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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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르는 고대 로마에서 새의 비행이나 소리를 관찰하여 신의 뜻을 해석하고 공적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적 직책이었다. 아우구르는 종신직으로, 주요 역할은 새의 행동을 통해 신의 뜻을 파악하는 것이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에는 아우구르의 권위가 매우 컸으며, 선거 무효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점술 의식인 아우구리아는 국가와 관련된 문제에 적용되었으며, 다양한 종류의 징후를 통해 신의 뜻을 해석했다. 아투스 나비우스는 아우구르의 수호자로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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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르 | |
---|---|
기본 정보 | |
유형 | 직업 |
분야 | 고대 로마 종교 |
역할 | 점술사 |
활동 시기 | 고대 로마 |
상세 정보 | |
주요 임무 | 새의 행동을 관찰하여 신탁을 해석하고 미래를 예측 |
권한 | 공공 사업, 전쟁, 관직 임명 등 주요 결정에 대한 조언 |
신성한 새 | 독수리, 올빼미, 기타 징조를 나타내는 새로 여겨지는 새들 |
징조 해석 방법 | 새의 종류 나는 방향 소리 행동 패턴 |
역사적 맥락 | |
기원 | 에트루리아인의 종교적 전통에서 유래 |
로마에서의 역할 | 로마 공화정과 제정 시대에 걸쳐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역할 수행 |
영향력 감소 | 기독교의 부상과 함께 점차 쇠퇴 |
관련 용어 | |
아우구라쿨룸 (auguraculum) | 점을 치기 위해 지정된 신성한 장소 |
신탁 | 신의 뜻을 전달하는 메시지 또는 예언 |
조짐 | 미래의 사건을 암시하는 징조 |
2. 어원
고대 저술가들은 "아우구르(augur)"라는 용어가 "새를 인도하는"이라는 뜻의 라틴어 ''avis''와 ''gerō''에서 유래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언어학적 증거는 "증가시키다, 번영시키다"라는 뜻의 어근 ''augeō''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고대 로마에서 정치, 군사, 민간과 관련된 중요한 행위는 신의 뜻을 묻는 점복(augurium|아우구리움la)과 점장(haruspices)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아우구르는 이러한 점복 의식을 공식적으로 수행하는 사제 집단으로, 주로 새의 울음소리나 비행 모습 등 자연 현상을 관찰하여 신의 뜻을 해석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들의 해석은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전쟁이나 상업과 같은 로마의 중요한 공적 의사 결정 과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3. 역사와 공적 역할
아우구르직은 집정관이나 법무관과 같은 다른 고위 공직과 달리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종신제였다. 이들은 고위 관리를 대신하여 점복을 수행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고위 관리 자체가 존경받는 사제 역할을 했던 이웃 에트루리아 지역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로마의 고위 관리들은 군사 및 민간 영역에서 최고위직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로마와 시민 전체의 평화(paxla), 행운(fortunala), 안녕(salusla)을 책임지는 종교적 직무도 수행했다.
점복 의식을 주재하는 고위 관리는 "점복의 권리"(ius auguriila)를 가졌다.[3] 그러나 예상치 못한 불길한 징조(auspicia oblativala)의 출현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권한(nuntiatiola)은 오직 집전하는 아우구르에게만 있었으며, 이를 통해 진행 중인 공적 절차를 중단시킬 수도 있었다.[14]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아우구르직을 파트리키 계층이 사실상 독점했으며, 전임자가 후임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에 오굴니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이 법에 따라 아우구르의 정원이 기존 4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고, 늘어난 5명의 자리는 플레브스 출신으로 채우도록 규정되어 평민에게도 아우구르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37] 이후 내란의 세기 무렵에는 부족 투표 등 선거를 통해 후임자를 선출하는 방식으로 점차 변화하였다.
