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흐람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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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흐람 1세는 사산 제국의 세 번째 샤(Shah)로, 샤푸르 1세의 아들이다. 그는 조로아스터교를 장려하고 마니교를 탄압했으며, 카르티르와 협력하여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를 처형했다.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팔미라 제국과 갈등이 있었으며,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와 휴전 협정을 맺었으나,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되면서 침공 위협을 겪었다. 바흐람 1세는 276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바흐람 2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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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람 1세 | |
---|---|
기본 정보 | |
이름 (팔라비어) | Bahram I 베흐람 1세 |
칭호 | 이란과 비이란의 왕 중 왕 |
왕조 | 사산 왕조 |
종교 | 조로아스터교 |
아버지 | 샤푸르 1세 |
후계자 | 바흐람 2세 |
자녀 | 바흐람 2세 호르미즈드 1세 쿠샨샤 |
통치 기간 | |
즉위 | 271년 6월 |
사망 | 274년 9월 |
선대 군주 | 호르미즈드 1세 |
화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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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바흐람 1세는 사산 제국의 샤 샤푸르 1세의 아들이었다. 타바리의 저서에는 호르미즈드 1세의 아들이자 샤푸르 1세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으나,[1] 샤푸르 1세의 팔라비어 비문에는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호르미즈드-아르다시르, 나르세, 샤푸르 메샨샤 세 명의 남동생을 두었다. 샤푸르의 아들들 중 맏아들이었음에도, 그의 어머니는 지위가 낮은 첩이었기 때문에 바흐람 1세는 동생들보다 서열이 낮았다.
왕자들 중에서 바흐람의 취급은 제일 낮았으며, 샤푸르 1세의 비문 중 그의 이름만은 성화(聖火)에 의해 공표되지 않았다. 또한 그가 통치하던 길란은 아르메니아,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 남방의 비옥한 카라케네(메세네), 제국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카 등에 비해 전략적 중요성이 낮은 지역이었다.
샤푸르의 통치 기간 동안, 바흐람 1세는 카스피 해 남서 해안에 위치한 길란 지역의 총독으로 "길란 샤"("길란의 왕")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이란의 페르세폴리스 근처 나크셰 로스탐에 있는 카바예 자르토슈트 벽에 새겨진 비문에 언급되어 있다.
바흐람이라는 이름은 신의 이름을 붙여 가호를 받는 테오포릭 네임(:en:Theophoric name)이다. 팔라비어로 바흐람(Varahrän)은 승리를 뜻하며, 조로아스터교의 베레스라그나(Vərəθraγna)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파르티아 제국 시대에 이 신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퍼진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와 동일시되었다.
바흐람 1세는 나그쉐 라쟈브(:en:Naqsh-e Rajab)에 있는 아르다시르 1세의 대관식 기념비에 처음 등장하는데, 아르다시르나 아후라 마즈다보다 작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베레스라그나 신 앞에서 인사를 하여 경의를 표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멧돼지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인장이나 왕관에 붙여 승리의 야자타(아마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베레스라그나로 생각된다)와의 연결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4명의 왕자들 중에서 바흐람은 가장 신앙심이 깊었으며, 조로아스터교도로서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형인 호르미즈드 1세가 급사했을 때, 다음 황제는 카라케네의 왕인 삼남 샤푸르나 사카의 왕인 사남 나르세가 유력했다. 그러나 바흐람은 마니교의 전파를 우려하는 조로아스터교단과 협력하여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나르세 1세와 합의를 보았는데, 나르세는 아르메니아 총독직을 받는 대가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르세는 여전히 바흐람을 찬탈자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2. 1. 출생과 가계
바흐람 1세는 샤푸르 1세의 차남으로 기록되어 있다.[1] 그러나 아바스 왕조의 역사가 타바리는 호르미즈드 1세의 아들이자 샤푸르 1세의 손자로 기록했다.바흐람 1세를 낳은 왕비는 다른 왕자들(호르미즈드 1세, 샤푸르, 나르세스 1세)을 낳은 왕비보다 지위가 낮은 첩으로 추정된다. 샤푸르 1세의 비문에서 바흐람의 이름만이 성화(聖火)로 공표되지 않았고, 그가 통치하던 길란은 아르메니아, 크테시폰 남쪽의 카라케네(메세네), 제국 동부의 사카 등에 비해 전략적 중요성이 낮았다.
