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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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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간의 관계를 재정립한 역사적 합의이다. 이 타협은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제국 내 민족주의 운동이 격화된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타협의 주요 내용은 헝가리에 자치권을 확대하여 헝가리 의회를 재건하고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외교, 국방, 재정 분야에서는 이중 구조를 갖추어 공통 외무부, 국방부, 재무부를 설치했다.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국가 채무의 상당 부분을 부담했으며, 황제는 군사, 외교, 비상사태에 대한 광범위한 권한을 유지했다. 이 타협은 헝가리 내 소수 민족의 불만을 야기하고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했으며, 아일랜드 민족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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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2. 역사

중세 시대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는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이었고, 헝가리 왕국은 제국 외부에 있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이후 두 지역은 동군연합 관계를 맺었지만 헝가리는 독자적인 정부, 의회, 법률을 유지하며 상당한 자치권을 누렸다.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헝가리의 독자적 지위는 유지되었으나, 1840년대 유럽에 불어닥친 자유주의의 영향으로 1848년 헝가리 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 결과 헝가리는 기존에 누리던 독자적인 재정권을 박탈당하는 등 자치권에 제약을 받게 되었다.

19세기 중반,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 통일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의 연이은 패배로 큰 타격을 입었으며, 외교적으로도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 악화 등으로 국제적 지위가 크게 하락했다. 이러한 외부적 위기 상황 속에서,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 제국 내부에서는 여러 민족들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며 활발한 민족 운동을 전개했다. 연방제 개편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나, 기존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독일인 지배 계층과 국체 변화를 우려한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결국 제국 지도부는 제국 내 제2의 주요 민족인 마자르족(헝가리인)과의 협력을 통해 다른 민족들의 요구를 억누르고 제국을 유지하는 방안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독일인과 헝가리인 사이의 정치적 타협이 바로 1867년의 '''아우스글라이히''' 체제로 이어졌다.

2. 1. 중세 시대 배경

중세 시대에 오스트리아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 내의 자치적인 영방이었던 반면, 헝가리 왕국은 신성 로마 제국 외부에 위치한 독립적인 주권 국가였다.

전환점은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찾아왔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가 헝가리 군대를 격파하면서, 루이 2세 국왕은 후계자 없이 전사했다. 이로 인해 헝가리 영토는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의해 분할 통치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루이 2세의 매제였던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는 1526년 12월, 포조니(현재의 브라티슬라바)에서 열린 잔여 의회에 의해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되었다.[8][9] 이후 오스만 제국은 사보이 공자 외젠이 이끄는 국제적인 서방 기독교 세력의 도움으로 1686년에서 1699년 사이에 헝가리에서 축출되었다.

1526년부터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수립되기 전까지, 헝가리는 헝가리 국왕으로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았지만, 명목상 및 법적으로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다른 영토와는 분리된 상태를 유지했다. 헝가리는 다른 합스부르크 지배 지역과 달리 오래된 역사적 헌법을 가지고 있었으며,[10] 이는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13세기부터 의회의 권위를 크게 증대시키는 역할을 했다. 특히 1222년 금인칙서는 유럽 군주의 권력에 헌법적 제한을 가한 초기의 중요한 사례로,[11] 이는 잉글랜드의 존 국왕이 마그나 카르타 서명을 강요받았던 것과 유사하게 헝가리 국왕에게 요구되었다. 헝가리 의회는 12세기부터 중요한 정치 기구였으며, 1290년대부터는 왕국의 최고 입법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12]

