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헝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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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재했던 다민족 국가로, 정식 명칭은 '제국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이 이중 군주국 형태로 연합한 형태로, 외교, 국방, 재정을 공유하고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국왕이 군주였다. 19세기 말, 1848년 혁명, 이탈리아 통일 운동 등의 위기를 겪었고,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독일 연방의 맹주 자리를 넘겨주었다.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을 통해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으로 분리되었고, 각자 의회와 정부를 갖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세르비아를 공격하면서 전쟁에 참전했으나, 패배하며 1918년 붕괴되었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이탈리아 등으로 분리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독일어, 헝가리어, 체코어 등 여러 언어가 사용되었다. 문화적으로는 철학, 경제학, 건축, 음악, 미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전을 이루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해체되면서 그 유산은 각 국가로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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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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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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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명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독일어 명칭 | 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 (외스터라이히슈-웅가리셰 모나르히) |
헝가리어 명칭 | Osztrák–Magyar Monarchia (오스트락-마저르 모나르키어) |
일반 명칭 | 오스트리아-헝가리 |
시대 | 신제국주의 제1차 세계 대전 |
건국 | 1867년 타협 |
건국일 | 1867년 3월 30일 |
멸망 | 1918년 |
멸망일 | 1918년 10월 31일 |
국가 표어 | Indivisibiliter ac inseparabiliter (나눌 수 없고 분리할 수 없음) |
국가 |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 (신이여, 프란츠 황제를 보호하소서) |
공용어 | 독일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
기타 사용 언어 | 독일어 헝가리어 크로아티아어 체코어 폴란드어 루테니아어 루마니아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 슬로바키아어 슬로베니아어 이탈리아어 카르파티아 로마니어 이디시어 프리울리어 이스트로-루마니아어 라딘어 |
종교 | 76.6% 로마 가톨릭교회 (64–66% 라틴 교회, 10–12% 동방 가톨릭 교회) 8.9% 개신교 (루터교, 칼뱅주의, 유니테리언) 8.7% 동방 정교회 4.4% 유대교 1.3% 이슬람교 |
수도 | 빈 (오스트리아) 부다페스트 (헝가리) |
최대 도시 | 빈 |
통화 | 굴덴/플로린 (1867–1892) 크로네 (1892–1918) |
면적 | 676,615 km² (1910년) |
인구 | 51,390,223명 (1910년) |
정치 |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
황제 | 프란츠 요제프 1세 (1867–1916) 카를 1세 (1916–1918) |
오스트리아의 수상 |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 (1867, 초대) 하인리히 람마슈 (1918, 마지막) |
헝가리의 총리 | 줄러 안드라시 (1867–1871, 초대) 미하이 카로이 (1918, 마지막) |
의회 | 제국의회 헝가리 의회 |
역사적 사건 | |
1867년 타협 | 1867년 3월 30일 |
독오 동맹 | 1879년 10월 7일 |
보스니아 위기 | 1908년 10월 6일 |
7월 위기 | 1914년 6월 28일 |
세르비아 침공 | 1914년 7월 28일 |
제국 해체 | 1918년 10월 31일 |
오스트리아 공화국 | 1918년 11월 12일 |
헝가리 공화국 | 1918년 11월 16일 |
생제르맹 조약 | 1919년 9월 10일 |
트리아농 조약 | 1920년 6월 4일 |
현재 국가 | |
상징 | |
2. 국명
이 나라의 정식 명칭은 '''제국 의회에서 대표되는 왕국들과 영토 및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 und die Länder der heiligen ungarischen Stephanskrone|디 임 라이히스라트 페어트레테넨 쾨니크라이헤 운트 렌더 운트 디 렌더 데어 하일리겐 웅가리셴 슈테판스크로네deu, A birodalmi tanácsban képviselt királyságok és országok és 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어 비로덜미 터나치번 케프비셸트 키라이샤고크 에시 오르사고크 에시 어 머저르 센트 코로너 오르사거이hun)이었다.[15] 내부 행정에서는 이 전체 명칭이 사용되었다.
통상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외스터라이히쉬-웅가리쉬 모나르히deu, Osztrák–Magyar Monarchia|오스트라크-머저르 모너르히어hun)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불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주로 '''오스트리아-헝가리'''(Österreich-Ungarndeu, Ausztria-Magyarországhun)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1868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결정에 따라, 국제 관계에서의 공식 명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왕국'''(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Reichdeu, Osztrák–Magyar Monarchia/Birodalomhun)으로 정해졌다.[18] 영어권에서는 종종 '이중 군주국' 또는 단순히 '오스트리아'라고 불리기도 했다.[18]
오스트리아인들은 또한 k. u. k. Monarchiedeu(k. u. k. monarchyeng)[16] (Kaiserliche und königliche Monarchie Österreich-Ungarn|카이저리헤 운트 쾨니글리헤 모나르히 외스터라이히-웅가른deu; Császári és Királyi Osztrák–Magyar Monarchia|차사리 에시 키라이 오스트라크-머저르 모너르히어hun)[17]라는 명칭도 사용했는데, 이는 '제국이자 왕국인 군주국'이라는 뜻이다. 또한 '다뉴브 군주국'(Donaumonarchie|도나우모나르히deu; Dunai Monarchia|두너이 모너르히어hun) 또는 '이중 군주국'(Doppel-Monarchie|도펠모나르히deu; Dual-Monarchia|두알모너르히어hun), '쌍두 독수리'(Der Doppel-Adler|데어 도펠아들러deu; Kétsas|케트샤시hun)라는 별칭도 사용했지만, 헝가리나 다른 지역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았다.
1867년 이후 공식 기관 명칭에 사용된 약어는 다음과 같이 그 책임 범위를 나타냈다.
약어 | 원어 | 의미 | 적용 대상 |
---|---|---|---|
k. u. k.deu | kaiserlich und königlichdeu | 제국이자 왕립 | 군주국 전체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관 (예: 해군, 1889년 이후 육군)[20] |
K. k.deu | kaiserlich-königlichdeu | 제국-왕립 | 치슬라이타니아(오스트리아)의 기관. "왕립"은 보헤미아 왕관령을 지칭. |
K. u.deu 또는 M. k.hun | königlich-ungarischdeu 또는 Magyar királyihun | 왕립 헝가리 | 트란스라이타니아(헝가리)의 기관. |
k.hrv | kraljevskihrv | 왕립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내 자치 기관.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에 따라 크로아티아어가 유일한 공식 언어였기 때문에 사용. |
1915년에는 정식 명칭의 일부인 "제국 의회에서 대표되는 여러 왕국 및 여러 지방"이 "'''오스트리아 여러 지방'''(Österreichische Länderdeu)"으로 개칭되어, 정식 명칭은 "'''오스트리아 여러 지방 및 신성한 헝가리의 이슈트반 왕관의 여러 지방'''"이 되었다. 이는 당시 오스트리아 당국이 '오스트리아'의 범위를 헝가리까지 포함하는 대 오스트리아주의적 관점을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다음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통용되었던 일부 언어로 표기된 제국의 명칭이다.
언어 | 명칭 | 발음 |
---|---|---|
독일어 | Österreich-Ungarn Monarchiedeu | 외스터라이히-웅가른 모나르히 |
헝가리어 | Osztrák-Magyar Monarchiahun | 오스트라크-머저르 모너르히어 |
폴란드어 | Austro-Węgrypol | 아우스트로-벵그리 |
이탈리아어 | Austria-Ungheriaita | 아우스트리아-운게리아 |
체코어 | Rakousko-Uherskoces | 라코우스코-우헤르스코 |
슬로바키아어 | Rakúsko-Uhorskoslk | 라쿠스코-우호르스코 |
슬로베니아어 | Avstro-Ogrskaslv | 아브스트로-오그르스카 |
크로아티아어 | Austro-Ugarskahrv | 아우스트로-우가르스카 |
세르비아어 | Аустро-Угарскаsrp | 아우스트로-우가르스카 |
우크라이나어 | Австро-Угорщинаukr | 아우스트로-우호르시나 |
루마니아어 | Austro-Ungariaron | 아우스트로-운가리아 |
3. 역사
1848년 혁명의 여파와 크림 전쟁에서의 외교적 실책, 이탈리아 통일 전쟁(1859년) 및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국제적 지위가 크게 하락하고 내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패배로 독일 연방에서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제국의 위상은 더욱 추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국 내 다양한 민족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특히 제국 인구의 약 20%를 차지하는 마자르인(헝가리인)의 자치 요구가 거셌다. 오스트리아 지배층은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민족에게 평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연방제 대신, 제국 내 두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인 마자르인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했다. 1867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마자르)는 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를 맺어, 오스트리아 황제가 헝가리 국왕을 겸하고 외교, 군사, 재정 등 일부 공동 업무를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각자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는 이중 제국 체제를 수립했다. 이것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시작이다.[20]
그러나 아우스글라이히는 제국 내 다른 민족들의 불만을 잠재우지 못했다. 오스트리아 지역에서는 독일인이, 헝가리 지역에서는 마자르인이 지배적인 지위를 유지하려 하면서 체코인, 폴란드인, 슬로바키아인, 남슬라브족 등 다른 민족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특히 헝가리 정부는 마자르화 정책을 추진하여 비(非)마자르 민족의 반발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의 민족 운동은 제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보다는 제국 체제 내에서의 자치권 확대를 목표로 했다. 이는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소국으로 분립하는 것의 위험성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독일과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점차 발칸 반도로 눈을 돌렸다. 이 지역은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되면서 '유럽의 화약고'로 변모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는 러시아와 경쟁하며 발칸 반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1878년 베를린 회의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행정권을 획득했고,[155] 1908년에는 이 지역을 완전히 병합했다. 이 병합은 세르비아를 비롯한 슬라브 민족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보스니아 위기), 발칸 반도의 긴장을 더욱 고조시켰다.[162] 제국은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1882년)을 맺어 국제적 입지를 다지려 했으나, 발칸 문제를 둘러싼 열강 간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는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했다.[163] 오스트리아-헝가리 내 강경파는 이를 빌미로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을 주장했고, 독일 제국의 전폭적인 지지(백지수표)를 약속받은 후 세르비아에 가혹한 최후 통첩을 보냈다.[164] 세르비아가 일부 요구 조건을 거부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했고,[165] 이는 러시아,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주요 강대국들이 연쇄적으로 참전하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졌다.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 전선과 러시아 전선에서 고전하며 군사적 약점을 드러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는 지휘와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고,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경제난과 식량 부족, 민족 갈등 심화 등 내부 문제가 심각해졌다. 제국은 점차 독일 제국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의존하게 되었고, 1916년 즉위한 카를 1세 황제의 단독 강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
1918년,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제국 내 민족들은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 제창한 민족 자결 원칙에 고무되어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체코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 등).[167] 헝가리 역시 완전한 분리를 선언했다. 전선에서의 패배와 내부 붕괴가 가속화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1월 3일 연합국에 항복했고(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 11월 11일 카를 1세가 국사 불관여를 선언하면서 650년 역사의 합스부르크 제국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 이후, 중부 및 동유럽 지역은 민족 문제와 영토 분쟁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제국은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복잡한 지역을 하나의 틀 안에서 유지하며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지만, 민족 간의 완전한 평등을 이루지 못하고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붕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부에서는 제국의 해체가 중부 유럽의 정치적 균형을 파괴하고 이후 더 큰 비극을 초래했다고 보기도 한다.[149]연도 주요 사건 1867년 아우스글라이히 (대타협) 체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성립 1878년 베를린 회의 참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행정권 획득[155] 1879년 독일 제국과 독오 동맹 체결[156] 1882년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 동맹 결성[158] 1889년 루돌프 황태자 사망 (마이얼링 사건) 1898년 엘리자베트 황후 암살 1908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 선언, 보스니아 위기 발발[162] 1912년-1913년 발칸 전쟁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 발생[163]
7월 28일: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제1차 세계 대전 발발[165]1915년 이탈리아, 연합국 측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165]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 사망, 카를 1세 즉위[165] 1918년 제국 내 민족들 독립 선언, 11월 3일: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 체결 및 항복, 11월 11일: 카를 1세 국사 불관여 선언, 제국 해체
3. 1. 형성
오스트리아 제국은 19세기 중반 이후 여러 위기에 직면했다. 1848년 혁명의 물결은 이탈리아 반도에도 영향을 미쳐, 리소르지멘토라 불리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과 결합하며 혁명의 기운을 고조시켰다. 1859년 4월, 롬바르디아 주민들이 사르데냐 왕국 군대에 합류한 사건을 계기로,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솔페리노 전투에서 패배하여 베네치아 지역의 요새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꿔 7월 11일 빌라프란카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5월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등에서 혁명이 일어나 승리를 확신하던 사르데냐 지도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르데냐와의 협의 없이 체결된 이 휴전은 11월 취리히 조약으로 확정되었고, 이에 격분한 사르데냐 재상 카밀로 카보우르는 사임했다. 나폴레옹 3세가 태도를 바꾼 이유는 카보우르가 이탈리아 혁명의 배후라는 사실과, 이탈리아 반도가 프랑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연이은 패배 속에서 알브레흐트 대공이 프로이센 측에 프랑스 공격을 제안한 것도 부담으로 작용했다.
취리히 조약에 따라 롬바르디아 지역은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었다. 같은 해 가을, 합스부르크로트링겐가 및 그 분가인 합스부르크에스테가가 통치하던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피아첸차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과 교황령 일부 지역에서도 기존 지배자를 축출하고 사르데냐와의 합병을 결의했다. 1860년 1월 카보우르가 재상으로 복귀한 후, 3월 국민투표를 통해 이 지역들은 사르데냐에 병합되었다.
