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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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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황후는 고려 행주 출신으로, 원나라 순제의 후궁이자 황후였다. 1333년 원나라에 공녀로 보내져 순제의 총애를 받았으며, 다나슈리의 폐위 이후 부인이 되었다.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황태자 책봉에 영향을 미쳤고, 1365년 정식 황후가 되었다. 기철의 횡포로 고려 공민왕과 갈등을 겪었으며, 원나라가 멸망한 후 북원으로 피신하여 황태후가 되었으나, 사망 시기와 장소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현재 경기도 연천에 묘가 있으며, 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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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기황후
한글 표기기황후
한자 표기奇皇后
몽골어 (키릴 문자) 표기Өлзей Хутуг
몽골어 (로마자) 표기Ölǰei Khutugh (올제이 쿠투크)
시호보현숙성황후 (普顯淑聖皇后)
생애
출생1315년, 고양, 경기도, 고려
사망1369년 이후 (1370년 추정)
가문행주 기씨
아버지기자오
어머니익산 이씨 부인 이씨
종교대승 불교
혼인과 자녀
배우자토곤 테무르
자녀빌리그트 칸 아유르시리다라
칭호
원나라 황후 (제1황후)1365년 - 1368년 9월 10일
북원 황후1368년 - 1369년
원나라 황후 (제2황후)1340년 - 1365년

2. 생애

행주 기씨 기자오의 딸로 태어나 고려공녀원나라에 보내졌다. 비록 원치 않는 길이었으나, 기황후는 이를 기회로 삼아 원 혜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다.[16] 첫 황후 다나슈리의 질투와 핍박 속에서도[16] 원 혜종의 신임을 얻어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권력 기반을 다졌다. 1340년 마침내 제2황후에 책봉되었으며,[16] 고려 출신 인물들을 중심으로 자정원이라는 정치 세력을 형성하여 원나라 조정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16]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고 1353년 그를 황태자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했으며,[16] 1365년 제1황후 바얀 후투그 카툰이 사망하자 원나라의 정식 황후(제1황후)가 되었다.[13] 그러나 황후가 된 후 오빠 기철 등이 고려에서 권문세족으로 행세하며 전횡을 일삼자, 공민왕은 1356년 기철 일족을 숙청했다.[23] 이에 기황후는 고려에 복수하고자 덕흥군을 내세워 고려를 침공했으나 최영, 이성계 등에게 격퇴당했다.[23] 1368년 명나라 군대에 의해 대도가 함락되자 원 혜종, 아들과 함께 북쪽 잉창으로 피신하여 북원 시대를 맞았다. 1370년 원 혜종 사후 황태후가 되었으나, 이후의 정확한 행적과 사망 시기는 불분명하다. 경기도 연천군에 그녀의 묘로 전해지는 고분이 남아 있다.[20]

2. 1. 출생과 가계

본관은 행주이다. 아버지는 사후 영안왕[15]과 경왕에 추증된 고려 문신 기자오(奇子敖)이고, 어머니는 익산 이씨(益山 李氏)로 전서(典書) 이행검(李行儉)의 딸이다. 증조모 장흥 임씨(長興 任氏)는 고려 인종의 왕비 공예왕후의 친정 조카인 임경순(任景恂)의 딸이었다.

  • '''증조모 가계'''
  • * 임원후(任元厚): 공예왕후의 아버지
  • ** 임유(任濡): 공예왕후의 동생

임경순(任景恂): 임유의 아들
* 장흥 임씨(長興 任氏): 임경순의 딸, 기황후의 증조모

오빠로는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 등이 있었다. 진천군지명지(진천문화원 외, 1997년)의 이월면 노원리 옥녀봉 설명에 따르면 이름은 옥녀(玉女)라고 한다.