3. 1. 로마 왕정 시대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는 아우구르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이 도시가 조짐을 살핀 후에야 건설되었고, 전쟁과 평화, 국내외 모든 일이 조짐을 살핀 후에야 이루어졌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4]
왕정 시대(기원전 509년 종료)에는 전통적으로 아우구르가 3명이었다고 전해진다.[5] 이 시기 아우구르와 관련된 주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이후 아우구르의 정원은 점차 늘어나, 기원전 3세기에는 9명이 되었고, 술라 시대에는 15명으로, 원수정 시대에는 25명까지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5]
3. 2. 로마 공화정 시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아우구르직은 집정관직, 검열관직, 개선식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졌다.[5] 집정관이나 법무관과 달리 종신제 공직이었으며, 아우구르들은 직책의 의무와 책임을 공유하는 사제들의 단체(la)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임명되면 평생 동안 축제 행렬과 공개 연회에 중요한 인물로 참여할 권리가 주어졌고, 직책의 상징인 리투우스(lituus)를 자랑스럽게 전시했다.[5]
아우구르의 주요 역할은 새의 행동이나 다른 자연 현상을 관찰하여 신의 뜻을 해석하고, 이를 통해 전쟁, 상업 등 로마의 중요한 공적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었다. 점복 의식을 주재하는 고위 관리는 "점복의 권리"(ius augurii|이우스 아우구리이la)를 가졌으며,[3] 예상치 못한 징조(auspicia oblativa|아우스피키아 오블라티바la)의 출현을 알리는 nuntiatio|눈티아티오la의 권리는 집전하는 아우구르에게만 보장되어, 진행 중인 절차를 중단시킬 수도 있었다.[14] 이러한 권한은 정치적으로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키케로에 따르면, 아우구르의 권위(auctoritas|아욱토리타스la)에는 법 절차를 연기하거나 뒤집을 수 있는 권리(ius augurum|이우스 아우구룸la)가 포함되었다. 실제로 점복 과정에서의 작은 실수로 인해 집정관 선거가 무효화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키케로는 아우구르가 공화정에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가진 자라고 생각했다. 키케로 자신도 그의 경력 후반에 아우구르 사제단에 선출되었다.[6]
로마 공화정 초기에는 파트리키 계급만이 아우구르가 될 수 있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독점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에 제정된 오굴니우스 법에 따라 아우구르의 정원이 기존 4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으며, 새로 추가된 5명은 플레브스(평민) 출신으로 채워지도록 규정되어 플레브스에게도 아우구르가 될 길이 열렸다.[37]
이후 아우구르 선출 방식은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연도 | 법률/사건 | 내용 | 관련 인물 |
---|---|---|---|
공화정 초기 | 관습 (전임자 지명) | 파트리키 독점, 전임자가 후임 지명 | - |
기원전 300년 | 오굴니우스 법 | 정원 9명으로 확대 (플레브스 5명 포함), 플레브스에게 개방 | - |
기원전 104년 | 도미티우스 법 Lex Domitia de sacerdotiisla | 17개 트리부스 선거로 선출 (사제단이 작성한 명단에서 선택) |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호민관) |
기원전 81년 | 술라의 코르넬리우스 법 | 정원 15명으로 증원, 도미티우스 법 폐지 (다시 사제단 쿠옵션 방식으로 회귀 추정)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
기원전 63년 | 라비에누스의 법률 제정 | 도미티우스 법의 선거 방식 부활 | 티투스 라비에누스 (호민관),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 (배후설)[36] |
내란의 세기 무렵에는 선거를 통해 후임이 결정되는 시대로 이행하고 있었다. 후기 공화정 시대에는 점술 행위 전반을 폰티펙스(pontifices) 사제단이 감독하게 되었으며, 이들 사제-고위직의 권한은 점차 로마의 관직 경력 과정인 쿠르수스 호노룸(cursus honorum)에 통합되었다. 특히 최고 사제장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 직책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상 집정관의 특권처럼 여겨지게 되었다.[7]
