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노브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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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르노브제크는 폴란드 남동부에 위치한 도시로, 국도 9호선과 철도 허브를 통해 연결된다. 1593년 타르노프스키 가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한때 폴란드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으나, 1990년대 유황 광산 폐쇄 이후 인구가 감소했다. 현재는 카르파티아 현에 속하며, 도미니크 교회와 수도원, 디지쿠프 성 등 다양한 문화 유적과 관광 명소를 보유하고 있다. 과거 유황 산업 중심지였으나, 현재는 경제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으며, 슬로바키아의 반스카비스트리차, 우크라이나의 체르니히우 등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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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노브제크 - [지명]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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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타르노브제크 |
행정 구역 | 서브카르파티아 주 |
군 | 시 군 |
시장 | 우카시 노바크 |
시 승격 | 1593년 |
면적 | 85.6 km2 |
인구 (2017년 기준) | 47387명 |
인구 밀도 | 자동 계산 |
시간대 | CET (+1) |
하계 시간대 | CEST (+2) |
해발 고도 | 160 m |
우편 번호 | 39-400 |
지역 번호 | +48 015 |
차량 번호판 | RT |
웹사이트 | 타르노브제크 공식 웹사이트 |
2. 지리
타르노브제크는 국도 9호선을 따라 위치하며, 이 도로는 유럽 고속도로 E371호선의 일부이다. 또한 철도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며, 도시 내에는 오치체, 소보프, 타르노브제크, 타르노브제크 바스코토로비, 비엘로비에시 등 5개의 기차역이 있다. 철도 노선은 남쪽 쳄비차 방향, 남동쪽 제슈프 방향, 동쪽 스탈로바 볼라 방향, 북쪽 산도미에시 방향으로 연결된다.
2. 1. 행정 구역
현재 타르노브제크는 영토 면적 85km2로 폴란드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이며, 도시의 최북단과 최남단 지점 사이의 거리는 20km에 달한다. 이는 1975년 타르노브제크가 새로 창설된 타르노브제크 주(Tarnobrzeg Voivodeship)의 주도가 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지방 당국은 도시 확장을 위해 인근 마을을 합병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그 결과 1970년대 후반에 마후프, 지쿠프, 미에호친, 비엘로비에시, 시에레츠, 포들레제(Podłęże), 소보프, 모크시슈프 등 여러 마을과 정착지가 타르노브제크의 구(區, Osiedle)로 편입되면서 도시의 규모가 빠르게 성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타르노브제크의 구시가지와 역사 중심지는 도시 전체 면적에서 매우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며, 도시의 약 80%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건설되었다.타르노브제크의 현재 행정 구역(오시에들라)은 다음과 같다.
구역명 | 구역명 | 구역명 |
---|---|---|
비엘로비에시 | 시에레츠 | 흐바우키(Chwałki) |
보루프(Borów) | 빔스우프(Wymysłów) | 자크슈프 |
즈비에르지니에츠(Zwierzyniec) | 지쿠프 | 포드웽제(Podłęże) |
세르비누프 | 나돌레(Nadole) | 올드 타운(Stare Miasto) |
비엘로폴레 | 비아와 구라(Biała Góra) | 포드호이니(Podchoiny) |
콤키(Kępki) | 시아르코비에츠(Siarkowiec) | 스칼나 구라(Skalna Góra) |
프시비슬레(Przywiśle) | 모크시슈프 | 피아스투프(Piastów) |
소보프 | 하우프키(Chałupki) | 미에호친 |
오치체 | 코지에레츠(Kozielec) | 카이모프(Kajmów) |
마후프 | 나그나유프 |
타르노브제크는 16세기 폴란드 황금기에 귀족 가문인 타르노프스키 가문에 의해 설립되었다. 도시의 이름 역시 이 가문에서 유래했으며, 1593년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로부터 마그데부르크 권을 부여받았다. 초기에는 지쿠프나 미에호친 등 인근의 더 오래된 정착지의 명성에 가려졌으나, 점차 발전하여 지역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3. 역사
1772년 폴란드 분할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의 갈리시아 지방에 속하게 되었으며, 이 시기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경 지대에 위치하여 큰 피해를 겪었다. 전쟁 후 잠시 타르노브제크 공화국이 선포되기도 했으나, 곧 제2 폴란드 공화국의 일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나치 독일의 점령 하에 있었으며, 특히 번성했던 유대인 공동체는 홀로코스트로 인해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다.[2] 전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시기에는 인근에서 대규모 황 매장량이 발견되면서 급격한 공업 도시로 성장하여 인구가 크게 증가했다. 1975년에는 타르노브제크주의 주도가 되기도 했으나, 1990년대 황 산업의 쇠퇴와 1999년 행정 구역 개편으로 주도의 지위를 잃고 현재는 카르파티아 현 소속의 시-군(포비아트)이 되었다. 타르노브제크의 역사는 설립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의 행정적, 경제적 변화를 겪으며 이어져 왔다.
