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파비우스 씨족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 한니발의 군대에 맞서 지구전술인 파비안 전략을 구사한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이다. 그는 10세에 아우구르로 임명되어 62년간 그 직을 수행했으며, 집정관, 독재관, 감찰관 등을 역임했다. 한니발의 이탈리아 침공 당시, 정면 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통해 한니발을 약화시키는 전술을 펼쳤으나, 처음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후 칸나이 전투 패배 이후 그의 전략이 재평가되었으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프리카 원정에는 반대했다. 그는 "로마의 방패"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그의 이름은 파비안 전략의 어원이 되었고, 후대에도 군사적, 정치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파비우스 씨족 - 교황 파비아노
    교황 파비아노는 평신도에서 기적적으로 교황이 되어 로마 교회를 재정비하고 갈리아에 선교사를 파견했으며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기에 순교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20대 교황이다.
  • 파비우스 씨족 - 마르쿠스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
    마르쿠스 파비우스 퀸틸리아누스는 1세기 로마의 수사학자이자 교육자로, 《웅변가 양성론》에서 웅변술과 웅변가의 인격 함양을 강조하여 후대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기원전 203년 사망 - 마고 바르카
    마고는 카르타고 엘리트 계층에서 흔한 이름으로, 카르타고 제국 건설자, 제2차 포에니 전쟁의 장군, 농업 서적 저술가 등 역사 속 여러 인물들이 존재한다.
  • 기원전 203년 사망 - 여선왕
    여선왕은 여씨 가문의 시조로 추정되며, 그의 후손으로는 여택, 여치 등이 있고, 특히 딸 여치는 유방의 황후가 되어 여씨 천하를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 쿤크타토르
로마자 표기Quintus Fabius Maximus Verrucosus Cunctator
다른 이름쿤크타토르 (Cunctator, "지연가" 또는 "꾸물거리는 자"라는 의미)
퀸투스 파비우스 쿤크타토르, J. B. Hagenauer의 조각상 (1777), 쇤브룬 궁전, 비엔나
퀸투스 파비우스 쿤크타토르, J. B. Hagenauer의 조각상 (1777), 쇤브룬 궁전, 비엔나
생애
출생기원전 280년경
사망기원전 203년
국적로마
직업 및 관직
주요 활동파비안 전략 창시
관직집정관 (기원전 233년, 228년, 215년, 214년, 209년)
독재관 (기원전 221년, 217년)
감찰관 (기원전 230년)
자녀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수상풀잎관
로마 개선식
군사 경력
주요 전투제2차 포에니 전쟁 (아게르 프레르누스, 게로니움, 카푸아 포위전, 제2차 타렌툼)

2. 초기 생애 및 경력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는 로마의 유서 깊은 파트리키 가문인 파비우스 씨족 출신으로, 기원전 280년경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여러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가였으며, 특히 삼니움 전쟁의 영웅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의 손자 또는 증손자로 여겨진다. 그는 윗입술의 사마귀 때문에 '베루코수스'(Verrucosus|사마귀la)라는 코그노멘으로 불렸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어린 시절에는 온화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파비우스는 기원전 265년 어린 나이에 아우구르로 임명되어 사망할 때까지 62년간 그 직책을 유지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241년) 참전 여부는 불확실하며, 그의 본격적인 정치 경력은 전쟁 이후 시작되었다.

그는 로마의 관직 역임 과정인 쿠르수스 호노룸을 따라 퀘스토르(아마도 기원전 237년 또는 236년), 아에딜리스(기원전 235년경)를 거쳐 기원전 233년과 기원전 228년 두 차례 집정관을, 기원전 230년에는 감찰관을 역임했다. 첫 집정관 임기 중에는 리구리아인을 상대로 승리하여 로마 개선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첫 독재관 직을 맡았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직전인 기원전 218년, 한니발의 사군툼 점령 이후 카르타고에 파견된 로마 사절단에 파비우스가 참여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리비우스는 파비우스가 사절단의 일원으로 카르타고 원로원에 한니발의 인도를 요구하고, 거절당하자 전쟁을 선포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카시우스 디오는 이 사절을 "마르쿠스 파비우스"라고 지칭하며, 전쟁을 선포한 인물은 파비우스의 사촌인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였다고 주장한다.

