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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에두아르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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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에두아르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이자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의 아들로, 1900년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에서 복무하며 영국과 대립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나치당에 협력하여 독일 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하며 나치 정권의 정책을 지원하였고, 전쟁 후 탈나치화 재판에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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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에두아르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를 에두아르트, 나치당 제복 착용 모습 (1933년, [[슈투름아프타일ุง|SA]]-[[Gruppenführer|그루펜퓌러]])
카를 에두아르트 (1933년 SA-그루펜퓌러로 복무 당시)
이름레오폴트 카를 에두아르트 게오르크 알베르트
출생명카를 에두아르트 공자, 올버니 공작
출생일1884년 7월 19일
출생지클레어몬트, 잉글랜드, 서리
사망일1954년 3월 6일
사망지서독 바이에른 코부르크
배우자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공주 (1905년 결혼)
자녀요한 레오폴트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시빌라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녀
후베르투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프리드리히 요시아스 폰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자
서명
작위
작위명올버니 공작
계승 순서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재위 기간1900년 7월 30일 – 1918년 11월 14일
이전알프레트
섭정호엔로에-랑겐부르크의 에른스트 (1900년 – 1905년)
이후군주제 폐지
군사 경력
소속독일 제국 (1900년–1918년)
계급명예 연대장
군종독일 육군
정치 경력
정당나치당 (1933년–1945년)
직책독일 적십자사 총재
임기 시작1933년 12월 1일
임기 종료1945년
이후오토 게슬러
직책국회의원
임기 시작1936년
임기 종료1945년
가문
가문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
아버지올버니 공작 레오폴트
어머니헬레네 폰 발데크 운트 피르몬트 공녀

2. 영국 왕자 시절

클레어몬트: 카를 에두아르트의 출생지


카를 에두아르트는 잉글랜드 서리의 클레어몬트에서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인 올버니 공 레오폴드와 발데크 후작 게오르크 빅토르의 딸 헬레네 사이에서 태어났다.[1] 1883년에는 누나 앨리스 메어리가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는데, 1884년 3월 28일 아들이 태어나기 전 에서 사고로 급사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의 작위였던 올버니 공작위를 계승했다.[3]

이후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다가, 여러 사립 학교와 이튼 칼리지에서 공부하였다.[4]

2. 1. 가족 배경



카를 에두아르트는 잉글랜드 서리의 클레어몬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넷째 아들인 올버니 공 레오폴드였고, 모친은 발데크 후작 게오르크 빅토르의 딸 헬레네였다.[1] 1883년에는 누나 앨리스 메어리가 태어났다. 레오폴드는 혈우병을 앓고 있었는데, 1884년 3월 28일 아들이 태어나기 전 에서 사고로 급사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탄생과 동시에 아버지의 작위였던 올버니 공작위를 계승했다.

2. 2. 유년 시절과 교육

카를 에두아르트는 잉글랜드 서리의 클레어몬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아들인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였고, 어머니는 발데크 후작 게오르크 빅토르의 딸 헬레네였다. 1883년에는 누나 앨리스 메어리가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폴드는 1884년 3월 28일 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카를 에두아르트는 태어남과 동시에 올버니 공작위를 계승했다.[3]

이후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다가, 여러 사립 학교와 이튼 칼리지에서 공부하였다.[4]

3.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독일 제국 내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위치 (빨간색)


1900년 숙부 알프레트가 사망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군주가 되었다. 본래 영국식 이름은 '찰스 에드워드'였으나, 독일 공국의 군주가 되면서 카를 에두아르트로 이름이 바뀌었다.[3][4]

어린 나이 때문에 즉위 후 5년간 섭정을 받았다. 1905년 7월 19일 친정을 시작했고, 같은 해 10월 11일 빅토리아 아델하이트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녀는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의 어머니인 지빌라 폰 작센코부르크고타이다.

1918년 패전의 결과로 다른 독일의 군주들과 함께 폐위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과 영국이 적국이 되자, 작위박탈법에 의하여 올버니 공작위와 영국의 왕자 직위를 박탈당했다.

