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불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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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철불흉노는 흉노의 분파로, 오르도스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했다. 남흉노 우현왕 거비의 후예들이 조조의 신임을 받아 한나라 유씨 성을 사용했으며, 310년 탁발부에 패하여 오르도스 지역으로 이동하여 전조, 후조, 전진 등과 협력했다. 이후 탁발부에 여러 차례 패배하며 전진에 종속되기도 했으나, 376년 탁발부 토벌에 공을 세워 오르도스로 복귀했다. 386년 탁발부가 북위를 건국한 후 391년 유위진이 북위에게 살해당하며 멸망했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은 후진에 의탁하여 북위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했다.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후, 남흉노의 일파인 철불부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했다. 철불부의 선조는 삼국 시대 흉노 선우였던 어부라의 조카뻘인 우현왕 거비이다. 거비는 조조의 신임을 얻어 남흉노를 다스렸으며, 한나라 황실의 성씨인 유씨(劉氏)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철불부는 남흉노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으로, 그 기원은 272년 남흉노 부사(部帥) 유맹이 암살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유맹의 아들 유부륜은 선비족 탁발부로 망명하여 독고부의 시조가 되었고, 남은 무리는 거비의 아들인 유고승원(劉誥升爰)이 통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철불부의 시작이다.
2. 역사
272년(서진 태시 8년), 남흉노의 부사(部帥) 유맹이 부하에게 암살당하자 그의 아들 유부륜은 선비 탁발부로 망명하여 독고부를 이루었다. 남은 무리는 거비의 아들인 고승원이 이끌면서 철불부가 시작되었다.
309년, 고승원이 사망하자 아들 유호가 뒤를 이었다. 유호는 부족의 이름을 '철불(鐵弗)'이라 칭했는데, 이는 아버지는 흉노인이고 어머니는 선비인이라는 뜻이다. 처음에는 탁발부에 복속했으나, 310년 백부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함께 거병했다. 이들은 병주자사 유곤이 다스리던 신흥과 안문을 공격했다. 유곤은 탁발부에 지원을 요청했고, 탁발부의 대인(부족장) 탁발의로는 조카 탁발울률에게 기병 2만을 주어 파견했다. 탁발부 군대는 백부와 철불부를 격파하고 그 근거지를 함락시켰다. 유호는 서쪽 삭방으로 도망쳐 한(후의 전조)의 유총에게 귀순했다. 유총은 유호를 동족으로 대우하여 누번공(樓煩公)에 봉하고 안북장군·감선비제군사·정령중랑장으로 삼았다.
318년, 유호는 삭방을 근거지로 삼아 대국(탁발부)의 서쪽 지역을 침공했으나, 대왕 탁발울률에게 크게 패하고 장성 밖으로 도주했다. 이때 유호의 종제(사촌 동생) 유로고는 부족을 이끌고 대국에 귀순하여 탁발울률의 딸과 혼인했다.
341년 10월, 유호는 다시 대국의 서쪽 국경을 침공했지만, 대왕 탁발십익건이 보낸 군대에게 크게 패배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호는 사망했고, 아들 유무환이 뒤를 이었다. 유무환은 철불부 대인이 된 후 대국에 귀순하여 탁발십익건의 딸과 혼인했다. 유무환은 대국에 복속하는 한편, 후조의 석호와도 비밀리에 관계를 맺고 평북장군·좌현왕·정령선우의 직위를 받았다.
356년 1월, 유무환이 사망하자 동생 유알두가 대인의 자리를 이었다. 유알두는 대국에 속해 있었지만 몰래 다른 마음을 품었다. 그러나 358년 대국의 이간계에 휘말려 조카인 유무환의 아들 유실물기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알두는 두려움에 황하를 건너 동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강을 건너던 중 얼음이 깨져 무리의 절반을 잃었고, 남은 절반은 유실물기에게 귀순했다. 결국 유알두는 대국에 귀순했고, 탁발십익건은 이전과 같이 그를 대우했다. 유실물기가 철불부 대인이 되었으나, 359년 4월에 사망하고 동생 유위진이 뒤를 이었다.