2. 2. 고려 공녀 차출과 원나라 후궁

원나라는 해마다 고려공녀를 요구했는데, 기황후 역시 공녀로 차출되었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목은 이색이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묘사할 정도로 비참했다.[16] 그러나 기황후는 침착하게 부모를 위로하며, 원치 않는 길이었지만 이를 새로운 인생의 기회로 삼기로 결심했다. 당시 세계 제국이었던 원나라에서 더 큰 기회를 찾으려 한 것이다.[16]

공녀원나라의 수도 대도 황궁에 도착한 기황후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부처에게 기도하며 지냈다. 이때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격인 내시 고용보(高龍普)를 만나게 되었다. 고용보는 기황후가 황제 원 혜종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그녀를 혜종에게 다과를 올리는 궁녀로 추천했다.[16]

대의 대도


1333년(충숙왕 복위 2) 고용보의 추천으로 황태자궁에 배치된 기황후는 원 혜종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게 되었다. 원 명종의 장자였던 토곤 테무르(혜종)는 황제 즉위 전인 1330년 7월부터 약 1년 5개월간 원 황실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해 고려의 대청도에 유배된 경험이 있었다. 이 어려운 시절의 기억은 그가 고려 출신인 기황후에게 호감을 느끼는 배경이 되었고,[16] 이는 기황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기황후는 혜종을 통해 자신의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16]

그러나 혜종의 첫 번째 황후였던 킵차크족 출신의 다나슈리는 기황후를 심하게 질투하여 채찍으로 때리고 인두로 지지는 등 학대했다.[16] 그럼에도 기황후는 좌절하지 않고 원 혜종을 움직여 다나슈리 세력과 맞섰다. 1335년, 다나슈리의 친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원 혜종은 승상 바얀과 손잡고 다나슈리의 오빠 텡기스 등을 역모 혐의로 몰아 제거했다. 다나슈리의 아버지 엘 테무르는 과거 혜종의 아버지 원 명종을 독살했던 인물이기도 했다.[16] 텡기스 등이 처형될 위기에 처하자 다나슈리는 혜종에게 오빠들을 살려달라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다나슈리 역시 역모에 가담했다는 죄목으로 폐위되어 유배를 가던 중 승상 바얀에 의해 독살당했다.[16]

다나슈리가 죽은 후, 1337년 콘기라트부 출신의 바얀 후투그가 새로운 황후로 책봉되었고, 기씨는 제2황후가 되었다.

2. 3. 황후 책봉과 권력 장악

이전 황후 다나슈리가 1335년 친정의 반란 연루로 폐위된 후, 혜종은 기씨를 새로운 황후로 맞이하려 했으나, 원나라의 실권자였던 승상 메르키트 바얀과 몽골 귀족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에 기씨는 원 혜종에게 메르키트 바얀 세력이 자신을 핍박한다고 호소하며 그의 제거를 설득했다.[16] 혜종은 자신의 스승 사라판 등과 손잡고 바얀을 탄핵할 기회를 엿보았다.

1340년 2월, 혜종의 의중을 파악한 바얀의 조카 토크토아가 오히려 혜종에게 협력할 것을 약속하며 바얀 탄핵에 앞장섰다. 결국 토크토아, 사라판 등 여러 신하의 탄핵으로 메르키트 바얀은 실각했고, 남쪽 광둥 성으로 유배를 가던 중 사망했다.

메르키트 바얀 세력이 제거된 직후인 1340년 4월, 기씨는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 책봉과 함께 기씨 가문은 높은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기황후 책봉 후 추증 및 봉작된 가계[23]
인물관계작위/봉작비고
기자오(奇子敖)아버지영안왕(榮安王) → 경왕(敬王, 추봉)원 혜종이 직접 묘비명 작성
기관(奇琯)할아버지왕(王)시호 미상
기홍영(奇洪潁)증조부왕(王)시호 미상
이씨(李氏)어머니영안왕 대부인(大夫人)
기철오빠덕성부원군원나라 관직 및 고려 정승 겸임
기원남동생덕양군



