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뢰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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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뢰비트는 유대인 출신으로,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우고 나치즘 비판으로 독일을 떠나 일본, 미국에서 활동한 철학자이다. 그는 기독교 철학의 붕괴와 역사철학을 통한 기독교 철학에서의 구원, 실존주의를 주요 주제로 다루었으며, 하이데거, 헤겔, 니체, 키르케고르 등의 영향을 받았다. 뢰비트는 역사관 비판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근대성의 혼합을 지적하고,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유한성과 불안, 신앙의 문제를 탐구했다. 주요 저서로는 『역사 속의 의미』, 『헤겔에서 니체까지』 등이 있으며, 그의 사상은 한국의 철학, 신학, 사회학 분야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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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뢰비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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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카를 레비트 |
출생일 | 1897년 1월 9일 |
출생지 | 독일 뮌헨 |
사망일 | 1973년 5월 26일 |
사망지 | 독일 하이델베르크 |
학력 | |
모교 | 뮌헨 대학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
경력 | |
직장 | 마르부르크 대학교, 도호쿠 대학, 코네티컷 대학교,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
활동 분야 | 철학 |
2. 생애
뢰비트는 뮌헨에서 유대인 출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마르틴 하이데거 밑에서 현상학을 공부했고, 두 사람은 깊은 우정을 쌓았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가담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뢰비트는 나치 독일 정권 때문에 1934년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 1936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 대학에서 강의했다.[1][2] 제3제국과 일본의 동맹 때문에 1941년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갔으며,[3] 1941년부터 1952년까지 하트퍼드 신학교와 뉴스쿨에서 강의했다. 1952년 독일로 돌아와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97-1928)
1897년 뮌헨에서 유대인 출신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자원 입대하여 독일군으로 참전했으나 중상을 입고 이탈리아군의 포로가 되었다.1917년 제대 후 뮌헨으로 돌아와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뮌헨 대학교에서 생물학, 철학, 인류학, 사회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18년부터 1919년까지 뮌헨에서 막스 베버의 강의에 참석했고, 1919년에는 알베르트 루트비히 프라이부르크 대학교로 옮겨 학업을 계속했다. 그곳에서는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그의 조수이자 뢰비트에게 큰 영향을 준 마르틴 하이데거, 동물학자 한스 슈페만이 강의를 맡고 있었다.
1922년 뮌헨으로 돌아와 현상학의 대가 모리츠 가이거의 지도를 받았고, 이듬해인 1923년에 박사 학위 논문 "니체의 자기 해석과 니체 해석의 해명"(원제: '"Auslegung von Nietzsches Selbst-Interpretation und von Nietzsches Interpretationen"')을 쓰고 졸업했다. 1924년에는 하이데거를 따라 마르부르크로 가서 그곳에서 레오 슈트라우스, 게르하르트 크뤼거, 한스 게오르크 가다머를 알게 되었다. 1928년 하이데거의 지도하에 대학 강사 자격 논문 "이웃의 역할에서의 개인"(원제: '"Das Individuum in der Rolle des Mitmenschen"')을 제출했다.[1]
2. 2. 망명과 저술 활동 (1934-1952)
뢰비트는 나치 독일 정권 때문에 1934년 독일을 떠나야 했다.[1] 록펠러 장학생으로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1935년부터 1936년에 『니체의 영원회귀의 철학』(원제 ''"Nietzsches Philosophie der ewigen Wiederkehr des Gleichen"'')과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원제 ''"Jacob Burckhardt"'')를 로마에서 집필했다. 1936년에는 일본으로 가서 도호쿠 제국대학에서 철학과 독일 문학 강좌를 담당했으며, 같은 해 하이데거가 나치즘에 계속 충성하는 것을 목격한 중요한 증인이었다.[1] [2]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나치 독일과 같은 추축국 진영에 가담함에 따라 1941년에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3] 이후 『사상』에 논문 "유럽의 허무주의"를 게재했다.
미국에서는 신학자 파울 틸리히와 라인홀트 니버의 추천으로 하트퍼드 대학교와 코네티컷 대학교의 신학 강좌를 담당했다. 이 시기에 『헤겔에서 니체까지』, 『역사에서의 의미』(원제 ''"Meaning in History"'')를 집필했다. 1949년에는 뉴스쿨 대학교에 초빙되었다.
2. 3. 독일 귀국과 말년 (1952-1973)
1952년, 마르틴 하이데거의 제안에 따라 루프레히트 카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직에 취임하기 위해 독일로 귀국했다. 1964년 은퇴할 때까지 강의를 담당했다. 이 시기에 『하이데거 - 빈곤한 시대의 사상가』(원제 ''"Heidegger - Denker in dürftiger Zeit"''), 『역사적 존재의 비판』(원제 ''"Kritik der geschichtlichen Existenz"''), 『신, 인간, 세계』(원제 ''"Gott, Mensch und Welt in der Metaphysik von Descartes bis zu Nietzsche"'')를 집필했다.1973년, 76세의 나이로 하이델베르크에서 사망했다.[1]
3. 사상
카를 뢰비트는 하이데거, 헤겔, 니체, 키르케고르 등에게 영향을 받아 독자적인 사상을 전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를 바르트 등과 같이 과학주의, 세속주의, 회의주의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뢰비트는 저서 『역사 속의 의미』에서 서구 역사관이 기독교 신앙과 현대관의 관계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주장했다. 현대관은 기독교적이지도 이교적이지도 않아 그리스적 사고나 성서적 사고에 비해 흐릿하다는 것이다.[3] 그는 현대관이 역사는 선형적으로 움직인다는 신학에 의존하기에 기독교적 "이단"이라고 보았다.[4]
뢰비트는 신앙과 이성, 특히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는 기독교적 희망은 세속적인 욕망,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에 기초한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진정한 희망은 신앙 행위처럼 자유롭고 절대적이며, 합리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뢰비트는 신앙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고 보았다.[4]
뢰비트는 스토아적이고, 회의적이며, 불가지론자로 여겨진다. 그의 철학 주제는 기독교 철학의 붕괴(혹은 세속화)와 헤겔, 마르크스 등의 역사철학을 통한 기독교 철학에서의 구원과 실존주의이다. 고대 그리스와 자연의 상관관계를 중점으로 한 코스모로지컬한 사상은 새로운 시대의 형이상학과 실존적인 열정을 개척했다.
