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게오르크 엘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게오르크 엘저는 1903년 독일에서 태어나 목수 일을 하던 중, 나치즘에 반대하여 아돌프 히틀러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1939년 11월 8일 뮌헨의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히틀러의 연설에 맞춰 폭탄 테러를 시도했으나, 히틀러가 연설 시간을 앞당기면서 암살에 실패했다. 엘저는 체포되어 고문과 심문을 받았지만,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으며, 이후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4월 9일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사후, 나치는 엘저의 단독 범행을 인정하지 않고, 음모론을 퍼뜨렸지만, 이후 그의 용기와 저항 정신은 재평가되어 기념되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소목장 - 조상기
    대한민국의 배우 조상기는 계원예술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조소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연극 배우로 데뷔, 1996년 SBS 공채 6기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여 코믹 연기로 이름을 알리며 드라마, 영화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 소목장 - 토머스 쿡
    토머스 쿡은 세계 최초의 패키지 여행을 기획하여 대중 관광 시대를 연 영국의 여행 사업가이자 침례교 선교사이자 금주 운동가이다.
  • 아돌프 히틀러의 암살 미수자 -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는 독일 귀족 출신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계획인 7월 20일 음모를 주도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되었으며, 전후 나치즘에 저항한 독일의 상징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 아돌프 히틀러의 암살 미수자 - 한스 슈파이델
    한스 슈파이델은 제1,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서부 전선에서 롬멜 원수의 참모장으로 복무하며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었으며, 전후 서독 재군비에 기여하고 NATO 사령관을 지냈으나, 유대인 학살 연루 의혹과 롬멜 배신 논란 등 비판도 받는 독일 군인이다.
  • 대목장 - 예수
    예수는 기원후 1세기경 갈릴리에서 활동한 유대인으로, 기독교의 중심 인물이자 하느님의 아들로 여겨지며,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여 가르침을 전파하고 기적을 행했으며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후 부활했다고 전해진다.
  • 대목장 - 나자렛의 요셉
    나자렛의 요셉은 기독교에서 예수의 양아버지로, 마태오 복음서와 루가 복음서에 등장하며 다윗의 후손이자 나자렛의 목수로 묘사되고, 성령으로 잉태한 예수를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여 가톨릭 교회, 성공회, 개신교에서 존경받는 인물이다.
게오르크 엘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게오르크 엘저 뒤셀도르프 주 경찰 본부 인사 파일 사진
게오르크 엘저 뒤셀도르프 주 경찰 본부 인사 파일 사진
본명요한 게오르크 엘저
출생1903년 1월 4일
출생지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헤르마링겐
사망1945년 4월 9일
사망지나치 독일 바이에른주 다하우 다하우 강제 수용소
사망 원인총살
직업목수
알려진 이유아돌프 히틀러 암살 시도

2. 배경

(내용 없음)

2. 1. 어린 시절과 가족 관계

게오르크 엘저는 뷔르템베르크의 헤르마린겐에서 루드비히 엘저와 마리아 뮐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그가 태어난 지 1년 만에 결혼했고, 어머니 마리아는 아버지 루드비히와 함께 쾨니히스브론으로 이사하여 소규모 농장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목재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농장에서 일했다. 게오르크는 다섯 명의 어린 동생들, 즉 프리데리케 (1904년생), 마리아 (1906년생), 루드비히 (1909년생), 안나 (1910년생), 레온하르트 (1913년생)를 종종 돌봐야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잦은 음주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엘저는 1939년 게슈타포 심문에서 아버지가 습관적으로 술에 취해 늦게 귀가했다고 회상했다.[1]

그는 1910년부터 1917년까지 쾨니히스브론의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그림, 서예,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2. 2. 직업 및 사회 생활

1917년, 엘저는 아버지의 사업을 반 년간 도왔으나 독립을 원해 쾨니히스브론의 제련소에서 선반공 견습을 시작했다. 그러나 건강 문제로 곧 그만두게 되었다.[1][2]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쾨니히스브론의 장인 목수 로베르트 자퍼 밑에서 목공 기술을 배웠고, 하이덴하임 무역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했다. 졸업 후에는 아알렌의 파울 리더 가구 공장에서 일했다.[1][2]