유위진은 359년 8월 대국에 아들을 보내 조공했으며, 360년 7월에는 대왕 탁발십익건의 딸과 혼인했다. 동시에 전진의 부견과도 관계를 맺어 좌현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진의 백성을 약탈하여 부견에게 노비로 바치려다 질책을 받고 관계가 틀어졌다. 361년에는 부견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전진의 장수 등강에게 사로잡히기도 했다. 부견은 유위진을 하양공(夏陽公)으로 삼고 그의 부족을 다스리게 했다.
이후 유위진은 대국과 전진 사이에서 복속과 배신을 반복했다. 365년에는 대국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해 도주했고, 367년에는 다시 대국의 공격을 받아 부견에게 망명했다. 부견은 유위진을 삭방으로 돌려보내고 군사를 주둔시켜 감시했다. 374년 탁발십익건이 다시 유위진을 공격하자 남쪽으로 도망쳐 375년 부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376년, 부견은 유위진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사마 부락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대국을 공격하게 했다. 대국 군대는 패배했고, 탁발십익건이 서자 탁발실군에게 살해당하자 부견은 대국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은 독고부의 유고인에게, 서쪽은 유위진에게 맡겼다. 이로써 유위진은 서선우(西單于)가 되었다. 그러나 유고인이 부견에게 더 높은 직위인 광무장군으로 임명되자 이에 분노하여 전진에 반기를 들고 유고인을 공격했다. 하지만 유고인에게 패배하여 처자와 부족민을 빼앗겼다.
386년 10월, 북위의 북부 대인인 숙손보락 등 13인 및 제오환(여러 방면의 잡다한 사람들이 와서 귀부한 자의 뜻)[1]이 유위진에게 망명했다. 또한 북위 탁발규의 숙부 탁발굴돌이 망명해 오자 유위진은 그를 살해했다. 유위진은 서연의 모용영으로부터 지절·도독하서제군사·대장군·삭주목에 임명되었고, 후진의 요장에 의해 지절·도독북삭잡이제군사·대장군·대선우·하서왕·유주목에 임명되었다.
387년, 유위진은 후연의 모용수와 통호하여 말 3천 필을 모용수에게 보내려 했다. 이를 위해 모용수는 모용량을 파견하여 유위진을 맞이하게 했으나, 독고부의 유현에게 습격당해 말을 빼앗기고 말았다.
390년 6월, 유위진은 아들 유직력제를 파견하여 하란부에 침공하여 포위했으나, 탁발규의 원군에 의해 패주했다.
391년 10월, 유위진은 아들 유직력제를 파견하여 북위의 남부에 침공했다. 유직력제의 병력은 8~9만이었으나, 탁발규의 병력은 5~6천에 불과했음에도 철기산 남쪽에서 크게 격파당하여 유직력제는 단기로 도주했다. 북위군이 승리의 기세를 몰아 유위진의 거성인 열발성(悅拔城)에 접근하자, 유위진 부자는 도주했고, 백염지(白鹽池)에서 유직력제가 사로잡혔으며, 단기로 도주한 유위진도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철불부는 일시적으로 멸망했다. 유위진의 삼남 유발발은 설간부(薛干部)의 태실복에게 망명하여 후일을 도모했고, 훗날 하나라를 건국하게 된다.이름 재위 기간 비고 거비 남흉노의 우현왕 고승원 272년 - 309년 거비의 아들, 철불부 시작 유호 309년 - 341년 이후 고승원의 아들, 철불 명칭 사용 유무환 341년 이후 - 356년 유호의 아들 유알두 356년 - 358년 유호의 아들, 유무환의 동생 유실물기 358년 - 359년 유무환의 아들 유위진 359년 - 391년 유무환의 삼남, 유실물기의 동생 유발발 391년 이후 유위진의 삼남, 하나라 건국 (407년)
3. 역대 군주
4. 흉노와의 관계
309년 유고승원의 아들 유호가 뒤를 이으면서 부족의 명칭을 '''철불'''(鐵弗)이라 칭했다. 이는 아버지는 흉노인, 어머니는 선비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유호는 310년 한(漢, 훗날 전조)의 유총에게 귀순했는데, 유총은 유호를 같은 흉노 동족으로 대우하며 누번공(婁煩公)에 봉하고 안북장군 등의 관직을 내렸다. 이는 철불부가 다른 흉노계 국가와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철불부는 탁발부(훗날 북위)와 대립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려 했으며, 전조, 후조, 전진, 후진, 서연 등 여러 국가와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유위진 대에는 전진의 부견에게 복속되었다가 다시 반기를 들기도 했으며, 서연의 모용영이나 후진의 요장으로부터 관직과 작위를 받기도 했다. 