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회 (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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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국의회는 신성 로마 제국의 주요 기관으로, 제국의 역할과 기능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프랑크 왕국 시기에는 부족 공작들의 협의회로 시작하여, 1489년 공식적으로 '콜레기아'에 따라 선제후, 제후, 제국 자유 도시로 구성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황제의 권한이 약화되었고, 제국의회는 가톨릭과 개신교로 나뉘어 문제를 논의하는 분할 투표 방식을 채택했다. 제국의회는 황제가 소집하거나 7명의 선제후들이 요구할 수 있었으며, 1806년 신성 로마 제국 해체와 함께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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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회 (신성 로마 제국) - [의회]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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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
라틴어 | Dieta Imperii 또는 Comitium Imperiale |
독일어 | Reichstag (라이히스탁) |
개요 | |
유형 | 신성 로마 제국의 자문 기관 |
설립 | 803년 |
해체 | 1806년 |
계승 | 라인 연방의 Diet of the Confederation |
추가 정보 | |
참고 문헌 | Gagliardo, John G. Reich and Nation. The Holy Roman Empire as Idea and Reality, 1763–18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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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는 초기에는 정해진 시기나 장소가 없이, 프랑크 왕국을 형성했던 옛 게르만족 부족 공작들의 회의에서 기원했다. 이들은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모였으며, 지도자가 주요 인사들의 지지에 의존했던 고대 게르만족의 법률을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중세 초기와 후기에는 왕이나 황제의 결정에 따라 필요할 때 ''호프타그''(궁정일)라는 이름으로 황궁(카이저팔츠)에서 열렸지만, 아직 제도화되지는 않았다.
헤르만 비슬리케누스의 19세기 그림
다음은 제국의회의 주요 사건들이다.
- 777년 파더보른: 샤를마뉴의 색슨 전쟁 중 호프타그가 열려 정복된 색슨족 등 여러 부족에 관한 법률을 결정했다. (왕립 프랑크 연대기 기록)
- 803년: 샤를마뉴가 작센 법전 최종본을 발표했다.
- 919년 프리츨라어: 제국의회에서 공작들이 하인리히 1세를 최초의 독일의 군주로 선출하여, 프랑크족과 색슨족 간의 오랜 갈등을 끝내고 독일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 1158년 론칼리아 회의: 이탈리아 왕국 정복 후, 제국 헌법을 크게 바꾸는 4가지 법률을 확정하여 지방 공작에게 유리하고 중앙 권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 1356년 금인칙서: 공작들이 각자 영토에서 넓은 자치권을 갖는 "제후권" 개념을 강화하고, 황제 선출권을 가진 선제후를 7명으로 제한했다. 교황은 선출 과정에 관여하지 않고, 선제후들이 뽑은 사람을 승인하고 대관식을 하는 역할만 했다.
- 15세기 후반: 제국의회가 아직 공식 기관이 되지 못하고, 공작과 제후들이 황제 궁정에 불규칙하게 모이는 ''호프타그''가 이어졌다.
- 1489년: 제국의회가 ''라이히스타크''로 불리기 시작하고, 공식적으로 ''콜레기아''(계파)로 나뉘었다.
- 1489년 프랑크푸르트 제국 회의:
회의 | 의장 | 의결권 |
---|---|---|
선제후 회의(Kurfürstenrat) | 마인츠 대주교 | 7표 |
제후 회의(Fürstenrat) | 오스트리아 대공(합스부르크 가문) | 100표 |
도시 회의(Städtetag) | 개최 도시 | 2표 |
- 1495년 제국의회: 제국 개혁을 시도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황제가 제국의회 결정을 따르도록 강제되어 황제의 권한이 크게 줄었다.
-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제국 개혁을 제정했다.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마르틴 루터를 추방했다. (보름스 칙령 참조)
-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및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슈파이어 항의 참조).
- 뉘른베르크 제국의회.
