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 (1842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수정은 1842년 전라남도 곡성에서 태어나,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를 피신시킨 공로로 고종의 허락을 받아 신사유람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가 유학했다. 일본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고 한국어 성경 번역에 힘썼으며, 미국에 선교사 파견을 요청하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내한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개화파에게 개신교 교리를 전파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귀국하여 처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 - 쓰카다 주이치로
쓰카다 주이치로는 니가타현 지사, 중의원 및 참의원 의원을 지낸 일본의 정치인으로, 제5차 요시다 내각에서 체신대신, 자치청 장관, 행정관리청 장관을 겸임하며 니가타현 종합 개발 계획 수립과 니가타항 동항 건설, 시나노 강 세키야 분수 사업을 추진했다. - 도쿄 외국어대학 교수 - 다카쿠스 준지로
다카쿠스 준지로는 일본의 불교학자이자 교육자로, 도쿄제국대학에서 범어학 강좌를 창설하고 『대정신수대장경』과 『남전대장경』의 간행을 주도하여 불교학 연구에 기여했으며 무사시노 여자학원과 니혼바시 간이 상업 야간 학교를 설립하고 에스페란토 운동에도 참여했다. - 조선의 개신교도 - 백홍준
백홍준은 조선 말기 개신교 신자로서 만주에서 개종 후 성경 번역과 교회 활동에 기여하고 만주 선교에도 참여했으나, 불법 집회 혐의로 체포되어 옥사,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가 되었다. - 조선의 개신교도 - 서상륜
서상륜은 조선 말기 기독교 전도자이자 성서 번역가로, 스코틀랜드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한국 최초의 한글 신약성경 번역 및 출판에 기여하고 한국 최초의 자생 개신교 교회인 소래교회 설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1886년 사망 - 프란츠 리스트
프란츠 리스트는 19세기 헝가리 출신의 "피아노의 왕"이라 불린 천재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혁신적인 기법과 화려한 연주, 교향시 창시, 표제음악 발전, 바그너 지원, 종교 음악 작곡, 후진 양성 등 음악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86년 사망 - 레오폴트 폰 랑케
레오폴트 폰 랑케는 19세기 독일의 역사가이자 실증주의 역사학의 선구자로, 사료 비판을 통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했으며, 베를린 대학교 교수로서 세미나 시스템을 통해 사료 분석 및 해석 방법을 가르치고 다양한 역사서를 저술하여 역사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수정 (1842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씨명 | 이수정 |
한자 | 李樹廷 |
출생일 | 1842년 |
출생지 | 이씨조선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 |
사망일 | 1886년 |
사망지 | 이씨조선 |
사망 원인 | 처형 (순교) |
국적 | 이씨조선 |
직업 | 도승지, 교사, 성서 번역가 |
종교 | 개신교 |
2. 일생
이수정은 1842년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옥과현)에서 태어났으며, 민영익과 친분이 있었다.[14]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이었던 안종수의 이야기에 힘입어 일본에 갈 것을 꿈꾸게 된다. 얼마 뒤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이수정은 농부로 변장하여 명성황후를 지게에 거름이 나가는 것처럼 꾸며 궁궐에서 빠져나와 광나루를 건너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켰다. 그는 이 업적으로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여기에 힘입어 1882년 10월 고종의 허락 하에 비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문물 탐방과 자유로운 학술 연구를 할 기회를 갖게 된다.[14]
이수정은 일본 유학 중 쓰다 센의 영향으로 개신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1883년 4월 29일 도쿄 로게츠쵸(霜月町)교회[15]에서 조지 W. 녹스(George W. Knox) 목사와 야스카와 도루(安川 亨)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개신교인이 되었다.[16] 1883년(메이지 16년) 4월 9일, 로게츠마치 교회(현재 일본기독교단 시바 교회)에서 야스카와 토오루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4][5] 이수정 등의 수세가 계기가 되어 조선 안식일 학교가 개설되었다. 또한, 30명 정도의 유학생에 의해 조선인 학교가 설립되었다.
이수정은 성경의 자국어 번역이 선교 사업의 기본이라고 인식하고, 미국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Henry Loomis)[17]와 조지 W. 녹스(George W. Knox)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개신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11] 1884년 미국성서공회의 자금 지원 아래 발간된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는 기존의 한문 성서에 한글로 토를 단 것이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이 포함되었다. 본격적인 한국어 번역본 중 최초로 나온 것은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였으며,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1천부가 인쇄되었다.[18] 1885년에는 미국 성서 협회에서 조선어 한글 표기의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해』(마가복음)가 6,000부 출판되었다.[12] 이것들은 개신교 역사상 최초의 조선어 번역 성서이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는 일본 요코하마에 체류하던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웠으며, 미국에서 일본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은 이수정의 한국어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수정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조선의 문물이 개방되고 기독교 박해가 줄어들 것이라는 상황을 알리고, 조선에 오는 선교사를 돕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14] 이 편지는 1884년 1월 26일 발행된
귀국 후 그와 함께 일본에 다녀온 안종수(安宗洙)를 만나게 되고, 안종수가 일본 방문시에 만났던 츠다센(津田仙)을 소개한다.
