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왕국 왕관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폴란드 왕국 왕관령은 폴란드 왕국의 영토, 행정 구역, 그리고 왕관의 권위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폴란드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2세기 잉글랜드에서 유래한 이 개념은 헝가리, 보헤미아를 거쳐 폴란드에 영향을 미쳤으며, 왕국, 왕관, 국가를 동일시하는 법적,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1385년 크레보 동맹, 1569년 루블린 연합과 같은 사건을 통해 왕관령의 개념은 더욱 발전했으며, 1791년 5월 3일 헌법은 왕관령 내 정부의 구조를 개혁하려 했다. 왕관령은 대폴란드와 소폴란드로 나뉘었으며, 다양한 행정 구역과 봉토, 보호령을 포함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행정 구역 - 리투아니아 대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3세기 중반부터 1795년까지 동유럽에 존재했던 국가로, 발트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다문화 사회를 이루었고, 폴란드 왕국과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원으로 존속하며 동유럽 여러 국가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폴란드 왕국 - 야기에우워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는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에서 시작되어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중앙 유럽 여러 국가를 통치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 폴란드 왕국 - 폴란드 섭정왕국
폴란드 섭정왕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점령한 러시아령 폴란드 지역에 세운 괴뢰 국가로, 독일 제국이 완충국 건설을 목표로 1916년 건국이 약속되었으나, 섭정 평의회의 제한적인 권한 행사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에게 권한 이양 후 폴란드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 리투아니아 대공국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13세기 중반부터 1795년까지 동유럽에 존재했던 국가로, 발트족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흑해 연안까지 영토를 확장하며 다문화 사회를 이루었고, 폴란드 왕국과 연합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원으로 존속하며 동유럽 여러 국가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 야기에우워 왕조
야기에우워 왕조는 폴란드 국왕 요가일라에서 시작되어 1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 중앙 유럽 여러 국가를 통치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의 사망으로 단절되었다.
폴란드 왕국 왕관령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개요 | |
다른 표기 | |
상태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 (1569년–1795년) |
정부 형태 | 봉건제 선거 군주제 혼합 군주제 |
역사 | |
시작 | 1385년 |
사건 시작 | 크레보 연합 |
날짜 시작 | 1385년 8월 14일 |
사건 1 | 루블린 연합 |
날짜 사건 1 | 1569년 7월 1일 |
사건 2 | 5월 3일 헌법 |
날짜 사건 2 | 1791년 5월 3일 |
종료 | 1795년 |
사건 종료 | 제3차 폴란드 분할 |
날짜 종료 | 1795년 1월 7일 |
국기 및 문장 | |
![]() | |
![]() | |
지도 | |
![]() | |
수도 | |
수도 | 크라쿠프 |
국가 | |
국가 | "" "하느님의 어머니" [[File:Bogurodzica - Collegium Vocale.ogg|alt=sound clip of Bogurodzica]] "" "기뻐하라, 오 폴란드 어머니"[[File:Gaude Mater Polonia - Educatus.opus]]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폴란드어, 라틴어 |
국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인구 및 통화 | |
데모님 | 폴란드인 |
통화 | 데나르 그로시 두카트 즈워티 |
정치 | |
지도자 1 |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첫 번째) |
지도자 2 | 스타니스와프 2세 아우구스트 (마지막) |
입법부 | 세임 |
상원 | 상원 |
하원 | 하원 |
이전 및 이후 | |
이전 국가 | 폴란드 왕국 |
계승 국가 | 프로이센 왕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러시아 제국 |
2. 폴란드 왕관령(Corona Regni) 개념의 발전
폴란드 왕관령(Corona Regni) 개념은 12세기 잉글랜드에서 시작된 '코로나 레그니' 개념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다. 12세기 초 잉글랜드 왕국에서 ''corona regni'' 개념이 처음 등장하여 13세기에 "corona regni Angliae"라는 용어로 발전했고, 이는 변하지 않는 영구적인 왕의 존엄성, 권위, 권리를 의미했다.[1]
특히 성 이슈트반 왕관으로 대표되는 헝가리와 corona regni Bohemiae 개념을 도입한 보헤미아의 사례는 폴란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헝가리에서는 12세기 말 ''corona regni'' 개념이 등장했고,[2] 보헤미아에서는 룩셈부르크 왕조가 폴란드 왕위를 얻는 데 실패하면서 슐레지엔 공국을 보헤미아 왕관과 통합할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corona regni Bohemiae''개념이 도입되었다.[6]
폴란드는 10세기 후반 미에슈코 1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통일 왕국으로 발전했다.[4] 크라쿠프는 왕국의 수도로 여겨졌으며, 바벨 대성당에는 왕실 보물이 보관되었다.[5] 스타니스와프 슈체파노프스키 주교는 왕국과 통일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았다.[5]
1335년 비셰그라드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3세는 보헤미아의 요한에게 폴란드 왕 칭호에 대한 주장을 돈으로 사들였다.[8] 이를 통해 "폴란드 왕국"(Regnum Poloniae|레그눔 폴로니아이lt)이라는 용어는 현재 왕의 통치를 받는 모든 영토와, 과거 피아스트 왕조에 속했던 모든 영토를 의미하게 되었다.[8]
카지미에시 3세 사후, 그의 유언은 왕국의 영토를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무효화되었는데, 이는 왕관의 이익을 위한 최초의 행위로 간주된다.[3] 러요시 1세는 즉위식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폴란드 왕국의 왕관을 위해 되찾을 것을 약속했다.[3]
야드비가 여왕의 즉위는 왕권이 왕조가 아닌 왕국 공동체와의 합의에 기반함을 보여주었다. 1384년 야드비가의 대관식으로 끝난 공위 시대는 왕국의 왕관의 활력을 증명했다.[3]
크레보 동맹은 1385년 8월 13일 요가일라와 폴란드 귀족들 사이에 맺어진 혼전 계약으로, 야드비가와의 결혼을 제안했다.[1] 이 계약에는 기독교 채택과 왕관에 의해 상실된 영토의 반환이 포함되었다.[2] 요가일라는 또한 자신의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영토를 폴란드 왕국 왕관에 영구적으로 귀속시킬 것을 약속했다.[3]
루블린 연합은 1569년 7월 1일, 폴란드 왕관령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실질적 연합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단일 국가를 창설했다.