- 1663년: 레겐스부르크 상설 제국의회가 도입되어 제국의회가 고정된 장소에 영구히 소집되었다.
- 1507년 4월 27일: 콘스탄츠 제국의회[3]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성을 인정하고 제국 상사 법원을 설립했다.
2. 1. 기원과 초기 발전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는 그 역할과 기능이 제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했다. 특히 제국에 속한 영토들이 제국의 권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면서 변화가 두드러졌다. 초기에는 의회에 정해진 시간이나 장소가 없었다. 제국의회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프랑크 왕국을 구성했던 옛 게르만족 부족들의 공작들이 모여 협의하던 것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협의회는 지도자들이 주요 인사들의 지지에 의존했던 고대 게르만족의 법률을 바탕으로 했을 것이다.예를 들어, 프랑크 왕족 연대기에 따르면 색슨 전쟁 중 샤를마뉴 재위 기간인 777년 파더보른에서 의회가 소집되어 항복한 색슨족 등 여러 부족에 관한 법률을 확정했다. 803년 샤를마뉴는 렉스 삭소눔의 최종본을 발표했다.[3]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의회에서 공작들은 색슨족 출신 하인리히 1세를 최초의 독일의 군주로 선출하여 프랑크족과 색슨족 간의 오랜 갈등을 해소하고 독일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이탈리아 왕국 정복 후, 1158년 론칼리아 회의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을 크게 바꾼 네 가지 법률을 확정했다. 이는 지방 공작들에게 유리하고 중앙 권력은 약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356년 금인칙서는 공작들이 각자 영토에서 폭넓은 자치권을 갖는 "제후권"(Landesherrschaft) 개념을 강화하고, 황제 선출 권한을 가진 선제후의 수를 7명으로 제한했다. 교황은 선출 과정에 관여하지 않았고, 선제후들이 선출한 인물을 승인하고 대관식을 거행하는 역할만 했다.

15세기까지 제국의회는 공식적인 기관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공작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궁정에 비정기적으로 소집되었으며, 이러한 모임은 호프타크(독일어로 궁정을 뜻하는 Hof에서 유래)라고 불렸다. 1489년에 이르러서야 제국의회가 ''Reichstag''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공식적으로 ''콜레기아''(collegia, 계파)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선제후와 그 외 공작 및 제후들로 구성된 두 개의 계파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 자유령을 가진 제국령 도시들과 과두 정치 체제의 독립 공화국 통치자들이 황제에게만 복종하면서 제3 계파로 인정받았다.
1507년 4월 27일에 열린 콘스탄츠 제국의회[3]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성을 인정하고 제국의 최고 법원인 제국 상사 법원을 설립했다.
2. 2. 중세 시대의 변화
제국의회의 정확한 역할과 기능은 신성 로마 제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수 세기에 걸쳐 변화했다. 제국의 봉신들과 분리된 영토들은 제국의 권력으로부터 자신들만의 힘을 점점 더 많이 얻었다. 처음에는 의회의 고정된 시간이나 장소도 없었다. 중대한 결정들을 내렸던 과거 프랑크 왕국을 형성한 옛 게르만족 부족들의 공작들의 협의회로서 시작하여, 지도자들이 그들이 이끄는 주요한 사람들의 지지에 의존했던 고대 게르만족들의 법률을 기초로 했을 것이다.[3]
프랑크 왕족 연대기에 따르면 색슨 전쟁 동안 샤를마뉴 황제 집권기에 의회가 777년 파더보른에서 소집되어 굴복한 색슨족과 다른 부족들에 관한 법률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803년 프랑크 황제는 렉스 삭소눔의 마지막으로 검토된 법률을 공표했다.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소집된 의회에서 공작들은 색슨족 출신 하인리히 1세를 최초의 독일 군주로 선출하였으며, 프랑크족과 색슨족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를 극복하고 독일 국가 설립의 토대를 쌓았다. 이탈리아 왕국을 정복한 후, 1158년 론칼리아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 (성문화 된적은 없지만)을 대대적으로 수정한 네 가지 법률이 완료되었고, 이것은 지방 공작들에게 유리하고 중앙 권력의 점진적 쇠퇴의 시작을 나타냈다. 1356년의 금인칙서에서 각자 보유한 영토들에 대한 공작들의 넓은 자율적인 통치권인 "제후권" (Landesherrschaft)이라는 개념이 강화되었고 또한 황제 선출자들의 숫자를 일곱으로 제한하였다. 교황은 선출 과정에 포함된 적은 없었고 선제후들이 선정한 자에 대한 비준과 대관식에만 참여하였다.