2. 1. 초기 경력

기원전 280년경 로마에서 태어난 파비우스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파비우스 씨족의 후손이었다. 그는 세 번 집정관을 지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게르게스의 아들이거나 손자이며, 삼니움 전쟁의 영웅으로 다섯 번의 집정관직과 독재관, 감찰관을 역임한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룰리아누스의 손자 또는 증손자로 여겨진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많은 집정관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의 코그노멘인 '베루코수스'(Verrucosus|베루코수스la)는 '사마귀'라는 뜻으로, 그의 윗입술에 있던 사마귀에서 유래되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파비우스는 어린 시절 온화하고 말이 느렸으며 배우는 속도도 더뎠다고 한다. 운동에는 신중했고 태도가 소심해 보이기도 했다. 겉보기에는 무능해 보였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신중함과 내면의 확고함, 사자 같은 기질을 감춘 모습으로 판단했다. 실제로 그는 성인이 되어 공직 생활의 도전에 직면하면서 그의 덕목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파비우스는 어린 나이인 기원전 265년에 아우구르(종교관)로 선출되어, 이후 사망할 때까지 62년간 그 직책을 유지했다. 제1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년-241년)에 참여했는지, 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파비우스의 정치 경력은 그 전쟁 이후에 시작되었다. 그는 로마의 고위 관직 등용 코스인 쿠르수스 호노룸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파비우스의 초기 경력 (추정)
연도 (기원전)관직비고
265년아우구르어린 나이에 임명, 62년간 유지
237년 또는 236년퀘스토르 (재무관)
235년아에딜리스 쿠룰리스 (안찰관)
233년로마 집정관 (첫 번째)리구리아인을 상대로 승리하여 로마 개선식 거행
230년로마 감찰관 (켄소르)
228년로마 집정관 (두 번째)



기원전 233년 첫 번째 집정관 임기 동안, 파비우스는 리구리아인을 성공적으로 격파하고 알프스 산맥 너머로 몰아낸 공로로 로마 개선식을 거행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기원전 230년에는 로마 감찰관을, 기원전 228년에는 두 번째로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가 이 시기에 처음으로 독재관 직을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역사가 리비우스에 따르면, 기원전 217년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명은 그가 그 직책을 두 번째로 맡은 것이며, 첫 번째 임기 때의 기병장관(Magister Equitum, 독재관의 부관)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였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플라미니우스가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의 기병장관이었다고 다르게 전한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플라미니우스가 불길한 징조로 인해 일찍 해임된 미누키우스의 뒤를 이어 파비우스 밑에서도 기병장관을 맡았을 가능성, 혹은 첫 독재관 임기가 집정관 부재 시 선거를 실시하는 것 외에는 주목할 만한 일이 거의 없었을 가능성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3. 제2차 포에니 전쟁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 도시인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막이 올랐다. 사군툼의 구원 요청을 받은 로마는 카르타고에 공격 중지를 요구하는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때 파비우스도 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카르타고가 로마의 요구를 거부하고 사군툼마저 함락되자, 파비우스는 사절단을 대표하여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다.

전쟁 초기, 로마는 기원전 218년 트레비아 전투와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했다. 특히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는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수도 로마는 한니발의 침공 위협 앞에 큰 공포에 휩싸였다.

두 번의 대패로 집정관 군대가 사실상 궤멸되고 국가적 위기가 최고조에 달하자, 로마 원로원은 비상 대책으로 독재관을 임명하기로 결정했다.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나이와 풍부한 경험을 높이 사 그를 독재관으로 선출했다. 이는 통상적인 집정관의 추천 절차를 생략한 이례적인 조치였다. 다만, 독재관의 부관인 기병대장은 파비우스가 직접 임명하지 못하고, 원로원은 그의 정적인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를 임명했다.

독재관이 된 파비우스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혼란을 수습하고 로마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했으며, 종교 의식을 통해 민심을 다독이고자 했다.[13] 그는 한니발과의 정면 결전을 피하고, 대신 적을 끈질기게 추격하며 병참을 압박하는 지구전(소모전)을 통해 서서히 적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했다. 이는 훗날 '파비우스 전략'으로 불리게 된다.

