈녕부사에 제수되고 경은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사후 효간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1680년 경신환국으로 연좌되어 파직되고 김해로 귀양갔으며, 형 양원군은 흥양으로 귀양갔다. 1683년 민정중의 청으로 형이 감형되어 한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강원도로 유배지가 옮겨졌고, 그는 김해에서 양양으로, 양원군은 흥양에서 통천으로 옮겨졌다.
1693년 인평대군의 묘를 경기도 광주군 춘궁리에서 포천군 왕방산으로 이장하는데 주관하였으며, 왕으로부터 관곽용 목재를 하사받았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살다가 1693년 서울 영호(후일의 영동대교, 성수동, 광진구 자양동 주변) 대은정(戴恩亭)으로 이사했다가 1694년 한성부 북부 쌍리동(雙里洞)으로 다시 이사했다.
1713년(숙종 39) 윤5월 권익흥(權益興)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에게 내려진 경기도 포천의 왕방산(旺方山)을 형 양원군 이환(陽原君 李煥)과 함께 차지하려 했다가 사헌부로부터 탄핵당했다.
1716년 경기도 포천의 선영에서 출발하여 백운산(白雲山) 여행을 다녀왔다. 1718년에는 유행병을 심하게 앓아 병석에 누웠는데, 독한 약을 여러 번 지어서 쓴 뒤에 회복되었다. 의원군의 병을 간호한 사람 중에 병에 전염된 사람이 없어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1721년 10월에 갑자기 풍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근독당(謹獨堂)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1699년 회재 이언적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썼다는 글을 본따서 자신의 책상에 써서 붙였다.
아들 안흥군 이숙은 태어나면서 귀머거리에 벙어리였고 불치병이 있어 말로 지식을 전해 줄 수 없었다. 그는 사물을 만날 때마다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저것을 가리켜 이것을 빗대고, 동쪽으로 인하여 서쪽을 설명하고 열심히 설명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비슷한 것을 미루어 지식을 확장하게 함으로써 아들 안흥군이 모르는 것이 없게 했다.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는 "세상에서는 이를 보고 기이한 일이라고들 하였다. 사람이 자식을 가르칠 적에 누군들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마는, 공은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가르침의 방법이 여러 가지라고는 하지만 지성(至誠)이 통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世稱以爲異事 夫人之於敎子 孰不用其極 而公能施敎於不可敎之地 雖曰敎亦多術 而苟非至誠所透 又安能如彼也)"라 하였다.
1722년(경종 2) 9월 앓고 있던 풍병이 위독해지자 영호에서 한성 도성 안으로 거처를 옮겨 치료하였다. 동평도위 정재륜(東平都尉 鄭載崙), 쌍호(雙湖) 최도명(崔道鳴) 등과 사귀며 친하게 지냈으며, 임종할 때 이들에게 영결을 고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집안일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해 11월 12일 정침에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와 수학
1661년(현종 2) 8월 13일 한성부 낙산(駱山) 동쪽의 사저에서 태어났다. 능창군 이종의 증손이고 생증조부는 인조이다. 할아버지는 인평대군 이요(麟坪大君 李㴭)이고, 생부는 복녕군 이욱(福寧君 李栯)이며 생모는 군부인 양천허씨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지낸 허열(許悅)의 딸이다.
1667년 의원정에 봉작되고 의원도정에 진책되었다가 1676년(숙종 2) 3월 11일 숙종이 직접 경학(經學)을 강의하였는데, 그가 논어(論語)에서 1등을 차지하자 숙종은 이를 매우 가상히 여겨 특별히 작위를 올리고, 의원군(義原君)에 책봉하였다. 이후 1677년 중의대부(中義大夫)로 승진하고 오위도총부 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겸하였다. 1677년 11월 8일 도총관, 11월 10일 부총관이 되었다. 이해에 임금이 춘당대(春塘臺)에서 관무재(觀武才)를 보이며 종친들에게 활로 과녁 쏘아 맞추기(射侯)를 시키자 그는 세 번을 명중시키고 임금에게 말을 하사받았다. 1679년 인조, 효종, 현종 세 임금의 어필(御筆)을 간행할 계획으로 상소를 올리고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직접 간행하여 숙종에게 올리자 숙종이 이를 가상히 여겨 승헌대부(承憲大夫)를 역임하였다.