그러나 15세기까지 제국의회는 기관으로서 실제로 공식화되지 않았다. 대신 공작들과 다른 제후들은 황제의 궁정에서 불규칙하게 소집되었으며, 이 집회는 호프타크 (독일어로 궁정을 뜻하는 Hof에서 유래)로 보통 불렸다. 1489년에 ''Reichstag''라고 제국의회가 시작되었을때, 공식적으로 ''콜레기아'' (collegia, 계파)에 따라 나뉘었다. 처음에는 선제후들과 그외 다른 공작들, 제후들로 이뤄진 두 개의 계파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제국 자유령을 가지게 된 제국령 도시들과 과두 정치 체제의 독립 공화국들의 통치자들이 황제만을 섬기면서 제3 계파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2. 3. 근대 초기의 발전과 제국 개혁
15세기 후반까지 제국의회는 아직 정식 기관으로 확립되지 않았다. 대신 공작들과 다른 제후들은 황제의 궁정에서 비정기적으로 모였다. 이러한 모임은 보통 ''호프타크''(독일어 Hof "궁정"에서 유래)라고 불렸다. 1489년이 되어서야 제국의회가 ''라이히스타크''(Reichstag)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공식적으로 ''콜레기아''(collegia, "대학")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선제후들과 그 외 다른 공작 및 제후들로 구성된 두 개의 콜레기아가 있었다. 나중에 제국령 도시들은 제국 자유령을 가지게 되어 황제에게만 복종하는 과두 정치 체제의 독립 공화국이 되면서 제3의 세력으로 인정받았다.
1495년 제국의회를 시작으로 제국을 개혁하고 점진적인 해체를 막으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큰 효과는 없었다. 반대로, 이 과정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가속화되었는데, 이 조약은 황제가 제국의회의 모든 결정을 공식적으로 수용하도록 구속하여, 그에게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권한을 박탈했다. 그때부터 1806년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제국은 사실상 독립 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가장 유명한 제국의회는 제국 개혁이 이루어진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와 마르틴 루터가 추방된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보름스 칙령 참조),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및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슈파이어 항의 참조), 그리고 여러 뉘른베르크 제국의회였다. 1663년 레겐스부르크 상설 제국의회가 도입되면서 제국의회는 고정된 장소에 영구적으로 소집되었다.
1507년 4월 27일에 개회된 콘스탄츠 제국의회[3]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성을 인정하고 제국의 최고 법원인 제국 상사 법원을 설립했다.
2. 4. 주요 제국의회
프랑크 왕국을 형성한 옛 게르만족 부족들의 공작 회의에서 기원한 제국의회는 초기에는 고정된 시간이나 장소가 없었다. 중세 초기와 후기에 이러한 의회는 아직 제도화되지 않았지만, 왕이나 황제의 결정에 따라 필요에 따라 개최되었다. 당시에는 제국의회라고 불리지 않고 ''호프타그''(궁정일)라고 불렸으며, 보통 황궁(카이저팔츠)에서 열렸다.- 777년: 샤를마뉴 통치하 작센 전쟁 중 파더보른에서 호프타그가 열려 정복된 작센족과 다른 부족들에 대한 법률이 결정됨 (왕립 프랑크 연대기 기록).