이러한 헝가리의 독자성은 여러 측면에서 나타났다. 헝가리의 행정 및 정부 구조는 1848년 혁명 이전까지 오스트리아의 행정 및 정부와 분리되어 있었다. 헝가리는 프레스부르크(포조니)에 위치한 헝가리 부총리 평의회(Gubernium)와 의 헝가리 왕실 재상청을 통해 주로 통치되었으며, 이는 오스트리아 제국 재상청과는 독립적이었다.[18] 또한, 1526년부터 1851년까지 헝가리 왕국은 자체적인 관세 국경을 유지하여 다른 합스부르크 지배 영토의 통합 관세 시스템과 분리되어 있었다. 헝가리의 오래된 헌법과 공법 조항들은 헝가리가 다른 국가에 통합되는 것을 법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19] 이론적으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 전쟁 중인 강대국과 독자적으로 평화를 맺을 수도 있었다. 이는 의회가 전쟁과 평화 선포에 대한 합법적 권리를 가졌기 때문이며, 국왕이 의회를 소집하지 않는 것은 맹세 위반으로 간주될 수 있었다.[20]

합스부르크 군주에게 있어 헝가리의 높은 자치 수준, 특히 자치 현의 존재는 절대주의 구축에 큰 장애물이었다. 현은 지역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으며, 위헌적인 왕실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로 인해 빈에서 내려오는 왕명 중 상당수가 합법성에 의문을 제기받을 수 있었다.[21]

또한, 헝가리에서는 국왕의 통치가 즉위와 동시에 시작되는 서유럽 국가들과 달리, 대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대관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왕국은 주인 없는 상태로 간주되었다. 오랜 동군연합 기간 동안에도 합스부르크 군주는 헝가리 국왕으로 정식 대관식을 치르기 전까지는 헝가리 영토 내에서 법률을 공포하거나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22][23][24] 1222년 금인칙서 이후 모든 헝가리 군주는 대관식 선서를 통해 국가의 헌법적 합의를 지키고, 신민의 자유와 영토의 온전성을 보존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25]

2. 2. 오스트리아 제국 성립과 헝가리 혁명

중세 시대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아래 있었고, 헝가리 왕국신성 로마 제국의 권역 밖에 있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 군대가 헝가리 군대를 격파하면서 헝가리 영토는 합스부르크 군주국과 오스만 제국에 의해 분할되었고, 헝가리 왕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왕국은 동군연합 관계에 있었지만, 헝가리는 독자적인 정부, 의회, 법률을 유지하며 공통의 군주 아래 느슨하게 통합되어 있었다.

1804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수립되면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공식적인 동군연합 관계를 맺게 되었다. 1848년, 유럽 전역에 퍼진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헝가리에서는 1848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혁명은 러시아 제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30]

혁명 실패 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권력이 회복되면서 헝가리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사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30] 1849년 3월 7일,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제국 전체에 통합 헌법인 오스트리아 3월 헌법을 공포했다.[26] 이 새로운 중앙 집권적 헌법은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에 신 절대주의를 도입하여 황제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부여했으며,[27] 헝가리의 역사적 헌법과 영토 통합을 부정하고 전통적인 입법 기관인 헝가리 의회를 폐지하려 했다.[28][29]

헝가리 사회의 모든 측면은 오스트리아 정부의 면밀한 감시와 통제 하에 놓였다.[31] 독일어가 공공 행정의 공식 언어가 되었고,[32] 교육은 국가 통제하에 놓여 교육 과정이 규정되었으며, 역사는 합스부르크 중심의 관점에서 가르쳐졌다.[33] 헝가리 문화의 보루였던 학술원조차 통제되어 활동이 위축되었다.[34][35][36] 이에 헝가리인들은 소극적 저항으로 대응했으며, 반 합스부르크 및 반 독일 감정이 강하게 나타났다.[37] 또한, 혁명 이후 헝가리의 독립적인 관세 시스템은 폐지되었고, 1851년 10월 1일부터 제국 통합 관세 시스템에 편입되어 독자적인 재정권을 상실했다.[38][39]

2. 3. 아우스글라이히 성립 배경

중세 시대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으며, 헝가리 왕국신성 로마 제국 외부에 존재했다.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하면서 헝가리 영토는 오스만 제국과 합스부르크 군주국에 의해 분할되었고, 헝가리 왕위는 합스부르크 군주국이 계승하게 되었다. 이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수립된 1804년까지 양국은 동군연합 관계를 유지했으며, 헝가리는 독자적인 정부, 의회, 법률을 보유했다.