역사가 앨런 R. 러스턴은 어린 찰스 에드워드가 "나는 끔찍한 독일 공자가 되어야 해"라고 말했다고 인용하며, 그가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불행해했다고 전했다. 주변 어른들은 찰스 에드워드가 새로운 역할을 받아들이도록 격려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의 누이는 어머니가 "나는 항상 찰리를 훌륭한 영국인으로 키우려고 노력했고, 이제 그를 훌륭한 독일인으로 만들어야 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했다. 프레더릭 로버츠 육군 원수는 그에게 "훌륭한 독일인이 되도록 노력해!"라고 말했다.[3][4]

3. 1. 공위 계승

1900년 숙부 알프레트가 사망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군주가 되었다. 본래 영국식 이름은 '찰스 에드워드'였으나, 독일 공국의 군주가 되면서 카를 에두아르트로 이름이 바뀌었다.[3][4]

알프레트 공작의 외아들 알프레트 공자는 1899년에 사망했고, 공작은 건강이 좋지 않아 후계자 문제가 가문의 쟁점이 되었다. 아서 공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셋째 아들로 처음에는 추정 상속인이었으나, 독일 언론 일부가 외국인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고, 빌헬름 2세는 영국군 복무자가 독일 국가 통치자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아서 공작의 아들 코넛의 아서 공자는 찰스 에드워드와 이튼 칼리지에 함께 다녔는데, 빌헬름 2세가 독일 교육을 요구하자 코넛 공작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했다. 결국 찰스 에드워드의 삼촌과 사촌 모두 공작령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여 찰스 에드워드가 다음 계승자가 되었다.

어린 나이 때문에 즉위 후 5년간 섭정을 받았다. 1905년 7월 19일 친정을 시작했고, 같은 해 10월 11일 빅토리아 아델하이트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녀는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의 어머니인 지빌라 폰 작센코부르크고타이다.

즉위 후 5년간 공국은 알프레트의 딸 알렉산드라 공녀의 남편인 에른스트의 섭정 하에 통치되었다.

3. 2. 통치와 결혼

1900년 숙부 알프레트가 사망하면서 16세의 나이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군주가 되었다. 독일 공국의 군주가 되면서 이름이 영국식 '찰스 에드워드'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로 바뀌었다.[1]

카를 에두아르트는 어렸기 때문에 즉위 후 5년간 섭정을 받았다. 1905년 7월 19일, 21세 생일을 맞아 친정을 시작했고, 같은 해 10월 11일 빅토리아 아델하이트와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2] 장녀 지빌라 폰 작센코부르크고타는 스웨덴의 칼 16세 구스타프의 어머니다.[3]

에드워드 7세와 카를 에두아르트 (작은 소년)를 묘사한 풍자 만화


카를 에두아르트는 성공회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등 영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독일 사회에 동화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독일어를 빠르게 배웠고, 군사학교에서 쓴 독일어 에세이가 곧 그의 영어 에세이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4]

[1][2][3][4]


4.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중, 카를 에두아르트는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사촌으로서 독일 제국을 지지하며 독일 육군 장군으로 복무했다.[6] 영국 왕족이 적대국 장군으로 복무하는 상황이었기에, 또 다른 사촌인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1915년에 카를 에두아르트의 가터 훈장을 박탈하고, 1917년에는 칭호 박탈법에 따라 올버니 공작위를 박탈했다.[6] 같은 해 영국 왕가의 명칭 또한 독일식인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에서 윈저 가문으로 바뀌었다.[6] 1919년에는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자손에게서 영국 왕족으로서의 신분(Prince of the United Kingdom|영국 왕자영어 칭호와 HRH|전하영어 경칭)도 박탈되었다.[6]

독일 혁명으로 독일 군주제가 폐지되고, 러시아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카를 에두아르트는 좌익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여러 우익 조직과 정치 운동에 참여하다가 나치당에 입당하여 돌격대(SA)의 일원이 되었다.[7]