한편, 독일어권에서는 1815년 빈 회의로 성립된 독일 연방의 성격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비독일 지역에 대한 연방의 책임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북독일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왕국 중심의 통일을, 남독일 자유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 중심의 대독일 통일을 주장하며 독일 내 통일 열망이 높아졌다. 1862년 9월,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와 의회 간의 군사 개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재상으로 취임했다. 그는 철혈 정책을 내세우며 군사 개혁과 헌정 분쟁 해결을 추진했고, 이 과정에서 오스트리아와의 대결을 통해 "독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비스마르크에게 기회는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 문제에서 찾아왔다. 두 공국은 덴마크 국왕이 공위를 겸했지만, 홀슈타인은 독일 연방 소속이었고 민족 구성도 복잡했다. 1848년 혁명 시기 덴마크 왕국의 프레데리크 7세가 완전 병합을 시도했으나 프로이센의 지원으로 저지되었고, 1852년 런던 조약으로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1863년 크리스티안 9세가 다시 병합을 추진하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덴마크에 최후통첩을 보냈고, 덴마크가 이를 거부하면서 1864년 2월 1일 덴마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의 승리로 끝났고, 10월 빈 조약으로 두 공국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공동 관리 하에 들어갔다. 이후 가슈타인 협정에 따라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하게 되었다. 이는 프로이센 영토 내에 오스트리아 관리 지역이 생기는 문제를 야기했고, 프로이센 주도의 북독일 통일에 오스트리아가 걸림돌이 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결국 오스트리아가 북독일 통일에 방해가 되자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이 발발했다. 프로이센은 7주 만에 오스트리아를 압도적으로 격파했다. 이 전쟁의 결과로 프로이센은 하노버 왕국, 헤센 선제후국, 슐레스비히 공국, 홀슈타인 공국, 프랑크푸르트 자유시를 합병했다. 합스부르크가는 독일 연방의 맹주 자리를 프로이센에게 넘겨주었고,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해야 했다.[19] 오스트리아는 독일어권에서의 주도권을 상실했으며, 연이은 영토 및 영향력 상실로 제국 내에서의 권위가 크게 추락했다.
이러한 외부적 요인 외에도, 제국 내부의 문제들이 대타협의 배경이 되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오랜 통치에 대한 헝가리인들의 불만은 1848년 헝가리 혁명으로 폭발했으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71] 비록 혁명은 실패했지만, 오스트리아 당국은 헝가리에 대한 통치 방식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더 이상 강경책만으로는 제국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합스부르크가는 제국 내에서 오스트리아인 다음으로 인구가 많은 헝가리인(약 20%)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이는 독일인 지배를 포기하고 연방 국가로 나아가는 대신, 독일인과 헝가리인이 연합하여 제국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지배층인 독일인은 제국 전체 인구의 24%에 불과하여 다른 민족들의 요구를 계속 억누르기 어려웠다.
1850년대 후반부터 헝가리 혁명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1713년 국사조칙 하에서 헝가리 왕국의 완전한 자치권을 인정한다면, 외교와 국방은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는 헝가리와의 권력 분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외무장관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는 교착 상태에 빠진 헝가리와의 협상을 마무리 짓고자 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페렌츠 데아크가 이끄는 헝가리 귀족들과 협상에 들어갔다.
1867년 3월 20일, 헝가리 혁명으로 폐쇄되었다가 페스트에 다시 문을 연 헝가리 의회는 제국 개편을 위한 새로운 입법안 논의를 시작했다. 헝가리 지도자들은 법안 통과를 위해 오스트리아 황제가 6월 8일까지 성 이슈트반 왕관령(헝가리)의 국왕으로 즉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20] 이에 7월 28일,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함과 동시에, 제국을 "제국 의회에서 대표되는 여러 왕국 및 여러 방"(치스라이타니엔, 오스트리아 측)과 "신성한 헝가리의 이슈트반 왕관의 여러 방"(트란스라이타니엔, 헝가리 측)으로 나누는 새로운 법률을 승인하고 공포했다. 이 독일인과 마자르인 간의 타협, 즉 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를 통해 군주(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국왕)와 군사, 외교, 재정만을 공유하고 나머지는 각자의 정부가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이중 국가 체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공식적으로 탄생했다. 헝가리 왕국은 1848년 헝가리 혁명 이후 상실했던 자치권을 되찾았다.
3. 2. 1866–1878: 소독일주의와 발칸 문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1866년 프라하 조약으로 종결되었으며, 이 조약은 독일 문제를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 해법으로 해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21] 이 패배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연방 해체와 함께 독일 문제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19]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외무장관을 지낸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 백작은 프로이센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게 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보이스트는 오스트리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프랑스에 기대를 걸고, 나폴레옹 3세와 반(反)프로이센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 연합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되면서, 오스트리아가 독일 내에서 과거의 영향력을 회복하려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고 보이스트는 자리에서 물러났다.[22]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새로운 외교적 활로를 모색하며 발칸 반도로 눈을 돌렸다. 당시 발칸 반도는 여러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독립 요구가 거세지며 불안정한 상황이었다.[23] 이러한 상황 속에서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모두 발칸 지역에서의 세력 확장을 노렸다.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슬라브족과 정교회 신자들의 보호자를 자처했고,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빈을 중심으로 한 다민족, 다종교 제국의 영향력 확대를 꾀했다.
1871년부터 1879년까지 외무장관을 역임한 헝가리인 줄러 앤드라시 백작은 러시아의 발칸 반도 팽창을 견제하고,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남슬라브 연방 구상을 저지하는 것을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로 삼았다. 그는 러시아 대신 독일 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하고자 했다.[24]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8년 베를린 회의에 참가하여 베를린 조약을 통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행정권을 획득하며 발칸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일부 확보했다.[155]
3. 3. 1878–1914: 베를린 회의, 발칸 반도의 불안정, 보스니아 위기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단체들은 발칸 반도의 반군을 지원했고, 이는 러시아 정부가 정교회 신자 보호를 명분으로 1877년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도록 압박하는 결과로 이어졌다.[20]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의 세르비아 지배권 문제를 중재하지 못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튀르크 전쟁이 발발하자 중립을 지켰다. 루마니아와 그리스의 도움을 받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을 물리치고, 산 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러시아의 영향력 아래 있는 거대한 대불가리아를 세우려 했다.
이 조약은 국제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유럽 전체가 전쟁 직전까지 가는 상황을 만들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영국은 대불가리아가 사실상 러시아의 위성국이 되어 러시아가 발칸 반도를 지배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영국 총리 벤자민 디즈레일리는 수에즈 운하 통과 경로와 너무 가까운 동지중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군함을 파견했다. 오스트리아는 산 스테파노 조약이 러시아와 그 정교회-슬라브 동맹에 지나치게 유리하다고 여겼다.
베를린 회의는 러시아가 오스만 영토에서 분할하려 했던 대불가리아를 다시 나누고, 불가리아의 어떤 지역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얻지 못하게 함으로써 러시아의 승리를 상당 부분 되돌렸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슬라브족이 다수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할 권한을 얻었다(병합은 아님). 이는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조치였다.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는 완전한 독립을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칸 반도는 독립에 대한 열망과 열강 간의 경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지역으로 남았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외무부 장관 줄러 언드라시 백작은 러시아가 발칸 반도에서 더 이상의 영토적 요구를 하지 않도록 압박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대불가리아는 분할되었고 세르비아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같은 해, 영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가 인근 세르비아로 확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보스니아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러시아의 발칸 진출을 막기 위한 추가 조치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87년 영국 및 이탈리아와 지중해 협정을 맺고, 1879년에는 독일, 1883년에는 루마니아와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한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다. 베를린 회의 이후 유럽 열강들은 복잡한 동맹과 조약을 통해 안정을 유지하려 했다.
발칸 반도의 불안정과 러시아의 팽창 정책에 대한 우려, 그리고 유럽 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9년 10월 독일과 독오 동맹을 맺었고, 1882년 5월에는 이탈리아까지 참여시켜 삼국 동맹을 결성했다. 이탈리아는 주로 프랑스와의 식민지 경쟁 때문에 이 동맹에 가입했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사이의 긴장은 여전히 높았기 때문에, 독일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기존의 삼제 동맹을 러시아와의 재보험 조약으로 대체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범슬라브주의 문제로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막으려 했다. 노비파자르 산자크 지역은 1878년부터 1909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점령 하에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에 반환된 후 몬테네그로 왕국과 세르비아 왕국에 의해 분할되었다.[26]
대(大)발칸 위기 직후인 1878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점령했다. 이후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공식적으로 병합하여, 치스라이타니아(오스트리아)나 트란스라이타니아(헝가리) 어느 한쪽에 귀속시키지 않고 제국 공동 재무부가 직접 통치하는 공동 영토로 만들었다. 이 병합으로 인해 빈에서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크로아티아와 합쳐 제국의 세 번째 슬라브 구성 단위를 만들자는 논의가 일기도 했다.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안(1867년 사망)과 외아들 루돌프가 사망하면서 황제의 조카인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헝가리 귀족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이러한 삼원주의(오스트리아-헝가리-슬라브) 구상을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8년 병합 당시 발표된 포고령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주민들에게 완전한 시민권과 지방 의회를 통해 자신들의 문제를 관리할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이 약속에 따라 1910년에 헌법이 공포되었다.
보스니아 위기(1908-1909)의 핵심 인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과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였다. 두 사람 모두 개인적인 정치적 야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에렌탈은 이를 통해 성공을 거두었지만 이즈볼스키는 이 위기로 인해 몰락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1909년 유럽을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 결과적으로 1914년 7월에 전쟁을 시작하게 될 두 개의 무장 진영으로 유럽을 분열시키는 데 기여했다.[27][28]
에렌탈은 발칸의 슬라브 민족들이 단결할 수 없으며, 어떤 발칸 동맹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위협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터키, 루마니아를 포함하는 동맹을 만들자는 오스만 제국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불가리아를 소외시켰고, 불가리아는 대신 러시아와 세르비아로 눈을 돌렸다. 오스트리아는 남쪽으로 추가 확장을 할 의도가 없었지만, 에렌탈은 그럴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발칸 국가들을 견제하려 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발칸 국가들이 오스트리아를 막기 위한 방어 동맹을 결성하도록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처럼 최고위층의 심각한 오판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적들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1914년, 보스니아의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의 완전 병합 계획에 반발하여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자를 암살했고, 이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다.[29]
3. 4. 1914–1918: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된 사라예보 사건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 사건을 명분 삼아 독일 제국의 지지를 확보한 후,[38]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고 전쟁을 선포했다. 이는 유럽 주요 강대국들의 연쇄적인 참전을 유발하며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군사적 준비 부족과 지휘부의 실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독일 제국에 대한 군사적, 경제적 의존도가 심화되었다.[40][41][64] 1915년에는 이전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영토 확장을 대가로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전선은 더욱 확대되었다.[39]
전쟁 기간 동안 제국 내부는 심각한 경제난과 식량 부족에 시달렸으며, 다양한 민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독립 요구가 거세졌다.[42] 1916년 말 즉위한 카를 1세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연합국과의 단독 강화를 시도했으나,[42] 이탈리아 등의 반대로 실패했다.[43][44]
헝가리 왕국은 전쟁 수행에 상당한 병력과 물자를 지원했으나,[62][63] 전쟁 말기에는 제국 해체의 흐름에 동참했다. 1918년, 연합국의 공세와 제국 내 민족들의 잇따른 독립 선언(체코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 등)으로 제국은 급격히 와해되었다.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 등에서 결정적 패배를 겪은 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8년 11월 3일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을 맺고 항복했다. 11월 11일, 카를 1세 황제가 국사 불관여를 선언하면서[68] 합스부르크 제국은 최종적으로 해체되었다.
3. 4. 1. 발발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위 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보스니아 내 기존의 종교 및 민족 갈등을 극단적으로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암살 직후 사라예보에서는 오스트리아 당국이[32][33]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한 폭력을 조장하면서, 가톨릭 크로아티아인과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세르비아계 주민 2명을 살해하고 다수의 세르비아계 소유 건물을 파괴하는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이 일어났다. 작가 이보 안드리치는 이를 "사라예보 증오의 광란"이라고 묘사했다.[34] 세르비아계에 대한 폭력은 사라예보뿐만 아니라 오늘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속하는 다른 주요 오스트리아-헝가리 도시들에서도 조직적으로 발생했다.[35]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약 5,500명의 유력한 세르비아인을 투옥하거나 추방했으며, 이 중 700명에서 2,200명이 감옥에서 사망했다. 460명의 세르비아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고, 주로 무슬림으로 구성된 특수 민병대 'Schutzkorps'가 창설되어 세르비아인 박해에 앞장섰다.[37]
오스트리아-헝가리 정부 내에서는 외무부 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백작과 육군 사령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 등 일부 강경파들이 이전부터 세르비아의 민족주의 움직임을 억누르기 위한 예방 전쟁을 주장해왔으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티서는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사라예보 사건 이후 분위기는 급변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부는 7월 5일, 포츠담에 대사 라슬로 쇼기니를 파견하여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입장을 확인했다.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대(對)세르비아 행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 이른바 '백지수표'를 약속했다.