1848년 헝가리 혁명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으로 발발했으나, 러시아 제국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으로 헝가리는 독자적인 재정권을 박탈당했지만, 그 이상의 구조적 변화는 없었다.

1860년대 들어 오스트리아 제국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크림 전쟁(1853–1856) 시기의 막대한 군비 지출과 이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1859) 및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에서의 연이은 패배는 막대한 국가 부채와 재정 위기를 초래하여 제국을 파산 직전으로 몰고 갔다.[40][42] 이러한 전쟁 패배로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독일 내 주도권을 프로이센에 넘겨주었으며,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 악화 등으로 국제적 지위가 크게 하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국 내 여러 민족들은 자치권 획득과 연방제 도입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제국 내 독일인 지배 계층의 반발과 정치 체제 변화를 두려워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는 연방제 개편 대신, 헝가리인(마자르족)과의 협력을 통해 제국 내 다른 민족들의 요구를 억제하는 길을 선택했다.[41] 이는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다.[42]

헝가리 측에서는 페렌츠 데아크와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 타협을 주도했다. 데아크는 1723년 국사조칙에 근거하여 헝가리의 완전한 내부 독립을 추구하되, 국방 및 외교 문제는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유지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이를 통해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관계에서 안정을 찾고 경제적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44] 제국 재상 보스트가 협상을 신속하게 진행했으며,[45][46] 1867년 5월 29일, 복원된 헝가리 의회는 오스트리아와의 타협안, 즉 아우스글라이히를 비준하였다.[47]

하지만 이 타협은 헝가리 내 극소수 정치 엘리트(당시 투표권은 인구의 8% 미만)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다수에게는 1848년 혁명 정신과 독립 전쟁 유산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져 헝가리 사회 내부에 깊은 균열을 남겼다.[43]

3. 주요 내용

오스트리아 제국령(치슬라이타니아)과 헝가리 왕국(헝가리 왕관령, 트란스라이타니아)은 각각 자립적인 정부, 의회, 헌법을 가지게 되었다. 황제와 헝가리 국왕을 합스부르크 가의 당주가 겸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유지했다. 이러한 체제는 "헝가리 왕국에 대해 내정상의 지배권을 부여하면서,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불가분 부분임을 승인하게 하는 것"이었다.[70] 그러나 이는 쌍방을 "단순한 동군 연합 형태로 연결한 것은 아니었다".[71] "공통 업무"로서 외교, 군사, 그리고 그와 관련된 재정, 이 세 가지는 "이중 군주국 전체에서 일원적이고 공통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정해져"[72] 여전히 황제가 직접 관할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오스트리아 측의 공식 명칭은 "제국 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여러 왕국과 여러 영방"이었으며, 고유한 이름을 가지지 않았다.

3. 1. 헝가리의 자치권 확대와 한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 분홍색: 치슬라이타니아; 녹색: 트란스라이타니아; 갈색: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콘도미니엄 (1908년 추가).


1867년 타협을 통해 헝가리는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회복했다. 12세기부터 최고 입법 기관이었던 헝가리 의회가 1849년 이전처럼 재건되었고,[70]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독립적인 의회와 총리가 이끄는 독자적인 정부를 갖게 되었다. 헝가리 왕국 영토에서는 헝가리의 역사적 헌법이 복원되었으며, 헝가리의 법률 제도와 법률이 다시 시행되었다.[50] 이는 타협 협상 과정에서 군주가 헝가리 혁명 의회의 4월 법 대부분을 수용한 결과이기도 하다.[50] 또한 전통적으로 독립적이었던 헝가리의 사법 시스템도 복원되었다. 헝가리 왕립 훈베드 군대 역시 복원되었다.[57] 국제 관계에서도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자 독립적으로 국제 상업 조약 및 무역 협정을 체결할 권한을 가졌다.[56]