또한, 386년에는 북위 내부의 여러 부족장들과 탁발규의 숙부 탁발굴돌 등이 유위진에게 망명하는 등[1], 당시 북방 민족들 간의 관계에서 철불부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4. 1. 흉노 제국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남흉노의 일파인 철불부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다. 철불부의 기원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의 조카뻘이자 우현왕이었던 거비는 조조의 신임을 얻어 남흉노 지역을 다스렸으며, 이때부터 한나라 왕족의 성씨인 유씨(劉氏)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310년, 거비의 손자인 유호(劉虎)는 탁발부(탁발선비)에게 원래 근거지였던 병주 일대를 빼앗기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이주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후 유호는 전조, 후조, 전진과 차례로 협력하며 세력을 유지하고자 했다. 유호의 손자인 유위진(劉衛辰) 시대에는 다시 탁발부에게 패배하여 오르도스를 잃고 전진의 영토 안으로 이동해야 했다.
376년, 유위진은 전진이 탁발부를 공격할 때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그 대가로 다시 오르도스 지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그는 탁발부와 유연까지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386년, 탁발부가 다시 강성해져 대나라(북위의 전신)를 재건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391년, 북위 군대의 침공으로 유위진이 살해당하면서 철불부는 일시적으로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 유위진의 아들인 유발발은 오르도스 서남쪽의 고평(高平)으로 피신했지만, 북위의 계속되는 추격을 피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결국 유발발은 후진에 의탁하게 되었고, 후진은 북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발발을 다시 오르도스 지역에 배치하였다.
4. 2. 흉노의 분열과 재통일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후, 남흉노의 일파인 철불부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철불부의 선조는 삼국 시대 흉노 선우였던 어부라의 조카뻘인 우현왕 거비로 알려져 있다. 거비는 조조의 신임을 얻어 남흉노를 다스렸으며, 이때부터 한나라의 성인 유씨(劉氏)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310년, 거비의 손자인 유호(劉虎)는 탁발부(탁발선비)에게 원래 근거지였던 병주 일대를 빼앗기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이주했다. 이후 유호는 전조, 후조, 전진 등 주변 강대국들과 협력하며 세력을 유지하려 했다. 유호의 손자인 유위진 대에 이르러 철불부는 다시 탁발부에게 패배하여 오르도스를 잃고 전진의 영토 안으로 옮겨가야 했다.
376년, 유위진은 전진이 탁발부를 토벌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다. 그 대가로 다시 오르도스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탁발부와 유연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386년, 탁발부가 다시 힘을 키워 대나라(훗날 북위)를 재건했고, 391년에는 북위 군대의 공격으로 유위진이 살해당하면서 철불부는 일시적으로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 유위진의 아들인 유발발은 오르도스 서남쪽의 고평까지 도망쳤지만, 북위의 계속되는 추격을 피해 여러 곳을 떠돌았다. 결국 유발발은 후진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후진은 북위의 남침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발발을 다시 오르도스 지역에 배치하였다.