'''1791년 5월 3일 헌법'''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헌법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성문 헌법으로 '''정부법'''(''Ustawa Rządowa'')이라고 불렸다. 이 헌법은 폴란드를 국왕을 행정부 수반으로 하는 입헌 군주국으로 만들었다.
2. 1. 외부 영향
12세기 초 잉글랜드 왕국에서 ''corona regni'' 개념이 처음 등장하여 13세기에 "corona regni Angliae"라는 용어로 발전했고, 이는 변하지 않는 영구적인 왕의 존엄성, 권위, 권리를 의미했다. 주로 국왕의 사법권과 잃어버린 영토를 포함한 국가 전체를 포괄했다.[1]폴란드에 중요한 영향을 준 것은 12세기 말 헝가리에서 ''corona regni''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처음에는 아르파드 왕조와 연결된 영토적 실체로서의 왕국, 즉 성 이슈트반 왕관의 상속자를 나타냈다.[2] 이는 앙주 왕가의 쇠퇴와 함께 일어났고, 국회는 여성 계승을 통해 왕위 계승을 합법화했다.[3] 지기스문트 통치 기간 동안 성 이슈트반 왕관은 국왕과 구별되었고, 헝가리 귀족들은 왕관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했다.[4] 15세기에 왕관은 법적 인격을 획득하여 국왕과 귀족 모두를 초월하는 진정한 주권자가 되었다.[5]
보헤미아에서는 ''corona regni'' 개념이 주로 국가의 영토 확장 및 통합과 관련하여 등장했다. 룩셈부르크 왕조가 폴란드 왕위를 얻는 데 실패하면서 슐레지엔 공국을 보헤미아 왕관과 통합할 필요성이 강조되었다. 1348년 카를 4세는 국가의 봉건 구조를 공식화하고 ''corona regni Bohemiae'' 개념을 도입하여 슐레지엔과 상부 루사티아 영토를 영구적인 왕관에 귀속시켰다.[6]
2. 2. 왕국의 관념
폴란드는 10세기 후반 미에슈코 1세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 통일 왕국으로 발전했다.[4] 크라쿠프는 왕국의 수도로 여겨졌으며, 바벨 대성당에는 왕실 보물이 보관되었다.[5] 스타니스와프 슈체파노프스키 주교는 왕국과 통일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았다.[5]1295년 프셰미스우 2세가 그니에즈노 대성당에서 폴란드 왕으로 즉위했으나, 1년 후 암살당했다.[6] 이후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2세가 폴란드 왕위를 계승했으나, 피아스트 왕조의 중앙 권력은 약화되었다.[6] 1320년 와디스와프 1세 단신공이 크라쿠프에서 왕으로 즉위했지만, 보헤미아의 요한의 권리를 침해하지는 않았다.[6] 카지미에시 3세 시기에 왕권이 강화되었고, 그는 이전 폴란드 왕들이 통치했던 영토를 되찾으려 노력했다.[7] 1335년 비셰그라드 회의에서 카지미에시 3세는 보헤미아의 요한에게 폴란드 왕 칭호에 대한 주장을 돈으로 사들였다.[8] 이를 통해 "폴란드 왕국"(Regnum Poloniae|레그눔 폴로니아이lt)이라는 용어는 현재 왕의 통치를 받는 모든 영토와, 과거 피아스트 왕조에 속했던 모든 영토를 의미하게 되었다.[8]
2. 3. 왕관의 관념
카지미에시 3세 사후, 그의 유언은 왕국의 영토를 분열시킨다는 이유로 무효화되었는데, 이는 왕관의 이익을 위한 최초의 행위로 간주된다.[3] 러요시 1세는 처음에는 유언을 인정하려 했으나,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법정에 이 문제를 회부했고, 법정은 군주가 왕국의 영토를 줄일 수 없다고 판결했다. 러요시 1세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3]새로운 국왕 러요시 1세는 즉위식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폴란드 왕국의 왕관을 위해 되찾을 것을 약속했다.[3] 1381년, 얀 라들리차는 '크라쿠프 출신' 또는 '궁정' 재상이라는 칭호 대신 ''regni Poloniae supremus cancellarius''(폴란드 왕국 최고 재상)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3]
야드비가 여왕의 즉위는 왕권이 왕조가 아닌 왕국 공동체와의 합의에 기반함을 보여주었다. 1382년 러요시 1세 사망 후, 1384년 야드비가의 대관식으로 끝난 공위 시대는 왕국의 왕관의 활력을 증명했다. 이 기간 동안 영주들은 내전을 피하고 새로운 통치자의 대관식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국가의 업무를 관리했다.[3] 귀족들은 러요시의 딸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자연적인 권리를 존중했지만, 이 권리는 통치자가 왕국의 왕관에 대한 서약과 의무를 준수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3]