- 803년: 샤를마뉴가 프랑크족 황제로 즉위하여 작센 법전 최종판 발표.
- 919년: 프리츨라 제국의회에서 공작들이 최초의 독일 왕으로 작센족 출신 사냥꾼 하인리히를 선출. 이는 프랑크족과 작센족 사이의 오랜 경쟁을 극복하고 독일 왕국의 기초를 다지는 계기가 됨.
- 1158년: 이탈리아 정복 후 론칼리아 제국의회에서 제국 헌법(형식적으로 기록되지는 않음)을 변경하는 4가지 법률 확정. 이는 지방 공작에게 유리하고 중앙 권력의 쇠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음.
- 1356년 금인칙서: "영토 통치"(''Landesherrschaft'') 개념, 즉 공작들이 각 영토에 대한 광범위한 독립 통치를 확립하고 선제후의 수를 7명으로 제한. 교황은 선거 과정에 관여하지 않고 선제후가 선택한 사람의 비준 및 대관 과정에만 관여.
- 15세기 후반: 제국의회가 제도적으로 공식화되지 않은 채, 공작과 제후들이 황제 궁정에 불규칙하게 소집. 이러한 회의는 ''호프타그''라고 불림.
- 1489년: 제국의회가 ''라이히스타크''라고 불리기 시작하고 공식적으로 ''콜레기아''(대학)로 나뉨.
- 1495년 제국의회: 제국 개혁 시도는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함.
-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황제가 제국의회 결정을 수용하도록 의무화되어 황제의 권한이 크게 약화됨.
-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제국 개혁 제정.
-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마르틴 루터 추방 (보름스 칙령 참조).
-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및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슈파이어 항의 참조).
- 뉘른베르크 제국의회.
- 1663년: 레겐스부르크 상설 제국의회 도입으로 제국의회가 고정된 장소에 영구 소집.
- 1507년 4월 27일: 콘스탄츠 제국의회[3]에서 신성 로마 제국 통일성 인정 및 제국 상사 법원 설립.
- 1489년 프랑크푸르트 제국 회의:
1489년 프랑크푸르트 제국 회의의 의결권은 다음과 같았다.
회의 | 의장 | 의결권 |
---|---|---|
선제후 회의(Kurfürstenrat) | 마인츠 대주교 | 7표 |
제후 회의(Fürstenrat) | 오스트리아 대공(합스부르크 가문) | 100표 |
도시 회의(Städtetag) | 개최 도시 | 2표 |
1489년부터 제국의회는 세 개의 신분회로 구성되었다. 제국의회에 참여할 수 있는 신분을 제국 등족이라고 한다.
3. 구성
제국의회는 초기에는 고정된 시간이나 장소가 없었다. 프랑크 왕국을 형성한 옛 게르만족 부족들의 공작들의 협의회에서 시작되었으며, 지도자들이 주요 인사들의 지지에 의존했던 고대 게르만족들의 법률을 기초로 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프랑크 왕족 연대기에 따르면 색슨 전쟁 동안 샤를마뉴 황제 집권기에 의회가 777년 파더보른에서 소집되어 색슨족과 다른 부족들에 관한 법률을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3] 803년 프랑크 황제는 렉스 삭소눔의 마지막으로 검토된 법률을 공표했다.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소집된 의회에서 공작들은 색슨족 출신 하인리히 1세를 최초의 독일의 군주로 선출하였으며, 프랑크족과 색슨족 사이의 오랜 적대 관계를 극복하고 독일 국가 설립의 토대를 쌓았다. 이탈리아 왕국을 정복한 후, 1158년 론칼리아 회의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을 대대적으로 수정한 네 가지 법률이 완료되었고, 이것은 지방 공작들에게 유리하고 중앙 권력의 점진적 쇠퇴의 시작을 나타냈다. 1356년의 금인칙서에서 각자 보유한 영토들에 대한 공작들의 넓은 자율적인 통치권인 "제후권" (Landesherrschaft)이라는 개념이 강화되었고 또한 황제 선출자들의 숫자를 일곱으로 제한하였다. 교황은 선출 과정에 포함된 적은 없었고 선제후들이 선정한 자에 대한 비준과 대관식에만 참여하였다.[3]