:폐하는 저에게 이 경우에도 독일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프란츠 요제프]에게 보고하도록 승인하셨습니다. 언급했듯이, 그는 먼저 재상과 상의해야 했지만, 특히 세르비아에 대한 우리의 행동과 관련하여 폰 베트만 홀베크가 그와 완전히 동의할 것이라는 점에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았습니다. [빌헬름]의 견해로는, 행동을 취하기 전에 참을성 있게 기다릴 필요가 없었습니다...[38]
독일의 지지를 확보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도부는 세르비아가 더 강력해지기 전에 군사적으로 제압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사라예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3일 세르비아 정부에 10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최후 통첩을 전달했다. 이 요구 조건들은 세르비아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도록 의도적으로 가혹하게 만들어졌다. 세르비아는 10개 요구 사항 중 9개를 수용하고 나머지 하나에 대해서도 부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유보적인 답변을 보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거부하고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도 결국 강경파 고문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 사건들은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키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이어졌다. 러시아 제국이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우며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선포하자, 독일 제국은 러시아에 선전포고(8월 1일)하고 동맹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원했다. 이에 오스트리아-헝가리도 8월 6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프랑스와 영국 역시 동맹 관계에 따라 독일에 선전포고하면서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삼국 동맹의 일원이었던 이탈리아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191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 일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협상국 측에 가담하여 옛 동맹국에게 등을 돌렸다.[39]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 지휘관들과 함께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외교적으로 점차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으며, 동맹국인 독일의 영향력과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40][41] 제국의 초기 전쟁 목표는 세르비아를 응징하고 제국 내 민족들의 분열을 막는 것이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러한 목표 달성은 요원해졌다. 1916년 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카를 1세는 친독일 성향의 관리들을 해임하고 연합국 측에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타협을 통해 전쟁을 종결시키거나, 심지어 독일과 별도로 단독 강화를 맺을 가능성까지 모색했다.[42] 그러나 이러한 평화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이탈리아는 1915년 협상국 가담 시 약속받은 오스트리아 영토(남티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일부 등)를 요구했으나, 오스트리아는 트렌티노 지역만을 양보할 의사가 있었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다.[43] 결국 카를 1세의 평화 시도는 국내외적으로 '패배주의'로 인식되어 그의 입지만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4]
3. 4. 2. 전시 외교
제1차 세계 대전 중 군 지휘관들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부 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 백작과 육군 사령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 등 일부 강경파는 세르비아에 대한 예방 전쟁을 주장했으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티서는 반대했다. 그러나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도부는 세르비아에 대한 군사 행동을 결정하기 전 독일의 지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1914년 7월 5일, 라슬로 쇼기니 대사가 포츠담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만나 전폭적인 지원 약속을 받았다.[38]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7월 최후 통첩을 보내고 결국 전쟁을 선포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1915년, 협상국 측에 가담하여 옛 동맹국이던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하고 영토 획득을 추구했다.[39]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외교적으로 비교적 수동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동맹국인 독일 제국의 지배와 통제를 점점 더 받게 되었다.[40][41] 제국의 전쟁 목표는 세르비아를 응징하고 제국 내 민족적 분열을 막는 것이었지만, 이는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1916년 말,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카를 1세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시작했다. 그는 친독일 성향의 관리들을 해임하고 연합국 측에 평화 제의를 타진했다. 이를 통해 타협을 통해 전쟁을 종결하거나, 심지어 독일과 별도로 평화 조약을 맺을 가능성까지 모색했다.[42]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특히 이탈리아는 1915년 연합국에 가담하면서 약속받은 오스트리아 영토 할양을 요구했으나, 오스트리아는 트렌티노 지역만을 넘겨줄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었다.[43] 결국 카를 1세의 평화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는 오히려 패배주의자로 인식되어 국내외적으로 입지가 약화되었다.[44]
3. 4. 3. 전황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강경파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예방 전쟁을 주장했고, 독일 제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받은 후[38] 세르비아에 7월 최후 통첩을 보냈다. 세르비아가 요구 사항 일부를 수용하지 않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전쟁을 선포했고, 이는 곧 제1차 세계 대전으로 확대되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동원령을 내리자 독일이 러시아에,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러시아에 각각 선전포고했다. 이탈리아는 처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1915년 영토 확장을 대가로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를 공격했다.[39]
전쟁 초기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세르비아 침공에서 예상보다 큰 피해를 입고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동부 전선으로 병력을 이동시켜야 했다. 이는 오스트리아 최고 사령부의 전쟁 준비 부족과 무능함을 드러냈다. 군대는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참모총장이 실질적으로 지휘했으나, 1916년 말 카를 1세 황제가 즉위한 후 1917년에 해임되었다. 제국은 전쟁 기간 동안 총 780만 명의 병력을 동원했는데,[45] 이 중 약 40% 이상이 헝가리 왕국 출신이었다.[62] 헝가리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물자 공급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전쟁이 길어지면서 제국 전체의 경제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수백만 명의 남성이 징집되면서 농업 생산량은 급감했고 식량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 운송 체계는 과부하 상태였으며, 산업 생산력은 막대한 군수품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독일의 지원이 있었지만 상황을 개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제국 내 여러 민족 집단의 정치적 불안정은 전쟁 지원에 대한 국가적 합의에 대한 희망을 무너뜨렸다. 역사적, 언어적 문화를 기반으로 제국을 해체하고 자치 국가를 설립하라는 요구가 증가했다.
1916년 말부터 새로운 황제 카를 1세는 타협을 통해 전쟁을 끝내기 위해 연합국에 비밀리에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42] 특히 이탈리아의 반대로[43] 실패했다.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카를 1세를 패배주의자로 보이게 하여 국내외적으로 그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4]
전쟁 마지막 2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독일과 독립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상실했고, 1916년 9월부터는 독일 황제가 동맹국 군대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면서 사실상 독일의 위성국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64]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작전 능력은 보급 부족, 낮은 사기, 높은 사상자 발생률 때문에 심각하게 저하되었으며,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한 언어 및 문화적 장벽 또한 군대의 효율성을 심각하게 저하시켰다.[65] 헝가리 출신 병사 중 약 60만 명이 사망하고 70만 명이 부상당하는 등[63] 인명 손실도 막대했다.
1918년까지 경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국내에서 정부의 실책으로 전쟁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완전히 사라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 가을 극적인 속도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좌익 및 평화주의 정치 운동은 공장에서 파업을 조직했고, 군대 내 봉기가 일반화되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민족적 통일성은 감소했고, 연합국은 소수 민족의 분리 요구를 장려했으며 제국은 붕괴 직전에 놓였다.[42] 연합국의 승리가 임박해 보이자 민족주의 운동은 사회적 단결을 약화시키기 위해 민족적 불만을 이용했다.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군사적 패배(피아베강 전투,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는 다민족 제국을 구성하는 수많은 민족들이 이제 무의미해 보이는 대의를 위해 계속 싸우기를 거부하면서 반란의 도화선이 되었다. 황제는 제국이 무너지면서 통치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1918년 10월 14일, 외무 장관 바론 이슈트반 부리안 폰 라예츠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14개조 평화 원칙에 근거한 휴전을 요청했다. 이틀 후 카를 1세 황제는 제국을 연방으로 변경하려는 선언("1918년 10월 16일 제국 선언")을 발표했지만,[66] 상황을 되돌리기에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10월 18일, 미국은 민족 자치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탈리아 전투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인과 남슬라브족은 독립을 선언했다. 10월 28일 체코 정치인들이 프라하에서 평화적으로 권력을 인수했고(체코슬로바키아 독립 선언), 10월 29일 남슬라브족은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됨)를 선포했다. 10월 31일 헝가리에서는 미하이 카로이가 이끄는 아스터 혁명이 일어나 오스트리아와의 연합을 공식적으로 종료시켰다.[67]
결국 1918년 11월 3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탈리아와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을 맺고 항복했으며, 11월 11일 카를 1세가 오스트리아 국가 문제에 대한 "모든 참여를 포기"한다고 선언하면서[68]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3. 4. 4. 헝가리의 역할
1867년 아우스글라이히(대타협) 이후 헝가리 왕국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제국의 주요 구성원이 되었다. 헝가리는 제국 내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지만, 국내적으로는 마자르인 중심의 정책, 이른바 마자르화를 추진하여 다른 민족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다만, 크로아티아인과는 나고도바 법을 통해 일정 부분 타협하여 협력을 얻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티서 백작은 처음에는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독일의 강력한 지지를 확인한 후에는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하게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헝가리는 제국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인구의 약 42%만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62] 동원된 780만 명의 병력 중 과반수에 가까운 380만 명 이상이 헝가리 왕국 출신이었다. 이들 중 약 60만 명이 전사하고 70만 명이 부상을 입는 등 인적 손실도 막대했다.[63]
항목 | 내용 |
---|---|
헝가리 왕국 출신 동원 병력 | 380만 명 이상 (제국 전체 병력의 약 49%) |
전사자 | 약 60만 명 |
부상자 | 약 70만 명 |
헝가리는 인력뿐만 아니라 군수물자 공급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헝가리 측의 지원 덕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수년간 전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여를 바탕으로 헝가리 총리 이슈트반 티서와 외무 장관 이슈트반 부리안 등 헝가리 정치인들은 제국의 국내외 정책 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헝가리 내부에서도 어려움이 커졌다. 1916년 말부터는 식량 공급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고, 헝가리 정부는 연합국과의 단독 강화를 모색하기도 했으나, 연합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통합성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제국 곳곳에서 민족 독립 움직임이 거세지자, 헝가리 역시 독립을 향해 나아갔다. 1918년 10월 17일, 헝가리 국회는 오스트리아와의 연합을 종료하기로 의결했다. 10월 31일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아스터 혁명이 일어나 미하이 카로이 백작이 정권을 잡았다. 카로이는 즉시 아우스글라이히를 공식적으로 파기하여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시켰고,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 국가의 공식적인 해체를 의미했다.[67] 이후 11월 16일,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제국 시기 헝가리 왕국은 공식적으로 헝가리 문장이 부착된 적백녹 삼색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3. 4. 5. 패배 요인 분석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한 원인은 복합적이다. 군사적 무능력, 경제적 취약성, 심화된 민족 갈등, 정치적 리더십 부재, 외교적 고립 등이 상호작용하며 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군사적 요인개전 초기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여러 문제점을 드러냈다. 최고 사령부는 대륙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부족했으며, 육군과 해군 모두 전쟁 준비가 미흡했다. 특히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백작을 비롯한 지휘부의 전략적 판단 착오와 무능력은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세르비아 침공은 예상보다 큰 인명 피해를 낳았고, 러시아 제국과의 동부 전선에서는 독일 제국의 지원 없이는 전선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는 러시아군에게 참패하며 군사적 약점을 여실히 드러냈다.[164]
다민족으로 구성된 군대는 고질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병사들 간의 언어 장벽과 문화적 차이는 효과적인 지휘와 소통을 방해했으며, 이는 낮은 사기와 높은 사상자 발생률로 이어졌다.[65] 군대의 근대화 역시 지연되어 전투력 약화의 원인이 되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보급 부족 문제도 심각해졌고, 군대의 작전 능력은 크게 저하되었다.[65]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점차 독일 제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가 높아졌다. 1916년 9월부터는 독일 황제가 동맹국 전체 군대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사실상 독일의 군사적 위성국으로 전락했다.[64] 독일 내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동맹을 "시체에 묶인 것"으로 여기는 시각이 퍼질 정도였다. 전쟁 말기 피아베강 전투와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군사적 붕괴를 가속화했다.
경제적 요인제국의 경제 구조는 전쟁 수행에 매우 취약했다. 농업에 크게 의존하던 경제는 수백만 명의 남성이 군대로 징집되면서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고, 이는 식량 생산 감소로 이어졌다. 과밀화된 운송 시스템은 물자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산업 기반은 전쟁에 필요한 막대한 양의 군수품, 특히 탄약을 감당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독일의 경제적 지원도 제한적이었다. 1916년 말에는 헝가리에서조차 식량 공급이 불안정해졌고, 1918년에 이르러서는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어 전쟁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거의 사라졌다.
정치 및 사회적 요인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 이후 사라예보 반 세르비아 폭동 등 세르비아계에 대한 박해가 자행되면서 제국 내 민족 갈등은 극도로 심화되었다.[32][33][34][35][37] 전쟁이 길어지면서 제국 내 여러 민족 집단의 정치적 불안정은 더욱 커졌고, 역사적·언어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자치 및 독립 요구가 거세졌다. 이는 전쟁 수행을 위한 국가적 합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1916년 말 즉위한 카를 1세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연합국에 평화 협상을 제안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으나,[42] 이탈리아의 반대 등으로 실패했다.[43] 오히려 이러한 시도는 국내외적으로 그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44] 1918년에는 경제난과 전쟁 피로가 극에 달하면서 공장 파업과 군대 내 봉기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연합국, 특히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내세운 민족 자결 원칙은 제국 내 소수 민족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더욱 부추겼다.[42] 결국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국가(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됨), 헝가리 등이 잇따라 독립을 선언하면서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카를 1세가 제국을 연방제로 개편하려던 시도("1918년 10월 16일 제국 선언")는 너무 늦은 조치였다.[66]
외교적 요인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는 점차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면서 수동적인 역할에 머물렀다.[40][41] 전쟁의 주요 목표였던 세르비아 응징과 제국 내 민족 통합 유지라는 초기 목표는 완전히 실패했다. 1915년에는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영토 확장을 대가로 협상국 측에 가담하면서 외교적 타격을 입었다.[39] 카를 1세의 단독 강화 시도 역시 연합국의 거부, 특히 이탈리아의 강경한 입장으로 인해 무산되었다.[43] 연합국이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제국 내 소수 민족의 독립을 지지한 것도 제국의 외교적 고립을 심화시키고 붕괴를 앞당기는 요인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군사적 준비 부족과 지휘부의 무능, 취약한 경제 구조, 해결되지 못한 민족 갈등의 폭발, 정치적 리더십의 실패, 그리고 독일 제국에 종속된 외교적 한계 등 내외부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해체에 이르게 되었다.