2. 4. 크레보 동맹
크레보 동맹은 1385년 8월 13일,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와 폴란드 귀족들 사이에 크레바 성에서 맺어진 혼전 계약으로,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의 결혼을 제안했다.[1] 1385년 8월 14일, 요가일라가 혼전 계약을 확정하면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개인 연합을 형성했다. 이 계약에는 기독교 채택과 왕관에 의해 상실된 영토의 반환이 포함되었다.[2] 요가일라는 또한 자신의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영토를 폴란드 왕국 왕관에 영구적으로 귀속시킬 것을 약속했다(''terras suas Lithuaniae et Rusie Corone Regni Poloniae perpetuo aplicare)'').[3] 1386년 2월 15일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후, 요가일라는 공식적으로 브와디스와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세례 3일 후,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사이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게디미나스 왕조 출신의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리투아니아 출신 게디미나스 가문인 요가일라, 그의 아내 야드비가, 그리고 폴란드 왕국 왕관에 경의를 표했다.[4]크레보 동맹은 당시 유럽에서 흔했던 일반적인 개인 연합과는 구별된다. 그 이유는 한쪽 당사자가 왕조나 통치자가 아닌 ''Corona Regni'', 즉 폴란드 왕국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이는 카지미에시 3세와 러요시 1세 사이의 계약과는 다르며, 이 계약은 후자를 왕위에 올렸다.[5] 요가일라와 야드비가는 귀족들에 의해 폴란드 왕위에 선출되었다. 그들의 왕위에 대한 자연권은 미약했고, 그들의 권력은 그들과 왕국 왕관 사이의 합의에만 의존했다.[6] 로버트 I. 프로스트에 따르면, 크레보 동맹의 목표는 폴란드의 리투아니아 병합이 아니라 왕국 공동체, 즉 왕관으로의 통합이었다.[7]
2. 5. 루블린 연합
루블린 연합은 1569년 7월 1일, 폴란드 왕관령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실질적 연합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단일 국가를 창설했다. 그 이전에는 폴란드 왕국 왕관령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단지 개인적 연합만 이루고 있었다. 루블린 연합은 또한 왕관령을 선출 군주국으로 만들었다. 이는 1573년 5월 16일 앙리 드 발루아가 군주로 선출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했다.2. 6. 1791년 5월 3일 헌법
'''1791년 5월 3일 헌법'''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헌법이자,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성문 헌법이다. 가장 오래된 헌법은 미국 헌법이다. 이 헌법은 '''정부법'''(''Ustawa Rządowa'')이라고 불렸다. 1788년 10월 6일에 헌법 초안 작성이 시작되어 32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는 이 헌법의 주요 저자였으며, 영국과 유사한 입헌 군주제를 원했다. 1791년 5월 3일, 대(大) 세임이 소집되어 새 헌법을 읽고 채택했다. 이 헌법은 부르주아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정부를 3부로 분리했으며, 리베룸 베토를 폐지하고, 렙닌 세임의 남용을 중단시켰다.
이 헌법은 폴란드를 국왕을 행정부 수반으로 하는 입헌 군주국으로 만들었다. 국왕은 법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각료 회의를 두었다. 입법부는 선출된 세임과 임명된 상원으로 구성된 양원제였고, 국왕은 상원에서 동률일 경우 결정권을 가졌다. 세임의 수장은 세임 원수였다. 왕관 재판소는 왕관령 내 최고 항소 법원으로 개혁되었다. 세임은 세임 법원(왕관령의 의회 법원)의 판사를 대의원(''posłowie'') 중에서 선출했다.
