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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우 (16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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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서우(1633년)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633년 이경항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우계, 자는 윤보, 호는 송곡이다. 고산 윤선도와 이민구, 백호 윤휴 등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1660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섰다. 청남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사간원 정언을 거쳐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경신환국으로 유배되었으나, 갑술환국 이후 복권되어 학문과 시문으로 후학을 양성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시가 정교하고 치밀하나 원대한 운치는 부족하다고 평했다. 저서로는 《송파문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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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우 (1633년)
기본 정보
이서우 영정
한글 이름이서우
한자 이름李瑞雨
로마자 표기I Seou
윤보(潤甫), 휴징(休徵)
송곡(松谷), 송파(松坡), 구계(癯溪), 계옹(溪翁)
인물 정보
출생일1633년 3월 1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사망일1709년 10월 14일
사망 원인병사(노환)
거주지조선
국적조선
종교유학, 성리학
배우자증 정부인 청송심씨, 첩 1명
자녀아들 이정관, 아들 이석관, 아들 이홍관, 딸 이씨, 서자 이익관, 서자 이순관, 서녀 이씨(민관효민종도의 서자의 처)
부모아버지 이경항, 어머니 전주이씨
친척형 이덕우, 형 이가우, 형 이희우, 매형 윤득열, 매형 이서규, 외조부 이경유, 외종조부 이경록, 외당숙 이서
학력 및 경력
직업문신, 시인, 학자, 정치인, 서예가
과거 급제1660년 증광 문과 갑과 급제
서명

2. 생애

1633년(인조 11년) 한성부에서 대북 계열의 이경항효령대군의 후손인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가로는 인조반정 공신이자 서인 중진인 이서와 연결되어 있었다.[6] 어린 시절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랐으며, 윤선도, 이민구, 윤휴, 허목 등 당대의 명망 높은 학자들 밑에서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년) 문과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초기에는 승정원 문서 작성 방식 문제나 죄수 옥사 사건 연루 등으로 부침을 겪었다. 이후 뛰어난 글재주로 점차 인정받으며 남인청남 세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고,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허목윤휴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그는 서인 세력과 예송논쟁 등에서 날카롭게 대립하며 남인의 입장을 대변하였고,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병조 정랑 등 삼사의 요직을 거쳤다.[7]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승지, 대사헌, 도승지, 함경도관찰사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인현왕후 폐위 과정에 관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파직되고 관작을 삭탈당한 뒤 문외출송되는 등 정치적 시련을 겪었다. 유배 생활 중에는 군역의 폐단과 기근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1697년 복권되었으나[11]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청계산 근처에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은거 중에도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세력의 학문과 정치 행태를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1709년 세상을 떠났다.

사후 1728년 이인좌의 난에 아들들과 사위가 연루되면서 가문이 큰 화를 입었고, 이서우 본인도 관작을 추탈당했다. 이후 정조 대에 이르러 남인 세력이 다시 등용되면서 1795년 복권되었다. 그는 남인 학문과 시맥(詩脈)을 잇는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특히 성호 이익 등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 1. 생애 초기

그의 집안은 본래 대북 계열이었으나, 외가 쪽으로 인조반정 공신이자 서인 중진인 이서와 연결되어 있어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배경을 가질 수 있었다.[6]

그러나 1642년 할머니의 상을 시작으로, 이듬해 10세의 나이로 아버지 이경항을 여의고, 이후 할아버지, 둘째 형 이가우, 둘째 누이 등 가족들이 연이어 세상을 떠나는 불행을 겪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홀어머니와 남은 형들 슬하에서 어렵게 공부하며 성장하였고, 이후 남산골에서 독립하여 생활했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으나, 유년 시절부터 오리 이원익의 증손 이상현(李象賢)과 교류했으며, 소년기에는 이은진(李殷鎭), 매산 이하진(李夏鎭) 등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이은진은 일찍 세상을 떠났지만, 이상현, 이하진과는 평생에 걸쳐 학문적, 인간적 교류를 이어갔다. 이서우의 문집인 《송파집》에는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 및 이하진 가문의 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2. 1. 1. 출생과 가계

1633년(인조 11년) 3월 1일 한성부에서 이경항(李慶恒)과 전주 이씨(全州李氏) 사이의 4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우계(羽溪)이며, 자는 윤보(潤甫), 호는 송곡(松谷)이다.

그의 가계는 이감(李戡)의 4대손이자 이성헌(李成憲)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길남(李吉男)이며, 아버지는 사복시 첨정을 지내고 사후 증 예조판서추증이경항이다. 어머니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 이보(李補)의 7대손으로, 수군절도사를 지낸 이경유(李慶裕)의 딸이자 이경록의 조카딸이다. 당색으로는 대북 계열의 집안이었으나, 외가 쪽으로 외당숙인 완풍부원군 이서(李曙)는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이자 서인의 중진 문신이었다. 이 덕분에 아버지 이경항은 처사촌인 이서의 도움으로 정치적 불이익을 피할 수 있었다.[6]

형제로는 형 이덕우(李德雨), 이가우(李嘉雨), 이희우(李喜雨)[4]가 있었고, 누이로는 윤사로의 후손인 감사 윤득열(尹得說)에게 시집간 누나, 일찍 요절한 둘째 누나, 성종의 아들 익양군의 후손인 진사 이서규(李瑞圭)에게 시집간 누나 등이 있었다. 둘째 형 이가우는 동명 김세렴(金世濂)의 사위였으며, 반계 유형원과는 처사촌이자 사촌 매부 관계인 동시에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 이가우는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했으나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형 이덕우는 1687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이일관(李日觀)은 무관으로 활동하다 1680년 허영, 허새의 역모 사건 당시 보사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5] 셋째 형 이희우는 사마방목효령대군파 족보에 이름만 기록되어 있을 뿐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1642년 할머니 하동 정씨(河東鄭氏)가 세상을 떠났고, 이듬해인 1643년(인조 21년)에는 10세의 나이로 아버지 이경항을 여의었다. 1644년에는 할아버지 이길남이, 1646년에는 둘째 형 이가우가 연이어 사망했으며, 둘째 누이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연이어 가족을 잃은 뒤 홀어머니와 남은 두 형(이덕우, 이희우) 슬하에서 어려운 환경 속에 공부하며 자라다가, 이후 남산골에서 독립하여 생활했다.