4. 3. 오부흉노와 전조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이후, 남흉노의 한 갈래인 철불부는 오르도스 지역에서 세력을 키웠다. 철불부의 선조는 삼국 시대 흉노의 선우였던 어부라의 조카뻘인 우현왕 거비로 알려져 있다. 거비는 조조의 신임을 얻어 남흉노를 다스렸으며, 한나라 황실의 성씨인 유씨(劉氏)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310년, 거비의 손자인 유호(劉虎)는 탁발부(탁발선비)에게 본거지였던 병주 일대를 빼앗기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이동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이후 유호는 전조, 후조, 전진과 차례로 협력 관계를 맺었다. 유호의 손자인 유위진(劉衛辰) 대에 이르러 다시 탁발부에게 패배하여 오르도스를 잃고 전진의 영토 안으로 이주해야 했다. 376년, 유위진은 전진이 탁발부를 토벌하는 전쟁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고, 그 대가로 오르도스 지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탁발부와 유연을 복속시키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386년, 탁발부가 다시 강성해져 대나라(북위의 전신)를 세우면서 상황이 변했다. 391년, 북위 군대의 공격으로 유위진이 살해당하면서 철불부는 일시적으로 멸망 상태에 이르렀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은 오르도스 서남쪽의 고평(高平)으로 피신했으나, 북위의 지속적인 토벌을 피해 여러 곳을 떠돌아다니다 결국 후진에 의탁하게 되었다. 후진은 북위의 남하를 견제할 목적으로 유발발을 다시 오르도스 지역에 배치하였다.
'''오부흉노 선우 계보'''
이름 | 재위 기간 | 비고 |
---|---|---|
거비(去卑) | 미상 | 남흉노의 우현왕 |
유고승원(劉誥升爰) | 272년 ~ 309년 | 거비의 아들 |
유호(劉虎) | 309년? ~ 341년? | 유고승원의 아들 |
유무환(劉務桓) | 341년 ~ 356년 | 유호의 아들 |
유연두(劉閼頭) 또는 유연루두(劉閼陋頭) | 356년 ~ 358년 | 유호의 아들, 유무환의 동생 |
유실물기(劉悉勿祈) | 358년 ~ 359년 | 유무환의 아들 |
유위진(劉衛辰) | 359년 ~ 391년 | 유무환의 3남, 유실물기의 동생 |
유발발(劉勃勃) | 391년 ~ 407년 | 유위진의 3남. 하나라 건국 (혁련발발) |
5. 대외 관계
철불부는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된 후 오르도스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주변의 여러 국가 및 부족과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 철불부의 선조인 우현왕 거비는 삼국 시대 조조의 신임을 얻어 남흉노를 관할했으며, 이는 초기 철불부가 중원 세력과 관계를 맺는 기반이 되었다.
310년 거비의 손자 유호는 탁발부에게 본거지를 빼앗기고 오르도스로 이주한 뒤, 전조, 후조, 전진 등 당시 화북의 주요 세력들과 차례로 협력 관계를 맺었다. 특히 전조의 유총은 유호를 동족으로 대우하며 지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호는 대나라(탁발부)와는 초기부터 대립과 충돌을 반복하며 여러 차례 패배하였다. 유호의 아들 유무환 대에는 대나라에 귀순하여 혼인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동시에 후조와도 관계를 유지하는 등 복속과 독립 시도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쳤다.
유호의 손자 유위진 시대에 철불부의 대외 관계는 더욱 역동적으로 변모했다. 유위진은 탁발부에게 패배하여 세력을 잃고 전진의 영향권 아래로 들어가기도 했으나, 376년에는 오히려 전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탁발부를 공격하고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연 등 다른 부족을 복속시키기도 했다. 또한 유위진은 서연의 모용영이나 후진의 요장으로부터 관직을 받는 등, 여러 세력과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지위를 확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전진의 부견과는 협력과 반목을 반복했으며, 독고부와도 경쟁 관계에 있었다.
386년 탁발규가 북위를 건국하면서 철불부는 다시 강력한 적을 맞이하게 되었다. 유위진은 북위와 적대 관계를 이어가다 391년 북위와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패배하고 살해당하면서 철불부는 큰 타격을 입었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은 북위의 추격을 피해 후진으로 망명하였고, 후진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해 유발발을 지원하여 오르도스 지역에 배치하였다. 이는 훗날 유발발이 하나라를 건국하는 배경이 되었다.