3. 1. 한니발과의 대결 (파비안 전략)

기원전 219년,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이 로마의 동맹국인 사군툼을 공격하면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마는 파비우스를 포함한 사절단을 카르타고에 파견했으나 요구는 거부되었고, 파비우스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했다.[13] 로마는 기원전 218년 트레비아 전투와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 연이어 참패하며 큰 위기에 빠졌다. 특히 트라시메노 호수 전투에서는 집정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전사하고 로마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로마 원로원은 이례적으로 독재관을 임명하기로 결정하고, 고령과 경험을 고려하여 파비우스를 선택했다. 하지만 기병대장은 정치적 라이벌인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가 임명되었다. 독재관이 된 파비우스는 종교 의식을 통해 민심을 수습하고, 리크토르 24명을 대동하고 생존 집정관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보이며 혼란을 진정시키려 했다.[13]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파비우스는 한니발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고 정면 대결을 피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는 한니발 군대를 끈질기게 추격하되 직접적인 전투는 피하면서, 병참을 공격하고 주변 지역을 불태워 보급을 차단하는 초토화 전술을 병행했다. 이는 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는 한니발 군대를 서서히 약화시키려는 장기적인 소모전 전략이었다. 이 전략은 훗날 '파비안 전략'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지구전 전략은 즉각적인 승리를 원했던 로마 시민들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에게 큰 불만을 샀다. 그들은 파비우스에게 '쿤크타토르'(lat), 즉 '지연시키는 자'라는 경멸적인 별명을 붙였다. 특히 기병대장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는 파비우스의 전략에 공개적으로 반발했다. 파비우스가 종교 행사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미누키우스는 명령을 어기고 한니발군을 공격하여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성급한 승리에 목말랐던 로마인들은 미누키우스를 영웅으로 칭송했고, 호민관 메틸리우스의 주도로 미누키우스는 파비우스와 동등한 지휘권을 얻게 되었다.[14]

파비우스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미누키우스에게 절반의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미누키우스는 곧바로 게로니움 전투에서 한니발의 유인책에 말려들어 군대가 전멸할 위기에 처했다. 이를 지켜보던 파비우스는 즉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미누키우스를 구원했고, 한니발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전투 후 미누키우스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파비우스에게 지휘권을 반납하며 그의 전략적 안목을 인정했다.[14]

파비우스의 독재관 임기가 끝난 후, 기원전 216년 새로 선출된 집정관 바로와 아이밀리우스는 파비우스의 전략을 무시하고 한니발과의 결전을 강행했다. 그러나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했고, 약 7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 뼈아픈 패배 이후 로마인들은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의 가치를 깨닫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심지어 한니발조차 파비우스의 전략과 로마의 끈질긴 저항력을 두려워했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09년 파비우스가 타렌툼을 탈환했을 때, 한니발은 "로마인들도 그들만의 한니발을 찾았구나. 우리가 타렌툼을 빼앗긴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잃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5]

3. 2. 미누키우스와의 갈등

파비우스한니발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여 결전을 피하는 대신, 한니발 군대를 가까이에서 따라다니며 장기적인 소모전을 통해 적을 지치게 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는 카르타고군의 식량 징발 부대를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로마군 점령지 주변을 불태워 적의 보급을 차단하는 "초토화 전술"을 사용하면서 로마군의 군사력은 최대한 보존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한 방어 전략은 즉각적인 승리를 원했던 로마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지 못했고, 파비우스는 '쿤타토르'(Cunctator|쿤크타토르la, '지연시키는 자')라는 다소 경멸적인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략은 로마 군대 지휘부 내의 단결력 부족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실패했는데, 특히 파비우스의 기병대장(Magister Equitum)이자 정치적 경쟁자였던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와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한번은 파비우스가 종교 의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면서 미누키우스에게 군 지휘권을 맡겼는데, 이때 파비우스는 절대 한니발을 공격하지 말라고 명확히 지시했다. 하지만 미누키우스는 이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 카르타고군을 공격했다.

미누키우스의 공격은 전략적으로 큰 의미는 없었지만, 일부 카르타고 부대를 후퇴시키는 작은 성과를 거두었다. 승리에 목말랐던 로마 시민들은 이 소식에 열광하며 미누키우스를 영웅으로 치켜세웠다. 이 소식을 들은 파비우스는 격노했으며, 독재관으로서 명령 불복종을 이유로 미누키우스를 처형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 중 한 명이었던 메틸리우스는 미누키우스의 강력한 지지자였고, 자신의 정치적 권한을 이용해 그를 보호했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메틸리우스는 민중에게 미누키우스를 지지할 것을 호소하며 그에게 파비우스와 동등한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도록 평민회에 요청했다.