3. 5. 1918: 제국의 종말, 해체, 소멸
1917년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이 일어나 "빵과 평화"를 내걸면서 제국 내에서는 긴 전쟁에 대한 피로감과 함께 전쟁을 기피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볼셰비키 정부(레닌 정부)는 독일과 단독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전선에서 이탈했다. 이로 인해 동맹국 측은 서부 전선에 공세를 집중하게 되었다. 연합국은 비밀리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단독 강화를 시도했으나 독일에게 발각되어 실패했고, 오스트리아 측의 강화 제안 역시 프랑스가 이를 공표하면서 무산되어 독일과의 관계만 악화되었다.이런 상황 속에서 시베리아에 파견되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연합국은 이들의 구출을 명분 중 하나로 시베리아 출병을 실시하기도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활약에 주목한 연합국은 체코인 지도자 토마시 마사리크가 제안한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지지하며 그의 "체코슬로바키아 국민 회의"를 임시 정부로 승인했다. 이는 당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하지 않았던 연합국의 입장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제국 내 다른 민족들의 독립 움직임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들어 제국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6월 15일 이탈리아 전선에서 단독 공세를 시작했으나 피아베강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에게 패배했다. 10월에는 부다페스트에서 폭동이 발생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공화국 독립을 선언했으며[167], 다른 민족들도 잇따라 독립을 선언했다. 오랜 동맹이었던 헝가리마저 완전한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10월 24일에는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다시 패배하며 주력군 대부분이 항복하여 군사력을 거의 상실했다. 결국 10월 27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합국에 항복 의사를 전달했고, 11월 3일 이탈리아와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을 맺고 정전하며 항복했다.
황제 카를 1세는 제국의 붕괴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1918년 11월 11일 "국사 불관여"를 선언하고 쇤브룬 궁전을 떠나 국외로 망명했다. 이로써 650년간 중유럽을 지배했던 합스부르크가의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은 민족 자결 원칙을 내세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민족의 감옥", "낙후된 봉건 체제 국가"로 규정하며 전쟁을 정당화했다. 특히 폴란드의 부활은 연합국의 주요 전쟁 목표였고, 이를 달성한 것을 크게 선전했다.
그러나 제국 해체 후의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전후 처리는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졸속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동유럽에 새로운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폴란드는 영토 문제로 소비에트 연방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전쟁을 벌였고, 헝가리는 대폭 축소된 영토에 불만을 품었다. 오스트리아는 주요 산업 기반을 잃고 심각한 경제 불황에 시달렸으며, 독일과의 합병마저 금지되면서 국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다. 중·동유럽의 불안정한 상황은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는 연합국이 내세웠던 "민족 자결" 원칙을 역이용하여 중·동유럽 국가들에 흩어져 사는 독일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침략을 감행했다. 결국 중·동유럽의 신생 국가들은 다시금 강대국의 각축장이 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의 영향력 아래 놓이며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여러 민족이 혼재된 중·동유럽에 무리하게 민족 자결 원칙을 적용한 결과, 더 큰 혼란과 비극을 초래했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합스부르크 제국을 붕괴시키는 것은 자유지만, 이것은 다민족을 통치하는 모델 국가이며, 한 번 부수면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후에는 혼란만 남을 뿐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149]
— 19세기 초, 빈을 점령한 나폴레옹에게 프랑스 외무상 탈레랑이 보낸 편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가장 큰 역할은 다양한 민족과 문화가 공존하는 복잡한 중·동유럽 지역을 하나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비록 민족 간 완전한 평등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제국 내 민족들은 점차 지위를 향상시켜 나갔고 보통 선거권이 부여되는 등 정치적 권리도 신장되었다(아우스글라이히).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민족들은 공존하며 교류했고,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제국은 시대적 과제였던 민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했던 "민주적 연방제"로의 개혁에도 실패했다. 이러한 한계는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민족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을 가속화시켰고, 연합국의 개입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제국 내 여러 민족에게 강력한 일체감과 통일성을 부여하지 못한 것이 제국의 결정적인 실패 요인으로 지적된다.
제국의 해체는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주민들에게도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다. 영토 축소뿐 아니라 대독일주의에 기반한 독일과의 합병(안슐루스)마저 금지되면서 민족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고, 이는 훗날 나치 독일에 의한 병합으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되었다. 14개조 평화 원칙의 초안 작성에 참여했던 월터 리프먼은 윌슨 대통령에게 제국 해체에 반대하며 존속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훗날 제국 붕괴가 "중부 유럽의 정치적 균형을 파괴하고, 히틀러로 가는 길을 열었다"고 평가했다.[149]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민족 국가가 잘 기능하는 최고의 해결책이었습니다.[149]
— 독일의 역사학자 골로 만
4. 정부
1867년 대타협은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오스트리아 제국("제국 의회에 대표된 영토들", 시스라이타니아)[4]과 헝가리 왕국("성 이슈트반 왕관령", 트란스라이타니아)[4] 양국 간의 실질적 연합으로 재편했다.[20] 이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중적인 정부 구조를 갖게 되었다. 양국은 동일한 군주를 오스트리아 황제 겸 헝가리 국왕으로 섬겼으나, 정부 조직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었다.[185]
# 공동 외교부, 국방부, 그리고 이들 부처의 예산을 담당하는 합동 재무부 (공동 정부)
# 오스트리아(시스라이타니아) 정부
# 헝가리(트란스라이타니아) 정부
외교와 국방은 공동 정부가 관리했지만[20], 그 외 다른 모든 국가 기능은 각자 처리했으며, 공통 시민권도 존재하지 않았다.[4][69][70]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는 각각 자체 의회와 총리를 두었다. 헝가리에는 국회가, 시스라이타니아에는 제국 의회 (Reichsrat)가 있었으며, 각 의회는 군주가 임명한 자체 행정부를 가졌다.[71][72] 헝가리 왕국은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 탄생 이후에도 별도의 의회를 유지했고, 1848년 헝가리 혁명 이전까지는 행정부와 정부가 오스트리아와는 거의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혁명 이후 폐쇄되었던 헝가리 정부와 의회는 1867년 대타협 이후 복원되었다.
공동 정부는 각료위원회(Ministerrat für Gemeinsame Angelegenheiten|미니슈테라트 퓔 게마인자메 앙겔레겐하이텐deu)가 이끌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통수권, 외교 정책, 관세 동맹에 대한 권한을 가졌다.[20] 공동 정부는 3개의 제국과 왕국(k.u.k) 합동 부처로 구성되었다:
- k.u.k 내무부 및 외교부
- k.u.k 국방부 및 전쟁부
- 상기 두 부처의 재정만을 담당하는 k.u.k 재무부
각료위원회에는 3개 부처 장관 외에 헝가리와 시스라이타니아의 총리, 각 지역 대공들, 그리고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도 포함되었다. 총참모장도 주로 회의에 참석했다. 황제가 참석하지 않을 때는 통상 내무부 및 외교부 장관이 회의를 주재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의회는 각각 60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대표단을 선출하여, 공동 정부의 예산 지출을 심의하고 투표했다. 그러나 외교와 군사 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은 황제에게 있었다.
시스라이타니아 내의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나 트란스라이타니아 내의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과 같은 지역은 자치구로서 독자적인 정부 형태를 가졌다.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 참조)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공동 통치 하에 놓였다가[13] 1908년에 완전히 병합되었는데, 이는 보스니아 위기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14]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간의 차이로 인해 공통 시민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민들은 오스트리아 또는 헝가리 시민권자 중 하나였다. 여권도 각자 발급했으며 공통 여권은 없었다. 단,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크로아티아어와 프랑스어로 작성된 자체 여권을 발급했으며, 귀화와 시민권에 관한 행정적 자치권을 가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의 여권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이러한 이중 구조는 운영상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공동 부처와 각국 부처 간의 업무 중첩으로 마찰과 비효율성이 발생했으며, 특히 군대의 경우 공동 정부가 큰 틀을 결정했지만 모병, 보급, 훈련은 각국 정부가 담당하여 혼란을 겪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정부는 종종 자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공동 정부의 활동을 방해하기도 했다.
재정 문제 또한 지속적인 갈등의 원인이었다. 양국은 공동 통화를 사용했지만 재정은 독립적으로 운영했다. 1867년 대타협에 따라 공동 예산 분담 비율이 오스트리아 70%, 헝가리 30%로 정해졌으나, 이 비율은 10년마다 재협상되어야 했고, 이는 매번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다. 1907년에는 헝가리의 분담 비율이 36.4%까지 상승했다.[73] 이러한 재정 분담 및 관세 협정 문제는 1900년대 초 구조적 위기로 이어졌다. 특히 헝가리군 부대 내 지휘 언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었고, 1906년 헝가리 민족주의 연립 정부가 들어서면서 문제는 더욱 깊어졌다. 공동 협정은 1907년과 1917년에 임시로 갱신되었으나, 1917년의 협상은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와 제국 해체로 인해 무산되었다.[74]
빈은 제국의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으며, 인구와 경제력 면에서 시스라이타니아가 트란스라이타니아보다 우위에 있었다.
제국의 공식 명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Österreichisch-Ungarische Monarchie|외스터라이히슈-웅가리셰 모나르히deu; Osztrák–Magyar Monarchia|오스트라크-머저르 모너르히어hun)이었으나[15], 국제 관계에서는 주로 '오스트리아-헝가리'(Österreich-Ungarn|외스터라이히-웅가른deu; Ausztria-Magyarország|어우스트리어-머저로르사그hun)가 사용되었다. 내부 행정에서는 '''제국 의회에 대표된 왕국 및 영토 및 성 이슈트반 헝가리 왕관령'''이라는 긴 명칭이 사용되었다.
공식 기관 명칭에는 다음과 같은 약어가 사용되어 관할 범위를 나타냈다.
- k. u. k. (kaiserlich und königlich|카이절리히 운트 쾨니글리히deu, 제국 및 왕립): 양측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기관 (예: k.u.k. 해군, k.u.k. 육군). 공동 육군은 1889년 헝가리의 요청으로 K. k.에서 k.u.k.로 변경되었다.
- K. k. (kaiserlich-königlich|카이절리히-쾨니글리히deu, 제국-왕립): 치슬라이타니아(오스트리아)의 기관. "왕립"은 보헤미아 왕관령을 의미했다.
- K. u. (königlich-ungarisch|쾨니글리히-웅가리슈deu) 또는 M. k. (Magyar királyi|머저르 키라이hun, 왕립 헝가리): 트란스라이타니아(헝가리)의 기관.
- k. (kraljevski|크랄례브스키hrv, 왕립):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의 자치 기관. 크로아티아어가 유일한 공식 언어였기 때문이다.
5. 행정 구역
1867년 대타협으로 합스부르크 군주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통치하는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en|치스라이타니엔de)이고, 다른 하나는 헝가리 왕국이 통치하는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en|트란스라이타니엔de)이다.[4] 이 구분은 두 지역 사이를 흐르는 라이타강(Leitha|라이타de, Lajta|러이터hu)을 기준으로 이루어졌다. 시스라이타니아는 '라이타강 안쪽(서쪽)'을, 트란스라이타니아는 '라이타강 바깥쪽(동쪽)'을 의미한다.
시스라이타니아의 공식 명칭은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Die im Reichsrat vertretenen Königreiche und Länderde)이었으며, 빈을 중심으로 한 오스트리아의 여러 영토를 포함했다. 트란스라이타니아의 공식 명칭은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A magyar szent korona országaihu)으로,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한 헝가리 왕국과 그에 속한 영토들로 구성되었다.
이 두 주요 지역 외에도, 1878년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공동통치령(콘도미니엄)이 되었다.[13]
5. 1. 시스라이타니아의 구성국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던 지역을 '''시스라이타니아'''(Cisleithanien|치스라이타니엔de)라고 부른다. 이는 시스라이타니아 지역 대부분이 라이타강(Leitha|라이타de, Lajta|러이터hu)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1915년 이전까지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을 부르는 공식 명칭은 없었으나, 1915년 이후로는 '''제국 회의에 대표된 왕국들과 영토들'''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제국 회의(Reichsrat|라이히스라트de)는 시스라이타니아의 의회 역할을 하였다.
시스라이타니아는 다음과 같은 15개의 구성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번호 | 국가 | 수도 |
---|---|---|
1 | 보헤미아 왕국 | 프라하 |
2 | 부코비나 공국 | 체르니우치 |
3 | 케른텐 공국 | 클라겐푸르트 |
4 | 크라인 공국 | 류블랴나 |
5 | 달마티아 왕국 | 자다르 |
6 |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 리비우 |
6-1 | 크라쿠프 대공국 | 크라쿠프 |
7 | 오스트리아 연안 지대 | 트리에스테 |
7-1 |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 고리치아 |
7-2 | 트리에스테 제국직할시 | 트리에스테 |
7-3 | 이스트리엔 변경백국 | 포레치 |
8 | 하오스트리아 대공국 | 빈 |
9 | 모라바 변경백국 | 브르노 |
10 | 잘츠부르크 공국 | 잘츠부르크 |
11 | 상하 슐레지엔 공국 | 오파바 |
12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 그라츠 |
13 | 티롤 후백국 | 인스브루크 |
14 | 상오스트리아 대공국 | 린츠 |
15 | 포어아를베르크주 | 브레겐츠 |
5. 2. 트란스라이타니아의 구성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헝가리 왕국이 지배하던 영토를 '''트란스라이타니아'''(Transleithanien|트란스라이타니엔de)라고 부른다. 이는 해당 지역이 라이타강( Leitha|라이타de, Lajta|러이터hu)의 바깥쪽(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는 ‘신성 헝가리의 성 이슈트반 왕관령’(Szent István Koronájának Országai|센트 이슈트반 코로너여너크 오르사거이hu)이라 불렸는데, 이는 헝가리 왕국의 첫 기독교도 왕이자 성인으로 추대받은 성 이슈트반 대왕(Szent István király|센트 이슈트반 키라이hu)에서 유래한 명칭이다.트란스라이타니아는 주로 헝가리 왕국 본토와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포함하여 구성되었다.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은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에 따라 성 이슈트반 왕관령 내에서 독자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자치 지역으로 인정받았다.