기황후는 황후가 된 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고, 이곳에 고려 출신 환관, 유민, 유학생 등을 대거 등용했다.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아[16] 자정원을 중심으로 강력한 정치 세력, 이른바 '자정원당'을 형성했다. 이 세력에는 고려인뿐만 아니라 몽골 출신 고위 관료들도 참여했다.[16] 기황후는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칭기즈 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치는 등 원나라의 관습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황실 내 영향력을 키워나갔고,[16]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는 사재를 털어 죽을 쑤어 나누어주고 아사자들의 장례를 치러주는 등 민심을 얻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16]

1338년 혹은 1339년에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았다. 1340년 6월 부다시리 카툰엘 테구스가 제거되면서 아유시리다라는 유력한 후계자로 떠올랐다. 기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 등을 통해 혜종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압박하여, 마침내 1353년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아가 박불화를 군사 부문의 요직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임명하여 군사권까지 장악했다.[16] 아유시리다라 역시 고려의 복안부원군 권겸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황태자 책봉 이후 기황후의 권세는 더욱 커졌다. 그녀는 점차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주색에 빠진 혜종에게 실망하여 아들 아유르시리다라에게 제위를 양위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 1364년에는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수도 대도를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아유르시리다라는 코케 테무르에게 피신하고 기황후는 잠시 포로가 되기도 했으나, 곧 권력을 회복했다. 1365년에는 위조 칙서를 이용해 코케 테무르의 군대를 동원하여 혜종을 압박하려다 실패했지만, 황태자의 생모라는 강력한 입지 덕분에 황후의 지위는 유지되었다.

1365년 9월 7일, 제1황후였던 바얀 후투그 카툰이 사망하자[13] 기황후는 마침내 원나라의 정식 황후(제1황후) 자리에 올랐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기황후는 바얀 후투그 카툰의 궁을 방문했을 때 그녀가 남긴 검소하게 기워 입은 옷들을 보고 "정후가 이런 옷만 입고 있었던가"라며 크게 웃었다고 한다.[13] 이는 당시 황태자의 생모로서 그녀가 누렸던 막강한 권세를 짐작하게 하는 일화이다.

2. 4. 고려와의 갈등

기황후가 원나라의 제2황후가 되면서 그녀의 오빠 기철고려에서 대표적인 권문세족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기철친원파 세력과 결탁하여 원나라고려의 왕을 마음대로 바꾸려 했던 4차 입성책동을 주도하는 등 고려의 국정을 농단하고 각종 전횡을 일삼았다.[23]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고, 마침내 1356년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화된 틈을 타 기철 일족을 포함한 친원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23]

가족이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기황후는 크게 분노하여 원 혜종을 부추겨 공민왕에게 복수할 것을 요구했다.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당시 대도에 머물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 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따르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려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원사》에 따르면 이때 왜구 세력도 원나라의 용병으로 동원되었다고 한다. 덕흥군과 원나라 군대는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지방까지 진격했으나,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의 반격에 부딪혀 참패하고 도주했다.[23] 이 패배로 기황후의 복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의 위신 또한 크게 실추되었다.

2. 5. 북원 천도와 최후

1368년,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대도를 점령하자, 원 혜종은 기황후와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르와 함께 북쪽의 잉창(應昌)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로써 원나라는 북원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기황후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명확하지 않다. 1370년 잉창에서 원 혜종이 사망하고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북원의 황제(소종)로 즉위하면서 기황후는 황태후가 되었다. 일설에는 기황후가 1368년 잉창에서 명나라 군대의 포로가 되어 이듬해 사망했다고도 전해진다.[19] 하지만 정확한 사망 시기와 장소는 알려지지 않았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리 산145번지에는 기황후의 묘로 전해지는 고분이 있다. 기황후의 시신이 고려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안장되었다는 전승이 있으며, 금강산 장안사에는 그녀의 위패가 봉안되기도 했다. 기황후의 묘가 조성된 후 그 주변 지역은 제사를 지내는 큰 재실(齋室)이 있어 재궁동(齋宮洞) 또는 쟁골이라 불렸다고 하며, 현재의 연천읍 상1리 신망리역 근처에 해당한다.