정부법은 예카테리나 2세를 분노하게 했는데, 그녀는 폴란드가 정치 개혁을 하려면 러시아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폴란드가 당시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던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179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했다.[4][5] 이 헌법은 19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시행되었고, 그로드노 세임에 의해 무효화되었다.[6][7][8][9][10][11][12][13]
3. 정치
폴란드 왕국 왕관령의 창설은 폴란드 국가와 유럽 정체성의 진화에 중요한 사건이었다. 왕관령은 군주의 인격과 구분되는 폴란드 왕국(국가)의 개념을 나타냈다.[14] 이 개념은 폴란드 정부를 세습 군주국에서 귀족, 성직자, 노동 계급에게 권력이 있던 준-입헌 군주제(''monarchia stanowa'')로 변화시켰으며, 이는 "선거 군주제"로도 불렸다.
''코로나 레그니''(Corona Regni, 왕관령)의 개념은 카지미에시 3세의 문서에 세 번 나타나며, 모두 국왕의 이름으로 외국의 재상에 의해 작성되었다. 군주의 권력을 제한하는 이 아이디어는 그의 사후에야 인기를 얻었다. 1370년 카지미에시 3세의 유언 무효화는 본질적으로 왕관의 이익을 위해 수행된 최초의 행위였다. 러요시 1세는 처음에는 유언을 인정하려 했지만,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여 이 문제를 법정에 회부했고, 법정은 군주가 왕국의 왕관의 영토를 줄일 수 없다고 판결했으며, 러요시 1세는 이 결정을 수용했다.[14] 마찬가지로, 새로운 국왕 러요시 1세는 즉위식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자신을 위해, 아니라 폴란드 왕국의 왕관을 위해 되찾을 것을 약속했다.[14] 얀 라들리차는 자신을 "크라쿠프 출신" 또는 "궁정" 재상이라고 칭하는 것을 멈추고 1381년에 regni Poloniae supremus cancellariusla(폴란드 왕국 최고 재상)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최초의 국왕 재상이었다.[14]
왕관이 실질적인 주권자라는 개념은 레슈 폴란드의 엘리트층에 의해 홍보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이를 자신들의 역할을 높이는 방법으로 보았다. 이는 외국인 국왕의 통치, 그의 모친인 엘리자베스의 폴란드 섭정, 그리고 그의 사후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인해 여성인 야드비가 여왕이 폴란드 왕위에 오르게 되면서 촉진되었다. 당시의 인식으로는 이는 옛 법을 위반하는 것이었고 영주들의 동의가 필요했다.[14]
1382년 러요시 1세 사망 후, 1384년 야드비가의 대관식으로 끝난 공위 시대는 왕국의 왕관의 활력을 증명했다. 이 기간 동안, 영주(regnicolae regni Poloniae)들은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피하고 새로운 통치자의 대관식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국가의 업무를 관리했다.[14] 더욱이 권력의 기반은 왕조와 왕국의 공동체 간의 합의에 놓이기 시작했다. 귀족들은 러요시의 딸들이 왕위를 물려받을 자연적인 권리를 존중했지만, 이 권리는 통치자가 왕국의 왕관에 대한 서약과 의무를 준수하는 것을 전제로 했다.[14]
크레보 동맹은 1385년 8월 13일, 리투아니아 대공국 요가일라와 폴란드 귀족들 사이에 크레바 성에서 맺어진 혼전 계약으로,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의 결혼을 제안했다.[14] 요가일라가 1385년 8월 14일 혼전 계약을 확정하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개인 연합을 형성했다. 이 계약에는 기독교 채택과 왕관에 의해 상실된 영토의 반환이 포함되었다.[14] 요가일라는 또한 자신의 리투아니아와 루테니아 영토를 폴란드 왕국 왕관에 영구적으로 귀속시킬 것을 약속했다(terras suas Lithuaniae et Rusie Corone Regni Poloniae perpetuo aplicarela).[14] 1386년 2월 15일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은 후, 요가일라는 공식적으로 브와디스와프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세례 3일 후,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 사이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게디미나스 왕조 출신의 리투아니아 공작들은 리투아니아 출신 게디미나스 가문인 요가일라, 그의 아내 야드비가, 그리고 폴란드 왕국 왕관에 경의를 표했다.[14]
크레보에서 맺어진 이 동맹은 당시 유럽에서 흔했던 일반적인 개인 연합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한쪽 당사자가 왕조나 통치자가 아닌 ''Corona Regni'', 즉 폴란드 왕국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이는 카지미에시 3세와 러요시 1세 사이의 계약과 달랐고, 이 계약은 후자를 왕위에 올렸다.[14] 요가일라와 야드비가는 귀족들에 의해 폴란드 왕위에 선출되었다. 그들의 왕위에 대한 자연권은 미약했고, 그들의 권력은 그들과 왕국 왕관 사이의 합의에만 의존했다.[14]
루블린 연합은 1569년 7월 1일, 폴란드 왕관령과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실질적 연합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라는 단일 국가를 창설했다. 그 이전에는 폴란드 왕국 왕관령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단지 개인적 연합만 이루고 있었다. 루블린 연합은 또한 왕관령을 선출 군주국으로 만들었다. 이는 1573년 5월 16일 앙리 드 발루아가 군주로 선출되면서 야기에우워 왕조가 종식되었음을 의미했다.