국가 | 수도 |
---|---|
헝가리 왕국 | 부다페스트 |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 | 자그레브 |
5. 3. 공동통치령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이후 제국은 오스트리아 부분(치슬라이타니아)과 헝가리 부분(트란스라이타니아)으로 나뉘었지만, 일부 지역은 어느 한쪽에 속하지 않고 공동으로 관리되었다. 대표적인 예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이다.1878년 베를린 회의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보스니아 빌라예트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주권 하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사 및 민간 통치 하에 놓였다.[13]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어느 한쪽에 편입되지 않고, 제국 전체 재무부 장관이 관리하는 공동통치령(콘도미니엄)의 지위를 가졌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다른 열강이 해외 식민지를 다루는 방식과 유사하게 취급했음을 보여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08년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완전히 병합하였는데, 이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 발칸 국가들과의 심각한 외교적 갈등인 보스니아 위기를 촉발했다.[14] 또한, 1878년부터 1908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산자크 지역에도 주둔했으나, 이 지역은 공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6. 군사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근대화에 반대했던 테첸의 공작 알브레흐트 대공(1817–1895)의 지휘 아래 있었다.[139]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1868년부터 시민의 보편적, 개인적 무기 소지 의무 원칙에 기반한 군사 체제가 양국에서 유사하게 운영되었다. 군대는 공동군(Gemeinsame Armee|게마인자메 아르메de), 각 국가의 특수군, 그리고 예비군 성격의 국민군(Landsturm|란트슈투름de)으로 구성되었다. 공동군은 합동군사부 장관 직속이었고, 특수군에는 오스트리아의 Landwehr와 헝가리의 Honvéd가 있었으며, 이들은 각 국가의 국방부 소속이었다. 헝가리 측은 자치 국가의 상징으로 독자적인 국방군 설치를 희망했고, 오스트리아 측에도 독자적인 국방군을 설치하는 것을 조건으로 각 정부 관할 하에 란트베어와 혼베드가 설치되었다.[151] 병종은 보병, 기병, 포병, 공병대, 위생대, 수송대의 6개로 구성되어 있었다.[152]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성들은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육군의 연간 신병 충원 수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의회에서 의결한 군사 법안에 의해 정해졌고, 일반적으로 마지막 인구 조사 결과를 기준으로 인구에 따라 결정되었다. 1905년에는 103,100명에 달했으며, 오스트리아는 59,211명을, 헝가리는 43,889명을 충원했다. 또한 매년 10,000명이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에, 12,500명이 헝가리 혼베드에 배정되었다. 복무 기간은 현역 2년(기병은 3년), 예비군 7~8년, 란트베어 2년이었다. 현역 군대에 징집되지 않은 사람은 다양한 특별 예비군에서 총 복무 기간을 보냈다.[140]
군대의 최고 지휘권은 명목상 군주에게 주어졌으며, 군주는 군대 전체에 관한 모든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실제로는 황제의 조카 알브레흐트 대공이 그의 최고 군사 고문이었고 정책 결정을 내렸다.[140] 공동 국방부 장관은 오스트리아 란트베어와 헝가리 혼베드를 제외한 모든 군사 문제의 행정 책임자였으며, 이들은 두 국가의 국방부에서 담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주로 해안 방어군이었으며, 다뉴브강을 위한 소형 모니터 함대도 포함했다. 해군은 국방부 해군 부서에서 관리했다.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이 발생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 당국은 사라예보 내 세르비아인에 대한 폭력을 조장했다.[32][33] 이는 가톨릭 크로아티아인과
7. 문화
오스트리아는 19세기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독점하며 오랫동안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였으나,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소독일주의에 따라 오스트리아를 배제하고 독일 제국을 수립하면서 독일어권 문화의 중심지 자리를 내주었다. 제국이 해체되어 여러 나라로 분열되면서 기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문화'로 묶였던 유산들도 각국의 독립된 문화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문화는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는 경향이 있다.[187]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세기 당시 유럽의 주요 국가(유럽 대륙 면적 2위, 인구 3위)이자 열강으로서,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하며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특히 제국의 말기는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는 매우 풍요로운 시기였다. 빈을 중심으로 훌륭한 제립 극장과 미술, 음악 학교 등이 운영되며 문화가 진흥되었고, 문화 예술인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유능한 학자들도 많이 배출되어 국력의 쇠퇴 속에서도 문화와 학문의 꽃을 피웠다. 이 시기 제국은 철학, 경제학, 건축, 음악, 미술,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겼으며, 이는 각 하위 분야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진다.
7. 1. 철학
이 시기에 활동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사상가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을 창시함으로써,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철학을 발전시킴으로써 후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에드문트 후설도 오스트리아 출신이며, 신칸트학파에 대항하여 독일-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프란츠 브렌타노도 오스트리아 사람이다.7. 2. 경제학
오스트리아 학파를 세운 카를 멩거, 오이겐 폰 뵘바베르크, 프리드리히 폰 비저 등이 활동하며 경제학 분야에서 중요한 족적을 남겼다. 또한, 요제프 슘페터와 같은 저명한 경제학자도 이 시기에 활동했다.7. 3. 건축
건축가 오토 바그너가 대표적이다. 그는 유럽 근대 건축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였다.7. 4. 음악
제국의 말기가 문화의 종말기는 아니었다. 훌륭한 제립 극장과 미술, 음악 학교 등을 통해 문화가 진흥되었다. 문화인뿐만 아니라 유능한 학자도 배출하여, 국력 쇠퇴의 경향 속에서도 문화와 학문의 꽃을 피웠다. 특히 음악과 미술 분야에서는 당시 유럽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화가를 지망했던 젊은 히틀러가 빈의 제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려고 했던 것도 이 시기이다.이 시기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는 다음과 같은 유명 작곡가들이 활동했다.
- 구스타프 말러
- 안톤 브루크너
- 요하네스 브람스 - 독일 함부르크 출신이지만, 활동 거점은 빈이었다.
- 슈트라우스 일가
- 휴고 볼프
- 에리히 볼프강 코른골트
- 아르놀트 쇤베르크
- 안토닌 드보르자크
- 프란츠 레하르 - 헝가리에 거주하는 독일인으로 태어나 체코에서 배우고, 발칸 음악에도 정통했으며, 빈에서 활약했다.
- 프란츠 리스트
7. 5. 미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말기는 정치적, 사회적 격변기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오히려 풍요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제국은 훌륭한 제립 극장과 미술, 음악 학교 등을 통해 문화를 적극적으로 장려했으며, 이러한 환경 속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당시 유럽 미술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특히 빈을 중심으로 새로운 예술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구스타프 클림트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입맞춤'과 같은 유명한 작품을 남겼으며, 빈 아르누보 운동을 이끌며 당시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클림트 외에도 오스카 코코슈카, 에곤 실레 등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펼친 화가들이 활동하며 제국 말기 미술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젊은 시절 화가를 지망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빈의 제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려고 왔던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7. 6. 문학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기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프란츠 카프카가 있다. 그는 제국 내 보헤미아의 수도였던 프라하 출신이다.7. 7. 과학
오스트리아의 병리학자인 카를 란트슈타이너는 ABO식 혈액형과 Rh인자를 발견하여 현대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 업적으로 1930년에 노벨상을 수상했다.이 시기 활동했던 다른 주요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8.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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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였다. 이러한 민족적 다양성은 제국 내 갈등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지배 민족인 독일인과 마자르인(헝가리인)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약 24%, 20%에 불과하여[188] 소수 민족들의 요구와 운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어려웠다.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제국 내에서 사용되는 주요 언어와 그 비중은 다음과 같다. 이 조사는 '민족'이 아닌 '사용 언어'를 기준으로 집계되었다.
1910년 호구조사에서 집계된 사용언어[188] | ||
---|---|---|
언어 | 인구 | 비중 (%) |
독일어 | 12,006,521 | 23.36 |
헝가리어 | 10,056,315 | 19.57 |
체코어 | 6,442,133 | 12.54 |
폴란드어 | 4,976,804 | 9.68 |
세르보크로아트어 | 4,380,891 | 8.52 |
우크라이나어 | 3,997,831 | 7.78 |
루마니아어 | 3,224,147 | 6.27 |
슬로바키아어 | 1,967,970 | 3.83 |
슬로베니아어 | 1,255,620 | 2.44 |
이탈리아어 | 768,422 | 1.50 |
기타 | 2,313,569 | 4.51 |
계 | 51,390,223 | 100.00 |
각 지역별로 주로 사용되는 언어도 다양했다. 1910년 조사 기준 각 지역별 최대 사용 언어는 다음과 같다.
1910년 호구조사에서 집계된 각 지역별 최대 사용언어[189] | ||
---|---|---|
지역 | 제1언어 | 제2언어 (및 기타 주요 언어) |
뵈멘 왕국 | 체코어 (63.2%) | 독일어 (36.8%) |
달마티아 왕국 | 크로아트어 (96.2%) | 이탈리아어 (2.8%) |
갈리치아 왕국 | 폴란드어 (58.6%) | 우크라이나어 (40.2%) |
니더외스터라이히 | 독일어 (95.9%) | 체코어 (3.8%) |
오버외스터라이히 | 독일어 (99.7%) | |
부코비나 공국 | 우크라이나어 (38.4%) | 루마니아어 (34.4%), 독일어 (21.2%), 폴란드어 (4.6%) |
케른텐 공국 | 독일어 (78.6%) | 슬로베니아어 (21.2%) |
크라인 공국 | 슬로베니아어 (94.4%) | 독일어 (5.4%) |
잘츠부르크 공국 | 독일어 (99.7%) | |
슐레지엔 공국 | 독일어 (43.9%) | 폴란드어 (31.7%), 체코어 (24.3%) |
슈타이어마르크 공국 | 독일어 (70.5%) | 슬로베니아어 (29.4%) |
메렌 변경백국 | 체코어 (71.8%) | 독일어 (27.6%) |
티롤 후백국 | 독일어 (57.3%) | 이탈리아어 (42.1%) |
퀴스텐란트 | 슬로베니아어 (37.3%) | 이탈리아어 (34.5%), 크로아트어 (24.4%), 독일어 (2.5%) |
포어아를베르크 | 독일어 (95.4%) | 이탈리아어 (4.4%) |
아우스글라이히 이후, 제국은 오스트리아 중심의 치슬라이타니아와 헝가리 중심의 트란스라이타니아로 나뉘었다. 각 지역은 민족 문제에 대해 다른 접근 방식을 보였다.
오스트리아(치슬라이타니아)에서는 1867년 "기본 국가법"(''Staatsgrundgesetz'') 제19조를 통해 이론적으로 모든 민족의 평등한 권리와 언어 사용권을 보장했다. 이 법은 "제국의 모든 민족은 평등한 권리를 가지며, 모든 민족은 자신의 국적과 언어를 보존하고 사용하는 침해할 수 없는 권리를 갖는다"고 명시하고, 학교, 관청, 공공 생활에서 각 지역의 "관습적인 언어"("landesübliche Sprachen")의 평등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언어를 '관습적'으로 인정할지를 두고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가 제국 전역에서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를 원했다.[75] 오스트리아 정부는 폴란드인과 타협하여 그들의 협력을 얻는 방식으로 독일인의 지배적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크로아티아어(달마티아, 1867년), 슬로베니아어(크라인 공국, 1882년), 폴란드어(갈리치아, 1869년) 등이 특정 지역에서 공식 언어로 인정받기도 했다.[78]
헝가리(트란스라이타니아)에서는 1868년 소수 민족법을 통과시켜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세르비아인 등 소수 민족에게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언어 사용권을 부여했지만, 영토적 자치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법은 자유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마자르화 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면서 소수 민족 언어 사용이 억압받는 경우가 많았다. 1875년 이후에는 슬로바키아어 중등학교들이 폐쇄되었으며,[76] 1907년에는 모든 학교에서 4학년 이후 헝가리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도록 강제하는 법이 시행되어 슬로바키아어와 루신어 학교가 추가로 폐쇄되는 결과를 낳았다. 헝가리 정부는 크로아티아인과는 나고도바 법을 통해 타협하여 협력을 얻었지만, 다른 소수 민족에 대해서는 동화 정책을 강하게 추진했다.
언어 문제는 제국 정치에서 가장 첨예한 갈등 요소였다. 모든 정부는 행정 및 교육 언어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소수 민족들은 자국어 교육 기회 확대를 요구하는 동시에, 지배 언어인 독일어와 헝가리어 교육 기회도 원했다. 1897년 오스트리아 총리 카지미르 펠릭스 바데니 백작이 보헤미아에서 체코어를 독일어와 동등한 지위로 격상시키려 했을 때, 독일 민족주의자들의 격렬한 반발로 인해 결국 총리가 해임되는 사건도 있었다.[77] 보헤미아에서는 체코인과 독일인 간의 갈등이 특히 심했는데, 1880년대 이후 체코인의 인구가 증가하면서 프라하 등 주요 도시에서 체코어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1882년에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가 독일어 학부와 체코어 학부로 분리되기도 했다.[79]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 슬로바키아의 슬로바키아인, 크로아티아 및 달마티아의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등 여러 민족들이 자치권 확대나 인접 민족 국가와의 통합을 요구하며 헝가리의 지배에 도전했다. 특히 세르비아인과 루마니아인은 각각 세르비아, 루마니아와의 연계를 주장했다.