2. 1. 2. 수학

고산 윤선도의 문하에서 학문과 시문을 배웠으며, 지봉 이수광의 아들인 동주 이민구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이후 백호 윤휴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가르침을 받았는데, 특히 스승 윤휴로부터는 실학자 지봉 이수광과 그의 아들 동주 이민구의 시문과 학문을 계승하였다. 성인이 된 뒤에는 미수 허목의 문하를 찾아가 학문을 이어갔다.

청년 시절에는 이은진과 함께 유람하며 시문을 주고받았으나, 이은진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후 매산 이하진, 이상현 등과 오랫동안 교류하며 학문을 닦았다.

2. 2. 관료 생활

1660년(현종 1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여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초기에 직장, 한성부참군 등을 지냈으나, 승정원에 제출하는 문서를 전문(篆文)으로 작성했다는 이유로 승지 조윤석(趙胤錫)에게 탄핵받아 문초를 당하기도 했으며, 1661년 죄수 성원(成元)의 옥사 사건과 관련된 시신 검시 문제에 연루되어 1662년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는(개차) 등 부침을 겪었다.

1663년 부사정으로 복귀한 뒤 승정원 주서 등을 역임하며 글 잘 짓는 관료로 점차 인정받았다. 그는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던 허목, 윤휴 등의 영향을 받아 남인청남 세력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당시 청남은 허목윤휴를 영수로 하여 오정창, 오정위, 오시수, 이무, 조사기, 이수경 등이 중심이었고, 이서우는 장응일, 정지호, 남천한 등과 함께 '매와 사냥개'처럼 전위 역할을 담당하며 서인 세력과 대립하고 인평대군의 세 아들(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연계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7] 이후 성균관전적과 성환역찰방, 함경도 고산역 찰방 등 내외직을 거쳤다.

2. 2. 1. 과거 급제

미수 허목 초상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1651년(효종 2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653년 효종이 친히 주관한 관학제생제술(館學諸生製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12명 중 9등으로 선발되어 종이, 붓, 먹 등을 하사받았다.

1660년(현종 1년) 9월 성균관 유생 시절, 과제(課製)에서 1등을 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같은 해 10월 10일 치러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급제 후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그해 한성부참군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승정원에 제출하는 삭서(朔書)를 전서체(篆書體)로 썼다는 이유로 승지 조윤석(趙胤錫)의 탄핵을 받아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1661년에는 북방 국경을 넘다 체포된 죄인 성원(成元)이 옥사한 사건의 시신 검시 문제에 연루되어 1662년(현종 3년) 관직에서 잠시 물러났다(개차). 1663년 부사정으로 복귀하였고, 이듬해 승정원 사변가주서, 사옹원 직장, 승정원주서 등을 역임하였다.

글을 잘 짓는다는 평을 받았다.

2. 2. 2. 관료 생활 초기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백호 윤휴
(스승의 한사람이자 청남의 영수로 그를 후원하였다.)


1650년(효종 1년) 심광위의 딸 청송 심씨와 혼인하였다. 1651년(효종 2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유생으로 수학하였다. 1653년 효종이 친히 주관한 관학제생제술(館學諸生製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12명 중 9등으로 선발되어 종이, 붓, 먹 등을 하사받았다.

1660년(현종 1년) 9월 성균관 유생 시절 과제(課製)에서 1등을 하여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으며, 같은 해 10월 10일 치러진 증광문과에 갑과(甲科)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직장을 지냈고, 그해 한성부참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승정원에 바치는 문서를 전문(篆文)으로 썼다는 이유로 승지 조윤석(趙胤錫)의 탄핵을 받아 문초를 당하기도 했다. 1661년에는 북방 국경을 넘다 체포된 죄인 성원(成元)이 옥사한 사건과 관련하여 시신 검시 문제에 연루되어 1662년(현종 3년)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다.

1663년 부사정으로 복귀하였고, 이듬해 승정원 사변가주서, 사옹원 직장, 승정원 주서를 지냈다. 1664년에는 여러 차례 승정원 가주서로 입직하였으며, 여름에는 이하진과 함께 한성부 북서(北署) 지방을 여행하기도 했다.

글을 잘 짓는다는 평판을 얻었으며, 이후 남인청남 세력에 가담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청남은 허목윤휴를 중심으로 오정창, 오정위, 오시수, 이무, 조사기, 이수경(李壽慶) 등이 주축이었고, 이서우는 장응일, 정지호, 남천한 등과 함께 전위대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삼복, 三福)과 가까이 지내며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7]

1665년(현종 6년) 말에는 성균관 전적에 임명되었다. 1667년 모친상을 당했으며, 1668년(현종 9년) 통훈대부 행 성균관전적을 거쳐 성환역찰방으로 부임하였다. 이듬해인 1669년에는 함경도 고산역(高山驛) 찰방으로 발령받았다.