1574년 2월 22일, 앙리 드 발루아가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즉위한 지 두 달 후인 1574년 5월 30일, 그는 프랑스 왕이 되었으며, 1575년 2월 13일 프랑스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지 두 달 만인 1575년 5월 12일 왕관령의 왕위를 떠났다. 그 후 안나 야기에우워가 선출되었다.
1791년 5월 3일 헌법은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래된 성문 헌법이며,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 헌법이다. 가장 오래된 헌법은 미국 헌법이다. 이 헌법은 '''정부법''' (Ustawa Rządowapl)이라고 불렸다. 이 헌법의 초안은 1788년 10월 6일에 시작되어 32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는 이 헌법의 주요 저자였으며, 그는 왕관을 영국과 유사한 입헌 군주제로 만들기를 원했다. 1791년 5월 3일, 대(大) 세임이 소집되어 새 헌법을 읽고 채택했다. 이 헌법은 부르주아에게 참정권을 부여하고, 정부를 3부로 분리했으며, 리베룸 베토를 폐지하고, 렙닌 세임의 남용을 중단시켰다.
이 헌법은 폴란드를 국왕을 행정부 수반으로 하는 입헌 군주국으로 만들었고, 국왕은 법의 수호자라고 불리는 각료 회의를 두었다. 입법부는 선출된 세임과 임명된 상원으로 구성된 양원제였고, 국왕은 상원에서 동률일 경우 결정권을 가지며, 세임의 수장은 세임 원수였다. 왕관 재판소는 왕관령 내 최고 항소 법원으로 개혁되었다. 세임은 세임 법원(왕관령의 의회 법원)의 판사를 대의원(''posłowie'') 중에서 선출했다.
정부법은 예카테리나 2세를 분노하게 했는데, 그녀는 폴란드가 정치 개혁을 하려면 러시아 제국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폴란드가 당시 프랑스에서 두드러졌던 급진적인 자코뱅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1792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침공했다.[4][5] 이 헌법은 19개월도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시행되었고, 그로드노 세임에 의해 무효화되었다.[6][7][8][9][10][11][12][13]
4. 지리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국 왕관령은 지리적으로 폴란드 왕관 영토의 불가분성과 관련이 있었다.[14] 이는 중세 시대부터 18세기 말까지 폴란드 국가가 직접 통치했던 행정 구역, 즉 영토로 볼 수 있다. 이 영토들은 초기 폴란드 왕국의 일부를 형성했고, 이후 1795년 최종 멸망할 때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다. 현재의 폴란드, 우크라이나, 그리고 일부 러시아, 벨라루스, 몰도바, 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 국경 지역에 해당한다.
동시에 왕관령은 폴란드 국왕이 폴란드 국경 내에 있지 않은 영토를 포함하여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는 모든 영토를 의미하기도 했다.[14]
이 용어는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연합된 영토와 프로이센 공국, 쿠를란트 공국과 같은 다양한 봉토 (왕으로부터 다양한 정도의 자율성 또는 반독립성을 누렸던)를 구분한다.
1569년 루블린 연합 이전에는 왕관령 영토는 폴란드 왕국 자체의 영토로, 폴란드인이 거주하거나, 폴란드 국왕의 주권 하에 있는 다른 지역 (예: 로열 프로이센) 또는 슐라흐타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블린 연합으로 인해 현재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폴란드인 인구가 거의 없고, 그 전까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통치했음)이 폴란드 행정 하에 들어가 왕관령 영토가 되었다.
5. 행정 구역
폴란드 왕국 왕관령은 지리적인 측면, 특히 폴란드 왕관 영토의 불가분성과 관련이 있었다.[14] 이는 중세 시대부터 18세기 말까지 폴란드 국가가 직접 통치했던 행정 구역 단위, 즉 영토로 볼 수 있다. 이 영토들은 초기 폴란드 왕국의 일부였고, 이후 1795년 최종 멸망할 때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였다.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왕관령은 대폴란드와 소폴란드 두 주로 나뉘었다. 이들은 다시 보예보드십이라는 행정 구역으로 나뉘었다.
