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유 (1560년)
1. 개요
이경유는 1560년(명종 15년)에 태어난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태종의 후손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훈련원 주부 등을 거쳐 여러 고을의 현감과 군수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활약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관직을 거쳤다. 1620년에 사망했으며, 사후 인조반정 공신인 서자 이기축의 공로로 증직되고 완원군에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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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파 -
이기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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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파 -
이강래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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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0년 사망 -
태창제
만력제의 장남인 태창제는 황태자 책봉 과정의 정쟁과 암살 미수 사건을 겪고 즉위 29일 만에 급서하여,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관련된 미스터리는 명나라 말기 정치적 혼란의 중요한 요소로 평가받는다. -
1620년 사망 -
이여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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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관련자 -
성혼
성혼은 조광조의 제자이자 이이와 도의를 맺고 이황을 사사한 조선 중기 문신으로, 사림파 서인에 속하여 정여립의 난과 임진왜란 시기에 활동했으며, 이황의 이기이원론을 지지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
임진왜란 관련자 -
허균
허균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로서, 홍길동전, 교산시화, 도문대작 등 다양한 저서를 남겼으나, 진보적인 사상과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이다.
2. 생애
1560년 8월 26일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6대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온양군수와 의흥위부호군 등을 지낸 이간이며, 어머니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장순손의 후손인 인동 장씨이다. 어려서 독서를 즐겼고, 일찍이 학문을 닦아 시서(詩書)에 능하였으며 무예도 갖추었다. 외손자 이서우에 의하면 일찍부터 독서와 기사(騎射,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정석희(鄭錫禧)의 딸 연일정씨(延日鄭氏)와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후처로 병절교위를 지낸 박문좌의 딸 죽산박씨(竹山朴氏)와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지만, 아들 이정은 일찍 요절하였다. 첩에게서는 이기축, 훈련원습독관(訓鍊院習讀官) 이상(李日+尙), 만호(萬戶) 송철(宋鐵)에게 시집간 서녀 1명을 보았다.
1583년(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 훈련원주부(主簿), 병조좌랑을 거쳐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지냈다. 이후 영암군수, 단천군수, 고원군수(高原郡守), 선천 군수를 지내고, 고령진[[병마]첨절제사(高領鎭兵馬僉節制使), 평안도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候)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승전하였다. 그 공로로 1593년(선조 26)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 1597년(선조 30)에는 독단으로 관곡(官穀)을 출고하여 제주도에 판매, 군량 비용에 쓰려다가 바다에서 배가 전복되어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선조는 그를 아깝게 여겨 봉산군수로 전직케 하였다. 재직 3년 만에 치적을 쌓아 조정으로부터 표창이 내려졌으나 1598년(선조 31) 3월 3일 아버지 이간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봉산 군수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황해도 봉산에 혜정비(惠政碑)가 세워졌고, 청백리 칭호를 받았다. 1601년(선조 34)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부임했다가 훈련도감 중군(訓鍊都監中軍)으로 복귀하였다. 의장(議將)을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601년(선조 34년) 10월 단천 군수로 부임했다가 1602년 10월 매 대신 명주를 진상품으로 바꿨으나, 진상물인 명주를 사사로이 사용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603년(선조 36) 한성부 판윤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첨정이 되고 그해 임진왜란, 호성 공로자들을 시상할 때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606년(선조 39) 1월 사헌부로부터 가정에서의 행실이 패려스럽고, 부임한 이후 뇌물을 써서 주민의 원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지만 선조가 무마시켰다.
1614년 훈련도감 중군이 되었다. 이후 묘당의 추천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다. 1620년(광해군 13) 11월 17일 경기도 양주군 내동면 송산(현 의정부시 고산동)의 정침에서 사망하였다.
2.1. 가계와 출생
1560년(명종 15년) 8월 26일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6대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온양군수와 의흥위부호군 등을 지낸 이간이며, 어머니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장순손의 후손인 인동 장씨이다. 1562년생 설이 있다. 이복 형제로는 이경록이 있었다.
고조부는 운림군 이핍이고 증조부는 파성정 철동으로, 왕족으로서의 예는 증조부 파성정에서 끝났으며 파성정은 서자였다. 할아버지 이광윤은 풍덕군수를 지냈고, 사후 형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아버지 이간은 음서로 관직에 올라 임진왜란 때 온양군수와 오위장을 지냈으며, 사후 병조판서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2.2. 청년기와 혼인
그는 어려서 독서를 즐겼고, 일찍이 학문을 닦아 시서(詩書)에 능하였으며 무예도 갖추었다. 외손자 이서우에 의하면 그는 일찍부터 독서와 기사(騎射,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혔다고 한다.
정석희(鄭錫禧)의 딸 연일정씨(延日鄭氏)와 혼인했으나 자녀가 없었고, 후처로 병절교위를 지낸 박문좌의 딸 죽산박씨(竹山朴氏)와 재혼하여 1남 1녀를 두었지만, 아들 이정은 일찍 요절하고 딸만 1명 살아남아 이경항에게 시집갔다. 훗날 그의 아들 이정이 서자 이기축의 처음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1970년 이후 한국학연구원, 국사편찬위원회 등에서 고려, 조선시대의 문집을 확인, 검토하는 과정에서 다른 인물로 확인됐다.
첩은 고언명의 첩의 딸 장흥고씨였다. 그의 첩 고씨는 족보와 선원록에는 수록되지 않았는데, 훗날 최석정의 완계군이공시장, 인조 반정 공신인 그의 서자 이기축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는 장계에 "母姓高, 沃溝縣監彥命之女 沃溝卽霽峯敬命之弟也"라고 기록된 것이 확인되어 알려졌다. 첩에게서는 이기축, 훈련원습독관(訓鍊院習讀官) 이상(李日+尙), 만호(萬戶) 송철(宋鐵)에게 시집간 서녀 1명을 보았다.