4. 1. 독일군 복무와 영국 왕족 지위 박탈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사촌이기도 했던 카를 에두아르트는 독일인으로서 독일 제국을 지지하며, 독일 육군의 장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했다.[6] 영국 왕족이 영국에 적대하는 입장에 섰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또 다른 사촌인 영국 국왕 조지 5세는 1915년가터 훈장을 박탈하고, 1917년에는 칭호 박탈법에 근거하여 올버니 공작위를 박탈했다.[6] 1917년에는 영국 왕가의 가문 이름도 독일식인 작스-코버그-고타(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에서 윈저 가문으로 개명했다.[6] 종전 후인 1919년에는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자손으로부터 영국 왕족으로서의 신분 (Prince of the United Kingdom|영국 왕자영어 칭호와 HRH|전하영어 경칭)도 박탈되었다.[6]

4. 2. 전후 정치 활동

카를 에두아르트는 독일 혁명으로 독일 군주제가 폐지되고, 러시아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 일가가 볼셰비키에게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을 겪으면서 좌익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그는 여러 우익 조직과 정치 운동에 참여하다가 나치당에 입당하여 돌격대(SA)의 일원이 되었다.[7]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적십자사 총재를,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국회 의원을 역임했다.

1936년, 사촌 조지 5세의 장례식에 SA 제복을 입고 참석했는데, 이는 영국 왕족으로서 영국 군복 착용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카를 에두아르트는 에드워드 8세와 독영 관계 개선 및 조약 체결 가능성을 논의할 임무를 받았으나, 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1940년 4월,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독일 측 경봉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당초 2월 방문 예정이었으나, 대영미 관계 악화를 우려한 요나이 내각의 요청으로 연기되었다. 방일 중 쇼와 천황을 알현하고 천장절에 히틀러 총통의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군은 카를 에두아르트를 나치 협력자로 체포했다. 1946년, 탈나치화 재판에서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튀링겐과 코부르크에 있던 재산 대부분은 소련군에게 몰수되었고, 그는 빈곤 속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

채널 4는 2007년 12월 6일 방송된 프로그램 "Hitler's Favourite Royal영어"에서 카를 에두아르트가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서 나치 정권의 장애인 학살, 수정의 밤 사건, 유대인 대학살 등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5. 나치 정권과의 협력

제1차 세계 대전은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충성의 갈등을 야기했지만, 그는 독일 제국을 지지하기로 결정했다.[8][9] 그는 사라예보 암살 사건 당시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민법 박사 명예 학위를 받기 위해 영국에 있었다.[10] 그는 여동생에게 영국을 위해 싸우고 싶었지만, 영국의 혈통으로 인해 공작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한 자신의 공국으로 돌아가야 할 의무를 느꼈다고 말했다.[11] 그는 7월 9일에 독일로 돌아갔다. 전쟁 후, 그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1914년의 사건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행복"의 종말로 묘사했다.[12]

전쟁 초기에 독일 언론은 독일 귀족의 외국 관계를 비판했고, 카를 에두아르트는 특히 심하게 공격받으며 "절반 영국인"이라는 비난을 받았다.[13] 공작은 공개적으로 영국을 비난하며 독일을 공격했다고 비난했고, 시포스 하이랜더 연대장 직을 포기했다.[14] 그는 영국 군사 훈장을 반환하는 대신 팔아버렸는데, 이는 가족에 대한 경멸의 몸짓으로 볼 수 있다.[15] 그는 영국과 벨기에 궁정과의 관계를 끊었지만, 독일 내에서 그의 충성에 대한 의구심을 극복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의 태도는 전쟁이 진행되면서 진심으로 친독일적이 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가 독일 군복을 입은 일렬의 병사들 중 한 명과 악수하는 모습
병사들을 사열하는 카를 에두아르트(1914)


카를 에두아르트는 썰매 사고로 다리가 영구적으로 손상되어 전투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서 온 육군 부대에 비전투 지원을 제공했으며,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으로 함께 이동했다. 그는 처음에는 1914년 독일의 벨기에 침공에 참여했다. 이곳에서 공작은 독일 군인들이 수백 명의 벨기에 민간인을 살해한 디낭 약탈을 목격했다. 그의 부관 마르셀 폰 샤크는 벨기에 민간인들이 적절하게 대우받았다고 생각했고, 그 사건이 공작에게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고 썼다. 그는 1914년 9월 초에 동부 전선으로 전출되었다. 그는 동부 전선에서 만난 지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마음에 안 들었고, 특히 유대인들의 집이 더럽다고 생각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1914년 말에 "용감함"을 이유로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전쟁 중반에 카를 에두아르트는 서부 전선발칸 전역의 여러 분쟁 지역을 방문했다.