2.2. 유배와 복권
1680년 경신환국으로 연좌되어 파직되고 김해로 귀양갔으며, 형 양원군은 흥양으로 귀양갔다. 1683년 민정중의 청으로 형이 감형되어 한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강원도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그는 김해에서 양양으로, 양원군은 흥양에서 통천으로 옮겨졌다.
1688년(숙종 14) 어머니 상을 당했지만 유배 중이라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1689년 갈암 이현일이 왕실의 가까운 친척임을 들어 사면을 상소하였다. 1689년(숙종 15) 2월 10일 방귀전리되고, 1692년 12월 2일 직첩을 돌려받았다. 1690년 파주 사목촌으로 낙향했다.
1693년 7월 13일 서용(敍用)의 명을 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2일 승정원, 의금부 등에서 거듭 탄핵당했지만 숙종이 듣지 않았다. 1701년 다시 삭직되었다.
2.3. 후기 생애
1688년(숙종 14) 어머니 상을 당했지만 유배중이라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1689년 갈암 이현일이 그가 왕실의 가까운 친척임을 들어 사면을 상소하였다. 1689년(숙종 15) 2월 10일 방귀전리되고 1692년 12월 2일 직첩을 돌려받았다. 1690년 파주 사목촌(沙鶩村)으로 낙향했다.
1693년 7월 13일 서용(敍用)의 명을 받았으며 7월 22일 승정원, 의금부 등에서 거듭 탄핵당했지만 숙종이 듣지 않았다. 그해에 인평대군의 묘를 경기도 광주군 춘궁리에서 포천군 왕방산으로 이장하는데 주관하였으며, 왕으로부터 관곽용 목재를 하사받았다. 이후 경기도 파주에 살다가 1693년 서울 영호(후일의 영동대교, 성수동, 광진구 자양동 주변) 대은정(戴恩亭)으로 이사했다가 1694년 한성부 북부 쌍리동(雙里洞)으로 다시 이사했다.
1701년 다시 삭직되었다. 1713년(숙종 39) 윤5월 권익흥(權益興)과 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에게 내려진 경기도 포천의 왕방산(旺方山)을 형 양원군 이환(陽原君 李煥)과 함께 차지하려 했다가 형 양원군 이환과 같이 사헌부로부터 탄핵당했다.
1716년 경기도 포천의 선영에서 출발하여 백운산(白雲山) 여행을 다녀왔다. 1718년에는 유행병을 심하게 앓아서 병석에 누웠는데, 이때 독한 약을 여러 번 지어서 쓴 뒤에 회복되었다. 그런데 의원군의 병을 간호한 사람 중에, 병에 전염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겼다. 1721년 10월에 갑자기 풍병에 걸렸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에 특별히 근독당(謹獨堂)이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한다. 1699년 회재 이언적이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썼다는 글을 본따서 자신의 책상에 써서 붙였다.
그의 아들 안흥군 이숙은 태어나면서 귀머거리에 벙어리였고 나면서부터 불치병이 있어 말로 지식을 전해 줄 수 없었다 한다. 그는 사물을 만날 때마다 아들에게 가르쳐 주고, 저것을 가리켜 이것을 빗대고, 동쪽으로 인하여 서쪽을 설명하고 열심히 설명하고 마음으로 깨닫고 비슷한 것을 미루어 지식을 확장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아들 안흥군이 모르는 것이 없게 했다.
무명자 윤기(無名子 尹愭)는 "세상에서는 이를 보고 기이한 일이라고들 하였다. 사람이 자식을 가르칠 적에 누군들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마는, 공은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서 가르침을 베풀었다. 가르침의 방법이 여러 가지라고는 하지만 지성(至誠)이 통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와 같이 할 수 있었겠는가?(世稱以爲異事 夫人之於敎子 孰不用其極 而公能施敎於不可敎之地 雖曰敎亦多術 而苟非至誠所透 又安能如彼也)"라 하였다.