그러나 15세기까지 제국의회는 기관으로서 실제로 공식화되지 않았다. 대신 공작들과 다른 제후들은 황제의 궁정에서 불규칙하게 소집되었으며, 이 집회는 호프타크 (독일어로 궁정을 뜻하는 Hof에서 유래)로 보통 불렸다. ''Reichstag''라고 제국의회가 1489년에 시작되었을때, 공식적으로 ''콜레기아'' (collegia, 계파)에 따라 나뉘었다. 처음에는 선제후들과 그외 다른 공작들, 제후들로 이뤄진 두 개의 계파가 있었다. 시간이 흘러 제국 자유령을 가지게 된 제국령 도시들과 과두 정치 체제의 독립 공화국들의 통치자들이 황제만을 섬기면서. 제3 계파로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1495년 제국의회를 시작으로 신성 로마 제국 개혁과 해체를 이루려는 시도를 했으나,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 과정은 의회에서 내린 모든 결정들을 황제가 공식적으로 따라야만하는 하게 된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만 서둘러 이루어졌고, 실제로도 황제가 지닌 몇 가지 남은 권한들을 빼앗아 갔다. 이때부터 1806년에 해체될까지, 신성 로마 제국은 더 이상 독립 국가들의 거대한 집합체 이상이 아니게 되었다.
3. 1. 선제후
선제후단(''Kurfürstenrat'')은 독일 왕국의 대재상 지위를 가진 마인츠 대주교가 이끌었다. 1356년 금인칙서에 따라 7명의 선제후가 선정되었다.[3]
선제후들의 숫자는 1623년에 바이에른 공작이 팔츠 백작의 선거권을 가져가면서 여덟 명으로 늘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 (Causa Palatina)에 따라 팔츠 백작은 대고직 자리를 포함해서 선제후 계파로부터 분리된 선거권을 얻었다. 1692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선제후국 (하노버)이 9년 전쟁 기간에 대기수(大旗手)로서 9번째 선제후가 되었다.[3]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팔츠와 바이에른의 선거권이 통합되었고, 1779년 테셴 조약으로 공인되었다. 1803년 독일 합병은 쾰른, 마인츠, 트리어 대주교령의 해체가 동반되었고 독일 재상은 프랑스 제1공화국에게 상실한 영토에 대한 보상으로 신설 국가 레겐스부르크 공국을 받았다. 그 결과, 4개의 교회 제후들을 세속 선제후로 전환시켰다:[3]
그러나 이 변화는 3년 뒤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2세의 퇴위로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며 효과가 미미하였다.[3]
3. 2. 제후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 내 제후 회의(Reichsfürstenrat 또는 Fürstenbank)는 제국 백작, 제국 직속 영주, 제후-주교, 제국 수도원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제후 회의는 선제후의 지배에 맞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고자 했으며, 구성원 간의 불화가 잦았다.
제후 의회는 교회 의석과 세속 의석으로 나뉘었다. 세속 의석은 오스트리아 대공과 부르고뉴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공작(1556년부터 합스부르크 스페인 소유)이 이끌었으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은 세속 의석의 지도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교회 제후들의 지도를 받았다. 첫 번째 교회 제후는 "게르마니아의 수석" 지위를 가진 잘츠부르크 대주교였으며, 베장송 제후-대주교는 1678년 네이메헌 조약까지 공식 구성원이었으나 제국의회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교회 의석에는 튜튼 기사단의 총장 및 '도이치마이스터', 하이테르스하임의 구호 기사단 수도사 국가 대수도원장도 포함되었다. 뤼베크 제후-주교령은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 이후 개신교로 개종했음에도 1586년부터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 출신 교구 행정관이 통치하며 교회 구성원으로 남았다. 오스나브뤼크 제후-주교령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가톨릭교회 주교와 하노버 가문 출신 루터교 주교가 번갈아 통치했다.