그러나 이러한 자치권 확대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한계가 존재했다. 일부에서는 이 타협안이 1848년 혁명 이전에 비해 오히려 헝가리의 주권과 자율성을 축소시킨 것이라는 평가도 제기된다. 외교, 군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재정은 "공통 업무"로 지정되어 여전히 황제가 직접 관할했다.[71][72] 이를 위해 외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 공동 재무부 장관이 임명되었지만, 이들은 이원 군주제 전체를 대표하는 제한적인 역할만 수행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전체를 아우르는 공동 의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외교 및 군사 문제는 오스트리아 의회와 헝가리 의회에서 각각 파견된 60명의 대표단이 관리했다. 이 대표단은 각 의회 내 정당 비율을 반영하여 구성되었으나, 회의 중 토론이나 새로운 법안을 제안할 권리가 없었으며, 단지 각자 소속된 의회의 결정을 전달하고 투표하는 역할에 그쳤다.[51] 모든 공동 결정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양측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만 효력을 발휘했다.[51]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에는 공동 시민권이 존재하지 않아 오스트리아 시민 또는 헝가리 시민으로 구분되었으며, 여권도 각각 발행되었다.[53][54] 통화는 공동으로 사용했지만, 재정적으로는 양국이 독립적인 주권을 유지했다.[55]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국가 부채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했다.[59]

군사적으로도 헝가리 왕립 훈베드가 복원되고 오스트리아 측의 제국-왕립 란트베어가 창설되었지만, 양국은 여전히 훨씬 규모가 큰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군의 재정을 함께 부담해야 했다.[57] 공동 국방부가 공동군을 관할했지만, 헝가리 국방부 장관은 헝가리 의회와 총리에게만 종속되었다.[57]

무엇보다 황제-국왕은 여전히 막강한 권한을 보유했다. 군대의 구조, 조직, 운영에 대한 모든 권한, 고위 관료 임명권, 전쟁 선포권, 군 최고 사령관 지위를 유지했다. 또한 비상사태 선포권, 내각이 의회에 제출할 법안에 대한 사전 승인권,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에 대한 거부권, 의회 해산권, 내각 구성원 임명 및 해임권 등을 가졌다. 이는 1848년 이전과 비교해도 황제의 권한이 크게 강화된 것으로, 헝가리의 자치권이 명확한 한계 속에서만 인정되었음을 보여준다.

3. 2. 이중 제국의 구조



1867년 타협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치슬라이타니아)과 헝가리 왕국(트란스라이타니아)은 각각 독자적인 정부, 의회, 헌법을 갖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군주가 오스트리아 황제와 헝가리 국왕을 겸임하며 전체적으로 하나의 국가 형태를 유지했다. 이는 헝가리에 내정상의 자치권을 부여하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임을 확인하는 방식이었다.[70] 그러나 단순히 군주만 공유하는 동군 연합과는 달랐는데,[71] 외교, 군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재정이라는 세 가지 "공통 업무"는 이중 군주국 전체에서 일원적으로 처리하도록 정해져 황제가 직접 관할했기 때문이다.[72]

이러한 공통 업무를 위해 공동 외무부 장관, 공동 국방부 장관, 공동 재무부 장관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육군, 해군, 외교와 관련된 비용을 담당했다. 각 지역은 총리가 이끄는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했으며, 헝가리 왕국의 영토에서는 헝가리의 법률 제도와 법률이 다시 시행되었다.[50]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공동 주체였지만 사법권이나 입법권을 갖지 않았고, 공동 의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외교 및 군사와 관련된 공동 사무는 오스트리아 제국 의회와 헝가리 의회에서 각각 파견된 60명의 대표단이 관리했다. 대표단의 구성은 각 의회 내 정당 비율을 정확하게 반영했다. 이 대표단은 회의 중에 토론을 하거나 새로운 법안을 제출할 권리가 없었으며, 각 의회의 결정을 전달하고 투표하는 역할만 수행했다.[51] 모든 공동 결정은 오스트리아 의회와 헝가리 의회의 비준을 거쳐야 각 영토에서 효력을 발생했다.[51] 대표단 회의는 격년으로 비엔나와 부다페스트에서 번갈아 열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공동 외무부가 외교 정책을 담당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외무부 참조)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 시민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시민들은 오스트리아 시민 또는 헝가리 시민으로 분류되었다.[53] 여권 또한 오스트리아 여권과 헝가리 여권으로 분리되어 발급되었고, 공동 여권은 없었다.[54] 국제 조약, 특히 영토 변경과 관련된 평화 조약에서는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이 독립적으로 행동해야 했다.[52]

