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타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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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타는 8세기부터 존재한 독일 튀링겐주의 도시로, 12세기 말 루도윙 왕조에 의해 도시로 발전했다. 두 개의 중요한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리적 이점을 바탕으로 번성했으며, 1180년에 도시로 처음 언급되었다. 1247년 루도윙 왕조 멸망 이후 베틴 가문의 영토가 되었고, 1640년 작센-고타 공국이 설립되면서 문화적 전성기를 맞았다. 1826년부터 1918년까지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일부였으며, 독일 사회민주당 창당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20세기에는 동독에 속했으며, 독일 재통일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으나, 현재는 농업, 차량 제조, 공공 서비스 등을 중심으로 경제적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고타는 다양한 박물관, 역사적인 건축물, 특히 프리덴슈타인 성을 포함한 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으며, 2024년 시장 선거에서 크누트 크로이치가 당선되었다.
고타는 비옥한 튀링겐 분지 내의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다. 도시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로지르는 단층 파열로 인해 세 개의 두드러진 언덕이 형성되었는데, 북서쪽에는 해발 431m의 크란베르크와 라트홀츠 숲, 도시 중심부에는 프리덴슈타인 성의 언덕, 남동쪽에는 해발 409m의 제베르크가 있다. 도시 자체는 해발 300m에 위치하며, 시 관할 구역은 숲이 거의 없고 집약적인 농업에 이용된다. 고타는 강가에 위치해 있지 않아 중세 시대부터 물 공급이 문제였고, 14세기에 25km가 넘는 라이나 운하를 건설하여 회르젤과 아펠슈테트 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라이나 운하의 배수로는 네세의 지류인 플루트그라벤이다. 튀링겐 숲은 고타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2. 역사
고타의 역사는 최소 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마뉴가 서명한 문서에서 ''Villa Gotaha''(고대 고지 독일어로 "좋은 물")로 언급되었다. 17세기 작센-고타 공국의 수도였으며, 19세기 코부르크와 함께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수도로서 번영을 누렸다. 18세기 볼테르가 체류하며 독일 계몽주의 중심지가 되었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가문은 현재 벨기에 및 영국(작센-코부르크-고타 왕조) 왕가, 과거 포르투갈 및 불가리아 왕가의 기원이다.
1875년 독일 사회민주당 창당 당시 강령 초안 (고타 강령)이 카를 마르크스에게 비판받았다(『고타 강령 비판』).
모리 오가이의 소설 『무희』에 나오는 "고타 판 루틴의 귀족보"는 고타에서 인쇄・출판된 러시아 궁정 귀족 계보록을 가리킨다.
2. 1. 중세
고타는 적어도 8세기부터 존재했으며, 775년 샤를마뉴가 서명한 문서에서 ''Villa Gotaha'' (고대 고지 독일어로 "좋은 물"을 의미하는 ''gotaha'')로 언급되었다. 첫 정착지는 아마도 오늘날 도시 중심지 북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Hersdorfplatz'' 주변에 위치했을 것이다. 11세기 동안, 인근의 루도윙 왕조는 이 마을을 받았고, 고타는 아이제나흐 다음으로 두 번째로 중요한 도시가 되면서 12세기 말에 도시를 건설했다. 이 도시는 비아 레지아와 튀링겐 숲을 지나 뮐하우젠에서 프랑코니아로 이어지는 남북 방향의 도로, 두 개의 중요한 장거리 무역로가 교차하는 편리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부를 창출했다. 도시에서 활발한 무역 활동이 있었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 중 하나는 1185년에 도시 중심부에 묻힌 거의 800개의 브락테아테가 포함된 "고타 동전 매장"이다. 1180년, 고타는 처음으로 도시로 언급되었으며, ''Brühl''과 ''Jüdenstraße'' 사이의 지역이 도시 개발의 핵심이 되었고, 이 오래된 무역 도시에서 유대인의 초기 존재를 강조했다.
이 첫 번째 도시 정착지의 교구 교회는 ''Schlossberg''에 있는 성 마리아 교회(1530년 철거)였다. 성(오늘날 프리덴슈타인 성이 있는 부지)은 1217년에 처음 언급되었다. 루도윙 왕조가 1247년에 멸망하면서 고타는 베틴 가문의 영토가 되었고, 1918년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Querstraße'' 동쪽에 있는 ''새로운 도시''는 15세기 초에 건설되었다(''Neumarkt'', 1428년에 처음 언급됨).
시토회 수도원(1258년부터는 아우구스티누스회)은 1251년 이전에 설립되었고 1525년에 폐쇄되었다. 1665년까지 고타의 증권 거래소는 오늘날 시청이 있는 르네상스 건축 건물 내부의 ''Hauptmarkt'' 광장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 중세 시대의 시청은 Hauptmarkt의 북동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며, 오늘날의 ''Innungshalle'' 부지에 위치해 있었다.
고타는 강에 위치해 있지 않기 때문에 물 공급은 큰 문제였다. 1369년, 튀링겐 방백 발타자르는 Leinakanal을 건설했다. 25km가 넘는 이 수로는 튀링겐 숲(Hörsel과 Apfelstädt 강)에서 도시로 신선한 물을 공급했다. 중세 고타의 주요 산업은 천 제조와 쪽 무역이었다.
2. 2. 근대 초기
종교 개혁은 1524년 고타에 도입되었으며, 성은 1530년에서 1541년 사이에 더 큰 요새로 재건되었다. 고타는 1485년 라이프치히 조약 이후 에르네스틴 베틴 영토의 일부였으나, 1547년 슈말칼덴 전쟁, 1572년 에르푸르트 조약 이후 에르네스틴 가문의 권력 상실, 도시가 작센-코부르크의 일부가 된 것과 30년 전쟁은 고타의 쇠퇴를 초래했다. 지역 성인 '그리멘슈타인'은 1572년 제국군에 의해 파괴되었다.[3]
1640년 영토 분할에서 고타가 공작의 거주지로 선택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고, 경건한 에른스트가 작센-고타 공국을 설립했다. 강력한 프로테스탄트이자 절대 군주였던 그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작은 국가를 재조직하기 시작했고, 특히 1642년까지 12세까지 의무 교육을 도입하는 등 학교 시스템을 육성했다.[3] 이것이 고타 시민의 자유로운 교육과 이후 문화적 전성기의 기원이 되었다.