아우구르들은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성채에 마련된 관측소에서 점을 쳤다. 이곳은 로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장소였으나,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도 초라한 오두막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아우구르는 토가를 머리에 쓰고 리투우스(지팡이)를 든 채, 알바누스 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남동쪽을 향해 점을 쳤다. 이때 아마도 비아 사크라(신성한 길)를 중심선으로 삼아 시내를 좌우로 나누고 나무 등을 이용해 관측 범위를 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3. 3. 로마 제국 시대
점술의 효과는 신이 정한 평화(pax deorum)가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통해 사후적으로 판단되었다. 신의 분노(ira deorum)를 일으킨 사람은 진정한 점술의 권리(ius augurum)를 가질 수 없다고 여겨졌다.[8] 로마 내전의 여러 주역 가운데 옥타비아누스만이 로마 백성에게 pax deorum을 회복시켰다고 인정받아 이 권리를 가질 수 있었다. 원수정 시대의 저술가 루카누스는 당시의 내전을 우주의 초자연적인 혼란이 반영된 "비자연적인" 사건으로 묘사했는데, 이는 점술의 전통적 원칙 및 스토아 학파의 제정 옹호론과도 맥락을 같이 한다.[9] 스토아 철학의 우주론에서 pax deorum은 인간사에 나타난 자연 질서의 표현으로 이해되었다.[10]레피두스가 사망하자,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뒤를 이어 최고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직책을 맡았다. 그는 이 지위와 검열관으로서의 권한을 이용하여 국가 신탁(그리스 신탁 예언서 포함)에 대한 사제단의 통제권을 장악하고, '승인되지 않은' 신탁이 유포되는 것을 억압했다.[11]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서 아우구르의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다른 주요 사제단(quattuor amplissima collegia)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구성원들에게 높은 명예를 부여하는 자리로 여겨졌다.
로마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성채에는 아우구르의 관측소가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는 소박한 오두막 형태였다. 아우구르는 리투우스(지팡이)를 들고 토가 자락을 머리에 쓴 채, 알바누스 산을 바라보며 남동쪽을 향했다. 아마도 비아 사크라를 중심선으로 삼아 시내를 좌우로 나누고 특정 나무 등을 기준으로 관측 범위를 정한 뒤 점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4. 점술 의식 (Auguria)
고대 로마에서 auguria|아우구리아la(점복 의식)는 신의 뜻을 알아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이는 sacra|사크라la(신성한 의식)와 함께 신들이 인간에게 의지를 전달하는 통로로 여겨졌다.[14] 정치, 군사, 민간의 주요 행위는 점복과 점장의 점술을 통해 신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관행은 점술가가 고위 관리로 존경받았던 이웃 에트루리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점복 의식을 주관하는 고위 관리는 "점복의 권리"(ius auguriila)를 가졌다.[3]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징후(auspicia oblativala)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nuntiatiola의 권리는 집전하는 아우구르에게만 주어졌으며, 이는 진행 중인 절차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14]
Augures Publici|아우구레스 푸블리키la(공공 점쟁이)는 국가와 관련된 중대한 문제만을 다루었다. 이들의 주요 역할은 왕의 즉위, 집정관, 법무관 등 고위 관리와 주요 사제들의 직무 수행(취임식), 그리고 모든 공공 사업과 같은 국가적 행동 방침에 대한 신들의 의지를 묻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점복의 정치적 영향력은 상당해서, 점쟁이나 관리가 천둥 소리를 들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도 민회인 코미티아의 소집을 중단시킬 수 있었다.[12]
그러나 Auguria Publica|아우구리아 푸블리카la와 관리들의 취임식이 정치 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점복은 점차 정치적으로 악용되고 타락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이러한 남용은 결국 점복의 종교적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돌이킬 수 없는 쇠퇴를 가져왔다.