이 시기 남인 내부에서는 허적 등이 그의 아버지 이경항이 광해군 시절 대북 당원이었다는 점을 문제 삼아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그의 스승이자 정치적 후원자였던 허목윤휴가 적극적으로 그를 변호하고 옹호하였다. 이러한 후원에 힘입어 그해 10월 허목윤휴의 추천으로 홍문관 관원을 선발하는 홍문록에 이름을 올렸고, 10월 11일에는 윤휴에 의해 도당록에도 추천되었다. 1673년에는 평안도 용강현감으로 부임하였다.

2. 2. 3. 삼사 관료 생활

(스승이자 정치적 후견인이었다.)]]

글을 잘 지어 칭찬을 받았으며, 남인 중에서도 허목윤휴를 중심으로 한 청남에 속하여 활동하였다. 청남은 허목과 윤휴를 영수로 하여 오정창, 오정위, 오시수, 이무, 조사기, 이수경(李壽慶) 등이 중심을 이루었고, 장응일, 정지호, 남천한, 이서우 등은 '매와 사냥개'처럼 전위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들은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삼복(三福)과 연결되어 후일을 대비하였다.[7]

남인 내에서도 탁남의 영수 허적 등은 이서우의 아버지 이경항광해군 시절 대북 당원이었다는 점을 들어 그의 등용에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허목윤휴가 그를 변호하였다. 1674년(현종 15년) 10월, 허목과 윤휴의 추천으로 홍문록에 이름을 올렸고, 10월 11일에는 윤휴에 의해 도당록에도 추천되었다.

1675년(숙종 1년) 성균관 사예를 거쳐 그해 12월 11일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명 후 여러 차례 소패(召牌, 임금의 호출 명령)를 어겼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직을 청하고 물러나 처분을 기다렸다. 이때 남인 허적서인(西人) 세력은 경연에서 이서우를 비판하며 아버지 이경항의 과거 전력까지 문제 삼았으나, 미수 허목(許穆)이 변호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 이서우는 허목과 윤휴의 비호를 받았으며, 그의 글재주를 높이 산 두 사람의 추천으로 삼사(三司)의 요직에 임명될 수 있었다. 12월 26일에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이는 대북 가문 출신 인물로는 처음으로 청직(淸職)에 오른 사례로 여겨진다.

1676년(숙종 2년) 1월, 정언으로서 만과(萬科) 설치와 종이 호패 발급의 문제점을 지적하여 이를 폐지하도록 건의했다. 만과 설치 이후 백수들이 헛된 기대를 품게 되었고, 종이 호패는 흉년 시기에는 발급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었다. 이후 성균관 사예를 거쳐 병조 정랑으로 임명되어 비변사 낭청을 겸직했다. 같은 해 7월, 청나라에 파견되는 진하사(進賀使) 겸 인조반정 변무사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선발되었다. 정사(正使)는 복선군 이남(李柟), 부사(副使)는 정석(鄭晳)이었으며, 이서우는 이들과 함께 연경에 다녀와 12월 23일 귀국하였다.

정적 김수항


우암 송시열


귀국 후 1677년(숙종 3년) 초 낭성군수(琅城郡守)로 부임했으나, 같은 해 10월 4일 사헌부 장령으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했다. 그해 12월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이후 비변사 낭관을 거쳐 1678년(숙종 4년) 3월 8일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이 되어 그해 정시(庭試)의 대독관(對讀官)으로 시험을 주관하였다. 6월 16일에는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이 시기에도 서인과 일부 남인은 그의 아버지 이경항의 전력을 문제 삼았으나, 허목윤휴가 번갈아 그를 두둔하였다. 이서우는 서인송시열, 송준길, 김수항 등의 예론이 예법에 어긋난다며 비판하고 규탄하는 데 앞장섰다.

1678년(숙종 4년) 가을, 숙종의 명으로 경상도 경차관(敬差官) 중 한 명으로 임명되어 동래 지역을 포함한 경상도 남부 지방을 순회하고 돌아왔다. 한성으로 돌아온 뒤 이듬해인 1679년(숙종 5년) 1월 동래부사로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2. 2. 4. 2차 예송 논쟁과 경신환국

글을 잘 짓는다는 평을 받았으며, 이후 남인 내 강경파인 청남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청남허목윤휴를 중심으로, 오정창, 오정위, 오시수, 이무, 조사기, 이수경 등이 핵심 인물이었고, 장응일, 정지호, 남천한, 이서우 등은 이들의 전위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받는다. 이들은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 등 왕족과 연계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 하였다.[7]

2. 2. 5. 복관과 인현왕후 폐위 전후

1689년(숙종 15년) 1월 왕자 균(경종)의 원자 정호 문제를 계기로 2월 6일 기사환국이 일어나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서우는 이때 내직으로 돌아와 병조참의(兵曺參議)로 등용되었고, 곧바로 승지(承旨)가 되었다. 2월 15일 다시 승지로 임명되었다가 곧 병조참의가 되었다. 그는 스승 윤휴의 죽음을 애도하며 제문을 지어 보냈다.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지만 / 虎狼雖食人

사람이 또한 호랑을 죽인다네 / 人亦殺虎狼

뜬구름이 벌써 사라지고 / 浮雲已消散

태양이 다시 밝았어라 / 白日重晶光

경신년에 포악하고 잔인한 무리들 / 猴年虎冠輩

오늘날 편안히 지내는 자 누구인가 / 問誰今安康

귀신과 사람의 주벌을 받아 / 陰誅與顯戮

잇달아 모두가 죽었구려 / 相續皆淪亡

야유하던 자 죽임을 당하자 백성들이 통쾌히 여기는데 / 揶揄萬姓快

그들에 대한 욕설 천추에 영원하리 / 詈罵千秋長

이들이 어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만 하겠는가 / 豈如寃死人

은총의 교지와 제문을 내렸어라 / 絲綸下恩章

관직을 회복시키고 제사를 내리며 / 復官賜祭奠

자손들을 기록하여 조정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네 / 錄子登朝行

죽은 사람 산 사람이 모두가 그지없이 감격하건대 / 幽明交感極

이에서 또 어떠한 소망이 있겠는가 / 毫髮復何望

그 중에서도 백호옹은 / 就中白湖翁

영혼이 유독 애절하여라 / 英魂獨悲傷

그가 논한 예는 임금의 종통을 인용하였고 / 其禮引聖庶

그가 지닌 뜻은 제갈량의 일이었어라 / 其志乃南陽

군신의 계합이 우연한 것이 아니었건만 / 契合非偶然

경륜을 다 펴지 못하였네 / 經綸未渠央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예를 밝히지 못하니 / 志閼禮未明

