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선 (1841년)
1. 개요
이재선은 1841년 흥선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나, 1881년 고종을 폐위하고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사된 인물이다. 그는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가 남양부사, 종정경 등을 역임했지만, 1881년 안기영 등이 고종을 폐하고 이재선을 추대하려 한 '이재선 추대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사약을 받고 사망했으며, 1907년 순종에 의해 완은군으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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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 재선(載先) |
|---|---|
| 자 | 성오(聖旿) |
| 본관 | 전주(全州) |
| 생년월일 | 1842년 11월 13일 (음력 1842년 10월 11일) |
| 사망일 | 1881년 12월 3일 (음력 1881년 10월 23일) |
| 묘소 |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 신원리(현 덕양구 신원동) 산 57-1번지 |
| 아버지 | 이구(李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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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 | 정부인 나주 박씨(貞夫人 羅州朴氏) |
| 부인 | 현부인 평산 신씨(縣夫人 平山申氏) |
| 양자 | 이종헌(李鍾憲) |
| 생부 | 이재긍(李載兢) |
| 초수 | 완은군(完恩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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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1년 사망 -
벤저민 디즈레일리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19세기 영국의 정치가이자 작가로, 보수당 지도자로서 두 차례 총리를 역임하며 제국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문학 작품도 남겼으며, 윌리엄 글래드스톤과의 경쟁 속에서 영국 보수주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881년 사망 -
메리 시콜
메리 시콜은 자메이카 출신으로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전통 의학 지식을 바탕으로 크림 전쟁에서 부상병들을 자비로 치료하며 '시콜 어머니'로 불린 간호사이자 사업가이며, 사후 20세기 후반부터 재조명되어 인종차별을 극복한 헌신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정경심
정경심은 자녀 입시 비리 혐의로 징역 4년형이 확정되어 복역 후 가석방된 대한민국의 영문학자이자 대학교수였다. -
서울특별시 출신 -
서형원
서형원은 환경운동연합 활동을 거쳐 과천시의회 의원 및 의장을 역임하고 녹색당 풀뿌리정치지원단장으로 활동한 환경운동가 출신 정치인이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이재선(李載先, 1841년 ~ 1881년 음력 10월 28일)은 조선의 왕족이자 무관으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서자이자 고종의 이복 형이다. 1881년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이 고종을 폐위하고 이재선을 추대하려던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사망했다.
1863년 신정왕후의 명으로 별군직에 임명되었고, 1864년 왕실 종친 대상 특별 과거 시험에 3등으로 급제했다. 이후 훈련원 주부, 남양감목관, 훈련원 첨정 등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1879년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874년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에도, 이재선은 계속 무관직을 역임했다. 같은 해 양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1875년 신병을 이유로 삭출되었다.
1881년, 안기영, 권정호 등 흥선대원군의 측근들은 고종을 몰아내고 이재선을 왕으로 세우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 이들은 토왜(討倭)를 명분으로 내걸고 영남 유림, 위정척사 운동가들과도 연대했다. 그러나 9월 3일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이풍래가 포도청에 밀고하고, 관련자들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재선은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고 심문을 받았다.
명성황후는 다른 고변자를 통해 이재선 추대 모의를 알게 되었고, 의금부, 삼사에서 계속 처형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결국 1881년 음력 10월 28일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1907년 7월 15일 고종에 의해 특별 사면되었고, 1907년 8월 17일 순종에 의해 완은군(完恩君)에 추봉되었다.
2.1. 어린 시절
李載先중국어은 1841년(헌종 7년) 혹은 1842년(헌종 8년) 8월 1일 흥선대원군의 소실이었던 계성월의 아들로, 흥선군의 사저인 한성부 안국방 운현궁에서 태어났다. 흥선군의 첫 아들이었지만 서자였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정실 부인이었던 여흥부대부인 민씨에게서는 적제인 이재면과 이명복(뒷날의 고종)이 태어났다. 한때 그의 정확한 출생년대가 알려지지 않아, 일각에서는 그가 1847년경쯤 출생한 것으로 보고, 이재면보다 늦게 태어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유년시절이나 초기의 행적은 미상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했다는 기록이 있다. 판관을 지낸 신석완의 딸이었던 평산 신씨 부인과 혼인하였다.
2.2. 관료 생활
1863년(철종 14) 12월 조대비의 명으로 별군직(別軍職)에 임명되고, 12월 15일 병조의 추천으로 특별히 부장(部將)에 임명되었다. 1864년(고종 1) 4월 12일 왕실 종친을 대상으로 한 특별 과거 시험에 3등으로 급제하였다.