1925년, 엘저는 집을 떠나 테트낭 근처 베른리트의 바흐터 목공 회사에서 잠시 일했다. 이후 보덴 호수를 따라 여행하다 프리드리히스하펜에 도착하여 신생 항공기 제조업체인 도르니에(Dornier)에서 나무 프로펠러 제작 일을 맡았다.[1][2]

도르니에(Dornier) 비행정, 1932


같은 해 8월, 엘저는 동료의 권유로 콘스탄츠로 이주하여 시계 공장에서 일했다. 하지만 일거리가 부족해 공장은 곧 문을 닫았다가 슈크만 시계 공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엘저는 재고용되었으나, 공장 주인이 사업 실패 후 의문의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면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해고되었다. 이 시기 엘저는 공산주의자 동료와 함께 지내며 그의 권유로 적색 전선 투사 동맹에 가입했다. 또한 전통 의상 및 춤 단체(Trachtenvereine|트라흐텐페라이네de)에도 참여했다.[1][4]

1929년에는 스위스 국경 근처 보티히호펜의 작은 목공 회사 쇤홀저에서 일자리를 얻어 매일 국경을 넘나들었으나, 6개월 만에 일거리가 끊겨 해고되었다.[1][4] 이 무렵 엘저는 웨이트리스 마틸데 니더만을 만나 교제했고, 그녀가 임신하자 함께 스위스 제네바로 갔다. 당시 마틸데는 임신 4개월이었고 합법적인 낙태는 불가능했다. 아들 만프레드가 태어났지만, 엘저는 마틸데를 떠난 후 종종 주급을 초과하는 양육비 지급에 어려움을 겪었다.[1]

1930년, 엘저는 콘스탄츠에서 매일 페리를 타고 메어스부르크의 로트문트 시계 공장으로 통근하며 벽시계와 탁상시계 케이스를 제작했다. 크로이츨링겐 자유 금주 협회에서는 재봉사 힐다 랑과 교류했다. 1932년 5월 로트문트 공장이 문을 닫자, 그는 8월까지 메어스부르크에서 여러 가족과 함께 지내며 잡다한 목수 일을 했다.[1][4]

1932년 8월, 엘저는 어머니의 요청으로 쾨니히스브론으로 돌아왔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의존 상태였고 어머니에게 폭력적이었으며, 막대한 빚까지 지고 있었다. 엘저는 부모의 일을 도우며 집에서 가구를 만들어 수입을 보충했지만, 1935년 말 아버지의 강요로 가족 재산을 팔아야 했다. 그는 플루트, 아코디언, 베이스, 그리고 치터를 연주하는 음악 활동을 통해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위안을 찾았고, 1933년 초에는 쾨니히스브론의 치터 클럽에 가입했다.[1]

이 시기에 엘저는 하이킹 클럽에서 엘자 헤를렌을 만나 그녀의 집 지하실에 하숙하며 주방 가구를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깊어져 1937년 엘자는 남편과 별거했고 1938년 이혼했다.[4]

1936년, 엘저는 쾨니히스브론에서 그루프라는 목수와 함께 일했지만 급여에 불만을 느껴 곧 그만두었다. 이후 하이덴하임의 발덴마이어 무기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쾨니히스브론에서 기차나 자전거로 통근했다. 이곳에서 그는 동료 직원 마리아 슈마우더와 친구가 되었다.[1] 이 공장은 군수품을 생산했으며, 엘저는 이곳에서 시한 장치에 대한 지식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27] 발덴마이어 공장에서 엘저는 배송 부서에 근무하며 퓨즈와 기폭 장치가 생산되는 "특별 부서"를 포함한 공장의 여러 구역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는 체포 후 게슈타포 조사에서 "1938년 가을, 나의 행동을 결심하기 전까지 공장에서 부품이나 화약을 훔친 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1]

1938년, 엘저의 부모가 그의 형 레온하르트 부부와 함께 집을 사면서 엘저는 소외감을 느끼고 집을 나와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여동생 마리아를 제외한 가족과 관계를 끊었다. 1939년 5월, 그는 슈나이트하임에 있는 슈마우더 가족의 집으로 이사했다.[4]