천운이 어쩌면 그리도 아득한가 / 天運何茫茫

아서라 천운이야 어쩔 수 없거니 / 已矣無奈天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슬퍼할 건가 / 胡爲漫回腸

아서라 천운이야 어쩔 수 없거니 / 已矣無奈天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슬퍼할 건가 / 胡爲漫回腸



같은 해 윤 3월, 이서우는 다른 남인 신료들과 함께 송시열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4월 23일 승지가 되었고, 예조참의를 거쳐 8월 3일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1689년 10월 3일에는 사간원 대사간,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했으며, 10월 23일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서인이 잘못된 예론을 고집한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성토하였다.

1690년(숙종 16년) 1월 10일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고, 이후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지냈다. 그는 김수항, 송시열 등을 탄핵하며 서인 세력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를 폐위시키는 과정에서는 승지로 있으면서 숙종의 뜻을 받들었다. 1690년 5월에는 함경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咸鏡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어 도순찰사(巡察使)와 함흥부윤(咸興府尹)을 겸직하였다.

함경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로 재직하던 중, 1691년 4월 인삼 관련 행정 처리에 문제가 있었고, 인삼 채취를 위해 국경을 넘는 백성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변사의 탄핵을 받아 삭직되었다.

1691년(숙종 17년) 민암대제학 직에서 물러나자 후임 물망에 올랐으나 임명되지 못했다. 이후 가야산 해인사에 들러 최치원의 시 구절을 일부 바꾸어 송시열을 비판하는 시를 남기고 상경하였다. 1692년 10월 2일, 의정부좌의정 목래선의 건의로 다시 관직에 서용(敍用)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2. 3. 생애 후반

1692년(숙종 18년) 10월, 의정부좌의정 목래선(睦來善)의 추천으로 예문관제학에 임명되었고, 곧이어 공조참판에도 제수되었으나 거듭 사양하였다. 같은 해 11월 승정원도승지가 되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손자의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1693년에는 다시 예문관제학으로 임명되어 특진관을 겸하며 식년시 생원진사시 등 여러 과거 시험의 시험관을 맡았고, 승문원 제조를 거쳐 황해도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1694년 4월 1일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남인이었던 그는 공조참판 직에서 파직되고 관작을 삭탈당했으며, 4월 16일에는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1697년 석방되어 복관되었고, 1698년 2월 25일 숙종의 서용(敍用) 명령까지 받았으나[11], 이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청계산 근처에 은거하며 송시열김수항서인 세력을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러한 태도로 인해 비변사 등에서 여러 차례 지방관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번번이 임명되지 못했으며, 1700년 의정부우참찬 이현석이 강화부유수로 추천했을 때도 거절당했다.

2. 3. 1. 갑술환국과 복권

1694년 4월 1일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정권을 잡자, 공조참판이었던 이서우는 파직되고 관작이 삭탈되었다. 같은 해 4월 16일에는 문외출송(門外黜送)의 처분을 받았다. 1695년 숙종이 사면령을 내렸으나, 승지 이야(李壄) 등이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문외출송된 이후 그는 청계산(淸溪山) 근처에 머물며 각지를 유람했다. 이 시기 그는 군역의 폐단이 극심하여 어린아이와 노인에게까지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이 때문에 백성들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이거나 산 채로 묻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겼다. 또한 기근과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과 성 밖에 시체가 쌓이는 참상을 여러 수의 시로 남기기도 했다.

1697년(숙종 23년) 4월, 마침내 석방 명령을 받고 풀려나 관작이 복구되었다. 당시 남인 등용 정책을 펴던 소론 재상 최석정(崔錫鼎)은 그의 청렴함을 인정하여 서용(敍用, 다시 벼슬에 씀)을 건의했다. 이에 1698년 2월 25일 숙종승정원에 전교하여 이서우를 서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1] 그러나 그는 복권된 이후에도 관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복권 이후에도 그는 송시열김수항서인 세력이 진리를 왜곡하고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며 권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비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또한 서인북벌론에 대해 효종이 송시열에게 하사한 초구(貂裘, 담비 가죽 옷)를 개가죽에 빗대며 조롱하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 때문에 비변사에서 여러 차례 지방관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번번이 임명되지 못했다. 1700년(숙종 26) 2월 3일 신임 강화부유수를 천거할 때 의정부우참찬 이현석이 그를 추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701년(숙종 27년) 8월, 희빈 장씨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이유로 체포, 투옥되면서 장희재를 비롯한 남인 인사들이 대거 처형당하자, 이서우 역시 금고(禁錮, 정치 활동 금지) 처분을 받았다. 그해 10월 8일 희빈 장씨가 사사된 뒤 다른 남인 당원들과 함께 사면되었으나, 이후 그는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광주 청계산 근처 신원리로 낙향하여 은거했다.