바흐람은 신의 이름을 붙여 가호를 받는 테오포릭 네임(:en:Theophoric name)이다. 팔라비어로 바흐람(Varahrän)은 승리를 뜻하며, 조로아스터교의 베레스라그나(Vərəθraγna) 신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이 신은 파르티아 제국 시대에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퍼진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와 동일시되었다.
바흐람 1세는 나그쉐 라쟈브(:en:Naqsh-e Rajab)에 있는 아르다시르 1세의 대관식 기념비에 처음 등장하는데, 아후라 마즈다보다 작은 인물로 묘사되며, 베레스라그나 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멧돼지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인장이나 왕관에 붙여 승리의 야자타(베레스라그나로 추정)와의 연결을 강화하려 했다.
4명의 왕자들 중 바흐람은 가장 신앙심이 깊은 조로아스터교도였다. 형인 호르미즈드 1세가 급사했을 때, 바흐람은 마니교의 전파를 우려하는 조로아스터교단과 협력하여 제위에 올랐다.
2. 2. 길란 총독 시절
샤푸르 1세의 팔라비어 비문에 따르면, 바흐람 1세는 샤푸르 1세의 차남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아바스 왕조의 역사가 타바리의 저서 《예언자들과 제왕들의 서(Ta'rīkh Rusul wa al-Mulūk)》에서는 호르미즈드 1세의 아들, 즉 샤푸르 1세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다.[1]바흐람 1세를 낳은 왕비는 다른 세 명의 왕자(호르미즈드 1세, 샤푸르 1세, 나르세스 1세)를 낳은 왕비와 비교해 지위가 낮은 첩이었다고 짐작된다. 왕자들 중에서 바흐람의 취급은 제일 낮았으며, 샤푸르 1세의 비문 중 그의 이름만은 성화(聖火)에 의해 공표되지 않았다. 또한 바흐람이 통치하던 길란은 아르메니아, 제국의 수도 크테시폰 남방에 펼쳐진 비옥한 카라케네(메세네), 제국 동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카 등에 비해 전략적 중요성이 낮은 지역이었다.[1]
바흐람이라는 이름은 신의 이름을 붙여 가호를 받는 테오포릭 네임(:en:Theophoric name)이다. 팔라비어로 바흐람(Varahrän)은 승리라는 뜻이지만, 이것은 본래 조로아스터교의 베레스라그나(Vərəθraγna)신의 어형이다. 파르티아 제국 시대의 이 신은 메소포타미아를 중심으로 퍼진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와 동일시되었었다.[1]
바흐람 1세의 모습이 처음 언급된 것은 나그쉐 라쟈브(:en:Naqsh-e Rajab)에 있는 아르다시르 1세의 대관식 기념비다. 여기에서는 아르다시르나 아후라 마즈다보다 작은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베레스라그나 신 앞에서 인사를 하여 경의를 표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멧돼지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인장이나 왕관에 붙이고 있는데, 이는 승리의 야자타(아마 전쟁의 승리를 상징하는 베레스라그나로 생각된다)와의 연결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1]
4명의 왕자들 중에서 바흐람은 가장 신앙심이 깊었으며, 조로아스터교도로서 이름을 높이고 있었다. 형인 호르미즈드 1세가 급사했을 때, 다음 황제는 카라케네의 왕인 삼남 샤푸르나 사카의 왕인 사남 나르세스 1세가 유력했다. 그러나 바흐람은 혈통의 약점을 마니교 전파를 우려하는 조로아스터교단과 협력하여 극복하고 제위에 오를 수 있었다.[1]
바흐람 1세는 사산 제국의 두 번째 샤인 샤푸르 1세의 장남이었다. 그는 호르미즈드-아르다시르, 나르세, 샤푸르 메샨샤 세 명의 남동생을 두었다. 샤푸르의 아들들 중 맏아들이었음에도, 바흐람 1세는 동생들보다 서열이 낮았는데, 아마도 그의 어머니의 낮은 신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부수적인 왕비이거나 첩이었다. 샤푸르의 통치 기간 동안, 바흐람 1세는 카스피 해 남서 해안에 위치한 새로 정복한 길란 지역의 총독으로 일했다. 그는 "길란 샤"("길란의 왕")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남이란의 페르세폴리스 근처 나크셰 로스탐에 있는 카바예 자르토슈트 벽에 새겨진 비문에 언급되어 있는데, 샤푸르 1세는 자신의 아들들의 이름과 칭호를 언급하여 그들을 칭찬하기 위해 이 비문을 만들었다.