제후 회의 구성원은 단독 투표(Virilstimme) 또는 집단 투표(Kuriatstimme)를 행사했다. 1582년부터 제후들의 단독 투표는 직할 영지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이는 한 통치자가 여러 영토를 개인 연합으로 소유했을 때 투표권이 누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백작과 영주들은 집단 투표만 가능하여 베터라우 제국 백작 협회와 같은 별도 회의를 형성하고 슈바벤 관구, 프랑코니아 관구, 하부 라인-베스트팔리아 관구 내에서 결집했다. 교회 의석에서도 제국 수도원장들이 슈바벤 또는 라인 회의에 합류했다.
1803년 독일 제국령 몰수로 다수의 교회 영토가 세속 영지로 병합되었으나, 제후 회의 개혁은 1806년 제국 해체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3. 3. 제국령 도시
제국령 도시 계파는 1489년부터 포함되어, 정치 기구로서 제국의회를 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그럼에도 처음에는 제국령 도시들이 가진 집단 선거권은 1582년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의 제국휴회까지 중요도가 낮았다.[3] 제국령 도시 계파는 의회가 열리는 장소의 도시 의회가 이끌었고, 1663년 영구 의회가 실행되면서, 의회 장소는 레겐스부르크로 옮겨졌다.
제국령 도시들은 라인 계층과 슈바벤 계층으로 나뉘었다.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레겐스부르크가 슈바벤 도시들을 이끌었고, 쾰른, 아헨, 프랑크푸르트가 라인 도시들을 이끌었다.
4. 기능과 운영
제국의회의 역할과 기능은 신성 로마 제국 자체와 마찬가지로 수 세기에 걸쳐 변화했으며, 영방과 개별 영토는 제국의 권력을 희생하면서 자체적인 업무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처음에는 제국의회에 고정된 시간이나 장소가 없었다. 이는 프랑크 왕국을 형성한 옛 게르만족 부족들의 공작 회의에서 시작되었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각 지도자는 주요 인사들의 지지에 의존하는 옛 게르만법에 기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세 초기와 후기에 이러한 의회는 아직 제도화되지 않았지만, 왕이나 황제의 결정에 따라 필요에 따라 개최되었다. 아직 제국의회라고 불리지는 않았지만, ''호프타크''(궁정일)라고 불렸다.
919년 프리츨라어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공작들은 최초의 독일 왕을 선출했는데, 그는 작센족인 사냥꾼 하인리히였으며, 이는 프랑크족과 작센족 사이의 오랜 경쟁을 극복하고 독일 왕국의 기초를 다졌다. 이탈리아 정복 후, 1158년 론칼리아 회의는 제국의 (형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헌법을 상당히 변경할 4가지 법률을 확정했으며, 이는 지방 공작에게 유리한 중앙 권력의 꾸준한 쇠퇴의 시작을 알렸다. 1356년 금인칙서는 "영토 통치"(''Landesherrschaft'')의 개념, 즉 공작들이 각 영토에 대한 광범위한 독립 통치를 굳혔으며, 선제후의 수를 7명으로 제한했다. 교황은 선제후가 선택한 사람의 비준 및 대관 과정에만 관여했으며, 선거 과정에는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
15세기 후반까지 제국의회는 제도적으로 공식화되지 않았다. 대신 공작과 다른 제후들이 황제의 궁정에 불규칙하게 소집되었다. 1489년에야 제국의회가 ''라이히스타크''라고 불렸고, 공식적으로 ''콜레기아''( "대학")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선제후와 나머지 공작 및 제후들로 구성되었다. 나중에는 제국 직속 도시가 있는 자유 제국 도시가 지방 통치자에게만 종속되고 황제 자신에게만 복종하는 과두 공화국이 되었으며, 제3자로 인정받았다.