2. 3. 2. 만년

1694년 4월 1일 갑술옥사서인이 집권하자 파직되고 관작이 삭탈되었으며(삭출), 4월 16일에는 성문 밖으로 쫓겨나는 문외출송(門外黜送) 처분을 받았다. 1695년 숙종의 사면령이 내려졌으나 승지 이야(李壄) 등 서인 세력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그는 청계산(淸溪山) 근처에 머무르며 은거하거나 각지를 유람했다. 이 시기 군역의 폐단이 심하여 어린아이와 노인에게까지 군포(軍布)를 징수하고, 심지어 남자 아이를 낳으면 죽이거나 산 채로 묻는 참혹한 현실을 목격하고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또한 기근과 흉년으로 인한 굶주림과 성 밖에 시체가 쌓이는 참상을 여러 수의 시로 남겼다.

1697년(숙종 23년) 4월에 석방 명령을 받고 풀려나 복관되었다. 그 해 남인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던 소론 재상 최석정(崔錫鼎)이 그의 청렴함을 인정하여 서용(敍用, 다시 벼슬에 씀)을 건의하였으며, 1698년 2월 숙종으로부터 서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11] 현직에 나아가지는 않았다. 대신 경기도 광주 청계산 철곡(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근처 신원리로 낙향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오상렴(吳尙濂), 채팽윤, 오광운(吳光運), 김리만(金履萬), 강박(姜樸), 이정휴, 이병휴 등이 그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특히 성호 이익(李瀷)은 이서우를 '사백(詞伯, 시문의 으뜸)'이라 칭하며 존경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은거 중에도 송시열김수항 등이 진리를 왜곡하고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며 권력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계속 비판하는 등 서인 세력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서인북벌론에 대해 효종이 송시열에게 내려준 초구(貂裘, 담비 가죽 옷)를 개가죽에 빗대어 조롱하기도 했다. 비변사로부터 여러 차례 지방관 직의 물망에 올랐지만 번번이 임명되지 못했다. 1700년(숙종 26년) 2월 3일 신임 강화부유수 적임자를 천거할 때 의정부우참찬 이현석이 그를 추천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는 사망 후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원지리 철곡(현 서울특별시 서초구 원지동 산 83-2번지) 유좌(酉坐)의 부인 청송 심씨 묘소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묘소 위에는 종조부 이명남, 임진왜란 때 전사한 재종조부 이복남의 의관과 갑옷을 묻은 허묘(虛墓)와 그 부인 청주 한씨의 합장묘, 고조부 이광식의 묘소가 차례로 있다. 그의 묘소 남쪽에는 2011년 건립된 서울추모공원이 있다.

=== 사후 가계의 몰락과 복권 ===

1728년(영조 4년) 이인좌의 난에 두 서자 이익관, 이순관과 서녀 사위 민관효가 연루되면서 그의 가계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셋째 아들 이홍관은 처형당했고, 괘서를 돌리는 데 가담한 이익관, 이순관 형제는 능지처참당하고 가산은 적몰되었다. 이인좌를 도운 서녀 사위 민관효 일가 역시 처형당하고 가산이 적몰되었다. 이들의 후손인 서손 이계강, 이철강 등은 먼 변방의 노비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정관의 아들 이번 등 다른 친족들도 연루되어 노비로 끌려갔다가 석방되기도 했다.

이서우 역시 역모로 연좌되어 관작을 추탈당했다. 그의 두 아들 이정관과 이석관은 난 이전에 사망했으므로 화를 면하였으나, 그의 적손들 역시 뿔뿔이 흩어져 경상북도 성주강원도 원주 등지로 피신해야 했다.

1745년(영조 21년) 10월에는 을축 괘서 사건에 그의 손자이자 이정관의 아들 이심이 연좌되어 처형되면서 가계는 더욱 몰락했고, 외손 강박, 외증손 신후담 등도 연좌되어 관직에 나아가는 데 제한을 받게 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으로 추탈되었던 관작은 정조남인이 다시 등용되면서 1795년(정조 19년) 10월에야 복권되었다.

=== 사후 평가 및 추모 ===

그는 사후 남인 학문과 시맥(詩脈)의 정통이자 남인 문단의 종장(宗匠)으로 추숭되었다. 훗날 채제공허목-이서우-이익으로 이어지는 남인 학문과 시문의 법통을 확립하며 그의 학문적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의 문집은 외손자인 국포 강박이 정리했고, 강박의 손자 강세륜과 강세백이 재정리하여 간행한 뒤 이서우의 직계 후손에게 전해주었다. 1995년 연세대학교에서 국역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졌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작실에 그를 제향하는 영정각이 세워졌으며, 매년 3월 1일 원주시 부론면 단강리 영정각에서 다례(茶禮)를 올리고 있다. 1995년 8월 후손들에 의해 묘비가 다시 세워졌다.

3. 평가

남인북인 내부에서는 구경(九經)에 통달한 거유(巨儒)이자 도학군자로 칭송받았다. 당대에 청백리로 인정받아 여러 곳에 그의 선정을 기리는 인정비(仁政碑)가 세워지기도 했다.[34]

학문적으로 그는 윤선도, 허목, 윤휴, 이민구의 학통을 이어받아, 후대의 이익, 안정복, 채제공 등에게 전해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이 때문에 그는 남인 학문과 시맥의 정통 계승자이자 남인 문단의 중심 인물(종장, 宗匠)로 높이 여겨졌다. 채제공은 그를 허목-이서우-이익으로 이어지는 남인 학문과 시문의 정통으로 보았다.[21] 갈암 이현일은 그의 추도문에서 이서우의 학문이 퇴계 이황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하기도 했다.



