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티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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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갈라티아인은 기원전 3세기에 소아시아에 정착한 켈트족으로, 텍토사게스족, 트로크미이족, 톨리스토보기이족의 세 부족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용병으로 활동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로마와 갈라티아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로마의 지배를 받다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를 지지하여 자유를 얻었으며, 기원전 64년 로마의 위성국이 되었다. 갈라티아는 각 부족의 족장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되었으며, 300명의 의원과 12명의 족장으로 구성된 회의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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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토사게스족은 기원전 3세기 갈리아 툴루즈 지역에서 기원한 켈트족의 일파로, 발칸 반도 침략 후 소아시아로 이동하여 갈라티아인을 형성하고 앙키라를 중심으로 갈라티아 영토의 중심부를 차지했다.
갈라티아인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언어 | 갈라티아어 |
민족 | 골족 |
위치 | 아나톨리아 중부, 현대 앙카라 주변 지역 |
존속 기간 | 기원전 280년–64년 |
역사 | |
주요 사건 | 기원전 278년: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아시아 미노르로 이주 기원전 3세기: 페르가몬 왕국에 정복당함 기원전 25년: 로마 제국의 속주가 됨 |
사회 | |
종교 | 골족의 전통적인 종교 (드루이드교와 유사) 및 헬레니즘 종교 |
문화 | |
언어 | 갈라티아어 (골족의 언어와 유사) |
관련 항목 | 갈라디아서 |
기타 | |
별칭 | 갈라타이 (Galátai), 갈라티 (Galati), 갈로그라이키 (Gallograeci) |
2. 역사
갈라티아인들은 기원전 3세기경 발칸 반도를 거쳐 소아시아로 이주한 켈트족(갈리아인)의 일파이다.[9][4] 이들은 아나톨리아 중부 고원 지대에 정착하여 '갈라티아'라는 지역을 형성했으며, 용맹한 전사로 알려져 주변 헬레니즘 왕국들의 역사에 영향을 미쳤다.[10][5] 이후 로마와의 충돌과 협력을 거쳐 점차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2. 1. 켈트족의 이동과 정착
프랜시스 베이컨과 같은 르네상스 시대 작가들은 기원후 3세기 라틴 역사가 유니아누스 유스티누스처럼 그리스화된 갈라티아인들을 Gallo-Graeci|갈로-그라이키la('그리스인들 사이에 정착한 갈리아인') 또는 그들의 땅을 Gallo-Graecia|갈로-그라이키아la라고 불렀다.[9][4] 고대에는 디오도로스 시켈로스가 사용한 Ἑλληνογαλάται|헬레노갈라타이grc라는 용어가 더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그리스인과의 관계 때문에 갈로그라이키라 불린다"는 의미로, 서쪽의 갈리아가 아닌 그리스 동부의 갈라티아를 지칭했다.[10][5] 수다 역시 헬레노갈라타이(Hellenogalatai)라는 용어를 사용했다.[6]
브렌누스는 기원전 281년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을 약탈하기 전에 저지당했다. 같은 시기, 남성, 여성, 아이들로 구성된 또 다른 켈트족 무리가 트라키아를 통해 이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기원전 279년 브렌누스의 무리에서 분리되어 지도자 레온노리우스와 루타리우스의 지휘 아래 트라키아로 향했다. 이들은 기원전 278년–277년경 소아시아에 나타났다. 한편, 마케도니아를 침략한 다른 켈트족 무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를 전사시켰으나, 디아도코이 안티고노스 1세 모노프탈모스의 손자인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게 패배하여 쫓겨났다.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1세는 형제 지포에테스와의 권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약 2만 명의 갈라티아 용병을 고용했다. 갈라티아인들은 레오노리우스와 루타리우스가 이끄는 두 그룹으로 나뉘어 각각 보스포루스 해협과 헬레스폰트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왔다. 기원전 277년 니코메데스와의 계약이 끝나자, 갈라티아인들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시리아에서 세력을 다지고 있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1세를 대신하여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키지쿠스, 일리온, 디디마, 프리에네, 티아티라, 리쿠스 강가의 라오디게아 등을 약탈했고, 에리트라스 시민들은 몸값을 지불해야 했다.

기원전 275년 또는 269년, 안티오코스 1세의 군대는 사르디스 평원에서 벌어진 '코끼리 전투'에서 갈라티아인들과 맞붙었다. 셀레우코스 군대의 전투 코끼리는 켈트족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갈라티아인들은 패배했다. 전투 후, 켈트족은 옛 프리기아 동부를 포함한 아나톨리아 중부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 지역은 이후 갈라티아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텍토사게스족, 트로크미이족, 톨리스토보기이족의 세 부족으로 나뉘어 정착했으며, 유럽에서 동족들이 계속 유입되면서 세력을 강화했다.