2. 3. 즉위 과정
바흐람 1세는 사산 제국의 두 번째 샤인 샤푸르 1세의 차남이었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왕위 계승 서열은 낮았다. 타바리의 저서에는 호르미즈드 1세의 아들, 즉 샤푸르 1세의 손자로 기록되어 있어 샤푸르 1세의 팔라비어 비문과는 차이를 보인다.[1]바흐람 1세는 카스피 해 남서 해안에 위치한 길란 지역의 총독으로 "길란 샤"("길란의 왕")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길란은 아르메니아, 크테시폰 남방의 카라케네(메세네), 사카 등에 비해 전략적 중요성이 낮은 지역이었다.[1]
바흐람이라는 이름은 신의 이름을 붙여 가호를 받는 테오포릭 네임이다. 팔라비어로 바흐람(Varahrän)은 승리라는 뜻이며, 조로아스터교의 베레스라그나 신과 관련이 있다. 파르티아 제국 시대에 이 신은 헤라클레스와 동일시되었다.[1]
바흐람 1세는 나크셰 라자브에 있는 아르다시르 1세의 대관식 기념비에 처음으로 등장하며, 아후라 마즈다보다 작은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는 멧돼지를 모티브로 한 장식을 인장이나 왕관에 붙여 베레스라그나와의 연결을 강화하려 했다.[1]
270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하고 호르미즈드 1세가 계승했지만 1년 만에 사망했다. 바흐람 1세는 왕위 계승 후보로 고려되지 않았지만, 조로아스터교 사제 카르티르의 도움으로 즉위했다. 그는 마니교의 전파를 우려하는 조로아스터교단과 협력하여 왕위에 올랐다.[1]
바흐람 1세는 나르세 1세와 합의를 보았는데, 나르세는 아르메니아 총독직을 받는 대가로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르세는 여전히 바흐람을 찬탈자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3. 종교 정책
바흐람 1세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위 성직자인 모우바단 모우바드[1] 카르티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마니교 창시자 마니를 처형하고 마니교를 박해했다. 마니는 샤푸르 1세에게 자신의 사상을 설명한 『샤부르간』(Šābuhrgān|샤부르간fa)이라는 저서를 헌정하기도 했으나, 바흐람 1세의 통치 정책상 마니교 박해는 필연적인 결과였다.
당시 마니교는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었다. 신교 지도자는 계층 구조를 갖추고 많은 성직자에 의해 지지받았다. 12사도, 72명의 주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조로아스터교 성직자에게 끌려가 처형되거나 처벌을 받았다.