엘저는 목수이자 가구 제작공으로서 좌익 성향의 목공 노동자 연맹 회원이었다. 적색 전선 투사 동맹에도 가입했지만, 1939년 심문에서는 정치 집회에 세 번 이상 참석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독일 공산당이 노동자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하여 1933년까지 공산당에 투표했다고 진술했다.[1] 엘저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의 고향이 전통적으로 공산당 지지세가 강했던 영향도 있었다.[29]

엘저는 1933년 나치 정권 수립 초기부터 나치즘에 명확히 반대했다. 그는 히틀러 경례를 거부했고, 라디오로 방송되는 히틀러의 연설을 듣지 않았으며, 나치 시대의 선거 및 국민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4][25] 1933년 쾨니히스브론에서 열린 목공 연맹 회의에서 만난 슈나이트하임 출신의 공산주의자 요제프 슈르는 1947년 울름의 한 신문에 보낸 편지에서 엘저의 반파시스트적 견해를 증언했다. 편지에는 엘저가 "히틀러와 그의 측근에 대한 어떤 폭력 행위에도 항상 극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항상 히틀러를 '집시'라고 불렀다. 그의 범죄자 같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언급했다고 적혀 있었다.[4]

엘저의 부모는 개신교 신자였고, 그 역시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다녔으나 점차 발길이 뜸해졌다. 그러나 암살 시도를 결심한 1939년에는 개신교회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더 자주 출석했다. 그는 교회 출석과 주기도문 암송이 자신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체포 후 경찰에게 그는 "나는 죽음 이후 영혼의 생존을 믿으며, 선을 행하고 싶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또한 나의 행동으로 훨씬 더 큰 유혈 사태를 막고 싶었다"고 진술했다.[1]

2. 3. 이념 및 종교

엘저는 직업이 목수이자 가구 제작공이었으며, 좌익 성향의 목공 노동자 연맹 회원이었다. 그는 또한 적색 전선 전사 동맹에 가입했지만, 1939년 심문에서는 회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정치 집회에 세 번 이상 참석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1] 그는 독일 공산당이 노동자의 이익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여겨 1933년까지 투표했으나, 열성적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밝혔다.[1][29] 이는 그의 고향이 전통적으로 공산당 지지가 강했던 배경도 있었다.[29]

엘저는 1933년 나치 정권이 시작된 이후 명확하게 나치즘에 반대했다.[4][25] 그는 히틀러 경례를 거부했고, 라디오로 방송되는 히틀러의 연설을 듣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았으며, 나치 시대의 선거 또는 국민 투표에도 참여하지 않았다.[4] 1933년 쾨니히스브론에서 열린 목공 연맹 회의에서 만난 공산주의자 요제프 슈르(Josef Schurr)는 1947년 울름의 한 신문에 보낸 편지에서 엘저의 반파시스트적 견해를 증언했다. 편지에 따르면 엘저는 "히틀러와 그의 측근에 대한 어떤 폭력 행위에 항상 극도로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항상 히틀러를 '집시'라고 불렀다. 그의 범죄자 같은 얼굴만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했다.[4]

엘저의 부모는 개신교 신자였고, 그 역시 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다녔으나 점차 출석이 뜸해졌다. 그러나 암살 시도를 결심한 후인 1939년에는 개신교회나 로마 가톨릭 교회에 더 자주 출석했다. 그는 교회 출석과 주기도문 낭송이 자신에게 심리적 안정을 준다고 말했다.[1] 체포 후 경찰에게 그는 "나는 죽음 이후 영혼의 생존을 믿으며, 선을 행하고 싶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다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또한 나의 행동으로 훨씬 더 큰 유혈 사태를 막고 싶었다"고 진술했다.[1]

3. 암살 시도

게오르크 엘저는 나치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시도한 인물이다. 그는 나치당 집권 이후 노동자들의 권리가 억압받고 생활 수준이 악화되는 현실과, 주데텐란트 병합 이후 임박한 제2차 세계 대전의 위협 속에서 히틀러 제거를 결심했다.[30][31] 엘저는 1938년 가을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으며, 매년 11월 8일 뮌헨의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리는 맥주 홀 폭동 기념 연설이 히틀러를 포함한 나치 지도부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1][25]