1864년(고종 1) 5월 12일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었으며, 6월 21일 훈련원 첨정이 되었다. 12월 남양감목관(南陽監牧官)이 되었다. 1865년(고종 2) 첨지중추부사를 거쳐 오위장, 1866년 별군직을 역임했다. 그해 3월 22일 가례도감에 참여한 관원들을 포상할 때 그는 별군직으로 상현궁(上弦弓) 1정을 하사받았다. 1870년 3월 4일 남양부사로 부임했다가 4월 2일 근심으로 인한 담벽증(痰癖症)을 이조에 보고하여 4월 3일 면직되었다. 1872년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연령군파보, 은신군 파보(1900년), 한국학중앙연구소 소장에 따르면, 그는 훈련원 주부, 남양감목관, 훈련원첨정 등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품계는 종2품 참판에 이르렀다.
1873년 3월 27일 종정경(宗正卿)에 임명되었다. 1874년 여름 원자 척이 갑자기 수두증에 걸렸다가 쾌차하자 그해 6월 22일 내의원 도제조 이하 관원을 시상할 때 상현궁 1장을 하사받았다.
1873년(고종 10) 11월 섭정으로 있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친정 선언 이후 권좌에서 축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원군 축출과 상관없이, 무관직(武官職)에 계속 임명되었다. 1874년(고종 11) 11월 별군직을 지냈다가 부호군을 거쳐 그해 12월 28일 경기도 양주목사로 부임하였으나, 1875년 1월 신병으로 업무를 보기 힘들다는 이조의 탄핵을 받고 삭출되었다. 그해 2월 15일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2월 20일 별군직으로 전임되었다. 1879년 12월 21일 부호군으로 재직 중 가선대부로 승진하고, 같은 날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었다.
이재선은 어느 시점에 무과(武科)에 합격하여 무관이 되었다. 1864년 4월 12일 (고종 즉위 원년), 이재선은 왕족을 위한 특별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3등을 차지했다. 1864년 6월 21일에는 훈련원(訓鍊院)의 수장이 되었다.
1864년 이후, 그는 승진을 거듭하며 군직을 역임했다.
1874년 11월, 그의 아버지가 권력에서 물러났는데,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에 분노했다. 이재선은 또한 직업 군인(비교적 낮은 계급)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입장을 지지했을 수도 있다.
2.3. 이재선 추대 미수 사건
1881년(고종 18)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安驥永), 권정호(權鼎鎬) 등이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1881년 흥선대원군 퇴진에 불만을 품은 흥선대원군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은 군사 정변을 준비했고, 9월 13일 사람을 모아 거사를 준비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거사 목적을 토왜(討倭)로 정하였다. 이들은 영남의 유림인 강달선(姜達善) 등과도 연락, 접선했고 개화, 개방에 반대하는 위정척사 운동가들과도 교류하였다.
지방의 비경기권 노론 유림들도 개항에 반대하여 반란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성지역의 노론은 거의 협조하지 않았는데, 황현에 의하면 노론으로 참여한 사람은 북촌의 서얼 수명뿐이었다 한다.
그러나 9월 3일 거사에 참여하기로 한 광주산성(廣州山城)의 장교 이풍래(李豐來)가 포도청에 모의를 고변하였고, 광주산성 장교들이 대부분 의금부에 자수했다. 9월 6일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물은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와 그외 30여명의 관련자들이었다. 그밖에도 광주의 하급 서리들이 의금부에 자수하였다.
이재선의 역모 사건을 고변한 이들 중에는 그의 친매부 이윤용도 있었다 한다. 이윤용은 '운현궁이 안기영·권정호의 모의에 통하여 일이 이루어지면 대권이 다시 올 것이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데 불과하다고 하여 드디어 우물쭈물 모호하게 자식을 사지로 밀어 넣은 셈이 될 수 있으니, 이는 크게 인륜을 저버리고 도리에 어긋난 행위이다.'라고 생각하여 이때부터 운현궁을 배반하고 마음을 털어 양전(고종, 민비)에 고해 바쳤다. 9월 3일 그는 자수 형식으로 의금부에 출두하였다.
2.4. 최후
명성황후는 다른 고변자를 통해 누군가 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추대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안기영, 권정호 외 30여명은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거나 처형당했다. 이재선이 직접 사건에 개입했는지, 혹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 일로 이재선은 1881년 9월 3일 체포되어 의금부에 투옥되었으며, 9월 12일까지 명창록, 안기영 등과 대질심문을 받았다. 이철구 등은 끝까지 부인했지만 일부는 이재선을 추대하려 했다고 자백하였다. 한편 이때 체포를 피해 달아난 허욱 등은 나중에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폐하고 이준용을 옹립하려는 쿠데타에 가담한다.