연원은 멀리 퇴계에서 왔고 / 淵源遙自退溪來한국어


풍운처럼 계합하여 초야에서 일어났네 / 契合風雲起草萊한국어


척지의 경륜으로 재상의 자리에 다가갔으나 / 尺地經綸台象逼한국어


노년의 종적은 귀문에서 돌아왔네 / 暮途蹤跡鬼門回한국어


막 수염과 모발이 부로와 같다고 들었는데 / 纔聞髭髮同涪老한국어


홀연히 음용이 야대로 드셨다고 하네 / 忽報音容隔夜臺한국어


오래도록 성남에서 이별할 때의 말씀을 기억하노니 / 長記城南臨別語한국어


동쪽으로 영가를 바라보매 슬픔을 금할 길 없네 / 永嘉東望不勝哀한국어



그의 스승인 허목윤휴는 한강 정구의 학통을 계승했는데, 정구는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제자였으므로, 이서우의 학문은 이황과 조식에게까지 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에 대해서는 주로 과거 시험 때 짓는 과시(科詩)에 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채제공은 그를 남인 시맥의 종장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의 시에 원대한 운치는 부족하다는 평을 남겼다.[21] 정약용 역시 그의 작품에 대해 "우리들(남인)의 시맥은 호주 채유후(湖洲 蔡裕後)·동주 이민구(東州 李敏求) 이후로 오직 송곡 이서우가 그 정통을 얻었으나, 성곡의 시는 정교하고 치밀하기만 할 뿐, 원대한 운치가 적다"고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21]

그의 시는 만당(晩唐), 송(宋), 원(元)나라의 시와 조선의 고시(古詩)를 배웠으며, 특히 이백의 시를 모범으로 삼으려 했다. 또한 이규보, 이색, 윤선도, 이민구의 시에서도 영향을 받았는데, 그중 동주 이민구를 가장 높이 평가했다. 아버지 이경항이 임숙영의 문인이었기에 임숙영의 시에도 관심을 가졌고, 교유하던 친구 신선함의 아버지인 신유(申濡)의 시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일찍이 민점(閔點)이 문형(文衡, 홍문관·예문관대제학)을 추천할 때, 권유(權愈)와 이서우를 두고 고민하다가 명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운을 내어 재주를 시험했는데, 이서우가 즉석에서 시를 지어 좌중을 놀라게 하여 문형에 올랐다는 일화가 전해진다.[34]

영남 안찰사로 재직할 때는 귀임길에 태학사 권유(權愈)를 만나 "영남 70개 고을 중 옛 도리대로 백성을 돌보는 이는 의령의 이사군(李使君) 숭일(이현일의 동생) 뿐이다"라고 말하며 지방관의 자세를 강조하기도 했다.[35] 또한 생전에 안경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 그 생김새를 신기하게 여겨 이를 묘사한 시를 남기기도 했다.[36]

4. 저서 및 작품

정약용은 이서우의 작품 상당수가 유실된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서우는 우서당(정경세)과 비슷한 이로 정밀하고 곱기는 우세했건만 불행과 곤궁이 사후까지 이어졌기에 남긴 초고 대부분 전하지 않는다."[17]라고 평하기도 했다.
저서


  • 《송파문집》(松坡文集) 20권
  • 《강사》(康史) 2권
  • 《장산후지(萇山後誌)》[18]
  • 《동래승람서후지(東萊勝覽書後誌)》[18]
  • 《호사》(虎史) 1권 (현재 전하지 않음)
  • 《전제 (筌蹄)》: 시 일부를 모은 소책자 (조선 말기 간행, 연대 미상)

작품

  • 문수사 풍담대사비(文殊寺 楓潭大師碑) 전액 (글씨)
  • 오리 이원익 묘갈명
  • 노주 김태일 묘갈명
  • 이하진 묘갈명(李夏鎭墓碣銘)
  • 소릉문집 서문(少陵文集序文[19])
  • 백곡집 서문(柏谷集序) (1686)
  • 삭녕군수(朔寧郡守) 이상현(李象賢) 묘갈명 (경기도 광명시 소재)
  • 충장공 이복남의 시호 상주(上奏) 시장(諡狀)
  • 해원군 이건 지문(海原君李健誌文)
  • 증좌찬성 행호조판서 이명 신도비(李溟神道碑)의 글씨 (1673): 장단군 판부리 소재. 신도비문은 허목이 짓고 글씨는 윤심(尹深)이 썼으며, 이서우가 비석에 새겼다.
  • 심서묘갈명(沈諝墓碣銘):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 31-1번지 심서 묘역 내
  • 진사 강석훈[20] 묘갈명(進士姜碩塤墓碣銘)
  • 강전(姜琠) 묘갈명: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용암 해좌 소재
  • 초연재문집 서문(超燕齋文集序文)
  • 권황 묘비: 통진 명월산 소재
  • 김정회 묘갈명 (현재 실전)


그의 생전에 안경조선에 처음 유입되었는데, 그는 안경의 생김새를 놀라워하며 이를 묘사한 시를 지어 남기기도 했다.[36]

5. 가족 관계

이서우는 1633년 (인조 11년) 3월 1일 이경항과 전주 이씨 사이에서 4남 4녀 중 넷째 아들로 한성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우계(羽溪)이며, 북인 중에서도 대북 계열 가문 출신이다. 이감의 4대손이며, 아버지는 사복시 첨정을 지내고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된 이경항이다. 어머니 전주 이씨는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7대손으로, 수군절도사 이경유의 딸이자 이경록의 조카딸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훈구파북인 대북 계열이었으나, 외당숙인 완풍부원군 이서가 인조반정에 참여한 공신이자 서인 중진이었기에 아버지 이경항은 처사촌인 이서의 도움으로 정치적 불이익을 피할 수 있었다.[6] 그러나 1642년 할머니 하동 정씨, 1643년 아버지 이경항, 1644년 할아버지 이길남, 1646년 둘째 형 이가우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고, 둘째 누이 역시 일찍 요절하여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둘째 형 이가우는 동명 김세렴의 사위이자 반계 유형원과는 처사촌-사촌매부 관계이며 절친한 친구였다. 이가우는 초시에 1등으로 합격했으나 부친의 3년상을 마친 뒤 일찍 요절했다. 첫째 형 이덕우의 아들 이일관은 무관으로 활동했으며, 1680년 허영, 허새의 옥사 때 보사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5]

이서우는 청송 심씨 부인 외에도 첩 2명을 더 두어 여러 자녀를 두었다.