3. 1. 설립과 발전
타르노브제크라는 이름은 도시를 세운 타르노프스키 가문에서 유래했다. 처음에는 "타르노드보르", "노보 드보르", "노비 타르누프" 등 다른 이름도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타르노브제크로 결정되었다. 타르노그루드나 테르노필처럼 타르노프스키 가문이 건설한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하지만 20세기까지 타르노브제크라는 이름은 주민들 사이에서 널리 쓰이지 않았다. 대신 더 오래되고 규모가 컸던 지쿠프(지쿠프 성 참조)나 미에호친이라는 이름이 주로 사용되었다. 1887년 타르노브제크 기차역이 개통되고 1920년 타르노브제크 군이 설립되면서 비로소 타르노브제크라는 이름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 지역의 수호성인은 여전히 지쿠프의 성모로 불린다.
타르노브제크의 역사는 16세기에 성을 타르노프스키로 바꾼 귀족 렐리비타 가문과 깊은 관련이 있다. 1349년 타르누프의 라팔이 비엘로비에시의 소유주였던 제르즈카와 결혼하며 그곳으로 이주했고, 이후 가문의 영지는 점차 확장되었다. 1365년에는 트제스니와 조호프, 1375년에는 시에레츠와 소보프를 확보했으며, 1397년에는 얀 타르노프스키가 여러 마을을 사들였다. 15세기 말, 얀 스피테크 타르노프스키는 요새화된 성과 함께 디지코프를 구매했다.
타르노브제크는 폴란드 황금기였던 1593년, 타르노프스키 가문의 거주지로 설립되었다. 그해 5월 28일, 국왕 지그문트 3세 바사는 이 도시에 마그데부르크 권을 부여했다. 도시 설립자는 산도미에르츠의 카스텔란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타르노프스키(1541–1609)였다. 그는 스테판 바토리와 지그문트 3세 국왕의 궁신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 미하우 스타니스와프(1590–1654)는 1620년대에 도시 확장과 현대화를 추진하여 시청이 있는 시장 광장을 중심으로 거리 체계를 계획했으며, 디지코프 요새와 미에호친 교회도 확장했다.
그러나 노비 타르누프(타르노브제크의 초기 명칭 중 하나)의 개발은 파괴적인 스웨덴의 폴란드 침공 (1655–1660)으로 중단되었다. 이 시기 도시는 스웨덴군에 의해 크게 파괴되었다. 침공 이후 얀 스타니스와프 타르노프스키는 디지코프 성에서 옮겨온 디지코프의 성모 그림을 모신 도미니크 수도원을 1678년에 설립했다. 1734년에는 디지코프 성에서 디지코프 연맹이 결성되었는데, 요제프 마테우시 타르노프스키가 창설자 중 한 명이었다. 18세기 말에는 디지코프 성이 후기 바로크 양식으로 개조되었다. 디지코프의 마지막 소유주는 얀 즈디스와프 타르노프스키(1862–1937)와 아르투르 타르노프스키(1903–1984)였다.
1772년 폴란드 분할 이후 타르노브제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고, 1918년 11월까지 갈리시아 지방에 속했다. 당시 러시아-오스트리아 국경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제1차 세계 대전 중 침략군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짧은 기간 동안 타르노브제크 공화국이 이곳에 선포되었고, 1919년에는 독립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르부프주에 속하게 되었다. 전간기(1919-1939) 동안 타르노브제크는 구 오스트리아 제국 지역 및 다른 곳에서 온 상당한 이민자를 받아들였으며, 이 시기에 공립 학교 시스템이 설립되었다.