파이트 루드비히 폰 제켄도르프는 공작이 고용한 수많은 경험 많고 충성스러운 공무원 중 한 명이었다. 제켄도르프는 당시 행정 및 공법 분야에서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에른스트의 명령에 따라 쓰여진 그의 저서 『Der teutsche Fürstenstaat』(1656)은 수십 년 동안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는 데 표준 서적으로 사용되었다.[3]
프리덴슈타인 성은 1643년에서 1654년 사이에 지어졌으며 독일 최초의 대규모 바로크 양식 거주 성 중 하나이다.[3] 1657년에서 1676년 사이에 도시는 더 강력한 요새를 받았으며, 이는 1772년에서 1811년 사이에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는 프리덴슈타인 주변의 공원과 도시 주변의 대로가 조성되었다. 1650년에 설립된 공작 도서관(오늘날 에르푸르트 대학교의 일부인 '고타 연구 도서관'), 1712년의 '동전 캐비닛', 오늘날 박물관의 기초가 된 '예술 및 자연 컬렉션', 1788년에 설립된 Seeberg 산의 고타 천문대 등은 중요한 과학 기관이었다. 1767년에 설립된 고타 도자기 제조소는 1800년경 파이앙스로 유명했다.
1774년, "독일 연기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크호프가 이끄는 배우 그룹이 바이마르에서 고타로 왔다. 그는 '슐로스타터'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많은 연극에 직접 출연하면서 1683년 설립된 최초의 독일 궁정 극장의 '감독'이 되었다. 그를 독일 최고의 극장 중 하나로 만들었지만, 1778년 그의 죽음 이후 극장의 명성은 급격히 쇠퇴했다.[3]
유럽 왕족과 귀족의 명부인 『고타 통감』은 1763년에 처음 출판되었고, 유스투스 페르테스는 1785년에 과학 출판 회사를 설립했다. 요제프 마이어는 1826년에 비블리오그래피셰스 인스티튜트를 설립하여 브로크하우스와 함께 독일어로 된 두 개의 주요 백과사전 출판사 중 하나가 되었고, 아돌프 슈티엘러는 1816년 고타에서 처음으로 그의 『핸드아틀라스』를 출판했다. 요한 아담 바이스하우프트(일루미나티의 창시자)는 1830년 고타에서 사망했다. 이 시기에 도시는 상당한 유대인 인구를 형성했다.
2. 3. 1815년 이후
1826년부터 1918년까지 고타는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의 두 수도 중 하나였다.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2세의 통치 아래, 고타는 독일 고전적 자유주의 운동의 중심지였으며, 1848년 독일 혁명의 여파인 고타 나흐파르라멘트가 열렸다. 1851년 이후 소설가이자 독일 통일 옹호자이며 종종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비판했던 구스타프 프라이타크는 지블레벤(현재 고타의 일부)을 여름 별장으로 삼았다. 에른스트 2세는 프라이타크에게 프로이센 정부의 체포 영장이 발부되자 1854년에 그를 ''호프라트''(추밀 고문)로 임명했다.[3]
1875년,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이끄는 사회민주노동자당과 페르디난트 라살이 창립한 전독일노동자협회의 합병을 통해 독일 사회주의 정당(SPD)이 고타에서 창당되었다. 고타 강령으로 알려진 타협안이 마련되었지만, 카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고타 강령 비판''에서 개혁주의적 편향성을 강하게 비판했다.
1876년부터 1908년까지 "독일 과학 소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설가 쿠르트 라스비츠는 튀링겐에서 가장 오래된 ''김나지움''인 고타의 에르네스티눔에서 교사로 일했다.[3]
고타는 1847년 튀링겐 철도와 연결되면서 1850년경 산업화가 시작되었다. 이 도시는 1883년에 설립된 트램 및 비행기 제조업체인 ''고타 차량 공장''과 같은 회사와 함께 엔지니어링의 중심지가 되었다. 19세기 동안 고타는 독일의 은행 및 보험업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에른스트-빌헬름 아르놀디는 1820년에 최초의 화재 보험을 설립했고, 1827년에는 최초의 생명 보험을 설립했다. Gothaer Versicherungsbank|고타어de 상호 보험은 독일에서 가장 큰 보험 회사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쾰른으로 이전했다). 고타의 트램 네트워크는 1894년에 설립되었다. 독일 최초의 화장장은 1878년 고타에 건설되었다.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 (USPD)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SPD의 전쟁 정책에 반대하여 1917년 고타에서 창당된 SPD의 좌파 분파였다. 1918–19년 독일 혁명 동안, 공작은 1918년에 퇴위했다. 1919년 고타에서 극좌 정부가 선출되어 바이마르 국민 의회와 카프-뤼트비츠 폭동 모두에 반대하며 도시를 내전 직전까지 몰고 갔다. 국민 투표 후, 고타 주는 1920년 새로 창설된 ''자유주'' 튀링겐에 합류했다.
나치 통치 하에서, 고타는 약 7,000명의 강제 노동자가 도시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무기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200명 이상이 사망했다. 고타 막사는 남부 외곽에서 확장되었고, 1938년 ''수정의 밤'' 동안 유대교 회당이 파괴되었다. 1944/5년 연합군의 공습으로 도시의 일부 건물, 특히 주립 극장(1958년 동독 당국에 의해 철거됨)과 중앙역(건물의 절반만 남아 있음), 그리고 주요 교회(전쟁 후 재건축됨)가 손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건물의 약 95%는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았다. 고타의 채석장에서 일하던 유대인 노예 노동자들은 1945년 4월 4일, 미국군이 도시를 점령하기 직전에 나치 감독관들에 의해 모두 살해되었다.[4]
1945년 4월에 미국군이 도시에 도착했지만 1945년 7월에 소련군으로 교체되었고, 1949년 고타는 동독의 일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일부 역사적인 시내 지역은 ''Plattenbau'' 건물로 대체되었는데, 특히 하우프트마르크 서쪽과 시내 중심에서 북쪽의 가르텐슈트라세에 위치했다. 다른 많은 건물들은 이후 동독 시대와 1990년대의 도시 쇠퇴기에 황폐해졌지만,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다른 건물들은 개조되었다. 고타의 경제는 1990년 이후 국가에서 시장 경제로의 전환으로 타격을 받았지만, 일부 회사는 살아남거나 새롭게 설립되었으며 고타를 경제적으로 비교적 성공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3. 지리 및 인구
고타는 미테, 베스트슈타트, 베스트, 노르트, 쥐트, 오스트슈타트, 오스트의 7개 도시 구역과 보일슈테트(1994년 편입), 지블레벤(1922년), 준드하우젠(1974년), 윌레벤(1994년)의 4개 농촌 구역, 총 11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또한 고타는 주변의 여러 지역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고타는 튀링겐주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며, 중세 시대에는 5,000~6,000명, 1800년경에는 10,000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했다. 산업화와 철도 연결 이후 인구가 증가하여 1950년에는 58,000명으로 정점에 달했으나,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크게 감소하여 2012년에는 44,000명까지 줄었다. 2013년부터 2016년까지는 인구가 다시 증가하여 2016년에는 45,640명이었다.[5]
2009년과 2012년 사이의 연평균 인구 감소율은 -0.05%였으며,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많은 주민들이 서독이나 다른 동독 주요 도시로 이주했다. 2005년 이후 이주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출생률 감소가 더 큰 문제가 되고 있다.[5] 2012년 출생률 감소는 175명으로, 인구 1,000명당 -3.9명이었다. 같은 해 순이동률은 인구 1,000명당 +6.2명이었다.[6] 고타 이주민의 주요 출신 지역은 튀링겐의 인접한 농촌 지역과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같은 외국이다.