'코로니아르'(복수형: 코로니아르제)는 왕관령 출신 폴란드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왕관을 뜻하는 '코로나'에서 유래했다.[14]
5. 1. 대폴란드 주
1569년 루블린 연합 이후 폴란드 왕국 왕관령은 대폴란드와 소폴란드 두 개의 주로 나뉘었다. 대폴란드는 다음과 같은 보이보드십으로 구성되었다.[14]보이보드십 | 폴란드어 명칭 | 중심 도시 |
---|---|---|
브제스크 쿠야프스키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brzesko-kujawskie|브제스코 쿠야프스키에pl | 브제스크 쿠야프스키 |
그니에즈노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gnieźnieńskie|그니에즈니엔스키에pl | 그니에즈노 |
이노브로츠와프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inowrocławskie|이노브로츠와프스키에pl | 이노브로츠와프 |
칼리시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kaliskie|칼리슈스키에pl | 칼리시 |
웽치차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łęczyckie|웽치츠키에pl | 웽치차 |
마조비아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mazowieckie|마조비에츠키에pl | 바르샤바 |
포즈난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poznańskie|포즈난스키에pl | 포즈난 |
프워츠크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płockie|프워츠키에pl | 프워츠크 |
포들라스키에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podlaskie|포들라스키에pl | 드로히친 |
라바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rawskie|라프스키에pl | 라바 |
시에라츠 보이보드십 | województwo sieradzkie|시에라츠키에pl | 시에라츠 |
바르미아 주교령 |
5. 2. 소폴란드 주
루블린 연합 (1569년) 이후 폴란드 왕관령은 대폴란드와 소폴란드 두 개의 주로 나뉘었다. 소폴란드 주는 다음과 같은 보예보드십들로 구성되었다.보이보드십 | 폴란드어 표기 및 중심 도시 |
---|---|
베우즈 주 | województwo bełzkiepl, 베우즈 |
브라츠와프 주 | województwo bracławskiepl, 브라츠와프 |
체르니호프 주 | województwo czernihowskiepl, 체르니호프 |
키예프 주 | województwo kijowskiepl, 키예프 |
크라쿠프 주 | województwo krakowskiepl, 크라쿠프 |
루블린 주 | województwo lubelskiepl, 루블린 |
포돌리아 주 | województwo podolskiepl, 카미야네츠포돌스키 |
루스 주 | województwo ruskiepl, 르비우 |
산도미에르츠 주 | województwo sandomierskiepl, 산도미에르츠 |
볼히니아 주 | województwo wołyńskiepl, 루츠크 |
시에비에르츠 공국 | 시에비에르츠 |
5. 3. 왕령 프로이센 (1569–1772)
1569년 루블린 연합 이전 왕관령 영토는 폴란드 왕국 자체의 영토, 즉 폴란드인이 거주하거나 폴란드 국왕의 주권 하에 있는 로열 프로이센 등의 지역, 또는 슐라흐타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루블린 연합으로 인해 현재 우크라이나의 대부분 지역(폴란드인 인구가 거의 없고, 그 전까지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통치했음)이 폴란드 행정 하에 들어가 왕관령 영토가 되었다.[14]당시 왕관령 출신 폴란드인을 지칭하는 용어는 '코로니아르'(복수형: 코로니아르제)였는데, 이는 왕관을 뜻하는 '코로나'에서 유래했다.[14]
6. 기타 영지 및 봉토
폴란드 왕관령은 다양한 영지와 봉토를 포함했다.
- 몰다비아 공국 (1387년-1497년): 페트루 1세는 1387년 블라디슬라프 2세 야기에우워의 봉신이 되어 몰다비아를 폴란드에 더 가깝게 만들었다.[16] 이후 몰다비아는 폴란드와 헝가리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오스만 제국에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 스피시 지역 마을 (1412년-1795년): 루보브라 조약에 따라 헝가리는 스피시 지역의 16개 소금 생산 마을을 폴란드에 담보로 제공했다.[1]
- 시에비에르츠 공국 (1443년-1795년): 1443년 크라쿠프 대주교인 즈비그니에프 추기경 올레시니츠키가 벤체슬라우스 1세에게서 시에비에시 공작령을 매입하면서 폴란드 왕관령에 속하게 되었다.[17]
- 바르미아 주교령 (1466년-1772년): 토룬 평화 이후 폴란드 왕국의 보호령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19]
- 라우엔부르크와 부토프 (1637년-1772년): 포메라니아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보기슬라프 14세 사후 폴란드 왕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비드고슈치 조약과 벨라우 조약에 따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에 봉토로 주어졌다.[22]
- 쿠를란트와 세미갈리아 공국 (1562년-1791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봉신국이었다가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부가 되었다.[1] 1795년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다.[1]
- 프로이센 공국 (1569년-1657년): 튜튼 기사단령을 세속화하여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 공작이 세운 공국으로, 폴란드 왕국의 봉토였다. 벨라우 조약을 통해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인정받았다.[23]
6. 1. 몰다비아 공국 (1387–1497)