1939년부터 1944년까지는 나치 독일의 총독부 치하에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인민 공화국 시기인 1950년대에 지질학적 탐사를 통해 상당한 황 매장량이 발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1960년대 초부터 도시는 빠르게 성장하여 인구가 5,000명에서 1990년대에는 50,000명까지 증가했다. 그러나 마초프와 예지오르코에 있던 황 광산 "시아르코폴"이 폐쇄되면서 타르노브제크는 정체기를 맞았다. 1999년에는 주(Województwo)의 수도 지위를 잃고 카르파티아 현 소속의 시-군(포비아트 그로드스키)이 되었다.
기간 | 소속 국가 | 소속 행정 구역 |
---|---|---|
1772년 이전 | 피아스트 왕조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 폴란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 산도미에르츠 주 |
1772 – 1918 | 오스트리아 제국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 갈리시아와 로도메리아 왕국 |
1918 – 1919 | 타르노브제크 공화국 | - |
1919 – 1939 | 제2 폴란드 공화국 | 르부프주 |
1939 – 1944 | 나치 독일 | 총독부 (크라쿠프 지구, 볘비차 란트) |
1944 – 1975 | 폴란드 인민 공화국 | 제슈프주 |
1975 – 1998 |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제3 폴란드 공화국 | 타르노브제크주 |
1999년 이후 | 폴란드 | 카르파티아 현 |
3. 2.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1772년 폴란드 분할의 결과로 타르노브제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는 1918년 11월까지 갈리시아와 로도메리아 왕국에 속하게 되었다. 이 시기 타르노브제크는 러시아와의 국경에 매우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다.19세기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전역에 찾아온 상대적인 평화와 안정의 시기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통치 하에서 타르노브제크 시민들은 유대인 공동체를 포함하여 황제가 의무화한 무상 공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이는 당시 프로이센이나 러시아 제국 지배 하에 있던 다른 폴란드 지역 유대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진보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일부 보수적인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은 세속 교육이 전통적인 토라와 탈무드 연구를 대체할 것을 우려하여 의무 공교육에 반대하기도 했다. 이 시기 타르노브제크는 서부 갈리시아 지역의 슈테틀로서 번성하는 전통적인 유대인 공동체의 고향이었으며, 이들은 갈리치아 유대인으로 여겨졌다. 저명한 유대인 시민으로는 19세기 동안 활동하며 나폴레옹 시대부터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통치기까지 생존했던 부유한 사업가이자 토지 소유자인 모제스 하우저가 있었다. 그의 삶은 홀로코스트 이후 타르노브제크 원로들이 출판한 ''이즈코르''(추모) 책에 기록되어 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은 타르노브제크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국경 지대에 위치했기 때문에 침략군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붕괴는 이 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종식시켰다. 특히 유대인 공동체에게는 어려운 시기였는데, 많은 유대인들이 전쟁 중 우랄산맥 너머 러시아 지역으로 강제 추방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는 기존 공동체에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이들이 미국이나 당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타르노브제크의 오스트리아 통치 시대는 막을 내렸다.
3. 3. 20세기 이후
제1차 세계 대전 중 타르노브제크는 러시아-오스트리아 국경과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침략군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전쟁 이후 단기간 존속했던 타르노브제크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며, 1919년에는 독립된 제2 폴란드 공화국의 르부프주 일부가 되었다. 전간기(1919-1939) 동안 이 도시는 구 오스트리아 제국 등지에서 상당한 이민을 받아들였고, 이 시기에 공립 학교 시스템이 설립되었다.1950년대에는 지질학적 연구를 통해 상당한 황 매장량이 발견되었다. 1960년대 초부터 황 산업을 기반으로 도시는 빠르게 성장하여, 인구가 5,000명에서 1990년대에는 50,000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마초프와 예지오르코에 위치했던 황 광산 "시아르코폴"이 문을 닫으면서, 타르노브제크는 성장 정체를 겪게 되었다. 1999년에는 행정 구역 개편으로 주도(州都)의 지위를 잃고 시-군(포비아트 그로드스키)이 되었다.
아래는 20세기 이후 타르노브제크의 소속 변화를 나타낸 표이다.