이 묘의 존재는 조선 시대 문헌에서도 확인된다. 1656년 유형원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는 '속전원순제기황후묘(俗傳元順帝奇皇后墓)'라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영조 때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는 '연천현 동북쪽 15리에 원나라 순제 기황후의 묘와 석인, 석양, 석물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20] 1899년 간행된 《연천현읍지》에는 '황후총은 동쪽 20리 재궁동에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길 원 순제 기황후가 고국에 돌아가 묻히기를 원해서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20] 묘소 주변에서는 고려 양식의 어골무늬 기와가 다수 발굴되기도 했다.[20]

현재 연천군 상1리에 위치한 기황후 묘는 한국전쟁 중 비석과 석물을 잃어버렸고, 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다. 묘 동쪽에는 마정승(馬政丞) 묘와 이정승(李政丞) 묘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있으나, 매장자의 신원은 불분명하며 이들 역시 방치된 상태이다. 1998년 묘 부근 연못 터에서 수습된 석수(石獸) 2점은 연천문화원에서 보관하다 2006년부터 향토사료관 입구에 전시되고 있다.

3. 평가

기황후에 대한 평가는 그녀가 이룬 높은 지위와 그로 인해 발생한 역사적 영향 때문에 서로 엇갈린다. 한편으로는 고려 출신의 여성이 원나라의 황후 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막강한 권력을 이용하여 오빠 기철 등 친족 세력이 고려에서 권세를 누리며 횡포를 부리도록 방조하고, 공민왕의 개혁 정치에 반발하여 원나라 군대를 동원해 고려를 침공하려 하는 등 모국에 해를 끼친 인물이라는 비판이 강하게 제기된다. 특히 한국사의 관점에서는 그녀의 친원적인 행보와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 시도가 부정적인 평가의 주요 근거가 된다.

3. 1. 부정적 평가

기황후가 원나라의 제2황후가 되면서, 당시 사실상 원의 속국 상태였던 고려에서는 그녀의 오빠 기철이 대표적인 권문세족으로 큰 권력을 누리게 되었다. 기철은 다른 친원 세력과 함께 고려를 원나라의 성(省)으로 편입시키려 한 4차 입성책동을 주도하고, 원나라충혜왕을 강제로 물러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등 고려의 국정을 어지럽히고 온갖 횡포를 부렸다.

이에 공민왕은 원나라의 영향력이 약해진 1356년을 틈타 기철을 포함한 그의 일족과 여러 친원 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집안이 멸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기황후는 크게 분노하여 원 혜종에게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요구했다. 결국 1364년 원나라 황제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새로운 고려 왕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주어 고려를 공격하도록 했다. 원나라 군대는 평안도 지역까지 쳐들어왔으나, 최영과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게 크게 패배하였다.[23]

4. 가계

본관은 행주이다. 아버지는 사후 영안왕[15]과 경왕에 추증된 고려의 문신 기자오(奇子敖)이고, 어머니는 익산 이씨로 전서 이행검(李幸儉)의 딸이다. 증조모인 장흥 임씨는 고려 인종의 왕비 공예왕후의 친정 조카 임경순의 딸로, 고려 왕실과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오빠로는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 등이 있었으며, 첫째 오빠 기식이 일찍 세상을 떠나 기철이 사실상의 장남 역할을 했다.[23] 진천군지명지(1997년)에 따르면 이름은 옥녀라고도 한다.

기황후의 가계는 대대로 고려에서 관직을 지낸 명문가였다. 종고조부 기윤위는 고려 희종 때인 1211년 왕준명 등이 최충헌을 제거하려 할 때 그를 구출하여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고조부 기윤숙은 상장군과 중서문하성의 양성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다. 증조부 기홍영은 좌우위보승낭장을 지냈고 사후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다. 할아버지 기관의 형제인 기온(奇蘊)은 고려 고종의 부마가 되기도 하였다.