1495년 제국의회부터 시작하여 제국을 개혁하고 점진적인 해체를 종식시키려는 여러 시도는 큰 효과가 없었다. 반대로 이 과정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가속화되었는데, 이 조약은 황제가 제국의회가 내린 모든 결정을 수용하도록 공식적으로 의무화하여, 그에게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권한을 박탈했다. 그때부터 1806년 제국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제국은 광범위하게 독립적인 국가들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가장 유명한 제국의회는 제국 개혁이 제정된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 마르틴 루터가 추방된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 (보름스 칙령 참조), 슈파이어 제국의회 (1526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및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 - 슈파이어 항의 참조), 그리고 뉘른베르크의 여러 제국의회(뉘른베르크 제국의회)가 있었다. 1663년 레겐스부르크 상설 제국의회가 도입되면서 제국의회는 고정된 장소에 영구적으로 소집되었다.
1507년 4월 27일에 개회된 콘스탄츠 제국의회[3]는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성을 인정하고 제국의 최고 법원인 제국 상사 법원을 설립했다.
제국의회는 과세 승인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가 제안하는 과세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30년 전쟁 이후 제국의회는 통치 기구로서의 권능을 잃고 제후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만 남게 되었다.
4. 1. 의사 결정 방식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 종교 문제는 더 이상 추밀원의 과반수 투표로 결정될 수 없었다. 대신, 제국의회는 천주교와 개신교로 나뉘어 별도로 문제를 논의한 다음 서로 합의를 보았는데, 이 절차를 ''분할 투표''라고 불렀다.[4]천주교 단체, 즉 ''코르푸스 카톨리코룸''은 마인츠 대주교 선제후가 수장이었다.[5]
개신교 단체, 즉 ''코르푸스 에반젤리코룸''은 작센 선제후가 수장이었다. 개신교 단체의 회의에서는 작센이 각 토론 주제를 소개한 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하노버가 발언하고, 나머지 국가들이 규모 순서대로 발언했다. 모든 국가가 발언을 마치면 작센이 투표를 집계하고 합의를 발표했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는 폴란드 왕이 되기 위해 1697년 천주교로 개종했지만, 선제후령 자체는 공식적으로 개신교를 유지했으며 개신교 단체의 수장직을 유지했다. 선제후의 아들 또한 천주교로 개종하자, 프로이센과 하노버는 1717년에서 1720년까지 수장직을 차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작센 선제후는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개신교 단체의 수장을 맡았다.[5]
4. 2. 주요 의제
제국의회의 주요 의제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으며, 제국 내 권력 구조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게르만족 관습법에 기반한 법률 제정, 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국의 통합,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적 문제 등이 주요 의제였다.
예를 들어, 샤를마뉴 시대에는 작센 전쟁 이후 파더보른에서 의회가 소집되어 색슨족 관련 법률을 확정했다.[3] 919년 프리츨라어에서는 하인리히 1세를 독일의 군주로 선출하여 독일 국가 설립의 토대를 마련했다. 1158년 론칼리아 회의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을 대대적으로 수정한 네 가지 법률이 확정되었다.
15세기 후반부터는 제국 개혁 시도가 주요 의제로 떠올랐으나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황제의 권한이 크게 약화되면서 제국의회는 실질적인 권한을 잃게 되었다.
종교 문제 또한 중요한 의제였다. 마르틴 루터를 이단으로 규정한 1521년 보름스 회의[3], 슈파이어 항의를 불러일으킨 1529년 슈파이어 의회[3] 등이 대표적이다.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는 종교 문제를 분리하여 논의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4] 가톨릭 단체는 마인츠 대주교 선제후가,[5] 개신교 단체는 작센 선제후가 이끌었다.[5]
1489년 프랑크푸르트 제국 회의에서는 선제후 회의, 제후 회의, 도시 회의로 구성되었다. 선제후 회의 의장은 마인츠 대주교였으며 7표, 제후 회의 의장은 오스트리아 대공 (합스부르크 가문)이 100표, 도시 회의 의장은 개최 도시가 돌아가며 2표의 의결권을 가졌다.