기간 | 소속 국가/행정 구역 | 비고 |
---|---|---|
1918 – 1919 | 타르노브제크 공화국 | 단기간 존속 |
1919 – 1939 | 제2 폴란드 공화국: 르부프주 | |
1939 – 1944 | 나치 독일: 총독부 (크라쿠프 지구, 볘비차 란트) | 제2차 세계 대전 점령기 |
1944 – 1975 |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제슈프주 | |
1975 – 1998 |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제3 폴란드 공화국: 타르노브제크주 | 1989년 제3 폴란드 공화국 출범 포함 |
1999 – 현재 | 폴란드: 카르파티아 현 | 행정 구역 개편으로 주도 지위 상실, 포비아트로 변경 |
3. 4. 유대인 공동체
홀로코스트 이전, 서부 갈리시아 지역의 슈테틀이었던 타르노브제크는 번성하는 전통적인 유대인 공동체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바르샤바, 크라쿠프, 루블린, 르비우, 빌노와 같은 폴란드의 주요 유대인 공동체 중심지들과는 다소 떨어져 있었지만, 폴란드 유대인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타르노브제크의 유대인 주민들과 그 후손들은 갈리치아 유대인으로 분류된다.
1772년부터 1918년까지(폴란드 분할 참조) 타르노브제크는 빈을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갈리시아 지방에 속해 있었다. 19세기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 전역에 상대적인 평화와 안정이 찾아온 시기였다. 이 시기 오스트리아 황제가 시행한 진보적인 정책 덕분에, 타르노브제크의 유대인 공동체를 포함한 시민들은 무상 의무 공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이는 단치히나 바르샤바 등 다른 폴란드 지역의 유대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혜택이었다. 그러나 일부 유대교 지도자들은 세속 교육이 전통적인 토라와 탈무드 연구를 대체해서는 안 된다고 믿어 의무 공교육에 반대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이 붕괴하면서 타르노브제크와 주변 지역의 정치적 안정은 끝났고, 이는 유대인 공동체에 어려운 미래를 예고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잔혹 행위와 강제 이주가 타르노브제크 유대인의 역사를 뒤흔들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도 우랄산맥 너머 러시아로의 추방은 공동체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시기 많은 유대인이 미국이나 당시 영국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타르노브제크 유대인 공동체는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인근의 ''슈테틀''인 로즈바도프나 울라누프와도 상업적, 가족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공동체 내에는 하시디즘, 시온주의, 분드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가진 단체들이 활동했다. 많은 유대인 시민들이 전쟁 발발 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훗날 이스라엘 건국에 기여했다.
타르노브제크의 저명한 유대인 시민 중 한 명인 모제스 하우저는 19세기를 거의 온전히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부터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 통치기까지 활동한 부유한 사업가이자 상인, 토지 소유자였다. 그의 삶은 홀로코스트 이후 타르노브제크 출신 생존자들이 출판한 ''이즈코르''(추모) 책에 기록되어 있다. 하우저는 열두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현재 미국, 이스라엘 등 여러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1939년 9월, 나치 독일과 소련의 폴란드 침공 직전 타르노브제크에는 약 3,8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39년 9월 17일 독일군이 도시를 점령했고,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저명한 유대인 다섯 명을 시내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총살했다. 독일-소련 국경 조약 체결 이후인 1939년 10월 2일부터는 유대인들을 산강 너머 소련 점령 지역으로 추방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이들이 미엘레츠와 산도미에시로 보내졌다.[2]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독일 점령군은 유대인을 포함한 폴란드 시민들에게 잔혹 행위를 저질렀고, 유대인들은 탈출하거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다. 극소수의 유대인만이 비유대인들의 도움(열방의 의인)으로 숨어 지내며 도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동쪽 러시아로 피난 간 유대인들은 소련 시민권을 받아 붉은 군대에 합류하여 국방군과 싸우거나, 실향민 신분으로 시베리아의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수용소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고, 많은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 질병으로 사망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야 러시아를 떠날 수 있었다.
4. 경제
타르노브제크의 경제는 과거 유황 채굴 및 가공 산업이 중심이었으나, 광산 폐쇄 이후 변화를 맞이했다.
4. 1. 유황 산업
타르노브제크는 한때 유황 및 황산 채굴과 가공의 주요 중심지였다. 하지만 수익성이 떨어지면서 광산들이 문을 닫게 되었다. 피아세츠노 광산이 가장 먼저 폐쇄되었고, 이후 40년간 운영되었으며 유럽 최대의 노천 유황 광산이었던 마초프 광산이 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1990년대에는 현대적인 프라쉬 공법을 이용한 유황 추출법 덕분에 오랫동안 운영될 수 있었던 예지우르코 광산이 폐쇄되었다.1980년대부터는 광산 지역의 땅을 되살리는 토지 복원 작업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다. 마초프 광산 자리에는 물을 채워 사람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저수지를 만들었으며, 예지우르코 광산 자리 역시 인근의 비슬라 강에서 물을 끌어와 천천히 채우고 있다.