1722년(경종 2) 9월 앓고 있던 풍병이 점점 위독해지자 영호에서 한성 도성 안으로 거처를 옮겨 치료하였다. 그는 동평도위 정재륜(東平都尉 鄭載崙), 쌍호(雙湖) 최도명(崔道鳴) 등 몇명과 사귀며 친하게 지냈으며, 임종할 때 이들에게 영결을 고하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이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집안일에 대한 언급은 한 마디도 없었다. 그해 11월 12일 정침에서 사망했다.
3. 사후
1723년(경종 3) 12월 1일 양원군 이환 등과 함께 경종의 특명으로 작첩을 돌려받았다. 이때 승정원이 따르기를 거부했으나 경종이 듣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인빈 김씨의 제사를 대신 지내기도 하였다. 한편 왕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인빈 김씨의 제사를 주관하는 것을 그의 6촌 동평군이 매우 싫어했다 한다.
처음에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아버지 복녕군 묘 아래에 매장되었다가 1735년 3월 27일 부인이 죽자 그해 윤 4월 그의 시신도 같이 경기도 광주군 고읍(후일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465번지) 선영의 해좌(亥坐), 남한산성 근처 궁안 마을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1999년 다시 경기도 포천 신북면 신평리로 이장해왔다.
사후 1751년 아들 안흥군 이숙이 정3품에 오르자 특명으로 증 가덕대부에 추증되었다. 1760년 다시 증 흥록대부(興祿大夫) 겸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고종 때인 1864년 7월 5일 고종의 특명으로 시호가 내려지고 7월 9일 시호를 문정이라 하였다.
그 뒤 영의정 김병학의 상소로 학문적 공적에 대한 포상이 청해져, 1867년 12월 17일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판종정경 겸 예겸에 추증되고 불천지위를 받았다.
1999년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 465번지에 있던 그의 일가 묘역, 능창대군 묘, 의원군 이혁의 부인 안동권씨 부부묘, 의원군의 5세손인 이연응(李沇應) 묘 등 의원군 일가 3개의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복식, 서간, 지석 등의 유물 130종 181점이 발견되었다. 2013년 8월 22일 이는 의원군 일가 묘 출토유물이라 명명되고 국가민속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국가민속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에 이장된 그의 묘에는 대한민국시대에 세워진 비석이 서 있고, 증 흥록대부 의원군 겸 홍문관 대제학 문정공 완산이공 휘 혁 지묘 안동군부인 권씨 부좌 라 쓰여 있다.
4. 가족 관계
5. 시
의원군이 1694년 숙종의 연회에서 지은 시와 꿈에 복녕군 앞에서 지었다는 시는 다음과 같다.
1694년 숙종의 연회에서 지은 시
臣罪應萬死중국어
全生天地仁중국어
花堂今日會중국어
尤祝聖恩新중국어
꿈에 복녕군 앞에서 지었다는 시
*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탈 것 없으니 / 伯牙不須鼓
* 음악을 알아듣는 종자기 없네 / 鍾子無相識
* 곧은 바늘 낚싯대 드리운 사람 / 直鉤垂釣者
* 부질없이 창랑곡만 부르는구나 / 空詠滄浪曲
5.1. 1694년 숙종의 연회에서 지은 시
臣罪應萬死중국어
全生天地仁중국어
花堂今日會중국어
尤祝聖恩新중국어
5.2. 꿈에 복녕군 앞에서 지었다는 시
백아(伯牙)는 거문고를 탈 것 없으니 / 伯牙不須鼓
음악을 알아듣는 종자기 없네 / 鍾子無相識
곧은 바늘 낚싯대 드리운 사람 / 直鉤垂釣者
부질없이 창랑곡만 부르는구나 / 空詠滄浪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