4. 1. 고대 전통
바로(Varro)[13]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시대 이전 아우구르들은 다섯 종류의 영토를 구분했다고 한다. 이는 로마 영토(ager Romanus), 가비누스 영토(ager Gabinus), 이방인 영토(ager peregrinus), 적국 영토(ager hosticus), 불확정 영토(ager incertus)이다. 이러한 구분은 라티움의 초기 역사를 보여주며 점술의 오랜 역사를 증명한다.[14]점술법(jus augurale)은 엄격히 비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의식의 구체적인 절차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 몇몇 점(auguria)의 이름 정도만 알려져 있다.
- 건강 점(augurium salutis): 매년 한 번 관리들과 백성 앞에서 거행되었으며, 신들에게 로마인의 안녕을 기원하는 것이 길한지 묻는 의식이었다.
- 개 점(augurium canarium): 붉은 개를 제물로 바치는 의식으로, 밀 이삭이 여물고 탈곡하기 전에 거행되었다.[15][16][14]
- 봄 점(vernisera auguria): 이름만 전해지며, 수확과 관련된 의식으로 추정된다.[17]
고대 저자들은 '점(augurium)'과 '조짐(auspicium)'이라는 용어를 혼용하기도 했다.[18] 현대 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문제를 논의했지만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했다. 뒤메질(Dumezil)[19]은 두 용어가 동일한 종교 행위의 다른 측면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 조짐(auspicium): 새를 관찰하는 행위(aves spicere), 즉 점술 행위의 기술적 과정을 의미한다.
- 점(augurium): 관찰 결과에 대한 해석, 즉 신의 뜻(auges)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과정과 그 최종 결과를 의미한다.
바로는 "점을 치기 위해 그는 새를 관찰했다(Agere augurium, aves specitla)"[20]라고 설명했다.
로마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성채에는 아우구르의 관측소가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는 소박한 오두막 형태였다. 아우구르는 리투우스라는 지팡이를 들고 토가 자락을 머리에 쓴 채, 알바누스 산을 바라보며 남동쪽을 향했다. 아마도 비아 사크라를 기준으로 삼아 시내를 좌우로 나누고, 특정 나무 등을 이용해 관측 범위를 설정한 뒤 점을 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4. 2. 점술의 종류
점복(auspicia)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뉘는데, 인간이 요청한 것(''impetrativa'')과 신이 자발적으로 제공한 것(''oblativa'')이다. ''impetrativa''와 ''oblativa'' 모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하위 범주로 나눌 수 있다.- ''ex caelo'' (천둥, 번개)
- ''ex avibus'' (새)
- ''ex tripudiis'' (음식에 대한 태도와 화성의 신성한 닭의 먹이 섭취 방식)
- ''ex quadrupedibus'' (개, 말, 늑대, 여우)
- ''ex diris'' (불길한 사건)
일부 종류의 새(''aves augurales'')만이 유효한 징후를 제공할 수 있었으며,[21] 그 의미는 종에 따라 달랐다. 여기에는 까마귀, 딱따구리, 올빼미, 수염수리, 독수리 등이 포함되었다.