페트루 1세는 헝가리-폴란드 연합의 종식을 이용하여 몰다비아를 야기에우워 왕국에 더 가깝게 만들었고, 1387년 9월 26일 블라디슬라프 2세 야기에우워의 봉신이 되었다.[16] 이로 인해 페트루는 폴란드 통치자에게 튜턴 기사단과의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했고, 빚이 상환될 때까지 포쿠티아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이 빚이 실제로 상환되었다는 기록은 없어, 포쿠티아 지역은 양국 간 분쟁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오베르틴 전투 (1531년)에서 몰다비아가 이 지역을 잃게 되었다.[16]페트루 공은 또한 통치 지역을 도나우 삼각주까지 남쪽으로 확장했다. 그의 형제인 로만 1세는 1392년 헝가리 지배하의 체타테아 알바를 정복하여 몰다비아에 흑해로의 출구를 열었지만,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대공 비타우타스와의 갈등에서 표도르 코리아토비치를 지지하여 왕위에서 쫓겨났다.[16] 슈테판 1세 치하에서 성장하는 폴란드의 영향력은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드에 의해 도전받았지만, 지기스문드의 원정은 1385년 그힌더오아니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슈테판은 불가사의한 상황에서 사라졌다.[16]
알렉산드루 1세가 1400년 헝가리인에 의해 왕위에 올랐지만(왈라키아의 미르체아 1세의 도움으로), 그는 폴란드로 충성을 옮겼다.[16] 특히 그룬발트 전투와 마리엔부르크 공방전에서 몰다비아 군대를 폴란드 측에 참여시켰고, 왈라키아에 자신의 통치자를 선택했다.[16] 그의 통치는 몰다비아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시기 중 하나였지만, 1420년 체타테아 알바에서 오스만 투르크와의 첫 번째 대결을 보았고, 나중에는 폴란드와의 갈등까지 겪었다.[16]
알렉산드루의 긴 통치 이후 심각한 위기가 닥쳤고, 그의 후계자들은 보그단 2세의 살해와 1451년 페트루 3세 아론의 즉위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쟁에서 서로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다비아는 그 이후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아론을 폐위시키고 수체아바에서 알렉산드렐을 왕위에 옹립하면서 헝가리의 추가적인 개입을 받았다. 페트루 아론의 통치는 또한 몰다비아가 오스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시발점이 되었으며, 통치자는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조공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다.[16]
6. 2. 스피시 지역 마을 (1412–1795)
루보브라 조약에 따라 헝가리 왕가는 프라하 그로셴 37,000개의 60배(약 7톤의 순은)에 해당하는 돈을 빌리는 대가로 스피시(지프스) 지역의 16개 소금 생산 마을을 폴란드에 담보로 제공하고, 빚을 갚을 때까지 폴란드에 통합될 권리를 부여했다. 담보로 제공된 마을은 다음과 같다.[1]
- 비아와
- 루비차
- 비에르즈보프
- 스피스카 소보타
- 포프라트
- 스트라제
- 스피스키 블라히
- 노바 비에시
- 스피스카 노바 베스
- 루시킨코프체
- 비엘카
- 스피스키 포드그로드지에
- 마체요프체
- 트바르조네
6. 3. 시에비에르츠 공국 (1443–1795)
벤체슬라우스 1세는 1443년 크라쿠프 대주교인 즈비그니에프 추기경 올레시니츠키에게 6,000 실버 그로트에 시에비에시 공작령을 매각했다.[17] 이후 시에비에시 공작령은 소폴란드 주와 연관된 것으로 간주되었으며,[18] 소폴란드에 있는 유일한 교회 공작령이었다.6. 4. 바르미아 주교령 (1466–1772)
토룬 평화 이후 바르미아 주교령[19](Biskupie Księstwo Warmińskiepl[20])은 폴란드 왕국의 보호령이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일부가 되었다(1466년-1772년).[21] 바르미아 주교령은 준독립적인 교회 주권 국가로, 바르미아 대교구의 관할 주교가 통치했다.6. 5. 라우엔부르크와 부토프 (1637-1772)
포메라니아 가문의 마지막 후손인 보기슬라프 14세가 1637년 후손 없이 사망하면서, 라우엔부르크와 부토프는 다시 폴란드 왕국 왕관령의 ''지에미아''(영토)가 되었다. 1641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포메라니아 보이보드십에 속하게 되었다. 1657년 비드고슈치 조약은 벨라우 조약을 수정했는데, 이에 따라 스웨덴-폴란드 전쟁에서 스웨덴 제국에 맞서 싸운 대가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에게 이전과 같은 유리한 조건으로 라우엔부르크와 부토프가 주어졌다. 라우엔부르크와 부토프는 1772년 폴란드 분할 전까지 공식적으로 폴란드 봉토였으며, 이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이 영토를 프로이센에 합병했고, 1773년 바르샤바 조약으로 이전 조건은 무효화되었다.[22]6. 6. 쿠를란트와 세미갈리아 공국 (1562–1791)
쿠를란트와 세미갈리아 공국은 1562년부터 1791년까지 발트 지역에 존재했던 공국으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봉신국이었다가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일부가 되었다.[1] 1791년에 완전한 독립을 얻었지만, 1795년 3월 28일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어 폴란드 분할에 포함되었다.[1] 이 공국은 토바고와 감비아에 식민지를 가지고 있었다.[1]6. 7. 프로이센 공국 (1569–1657)
프로이센 공국은 1525년부터 1701년까지 프로이센 동부에 위치했던 공국이었다. 1525년 종교 개혁 시기, 튜튼 기사단의 단장인 호엔촐레른의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 튜튼 기사단령을 세속화하여 프로이센의 알브레히트 공작이 되었다. 쾨니히스베르크(칼리닌그라드)를 수도로 삼았던 그의 공국은 1466년 10월 토리움 제2차 평화조약 이후 튜튼 프로이센이 그랬던 것처럼 폴란드 왕국 왕관령의 봉토로 세워졌다. 이 조약은 13년 전쟁을 종결했고, 기사단이 영토의 서쪽 절반에 대한 권리를 폴란드 왕관에 양도하도록 규정했으며, 이 지역은 왕립 프로이센이 되었고, 기사단 영토의 나머지 부분은 폴란드 왕국의 봉토가 되었다.17세기에 폴란드 국왕 얀 2세 카지미에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에게 스웨덴에 대항하는 폴란드를 지원하는 대가로 프로이센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으려 했다. 1657년 7월 29일, 그들은 벨라우 (Welawa|벨라바pl; 현재 즈나멘스크)에서 벨라우 조약을 체결했는데, 이 조약을 통해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이전의 스웨덴-프로이센 동맹을 포기했고 얀 카지미에시는 프로이센 공국에 대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완전한 주권을 인정했다.[23] 완전한 주권은 1701년 프로이센 공국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시키는 데 필요한 전제 조건이었다.