엘저는 약 1년에 걸쳐 치밀하게 암살을 준비했다. 그는 폭발물 제조 기술을 익히고, 공장과 채석장에서 일하며 화약과 뇌관 등 필요한 재료를 몰래 확보했다.[1][33][25] 1939년 가을, 그는 뮌헨으로 이주하여 약 두 달간 매일 밤 뷔르거브로이켈러에 잠입해 히틀러가 연설할 연단 뒤의 기둥 내부를 파내고 직접 제작한 정교한 시한폭탄을 설치했다.[1][25][36][37][38]

1939년 11월 8일 밤, 엘저가 설정한 시간에 맞춰 폭탄은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폭발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예상보다 일찍 연설을 마치고 행사장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암살은 실패로 돌아갔다.[4][25] 폭발로 인해 현장에 남아 있던 8명이 사망하고 60여 명이 부상을 입는 큰 피해가 발생했다.[4][6][25] 엘저는 당일 밤 스위스로 탈출하려다 국경에서 체포되었다.[45]

3. 1. 동기

1933년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 엘저는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삶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나치 정권 하에서 노동자들의 권리가 억압받고 생활 수준이 악화되는 현실에 불만을 품었다.[30][31] 또한, 1938년 나치 독일체코슬로바키아주데텐란트를 병합하는 것을 보며(뮌헨 협정), 이것이 결국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더 큰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깊이 우려했다.[30][31] 이러한 노동자 문제와 임박한 전쟁에 대한 불안감이 엘저가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결심하게 된 주요 동기였다.

엘저는 1939년 11월 베를린에서 진행된 심문 과정에서 자신의 동기를 직접 밝혔다. 그는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하고 전쟁을 피하는 방법을 생각했다"고 진술하며, 독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 지도부인 히틀러, 괴링, 괴벨스를 제거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정 이념(나치즘)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 지도자를 제거함으로써 독일의 정책 방향이 좀 더 온건하게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다. 엘저는 이러한 생각을 1938년 가을부터 구체화하기 시작했으며, 매년 11월 8일 뮌헨의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열리는 맥주 홀 폭동 기념행사가 지도자들이 함께 모이는 드문 기회임을 알고 이를 암살 실행의 적기로 보았다.[1]

훗날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엘저는 한 친위대(SS) 장교에게 히틀러 암살 시도가 자신에게는 "강박 관념"과 같았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히틀러가 독일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엘저는 자신이 공산주의자는 아니지만, 나치당에 의해 탄압받았던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에게 어느 정도 동정심을 느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4] 이는 그가 단순히 개인적인 원한이나 특정 정치 이념에 경도되었다기보다는, 당시 독일 사회의 모순과 임박한 전쟁의 위협 속에서 나름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음을 보여준다.

3. 2. 계획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 터에 있는 게오르크 엘저(Georg Elser) 기념 명판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게오르크 엘저는 자신의 가족을 포함한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와 주데텐란트 할양으로 인해 세계 대전이 발발할 것을 우려하여 히틀러 암살을 결심했다.[30][31] 그는 히틀러가 뮌헨 폭동의 무대였던 비어홀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에서 매년 11월 8일 밤 기념 연설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엘저는 히틀러의 위치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이 시점을 노려 암살을 계획했다.[25]

암살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엘저는 1938년 11월 8일, 히틀러의 연설이 있던 날 기차를 타고 뮌헨으로 향했다.[32] 그는 연설 장소인 뷔르거브로이켈러를 사전 답사했으나, 군중이 흩어진 밤 10시 30분이 되어서야 건물에 들어갈 수 있었고 자정까지 머물렀다.[1] 다음 날 뮌헨에서는 크리스탈밤(수정의 밤)이라 불리는 반유대인 폭력이 발생했다.[3]

뮌헨 답사 후 몇 주 동안 엘저는 연설대 바로 뒤에 있는 기둥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1] 그는 하이덴하임의 발덴마이어 무기 공장에서 일하며 폭발물 제조에 필요한 화약을 몰래 빼돌려 자신의 침실에 숨겼다.[1] 그러나 이 화약만으로는 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1939년 3월 공장을 그만두었다.[33]

정확한 폭탄 설계를 위해 기둥의 치수를 알아야 했던 엘저는 1939년 4월 4일부터 12일까지 다시 뮌헨을 방문했다. 이때 그는 마리아 슈마우더에게 선물 받은 카메라를 가져가 기둥의 치수를 측정했다. 당시 그는 공장 감독과의 마찰로 실직한 상태였다.[1]