공작은 지휘관 직책을 맡은 적이 없었다. 그의 공국 출신 군인들은 Carl-Eduard-Kriegskreuzde (카를 에두아르트 전쟁 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공작의 부관은 그의 활동에 대한 일기를 썼고, 이는 독일 군사 지휘부에 보고되었으며 선전 목적으로 독일 언론에 배포되었다. 그들은 그가 군인들의 어려운 생활 환경을 함께 겪고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고 묘사했다. 실제로는 그는 류마티즘과 강직성 척추염, 일종의 관절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보통 최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렀고 정기적으로 독일로 돌아가 치료를 받았다. 이는 젊은 군인이 자신의 질병을 억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일부 독일 엘리트 사이에서 불만을 샀다.

공작은 독일 정부와 불가리아 왕국의 통치자인 그의 친척 페르디난트 1세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했다. 불가리아는 중앙 동맹국의 일원이었다. 페르디난트는 1908년에 불가리아의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했고, 왕국은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경제 위기에 빠졌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 사건들 동안 페르디난트에게 재정적 지원을 포함한 많은 도움을 제공했다. 1916년, 페르디난트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기를 원했지만, 독일은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원치 않았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빌헬름 2세를 대신하여 소피아로 가서 페르디난트를 설득하여 전쟁을 포기하게 했다.

공작은 영국에서 반역자로 비난받았다.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살면서 영국 귀족 작위를 가지고 있었지만 중앙 동맹국 편을 든 귀족 집단 중 한 명이었고, 이 집단은 영국 언론에서 "반역자 영국 귀족"으로 자주 언급되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끝난 직후, ''선데이 포스트''는 "반역자 공작들"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여기에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삶에 대한 부정적이고 개인적으로 비방하는 프로필이 포함되었으며, 그의 전쟁에서의 역할을 "그의 불명예스러운 경력의 가장 어두운 장 중 하나"라고 칭했다.

1915년, 조지 5세는 그의 이름을 가터 훈장 명부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다. 1917년, 코부르크의 법률 변경으로 카를 에두아르트의 영국 친척들이 공작위를 승계하는 것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1917년 여름 동안 고타에서 건조된 폭격기들은 그 도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에서 1914-1918년 독일의 영국 폭격을 여러 차례 감행하여 수백 명의 영국 민간인을 살해했다. 그해, 수백만 파운드의 가치가 있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영국 재산이 몰수되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그의 영국 친척들이 다른 재산을 상속받는 것을 막는 법적 변경을 도입함으로써 대응했다. 영국 왕가는 나중에 독일식 작센코부르크고타에서 윈저 왕가로 이름을 변경했다. 1917년 작위 박탈법은 그의 영국 작위를 박탈하는 절차를 시작했다.

20세기 초 의상을 입은 부부와 네 자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부부와 네 명의 장성한 자녀(1918)


카를 에두아르트는 전쟁 후반기에 군 참모에서 서부 전선에서 일했다. 그는 자신의 개인 재산에서 를 출연하여 그의 영토에서 온 사망한 군인 가족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전쟁 몇 년 후 ''타임스''에 실린 보고서는 그가 종종 영국 전쟁 포로들을 도왔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그의 "배려심과 인도주의"의 징표로 묘사되었다. 공작은 1918년 로마노프 왕가의 학살에 의해 충격을 받았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그의 사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같은 일이 자신의 가족에게도 일어날까 봐 걱정했다. 이는 앞으로 몇 년 동안 그의 정치 활동을 규정할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의 시작이었다. 그는 황제 충성주의자 동맹에 가입했는데, 이는 독일 황제의 지지자 단체였지만, 그는 독일 장군이자 사실상 군사 독재자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도자로 선호했다.