재정적으로 양측은 공동 통화를 사용했지만 독립적인 주체였다.[55] 공동 재무부는 군대, 해군, 외교 관련 비용 및 지폐 발행만을 담당했으며, 그 외의 모든 지출은 각국의 재무부가 독립적으로 관리했다.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은 오스트리아 총리에게, 헝가리 재무장관은 헝가리 총리에게 각각 보고했다. 타협안의 금융 및 경제 관련 조항, 특히 관세 동맹은 10년마다 재협상하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막대한 국가 부채 중 상당 부분을 떠안게 되었다.[59]

군사적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제국-왕립 란트베어와 헝가리 왕립 훈베드라는 독자적인 군대를 보유했다. 하지만 양측 모두 이들보다 훨씬 규모가 큰 오스트리아-헝가리 공동군의 재정을 함께 부담해야 했다. 공동 국방부가 공동군을 관할했지만, 각국의 란트베어와 훈베드는 해당 국가 국방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57] 헝가리 훈베드는 헝가리 정부의 명시적인 승인이 있어야만 제국군에 합류할 수 있었다.[58] (제국 및 왕립 전쟁부 참조)

이러한 이원적 구조에도 불구하고 황제-국왕은 여전히 강력한 권한을 행사했다. 군대의 구조, 조직, 운영에 대한 모든 권한, 고위 관료 임명권, 선전포고권, 군 최고사령관 지위를 가졌다. 또한 비상사태 선포권, 내각이 의회에 제출할 법안에 대한 사전 승인권, 의회가 통과시킨 법률에 대한 거부권, 의회 해산권, 내각 구성원 임명 및 파면권 등을 보유했다. 이는 1848년 혁명 이전과 비교하더라도 헝가리의 주권과 자율성이 상당히 축소되었음을 보여준다.

3. 3. 외교, 재정, 국방 정책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외교 정책은 공통 외무부가 관할했다. 그러나 공통 시민권은 부여되지 않아 오스트리아 시민과 헝가리 시민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은 각자 별개의 여권을 사용했으며, 공통 여권은 발행되지 않았다.

재정 분야에서는 육군, 해군, 외교 관련 비용과 지폐 발행을 공통 재무부가 담당했으며, 재무부 장관이 총재 역할을 했다. 그 외의 모든 지출은 오스트리아 재무부와 헝가리 재무부가 각각 관할했다.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은 오스트리아 황제의 명령을, 헝가리 재무장관은 헝가리 총리의 명령을 따라야 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공통 통화를 사용했지만, 재정적으로는 독립된 주권을 가진 주체였다. 타협안과 관세 동맹에 명시된 금융 및 경제 관련 조항은 10년마다 재협상해야 했다. 한편, 헝가리는 오스트리아 국가 채무의 상당 부분을 부담하게 되었다.

국방 정책은 공통 국방부가 관할했지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각각 독자적인 군대(오스트리아 제국왕실 방위군과 헝가리 왕립 방위군)를 보유했다. 양국 모두 공통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왕실 육군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왕실 해군)의 재정을 부담했다. 공통군은 오스트리아 제국왕실군과 헝가리 왕실군으로 구성되었으나, 공통 국방부는 이들 군대에 대한 직접적인 지휘권은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방부 장관은 공통 국방부의 지휘와 감독을 받았지만, 각각 자국의 의회 명령을 따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제는 군대의 구조, 조직, 운영에 관한 모든 권한, 고위 관료 임명권, 전쟁 선포권을 가졌으며, 육군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이러한 "공통 업무"(외교, 군사, 관련 재정)는 "이중 군주국 전체에서 일원적이고 공통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정해져"[72] 황제가 직접 관할했다.