새로부터 얻은 징후는 비행으로부터 얻은 ''alites''와 소리로부터 얻은 ''oscines''로 나뉘었다. ''alites''에는 하늘의 영역, 고도 및 비행 유형, 새의 행동, 새가 쉬게 될 장소가 포함되었다. ''oscines''에는 소리의 높낮이와 방향이 포함되었다.[22]
4. 3. 의례 절차
법에 의해 ''spectio''(조짐 관찰) 권한을 부여받은 관리들은 auspicia impetrativa(요청된 조짐)를 얻기 전에 auspicium(관찰 장소)을 설치해야 했다. 점술이 이루어지는 신성한 공간인 templum은 정사각형 모양에 입구가 하나여야 했으며, 설치 후 경계를 명확히 하고[23][24] effari와 liberare 의식을 통해 정화해야 했다.[25]관찰 의식의 시작을 알리는 조짐 발표는 legum dictio라고 불렸다.[26] 관찰 조건은 매우 엄격했으며, 의식의 유효성을 위해 절대적인 침묵이 요구되었다. 기술적으로 하늘은 네 개의 구역으로 나뉘었는데, 각각 dextera|덱스테라la(오른쪽), sinistra|시니스트라la(왼쪽), antica|안티카la(앞쪽), postica|포스티카la(뒤쪽)이다.[27]
로마 시내를 조망할 수 있는 카피톨리누스 언덕의 성채에는 관측소가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도 초라한 오두막 형태였다. 아우구르는 리투우스(끝이 구부러진 지팡이)를 들고 토가를 머리에 쓴 채, 알바누스 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남동쪽을 향했다. 아마도 비아 사크라를 중심선으로 삼아 시내를 좌우로 나누고, 특정 나무 등을 기준으로 관측 범위를 정하여 점을 쳤던 것으로 보인다.
인물 취임 의식의 원형은 리비우스[28]가 기록한 누마 폼필리우스 왕의 취임식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점쟁이는 유피테르에게 "Si fas est|시 파스 에스트la"(이것이 신의 뜻에 맞는 일입니까?)라고 물으며, 특정한 signum|시그눔la(징표)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29] 그런 다음 점쟁이는 나타나기를 바라는 auspicia|아우스피키아la(조짐)를 열거했다. 마침내 그 조짐들이 나타나자 누마는 왕으로 선포되었다.
4. 4. 징후의 우선순위
관찰 과정이 복잡했기 때문에 여러 징후가 서로 충돌하는 경우가 흔했다.[30] 이러한 상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징후들 사이에 우선순위를 두는 계층 구조가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독수리가 나타내는 징후는 딱따구리나 물수리( ossifragae|오시프라가에lat, parra|파라lat)의 징후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31]로마 공화정 말기에는 하늘의 현상(ex caelo|엑스 카일로lat)과 새의 발소리(ex tripudiis|엑스 트리푸디이스lat)를 통한 예언이 다른 형태의 점술을 점차 대체했다. 이는 다른 형태의 점술들이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에 맞춰 결과를 쉽게 조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2] 키케로는 이러한 사기적인 관행을 비판하며, 당시 점술가들의 전문 지식 수준이 저하된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33]
4. 5. 부정적 징후 회피
징조 해석은 매우 광범위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관리들은 부정적인 징조로 인해 일이 마비되는 상황을 피하고자 여러 보호적인 방법을 고안했다.[34] 부정적인 징후(auspicia oblativa|아우스피키아 오블라티바la)가 나타났을 때 이를 피하기 위해 사용된 공식적인 절차는 다음과 같다.- 적극적으로 보지 않기: 불길한 징조가 될 만한 것을 의도적으로 보지 않는다.
- 거부하기 (repudiare|레푸디아레la): 해석을 교묘하게 바꾸어 징조의 의미를 거부한다.
- 무시하기 (non observare|논 옵세르바레la): 징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간주한다.
- 실제와 다르게 선언하기: 실제로는 나타나지 않은 긍정적인 징조를 선언한다.
- 시간 선택 (tempestas|템페스타스la): 징조를 관찰하는 시간을 자신의 의도대로 유리하게 선택한다.
- 선언 분리 (renuntiatio|레눈티아티오la): 징조를 관찰하는 행위와 그 결과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행위를 분리한다.
- 결함 인정 (vitia|비티아la): 절차상에 작은 실수가 있었음을 인정하여 징조 자체의 효력을 무효화한다.
- 절차 반복: 위의 방법들이 통하지 않을 경우, 전체 징조 관찰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5. 아투스 나비우스
로마의 점조술을 가장 잘 대표하고 보여준 인물은 아투스 나비우스(la)였다. 그의 이야기는 키케로에 의해 전해진다.