다른 동독 도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은 고타 인구의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구 동독의 공식적인 무신론으로 인해, 대부분의 인구는 비종교적이다.
3. 1. 지형
고타는 비옥한 튀링겐 분지 내의 평평한 지형에 위치해 있다. 단층 파열이 도시를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가로지른다. 이로 인해 3개의 두드러진 언덕이 형성되는데, 북서쪽에는 해발 431m의 크란베르크와 라트홀츠 숲이 있고, 도시 중심부에는 프리덴슈타인 성의 언덕이 있으며, 남동쪽에는 해발 409m의 제베르크가 있다. 도시 자체는 해발 300m에 위치해 있으며, 시 관할 구역은 숲이 거의 없고(두 산은 예외) 집약적인 농업에 이용된다. 독일에서 매우 드문 고대 도시 중 하나인 고타는 강가에 위치해 있지 않아서 중세 시대부터 물 공급이 문제였다. 이러한 이유로 14세기에는 당시 엄청난 작업이었던 25km가 넘는 거리에 걸쳐 라이나 운하가 건설되었다. 라이나 운하는 회르젤과 아펠슈테트 강에서 물을 가져와 엘베 (아펠슈테트)와 베저 (고타) 사이의 분수령을 극복하여 고타로 물을 공급한다. 라이나 운하의 배수로는 네세의 지류인 플루트그라벤이다. 튀링겐 숲은 고타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져 있다.
3. 2. 행정 구역
고타는 11개의 구역으로 나뉜다. 도시 구역으로는 미테, 베스트슈타트, 베스트, 노르트, 쥐트, 오스트슈타트, 오스트가 있으며, 농촌 구역으로는 보일슈테트(1994년 편입), 지블레벤(1922년), 준드하우젠(1974년), 윌레벤(1994년)이 있다.
고타는 골트바흐, 렘슈테트, 부플레벤, 프리마르, 튈레벤, 드라이 글라이헨, 귄터스레벤-베크마르, 슈바바우젠, 엠레벤, 라이나탈, 회르젤과 경계를 접하고 있다.
3. 3. 인구 통계
고타는 오랫동안 튀링겐주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다. 중세 시대에는 인구가 5,000~6,000명 정도였으며, 17세기와 18세기 공작의 거주지로 선정되면서 더욱 발전하여 1800년경에는 이미 10,000명 이상의 인구를 보유하게 되었다. 산업화와 철도 연결 이후 1850년경에는 인구가 15,000명으로 증가했다. 이후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1875년 23,000명, 1900년 35,000명, 1925년 46,000명, 그리고 1950년에는 58,000명으로 정점에 달했다. 1990년까지 인구는 약 57,000명으로 거의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그러나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인구가 크게 감소하여 2000년에는 48,000명, 2012년에는 44,000명으로 줄어들었다. 2013년에서 2016년 사이에는 매년 인구가 증가하여 2016년에는 45,640명에 도달했다.[5]
2009년과 2012년 사이의 연평균 인구 감소율은 -0.05%였으며, 주변 농촌 지역의 인구 감소는 더 가속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교외화는 고타에서 작은 역할만 수행했으며, 1990년대 재통일 이후 잠시 발생했지만 대부분의 교외 지역은 행정 도시 경계 내에 위치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많은 주민들이 서독이나 예나, 에르푸르트와 같은 다른 동독 주요 도시에서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해 고타를 떠났다. 2005년 이후 이주는 더 이상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5] 오늘날에는 인구의 높은 평균 연령으로 인한 출생률 감소가 더 큰 문제이며, 최근 몇 년 동안 이민으로는 이를 보충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사용하지 않는 아파트를 철거하려는 도시 계획 활동에도 불구하고, 2011년에는 공실률이 약 9%로 높았지만 2017년에는 4%로 감소했다. 높은 공실률은 고타의 낮은 임대료 수준으로 이어졌다.
2012년 출생률 감소는 175명으로, 인구 1,000명당 -3.9명이다 (튀링겐 평균: -4.5, 전국 평균: -2.4). 같은 해 순이동률은 인구 1,000명당 +6.2명이었다 (튀링겐 평균: -0.8, 전국 평균: +4.6).[6] 고타 이주민의 가장 중요한 출신 지역은 튀링겐의 인접한 농촌 지역과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세르비아,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같은 외국이다.
다른 동독 도시와 마찬가지로, 외국인은 고타 인구의 적은 부분을 차지한다. 약 2.5%는 시민권 기준으로 비독일인이며, 전체적으로 7.1%는 이주민으로 분류된다 (2011년 EU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전국 평균과 대조적으로, 고타의 가장 큰 이주민 집단은 러시아인, 베트남인 및 우크라이나인이다.
구 동독의 공식적인 무신론으로 인해, 대부분의 인구는 비종교적이다. 18.2%는 중앙 독일 복음주의 교회의 신자이고, 4.8%는 가톨릭 신자이다 (2011년 EU 인구 조사에 따르면).
4. 문화, 관광 명소 및 도시 경관
고타는 다양한 박물관, 역사적 건축물, 도시 경관을 통해 풍부한 문화와 관광 명소를 제공한다.
=== 박물관 ===
고타에는 여러 박물관이 있으며, 이들은 프리덴슈타인 성과 함께 "고타 바로크 유니버스"(Gothaer Barock-Universum)로 홍보된다.