3. 4. 기타 조항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타협과 관세 동맹에 명시된 금융 및 경제 관련 조항은 10년마다 재협상해야 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공통 통화를 사용했지만, 재정 분야에서는 주권을 가진 독립된 주체였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육군, 해군, 외교 관련 비용과 지폐 발행은 공통 재무부가 담당했으며, 재무부 장관이 총재 역할을 했다. 그 외의 모든 지출은 오스트리아 재무부와 헝가리 재무부가 각각 관할했다. 오스트리아 재무장관은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의 명령을, 헝가리 재무장관은 헝가리 총리의 명령을 따랐다.
  •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국가 채무 중 상당 부분을 부담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에는 공통 시민권이 부여되지 않았으며, 시민은 오스트리아 시민 또는 헝가리 시민으로 분류되었다. 각 시민은 별개의 여권을 사용했고, 공통 여권은 발행되지 않았다.
  • 헝가리 왕국의 영역 내에서는 헝가리의 법률 제도와 법률이 시행되었다.
  • 오스트리아-헝가리는 공통 주체였지만, 사법권과 입법권을 갖지 못했고 공통 의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는 다음과 같은 광범위한 권한을 가졌다.
  • 군사의 구조, 조직, 운영에 관한 모든 권리 및 고위 관료 임명권, 전쟁 선포권 보유. 육군의 최고 사령관 역할 수행.
  • 비상 사태 선포권 보유.
  • 내각의회에 제출하려는 법안에 대한 승인권 및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에 대한 거부권 보유.
  • 의회 해산권 보유.
  • 내각 구성원 임명 및 파면권 보유.

4. 아우스글라이히의 영향과 한계

아우스글라이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치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편했지만, 동시에 여러 복합적인 영향과 한계를 드러냈다. 이 타협은 제국 내 다양한 민족 문제와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으며, 장기적으로 제국의 존립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제국 내 주요 민족 중 하나인 마자르인에게 부여된 특권적 지위는 다른 소수 민족들의 불만을 증폭시키고 민족 갈등을 심화시켰다. 또한, 타협안 자체에 대한 헝가리 내부의 정치적 반발은 지속적인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편, 아우스글라이히가 영국 제국 내 아일랜드의 자치 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제국이 해체되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4. 1. 민족 문제

아우스글라이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민족 문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제국 내에서 독일인 다음으로 큰 민족 집단인 마자르인에게 주어진 특권적 지위는 슬로바키아인과 루마니아인 등 다른 소수 민족들의 불만을 야기했다.[62] 비록 소수 민족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민족 법"이 제정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양측 의회는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접근 방식을 보였다.

결정적으로 타협은 역사적으로 헝가리 왕국 영토 내에 있던 비(非)헝가리계 소수 민족들의 민족적 열망을 자극하는 결과를 낳았다. 대다수의 헝가리인들은 억압 속에서 타협을 받아들였다고 느꼈다. 헝가리 군주는 대관식 서약 때문에 항상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으며, 국가의 오래된 불문 헌법 체제를 유지하고 헝가리 영토의 완전성을 보존하는 데 동의해야 했다. 이 대관식 서약은 1222년 황금 칙서 이후 대관식 과정에서 헝가리 군주에게 의무적으로 부과되었다.[63] 타협 이후 동등한 지위를 얻은 헝가리인들은 "자신들의" 소수 민족에게 인정과 자치를 부분적으로만 허용했다.