셀레우코스 왕조는 갈라티아인들의 약탈을 막기 위해 티아티라, 아크라소스, 나크라손 등에 요새를 건설하고 여러 도시에 주둔군을 배치했지만, 갈라티아인들은 이 방어선을 넘어 안키라(오늘날의 앙카라), 페시누스, 타비움, 고르디온과 같은 중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기원전 255년과 250년 사이에는 비티니아, 헤라클레이아, 폰토스 지역까지 습격했다.
갈라티아 국가의 구조는 스트라본에 의해 묘사되었다. 관습에 따라 각 부족은 네 개의 자치구(테트라르키아)로 나뉘었고, 각 자치구는 판사를 둔 족장(테트라르크)이 다스렸다. 족장의 권한은 살인 사건을 제외하고는 거의 무제한이었으며, 살인 사건의 경우 12개 자치구에서 선출된 300명의 평의회가 안키라 남서쪽 약 약 32.19km 떨어진 성스러운 장소에서 재판을 열었다. 이 장소는 그리스어로 Δρυνεμετον|드루네메톤grc이라 불렸는데, 이는 갈리아어 *dru-nemeton|드루네메톤xtg('참나무의 성지', drusxtg '참나무' + nemetonxtg '성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신성한 참나무 숲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카파도키아의 원주민들은 대부분의 땅과 도시의 통제권을 유지했지만, 군사 귀족 계층을 형성한 새로운 갈라티아 지배자들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다. 이들 지배자들은 요새화된 농가에 거주하며 자신들의 군대에 둘러싸여 있었다.





갈라티아인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에게 용맹한 전사로 인정받아 용병으로 자주 고용되었으며, 때로는 전쟁 중인 양측 모두에서 싸우기도 했다. 이들은 소아시아 서부 지역을 황폐화시켰으나, 셀레우코스 왕조에서 이탈한 왕자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상황이 변했다. 히에락스는 페르가몬의 통치자 아탈루스 1세를 공격했지만, 오히려 아탈루스를 중심으로 헬레니즘 도시들이 연합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원전 232년경, 아탈루스 1세는 카이쿠스 강 전투 등에서 히에락스와 갈라티아 연합군에게 여러 차례 심각한 패배를 안겼고, 갈라티아인들은 결국 자신들의 이름이 붙은 지역에 영구적으로 정착하도록 강요받았다. 이 승리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죽어가는 갈리아인' 조각상은 이후 한 세대 동안 헬레니즘 예술에서 인기 있는 주제가 되었다. 비록 활동 반경은 제한되었지만, 이들의 지역에 대한 권리는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페르가몬의 아탈루스 왕조 왕들은 소아시아에서 벌어진 전쟁에서 갈라티아 용병들을 계속 활용했다. 한편,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 휘하에서 싸우던 갈라티아 용병 부대는 일식 현상에 동요하여 전장을 이탈하기도 했다. 기원전 2세기 초, 갈라티아인들은 소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되찾으려던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위험한 선택임이 증명되었다.
기원전 189년, 로마는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를 파견하여 갈라티아 전쟁을 일으켰고, 갈라티아인들을 격파했다. 이 전쟁 이후 갈라티아는 지역 통치자를 통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갈라티아는 점차 쇠퇴하여 한때 폰토스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으나, 미트리다테스 전쟁 당시 로마를 지원하면서 다시 자유를 얻었다.
기원전 64년, 갈라티아는 로마의 종속국이 되었고, 이전의 정치 구조는 사라졌다. 로마는 각 부족당 한 명씩, 총 세 명의 족장(테트라르크)을 임명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세 족장 중 한 명이자 키케로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시대 인물이었던 데이오타루스가 다른 두 족장을 누르고 실권을 장악했고, 로마는 결국 그를 갈라티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2. 2. 갈라티아 왕국
기원전 281년 브렌누스가 이끄는 갈리아인들이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델포이 약탈 직전에 격퇴되었다.[9] 이와 별개로, 지도자 레온노리우스와 루타리우스가 이끄는 또 다른 갈리아인 무리(남성, 여성, 아이들 포함)는 기원전 279년 브렌누스 무리에서 이탈하여 트라키아를 거쳐 이동했다. 이들은 기원전 278년–277년경 소아시아에 도착했는데, 그 과정에서 일부는 마케도니아를 침략하여 프톨레마이오스 가문의 통치자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를 전사시키기도 했으나, 안티고노스 왕조의 안티고노스 2세 고나타스에게 패배하고 쫓겨났다.