- 프리덴슈타인 성에는 에크호프 극장, 역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성 박물관 등이 있다.
- 성 맞은편 공작 박물관에는 공작의 예술품 컬렉션이 전시되어 있다.
- 바호프슈트라세의 보험 박물관은 독일 보험 사업의 역사를 다룬다.
- 코스마르슈트라세의 티볼리는 독일 사회민주당 창당 장소로, 당 역사를 보여주는 작은 전시관이 있다.

=== 도시 경관 ===
고타 도심은 중세 시대 구시가지(''하우프트마르크트'' 주변)와 신시가지(''노이마르크트'' 주변)로 구성된다. 1810년까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이후 성벽이 철거되고 대로가 건설되었다. 19세기 후반 도시가 확장되면서 중앙역과 도심을 잇는 축은 수도 스타일로 개발되었다. 1870년부터 1914년 사이에는 공작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규모가 큰 건물과 저택이 많이 지어졌다.
일부 외곽 지역에는 독일 노동자 계급의 테넌트(예: ''오스트슈트라세''와 ''제베르크슈트라세'' 주변)가 있다. 서부 외곽에는 동독 시대 말에 세워진 플라텐바우 정착지가 있다. 1980년대에는 서부 구시가지 일부가 철거되고 소규모 ''플라텐바우'' 주택으로 대체되었다. 1990년 이후, 동독 시대에 황폐해졌던 많은 건물들이 개조되었지만, 역사적인 신시가지와 도심 주변에는 여전히 많은 역사적 건물 폐허가 남아있다.
=== 건축 유산 ===
고타에는 바로크 양식,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 교회 ====
- 노이마르크트의 주요 개신교 교회인 '''성 마르가레텐'''은 1494년에서 1543년 사이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클로스터플라츠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성 살바토르'''는 1300년경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옛 수도원으로, 1525년에 해산되었다.
- 프리덴슈타인 성 안의 공작 예배당은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1697년에 설계되었다.
- 에르푸르터 란트슈트라세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프리드리히 교회'''는 1712년에서 1715년 사이에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지블레벤 지구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성 헬레나'''는 1818년에서 1827년 사이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모슬러슈트라세에 있는 가톨릭 교구 교회인 '''성 보니파티우스'''는 1855년에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성과 궁전 ====
작센고타 공작들의 옛 거처는 독일에서 가장 큰 후기 르네상스/초기 바로크 양식의 성 중 하나인 프리덴슈타인 성이다. 프리덴슈타인 성은 U자 형태로 세 개의 날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끝에 두 개의 탑이 있고, 1643년부터 1654년 사이에 지어졌다.[1]
프리드리히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 ''프리드리히스탈 성''은 1707년에서 1711년 사이에 프랑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옛 공작 여름 별장이다.[1]
- ''빈터팔레(Winterpalais)''는 1822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옛 공작 겨울 별장이다.[1]
- ''오랑제리''는 두 개의 대칭적인 오랑제리 건물과 그 사이에 있는 바로크 공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47년에서 1774년 사이에 지어졌다.[1]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 모차르트 거리의 ''프린첸팔레(Prinzenpalais)''는 1776년에 지어진 공작 객실이었다.[1]
- 파르크알레의 ''마르스탈(Marstall)''은 1847년에 지어진 공작 마구간이었다.[1]
- 지블레벤 구역의 ''뫼히호프 성''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공작 여름 별장이었다.[1]

==== 기타 명소 ====
-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은 하우프트마르크트에 위치하며 1566년에서 1574년 사이에 증권 거래소로 지어졌다가 1665년부터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 하우프트마르크트와 브륄 주변에는 15세기와 16세기에 도시의 부를 보여주는 르네상스 시대 귀족 가옥이 여러 채 있다.
- '''성 마리아 병원'''은 과거 시립 병원이었으며 1716년에서 1719년 사이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 메인 묘지에 있는 '''화장터'''는 1878년에 설립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터이다.
- 슐로스베르크의 '''바서쿤스트'''(분수)는 1895년에 라이나카날의 물이 흐르는 세 개의 폭포로 조성되었다.
- 유스투스-페르테스-슈트라세에 있는 '''법원'''은 1895/96년에 역사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 19세기와 20세기 초 고타의 학교 건물들은 인상적인 규모와 디자인을 자랑한다.
학교 이름 | 위치 | 건축 년도 |
---|---|---|
에르네스티넘 | 베르갈레 | 1837/38년 |
미코니우스슐레 | 뷔르거라우 | 1865년 |
헤르초크-에른스트-슐레 | 라인하르츠브루너 슈트라세 | 불명 |
안드레아스-레이허-슐레 | 모차르트슈트라세 | 1898–1900년 |
아르놀디슐레 | 아이제나허 슈트라세 | 1909–1911년 |
구 바우게베르베슐레 | 트뤼츠슐러플라츠 | 1910/11년 |
- 1900년경 고타는 금융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고타의 많은 은행과 보험 건물 역시 건축학적으로 흥미롭다.
건물 이름 | 위치 | 건축가 | 건축 년도 |
---|---|---|---|
도이체 그룬트크레디트방크 | 바호프슈트라세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2–1877년 |
고타어 포이어페르지히루 | 바호프슈트라세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2–1874년 |
고타어 프라이바트방크 | 에크호프플라츠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3–1877년 |
고타어 레벤스페르지히루 | 바호프슈트라세 | 브루노 엘보 | 1893/94년 |
공작 재무실 | 유스투스-페르테스-슈트라세 | 알프레드 크라머 | 1908년 |
- '''가든 시티 암 슈말렌 라인'''은 드레스덴 근처의 헬러라우와 같은 가든 시티 스타일로 1928년에 지어졌다.
- '''슈타트바트 고타'''는 1909년에 지어졌고 2014년에 복원된 아르 누보 스타일의 공중 목욕탕이다.
- 2014년에 개관한 페르테스포럼에는 유스투스 페르테스의 [https://www.uni-erfurt.de/en/forschungscampus-gotha/campus-gotha/akteure/wissen-global 페르테스 기록 보관소](지도 185,000개, 지리 출판물 120,000개, 약 800m 규모의 사업 기록 보관소)이 있다.
4. 1. 박물관
고타는 다양한 박물관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는 공작 건물과 함께 "고타 바로크 유니버스"(Gothaer Barock-Universum)로 홍보되고 있다.- 프리덴슈타인 성에는 다음과 같은 박물관이 있다.