거사에 가담했던 유도석은 그의 조부가 고종 즉위에 도움을 준 인물이라 하여 사형을 감하고 섬으로 유배를 갔다. 이재선 추대 관련 옥사는 그해 겨울까지도 계속되었다.
9월 3일 이후 양사와 홍문관 등으로부터 계속 탄핵을 받았으며, 백부 흥인군 이최응 역시 이재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곧 제주도 제주목에 유배되었다. 9월 12일에는 시임, 원임 대신들이 처벌을 주청하였다. 곧 위리안치되었으며 이후 의금부, 삼사에서 계속 처형을 청하는 상소가 올라왔다. 10월 26일부터는 승정원에서도 처형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881년(고종 18) 음력 10월 28일 사약을 받고 사사되었다. 제주도 제주목이 아닌 한성으로 압송되어 서대문 밖의 민가에서 사사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설에는 고종의 배려로 사사되지 않고 신분을 바꾼 채 생존했다고도 전해진다.
이재선이 직접 연루되었는지, 실제 참여가 어떠했는지는 처음에는 명확하지 않았다.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일어난 일들 중 일부는 불분명하다. 제주도에 수감되었다. 처형장은 한성의 서대문(돈의문)이었다고 전해진다.
1881년 10월 28일, 사약을 받고 경기도 양주에 묻혔다. 묘는 후에 서울 왕십리동으로 이장되었고, 1909년 서울 시흥동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묘의 상태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07년 10월 15일, 그의 조카인 순종 황제에 의해 완은군(完恩君)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이 시호는 즉시 내려지지 않았다.
2.5. 사후
묘는 처음에 경기도 양주군에 안장되었지만 첫 무덤자리 위치는 실전되었다. 1907년 당시 연령군파 족보에 의하면 그의 묘소는 양주에 있다고만 기록되었으나 정확한 위치는 누락되었으며, 뒤에 여러 번 이장되었다. 나중에 후손들에 의해 경기도 화도읍의 흥원묘역에 안치되었다.
1899년(광무 2) 9월 1일 그의 고조부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 장종(莊宗)이 되고 법전에 따라 4대 후손에게 9월 1일부터 9월 29일 사이에 군의 작위를 내렸지만, 이재선은 이때 아무 작위를 받지 못했다. 후에 1907년(광무 10) 7월 4일 일진회장 이용구(李容九)와 일진회에서 이재선, 이연응, 안기영 등의 신원을 청하는 공함(公函)을 내각에 올렸고, 이는 고종에게 전달되었다. 1907년(광무 10) 7월 15일 고종에 의해 특별 사면되어 죄안을 삭제, 죄명을 취소하고 사건은 불문율에 부치라는 명을 내렸으며, 그에게는 임명장을 돌려주었다.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한동안 그의 묘소는 그의 조카 의친왕 이강이 성묘하고 돌보았다.
순종 즉위 후 1907년(융희 1) 8월 17일 완은군(完恩君)에 추봉되었다. 이재선의 완은군 추봉 기사는 황성신문과 제국신문 기사에 짤막하게 언급되기도 하였다. 그의 부인 신씨는 한일 합방 이후에도 살아 있었다고 한다. 이재선의 사진이라고 전해진 사진 두 장이 있는데, 한 장은 관복 차림으로 탁자에 한 팔을 기대고 앉은 사진이고, 다른 사진 한장은 그의 두 아들로 추정되는 소년이 함께 찍힌 사진이며 한 소년은 이재선이 직접 안고 있고, 다른 소년은 서 있다. 그러나 친왕(親王)으로 추봉되지는 못하였다.
그의 묘소는 서울 동대문밖 왕십리에 이장되었다가 묘지 관리가 되지 않아 1909년(융희 3) 12월 7일 다시 흥친왕과 이준용에 의해 경기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로 이장되었다. 이를 두고 황성신문은 어찌 풍수배(풍수지리를 보는 사람)의 말에 현혹되었느냐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의 묘소가 시흥군 동면 시흥리(현. 서울특별시 금천구 시흥동)로 이장되면서 부인 평산신씨도 시흥군 동면 시흥리 2통 3호 근처로 이주하였다. 몇 차례 묘소가 이전되었다가 후손들에 의해 경기도 화도읍 흥원묘역으로 안치되었다.