이스트리아에서는 소수 민족인 이스트로-루마니아인이 크로아티아인과 이탈리아인 사이에서 동화 압력과 차별을 겪었다.[81][82][83] 루마니아어 학교 설립 시도가 있었으나 크로아티아계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했다.[84]
유대인은 제국 내에서 약 200만 명에 달했으며(1900년경),[87] 주로 갈리치아, 헝가리, 보헤미아의 농촌 지역과 비엔나, 부다페스트, 프라하 등 주요 도시에 거주했다. 반유대주의 정당(예: 기독교 사회당)[88]과 운동이 존재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펴거나 포그롬을 조장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른 소수 민족 갈등으로 번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는 유럽 주요국 군대 중 유대인을 장교로 임관시키는 데 상대적으로 개방적이었다. 제국 인구의 약 5%를 차지했던 유대인은 예비 장교단의 약 18%를 구성했다. 많은 유대인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 치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를 비교적 안정적이고 관용적인 시기로 여겼다.[89] 특히 헝가리에서는 유대인이 인구의 약 5%(부다페스트는 23%)를 차지하며[90] 경제(상업, 금융)[91], 교육, 전문직(의사, 변호사)[92][93] 등 사회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정치에도 참여하여 장관직에 오르기도 했다.
이처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양한 민족 구성으로 인해 끊임없는 내부 갈등을 겪었지만, 동시에 각 민족이 공존하며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나름의 정체성을 유지하려 했던 복잡한 사회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 문제 해결의 실패는 결국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제국 해체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9. 종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국교는 로마 가톨릭이었으나, 개신교, 동방 정교회, 유대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가 공존했다. 각 종교별 인구 비율은 다음과 같다.
종교 | 전체 | 오스트리아 제국 | 헝가리 왕국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
로마 가톨릭 | 76.6% | 90.9% | 61.8% | 22.9% |
개신교 | 8.9% | 2.1% | 19.0% | 0% |
동방 정교회 | 8.7% | 2.3% | 14.3% | 43.5% |
유대교 | 4.4% | 4.7% | 4.9% | 0.6% |
이슬람교 | 1.3% | 없음 | 없음 | 32.7% |
1900년경 제국 전체에는 약 200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했다.[87] 유대인의 사회적 지위는 복합적이었다. 포퓰리즘과 반유대주의 성향의 기독교 사회당 같은 정치 세력이 존재했지만,[88]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정부는 포그롬(유대인 집단 학살)을 조장하거나 공식적인 반유대주의 정책을 시행하지는 않았다. 이는 다른 소수 민족에게 폭력이 확산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반유대주의 정당들은 의회 선거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해 정치적으로 주변적인 위치에 머물렀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유대인 대다수는 갈리시아의 작은 마을(슈테틀)이나 헝가리, 보헤미아의 농촌 지역에 살았지만, 비엔나, 부다페스트, 프라하, 크라쿠프, 르비우 같은 도시 중심가에도 큰 공동체를 형성하며 지역 다수를 차지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유럽 주요 강대국 군대 중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유대인을 장교로 정기적으로 승진시킨 거의 유일한 군대였다. 제국 전체 인구 중 유대인 비율은 약 5%였지만, 예비 장교단의 약 18%를 차지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 치하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시대를 자신들의 역사에서 황금기로 여기기도 했다.[89]
특히 헝가리에서는 1910년까지 약 90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며 전체 인구의 약 5%, 부다페스트 인구의 약 23%를 차지했다. 이들은 대체로 애국적이었으며, 헝가리 왕국 내에서 수적으로 불안정했던 마자르족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90] 경제 및 사회 분야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은 상당했다. 상업 사업주의 54%, 은행 및 금융 기관 이사/소유자의 85%, 상업 분야 전체 직원의 62%를 차지했으며,[91] 교육 분야에서도 일반 문법학교 학생의 20%, 상업 과학 문법학교 학생의 37%, 공학 학생의 31.9%, 대학 인문학부 학생의 34.1%가 유대인이었다. 전문직에서는 의사의 48.5%,[92] 변호사/법률가의 49.4%를 차지했다.[93] 헝가리 정치계에서도 빌모스 바존니(법무부 장관), 사무 하자이(육군 장관), 야노스 텔레츠키(재무부 장관), 야노스 하르카니(상무부 장관), 요제프 스테레니(상무부 장관) 등 유대인 출신 정치인들이 활동했다.
10. 국기 및 국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는 공통의 국기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깃발(흑황기)이 사실상의 국기로 사용되었다. 또한, 헝가리 왕국(트란스라이타니엔)에서는 헝가리의 문장이 부착된 적백녹의 삼색기가 국기로 사용되었다.
군함기는 오스트리아의 깃발에 문장을 더한 것이 사용되었다. 민간용 상선기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깃발을 조합하여, 각각에 왕관과 문장이 부착된 것이 사용되었다[146].
11. 대외 관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성립 이후 유럽의 복잡한 외교 관계 속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장하려 노력했다.
1869년에는 아시아의 일본과 일오수호통상항해조약을 체결하여 국교를 수립하는 등[153] 비유럽 국가와의 관계도 구축했다. 유럽 내에서는 1873년 6월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과 삼제동맹을 맺었으나[154], 특히 발칸 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의 경쟁 관계는 지속되었다. 1878년 6월 13일 시작된 베를린 회의에 참가하여 베를린 조약을 통해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의 행정권을 확보하며 발칸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155]
러시아와의 긴장이 고조되자 1879년 독일 제국과 독오 동맹을 체결하고[156], 1882년 5월에는 이탈리아 왕국을 포함한 삼국 동맹을 결성하여[158] 독일 중심의 동맹 체제에 깊숙이 편입되었다. 한때 1881년 6월 삼제 협상이 다시 성립되기도 했으나[157], 1887년 6월 독러 재보장 조약[159] 체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삼제 협상 갱신을 거부했다.[157]
1900년 청나라에서 의화단의 난이 발생하자 열강 연합의 일원으로 파병을 실시했고[160], 1903년 6월에는 톈진에 조계지를 획득하는 등[161] 제국주의적 팽창에도 참여했다. 1908년 10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병합 선언은[162] 세르비아 및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극도로 악화시켰다. 1912년 제1차 발칸 전쟁 이후에는 세르비아 견제를 위해 알바니아 건국을 지원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암살되자[163],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세르비아 침공의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7월 5일 독일의 전폭적인 지지(백지 수표)를 확보한 후[164], 7월 24일 세르비아 정부에 가혹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냈다.[164] 세르비아가 일부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하자,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며[165] 제1차 세계 대전의 시작을 알렸다. 7월 29일에는 베오그라드를 포격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동맹국의 주요 일원으로 연합국과 맞섰다. 8월 5일 러시아에 선전포고했으며[165], 이후 8월 10일 프랑스[165], 8월 11일 영국[165] 등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1915년 5월 23일에는 기존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 측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고[165], 1916년 8월 27일에는 루마니아 왕국도 연합국으로 참전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165]
전쟁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915년 10월 세르비아 전토를 점령하고, 1916년 12월 루마니아 대부분을 점령하여 항복시키는 등의 성과도 있었으나, 1916년 6월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러시아군에 참패하고[164], 1918년 6월 15일 개시한 피아베강 전투에서 이탈리아 왕국군에 패배하는 등 전황은 점차 불리해졌다. 1917년 10월 카포레토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지원을 받아 이탈리아에 승리하기도 했다.[166] 1916년 11월 21일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붕어하고 카를 1세가 즉위했으며[165], 1917년 1월에는 황후 치타의 오빠 식스투스 공자를 통해 단독 강화를 시도하기도 했으나 실패했다.
1918년 들어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의 자치 요구가 거세졌고(4월 로마 회의), 10월에는 부다페스트에서 폭동이 발생하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이 독립을 선언하는 등[167] 제국 내에서 독립이 잇따랐다. 10월 24일 시작된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주력군을 상실하자, 10월 27일 연합국 각국에 항복을 선언했다. 11월 3일 이탈리아 왕국과 빌라 주스티 휴전 협정을 맺고 정전하며 항복했고, 11월 11일 카를 1세는 "국사 불관여"를 선언하고 쇤브룬 궁전을 떠나면서 제국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11. 1. 대한 관계
흥선 대원군 집권기까지 조선은 서양과의 수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나 1876년 일본 제국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문호를 개방하고 서양 열강들과도 수교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는 1892년 6월 23일 조오수호통상조약(朝奧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며 공식적인 외교 관계를 맺었다.1897년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초대 주 오스트리아-헝가리 대사로 민영익이 임명되었다. 하지만 민영익은 건강 문제로 실제 부임하지 못했고, 1900년 6월에 이진범이 참사관으로 부임하여 외교 업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일본 제국이 강압적으로 체결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외교 관계도 자연스럽게 단절되었다.
11. 2. 대 독일 관계
오스트리아 제국은 독일 연방 내에서 프로이센 왕국과 주도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1815년 빈 회의로 독일 연방이 성립된 이후, 독일 통일 방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다. 북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소독일주의)을 지지하며 오스트리아에 반감을 가졌고, 남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오스트리아가 주도하는 통일(대독일주의)을 원했다.1862년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으로 취임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군비 확장을 통해 프로이센 중심의 통일을 추진하는 철혈 정책을 내세웠다. 그는 오스트리아와의 대결을 통해 독일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1864년 슐레스비히 공국과 홀슈타인 공국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덴마크와 전쟁(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연합하여 승리했다.
이후 가슈타인 협정에 따라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관리하게 되었으나, 이는 양국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프로이센은 홀슈타인 남부의 라우엔부르크 공국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가 관리하는 홀슈타인 내부에 프로이센 영토가 존재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또한 프로이센은 북독일 통일에 오스트리아가 방해가 된다고 여겼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발발했고, 프로이센은 쾨니히그레츠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7주 만에 오스트리아를 압도했다. 이 전쟁의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독일 연방에서 완전히 배제되었고, 독일 통일의 주도권은 프로이센에게 넘어갔다.[19] 프라하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소독일주의에 입각한 독일 통일을 인정해야 했다.[2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고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되면서 오스트리아는 독일 문제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당시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폰 보이스트는 프로이센에 대한 복수를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독일 제국의 성립으로 그의 계획은 무산되었다.[22]
독일과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영향력을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발칸 반도로 눈을 돌렸지만, 러시아 제국과의 경쟁 및 범슬라브주의 확산을 경계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새로운 외교 관계를 모색했고, 과거의 경쟁 상대였던 독일 제국과 손을 잡게 되었다. 외무장관 줄러 앤드라시는 러시아의 발칸 반도 확장을 견제하고 독일과의 동맹을 추진했다.[24]
1879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 제국은 러시아의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한 독오 동맹을 체결했다.[156] 1882년에는 이탈리아 왕국이 합류하여 삼국 동맹이 결성되었다.[158] 이 동맹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까지 유지되며 유럽의 주요 군사 동맹 중 하나로 기능했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으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암살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이를 세르비아에 대한 응징의 기회로 삼으려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지도부는 군사 행동에 앞서 동맹국인 독일 제국의 지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7월 5일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 대응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겠다는 약속(백지 수표)을 보냈다.[38][164] 독일의 지지를 확보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에 최후통첩(7월 위기)을 보내고 결국 7월 28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165]
11. 3. 대 러시아 관계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는 초기에는 비교적 양호하여 1848년 헝가리 혁명이 발발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러시아 제국에 원군을 요청하여 헝가리 혁명군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71]하지만 1853년 시작된 크림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여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는 등 러시아의 기대와 달리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로 인해 빈 체제 이후 유지되던 양국 간 우호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는 신성 동맹의 완전한 붕괴를 의미했다. 러시아의 지원을 잃은 오스트리아의 독일 연방 내 위상도 하락하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항구를 찾아 발칸 반도로 남하하려는 정책을 추진했고, 범슬라브주의를 내세워 발칸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러시아 제국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며 점차 대립하게 되었다. 1877년 발발한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중립을 선언했다. 러시아가 승리한 후 체결된 산 스테파노 조약은 친러시아적인 대불가리아를 구상하여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려 했으나, 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영국 등의 강력한 반발을 샀다.[20] 결국 1878년 열린 베를린 회의에서 외무부 장관 귤러 안드라시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성공했고, 산 스테파노 조약은 수정되어 대불가리아는 분할되었다. 이 회의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슬라브인이 다수 거주하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점령 및 행정권을 얻었다.[155] 이는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자국의 세력을 확장하려는 목적이었다.
발칸 반도에서의 불안정과 러시아의 팽창을 경계한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79년 독일 제국과 독오 동맹을 맺었고[156], 1882년에는 이탈리아 왕국까지 참여한 삼국 동맹을 결성했다.[158] 또한 1883년에는 루마니아 왕국과도 방위 조약을 맺었다. 비록 비스마르크의 중재로 한때 삼제동맹이 유지되기도 했으나[154][157], 양국 간의 긴장은 지속되었다.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공식 병합하자[162], 세르비아와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보스니아 위기 당시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렉사 폰 에렌탈과 러시아 외무장관 알렉산드르 이즈볼스키 사이의 외교적 충돌은 유럽을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으며[27][28], 에렌탈의 오판은 오히려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결속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1914년 사라예보 사건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자[165]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독일 제국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하고[165], 8월 5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역시 러시아에 선전포고하면서[165] 양국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완전히 적으로 맞서 싸우게 되었다. 전쟁 중 1916년 브루실로프 공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러시아군에게 큰 패배를 당하기도 했다.[164] 러시아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통해 전쟁에서 이탈했다.