- * '''에크호프 극장'''은 바로크 양식의 궁정 극장으로, 17세기에 제작된 무대 장치를 아직까지 사용할 수 있는 세계 유일의 극장이다.
- * '''역사 박물관'''은 고타의 시 및 지역 역사와 문화를 전시한다.
- * '''자연사 박물관'''은 동물, 광물, 화석을 전시하는 자연사 박물관이다.
- * '''성 박물관'''은 과거 공작의 생활 공간과 여러 문화사적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 성 맞은편에 있는 '''공작 박물관'''은 이집트 골동품,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회화, 중국 및 마이센 도자기 등 공작의 예술품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 바호프슈트라세에 있는 '''보험 박물관'''은 1820년부터 고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보험 사업의 역사를 다루는 독일 유일의 박물관이다.
- 코스마르슈트라세에 있는 '''티볼리'''는 독일 사회민주당이 창당된 곳으로, 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은 전시관이 있다.
4. 2. 도시 경관
고타의 도심은 중세 시대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구시가지는 ''하우프트마르크트'' 주변에, 신시가지는 ''노이마르크트'' 주변에 형성되어 있다. 두 지역 모두 1810년까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성벽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대로가 건설되었다. 근대 초기에 남서쪽(''드라이크로넨가세'' 주변), 서쪽(''그로세 파넨슈트라세'' 주변), 동쪽(''모렌베르크'' 주변)에 교외 지역이 조성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모든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특히 중앙역과 도심을 잇는 축은 수도 스타일로 대표적인 개발이 이루어졌다. 고타가 공작의 거주지였기 때문에 1870년부터 1914년 사이에 건설된 대부분의 건물은 규모가 컸으며 많은 저택이 지어졌다.일부 외곽 지역에서만 전형적인 독일 노동자 계급의 테넌트(예: ''오스트슈트라세''와 ''제베르크슈트라세'' 주변)를 볼 수 있다. 고타에서 가장 큰 플라텐바우 정착지는 동독 시대 말에 서부 외곽에 세워졌다. 1980년대에는 서부 구시가지의 넓은 지역이 철거되고 소규모 ''플라텐바우'' 주택으로 대체되었다. 1990년 이후, 동독 시대에 황폐해졌던 많은 건물들이 철저하게 개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타는 특히 역사적인 신시가지와 도심을 둘러싼 19세기 벨트 안에서, 인접 도시인 아이제나흐, 에르푸르트, 바이마르에 비해 비교적 많은 수의 역사적인 건물 폐허가 남아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정부는 때때로 역사적인 건물을 보존하는 데 실패했는데, 예를 들어 Volkshaus zum Mohren|폴크스하우스 춤 모렌de은 2007년에, Winterpalais (Gotha)|빈터팔레de는 2011년에 철거되었다(후자는 현재 외부적으로 재건축되었다). Orangerie Gotha|오랑게리de는 2006년에 구제되었고, ''프린첸팔레''는 2017년에 복원되었지만 인접한 ''카발리에르하우스''는 철거되었다.[1]
4. 3. 건축 유산
고타에는 바로크 양식, 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의 역사적인 건축물들이 많이 남아 있다.==== 교회 ====
- 노이마르크트의 주요 개신교 교회인 '''성 마르가레텐'''은 1494년에서 1543년 사이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클로스터플라츠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성 살바토르'''는 1300년경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옛 수도원으로, 1525년에 해산되었다.
- 프리덴슈타인 성 안에 있는 공작 예배당은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1697년에 설계되었다.
- 에르푸르터 란트슈트라세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프리드리히 교회'''는 1712년에서 1715년 사이에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지블레벤 지구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성 헬레나'''는 1818년에서 1827년 사이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모슬러슈트라세에 있는 가톨릭 교구 교회인 '''성 보니파티우스'''는 1855년에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성과 궁전 ====
작센고타 공작들의 옛 거처는 독일에서 가장 큰 후기 르네상스/초기 바로크 양식의 성 중 하나인 프리덴슈타인 성이다. 프리덴슈타인 성은 U자 형태로 세 개의 날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끝에 두 개의 탑이 있고, 1643년부터 1654년 사이에 지어졌다.[1]
프리드리히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 ''프리드리히스탈 성''은 1707년에서 1711년 사이에 프랑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옛 공작 여름 별장이다.[1]
- ''빈터팔레(Winterpalais)''는 1822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옛 공작 겨울 별장이다.[1]
- ''오랑제리''는 두 개의 대칭적인 오랑제리 건물과 그 사이에 있는 바로크 공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47년에서 1774년 사이에 지어졌다.[1]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 모차르트 거리의 ''프린첸팔레(Prinzenpalais)''는 1776년에 지어진 공작 객실이었다.[1]
- 파르크알레의 ''마르스탈(Marstall)''은 1847년에 지어진 공작 마구간이었다.[1]
- 지블레벤 구역의 ''뫼히호프 성''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공작 여름 별장이었다.[1]
==== 기타 명소 ====
-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은 하우프트마르크트에 위치하며 1566년에서 1574년 사이에 증권 거래소로 지어졌다가 1665년부터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 하우프트마르크트와 브륄 주변에는 15세기와 16세기에 도시의 부를 보여주는 르네상스 시대 귀족 가옥이 여러 채 있다.
- '''성 마리아 병원'''은 과거 시립 병원이었으며 1716년에서 1719년 사이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 메인 묘지에 있는 '''화장터'''는 1878년에 설립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터이다.
- 슐로스베르크의 '''바서쿤스트'''(분수)는 1895년에 라이나카날의 물이 흐르는 세 개의 폭포로 조성되었다.
- 유스투스-페르테스-슈트라세에 있는 '''법원'''은 1895/96년에 역사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 19세기와 20세기 초 고타의 학교 건물들은 인상적인 규모와 디자인을 자랑한다.
학교 이름 | 위치 | 건축 년도 |
---|---|---|
에르네스티넘 | 베르갈레 | 1837/38년 |
미코니우스슐레 | 뷔르거라우 | 1865년 |
헤르초크-에른스트-슐레 | 라인하르츠브루너 슈트라세 | 불명 |
안드레아스-레이허-슐레 | 모차르트슈트라세 | 1898–1900년 |
아르놀디슐레 | 아이제나허 슈트라세 | 1909–1911년 |
구 바우게베르베슐레 | 트뤼츠슐러플라츠 | 1910/11년 |
- 1900년경 고타는 금융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고타의 많은 은행과 보험 건물 역시 건축학적으로 흥미롭다.