파비우스는 미누키우스의 권한 상승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그의 성급함이 결국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 예상하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는 미누키우스에게 "우리의 진정한 적은 한니발이지, 당신이 아니다"라고 상기시켰다고 전해진다. 미누키우스는 군대의 지휘권을 격일로 번갈아 맡자고 제안했지만, 파비우스는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군대를 절반으로 나누어 각자 지휘하는 방식을 택했다. 미누키우스는 파비우스가 카르타고군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한다며 공개적으로 그를 비겁하다고 비난했다.

사문니움 지역의 라리눔(현 몰리세주 랠리노) 근처에서 한니발은 게로니움이라는 마을에 진을 치고 있었다. 게로니움 전투에 앞서 미누키우스는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있던 한니발 군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하고 선제적으로 공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한니발이 미리 파놓은 함정이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의 매복과 역습에 걸려 순식간에 큰 피해를 입고 거의 전멸될 위기에 처했다. 이 참혹한 광경을 지켜보던 파비우스는 "오, 헤라클레스! 미누키우스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그가 바랐던 것보다 늦게 스스로를 파멸시켰구나!"라고 외치며 자신의 군대에 즉시 동료 로마인들을 구출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용감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미누키우스를 구해야 한다"고 외치며 위험에 빠진 미누키우스 군대를 돕기 위해 전장으로 달려갔다.

파비우스의 군대가 전투에 개입하자 한니발의 군대는 즉시 후퇴했다. 전투 후, 미누키우스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파비우스의 진영으로 가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인정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저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당신은 제 생명을 구하셨습니다. 당신은 저의 두 번째 아버지입니다. 저는 지휘관으로서 당신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합니다."[14] 이 사건을 계기로 미누키우스는 파비우스의 지휘권 아래로 돌아왔고, 군대의 분열은 일단락되었다.

3. 3. 칸나이 전투 이후

기원전 216년,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와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이끈 로마군이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에게 참패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지자,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은 큰 충격에 빠졌다. 이전에는 파비우스의 신중한 전략을 비난했지만, 이제는 그에게 의지하며 조언을 구했다. 파비우스는 로마 거리를 걸으며 시민들을 위로하고 로마의 최종 승리를 확신시켰다. 그의 지도력이 없었다면 공포에 질린 원로원은 회의조차 열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는 혼란 속에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도시 문에 경비병을 배치하여 시민들의 도주를 막고, 애도 활동을 규제하여 기간과 장소를 정하고 각 가정이 사적인 공간에서 한 달 내에 마치도록 했다. 애도 기간이 끝난 후에는 도시 전체의 정화 의식을 거행했다.[16] 비록 다시 독재관 직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가 제안하는 모든 조치가 별다른 논의 없이 즉시 채택되면서 사실상 비공식적인 독재관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패배를 계기로 원로원과 민중은 한니발에게 정면으로 맞서서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이전에 그를 비난하며 불렀던 '쿵크타토르'(Cunctator|쿤크타토르la, 굼뜬 사람)라는 별명은 이제 '신중하고 주도면밀한 사람'이라는 의미의 명예로운 칭호로 바뀌었다.

기원전 215년, 정규 집정관으로 선출된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취임 전 전사하자, '로마의 검'이라 불리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보충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선거 절차상의 문제로 마르켈루스가 사임하면서 파비우스가 다시 보충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먼저 칼레스에 주둔한 뒤 동료 집정관과 합류하여 카푸아 주변을 약탈하고 푸테올리를 요새화했다.

기원전 214년에는 마르켈루스와 함께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지구전을 계속 펼쳤다. 이후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로마군과 한니발군 사이에 결정적인 대규모 전투는 피하면서 소규모 교전만 이어졌다. 전쟁의 주 무대는 시칠리아 섬, 이베리아 반도, 북아프리카 등지로 옮겨갔다. 파비우스의 예상대로 이탈리아에서 고립된 한니발과 그의 군대는 점차 약화되었고, 결국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파비우스의 군사적 업적 중 하나로 기원전 209년 타렌툼 점령이 꼽히지만, 이는 도시 내부의 협력 덕분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눈에 띄는 화려한 무공이 적다고 해서 그의 군사적 능력이 평가절하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뛰어난 전략적 안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독재관 이후에도 세 차례나 집정관을 역임하며 보여준 뛰어난 지도력과 방어 중심의 전략으로 그는 '''"로마의 방패"'''로 칭송받았다(반면 마르켈루스는 '''"로마의 검"'''으로 불렸다).