이후 이수정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갈 기회를 갖게 되는데, 동경제국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강사를 물색해 줄 것을 한국 정부에 요청해와, 이에 응모, 선발되었다. 일본에 도착한 이수정은 일본 농학박사이자 개신교 신자였던 츠다센(津田仙)을 만났고 그가 준 성서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개신교로 개종하게 된다. 1883년 4월 29일 도쿄 소재의 로게츠쵸(霜月町)교회[15]에서 조지 W. 녹스(George W. Knox) 목사와 야스카와 토오루(安川 亨)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개신교인이 된다.[16]
1883년 말 이수정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조국인 조선의 문물이 개방되고 있어 이전과 같이 기독교를 박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상황을 알리고 조선에 오는 선교사를 돕겠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조국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미국 교회에 요청하였다. 이수정의 편지는 일반 기독교 주간지인
이후 이수정은 성경의 자국어 번역이 선교 사업의 기본이라고 인식하고, 개신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미국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Henry Loomis)[17]와 조지 W. 녹스(George W. Knox) 선교사가 이수정의 번역 사업을 도왔다. 1884년 미국성서공회의 자금 지원 아래 발간된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는 기존의 한문 성서에 한글로 토를 단 것이었다. 본격적인 한국어 번역본 중 최초로 나온 것은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였으며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1천부가 인쇄되었다.[18] 초기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는 일본 요코하마에 체류하던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웠으며, 미국에서 일본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은 이수정의 한국어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1885년 7월부터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 예배집례를 주관했으며, 이들 유학생들에게 일본의 선진 문물을 전수하였다. 그는 개화파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에게 개신교 교리를 전파했다.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그는 조선 조정과 김옥균의 미움을 양쪽에서 받게 되었으며, 특히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 1886년 귀국과 동시에 개화파를 적대시하던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이수정은 1842년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옥과현)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홍문관 교리[2] 출신으로 민영익과 친분이 있었다.[1] 1881년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이었던 안종수의 이야기에 힘입어 일본에 갈 것을 꿈꾸게 된다.[14]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이수정은 농부로 변장하여 명성황후를 지게에 거름이 나가는 것처럼 꾸며 궁궐에서 빠져나와 광나루를 건너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켰다.[14] 이 업적으로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1882년 10월 고종의 허락 하에 비수행원으로 신사유람단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문물 탐방과 자유로운 학술 연구를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14]
2. 2. 임오군란과 명성황후 피신
이수정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났을 때, 농부로 변장하여 명성황후를 지게에 거름이 나가는 것처럼 꾸며 궁궐에서 빠져나와 광나루를 건너 충주까지 무사히 피신시켰다.[14] 이 업적으로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14]
2. 3. 일본 유학과 개종
이수정은 1842년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면(옥과현)에서 태어나 민영익과 친분이 있었다.[14]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이었던 안종수의 영향으로 일본 유학을 결심했다. 임오군란 당시 농부로 변장하여 명성황후를 충주까지 피신시킨 공로로 왕실의 신임을 얻었고, 1882년 10월 고종의 허락을 받아 신사유람단의 비수행원으로 일본에 건너갔다.[14]
귀국 후 안종수를 통해 일본 농학자이자 개신교 신자인 쓰다 센(津田仙)을 소개받았다.[14] 이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제국대학 한국어 강사로 선발되었고, 쓰다 센을 만나 성서를 연구하며 개신교로 개종했다. 쓰다의 권유로 도쿄 신에이바시 교회(현 일본기독교단 신에이 교회)의 크리스마스 예배에 참석하였다.
1883년 4월 29일, 도쿄 로게츠쵸(霜月町)교회에서 조지 W. 녹스(George W. Knox) 목사와 야스카와 토오루(安川 亨)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정식 개신교인이 되었다.[16] 또한, 감리교회 선교사 로버트 S. 맥클레이와도 친분을 맺었다.