소아시아로 건너온 갈리아인들은 비티니아의 군주 니코메데스 1세가 자신의 형제 지포에테스와의 권력 투쟁에서 도움을 얻기 위해 약 2만 명의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아나톨리아에 발을 들였다. 이때 텍토사게스족, 트로크미이족, 톨리스토보기이족의 세 부족으로 나뉘어 소아시아로 건너왔다. 니코메데스와의 협력이 끝난 후, 이들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1세 소테르가 시리아에서 세력을 공고히 하는 동안 소아시아의 여러 그리스 도시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기원전 275년(또는 269년)경, 안티오코스 1세는 전투 코끼리를 동원한 전투(코끼리 전투)에서 갈리아인들에게 승리했다. 패배 후 갈리아인들은 옛 프리기아 동부 지역을 포함한 아나톨리아 중부 고원 지대에 정착하게 되었고, 이 지역은 이후 갈라티아로 불리게 되었다.[10] 그들은 앙카라(오늘날의 앙카라), 페시누스, 타비움, 고르디온과 같은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고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며 약탈을 계속했다.[11]
스트라본에 따르면, 갈라티아의 정치 구조는 각 부족이 네 개의 자치구(테트라르키아)로 나뉘는 형태였다. 각 자치구는 테트라르크라 불리는 족장이 다스렸으며, 이들은 살인죄를 제외한 모든 사안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다. 살인죄의 경우, 12개 자치구에서 선출된 300명의 평의원이 앙카라 남서쪽 약 32.19km 떨어진 '드루네메톤'(Δρυνεμετον|드루네메톤grc)이라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재판을 열었다. 드루네메톤은 '참나무의 성지'를 의미하는 갈리아어 `*dru-nemeton` (''drus''는 '참나무', ''nemeton''은 '성지'를 의미)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신성한 참나무 숲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갈라티아인들은 군사 귀족 계층을 형성하여 요새화된 농가에 거주하며 지역민들로부터 조공을 받았다.
갈라티아인들은 용맹한 전사로 명성이 높아 헬레니즘 시대 여러 왕국에서 용병으로 자주 고용되었다. 때로는 전쟁 중인 양측 모두에서 갈라티아 용병이 싸우기도 했다. 이들은 소아시아 서부 지역을 약탈하며 세력을 떨쳤으나, 반역자 안티오코스 히에락스와 손잡고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루스 1세(기원전 241년–197년 재위)와 싸우다 기원전 232년경 여러 차례 패배했다. 이 패배로 갈라티아인들은 세력이 위축되고 갈라티아 지역 내로 활동이 제한되었다. 이 패배를 기념하여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각상 '죽어가는 갈리아인'은 당시 헬레니즘 예술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기원전 2세기 초, 갈라티아인들은 소아시아의 패권을 되찾으려던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로마의 개입을 불렀다. 기원전 189년, 로마는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를 파견하여 갈라티아 전쟁을 일으켰고, 갈라티아인들은 패배했다. 이 전쟁 이후 갈라티아는 로마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고, 기원전 189년부터 지역 통치자를 통해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이후 갈라티아는 쇠퇴하여 한때 폰토스 왕국의 지배를 받기도 했으나, 미트리다테스 전쟁 시기 로마를 지원하면서 자치권을 일부 회복했다.
기원전 64년, 갈라티아는 공식적으로 로마의 위성국이 되었다. 기존의 테트라르크 체제는 폐지되고 각 부족당 한 명씩, 총 세 명의 지도자가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했다. 세 지도자 중 한 명이었던 데이오타루스(키케로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시대 인물)는 다른 두 지도자를 몰아내고 갈라티아 전역의 지배권을 장악했으며, 로마는 결국 그를 갈라티아의 왕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갈라티아는 잠시 왕국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나, 여전히 로마의 강력한 영향력 하에 있었다.