말년에 파비우스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북아프리카 원정을 추진하는 것에 대해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함께 반대 입장을 보였다. 이는 그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에서 한니발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여겼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스키피오의 원정은 진행되었고, 파비우스는 포에니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기원전 203년,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4. 후기 생애 및 업적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 군대가 한니발에게 참패하자, 원로원과 민중은 정면 대결로는 한니발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파비우스의 지구전 전략이 옳았음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처음에는 "굼뜬 사람"이라는 비난의 의미였던 '쿵크타토르'라는 별명은 "신중하고 지연 전술에 능한 사람"이라는 명예로운 호칭으로 바뀌었다.[17][18]

파비우스는 독재관 임기를 마친 후에도 로마 정치 및 군사 활동에 깊이 관여했다. 기원전 215년, 정규 집정관으로 선출된 루키우스 포스투미우스 알비누스가 갈리아인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보충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나 선거 문제로 사임했고, 파비우스가 다시 보충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칼레스에 주둔하며 동료 집정관과 합류하여 카푸아 주변을 약탈하고 푸테올리를 요새화하는 등 군사 활동을 이어갔다. 기원전 214년에는 마르켈루스와 함께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지구전을 계속 펼쳤다. 기원전 209년에는 다섯 번째로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의 군사적 성공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기원전 209년 타렌툼을 재정복한 것이다. 비록 성 내부의 내응에 의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이 승리로 그는 첫 번째 개선식보다 더 화려한 두 번째 개선식을 거행했다고 플루타르코스는 전한다. 당시 타렌툼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리비우스 마카투스가 도시 탈환의 공을 주장하자, 파비우스는 "물론, 당신이 그것을 잃지 않았다면, 나는 그것을 결코 되찾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17][18] 이처럼 눈에 띄는 무공은 적었지만, 그의 진정한 가치는 전략가로서의 면모에 있었다. 그는 뛰어난 지도력과 방어 중심의 전략으로 '''"로마의 방패"'''로 불렸으며, 이는 공격적인 전술로 "로마의 검"이라 불린 마르켈루스와 대비되었다.

파비우스는 군사 및 정치 활동 외에도 종교적으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그는 어린 나이에 수석 아우구르가 되었고 폰티펙스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비우스에 따르면 폰티펙스 막시무스는 아니었다.[19] 두 최고 종교 회의의 직책을 동시에 보유한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나 술라 이전에는 드문 일이었다.[20]

말년에 파비우스는 원로원에서 젊고 야심찬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아프리카 원정 계획에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함께 반대했다. 그는 한니발과의 직접 대결이 여전히 위험하다고 보았으며, 스키피오의 원정이 로마에 불필요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스키피오의 계획은 제한적인 승인을 받았지만, 파비우스는 징집을 막고 스키피오의 병력 접근을 제한하는 등 지속적으로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4. 1. 죽음

파비우스는 한니발의 군대가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직후인 기원전 203년에 병으로 사망했다.[17][18] 이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기 직전이었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아프리카로 전쟁을 확대하려는 스키피오의 계획에 반대하며 한니발과의 직접 대결은 너무 위험하다고 계속 주장했다. 파비우스는 스키피오가 패배할 경우 로마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충분한 병력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스키피오의 인기에 대한 개인적인 질투심도 작용했다고 한다.[20]

5. 유산 및 평가

로마인들은 처음에 한니발과의 직접적인 대결을 피하는 파비우스의 전략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굼뜬 사람'이라는 뜻의 Cunctator|쿵크타토르la라 부르며 비난했다. 그러나 기원전 216년, 파비우스의 후임 집정관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칸나이 전투에서 성급하게 결전을 벌였다가 로마군 역사상 최악의 참패를 당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이 패배를 통해 원로원과 민중은 한니발에게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고, 지구전을 펼친 파비우스의 전략이 옳았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쿵크타토르'는 "굼벵이"나 "얼간이" 같은 부정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신중한 사람", "지구전주의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그 의미가 바뀌었다.

파비우스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를 구한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강인하고 용감한 로마인의 전형으로 여겨져 "로마의 방패"라는 영예로운 별명을 얻었다. 이는 적극적인 공세로 유명했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로마의 검"으로 불린 것과 대비된다. 고대 로마의 시인 엔니우스는 "한 사람이 지연 작전으로 우리에게 국가를 회복시켜주었다"라고 파비우스를 칭송했으며, 베르길리우스 역시 서사시 아이네이스에서 같은 구절을 인용하며 파비우스를 위대한 인물로 묘사했다. 그의 군사적 성공으로는 기원전 209년 타렌툼 탈환이 있으나, 이는 내부 협력자의 도움에 의한 것이라는 평가도 있어[1] 눈에 띄는 무공보다는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더욱 부각된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이탈리아 반도에서 한니발의 군대를 고립시키고 약화시킨 전략적 안목에 있었다.