건물 이름 | 위치 | 건축가 | 건축 년도 |
---|---|---|---|
도이체 그룬트크레디트방크 | 바호프슈트라세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2–1877년 |
고타어 포이어페르지히루 | 바호프슈트라세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2–1874년 |
고타어 프라이바트방크 | 에크호프플라츠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3–1877년 |
고타어 레벤스페르지히루 | 바호프슈트라세 | 브루노 엘보 | 1893/94년 |
공작 재무실 | 유스투스-페르테스-슈트라세 | 알프레드 크라머 | 1908년 |
- '''가든 시티 암 슈말렌 라인'''은 드레스덴 근처의 헬러라우와 같은 가든 시티 스타일로 1928년에 지어졌다.
- '''슈타트바트 고타'''는 1909년에 지어졌고 2014년에 복원된 아르 누보 스타일의 공중 목욕탕이다.
- 2014년에 개관한 페르테스포럼에는 유스투스 페르테스의 [https://www.uni-erfurt.de/en/forschungscampus-gotha/campus-gotha/akteure/wissen-global 페르테스 기록 보관소](지도 185,000개, 지리 출판물 120,000개, 약 800m 규모의 사업 기록 보관소)이 있다.
4. 3. 1. 교회
- 노이마르크트의 주요 개신교 교회인 '''성 마르가레텐'''은 1494년에서 1543년 사이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클로스터플라츠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성 살바토르'''는 1300년경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옛 수도원으로, 1525년에 해산되었다.
- 프리덴슈타인 성 안에 있는 공작 예배당은 북동쪽 모서리에 위치하며 1697년에 설계되었다.
- 에르푸르터 란트슈트라세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프리드리히 교회'''는 1712년에서 1715년 사이에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지블레벤 지구에 있는 개신교 교회인 '''성 헬레나'''는 1818년에서 1827년 사이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 모슬러슈트라세에 있는 가톨릭 교구 교회인 '''성 보니파티우스'''는 1855년에 신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4. 3. 2. 성과 궁전
작센고타 공작들의 옛 거처는 독일에서 가장 큰 후기 르네상스/초기 바로크 양식의 성 중 하나인 프리덴슈타인 성이다. 프리덴슈타인 성은 U자 형태로 세 개의 날개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끝에 두 개의 탑이 있고, 1643년부터 1654년 사이에 지어졌다.[1]프리드리히 거리에는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 ''프리드리히스탈 성''은 1707년에서 1711년 사이에 프랑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옛 공작 여름 별장이다.[1]
- ''빈터팔레(Winterpalais)''는 1822년에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옛 공작 겨울 별장이다.[1]
- ''오랑제리''는 두 개의 대칭적인 오랑제리 건물과 그 사이에 있는 바로크 공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747년에서 1774년 사이에 지어졌다.[1]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건축물들이 있다.
- 모차르트 거리의 ''프린첸팔레(Prinzenpalais)''는 1776년에 지어진 공작 객실이었다.[1]
- 파르크알레의 ''마르스탈(Marstall)''은 1847년에 지어진 공작 마구간이었다.[1]
- 지블레벤 구역의 ''뫼히호프 성''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진 공작 여름 별장이었다.[1]
4. 3. 3. 기타 명소
- '''르네상스 양식의 시청'''은 하우프트마르크트에 위치하며 1566년에서 1574년 사이에 증권 거래소로 지어졌다가 1665년부터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다.
- 하우프트마르크트와 브륄 주변에는 15세기와 16세기에 도시의 부를 보여주는 르네상스 시대 귀족 가옥이 여러 채 있다.
- '''성 마리아 병원'''은 과거 시립 병원이었으며 1716년에서 1719년 사이에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 메인 묘지에 있는 '''화장터'''는 1878년에 설립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화장터이다.
- 슐로스베르크의 '''바서쿤스트'''(분수)는 1895년에 라이나카날의 물이 흐르는 세 개의 폭포로 조성되었다.
- 유스투스-페르테스-슈트라세에 있는 '''법원'''은 1895/96년에 역사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 19세기와 20세기 초 고타의 학교 건물들은 인상적인 규모와 디자인을 자랑한다.
학교 이름 | 위치 | 건축 년도 |
---|---|---|
에르네스티넘 | 베르갈레 | 1837/38년 |
미코니우스슐레 | 뷔르거라우 | 1865년 |
헤르초크-에른스트-슐레 | 라인하르츠브루너 슈트라세 | 불명 |
안드레아스-레이허-슐레 | 모차르트슈트라세 | 1898–1900년 |
아르놀디슐레 | 아이제나허 슈트라세 | 1909–1911년 |
구 바우게베르베슐레 | 트뤼츠슐러플라츠 | 1910/11년 |
- 1900년경 고타는 금융 산업의 중심지였으며, 고타의 많은 은행과 보험 건물 역시 건축학적으로 흥미롭다.
건물 이름 | 위치 | 건축가 | 건축 년도 |
---|---|---|---|
도이체 그룬트크레디트방크 | 바호프슈트라세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2–1877년 |
고타어 포이어페르지히루 | 바호프슈트라세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2–1874년 |
고타어 프라이바트방크 | 에크호프플라츠 | 루드비히 본슈테트 | 1873–1877년 |
고타어 레벤스페르지히루 | 바호프슈트라세 | 브루노 엘보 | 1893/94년 |
공작 재무실 | 유스투스-페르테스-슈트라세 | 알프레드 크라머 | 1908년 |
- '''가든 시티 암 슈말렌 라인'''은 드레스덴 근처의 헬러라우와 같은 가든 시티 스타일로 1928년에 지어졌다.
- '''슈타트바트 고타'''는 1909년에 지어졌고 2014년에 복원된 아르 누보 스타일의 공중 목욕탕이다.
- 2014년에 개관한 페르테스포럼에는 유스투스 페르테스의 [https://www.uni-erfurt.de/en/forschungscampus-gotha/campus-gotha/akteure/wissen-global 페르테스 기록 보관소](지도 185,000개, 지리 출판물 120,000개, 약 800m 규모의 사업 기록 보관소)이 있다.