제국의회는 과세 승인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제후가 제안하는 과세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30년 전쟁 이후 제국의회는 통치 기구로서의 권능을 잃고 제후들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역할만 남게 되었다.
4. 3. 소집 절차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의회는 처음에는 정해진 시간이나 장소가 없었다. 이는 옛 게르만족 부족들의 공작 회의에서 시작되었으며, 지도자들이 주요 인사들의 지지에 의존했던 고대 게르만족의 법률에 기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샤를마뉴 황제 시기 777년 파더보른에서 의회가 소집되어 색슨족 관련 법률을 확정했다.[3] 919년 프리츨라어 의회에서는 하인리히 1세가 독일의 군주로 선출되어 독일 국가 설립의 토대를 쌓았다.1158년 론칼리아 회의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헌법을 수정하는 네 가지 법률이 완료되었고, 이는 중앙 권력의 쇠퇴를 야기했다. 1356년 금인칙서에서는 제후들의 자치권("제후권")이 강화되었고 황제 선출자들의 숫자가 7명으로 제한되었다. 교황은 선제후들이 선정한 자에 대한 비준과 대관식에만 참여하였다.
15세기까지 제국의회는 공식화되지 않았고, 공작들과 제후들은 황제의 궁정에서 불규칙하게 소집되었다. 이러한 집회는 호프타크로 불렸다. 1489년부터 ''Reichstag'' (제국의회)라고 불리기 시작했고, 공식적으로 ''콜레기아'' (collegia, 계파)에 따라 나뉘었다. 처음에는 선제후들과 그 외 공작, 제후들로 구성된 두 개의 계파가 있었고, 이후 제국자유도시들이 제3 계파로 받아들여졌다.
1495년 제국의회를 시작으로 신성 로마 제국 개혁 시도가 있었으나 효과적이지 못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황제가 의회의 모든 결정을 따르도록 강제되면서, 제국은 독립 국가들의 집합체로 변모했다.
황제 레오폴트 1세는 7명의 선제후와 다음과 같은 선거 협정을 맺었다.
"제국 의회 소집권은 황제에게 있지만, 황제는 미리 그 장소와 기간에 대해 문서 등으로 7명의 선제후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또한 7명의 선제후는 황제에게 제국 의회 개최를 요구할 수 있다. (중략) 신분 제후에 대한 의회 소집 영장은 명령조가 아닌 초청장 형식을 취하며, 의회 개최 6개월 전에 발송해야 한다."[7]
5. 제국의회의 종말과 유산
200년 동안 제위를 독점한 합스부르크 가문(오스트리아 대공)은 황제의 직책을 본령의 수입만으로 감당할 수 있는 대제후였다.[1] 합스부르크 가문은 금인칙서에 의해 영방 국가로 변한 신성 로마 제국을 재통합하고, 황제권의 재확립을 위해 분주하게 활동하게 된다.[1]
참조
[1]
서적
Les relations entre la France et le Saint-Empire au XVIIe siècle
Honoré Champion
2001
[2]
서적
Reich and Nation. The Holy Roman Empire as Idea and Reality, 1763–1806
Indiana University Press
1980
[3]
서적
History of the Reformation in Germany
[4]
웹사이트
Peace Treaties of Westphalia (October 14/24, 1648)
http://germanhistory[...]
[5]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Reconsidered
Berghahn
[6]
웹사이트
Hóman-Szegfű : Magyar Történet
http://www.elib.hu/0[...]
[7]
서적
プーフェンドルフ『ドイツ帝国憲法』
[8]
웹인용
Peace Treaties of Westphalia (October 14/24, 1648)
http://germanhistory[...]
[9]
서적
The Holy Roman Empire, Reconsidered
Berg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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