11. 4. 대 루마니아 관계
루마니아 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6년 8월 27일 연합국에 가담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선전포고하였다.[165] 전쟁 초기에는 동맹국 군대에 의해 국토 대부분이 점령당하고 1916년 12월에는 항복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루마니아는 패전국이 된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트란실바니아 지역을 획득했다.12. 경제
경제적으로 볼 때, 농업 중심이었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1867년 이후 서서히 근대화되었다. 철도는 한때 외딴 지역을 개방했고, 도시가 성장했다. 많은 중소 기업들은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을 장려했다. 기술 변화는 산업화와 도시화를 가속화했다. 최초의 오스트리아 증권 거래소(비엔나 증권거래소)는 1771년 비엔나에 개설되었고, 헝가리 왕국의 첫 번째 증권 거래소(부다페스트 증권 거래소)는 1864년 부다페스트에 개설되었다. 중앙 은행은 1816년 오스트리아 국립 은행으로 설립되었다. 1878년에는 비엔나와 부다페스트에 주요 사무소를 두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국립 은행으로 전환되었다.[99] 중앙 은행은 오스트리아 또는 헝가리 총재와 부총재가 교대로 관리했다.[100]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또한 미국과 독일 제국에 이어 전기 가정용품, 전기 산업용품, 발전소용 발전 장치의 세계 3위 제조업체이자 수출국이 되었으며,[101] 독일 제국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철도 네트워크를 건설했다. 2000년 연구에 따르면 1913년 불변 국가 가격의 GDP는 치슬라이타니아는 , 트란스라이타니아는 로 총 였다.[102] 2005년 연구에 따르면 1913년 GDP (PPP)는 로 유럽에서 5번째로 컸다.[103]
국민 총생산 1인당 소득은 1870년부터 1913년까지 연평균 약 1.76%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 수준은 영국(1%), 프랑스(1.06%), 독일(1.51%)과 같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매우 유리했다. 그러나 독일과 영국과의 비교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경제 전체는 지속적인 근대화가 훨씬 늦게 시작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상당히 뒤쳐져 있었다. 독일 제국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관행을 자주 사용했다. 1873년, 구 헝가리 수도 부다와 오부다(고대 부다)는 세 번째 도시 페슈트와 공식적으로 합병되어 새로운 대도시 부다페스트를 만들었다. 역동적인 페스트는 헝가리의 행정, 정치, 경제, 무역 및 문화 중심지로 성장했다. 헝가리의 많은 국가 기관과 현대 행정 시스템이 이 기간 동안 설립되었다. 경제 성장은 비엔나와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영토(현대 오스트리아 지역), 알프스 지역, 보헤미아 영토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세기 후반에는 급속한 경제 성장이 중앙 헝가리 평원과 카르파티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제국 내에 광범위한 개발 격차가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서부 지역은 동부 지역보다 더 발전했다. 헝가리 왕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밀가루 수출국이 되었다.[104] 헝가리의 대규모 식량 수출은 이웃 독일과 이탈리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헝가리는 영국의 대도시와 산업 중심지에 가장 중요한 외국 식량 공급국이 되었다.[105]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가장 가난한 주로 묘사된 갈리치아는 거의 지속적인 기근을 겪었고, 연간 5만 명의 사망자를 낳았다.[106] 이스트라의 이스트로루마니아인들도 목축이 쇠퇴하고 농업 생산성이 낮아 가난했다.[85]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경제적 격차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이는 군주국의 동부 지역의 경제 성장이 서부 지역의 경제 성장을 지속적으로 능가했기 때문이다. 부다페스트를 중심으로 한 헝가리 왕국의 강력한 농업 및 식품 산업은 제국 내에서 우위를 차지했으며 유럽 나머지 지역으로의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 주로 프라하와 비엔나를 중심으로 한 서부 지역은 다양한 제조업에서 뛰어났다. 이러한 동서 간의 분업은 기존의 경제 및 통화 동맹과 더불어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역에서 더욱 빠른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20세기 초부터 군주국의 오스트리아 측은 산업 혁명 분야에서 제국 내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헝가리는 제2차 산업 혁명의 현대 산업에서 더 나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제2차 산업 혁명의 현대 분야(예: 기계 건설 산업 및 전기 산업)에서 오스트리아의 경쟁은 지배력을 얻을 수 없었다.[107]
13. 사회 기반 시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근대화 과정에서 다양한 사회 기반 시설을 구축하고 확장했다. 제국 전역에 걸쳐 전신 및 전화망이 구축되었고, 철도 네트워크는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규모로 발전하여 경제 및 사회적 교류를 촉진했다. 또한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한 내륙 수운 정비와 트리에스테, 피우메(리에카) 등 주요 항구를 통한 해상 운송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러한 기반 시설의 발전은 제국의 경제 성장과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3. 1. 통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세기 중반부터 전신망을 구축하기 시작하여 주요 도시들을 연결했다.[108][109][110] 19세기 후반에는 전화가 도입되어 전화 교환국이 설치되고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되었다.[114][115][116][117][118] 제국은 유럽 내에서 상당한 수준의 통신 인프라를 갖추었으며,[119] 특히 부다페스트에서는 라디오 방송보다 앞서 텔레폰 히르몬도라는 전화 기반 정보 서비스를 운영하기도 했다.13. 1. 1. 전신
1847년 비엔나-브르노-프라하 구간을 시작으로 최초의 전신 연결이 이루어졌다.[108] 헝가리 지역에서는 1847년 12월 프레스부르크(현재의 브라티슬라바)에, 1848년에는 부다에 첫 전신국이 문을 열었다. 비엔나와 페스트-부다(부다페스트)를 잇는 전신선은 1850년에 건설되었고,[109] 같은 해 비엔나와 자그레브 간의 연결도 구축되었다.[110]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 국가들과 전신 연합에 가입했다.[111] 헝가리 왕국에서는 1884년 기준으로 2,406개의 전신 우체국이 운영 중이었다.[112] 1914년에는 헝가리 왕국 내 우체국에 설치된 전신 사무소 수가 3,000개에 달했고, 철도역에도 2,400개가 추가로 설치되었다.[113]
전화 교환국은 1881년 1월 8일 자그레브에서 처음 개통되었고,[114][115][116] 이어 부다페스트(1881년 5월 1일)[117]와 비엔나(1881년 6월 3일)[118] 순서로 개통되었다. 초기 전화 서비스는 개인 가입자나 회사, 사무실 등에서 주로 이용했다. 공중 전화는 1890년대에 등장하여 우체국과 기차역을 중심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1913년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연간 전화 통화량은 5억 6800만 통에 달했다. 이는 당시 서유럽 국가 중 독일 제국과 영국 다음으로 많은 수치였으며, 프랑스(3억 9600만 통)나 이탈리아(2억 3000만 통)보다 많았다.[119] 1916년 치슬라이타니아 지역에서는 총 3억 6600만 통의 전화 통화가 이루어졌고, 이 중 840만 통은 장거리 통화였다.[120] 트란슬라이타니아 지역에서는 1893년까지 모든 도시, 마을, 주요 정착지의 전화 교환국이 서로 연결되었다.[109] 1914년까지 헝가리 왕국 내 2,000개 이상의 정착지에 전화 교환국이 설치되었다.[113]
13. 1. 2. 전자 오디오 방송

Telefon Hírmondó|텔레폰 히르몬도hu(전화 전령)는 1893년 부다페스트에서 시작된 뉴스 및 엔터테인먼트 서비스이다. 이는 라디오 방송이 등장하기 20년 전에 도입된 것으로, 사람들은 특수한 전화 교환 시스템을 통해 매일 정치, 경제, 스포츠 뉴스는 물론 카바레, 음악, 오페라까지 들을 수 있었다.
13. 2. 철도

1913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의 철도 트랙 총 길이는 43280km에 달했다. 당시 서유럽에서는 독일만이 63378km로 더 긴 철도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다음으로는 프랑스(40770km), 영국(32623km), 이탈리아(18873km), 스페인(15088km) 순이었다.[121]
헝가리에서는 1846년 7월 15일, 페슈트와 바츠 사이에 최초의 증기 기관차 철도 노선이 개통되었다.[122] 1890년에는 대부분의 대형 헝가리 사철 회사가 부실 경영으로 인해 국유화되었다. 다만, 오스트리아 소유의 카샤우-오데르베르크 철도(KsOd)와 오스트리아-헝가리 남부 철도(SB/DV)는 예외였다. 이들 회사도 MÁV(헝가리 국영 철도)의 구역 운임 시스템에는 합류했다. 1910년까지 헝가리 왕국의 철도 네트워크 총 길이는 22869km에 달했으며, 1,490개 이상의 정착지를 연결했다. 제국 전체 철도의 거의 절반(52%)이 헝가리 지역에 건설되어, 철도 밀도는 오스트리아 지역(치슬라이타니아)보다 높았다. 이로 인해 헝가리의 철도 밀도는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수준이었다(독일과 프랑스보다 높음).[123]
부다페스트에는 4개의 전철화된 통근 철도 노선(BHÉV)이 건설되었다. 라츠케베 노선(1887년), 센텐드레 노선(1888년), 괴될뢰 노선(1888년), 체펠 노선(1912년)이다.[124]
도시 내 교통수단으로는 19세기 전반기에 마차 트램이 등장했으며, 1850년대부터 1880년대 사이에 빈(1865년), 부다페스트(1866년), 브르노(1869년), 트리에스테(1876년) 등 여러 도시에 노선이 건설되었다. 1860년대 후반에는 증기 트램이 등장했고, 1880년대 후반부터는 전철 트램이 도입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최초의 전철 트램은 1887년 부다페스트에서 운행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전철 트램 노선:'''
- 오스트리아: Gmunden (1894년); 린츠, 빈 (1897년); 그라츠 (1898년); 트리에스테 (1900년); 류블랴나 (1901년); 인스브루크 (1905년); Unterlach, Ybbs an der Donau (1907년); 잘츠부르크 (1909년); 클라겐푸르트, 장크트푈텐 (1911년); 피란 (1912년)
- 오스트리아 연안: 풀라 (1904년).
- 보헤미아: 프라하 (1891년); 테플리체 (1895년); 리베레츠 (1897년); 우스티나트라벰, 플젠, 올로모우츠 (1899년); 모라비아, 브르노, 야블로네츠나트니소우 (1900년); 오스트라바 (1901년); 마리안스케라즈네 (1902년); 체스케부데요비체, 이흘라바 (1909년)
- 오스트리아령 슐레지엔: 오파바 (1905년), 체신 (1911년)
- 달마티아: 두브로브니크 (1910년)
- 갈리시아: 르비우 (1894년), 비엘스코비아와 (1895년); 크라쿠프 (1901년); 타르누프, 체신 (1911년)
'''헝가리 왕국의 전철 트램 노선:'''
- 헝가리: 부다페스트 (1887년); 브라티슬라바 (1895년); 수보티차 (1897년), 솜버트헤이 (1897년), 미슈콜츠 (1897년); 티미쇼아라 (1899년); 쇼프론 (1900년); 사투마레 (1900년); 니레지하저 (1905년); 시비우 (1905년); 오라데아 (1906년); 세게드 (1908년); 데브레첸 (1911년); 노비사드 (1911년); 코시체 (1913년); 페치 (1913년)
- 크로아티아: 피우메 (1899년); 풀라 (1904년); 오파티야 – 로브란 (1908년); 자그레브 (1910년); 두브로브니크 (1910년).
부다페스트 지하철 1호선(원래 명칭: 프란츠 요제프 지하 전기 철도 회사)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지하철 노선[132](런던 지하철의 메트로폴리탄선이 최초, 글래스고가 세 번째)이며, 유럽 대륙에서는 최초이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건설되어 1896년 5월 2일에 개통되었다.[133] 2002년에는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134] 부다페스트 지하철 1호선은 당시의 혁신적인 기술들로 인해 IEEE 마일스톤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선정 이유로는 "양방향 트램 차량, 지하철역과 트램 차량의 전기 조명, 그리고 제3궤조 방식 대신 전력 공급을 위한 가공 전차선 구조" 등이 혁신적인 요소로 꼽혔다.[135]
13. 3. 내륙 수로 및 하천 정비
최초의 다뉴브 강 증기선 회사인 도나우담프쉬프파르츠게젤샤프트(DDSG)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세계 최대의 내륙 해운 회사였다.1900년 엔지니어 C. 바겐퓌러는 빈에서 트리에스테까지 운하를 건설하여 다뉴브 강과 아드리아 해를 연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제국이 아드리아 해로 직접적인 수로를 확보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었으나[136], 최종적으로 건설되지는 못했다.
다뉴브 강의 항해 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일찍부터 시작되었다. 1831년 헝가리의 개혁적인 정치인 세체니 이슈트반의 주도로 다뉴브 강 통로를 항해 가능하게 만들 계획이 처음 마련되었다. 이후 헝가리의 "철의 재상"으로 불린 바로시 가보르가 이 중요한 프로젝트의 자금 지원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철문 협곡 구간은 강바닥의 암석과 여울 때문에 선박 운항에 악명이 높았다. 독일어로는 폭포가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카타락텐슈트레케'(Kataraktenstrecke|카타락텐슈트레케de, 폭포 구간)로 불린다. 실제 철문 해협 근처의 프리가다(Prigrada) 암석과 상류 카잔(Kazan) 협곡 근처의 그레벤(Greben) 암석은 1896년까지 주요 장애물로 남아 있었다.