5. 경제 및 인프라
최근 몇 년 동안 고타시의 경제 상황은 개선되었다. 2005년 17%였던 고타 지역의 실업률은 2013년 7%로 감소했다.[7]
차량 제조는 여전히 고타에서 중요한 산업이다. 1990년 이후 고타 차량 공장은 슈미츠 카고불 공장(800명 고용)과 크레인 제조업체인 '고타 차량 기술'(400명 직원) 두 개의 후계 회사를 두었다. 파울라너 양조장에 속한 양조장은 300명의 직원이 있다. 2012년에는 산업 부문에 20명 이상의 근로자를 고용한 28개의 회사가 있었으며, 3,3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8.5억유로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7]
과거 주도(1920년까지)이자 구도였던 고타는 공공 및 민간 서비스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시내 중심가에는 몇몇 소매점이 있으며, 남서쪽 외곽에는 통일 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이 건설되었다. 프리덴슈타인 병영은 튀링겐에서 가장 큰 독일 연방군 기지 중 하나이다. 또한, 주 역사 기록 보관소인 Thüringisches Staatsarchiv Gotha|튀링기셰 슈타츠아르히브 고타de와 주의 재판소가 고타에 위치해 있다.
고타는 튀링겐 철도로 연결되어 동쪽의 에르푸르트와 라이프치히, 서쪽의 프랑크푸르트/카셀을 연결한다. 장거리 열차(ICE 또는 IC)는 서쪽의 프랑크푸르트와 동쪽의 라이프치히/드레스덴을 2시간 간격으로 연결하며, 지역 급행 열차도 운행된다.
아우토반 4번 (프랑크푸르트–드레스덴)와 아우토반 71번 (슈바인푸르트–장거하우젠)이 ''에르푸르터 크로이츠''에서 교차한다. 또한, 고타를 연결하는 연방 도로인 7번 연방 도로와 247번 연방 도로가 있다.
에르푸르트-바이마르 공항은 고타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져 있으며, 남부 유럽 관광지로의 휴가 항공편에 사용된다. 다음 주요 공항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남서쪽으로 약 250km 떨어져 있다.
1990년대에 품질 좋은 자전거 도로 건설이 시작되면서 자전거 타기가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다. 관광객을 위해 중세 ''비아 레지아''를 따라 아이제나흐에서 고타, 에르푸르트, 바이마르, 예나를 거쳐 알텐부르크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라트베크 튀링거 슈테테케테''(튀링겐 도시 연결 도로)가 있다.
고타 트램은 세 개의 노선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22km 길이의 ''Thüringerwaldbahnde''(튀링거발트반)은 바트타바르츠 등으로 연결된다.
5. 1. 농업, 산업 및 서비스
고타 주변 지역은 비옥한 토지로 인해 농업이 여전히 중요하다. 시 면적의 60% 이상이 옥수수, 곡물, 채소, 사탕무 재배를 위한 농업 용지로 사용된다.차량 제조는 여전히 고타에서 가장 중요한 산업이다. 잘 알려진 고타 차량 공장은 1990년 이후 두 개의 후계 회사를 두었다. 800명의 노동자를 고용한 슈미츠 카고불 공장인 '고타 차량 공장'과 400명의 직원을 둔 크레인 제조업체인 '고타 차량 기술'이다. 양조장은 파울라너 양조장에 속하며 300명의 직원이 있다. 2012년에는 산업 부문에 20명 이상의 근로자를 고용한 28개의 회사가 있었으며, 3,300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8.5억유로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7] 오래된 산업 지구는 고타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1990년 이후 남쪽에 새로운 산업 지구가 개발되었다. 또한, 인접한 작은 도시인 발터스하우젠과 튀링겐 오르도르프는 강력한 산업 중심지를 가지고 있으며, 고타에서 많은 통근자들이 일자리를 찾았다.
과거 주도(1920년까지)이자 구도였던 고타는 공공 및 민간 서비스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시내 중심가에는 몇몇 소매점이 있으며, 남서쪽 외곽에는 통일 이후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병원이 건설되었다. 프리덴슈타인 병영은 튀링겐에서 가장 큰 독일 연방군 기지 중 하나이다. 또한, 주 역사 기록 보관소인 Thüringisches Staatsarchiv Gotha|튀링기셰 슈타츠아르히브 고타de와 주의 재판소가 고타에 위치해 있다. 다양한 명소와 다채로운 역사에도 불구하고, 관광은 아직 고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2012년에는 고타에서 68,000명의 숙박객이 154,000박을 했다(아이제나흐에서는 310,000명, 바이마르에서는 650,000명, 에르푸르트에서는 750,000명). 지난 10년 동안 관광객 수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다.[8]

5. 2. 교통
고타는 동쪽의 에르푸르트와 라이프치히, 서쪽의 프랑크푸르트/카셀을 연결하는 튀링겐 철도로 연결된다. 또한, 고타에서 라이네펠데(뮐하우젠 경유)와 그레펜로다로 가는 일부 지역 철도가 있다(후자는 2011년부터 운행 중단). 장거리 열차(ICE 또는 IC)는 서쪽의 프랑크푸르트와 동쪽의 라이프치히/드레스덴을 2시간 간격으로 연결하며, 에르푸르트와 예나를 경유하여 북서쪽의 괴팅겐과 동쪽의 츠비카우/글라우하우로 가는 지역 급행 열차도 운행된다. 서쪽의 아이제나흐, 동쪽의 할레(에르푸르트와 바이마르 경유) 및 북쪽의 바트랑겐잘차로 가는 지역 열차는 매시간 출발한다.아우토반 4번 (프랑크푸르트–드레스덴)와 아우토반 71번 (슈바인푸르트–장거하우젠)이 ''에르푸르터 크로이츠''에서 교차한다. 또한, 고타를 연결하는 두 개의 연방 도로가 있는데, 서쪽의 아이제나흐에서 동쪽의 에르푸르트까지의 7번 연방 도로와 남쪽의 오르도르프에서 북쪽의 뮐하우젠까지의 247번 연방 도로이다. 고타에서 북동쪽의 바트텐슈테트, 남동쪽의 아른슈타트, 남서쪽의 발터스하우젠 및 북서쪽의 골트바흐로 이어지는 중요한 지방 도로가 있다. B 247을 따라 도시 중심부의 통과 교통량을 줄이기 위한 동부 우회 도로가 계획 중이다.
에르푸르트-바이마르 공항은 고타에서 동쪽으로 20km 떨어져 있으며, 남부 유럽 관광지로의 휴가 항공편에 사용된다. 다음 주요 공항은 프랑크푸르트 공항으로, 남서쪽으로 약 250km 떨어져 있다.