파비우스의 지연 전술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쳐, 그의 이름을 딴 파비안 전략이라는 군사 교리가 만들어졌다. 이 전략은 결정적인 전투를 피하면서 적의 보급선을 차단하고 소모전을 통해 서서히 적을 약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미국 독립 전쟁 당시 영국군을 상대로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여 "미국의 파비우스"로 불렸으며[2],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싸운 러시아의 미하일 쿠투조프 역시 그의 전략 때문에 "러시아의 파비우스"라는 별명을 얻었다.[3] 또한, 19세기 말 영국에서 등장한 점진적 사회 개혁을 추구한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 역시 파비우스의 신중하고 점진적인 접근 방식에서 이름을 따왔다.[4]

한편, 로마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마시모 가문은 고대 전설에 따라 자신들이 파비우스 막시무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5]

파비우스는 말년에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카르타고 본토를 직접 공격하려는 아프리카 원정 계획에 마르쿠스 포르키우스 카토와 함께 반대했다. 이는 파비우스가 여전히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 한니발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생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스키피오의 활약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나기 직전인 기원전 203년,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한 직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6]

참조

[1] 서적 Guerrilla Warfare: A Historical & Critical Study Transaction Publishers
[2] 서적 Plutarch: Makers of Rome Penguin Group
[3] 웹사이트 Plutarch • Life of Fabius Maximus (Cunctator) https://penelope.uch[...] 2021-07-01
[4] 웹사이트 The Internet Classics Archive {{!}} Fabius by Plutarch http://classics.mit.[...] 2021-07-01
[5] 간행물 The Magistrates of the Roman Republic American Philological Association
[6] 간행물
[7] 간행물
[8] 간행물 Livy says that Fabius was appointed dictator for the second time in 217. Broughton adduces that he must have been dictator during a gap in the Capitoline fasti (and thus in Livy's records) from 221 to 219, and before Livy's history resumes in 218. Since Flaminius was censor in 220 and 219, Broughton places this dictatorship in 221.
[9] 뉴스 "The Life of Marcellus", 5.3–6 https://penelope.uch[...]
[10] 웹사이트 Heritage History {{!}} Story of Rome by Mary Macgregor https://www.heritage[...] 2024-02-29
[11] 간행물 History of Rome
[12] 간행물
[13] 웹사이트 The Internet Classics Archive – Fabius by Plutarch – 3rd paragraph http://classics.mit.[...] Classics.mit.edu 2012-01-22
[14] 웹사이트 Plutarch • Life of Fabius Maximus (Cunctator) https://penelope.uch[...]
[15] 서적 Makers of Rome Penguin Classics 1965
[16] 간행물 The Histories of Rome
[17] 웹사이트 Plutarch, ''Lives'', life of "Fabius", ca. 75 A.D. tr. by John Dryden, ca. 1683 http://classics.mit.[...] Classics.mit.edu 2012-01-22
[18] 웹사이트 Appian, ''History of Rome'' or ''Roman History'', before 165 A.D., \S 32 on Tarentum, available at https://www.livius.o[...] Livius.org 2012-01-22
[19] 논문 "Electoral Irregularity and Chicanery during the Second Punic War," CAMWS 2011, citing Liv. 23.21.7, 30.26.10, c.f. 25.5.2–3.
[20] 논문 ''The Priests of the Roman Republic,'' 149 shows only an augurship for Sulla; 131–32, 156 on Julius. On Sulla see Stern, "Electoral Irregularity and Chicanery during the Second Punic War," CAMWS 2011, citing coinage.
[21] 문서 Roman Civilization: Selected Readings
[22] 서적 Storia della guerra dell' Independenza d'America
[23] 서적 The Life of George Washington
[24] 서적 The American Revolution, 1775–1783: An Encyclopedia
[25] 서적 The American Revolution, 1760–1790: New Nation as New Empire
[26] 뉴스 "The Strategy for Never Marching on Moscow" (A review of ''Napoleon: 1812'' by [[Nigel Nicolson]]). The Times 1985-09-05
[27] 서적 De gente Maximao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