'''기황후 가계'''
관계이름비고
종고조부기윤위최충헌의 측근
고조부기윤숙상장군, 문하시랑 평장사
증조부기홍영(奇洪潁)좌우위보승낭장, 사후 상서좌복야 추증
증조모장흥 임씨공예왕후의 조카 임경순의 딸
조부기관(奇琯)
아버지기자오(奇子敖)고려 문신, 사후 영안왕 및 경왕 추증
어머니영안왕후 익산 이씨이행검의 딸
오빠기식(奇軾)요절
오빠기철(奇轍)
오빠기원(奇轅)
오빠기주(奇輈)
오빠기륜(奇輪)
남편원 순제(元 順帝)원나라의 황제
아들원 소종(元 昭宗)북원의 황제
며느리권황후(權皇后)고려 출신
손녀 사위이수데르(也速迭兒)북원의 칸


5. 기타

기황후가 고려 출신 첫 후비(后妃)나 황후는 아니었다. 고려 출신 여성으로 원나라 궁녀가 되어 후비에 오른 인물로는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의 총애를 받은 이씨(李氏)가 있었고, 인종(仁宗) 때에는 다마시리 카톤(答里麻失里 哈屯, 충숙공 김심의 딸), 바얀 쿠투(伯顔忽篤, 충선왕의 의붓딸), 그리고 후궁인 영비(英妃) 다마 후투그(達麻忽都) 등이 있었다.[21]

나라의 코케 테무르 막객(幕客)으로 공민왕 15년(1366년) 고려를 방문했던 곽영석(郭永錫)은 환영 연회에서 고려의 빼어난 산수와 기자(箕子)의 풍속에 대해 듣고 지도, 예악, 관제 등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이에 접객을 맡은 고려의 임박은 "우리나라 산수의 기이함을 알고자 하면 바로 상국(上國)의 황후(기황후)와 태자(태자 아유르시리다르)가 계시는데 어찌 산천의 수려한 기운을 타고나지 않았겠는가?"라고 답했다. 그러자 곽영석은 무릎을 치며 "드디어 천하의 부모 마음으로 하여금, 아들 낳는 것을 중히 여기지 않고 딸 낳는 것을 중하게 여기게 하네."라고 감탄했고, 주변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22] 이는 당시 기황후와 그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Korea : an episodic narrative https://www.worldcat[...]
[2] 서적 Sex Among Allies: Military Prostitution in U.S.-Korea Relation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7-01-01
[3] 서적 Korea in the Middle: Korean Studies and Area Studies : Essays in Honour of Boudewijn Walraven https://books.google[...] Amsterdam University Press
[4] 서적 Children in Slavery through the Ages https://books.google[...] Ohio University Press 2009-09-08
[5]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Land of the Morning Calm" to States in Conflict https://books.google[...] Indiana University Press
[6] 서적 A New History of Korea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7] 서적 Korea https://books.google[...] HarperCollins 2009-10-27
[8] 학술지 Review of Empire's Twilight: Northeast Asia under the Mongols. Harvard-Yenching Institute Monograph Series https://www.jstor.or[...] 2010-01-01
[9] 서적 Dictionary of Ming biography, 1368-1644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6-10-15
[10] 웹사이트 4 Reasons Why Hurrem Sultan and Empress Ki were similar (Part 1) https://hypedforhist[...] 2022-09-13
[11] 서적 高麗史日本伝(上) 岩波文庫
[12] 학술지 元朝ケシク制度と高麗王家 : 高麗・元関係における禿魯花の意義に関連して 2001-02-01
[13] 서적 元史
[14] 뉴스 기황후… 누구냐, 넌 http://premium.chosu[...] 조선일보 2014-03-05
[15] 문서 또는 영안친왕
[16] 뉴스 다시 읽는 여인열전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공녀에서 元황후로…현지화 전략으로 ‘운명 개척’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2-04-02
[17] 두피디아 솔롱고
[18] 뉴스 유홍준의 국보순례 (43) 금강산 금동보살상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0-01-20
[19] 서적 신원사
[20] 뉴스 경기도 연천군 "기황후, 연천군에 잠들어 있다"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4-04-01
[21] 웹사이트 기황후-고려 http://history.zoglo[...]
[22] 서적 고려사
[23] 뉴스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고려 출신 元 기황후 세도의 배후였지만…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0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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