전쟁은 독일 국민에게 심각한 부담을 안겨주었고, 1918년 중반 이후 제국의 군사적 상황은 붕괴되었다. 그해 말에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서명되었고 독일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1918년 11월 11일, 코부르크에서 공작에 반대하는 평화로운 시위가 열렸다. 공국의 총리였던 헤르만 콰르크는 비교적 부유한 회원이 많은 지역 SPD를 설득하여 더 이상의 불안은 도시의 경관에 위험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는 고타의 정치적 분위기는 더 급진적이었고 노동자 및 군인 평의회가 본질적으로 통제권을 장악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다른 대부분의 통치 군주들보다 상황에 대응하는 데 더 오래 기다렸다. 그는 11월 14일에 "통치를 중단했다"고 발표했지만 명시적으로 퇴위하지는 않았다. 독일 귀족은 혁명 동안 물리적으로 공격받지 않았지만, 상황은 그들에게 깊이 두려움을 주었고 많은 원망의 원인이 되었다.

독일 혁명 이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좌익이나 볼셰비키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품게 되었고, 여러 우익 계열 무장 조직이나 정치 운동에 관여했다. 이후 나치당에 입당하여 돌격대(SA)의 일원이 되었다.

5. 1. 나치당 가입과 활동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러시아 제국의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 (카를 에두아르트의 사촌) 부부 일가가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된 사건의 영향으로, 카를 에두아르트는 좌익이나 볼셰비키에 대한 공포와 증오를 품게 되었다.[8] 여러 우익 계열 무장 조직이나 정치 운동에 관여한 후, 나치당에 입당하여 돌격대(SA)의 일원이 되었다.[8]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적십자사 총재를, 1937년부터 1945년까지 국회 의원을 역임했다.[8]

1936년, 사촌 조지 5세의 장례식에 카를 에두아르트는 SA 제복을 입고 참석했는데, 이는 영국 왕족으로서 영국의 군복을 착용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8] 이때 카를 에두아르트에게는 신왕 에드워드 8세와 회담하여 독영 관계 개선과 조약 체결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임무가 주어졌지만,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8]

1940년 4월, 황기 2600년의 독일 측 경봉사절로 방일했다.[8] 당초 2월에 방일할 예정이었지만, 대영미 관계 악화를 우려한 당시 요나이 내각의 요청으로 방일 일정이 늦춰졌다.[8] 방일 중 쇼와 천황과 알현하고, 천장절에 히틀러 총통의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8]

5. 2. 외교 활동

1936년, 카를 에두아르트는 사촌 조지 5세의 장례식에 돌격대(SA) 제복을 입고 참석했다. 영국 왕족으로서 영국 군복 착용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때 카를 에두아르트는 신왕 에드워드 8세와 회담하여 독영 관계 개선 및 조약 체결 가능성을 타진하는 임무를 받았지만, 그러한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9]

1940년 4월, 황기 2600년을 기념하는 독일 측 경봉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당초 2월에 방일할 예정이었으나, 대영미 관계 악화를 우려한 당시 요나이 내각의 요청으로 방일 일정이 늦춰졌다. 방일 중 쇼와 천황을 알현하고, 천장절에 히틀러 총통의 축하 메시지를 전달했다.[14]

5. 3. 전쟁 범죄 관련 의혹

영국의 채널 4가 2007년 12월 6일에 방송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Hitler's Favourite Royal영어”에 따르면, 카를 에두아르트는 독일 적십자사 총재로서 나치 정권이 10만 명에 달하는 신체 정신 장애인 및 장애 아동을 "Gnadentodde" (은총의 죽음)이라는 명목 하에 살해하고, 수정의 밤 사건, 유대인 대학살,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 등을 모두 알고 있었다고 한다.[10]

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1929년부터 나치당에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1932년에는 칼렌베르크 성이 개조되어 탑에 하켄크로이츠가 추가되었다. 그는 나치당의 군국주의와 반공주의에 매료되었으며, 히틀러는 왕실 재산 몰수에 반대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가 권력을 잡기 전 프랑코니아와 독일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연계를 통해 유용한 동맹자였다.

1929년, 그의 지원으로 코부르크는 독일에서 나치당 의회를 선출한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그의 나치당 행사 방문은 지역 언론에 보도되어 당의 인지도와 위신을 높였다. 코부르크의 유대인들은 점점 더 많은 육체적 학대와 차별을 겪었으며, 카를 에두아르트와 그의 아내는 반유대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31년, 카를 에두아르트는 발데마르 파프스트와 "파시즘 연구 협회"를 설립하여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델로 한 독일 통치 계획을 설계했다. 1932년 National Klubde 지도자로 선출되어 회원들에게 나치당 가입을 권장했고, 하르츠부르크 전선 창설에 참여하고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 지지를 공개적으로 촉구했다.