5. 문화
타르노브제크의 문화는 오랜 역사와 종교적 전통을 반영하는 다양한 유산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도시 곳곳에는 가톨릭 성당과 수도원뿐만 아니라 과거 유대인 공동체의 흔적인 시나고그와 유대인 묘지 등이 남아 있어 다채로운 종교적 배경을 보여준다. 또한 디지쿠프 성과 같은 역사적인 건축물, 바르토시 글로바츠키 기념비, 그리고 자연 휴식 공간인 마초프스키 저수지 등 다양한 관광 명소들이 있어 방문객들에게 풍부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러한 문화유산들은 타르노브제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5. 1. 종교
- 막달레나 성당: 약 1160년 설립, 1132년경부터 본당.
- 성 게르트루드와 성 미카엘 성당: 12세기 최초 건립, 1215년부터 본당. 현재 건물은 1884년 건축.
- 도미니코 수도원: 1667년 목조 건물로 시작, 1706년 재건, 1922년부터 본당.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당: 1979년 목조 성당으로 시작, 1984년 현재 건물 완공. 1980년부터 영원한 도움의 성모 본당으로 지정.
- 선한 목자 성당: 1990년 건립, 1972년부터 본당.
- 타르노브제크의 체스토호바의 성모 성당: 1991년 건립, 1969년부터 본당.
- 성 바르바라 성당: 1988년 목조 성당으로 시작, 1996년 현재 건물 완공, 1989년부터 본당.
- 하느님의 자비 성당: 1996년 건립, 1997년부터 본당.
- 방문 성당: 1997년 건립, 1985년부터 본당.
- 그리스도 왕 성당: 2003년 건립, 2003년부터 본당.
- 모든 성인 경당: 2009년 건립.
- 타르노브제크의 도미니코 수녀원
5. 2. 관광 명소
장소 | 사진 | 정보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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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교회와 수도원 | ![]() | 마리아 성모 디지쿠프 성소. 17세기 말 바로크 양식의 수도원으로, 성 야고보 리틀 폴란드 길의 일부이다. 구시가지의 그워바츠키 광장 근처에 위치한다. | 오전 6시 – 오후 7시 개방. 예배 시간 중에는 관광 방문이 금지된다. |
도미니크 수녀원 및 비엘로비에시에 있는 성 미카엘과 성 게르트루드 교회 | 19세기 중반의 건물 단지이다. 수도원에는 설립자 로자 콜룸바 비아레츠카의 무덤이 있다. 교회의 뿌리는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전통에 따르면 원래의 나무 교회는 성 히아신토의 도미니크 수도회 활동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진다. | 교회 내부 보존 작업 중이다. | |
디지쿠프 성과 공원 및 정원 단지 | ![]() | 역사 박물관 이전을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 완벽한 복원 및 수리 작업 중이며, 지하 방문이 가능하다. 화요일 – 금요일 오전 10시 – 오후 4시, 일요일 오후 12시 – 오후 4시에 개방한다. 작업 종료 및 재개관은 2011년 또는 2012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
유대인 묘지 | ![]() | 1930년에 설립되었다. | 방문객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
타르노브제크 시나고그 | ![]() | 19세기 후반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시립 공공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월요일 – 금요일 오전 10시 – 오후 6시, 토요일 오전 8시 – 오후 3시에 개방한다. |
미에호친의 마리아 막달레나 교회 | 14세기 고딕 양식의 교회로, 폴란드 영토의 기독교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예배 시간 외에는 폐쇄된다. 예배 시간은 평일 오후 6시, 일요일 및 축일 오전 7시 30분, 오전 10시 35분, 오후 5시이다. | |
타르노브제크 모크르지슈프의 쉰들러 사냥 별장 | 19세기 네오고딕 양식의 건물로, 현재 교사 교육 센터의 필요에 맞게 개조되었다. | ||