'''직계 조상'''



'''부모 및 형제자매'''

'''배우자 및 자녀'''
증손 : 이종일(李種一)
외증손 : 신후담(愼後聃, 1702년 ~ 1761년)
진외증손 : 강필악(姜必岳)
* 진외고손 : 강세륜(姜世綸, 1761년(영조 37)∼1842년(헌종 8))
* 진외고손 : 강세백(姜世白, 1748년(영조 24)∼1824년(순조 24))

  • ** 외손자 : 강순(姜栒, 1687년 - ?)
  • ** 외손녀 : 진주 강씨
  • ** 외손녀사위 : 남태보(南泰普, 본관은 의령, 부사)
  • * 딸 : 우계 이씨(羽溪李氏)
  • * 사위 : 신명제(申命濟, 1667년 ~ 1721년 2월 28일)

  • '''측실''' : 이름 미상(無名氏, ? - ?)
  • * 딸 : 우계 이씨(羽溪李氏), 유득공의 외할머니
  • * 사위 : 홍이석(洪以錫, 1687년 - 1742년, 이원현감 역임), 유득공의 외할아버지
  • ** 외손녀 : 남양 홍씨
  • ** 외손녀사위 : 유춘(柳瑃, ? - 1752년), 유득공의 아버지

외외증손 : 유득공(柳得恭, 1748년 12월 24일(음력 11월 5일) ~ 1807년 10월 1일(음력 9월 1일))

  • * 딸 : 우계 이씨(羽溪李氏)
  • * 사위 : 황팽로(黃彭老, 1681년 - 1741년)

  • '''첩''' : 이름 미상(無名氏, ? - ?)
  • * 서자 : 이익관(李翼觀, ? - 1728년 3월 28일)
  • * 서며느리: 수혜(守惠)[27]
  • ** 서손자 : 이금강(李今剛, 1712년 ~ 1728년 3월 29일)
  • ** 서손녀 : 이두혜(李斗惠)[28]
  • ** 서손자 : 이철강(李鐵剛, ? ~ 1745년 11월 28일), 이순관의 아들 (숙부 이익관에게 입양됨)
  • * 서자 : 이순관(李順觀, ? - 1728년) (원문: 순애(順愛) - 이름 확인 필요)
  • * 서며느리 : 신순애(愼順愛[29],[30])
  • ** 서손자 : 이철강(李鐵剛), 숙부 이익관의 양자로 출계
  • ** 서손자 : 이계강(李戒剛)
  • * 서녀 : 이씨(李氏)
  • * 서녀사위 : 민관효(閔觀孝, ? - 1728년, 민종도의 서자, 민암의 서손자)
  • * 서자 : 이현관(李顯觀, ? - 1728년 이전 사망)
  • * 서자 : 이관상(李觀上)
  • ** 서손자 : 이술(李述)
  • ** 서손자 : 이부(李富)
  • ** 서손자 : 이자득(李自得)


'''기타 친인척'''

  • 외할아버지 : 이경유(李慶裕, 1562년 - 1620년)
  • 외할머니 : 죽산 박씨(竹山朴氏), 병절교위 박문좌(朴文佐)의 딸
  • * 친외삼촌 : 이정(李瀞)
  • 서외조모 : 장흥 고씨, 고언명의 서녀
  • * 이복 외숙부 : 이기축(李起築, 1589년 - 1645년)
  • 외종조부 : 이경록(李慶祿, 1533년 - 1591년)
  • * 외당숙 : 이서(李曙, 1580년 - 1637년, 완산부원군, 인조 반정 공신)

  • 장인 : 심광위(沈光胃, 본관은 청송)

  • 사돈 : 강석번(姜碩蕃), 사위 강석훈의 동생
  • 사돈 : 민종도(閔宗道, 1633년 - 1693년, 서녀사위 민관효의 아버지)
  • 사돈 : 민점(閔點, 1614 ~ 1680)
  • 사돈 : 민암(閔黯, 1636 - 1693)
  • 사돈 : 신광원(愼光遠, 첩며느리 신씨의 동기)

6. 기타

그의 호는 송곡(松谷)이었으며 문집 역시 송곡문집이라 하였으나, 숙종 이후 남인이 정치적으로 몰락하자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송파문집(松坡文集)으로 이름을 바꾸어 간행하였다. 송파문집은 그의 외손자인 강박이 정리하였는데, 강박은 자신의 백부 강석번의 양자로 출계한 인물이다. 이후 강박의 손자인 강세륜과 강세백[31] 형제가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자신의 시에서 이서우의 불행을 안타까워하며 "송곡은 우서당(이민구)과 비슷한 이로, 정밀하고 고운 점은 우세했으나 불행과 곤궁이 사후까지 이어져 남긴 초고 대부분이 전하지 않는다.(松谷似西堂, 工緻勝濃姸. 厄窮逮身後, 草藁多不傳.)"라고 언급하였다.[17] 이처럼 그의 작품 중에는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 것이 많으며, 그의 시 일부를 모은 소책자로 《전제 (筌蹄)》(조선 말기, 간행년대 미상)가 전한다.