같은 해, 그의 딸 시빌라는 스웨덴 국왕의 장남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와 결혼했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 행사를 자신의 이념을 공개하고 공작 가문의 위신을 높이는 데 사용했다. 코부르크는 스웨덴 국기와 나치기로 장식되었고,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이 결혼식에 참석했다.

6. 1. 체포와 재판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카를 에두아르트는 나치당 동조 혐의로 미군에 체포되었다.[14]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고통받는 동생의 체포 소식을 들은 누나 앨리스는 남편 애슬론 백작과 함께 독일로 가서 미군에게 동생의 석방을 간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1]

카를 에두아르트의 재판은 4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두 번의 항소가 있었다. 앨리스와 다른 많은 동료들은 부정직하게 그의 입장을 대변하며, 그의 정권 참여를 최소화했다. 전쟁 후 1년쯤 지나자, 서방 연합군의 우선순위는 이전 나치 처벌에서 냉전 동안 서방 블록의 일부가 되도록 점령 지역을 준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946년, 탈나치화 재판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는 무거운 벌금형을 받았다.[14] 1950년 (또는 그의 ''ODNB'' 항목에 따르면 1949년 8월), 전 공작은 탈나치화 법정에 의해 Mitläuferde와 Minderbelasteterde (대략: '추종자' 및 '과실이 적은 추종자')로 판결받았다. 전 공작의 전기 작가 칼 샌들러는 그 결과를 "희극"이라고 불렀다.

카를 에두아르트는 제2차 세계 대전 참여로 인해 상당한 재산을 잃었다. 소련 점령 지역에 위치한 고타에 있는 그의 재산은 몰수되었다.[14] 튀링겐과 코부르크에 소유하고 있던 재산의 대부분도 소련군에 몰수되었다.[14]

6. 2. 몰락과 죽음

나치 독일의 적십자사 총재를 지냈으며, 1937년부터 패전 때까지 독일 제국의회 의원을 지낸 결과, 전후(戰後) 체포되어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14] 그의 공국(公國)이었던 고타 지역은 소련군 점령하에 놓여 소련군에 의해 그 지역에 있던 재산이 몰수되어 가난한 만년을 보냈다.[14]

탈나치화 재판소에서 부과한 벌금[15]과 소련에 의한 재산 몰수로 인해 카를 에두아르트는 상대적으로 가난하게 생애의 마지막 몇 년을 은둔 속에서 보냈다. 그러나 그의 생활 방식은 재판 후 상당 부분 정상으로 돌아왔다. 1953년, 구급차와 휠체어를 타고 코부르크의 영화관에서 열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을 관람했으며, 여동생을 포함한 친척들을 보면서 거의 울 뻔했다고 한다.

1954년 서독 코부르크에서 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3월 10일에 거행되었으며, 나치 정권 하에서 교회 관계자였던 루터교 학장이 주례했다. 학장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다른 사람들에게 조종당하고 연합군에게 부당하게 대우받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전 공작의 죽음은 코부르크에서 공식적으로 애도되었다. 장례식에 조기를 게양하는 것을 거부한 한 공무원은 바이로이트 지방 의회에 보고되었으며, 바이에른 주의회 의원에게 비난받았다. 빅토리아 아델라이드는 남편의 사망 후 몇 주 동안 전 고위 나치를 포함하여 많은 지지 편지를 받았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매장은 10월 12일에 이루어졌으며, 많은 조문객들이 지켜보았다. 그는 코부르크의 Beiersdorf 지구에 있는 칼렌베르크 성 근처의 Waldfriedhof Cemetery (Waldfriedhof Beiersdorfde)에 묻혔다.