그는 매우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그는 돼지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러자 그는 돼지를 찾으면 포도밭에서 자라는 가장 큰 포도를 신에게 바치겠다고 서원했다. 돼지를 되찾은 후 그는 남쪽을 향해 포도밭 한가운데 섰다. 그는 하늘을 네 부분으로 나누고 새들을 관찰했다. 새가 나타나면 그 방향으로 걸어가서 신에게 바칠 특별히 큰 포도를 발견했다.
그의 이야기는 즉시 유명해졌고, 그는 왕의 점술가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점술가들의 수호자로 여겨졌다.[35]
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의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물루스가 조류점으로 정한 라무넨세스, 티티엔세스, 루케레스 세 개의 켄투리아 외에,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부대를 창설하려 했다. 그러나 아우구르였던 아투스 나비우스는 조류점의 결과에 근거하여 이에 반대했다. 왕이 그의 능력을 시험하기 위해 마음속으로 생각한 것(숫돌을 칼로 자르는 것)을 맞춰보라고 하자, 아투스 나비우스는 조류점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고 답했고 실제로 칼로 숫돌을 잘라 보였다. 이 기적적인 사건 이후 아우구르의 권위는 크게 향상되었고, 중요한 결정은 모두 조류점을 통해 결정하게 되었다.
6.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주요 인물 및 사건 평가
로마 건국의 전설적인 인물인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새로운 도시를 세울 때 누가 도시 이름을 정할지를 새의 움직임을 통해 점치는 조류점(鳥類占)으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아우구르의 점술이 로마의 시작부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로마의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는 신관들이 신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할 자연 현상을 조류점으로 정하도록 하여, 아우구르 의식의 기초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5대 왕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시대에는 아우구르 아투스 나비우스가 왕의 계획에 반대하며 점술의 권위를 높인 일화가 있다. 타르퀴니우스 왕이 로물루스가 조류점으로 정한 기존의 켄투리아 외에 자신의 이름을 딴 부대를 새로 만들려 하자, 아투스 나비우스는 점괘를 근거로 이에 반대했다. 그가 기적을 보여주자 왕은 그의 주장을 받아들였고, 이후 로마에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반드시 조류점을 치게 되었다. 이는 아우구르가 단순히 종교적 역할을 넘어 정치적 결정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로마 공화정 초기, 아우구르 직위는 전임자가 후임자를 지명하는 방식으로 계승되어 사실상 파트리키 계층이 독점했다. 그러나 기원전 300년에 오굴니우스 법이 제정되면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 법은 아우구르의 정원을 4명에서 9명으로 늘리고, 늘어난 5명의 자리를 플레브스 출신에게 할당하도록 규정했다.[37] 이는 신분 차별을 완화하고 평민의 정치 참여 기회를 확대한 의미 있는 조치로 평가받는다.
내란의 세기로 접어들면서 아우구르 선출 방식에도 변화가 생겼다. 기원전 104년, 호민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기원전 96년 집정관)는 아우구르를 17개 트리부스(부족)의 선거를 통해 선출하도록 하는 도미티우스 법(Lex Domitia de sacerdotiis)을 제정했다. 이는 기존의 지명 방식에서 벗어나 민주적 절차를 도입한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원전 81년,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는 코르넬리우스 법을 통해 아우구르 정원을 15명으로 늘리는 한편, 도미티우스 법을 폐지하여 선거제를 폐기했다. 이는 민주적 개혁의 후퇴로 해석될 수 있다. 이후 기원전 63년, 호민관 티투스 라비에누스는 도미티우스 법의 선거 방식을 다시 부활시켰다. 라비에누스의 이러한 움직임 뒤에는 당시 최고대제사 직을 노리고 있던 가이우스 유리우스 카이사르의 영향력이 있었다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36] 이는 아우구르 선출 방식의 변화가 당시 정치적 권력 다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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