2. 4. 성서 번역과 선교 요청
이수정은 성경의 자국어 번역이 선교 사업의 기본이라고 인식하고, 미국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Henry Loomis)[17]와 조지 W. 녹스(George W. Knox)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개신교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884년 미국성서공회의 자금 지원 아래 발간된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는 기존의 한문 성서에 한글로 토를 단 것이었다.[18] 미국 성서 협회의 헨리 루미스 선교사의 권유로, 조선어 성서 번역을 시작하여 2개월 만에 『마가복음』을 거의 번역을 마쳤다.[11] 이듬해인 1884년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을 현토한문(懸吐漢韓, 조선어-한문)판으로 출판했다. 1885년에는 미국 성서 협회에서 조선어 한글 표기의 『신약 마가전 복음서 언해』(마가복음)가 6,000부 출판되었다.[12] 본격적인 한국어 번역본 중 최초로 나온 것은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였으며 1885년 2월에 요코하마에서 1천부가 인쇄되었다.[18] 이것들은 개신교 교회 역사상 조선어 번역 성서의 최초의 사례이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언더우드는 일본 요코하마에 체류하던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웠으며, 미국에서 일본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는 선교사들은 이수정의 한국어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1883년 말 이수정은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자신의 조국인 조선의 문물이 개방되고 있어 이전과 같이 기독교를 박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상황을 알리고 조선에 오는 선교사를 돕겠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냄으로써 자신의 조국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미국 교회에 요청하였다. 이수정의 편지는 일반 기독교 주간지인
2. 5. 조선인 유학생 지도와 개화파 지원
이수정은 1885년 7월부터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을 모아 예배를 주관하고, 이들에게 일본의 선진 문물을 전수하였다.[14] 그는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 개화파 핵심 인물들에게 개신교 교리를 전파했다.[14]
이수정은 도쿄 체류 중 성경 연구회를 열고 예배를 드렸으며,[6] 1883년 5월 도쿄 신에이바시 교회를 회장으로 열린 제3회 전국기독교 신도 대친목회에 참가하여 조선어로 기도를 드리고, 닛포리 야외 친목회에서는 한문으로 요한복음 14장을 바탕으로 신앙고백을 했다.[7]
또한, 수신사 손병호의 후임으로 도쿄 외국어학교(현, 도쿄 외국어대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2년의 임기로 조선어를 가르쳤으며,[8] 재일 중 도쿄 외국어학교의 교과서, 학습 교과서를 포함하여, 한문 소설의 일본 복간에 참여하는 등 저작 활동도 하였다.[3]
2. 6. 귀국과 죽음
이수정은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조선 조정과 김옥균의 미움을 양쪽에서 받게 되었으며, 특히 김옥균이 보낸 자객에 의해 죽음의 위협에 놓이기도 하였다.[9] 1886년 귀국과 동시에 개화파를 적대시하던 당시 집권 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9]
3. 신앙 활동
1883년 5월, 도쿄 신에이바시 교회에서 열린 제3회 전국기독교 신도 대친목회에 참석하여 조선어로 기도하고, 요한복음 14장을 바탕으로 한시(漢詩) 형식의 신앙고백을 했다.[7] 이 신앙고백은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문으로 평가받는다.
이수정은 도쿄 체류 중 성경 연구회를 열고 예배를 드렸다.[6] 이는 훗날 1908년의 재일대한기독교회 설립으로 이어진다.[6]
4. 성서 번역 활동
5. 한국 선교에 끼친 영향
이러한 요청에 따라 1885년 미국 감리교의 H. G. 아펜젤러와 장로교의 H. G. 언더우드가 한국에 왔다.[14] 이수정은 두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고, 부활절부터 두 선교사는 인천에서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사용하여 개신교 전도를 시작했다. 이수정은 성경의 한국어 번역을 선교 사업의 기본으로 인식하고, 미국성서공회 총무 헨리 루미스(Henry Loomis)[17]와 조지 W. 녹스(George W. Knox)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한국어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14] 1884년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으로 《현토한한신약전서(懸吐韓漢新約全書)》를 발간했고, 1885년 2월에는 최초의 본격적인 한국어 번역본인 《신약마가전복음서언해》 1천부를 요코하마에서 인쇄했다.[18] 초기 선교사들은 이수정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그의 한국어 번역본 성경을 가지고 선교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14]
이수정은 1885년 7월부터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의 예배를 주관하고, 개화파 핵심 인물인 서재필,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에게 개신교 교리를 전파했다. 이처럼 이수정의 활동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6. 평가 및 기념
6. 1. 긍정적 평가
6. 2. 부정적 평가
6. 3. 기념
2015년, 이수정의 한국어 성경 출판 130주년을 기념하는 심포지엄이 도쿄에서 개최되었다.[10]
7.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李氏朝鮮時代に、宮中の文書を管理して、王の諮問に応じる期間。
[2]
문서
文章の校正を行う高級官僚
[3]
서적
[4]
서적
日本キリスト教歴史大事典
[5]
서적
[6]
서적
在日大韓基督教会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뉴스
日 韓超えた宣教史 李樹廷・聖書翻訳130周年記念シンポが東京で開催
http://クリスチャン新聞.com/[...]
[11]
서적
ルーミス
[12]
서적
[13]
웹사이트
"[네이버 지식백과] 이수정 [李樹廷]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terms.naver.[...]
[14]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5]
문서
현 일본기독교단시바교회
[16]
문서
[17]
Find a Grave
[18]
서적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상)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