3. 1. 조로아스터교 국교화
샤푸르 1세를 포함한 이전 사산 왕조의 샤들은 제국 내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소수 종교에 대해 관용 정책을 폈다. 샤푸르 1세는 자신의 종교의 가르침을 존경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격려했지만, 유대교, 기독교, 불교, 힌두교 신자들이 자유롭게 종교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1] 그는 또한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에게 우호적이었으며, 마니는 자유롭게 설교할 수 있었고 샤푸르의 군사 원정에 호위병으로 참여하기도 했다.[1] 바흐람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로아스터교 사제의 권위가 높아지고 카르티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다. 마니가 군디샤푸르시에 도착했을 때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동이 일어났다. 카르티르와 다른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항의를 받은 바흐람 1세는 마니를 투옥하도록 설득당했고, 마니는 274년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마니의 죽음 이후 카르티르와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은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퍼뜨리기 위해 왕국의 종교적 소수자들을 공격하며 마니의 추종자들을 박해했다.[1]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에게 마니는 유대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제시하는 이질적인 철학자이자 위협적인 이교도로 여겨졌다.[1] 바흐람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르티르는 조로아스터교 국교의 토대를 마련했으며,[1] 이로 인해 바흐람은 사산조 기록에서 "자비롭고 가치 있는 왕"으로 칭송받았다. 그럼에도 바흐람 1세는 그의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미지근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3. 2. 마니교 박해
바흐람 1세는 조로아스터교 최고위 성직자인 카르티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마니교 창시자 마니를 처형하고 마니교를 박해했다. 마니는 샤푸르 1세에게 자신의 사상을 설명한 『샤부르간』(Šābuhrgān|샤부르간fa)이라는 저서를 헌정하기도 했으나, 바흐람 1세의 통치 정책상 마니교 박해는 필연적인 결과였다.3. 2. 1. 마니의 처형
조로아스터교 최고위 성직자인 카르티르는 바흐람 1세과 협력하여 마니교 창시자인 예언자 마니를 처형했다.[1] 투루판 시에서 발견된 마니교 기록에 따르면, 마니는 처형되기 전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후대의 마니교도들이 남긴 종교 문서나 전설에는 마니의 죽음을 순교로 미화하거나 과장한 내용이 많아, 마니의 가죽을 벗겼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아라비아어 일화집에는 짚으로 채워진 마니의 가죽이 샤푸르 도시 성문에 매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조로아스터교단의 도움으로 왕위에 오른 바흐람 1세에게 마니교 박해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전까지 별다른 제재를 받지 않았던 마니교는 당시 널리 퍼져 있었으나, 대부분 박해를 받아 처형되었다.
샤푸르 1세를 포함한 이전 사산 왕조의 왕들은 제국 내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소수 종교에 대해 관용 정책을 펼쳤다. 샤푸르 1세는 자신의 종교를 존중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격려했지만, 유대교, 기독교, 불교, 힌두교 신자들이 자유롭게 종교를 믿는 것을 허용했다. 그는 마니교 창시자인 마니에게도 우호적이어서, 마니는 자유롭게 설교하고 샤푸르의 군사 원정에 동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흐람 1세가 왕위에 오르고 조로아스터교 사제의 권위와 카르티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마니가 군디샤푸르시에 도착했을 때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와 같은 소동이 일어났다. 카르티르와 다른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항의를 받은 바흐람 1세는 마니를 투옥하도록 설득했고, 마니는 274년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마니가 죽은 후, 카르티르와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전파하기 위해 왕국의 종교적 소수자들을 공격하며 마니의 추종자들을 박해했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에게 마니는 유대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제시하는 이질적인 철학자이자 위협적인 이교도로 여겨졌다. 바흐람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르티르는 조로아스터교 국교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이로 인해 바흐람은 사산조 기록에서 "자비롭고 가치 있는 왕"으로 칭송받았다.
마니교는 그 당시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었다. 신교 지도자 계층 구조가 구성되어 많은 성직자에 의해 지지받았다. 12사도, 72명의 주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조로아스터교 성직자에게 끌려갔다. 카르티르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는 마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마니교 추종자는 처형되거나 어떤 처벌을 받았다.