5. 1. 주요 전투
309년, 유호가 아버지 고승원의 뒤를 이어 철불부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부족의 명칭을 '철불'(鐵弗)이라 칭했는데, 이는 아버지가 흉노이고 어머니가 선비 사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처음에는 탁발부에 복속했으나, 310년 백부가 군사를 일으키자 이에 호응하여 함께 거병했다. 이들은 병주자사 유곤이 주둔하던 신흥과 안문 두 군을 공격했다. 유곤은 탁발부에 도움을 요청했고, 탁발부의 지도자 탁발의로는 조카 탁발울률에게 2만 기병을 주어 파견했다. 탁발부 군대는 백부와 철불부를 격파하고 그들의 진영을 함락시켰다. 유호는 서쪽 삭방으로 달아나 한(후의 전조)의 유총에게 귀순했다. 유총은 유호를 동족으로 대우하여 누번공(婁煩公)에 봉하고 안북장군(安北將軍), 감선비제군사(監鮮卑諸軍事), 정령중랑장(丁零中郞將)으로 삼았다.318년, 유호는 삭방을 근거지로 삼아 대국(탁발부)의 서쪽 지역을 침공했다. 그러나 대왕 탁발울률에게 크게 패배하고 만리장성 밖으로 도망쳤다. 이때 유호의 종제(사촌 동생)인 유로고는 부족을 이끌고 대국에 항복하여 탁발울률의 딸과 혼인했다.
341년 10월, 유호는 다시 대국의 서쪽 국경을 침공했다. 대왕 탁발십익건이 군대를 보내 토벌하여 유호의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호는 사망했고, 아들 유무환이 뒤를 이었다. 유무환은 철불부 지도자가 되자 대국에 귀순하여 탁발십익건의 딸과 혼인했다. 이후 유무환은 흩어진 부족민들을 모아 세력을 키웠고, 대국에 복속하는 한편 후조의 석호와도 몰래 관계를 맺어 평북장군(平北將軍), 좌현왕(左賢王), 정령선우(丁零單于)의 직위를 받았다.
356년 1월, 유무환이 죽자 동생 유알두가 뒤를 이었다. 당시 철불부는 대국에 속해 있었으나, 유알두는 몰래 반란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해 2월, 대왕 탁발십익건이 서쪽 지역을 순시하며 황하까지 와서 유알두를 설득하자, 그는 다시 복종하기로 했다.
358년, 대국의 이간계로 인해 유무환의 아들 유실물기 등이 유알두에게 반기를 들었다. 두려움을 느낀 유알두는 동쪽으로 도망치려 겨울에 얼어붙은 황하를 건넜다. 일행의 절반쯤 건넜을 때 강 얼음이 깨져 많은 이들이 익사했고, 살아남은 나머지 절반은 유실물기에게 귀순했다. 이로써 유실물기가 철불부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고, 궁지에 몰린 유알두는 대국에 귀순했다. 탁발십익건은 유알두를 이전과 같이 대우해주었다.
359년 4월, 유실물기는 지도자가 된 지 1년 만에 사망했고, 동생 유위진이 뒤를 이었다. 그해 8월, 유위진은 아들을 대국에 보내 조공했다.
360년 7월, 유위진은 대왕 탁발십익건의 딸과 혼인했다. 동시에 전진의 부견과도 비밀리에 관계를 맺어 좌현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후 전진의 국경 지역 백성들을 약탈하여 노비로 부견에게 바쳤다가, 부견에게 질책을 받고 백성들을 돌려보내게 되면서 부견과 사이가 틀어졌다. 이로 인해 유위진은 대국과만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361년, 유위진은 다시 대국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그는 부견을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으나, 부견이 보낸 건절장군(建節將軍) 등강에게 패배하고 사로잡혔다. 부견은 유위진을 하양공(夏陽公)으로 삼고 부족 통솔을 계속하게 했다.
365년 1월, 유위진은 대국에 반란을 일으키고 동쪽으로 황하를 건넜다. 곧바로 대왕 탁발십익건에게 토벌당하자 유위진은 도주했다.