7. 유산과 평가

카를 에두아르트는 논란이 많은 인물로, 특히 나치 정권과의 협력은 비판의 대상이다. 그의 삶은 영국 왕족에서 나치 협력자로 전락한 비극적인 사례로 평가받는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운영 위원회에 속했으며, 1934년부터 1937년까지 이사회의 서기였다. 이 지위를 통해 우생학적 아이디어를 독일 대중, 특히 권력층에게 홍보하는 데 관여했다.[9] 유전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손의 예방에 관한 법률은 특정 집단의 사람들에게 강제적인 불임 수술을 도입했고,[9] 독일 정부는 장애인을 살해하는 여러 계획을 조직했다.[9] 카를 에두아르트는 이러한 계획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9] 그의 친족인 마리아 카롤리네 공주가 1941년에 이 프로그램에 의해 살해되었지만, 그는 개입하지 않았다.[9]

카를 에두아르트의 누이 앨리스는 자서전에서 오빠가 편견의 희생자였으며 가족 때문에 독일에 남기로 결정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주장이라는 비판이 있다.[1] 카를 에두아르트가 히틀러가 독일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했다고 믿었기 때문에 나치 정권을 지지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2]

여러 역사학자들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히틀러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으며, 나치 정권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정책을 은폐하는 데 도움을 준 "2선 가해자"였다고 평가한다.[6][7][8]

7. 1. 가족 관계


  • 요한 레오폴트 (1906년 ~ 1972년)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세자. 귀천상혼으로 공위 계승권을 포기하였다.
  • 지빌라 (1908년 ~ 1972년) - 구스타프 아돌프와 결혼. 현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의 어머니이다.
  • 후베르투스 (1909년 ~ 1943년)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동부 전선에서 전사하였다.
  • 카롤리네 마틸데 (1912년 ~ 1983년)
  • 프리드리히 요시아스 (1918년 ~ 1998년)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가 당주위를 계승하였다.


덧붙여 카를 에두아르트의 자손은 현재 251번째부터 312번째까지 영국 왕위 계승권을 갖는다.

7. 2. 21세기 묘사

카를 에두아르트의 생애는 여러 다큐멘터리와 서적을 통해 조명되고 있다. 1966년, 그의 누이 앨리스는 자서전 ''For My Grandchildren''에서 카를 에두아르트가 제1차 세계 대전 중 편견의 희생자였으며, 가족 때문에 독일에 남기로 결정했고, 나치 정권에서 최소한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했다.[1] 그러나 우르바흐는 이 자서전이 의도적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선택적이라고 비판했다.[1]

1981년 앨리스의 전기를 쓴 아론슨은 영국 왕실 일부 구성원들이 카를 에두아르트가 "히틀러가 독일을 공산주의로부터 구원했다는 신념 때문에" 정권을 지지했다고 언급했다. 앨리스는 오빠가 전쟁 후 투옥되었을 때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고 느꼈다고 기록했다.[2]

1977년, 아마추어 역사학자 루돌프 프라이스너는 카를 에두아르트의 생애에 대한 첫 번째 전기를 썼다. 카를 에두아르트의 아들 프리드리히 요시아스는 프라이스너에게 편지를 보내 책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동정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그의 형제 후베르투스가 유대인들의 절멸 수용소로의 추방을 목격했고 종종 그 문제에 대해 가족과 이야기했다고 썼다.[3]

2007년 12월, 영국의 채널 4는 카를 에두아르트 공작에 관한 한 시간짜리 다큐멘터리 "히틀러가 가장 사랑한 왕족"을 방영했다. ''가디언''은 이 영화를 "무능한 남자와 불행한 가족에 관한 탄탄한 다큐멘터리"라고 평가했다.[4] 반면 ''데일리 텔레그래프''는 이 다큐멘터리가 카를 에두아르트에게 지나치게 동정적이며, "공작이 되는 트라우마와 그것을 잃은 것이 어떻게든 그가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능력을 앗아간 것처럼" 묘사되었다고 비판했다.[5]