3. 2. 2. 마니교도 박해
바흐람 1세는 조로아스터교의 모우바단 모우바드[1] 카르티르와 협력하여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를 처형했다. 투르판 시에서 출토된 마니교 기록에 따르면, 마니는 형 집행 전 감옥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후세 마니교도들의 종교 문서나 전설에는 마니의 죽음을 순교로 과장하거나 윤색한 내용도 많아, 가죽이 벗겨진 마니가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아라비아어 일화집에는 짚이 채워진 마니의 가죽이 샤푸르 도시 성문에 매달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조로아스터교단의 도움으로 즉위한 바흐람 1세에게 마니교 박해는 필연적이었다. 당시 널리 퍼져 있던 마니교는 대부분 박해받아 처형되었다. 샤푸르 1세를 포함한 이전 사산 왕조의 샤들은 제국 내 소수 종교에 대해 관용 정책을 폈지만, 바흐람 1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조로아스터교 사제의 권위와 카르티르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이러한 상황은 바뀌었다.
마니가 군디샤푸르시에 도착했을 때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동이 일어났다. 카르티르와 다른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의 항의를 받은 바흐람 1세는 마니를 투옥하고 274년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마니의 죽음 이후, 카르티르와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은 왕국의 종교적 소수자들을 공격하며 마니의 추종자들을 박해했다.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에게 마니는 유대교, 불교,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제시하는 이질적인 철학자이자 위협적인 이교도로 여겨졌다.
바흐람 1세의 지원을 받은 카르티르는 조로아스터교 국교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이로 인해 바흐람은 사산조 기록에서 "자비롭고 가치 있는 왕"으로 칭송받았다. 그럼에도 바흐람 1세는 그의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미지근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다.
마니교는 그 당시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었다. 신교 지도자의 계층 구조가 구성되어 많은 성직자에 의해 지지받았다. 12사도, 72명의 주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성직자에게 끌려갔다. 카르티르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는 마니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마니교의 추종자는 처형되거나 어떤 처벌을 받았다.
4. 대외 관계
바흐람 1세는 로마 제국과의 관계에서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가 로마를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자,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272년 팔미라를 공격했다. 바흐람 1세는 제노비아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했으나, 제노비아는 패배하여 로마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바흐람 1세는 로마에 평화를 제의하여 휴전 협정을 맺었고, 274년 로마에서 열린 개선식에 페르시아 사절이 참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275년 로마가 다시 사산 왕조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아우렐리아누스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 1. 로마 제국과의 관계
로마 제국은 샤푸르 1세와 호르미즈드 1세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바흐람 1세를 강력한 군주로 인식하지 않았다. 바흐람 1세는 로마와의 외교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팔미라 제국의 제노비아가 세력을 확장하자,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272년 팔미라를 공격했다. 바흐람 1세는 제노비아의 요청으로 군대를 파견했지만, 제노비아는 패배하고 로마군에 체포되었다.이후 바흐람 1세는 로마에 평화를 제의하여 휴전 협정을 맺었다. 274년 로마에서 열린 개선식에는 페르시아 사절이 참석해야 했다. 그러나 275년 로마는 다시 사산 왕조에 전쟁을 선포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부하들의 음모로 암살당했다.
4. 1. 1. 팔미라 제국과의 갈등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 남부 경계에 있던 주요 도시 팔미라에서는 오데나투스(:en:Septimius Odaenathus)의 아내 제노비아가 어린 아들 바발라투스(:en:Vaballathus)를 아우구스투스로 칭했다. 제노비아는 자신을 아우구스타로 칭하며 팔미라 제국의 섭정 지위를 굳히고, 지배 영역을 로마 제국 근처까지 확대시켰다. 272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 토벌을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제노비아는 사산 왕조에 지원을 요청했고, 바흐람 1세는 병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제노비아는 전투에서 패배하고 사산 왕조로 망명하려 했지만, 유프라테스강 근처에서 로마군에게 포박되었다.바흐람 1세는 로마 황제에게 평화를 제의하며 공사를 로마에 파견했고, 아우렐리아누스는 이를 수락하여 휴전 협정을 맺었다. 274년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열었을 때, 페르시아는 로마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절을 파견해야 했다.