2.3. 관료 생활과 임진왜란
1583년(선조 21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훈련원주부(主簿), 병조좌랑을 거쳐 무장현감(茂長縣監)을 지냈다. 이후 영암군수, 단천군수, 고원군수(高原郡守), 선천(宣川) 군수를 지내고, 고령진[[병마]첨절제사(高領鎭兵馬僉節制使), 평안도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候) 등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도성으로 올라오는 일본군을 상대로 승전하였다. 그 공로로 1593년(선조 26) 영암군수로 부임하였다. 그 해, 지방의 산물과 군량을 모아 뱃길을 이용하여 선조가 파천한 의주 행재소 또는 관군 진영으로 보냈다. 1595년(선조 28) 겨울 풍랑으로 운송선이 침몰하여 인명과 물자의 손실이 많아 탄핵을 받았다. 1597년(선조 30)에는 독단으로 관곡(官穀)을 출고하여 제주도에 판매, 군량 비용에 쓰려다가 바다에서 배가 전복되어 물자 손실과 인명 피해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 뒤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지만 선조는 그를 아깝게 여겨 봉산군수로 전직케 하였다. 재직 3년 만에 치적을 쌓아 조정으로부터 표창이 내려졌으나 1598년(선조 31) 3월 3일 아버지 이간의 상을 당해 사직하였다. 형 이경록이 장례를 치르러 오다가 왕명으로 기복, 다시 제주목사 겸 제주진병마수군절제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났으므로 그가 상을 주관하였다. 봉산 군수 재직 시 선정을 베풀어 황해도 봉산에 혜정비(惠政碑)가 세워졌고, 청백리 칭호를 받았다. 전란이 끝난 후 1601년(선조 34)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로 부임했다가 훈련도감 중군(訓鍊都監中軍)으로 복귀하였다. 이후 의장(議將)을 거쳐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10월 22일 단천군수(端川郡守)에 제수되었다.
2.4. 생애 후반
1601년(선조 34년) 10월 단천 군수로 부임했다가 1602년 10월 매 대신 명주를 진상품으로 바꿨으나, 진상물인 명주를 사사로이 사용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후 승진하여 1603년(선조 36) 한성부 판윤으로 전임되었다. 이듬해 첨정이 되고 그해 임진왜란, 호성 공로자들을 시상할 때 선무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605년 1월 14일 선천군수로 부임했다. 1606년(선조 39) 1월 사헌부로부터 가정에서의 행실이 패려스럽고, 부임한 이후 뇌물을 써서 주민의 원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았지만 선조가 무마시켰다.
1606년(선조 39) 구례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608년 체임되었다. 1612년(광해군 4년) 평안도 병마우후가 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 박의장(朴毅長)이 공홍도 수군절도사에서 사퇴하면서, 그가 공홍도 수군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614년 훈련도감 중군이 되었다. 이후 묘당의 추천으로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했으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퇴했다. 1620년(광해군 13) 11월 17일 경기도 양주군 내동면 송산(현 의정부시 고산동)의 정침에서 사망하였다.
3. 사후
경기도 양주군 내동면 고산리(현,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산 52-1) 송산 선영 아래 해좌(亥坐)에 안장되었다. 묘표는 후에 외손자 이서우가 썼다. 그의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이간, 이복 형 이경록, 조카 이서의 묘소가 차례대로 있고, 이간의 묘소 바로 옆에는 조부 이광윤의 묘가 있다. 그의 묘소 왼쪽 서남쪽 방향에는 신숙주의 후손들 묘소와 그 옆에 신숙주 묘소가 있다. 남양주시로 가는 방향 길 건너편에는 의정부교도소가 있다.
그의 첩인 장흥고씨는 아들 이기축의 공로로 정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장흥고씨의 묘소는 의정부시 송산동의 내고산동 부락 정자촌(亭子村) 남향(南向)에 매장되었다.
아들 이정(李日+丁)이 자녀 없이 요절하여, 인조 반정에 참여한 서자 이기축을 승적시켜 후사를 이었다. 이기축의 4대손이 시인 문무자 이옥이다.
서자 이기축이 반정 정사 공훈에 참여하면서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補祚功臣) 가선대부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고 완원군(完原君)에 추봉되었다. 이후 증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4. 가족 관계
| | 이름 || 비고 | ||
|---|---|---|
| 5대조 | 의성군 이심(誼城君 李宷) | 1411년 - 1493년, 효령대군의 아들 |
| 고조부 | 운림군 이핍(雲林君李愊) | |
| 증조부 | 파성군 이철동(把城君 李哲仝) | |
| 할아버지 | 이광윤(李光胤) | 1490년 ~ 1535년 |
| 아버지 | 이간(李幹) | 1527년(?) ∼ 1598년 |
| 어머니 (생모) | 인동장씨(仁同張氏) | ? ~ ?년 8월 25일, 영의정 장순손의 증손, 사헌부감찰 장경량(張景良)의 딸 |
| 부인 | 죽산박씨(竹山朴氏) | ? ~ ?년 10월 6일, 병절교위(秉節校尉) 박문좌(朴文佐)의 딸 |
| 첩 | 장흥고씨(長興高氏) | ? - 1644년, 옥구현감 고언명(高彦命)의 서녀, 고경명의 조카 |
| 장인 | 박문좌(朴文佐) | |
| 외할아버지 | 장경량(張景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