군부인 평산신씨는 1922년 무렵까지도 생존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이왕직 자료와 순종실록 부록에 의하면 군부인 평산신씨의 팔순을 기념하여 일금 150원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군부인 평산신씨는 종친인 이관용을 양자로 입적한다.
1881년 10월 28일, 그는 사약을 받고 경기도 양주에 묻혔다. 그의 묘는 후에 서울 왕십리동으로 이장되었고, 1909년 서울 시흥동으로 이장되었다. 현재 묘의 상태는 알려져 있지 않다.
1907년 10월 15일, 그의 반(半) 조카인 순종 황제에 의해 그는 완은군(完恩君)으로 추증되었다. 그러나 이 시호는 즉시 내려지지 않았다.
3. 가족 관계
* 할아버지: 남연군(1788년 ~ 1836년)
* 할머니: 군부인 여흥 민씨(1788년 ~ 1831년), 민경혁의 딸
* 아버지: 흥선대원군(1820년 12월 21일 ~ 1898년 2월 22일)
* 적모: 여흥부대부인 민씨
이복 동생: 흥친왕(1845년 ~ 1912년)
이복 동생: 고종
* 생모: 계성월(? ~ ?)
* 서모: 추선(또는 초선, ? ~ 1885년)
* 서모: 서씨(? ~ 1914년)
* 부인: 군부인 평산 신씨(1842년 6월 20일 ~ ?), 판관 신석완의 딸
아들: 이주용(? ~ ?)
딸: 이창화(1867년 ~ 1937년) - 평산 신형균(申珩均)에게 출가
사위: 신형균(1870년 ~ 1940년)
딸: 미상
** 양자: 자작 이관용(? ~ ?)
* 장인: 신석완
* 매형: 이윤용(1854년 ~ 1939년)
* 처남: 신형균(1870년 ~ 1940년)
4. 누명 논란
황현에 의하면 이재선의 옥사는 왕후가 뒤에서 얽어서 꾸민 일이라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김기전(金起田)은 명성황후가 그를 역모로 몰아서 죽였다고 주장했다. 1881년 또는 그 이전, 흥선대원군의 측근인 안기영(安驥永)과 권정호(權鼎鎬)는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것에 불만을 품고, 고종을 폐위시키고 이재선을 옹립하기 위한 군사 쿠데타를 준비했다. 1881년 9월 3일, 이들은 사람들을 모아 반란을 준비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반란의 목적을 반일(反日) 봉기인 토왜(討倭)로 묘사했다. 이들은 영남의 유학자인 강달선(姜達善)과 연락했으며, 자유주의 개혁과 외국 세력의 개방에 반대하는 척사파(斥邪派) 운동가들과 교류했다. 쿠데타 가담자들은 보수적인 위정척사파였다.
1881년 9월 3일, 반란에 참여하기로 한 광주성의 장교 이풍래(李豐來)는 이 음모를 당국에 보고했고, 대부분의 성(城) 장교들이 당국에 투항했다. 관련된 사람들은 9월 6일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안기영, 권정호, 이철구 및 연루된 약 30명이 포함되었다. 광주의 하급 관리들도 투항했다.
이윤용(이재선의 매형) 또한 고종과 왕비에게 자수했다.
왕비는 또 다른 출처로부터 이 음모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안기영, 권정호, 그리고 체포된 다른 사람들은 심문을 받고 처형되었다.
6. 이재선을 연기한 배우들
* 1972년 MBC 드라마 《대원군》 - 배우 미상
* 1982년 KBS 1TV 드라마 《풍운》 - 장용
* 1990년 MBC 드라마 《대원군》, 조선왕조 오백년 - 김희라
* 1995년 KBS2 드라마 《찬란한 여명》 - 박현
* 2001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 - 이우석
7. 관련 자료
* 신봉승, 《실록대하소설24:왕조의 비극》 (금성출판사, 2007)
* 신명호, 《황후삼국지》 (다산초당, 2010)
* http://contents.history.go.kr/mfront/ta/view.do?levelId=ta_p42r_0100_0020_0040 왕비 민씨와 대원군
* https://jmagazine.joins.com/monthly/view/279118 월산대군이‘빈 배’탄 이유 오직 살기 위해서였다 중앙일보 Joins-i magazine 2009.06호(2009.06.01) 182호
* http://kor.theasian.asia/archives/133824 김국헌 칼럼‘군수비리’를 보면서 임오군란이 떠오르는 까닭 아시아엔 2015.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