275년, 로마는 사산 왕조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아우렐리아누스가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에 이르렀을 때 부하들의 음모로 비잔티움과 페린투스(:en:Perinthus) 사이에서 암살당했다.
4. 1. 2. 아우렐리아누스와의 관계
로마 제국 시리아 속주의 남부 경계 지대의 주요 도시 팔미라에서는 오데나투스(:en:Septimius Odaenathus)의 아내 제노비아가 어린 아들인 바발라투스(:en:Vaballathus)를 아우구스투스(인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고 황제라는 의미)라고 칭했다. 그와 동시에 스스로는 아우그스타(아우구스투스의 여성형)라고 자칭하면서 팔미라 왕국의 섭정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지배 영역을 로마 제국의 근처까지 확대시켰다. 결국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아누스는 272년에 팔미라 토벌을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이 사실을 들은 제노비아는 사산 왕조에 지원을 요구하였고, 바흐람 1세는 병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싸움에 진 제노비아는 퇴각하여 사산 왕조에 망명을 하려 하였지만, 유프라테스강 근처에서 로마군에게 포박되었다.바흐람 1세는 로마 황제에게 평화를 제의하기 위해 공사를 로마에 파견했으며, 아우렐리아누스는 바흐람 1세의 제의를 받고 휴전 협정을 수락하였다. 또한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에서 개선식을 실시한 274년에 페르시아는 로마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개선식에 사절을 파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275년에 로마는 사산 왕조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아우렐리아누스가 보스포루스 해협 근처에 다다랐을 때 부하들 중엔 원정을 저지하려는 음모가 조장되었다. 결국 아우렐리아누스는 비잔티움과 페린투스(:en:Perinthus) 사이의 진지에 도달했을 때 암살당했다.
5. 주화, 외모 및 습관
바흐람 1세의 치세 동안 주화 뒷면은 샤푸르 1세 통치 기간에 주조된 형태로 바뀌었는데, 두 명의 시종이 불의 제단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었다.[1] 바흐람 1세의 주화 앞면에는 방사형 스파이크로 장식된 머리 장식인 미트라의 독특한 왕관이 묘사되어 있다. 바흐람의 주화는 박트리아의 발흐에서 주조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이전 쿠샨 제국 영토에서 주조된 최초의 제국 사산 주화(즉, 쿠샤노-사산이 아님)이며, 바흐람 1세 치하에서 해당 지역에 대한 직접적인 사산 통치를 보여준다. 소실된 ''사산 왕들의 초상화의 서''는 바흐람 1세를 "오른손에는 창을 들고 왼손에는 칼을 짚은 채 서 있고, 붉은 가운과 바지를 입고 하늘색 지구본이 얹힌 금색 왕관을 쓰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다.
바흐람 1세는 전투, 사냥, 연회를 즐겼으며, 이를 정의로 여겼다.
6. 암각 부조
아르다시르 1세와 샤푸르 1세의 선례를 따라, 바흐람 1세는 즉위 모습을 암각 부조로 새겼다. 이 부조는 그가 말을 타고 조로아스터교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왕권을 상징하는 보관을 받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아후라 마즈다 역시 말을 탄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부조에는 중세 페르시아어 비문이 새겨져 있다. 고고학자 에리히 슈미트에 따르면, 이 부조는 "사산 왕조 암각 조각의 예술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예시"이다. 나르세가 293년에 왕위에 오르자, 그는 바흐람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이 암각 부조를 변경했다.
7. 사망과 계승
276년, 아우렐리아누스가 사망한 지 1년 후 바흐람 1세가 사망했다. 왕제인 나르세 1세와 당시 10세 초반이었던 왕자 바흐람 2세 사이에는 불안한 기류가 흘렀다. 이미 바흐람 1세 생전에 바흐람 2세가 후계자로 지명되었지만, 나르세 1세는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마법사 카르티르와 귀족들의 지지를 얻은 바흐람 2세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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