우르바흐는 2007년 다큐멘터리 제작팀 사이에서 카를 에두아르트를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있었고, 이로 인해 그의 성격에 대한 모순된 묘사가 이루어졌다고 썼다. 그녀는 2007년과 2015년 사이에 발견된 새로운 증거를 통해 그가 "분명히 상황의 순진한 희생자가 아니라 히틀러의 매우 적극적인 지지자"였음을 보여주었다고 말했다. 우르바흐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히틀러와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두 사람이 "이념과 그들의 자기애"를 공유한다고 언급했다.[6] 그녀의 2015년 저서 "히틀러를 위한 중개자"는 카를 에두아르트를 포함한 다양한 귀족들이 나치 독일의 비공식 외교관 역할을 한 방식을 다룬다. ''더 타임스''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나치당의 당원이었고, 준군사 테러의 후원자였으며, 히틀러의 중요한 '중개자'였다고 평가했다.[7]

뷔셸은 2016년 카를 에두아르트에 대한 전기에서 어린 시절부터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에 이르기까지 귀족에게 가해진 다양한 압력이 그가 분열성 인격 장애와 자기애를 발달시키도록 이끌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치 정권이 전직 공작에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잃어버린 지위의 상당 부분을 되찾도록 허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강압, 두려움, 세뇌, '최고를 유지하려는' 노력, 아마도 내면의 무주택과 외로움"의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뷔셸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독일을 떠날 수 있는 선택이 그에게 꽤 쉬웠을 때 나치 정권을 지지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믿었다. 그는 전직 공작이 정권의 귀족 지지자들 중 가장 활동적이고 열정적인 인물이었으며, "2선 가해자"라고 묘사했다.[8]

러스턴은 장애인을 살해하는 데 대한 전직 공작의 관계에 대한 2018년 저서에서 카를 에두아르트의 삶을 "왕족으로 태어나 인간 파괴의 정치에 휘말린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것은 비극적인 이야기이다."라고 묘사했다.[9] 러스턴은 카를 에두아르트가 히틀러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그가 히틀러에게 특정 만행을 중단하도록 격려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그의 친족 살인에 반응하지 않은 것은 그가 "의지가 약하다"는 것을 나타낸다고 느꼈다.[10]

2015년, 코부르크에서는 나치 정권과 연관된 사업가인 막스 브로제의 이름을 거리에 붙일지 여부를 놓고 지역 분쟁이 벌어졌다. 이에 대응하여 코부르크 시의회는 역사학자 그룹을 위촉하여 코부르크에서 나치에 대한 지지가 왜 이례적으로 빠르게 발전했는지와 그 기간 동안의 마을의 사건들을 조사했다. 2024년에 결과를 보고한 위원회는 카를 에두아르트가 마을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으며, 그의 내셔널리즘|민족주의de 조직에 대한 지원이 극우 정치의 성장에 기여했다고 언급했다.[11][12]

참조

[1] 웹사이트 The Infant Duke of Albany https://www.britishn[...] Daily News (London) 2023-03-23
[2] 웹사이트 Inflation calculator https://www.bankofen[...] 2024-02-15
[3] 뉴스 Unwilling Prince Is Now a German Duke https://www.nytimes.[...] 2023-09-10
[4] 뉴스 Kicked into the Kingdom https://www.newspape[...] 1905-07-15
[5] 뉴스 Foreign Intelligence{{mdash}}Germany{{mdash}}Marriage of the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https://www.britishn[...] 1905-10-13
[6] 뉴스 Royal Children of Europe: Saxe-Coburg-Gotha https://www.britishn[...] 1914-07-11
[7] 뉴스 The Duke of Saxe-Coburg Inspects Veterans https://www.britishn[...] 1910-08-18
[8] 뉴스 Traitor Peers https://www.britishn[...] 1919-04-02
[9] 뉴스 The Scandal of our Traitor Dukes https://www.britishn[...] 1919-03-30
[10] 웹사이트 Actualites Mondiales, November 14, 1941 https://search.alexa[...] Clarivate 2024-06-02
[11] 웹사이트 Prince and opera star killed in plane crash https://news.google.[...] 2014-11-24
[12] 웹사이트 Kungens liv i 60 år http://www.kungahuse[...] Royal Court of Sweden 2020-07-09
[13] 뉴스 Duke of Albany https://www.britishn[...] 1953-01-27
[14] 뉴스 The Duke of Saxe-Coburg https://www.thetimes[...] 1954-03-08
[15] 간행물 独国「ザクセン、コーブルヒ、ゴータ」大公「カール、エドゥアルト」叙勲ノ件 A10113354800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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