2. 3. 로마 시대
기원전 2세기 초 갈라티아인들은 소아시아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되찾으려한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 메가스의 동맹 세력이었으나, 이는 로마의 개입을 초래했다. 기원전 189년 로마는 그나이우스 만리우스 불소에게 갈라티아 전쟁 원정군을 맡겨 갈라티아인들을 패퇴시켰다. 이 전쟁 이후 갈라티아는 기원전 189년부터 지방 통치자를 통해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갈라티아는 점차 쇠퇴하여 폰토스 왕국의 지배하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로마인들을 지지하며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
기원전 64년의 협정으로 갈라티아는 로마의 종속국이 되었고, 옛 정치 구조는 사라졌다. 로마는 각 부족당 한 명씩, 세 명의 지도자(잘못하여 '테트라르크'라고 불림)를 임명했다. 그러나 이 구조는 세 지도자 중 한 명인 데이오타루스가 다른 두 지도자를 제압하면서 곧 무너졌다. 키케로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동시대인이었던 데이오타루스는 마침내 로마로부터 갈라티아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3. 부족
갈라티아인들은 아나톨리아 중부에 정착하면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생활했다. 대표적으로 텍토사게스족, 톨리스토보기이족, 트로크미이족이 있었으며, 이들 외에도 여러 소규모 부족들이 존재했다.[12][7] 각 부족의 영토는 4개의 칸톤 또는 테트라르키아로 나뉘었다. 총 12명의 테트라르크(족장)가 있었으며, 이들과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로 구성된 국가 회의가 드리네메톤(Drynemeton)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다.
3. 1. 주요 부족
갈라티아는 주로 세 부족으로 나뉘어 정착했다.- '''텍토사게스족''': 갈라티아 중앙 지역에 자리 잡았으며, 수도는 앙키라였다.
- '''톨리스토보기이족''': 서부 지역에 위치했으며, 주요 도시는 페시누스였다. 이들은 키벨레 여신을 신성시했다.
- '''트로크미이족''': 동부 지역에 거주했으며, 주요 도시는 타비움이었다.
각 부족의 영토는 4개의 칸톤(Canton) 또는 테트라르키(Tetrarchy)로 나뉘었다. 총 12명의 테트라르크(Tetrarch)가 있었으며, 각 테트라르크는 판사 한 명과 장군 한 명을 휘하에 두었다. 갈라티아의 국가 회의는 300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12명의 테트라르크로 구성되었으며, 드리네메톤(Drynemeton)이라는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열렸다.
이들 외에도 갈라티아에 속했던 다른 부족들은 다음과 같다.
부족 이름 | 위치 |
---|---|
아이고사게스족[12][7] | 트로이와 키지코스 사이[12][7] |
다구테니족[12][7] | 오늘날 마르마라 지역의 오르하넬리 인근[12][7] |
이노반테니족[12][7] | 트로크나데스 동쪽[12][7] |
오콘디아니족[12][7] |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사이, 오늘날 악셰히르 호수 북동쪽[12][7] |
리고사게스족[12][7] | 위치 확인되지 않음[12][7] |
'''갈라티아 유물'''
3. 2. 기타 부족
주요 3개 부족 외에도 다음과 같은 부족들이 갈라티아에 속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이고사게스족[7]: 트로이와 키지코스 사이에 위치했다.[7]
- 다구테니족[7]: 오늘날 마르마라 지역의 오르하넬리 인근에 자리 잡았다.
- 이노반테니족[7]: 트로크나데스 동쪽에 위치했다.
- 오콘디아니족[7]: 프리기아와 갈라티아 사이, 오늘날 악셰히르 호수의 북동쪽에 위치했다.
- 리고사게스족[7]: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4. 종교
갈라티아인의 종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비교적 적지만, 대부분의 켈트족의 종교와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의 신 텔레스포로스는 다른 그리스 신들에게서 볼 수 없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갈라티아에서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8]
참조
[1]
서적
The Oxford Companion to Classical Literature
Oxford University Press
[2]
서적
The Galatian Language: A Comprehensive Survey of the Language of the Ancient Celts in Greco-Roman Asia Minor
Edwin Mellen Press
2001
[3]
간행물
A salvage grammar of Galatian
2013
[4]
문서
Epitome of Pompeius Trogus
Justin
[9]
문서
Epitome of Pompeius Trogus
Justin
[5]
문서
Historical Commentary on Galatians
1997
[10]
문서
Historical Commentary on Galatians
1997
[6]
웹사이트
Suda, alpha, 259
https://www.cs.uky.e[...]
[7]
웹사이트
A Detailed Map of Settlements in Galatia, Names and La Tène Material in Anatolia, the Eastern Balkans, and the Pontic Steppes
Prifysgol Cymru, University of Wales
[12]
웹사이트
A Detailed Map of Celtic Settlements in Galatia, Celtic Names and La Tène Material in Anatolia, the Eastern Balkans, and the Pontic Steppes
Prifysgol Cymru, University of Wales
[8]
서적
Les Dieux de la Gaule romaine
Luxembourg
1989
[11]
문서
Natur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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