그는 이규보, 목은 이색, 퇴계 이황, 동주 이민구를 높이 평가하였다.

젊어서는 바둑을 둘 줄 몰랐으나, 여러 번 패배한 것을 분하게 여겨 스스로 독학하여 바둑을 익혔다는 일화가 있다.[37] 처음에 바둑 고수를 찾아가 대국했을 때는 열여섯 집 차로 졌고, 세 판을 두었으나 한 판도 이기지 못했다. 이에 분함을 느껴 돌아와 종이에 바둑판을 그려 들보에 매달아 놓고 누워서 수를 연구했다고 한다. 이틀 뒤 다시 그 고수를 찾아가 이번에는 열여섯 집 차로 이겼으며,[37] 이후 바둑의 달인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1728년(영조 4년)에는 그의 서자인 이익관과 이순관이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괘서를 돌리다가 모반 혐의로 처형되었고, 이로 인해 그의 다른 일족들도 연좌되었다.

후대의 시인 김삿갓은 자신의 시집에 '나부(懶婦)'라는 제목의 칠언율시를 실었는데, 이는 이서우의 시를 일부 고쳐 쓴 것이라는 평가가 있다.[32][33]

참조

[1] 논문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4-09-27
[2] 문서 민종도의 서자
[3] 웹사이트 의괴자료 http://yoksa.aks.ac.[...]
[4]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04-07
[5] 문서 이서우가 자신보다 앞서 죽은 조카 이일관의 묘지문이나 행장 등을 지은 기록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는 그가 짓지 않은 것인지, 지었는데 실전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6] 서적 인조 실록 제 19권, 6년(1628년 무진 / 명 천계(天啓) 8년) 12월 25일(신해) 3번째기사 "우승지 이경용을 황해 감사로 삼다"
[7] 서적 이야기 조선왕조사 청아출판사 2005
[8] 서적 숙종실록 4권, 숙종 1년(1675 을묘 / 청 강희(康熙) 14년) 10월 11일(을축) 1번째기사 "축성에 대해 논의하고, 윤휴가 이수경·신선온·이후항이 도당록에서 빠졌음을 아뢰다"
[9] 서적 2010 부산문화관광해설사 보수교육 부산문화원 학예연구실 2010
[10] 서적 숙종실록 10권, 숙종 6년(1680 경신 / 청 강희(康熙) 19년) 9월 13일(무진) 2번째기사 "청나라 사신의 접견·도성 역사·어영청 등의 군사 훈련·강화도의 시재·공훈 등을 논의하다"
[11] 서적 승정원일기 377책 (탈초본 20책) 숙종 24년 2월 25일 경오 3/6 기사 1698년 康熙(淸/聖祖) 37년, 吳始復 등을 收用하고 洪重夏 등은 논하지 말라는 전교
[12] 문서 그가 이서우를 찾아와서 시문을 지도받은 것을 이재가 권두경의 행장을 쓰면서 일부 언급하였다.
[13] 서적 혜환 이용휴 시전집 소명출판 2002
[14] 서적 星湖先生全集 卷55 한국문집총간
[15] 문서 후에 외손자 국포 강박에게 전해졌다가, 강박의 손자인 강세륜, 강세백이 정리하여 간행하였다. 그의 두 서자가 [[1728년]](영조 5년)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화를 입은 관계로, 문집은 그의 호인 송곡 대신 송파로 바꾸어 간행하였다.
[16] 문서 우계이씨 족보에는 둘째 형 이가우(李嘉雨)가 1705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으나, 이가우는 [[채유후]]가 지은 이군묘비문에 1646년에 사망했다고 기재되었다.
[17] 서적 古詩二十四首 민족문화추진회 1994
[18] 웹사이트 http://people.aks.ac[...]
[19] 웹사이트 소릉문집 http://100.nate.com/[...]
[20] 문서 그의 사위이다.
[21] 서적 다산문선 두산동아 2010
[22] 서적 호주문집 7권 이군묘갈명
[23] 문서 익양군 회-용천군 이수한(龍川君 李壽朋+鳥)-기성군 이현(箕城君 李俔)-평림군 이지윤(平林君 李祉胤)-이후석(李後奭)-이서규
[24]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4월 2일(임오) 맑음 "역적 이문저(李文著) 등에게 적용할 연좌율에 대해 보고하는 의금부의 계" http://db.itkc.or.kr[...]
[25] 웹사이트 http://sillok.histor[...]
[26] 문서 94세까지 장수하여 남편의 작위와는 관계없이 특별히 숙부인으로 봉해졌다.
[27]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4월 2일(임오) 맑음 "역적 이문저(李文著) 등에게 적용할 연좌율에 대해 보고하는 의금부의 계" http://db.itkc.or.kr[...]
[28]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4월 2일(임오) 맑음 "역적 이문저(李文著) 등에게 적용할 연좌율에 대해 보고하는 의금부의 계" http://db.itkc.or.kr[...]
[29] 웹사이트 승정원일기 영조 4년 무신(1728) 4월 2일(임오) 맑음 "역적 이문저(李文著) 등에게 적용할 연좌율에 대해 보고하는 의금부의 계" http://db.itkc.or.kr[...]
[30] 문서 신광원(愼光遠)의 누이
[31] 문서 이서우에게는 증외고손이 된다.
[32] 서적 한국 한시의 분석과 시각 연세대학교출판부 2000
[33] 서적 김립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44
[34] 웹사이트 권유 http://koreandb.nate[...]
[35] 서적 선택 민음사 1997
[36] 뉴스 새해 부자되세요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6-11-28
[37] 서적 고전 산문 산책: 조선의 문장을 만나다 휴머니스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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