3. 1. 주요 사상적 영향
뢰비트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인물 | 영향 |
---|---|
마르틴 하이데거 | 뢰비트의 초기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나치즘 협력 문제로 결별했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뢰비트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과 허무주의를 깊이 연구했다. |
쇠렌 키르케고르 | 뢰비트는 키르케고르의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신앙과 이성의 관계를 탐구했다. |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뢰비트는 헤겔 철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근대 역사철학의 기원을 추적했다. |
막스 베버, 카를 마르크스 | 뢰비트는 베버와 마르크스의 사회 이론을 비교 분석하며, 근대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했다. |
뢰비트는 서구의 역사관이 기독교 신앙과 현대관의 관계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보았다. 현대관은 기독교적이지도, 이교적이지도 않으며, 신앙과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리스적 사고나 성서적 사고에 비해 흐릿하다는 것이다.[4] 뢰비트는 현대관이 역사는 선형적으로 움직인다는 신학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종의 기독교적 "이단"이라고 생각했다.[4]
뢰비트는 신앙과 이성,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역사의 관계에 주목했다. 그는 기독교적 희망은 세속적인 욕망이나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목적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앙에 기초한 사고방식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진정한 희망은 신앙 행위 자체만큼 자유롭고 절대적이며, 그 합리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뢰비트는 신앙이 스스로를 정당화한다고 보았다.[4]
뢰비트는 스토아적이고, 회의적이며, 불가지론자로 여겨진다. 그의 철학의 주요 주제는 기독교 철학의 붕괴(혹은 세속화)와, 헤겔, 마르크스 등의 역사철학을 통한 기독교 철학에서의 구원과 실존주의이다. 고대 그리스와 자연의 상관관계를 중점으로 한 코스모로지컬한 사상은 새로운 시대의 형이상학과 실존적인 열정을 개척했다.
3. 2. 역사철학 비판
뢰비트는 저서 『역사 속의 의미』에서 서구의 역사관이 기독교 신앙과 근대성의 혼합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현대의 역사관이 기독교적이지도, 이교적이지도 않으며, 신앙과 이성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리스나 성서적 사고에 비해 흐릿하다고 주장했다.[3][4]뢰비트는 현대의 역사관이 사회가 선형적으로 발전한다는 기독교 신학에 의존하기 때문에 일종의 "이단"이라고 보았다. 이는 역사가 순환한다는 그리스 이교의 관점과는 대조적이다.[4] 그는 기독교인들은 신앙에 기초한 세계관을 가지기 때문에 역사적 민족이 아니며, 이 때문에 역사와 철학에서 종말론적인 인간 진보 관점을 보게 된다고 설명했다.[5]
뢰비트는 부르크하르트, 마르크스, 헤겔, 볼테르, 비코, 보슈에, 아우구스티누스, 오로시우스 등 서구 사상가들의 역사관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면서, 진정한 신학적 역사관은 내재적 목표를 향한 움직임이 아니라 세상의 완성에 대한 초월적인 종말론적 희망이라고 주장했다.[5][4]
3. 3. 실존주의와 신학
뢰비트는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인간의 유한성과 불안, 그리고 신앙의 문제를 탐구했다. 그는 키르케고르의 영향을 받아 신앙과 이성의 절대적인 단절을 강조했다.[4] 뢰비트는 기독교 신앙이 역사나 이성과는 무관하며, 오직 주어진 신앙에 대한 희망에 기초한다고 주장했다.[4]3. 4. 일본에서의 경험과 영향
1936년(쇼와 11년) 마르부르크에서 하이데거의 세미나를 통해 알게 된 구키 슈조의 도움으로 도호쿠 제국대학 교수로 초빙되어 일본에서 약 5년간 철학과 독일 문학 강좌를 담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일본이 나치 독일과 같은 추축국 진영에 가담함에 따라 1941년(쇼와 16년) 미국으로 망명했다.이후 『사상』에 "유럽의 허무주의"라는 논문을 게재했다. 전후 筑摩書房에서 같은 제목으로 논문집이 출판될 때 "일본 독자에게 주는 발문"을 통해 일본 언론계에 대해 엄격하게 지적했다.
4. 주요 저서
- 역사 속의 의미: 역사철학의 신학적 함의 (1949)
- 헤겔에서 니체까지 (1964)
- 막스 베버와 카를 마르크스 (1993)
참조
[1]
서적
My last meeting with Heidegger in Rome
MIT Press
[2]
서적
Japanese Culture: A Study of Origins and Characteristics
Hawaii University Press
[3]
서적
Heidegger's Children: Hannah Arendt, Karl Lowith, Hans Jonas, and Herbert Marcuse
https://books.google[...]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9-04-08
[4]
서적
Meaning in History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57
[5]
서적
Meaning in history: The Theological Implications of the Philosophy of History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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