367년 10월, 유위진은 다시 대국 군대의 토벌을 받고 전진의 부견에게 도망쳤다. 부견은 유위진을 삭방으로 돌려보내고 군대를 파견하여 그를 보호하게 했다.
374년, 탁발십익건은 세 번째로 유위진을 정벌했다. 유위진은 남쪽으로 도주했고, 이듬해(375년) 부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376년, 유위진의 요청을 받은 부견은 대사마(大司馬) 부락에게 20만 대군을 주어 주융, 장호, 등강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국의 남쪽 국경을 침공하게 했다. 대국 군대는 크게 패배했고, 탁발십익건이 서자(庶子) 탁발실군에게 살해당하자, 부견은 대국을 동서로 나누어 동쪽은 독고부의 유고인에게, 서쪽은 유위진에게 통치하도록 했다. 이로써 유위진은 서선우(西單于)가 되었다.
얼마 후, 유고인이 부견에 의해 광무장군(廣武將軍)으로 임명되자, 유위진은 자신의 지위가 유고인보다 낮아진 것에 분노하여 부견이 임명한 오원군태수를 살해하고 전진에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유고인의 서쪽 영토를 공격했으나, 이에 유고인이 반격하여 유위진을 격파하고 그의 처자와 부족민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386년 (등국 원년) 10월, 북위의 북부 대인(大人) 숙손보락 등 13명과 여러 부족 출신 귀순자들[1]이 유위진에게 망명했다. 또한, 위왕 탁발규의 숙부 탁발굴돌이 유위진에게 도망쳐 오자, 유위진은 그를 살해했다. 유위진은 서연의 모용영으로부터 지절(持節), 도독하서제군사(都督河西諸軍事), 대장군(大將軍), 삭주목(朔州牧)에 임명되었고, 후진의 요장으로부터는 지절, 도독북삭잡이제군사(都督北朔雜夷諸軍事), 대장군, 대선우(大單于), 하서왕(河西王), 유주목(幽州牧)에 임명되었다.
387년, 유위진은 후연의 모용수와 통호하여 말 3천 필을 보내려 했고, 모용수는 이를 맞이하기 위해 모용량을 파견했으나, 독고부의 유현에게 습격당해 말을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390년 6월, 유위진은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하란부를 침공하여 포위했으나, 북위의 탁발규가 보낸 원군에 의해 패배하고 도주했다.
391년 10월, 유위진은 다시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북위의 남쪽 지역을 침공했다. 유직력제의 병력은 8~9만에 달했지만, 5~6천 명에 불과했던 탁발규의 군대에게 철기산(鐵岐山) 남쪽에서 크게 패배했다. 유직력제는 혼자 겨우 도망쳤다. 북위군이 승세를 몰아 유위진의 거점인 열발성(悅拔城)으로 진격하자, 유위진 부자는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백염지(白鹽池)에서 유직력제가 사로잡혔고, 혼자 도망치던 유위진도 결국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철불부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유위진의 셋째 아들 유발발(후의 혁련발발)은 설간부(薛干部)의 수장 태실복(太悉伏)에게 망명했다.
5. 2. 북위와의 관계
철불부는 오르도스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며 북위의 전신인 탁발부(탁발선비)와 지속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초기 철불부의 수장 유호는 310년 탁발의로가 이끄는 탁발부 군대에 패배하여 근거지였던 병주 일대를 상실하고 오르도스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유호는 318년과 341년에 탁발부가 세운 대나라를 공격했으나, 각각 탁발울률과 탁발십익건에게 연이어 패배하였다.
유호의 아들 유무환 대에는 대나라에 귀순하여 탁발십익건의 딸과 혼인하는 등 일시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도 했으나, 동시에 후조와 비밀리에 통하는 등 양면적인 외교를 펼쳤다. 유무환 사후 그의 동생 유알두가 뒤를 이었으나, 대나라의 이간계와 유무환의 아들 유실물기 등과의 내부 분열로 인해 결국 대나라에 다시 귀순하였다.