한편, 티서 강은 헝가리 내 길이가 1419km에 달했으며, 중앙 유럽의 넓은 평야인 헝가리 대평원을 관통했다. 평탄한 지형 탓에 유속이 매우 느려 강이 심하게 구불거렸고, 이로 인해 잦은 홍수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체니 이슈트반은 몇 차례의 소규모 시도 끝에 1846년 8월 27일 '티서 강 규제'(a Tisza szabályozása|어 티서 서바요자샤hu)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 대규모 하천 정비 사업은 1880년에 실질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사업 결과, 헝가리 내 티서 강의 길이는 966km로 줄어들었고(총 길이는 1358km), 589km에 달하는 구불구불한 옛 물길(사(死) 운하)과 136km의 새로운 직선화된 강바닥이 생겨났다. 또한 총 2940km 길이의 홍수 방지 제방이 건설되었는데, 이는 당시 헝가리 전체 보호 하천 길이(4220km)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규모였다.
13. 4. 해운 및 항구
최초의 다뉴브 증기선 회사인 Donau-Dampfschiffahrts-Gesellschaft|도나우-담프쉬파르츠-게젤샤프트de (DDSG)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세계 최대의 내륙 해운 회사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발칸 반도 해안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여 여러 해운 항구를 이용할 수 있었다. 가장 중요한 해운 항구는 오스트리아 상선대의 기반이었던 트리에스테(현재 이탈리아의 일부)였다. 이곳에는 두 개의 주요 해운 회사인 오스트리아 로이드와 오스트리아-아메리카나, 그리고 여러 조선소가 위치했다. 1815년부터 1866년까지 베네치아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였으나, 베네치아를 상실하면서 오히려 오스트리아 상선대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오스트리아 로이드는 당시 가장 큰 해운 회사 중 하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시작 전 중간 규모 및 대형 증기선 65척을 소유했다. 오스트리아-아메리카나는 오스트리아 로이드의 약 3분의 1 규모였지만, 가장 큰 오스트리아 여객선인 SS ''카이저 프란츠 요제프 I''을 보유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아메리카나는 오스트리아 로이드와 비교하여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목적지에 집중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은 산업화로 인한 충분한 수익 덕분에 이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으며, 해군 기지로는 풀라(Pula, 현재 크로아티아의 일부)가 특히 중요했다.
군주국의 헝가리 지역에서는 피우메(리에카, 현재 크로아티아의 일부)가 가장 중요한 해운 항구였으며, 아드리아와 같은 헝가리 해운 회사들이 이곳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구분 | 총 톤수 | 총 척수 | 증기선 (톤수 / 척수) | 범선 (톤수 / 척수) | 승무원 수 |
---|---|---|---|---|---|
오스트리아 제국 | 471,252톤 | 16,764척 | 422,368톤 / 394척 | 48,884톤 / 16,370척 | 45,567명 |
헝가리 왕국 | 144,433톤 | 545척 | 142,539톤 / 134척 | 1,894톤 / 411척 | 3,217명 |
1900년 엔지니어 C. 바겐퓌러는 빈에서 트리에스테까지 운하를 건설하여 다뉴브 강과 아드리아 해를 연결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아드리아 해로 직접 연결되기를 바라면서 시작되었으나[136], 결국 건설되지는 않았다.
14. 계승 국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체로 이어졌다. 제국의 법적 승계국은 독일 오스트리아(이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와 헝가리 민주 공화국(이후 헝가리 왕국이 됨) 두 곳이었다.[141]
1919년 생제르맹 조약과 1920년 트리아농 조약은 각각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새로운 국경을 규정하여 두 나라를 소규모 내륙국가로 만들었다. 이 조약들을 통해 연합국은 제국 내 소수 민족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영토를 재분배했으나, 상당수의 독일어 및 헝가리어 사용 인구가 신생 독립 국가들에 포함되는 결과를 낳았다. 오스트리아는 독일과의 통일 시도가 무산되었고, 헝가리는 특히 영토와 인구, 자원 면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제국 해체와 함께 합스부르크 가문은 몰락했다.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법을 통해 왕가를 폐위시키고 가문 구성원을 추방했다. 마지막 황제 카를 1세는 1921년 헝가리 왕위 복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망명지에서 사망했다.[142] 헝가리에서는 미클로시 호르티가 섭정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14. 1.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후 법적 승계국은 두 곳이었다:[141] 독일 오스트리아(이후 오스트리아 공화국으로 변경)와 헝가리 민주 공화국(몇 차례의 과도기를 거쳐 최종적으로 헝가리 왕국이 됨)이다.
1919년 생제르맹 조약(제1차 세계 대전 승전국과 오스트리아 간)과 1920년 트리아농 조약(승전국과 헝가리 간)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새로운 국경을 확정하여 두 나라를 소규모 내륙국가로 만들었다. 연합국은 소수 민족들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로부터 독립하기를 원한다고 판단했으며, 상당수의 독일어 및 헝가리어 사용 인구가 거주하는 넓은 영토를 신생 독립 국가들에게 할양하도록 했다. 특히 민족적 다수가 명확하지 않은 지역의 경우, 연합국은 대부분 새로 독립한 국가들에게 유리하게 결정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구 오스트리아 제국 영토의 약 60%를 상실했다. 또한 독일과의 통일을 시도했으나, 국제 연맹의 승인 없이는 통일할 수 없다는 조항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헝가리는 영토의 72%, 인구의 64%, 그리고 대부분의 천연자원을 잃으며 더 큰 타격을 입었다. 헝가리 민주 공화국은 단명했고, 공산주의자들이 세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잠시 대체되었다. 그러나 1919년 헝가리-루마니아 전쟁 중 루마니아 군대가 벨러 쿤의 공산 정부를 전복시켰다.
1919년 여름, 합스부르크 왕가의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잠시 섭정을 맡았으나, 연합국이 그를 인정하지 않아 2주 만에 물러나야 했다.[142] 결국 1920년 3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마지막 사령관이었고 반혁명군 조직에 기여했던 미클로시 호르티가 섭정으로 추대되었다. 이 정부는 1920년 6월 4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그랑 트리아농에서 항의 속에 트리아농 조약을 체결했다.[143][144]
이전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제의 해체 결과, 다음 국가들이 새롭게 형성되거나, 재건되거나, 영토가 확장되었다:[141]
국가 유형 | 국가명 |
---|---|
형성/재건 | 독일 오스트리아 (이후 오스트리아 공화국) |
형성/재건 | 제1 헝가리 공화국 →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 헝가리 공화국 → 헝가리 왕국 |
형성 | 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
재건 | 제2 폴란드 공화국 (단명한 타르노브제크 공화국, 폴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등과 영토 분쟁) |
형성/통합 | 슬로베니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 국가와 세르비아 왕국 (이후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및 슬로베니아인 왕국으로 통합) |
확장 | 대 루마니아 |
확장 | 이탈리아 왕국 |
조차지 반환 | 중화민국 (구 텐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조차지) |
단명한 국가 | 루테니아(우크라이나 및 루신) 지역의 원형 국가들: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 (후에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에 흡수됨), 후출 공화국, 렘코 공화국, 코만차 공화국, 갈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대부분 폴란드에 흡수, 일부는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에 흡수) |
한편,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의 보호를 받았고 지배 가문이 치슬라이타니아에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했던 리히텐슈타인 공국은 제국 해체 후 스위스와 관세 및 방위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통화 대신 스위스 통화를 채택했다. 1919년 4월, 오스트리아 최서단 지역인 포어아를베르크 주민들은 스위스 연방 가입을 압도적으로 지지하는 투표를 했으나, 스위스와 연합국 모두 이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4. 2. 현재
다음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었을 때 제국의 경계 안에 있던 현재의 국가 및 국가의 일부 목록이다. 1867년 이전에는 유럽의 다른 일부 지역도 한때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일부였다.'''오스트리아 제국''' ('''치슬라이타니아'''):
-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는 쇼프론 제외)
- 체코 (흘루친스코 지역 제외)
- 슬로베니아 (프레크무르예 제외)
- 이탈리아 (트렌티노, 남티롤, 벨루노현 일부,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의 작은 부분)
- 크로아티아 (달마티아, 이스트라)
- 폴란드 (마워폴스카, 카르파티아, 실롱스크의 최남단 (비엘스코비아와와 치에신))
- 우크라이나 (리비우주, 이바노-프란키우스크주, 테르노필주 (북쪽 모서리 제외) 및 체르니우치주 대부분)
- 루마니아 (수체아바주)
- 몬테네그로 (코토르만, 부드바, 페트로바츠나모루, 수토모레 주변 해안과 배후지)
'''헝가리 왕국''' ('''트란스라이타니아'''):
- 헝가리
- 슬로바키아
-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는 쇼프론 제외)
- 슬로베니아 (프레크무르예)
- 크로아티아 (크로아티아 바라냐와 메지무르예주, 피우메는 헝가리의 일부가 아니었으며, 후자는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에 속했다.)
- 우크라이나 (자카르파탸주)
-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파르티움 지역, 바나트, 크리샤나, 마라무레슈 일부)
- 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북부 베오그라드 지역)
- 폴란드 (오라바와 스피슈의 폴란드 지역)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통치령'''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자발리에, 말리 스코차이와 벨리키 스코차이 마을, 비하치 서쪽 인접 지역)
- 몬테네그로 (소토니아 – 현재 크로아티아 (남서) 및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서) 국경 사이의 헤르체그노비 시정촌 서부, 아드리아해 해안 (동) 및 이갈로 마을 (북동))
- 산자크-라슈카 지역, 187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 1908년 철수, 공식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주국의 기타 소유'''
- 중화인민공화국 (구 톈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조계지)
15. 평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완패한 오스트리아 제국에 대해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전반에 걸친 세계적인 평가는 "다민족의 감옥", "낙후된 봉건 체제 국가" 등 좋지 않았다. 민족 자결 이념에 따른 각 민족의 자립은 현실적으로 연합국에게 전쟁을 정당화하는 선전 수단이 되었다. 특히 연합국은 "폴란드 부활"을 전쟁 목적의 핵심처럼 내세우고 이를 달성했다고 크게 선전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처리는 허술한 점이 많았고,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혀 영토 획정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동유럽에는 평화와 안정이 찾아오지 않았다. 전쟁 목적의 으뜸이었던 폴란드는 영토 문제에 불만을 품고 소비에트 연방이나 체코슬로바키아와 전쟁 상태에 빠졌다. 과거 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었던 헝가리 역시 전쟁 책임을 물어 영토가 대폭 축소되어 불만이 계속되었다. 중·동유럽의 혼란은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렸던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또한, 오스트리아는 주요 산업 기반을 잃고 심각한 불황에 빠졌으며, 전쟁 전 활발했던 국외 투자도 모두 사라져 많은 혼란을 겪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자, 과거 연합국 측이 내세운 "민족 자결" 원칙을 역이용하여 중·동유럽 제국에 흩어져 있는 독일계 주민 보호를 명분으로 잇따라 침략했다. 중·동유럽의 소국들은 각개 격파되었고, 과거 제국 내 여러 민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항쟁이 재현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중·동유럽 제국의 대부분이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국이 되어 동서 냉전의 최전선이 되었다. 결국, 여러 민족이 혼재하여 민족별 영역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중·동유럽에 "민족 자결" 원칙을 억지로 적용하면서 더 큰 혼란이 발생한 것이다.
19세기 초, 빈을 점령한 나폴레옹에게 프랑스 외무상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붕괴시키는 것은 자유지만, 이것은 다민족을 통치하는 모델 국가이며, 한 번 부수면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후에는 혼란만 남을 뿐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십시오"라는 편지를 보낸 바 있다[149]. 제국의 지배 체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은 이 혼란스러운 지역을 일단 하나로 묶어 놓았다는 점이다. 민족은 달라도 같은 제국 신민으로서 제국 내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전쟁도 함께 치렀다. 독일과 러시아라는 강대국 사이에 존재했던 하나의 큰 국가로서, 과거 동로마 제국, 대헝가리, 몽골 제국,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하에 분단과 병합을 반복했던 이 지역의 질서를 완만한 통합을 통해 이루어냈다는 점에서 제국의 존재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제국 내 각 민족의 지위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향상되었다. 여러 민족의 끈질긴 운동과 각 지역의 중요성 증대 등으로 지배 계급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오스트리아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했던 "민주적 연방제"로의 개편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모든 민족에게 보통 선거권이 부여되는 등 상당한 지위를 얻었고, 황제에 대한 여러 민족의 신뢰도 두터웠다. 그러나 아우스글라이히와 같은 어중간한 타협은 오히려 독립 움직임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장기적인 전쟁 속에서 여러 민족의 연방제 지지파가 쇠퇴하고 독립파가 부상하면서 연합국의 좋은 표적이 되었다. 결국 외국 세력의 개입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일체감과 통일성을 여러 민족에게 부여하지 못한 것이 이 제국의 가장 큰 실패였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여러 민족의 이탈로 인해 남겨진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주민에게는 제국의 붕괴와 영토 축소뿐만 아니라, 19세기 이래의 대독일주의에 기초한 독일과의 합병마저 금지되면서 자신의 민족 정체성마저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이후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고, 결국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 독일에 의한 병합(안슐루스)으로 이어졌다. 14개조 평화 원칙의 원안을 작성한 월터 리프먼은 "각 민족의 자치권은 확립하되, 합스부르크 제국을 해체해서는 안 된다"라고 윌슨 대통령에게 진언했고, 조항 초안에 제국의 존속을 담았었다. 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붕괴했지만, 리프먼은 훗날 "이것이 중부 유럽의 정치적 균형을 파괴하고, 히틀러로 가는 길을 열었다"라고 한탄했다[149].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은 "합스부르크 왕조가 멸망하지 않았다면, 중유럽의 여러 나라는 이처럼 오랫동안 고난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149]라고 평가했으며, 독일의 역사학자 Golo Mann|골로 만de 역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민족 국가가 잘 기능하는 최고의 해결책이었습니다"[149]라고 말하며 제국 해체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러한 평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민족 국가 운영 모델로서 재평가하는 시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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