세르비노프의 영원한 도움의 성모 교회 | 거대한 모자이크 성직자 구역이 특징이다. 에드문드 보야노프스키, 얀 보스코, 알베르트 시미엘로프스키, 지그문트 고라즈도프스키, 마더 테레사, 파우스티나 코발스카, 잔나 베레타 몰라, 파드레 피오 등 성인 및 축복받은 자들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 24시간 운영되는 영원한 숭배 예배당이 있다. 상부 교회는 예배 시간에 개방된다. 예배 시간은 평일 오전 6시, 오전 8시, 오후 3시, 오후 6시이며, 일요일 및 축일은 오전 7시, 오전 8시 30분, 오전 10시, 오전 11시 30분, 오후 1시, 오후 4시, 오후 5시, 오후 7시 30분이다. | |
타르노브제크-나그나유프의 파데비츠 저택 | 클래식 양식의 건물로 비스토스트라다 거리 근처에 위치한다. | 폐쇄되었다. | |
즈비에르지니에츠키 숲 | 산도미에르스카 황무지의 일부가 남아있는 곳이다. | 즈비에르지니에츠카 거리는 디지쿠프 성에서 세르비노프를 거쳐 숲으로 이어진다. | |
마초프스키 저수지 | ![]() | 구 황 광산 부지에 건설된 인공 저수지로, 비스토스트라다 거리 근처에 위치한다. | 2010년에 개장했다. |
비미슬로프의 옛 타르노브제크 곡물 창고 | ![]() | 1843년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시립 역사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화요일 – 금요일 오전 8시 – 오후 3시, 토요일 오후 12시 – 오후 4시에 개방한다. |
바르토시 글로바츠키 기념비 | 1904년에 건설되었으며, 도미니크 수도원 맞은편 주요 타운 스퀘어에 위치한다. | ||
타르노브제크 시청 | 1910년에 지어진 절충주의 양식의 건물이다. 구 카운티 홀이었으며, 현재 타르노브제크 시장 사무실로 사용된다. 수로비에츠키 광장 근처에 위치한다. | 오전 7시 30분 – 오후 3시 30분에 개방한다. | |
옛 부르거 카지노 | 20세기 초에 건설되었으며, 현재 문화 커뮤니티 센터로 사용된다. 소콜라 거리 근처에 위치한다. |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종교 건축물들이 있다.
- 막달레나 성당: 약 1160년 건설, 1132년경부터 본당
- 성 게르트루드와 성 미카엘 성당: 12세기 최초 성당 건립, 1215년부터 본당, 현재 성당은 1884년 건설
- 도미니코 수도원: 1667년 목조 건물 건립, 1706년 현재 건물 건립, 1922년부터 본당
-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당: 1979년 목조 성당 건립, 1984년 현재 성당 건립, 1980년부터 영원한 도움의 성모 본당
- 선한 목자 성당: 1990년 건설, 1972년부터 본당
- 타르노브제크의 체스토호바의 성모 성당: 1991년 건설, 1969년부터 본당
- 성 바르바라 성당: 1988년 목조 성당 건립, 1996년 현재 성당 건립, 1989년부터 본당
- 하느님의 자비 성당: 1996년 건설, 1997년부터 본당
- 방문 성당: 1997년 건설, 1985년부터 본당
- 그리스도 왕 성당: 2003년 건설, 2003년부터 본당
- 모든 성인 경당: 2009년 건설
- 타르노브제크의 도미니코 수녀원
6. 스포츠
- 시아르카 타르노브제크 - 축구 클럽
- 타르노브제크 시립 경기장
7. 자매 도시
타르노브제크는 다음 도시들과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3]
참조
[1]
웹사이트
Population. Size and structure by territorial division 1995-2009
http://www.stat.gov.[...]
Central Statistical Office 00-925 Warsaw, Al. Niepodległości 208
2009-12-31
[2]
웹사이트
Tarnobrzeg
http://www.sztetl.or[...]
Virtual Shtetl
2016-01-16
[3]
웹사이트
Tarnobrzeg Official Website – Partner Cities
http://www.tarnobrze[...]
"[[File:Flag of Poland.svg|border|8px]]{{fontcolor|Green|(in}} [[Polish language|{{fontcolor|Green|Polish}}]]) [[copyright|©]] 1999–2008 Urząd Miasta Tarnobrzeg"
2008-10-23
[4]
웹사이트
Banská Bystrica Sister Cities
http://eng.banskabys[...]
"[[copyright|©]] 2001–2008"
2008-10-23
[5]
웹사이트
Miasta partnerskie
http://www.tarnobrze[...]
2008-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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