1990년대에 품질 좋은 자전거 도로 건설이 시작되면서 자전거 타기가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다. 관광객을 위해 중세 ''비아 레지아''를 따라 아이제나흐에서 고타, 에르푸르트, 바이마르, 예나를 거쳐 알텐부르크까지 이어지는 장거리 ''라트베크 튀링거 슈테테케테''(튀링겐 도시 연결 도로)가 있다.
고타 트램은 세 개의 노선으로 구성되어, 도시 중심부와 남동쪽의 고타역, 북동쪽의 고타 동역, 남서쪽의 순트하우젠 지구의 병원을 연결한다. 22km 길이의 ''Thüringerwaldbahnde''(튀링거발트반, 1929년 설립)은 독일 마지막 전통적인 광역 트램 노선 중 하나이며, 바트타바르츠, 발터스하우젠 및 프리드리히로다로 연결된다. 이는 일상 교통과 관광객 모두에게 사용된다. 버스는 트램이나 철도 연결이 없는 도시 지역과 인근 마을에 서비스를 제공한다.
5. 2. 1. 철도
독일 철도(DB)- 튀링겐 본선
- * 고타역
- 고타-그레펜로다선
- * 고타역
- 고타-라이네펠데선
- * 고타역, 고타 동역
; 튀링겐 숲 철도·고타 시내 전차 (TWSB)
- 고타 시내 전차
5. 2. 2. 대중 교통
도이치반 (DB)- 튀링겐 본선
- * 고타역
- 고타-그레펜로다선
- * 고타역
- 고타-라이네펠데선
- * 고타역 - 고타 동역
; 튀링겐 숲 철도·고타 시내 전차 (TWSB)
- 고타 시내 전차
6. 교육 및 연구
고타에는 에르네스틴 김나지움을 포함하여 3개의 주립 김나지움이 있다. 또한, 50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인 튀링겐 공공 행정 전문대학, 튀링겐 재무부 산하 학교, 튀링겐 측지청 산하 학교도 고타에 있다.
근대 초기 역사에 중점을 둔 연구는 고타 연구 도서관, 주립 기록 보관소, 그리고 프리덴슈타인 성의 박물관을 운영하는 "프리덴슈타인 재단"에 의해 수행된다.
7. 정치
고타의 정치는 사회민주당(SPD)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2024년 시장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 소속 크누트 크로이치가 당선되었고, 2019년 시의회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제1당을 차지했다.
구체적으로 2024년 5월 26일에 실시된 시장 선거에서 크누트 크로이치는 1차 투표에서 49.5%를 득표하였고, 6월 9일 결선 투표에서 62.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2019년 5월 26일 시의회 선거에서는 사회민주당이 33.9%의 득표율로 12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24.4%로 9석,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은 17.6%로 6석을 기록했다.
7. 1. 시장 및 시의회
2024년 5월 26일에 시장 선거가 치러졌으며, 결선 투표는 6월 9일에 진행되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후보 | 정당 | 1차 투표 (득표수) | 1차 투표 (%) | 2차 투표 (득표수) | 2차 투표 (%) | |
---|---|---|---|---|---|---|
크누트 크로이치 | 사회민주당 | 9,456 | 49.5 | 11,481 | 62.9 | |
로베르트 루흔 | 기독교민주연합 | 4,023 | 21.0 | 6,769 | 37.1 | |
옌스 피들러 | 독일을 위한 대안 | 3,900 | 20.4 | |||
클라우스 슈미츠-기엘스도르프 | 좌파당 | 1,004 | 5.3 | |||
니콜 슐미트 | 무소속 | 729 | 3.8 | |||
유효 투표 | 19,112 | 99.1 | 18,250 | 96.7 | ||
무효 투표 | 170 | 0.9 | 628 | 3.3 | ||
총 투표 | 19,282 | 100.0 | 18,878 | 100.0 | ||
유권자/투표율 | 36,236 | 53.2 | 36,166 | 52.2 |
2019년 5월 26일에 시의회 선거가 치러졌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정당 | 선두 후보 | 득표수 | % | 의석 |
---|---|---|---|---|
사회민주당 (SPD) | 마티아스 헤이 | 18,683 | 33.9 | 12 |
독일을 위한 대안 (AfD) | 옌스 피들러 | 13,456 | 24.4 | 9 |
기독교민주연합 (CDU) | 막시밀리안 플라이드너 | 9,678 | 17.6 | 6 |
사라 바겐크네히트 동맹 (BSW) | 마르고 베라 피츠케 | 4,682 | 8.5 | 3 |
자유 유권자/해적당 (FWG–Piraten) | 율리아네 퓌르스팅거 | 3,785 | 6.9 | 3 |
녹색당 (Grüne) | 펠릭스 칼베 | 1,947 | 3.5 | 1 |
좌파당 (Die Linke) | 세바스티안 포크트 | 1,866 | 3.4 | 1 |
자유민주당 (FDP) | 슈테피 지겐발크 | 949 | 1.7 | 1 |
유효 투표 | 55,046 | 100.0 | ||
무효 투표 | 598 | 3.1 | ||
총 투표수 | 19,229 | 96.9 | ||
유권자/투표율 | 36,236 | 53.1 |
8. 자매 도시
참조
[1]
웹사이트
Gewählte Bürgermeister - aktuelle Landesübersicht
https://wahlen.thuer[...]
2024-06-25
[2]
문서
From 1885 till 2004 this was, especially in the 19th century, one of the leading publishers in the world in the fields of [[geography]] and [[cartography]].
[3]
서적
Thüringen - Literarische Streifzüge (German)
Artemis & Winkler (Patmos)
[4]
서적
The Holocaust Chronicle
Publications International
2000
[5]
웹사이트
Aktuelle Zahlen
http://www.gotha.de/[...]
2017-11-16
[6]
웹사이트
Thüringer Landesamt für Statistik
http://www.tls.thuer[...]
[7]
웹사이트
Thüringer Landesamt für Statist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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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웹사이트
Thüringer Landesamt für Statistik
http://www.tls.thuer[...]
[9]
웹사이트
Städtepartnerschaften
https://www.gotha.de[...]
Gotha
2019-12-02
[10]
간행물
Population GER-TH
SOURCE
16067029
[11]
웹사이트
"Bevölkerung nach Gemeinden, erfüllenden Gemeinden und Verwaltungsgemeinschaften"
http://www.statist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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