7. 보호령
오스만 제국과 크림 타타르족의 팽창에 맞서 카파는 1462년 폴란드 왕국에 보호를 요청했지만,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1]
7. 1. 카파
1462년, 오스만 제국과 크림 타타르족의 팽창에 맞서 카파는 폴란드 왕국의 카지미에시 4세 국왕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폴란드 국왕은 이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실제 위협이 닥쳤을 때 카파는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1]참조
[1]
웹사이트
Gaude Mater Polonia Creation and History
http://a-pesni.org/p[...]
2017-11-14
[2]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Volume 1: The Origins to 1795
Oxford University Press
[3]
서적
Dynastia Jagiellonów w Polsce
2011
[4]
서적
The Historians' History of the World: Poland, The Balkans, Turkey, Minor eastern states, China, Japan
https://archive.org/[...]
Outlook Company
2017-11-19
[5]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land: Jerzy Lukowski and Hubert Zawadzki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11-19
[6]
서적
Moyers on Democracy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Digital, Inc
2017-11-19
[7]
서적
The Golden Age of Polish Philosophy: Kazimierz Twardowski's Philosophical Legacy
https://books.google[...]
Springer
2017-11-19
[8]
서적
Europe: A History
https://archive.org/[...]
Oxford University Press
[9]
간행물
The Corsican constitution of Pasquale Paoli (1755–1769)
1973-07
[10]
서적
Constitutions, elections, and legislatures of Poland, 1493–1977: a guide to their history
https://books.google[...]
EJJ Books
2017-11-19
[11]
서적
Disorderly liberty: the political culture of the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 in the eigh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2017-11-19
[12]
서적
Constitutions, elections, and legislatures of Poland, 1493–1977: a guide to their history
https://books.google[...]
EJJ Books
2017-11-19
[13]
서적
The constitutions of Poland and of the United States: kinships and genealogy
American Institute of Polish Culture
[14]
서적
Historia panstwa i prawa polskiego
Paristwowe Wydawnictwo Naukowe
[15]
문서
Henryk Wisner, Rzeczpospolita Wazów. Czasy Zygmunta III i Władysława IV. Wydawnictwo Neriton, Instytut Historii PAN, Warszawa 2002, p. 26 #REDIRECT #REDIRECT
[16]
문서
"The Annals of Jan Długosz"
[17]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18]
웹사이트
Zygmunt Gloger Geografia historyczna ziem dawnej Polski
http://literat.ug.ed[...]
[19]
서적
History of the Polish Reformation
https://books.google[...]
Fortress Press
[20]
웹사이트
Biskupie Księstwo Warmińskie @ Google books
https://books.google[...]
[21]
서적
A Concise History of Poland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2]
간행물
Translation of a treaty between the King of Prussia and the King and Republic of Poland
https://books.google[...]
Edinburgh
[23]
간행물
Rivalität der Magnaten und Bedrohung der Souveränität
Warszawa: Wydawnictwo Interpress
[24]
서적
"Trade, Diplomacy and Cultural Exchange: Continuity and Change in the North"
https://books.google[...]
[25]
서적
Historia Polski Średniowiecze
Kraków
[26]
웹인용
Gaude Mater Polonia Creation and History
http://a-pesni.org/p[...]
2017-11-14
[27]
서적
God's Playground A History of Poland: Volume 1: The Origins to 1795
Oxford University Press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