헝가리 왕국에서 여러 소수 민족이 증가하는 마자르화의 압력에 직면했다.[64] 또한, 10년마다 발생하는 재협상은 종종 헌법적 위기를 초래했다. 궁극적으로, 타협은 다민족 국가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대국의 이점을 유지하고자 했지만, 새로운 시스템은 이전과 동일한 내부적 압력에 직면했다. 이중 군주국이 민족적 각성을 고려하여 국가를 얼마나 안정시켰고, 상황을 완화했는지 악화시켰는지는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유럽 국가 중 소수 민족의 권리를 선언하고 소수 민족 보호법을 제정한 나라는 헝가리(1849년 및 1868년), 오스트리아(1867년), 벨기에(1898년) 단 세 곳뿐이었다. 반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시대의 다른 유럽 국가들의 법적 시스템은 초등학교, 문화 시설, 공공 행정 사무소 및 법정에서 유럽 소수 민족 언어의 사용을 허용하지 않았다.[61] 그러나 헝가리 역시 이러한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마자르 민족 중심의 동화 정책을 강화하여 민족 갈등을 심화시켰다.

오스트리아 대공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1913년 2월 1일 외무 장관 레오폴트 베르히톨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의 미수복 지구 운동은 슬라브족이 헝가리인들에게 짓밟히는 대신 편안하고 공정하며 좋은 삶을 누릴 수 있다면 즉시 중단될 것"이라고 말하며, 헝가리 내 소수 민족에 대한 불공정한 대우가 제국의 불안정을 야기하고 있음을 시사했다.[65]

4. 2. 정치적 불안정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과 이를 지지하는 자유당은 헝가리 민족 유권자들 사이에서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 정당이 헝가리 의회 선거에서 계속 승리하자 많은 헝가리인들은 불만을 느꼈다. 자유당이 의회 다수당을 유지하는 데에는 소수 민족 유권자들의 지지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자유당은 소수 민족 유권자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지만,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루마니아 등 각 소수 민족을 대표하는 정당들은 정작 해당 민족 유권자들에게 큰 지지를 받지 못했다. 대다수 헝가리 민족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은 헝가리 민족주의 정당 연합은 대부분 야당에 머물렀으나, 1906년부터 1910년까지는 잠시 정부를 구성하기도 했다.[60]

4. 3. 아일랜드에 미친 영향 (논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군주국을 수립한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이 영국 제국 내에서 자율성을 추구하던 아일랜드의 투쟁에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역사적 증거는 부족하다. 일부에서는 아일랜드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이 타협안을 홈룰(Home Rule) 협상을 위한 모델로 고려했다고 이야기한다.

1880년대 중반 보수당 지도자였던 솔즈베리 경은 1867년 타협을 영국과 아일랜드 관계 개선 모델로 고려하기도 했다.[66] 1904년, 아서 그리피스는 영향력 있는 저서 ''헝가리의 부활: 아일랜드를 위한 비유''를 출판하여,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유사한 영국-아일랜드 이중 군주제를 제안했다.[67] 이 이중 군주제 모델은 그리피스가 창당한 신 페인|신 페인gle 당 초기 노선의 기반이 되었고, 아일랜드 민족주의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부활절 봉기와 1917년 10월 Ardfheis|아르드페스gle(당 대회) 이후 아일랜드 공화주의를 지향하게 되면서 이 모델은 더 이상 지지받지 못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와의 연합 속에서 헝가리가 상당한 자율성을 확보한 이중 군주제 구조가 아일랜드 정치 사상가들에게 매력적으로 비쳤으며, 홈룰 운동 내 논의에 영향을 주어 "아일랜드-영국 이중 통치" 체제에 대한 아이디어를 촉진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모델에 대한 아일랜드의 관심이 축구 클럽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도시 전설도 존재한다. 아스널 팬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정치에서 영감을 받아 더블린에서 팀을 두 개의 자율적인 '군주국'으로 나누어 경기를 치르려 했다는 이야기이다. 경기장에 혼란을 일으켰다는 이 일화는 아일랜드 스포츠계에서 "분열된 충성 축구"라는 이름으로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러한 내용은 대부분 허구이거나 가벼운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이 아일랜드에 미쳤다고 알려진 '영향'에 대한 신화에 흥미로운 요소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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