유실물기의 뒤를 이은 동생 유위진 역시 초기에는 대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며 360년 탁발십익건의 딸과 혼인하고 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365년 대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하고 전진으로 도주하는 등 관계는 불안정했다. 367년과 374년에도 대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였다.
376년, 유위진은 전진의 부견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전진 군대의 힘을 빌려 대나라를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대나라는 큰 타격을 입고 사실상 멸망하였으며, 탁발십익건은 서자 탁발실군에게 살해되었다. 부견은 대나라 영토를 동서로 나누어 서부를 유위진에게 통치하게 함으로써 유위진은 서선우가 되었다. 이는 철불부가 탁발부에 대해 거둔 결정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386년 탁발규가 흩어진 탁발부를 규합하여 대나라를 재건하고 이후 북위를 세우면서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유위진은 북위 내부의 망명자들을 받아들이고, 심지어 탁발규의 숙부인 탁발굴돌이 망명해오자 그를 살해하는 등 북위와 극심한 적대 관계를 형성했다.
390년 유위진은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북위의 동맹 세력인 하란부를 공격했으나 탁발규의 구원군에 패배했다. 391년 10월, 유위진은 다시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8~9만 명의 대규모 병력으로 북위 남부를 침공했으나, 5~6천 명의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탁발규가 이끄는 북위군에 철기산 남쪽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북위군은 승세를 타고 철불부의 본거지인 열발성까지 진격했고, 유위진은 도주하던 중 부하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유위진 시대의 철불부는 사실상 멸망하였다.
유위진의 삼남 유발발은 북위의 추격을 피해 후진으로 망명했으며, 후진은 북위를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유발발을 오르도스 지역에 배치하였다. 이는 훗날 하나라 건국의 기반이 된다.
5. 3. 전진, 후진, 서연과의 관계
철불부의 선조 유호는 전조, 후조에 이어 전진과 협력 관계를 맺었다.유호의 손자인 유위진 대에 이르러 철불부와 전진의 관계는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유위진은 탁발부에 패배한 후 오르도스를 상실하고 전진의 영내로 이주하였다. 360년 7월, 유위진은 전진의 부견과 밀통하여 좌현왕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전진의 변경 백성을 약탈하여 부견에게 헌납했다가 질책을 받고 관계가 틀어졌다. 이로 인해 유위진은 전진과 반목하고 대국(탁발부)과만 통교하게 되었다.
361년, 유위진은 부견을 치려다 오히려 전진의 장수 등강에게 토벌당해 사로잡혔다. 부견은 유위진을 하양공으로 삼고 그의 부락을 다시 통솔하게 했다. 그러나 365년과 367년에 유위진은 다시 대국(탁발부)에 모반하고 전진에 토벌당했으며, 결국 부견에게 도망쳐 의탁했다. 부견은 유위진을 삭방으로 돌려보내고 군사를 파견하여 지키게 했다.
375년, 유위진은 다시 탁발부의 공격을 받자 부견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376년, 부견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대사마 부락이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대국(탁발부)을 정벌하고, 대국 영토를 동서로 나누어 서부를 유위진에게 통치하도록 하여 서선우로 삼았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독고부의 유고인이 부견에게 더 높은 관직(광무장군)을 받자 유위진은 이에 분노하여 부견의 오원군태수를 살해하고 전진에 반기를 들었다. 유위진은 유고인의 서부를 공격했으나 오히려 유고인에게 격파당했다.
한편, 유위진은 서연의 모용영으로부터 지절·도독하서제군사·대장군·삭주목에 임명되었고, 후진의 요장으로부터는 지절·도독북삭잡이제군사·대장군·대선우·하서왕·유주목에 임명되는 등 여러 세력과 관계를 맺으며 독자적인 세력 구축을 시도했다.
391년, 유위진이 북위에 의해 살해되자 철불부는 일시적으로 멸망하였다. 유위진의 아들 유발발은 후진으로 도망쳐 몸을 의탁했다. 후진은 북위의 침입을 막기 위한 전략적 목적으로 유발발을 오르도스에 배치하였다. 이는 훗날 유발발이 하나라를 건국하는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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