1939년 4월에서 5월 사이, 엘저는 쾨니히스브론의 폴머 채석장에서 일자리를 구해 폭발물을 추가로 확보했다. 그는 그곳에서 발파용 카트리지 105개와 뇌관 125개를 몰래 수집했다. 그는 나중에 심문 과정에서 "뇌관 두세 개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여분으로 폭발 효과를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1] 슈나이트하임의 슈마우더 가족과 함께 지내며 그는 여러 설계도를 그렸고, 가족에게는 "발명"을 하고 있다고 둘러댔다.[1]

같은 해 7월, 엘저는 부모님 소유의 외딴 과수원에서 자신이 설계한 폭탄 시제품 여러 개를 시험했다. 그는 1932년 메어스부르크의 로트문트를 떠날 때 임금 대신 받은 시계 무브먼트와 자동차 방향 지시등 부품을 이용해 시한폭탄, 즉 "지옥의 기계"를 만들었다.[1]

1939년 8월 5일, 엘저는 폭탄 제조에 필요한 모든 재료(화약, 폭발물, 배터리, 뇌관 등)를 나무 가방의 이중 바닥에 숨기고 뮌헨으로 이사했다. 다른 상자에는 옷가지, 시계 부품, 작업 도구 등을 넣었다.[1][35][25] 뮌헨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시한폭탄 장치를 제작하는 한편, 매일 밤 9시경 뷔르거브로이켈러를 찾아가 저녁 식사를 하고 폐점 직전 창고에 숨어들었다.[36][37] 모두가 떠나고 홀이 조용해지면, 그는 미리 계획한 기둥 내부에 폭탄을 설치하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25]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화장실 자동 세척 소리나 노면 전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망치질과 조각 작업을 진행했다.[25][38] 다음 날 아침 7시 30분경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뒷문으로 빠져나왔고, 기둥을 파내면서 나온 잔해는 자루에 담아 강에 버렸다.[25] 이런 방식으로 엘저는 낮에는 폭탄과 시한 장치를 만들고 밤에는 비어홀에 잠입해 기둥을 파내는 작업을 약 30일에서 35일 동안 계속했다.[25] 그가 만든 시한 장치는 최대 144시간(6일)까지 설정 가능했으며, 페일세이프 기능까지 갖춘 매우 정교한 것이었다.[39]

엘저는 1939년 11월 2일 밤 또는 6일 밤에 완성된 폭탄을 기둥 안에 설치하고, 히틀러가 연설하는 11월 8일 밤 9시 20분에 폭발하도록 시한을 설정했다.[25][40] 폭탄 설치 후인 11월 6일에는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누나의 집을 방문해 하룻밤을 보냈고, 7일 밤 뮌헨으로 돌아와 뷔르거브로이켈러에 다시 들러 시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했다.[41]

3. 3. 뷔르거브로이켈러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엘저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와 주데텐란트 할양으로 인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우려 때문에 히틀러 암살을 결심했다.[30][31] 그는 히틀러가 매년 11월 8일 뮌헨 폭동 기념일에 뮌헨의 비어홀인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연설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시기를 암살 기회로 삼기로 계획했다.[25]

1938년11월 8일, 엘저는 사전 조사를 위해 뮌헨을 방문하여 히틀러가 연설할 연단 뒤의 기둥에 시한폭탄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32] 그는 하이덴하임의 공장에서 구한 흑색 화약의 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1939년 3월에 해당 공장을 그만두었다.[33] 1939년 봄, 엘저는 채석장에서 일하면서 시한폭탄에 사용할 폭발물을 조금씩 훔쳤고, 시한 발화 장치의 조립 및 실험을 반복했다.[25][34]

1939년 8월 5일, 엘저는 폭탄 재료를 이삿짐 밑에 숨겨 뮌헨으로 이사하여 발화 장치를 만들었다.[35][25] 그는 자신의 본명을 사용하여 방을 빌렸고,[1] 매일 밤 9시경 뷔르거브로이켈러 레스토랑에서 저렴한 저녁 식사를 한 뒤, 폐점 직전 홀 안의 창고 등에 숨어 들어갔다.[1][36][37] 이후 약 두 달 동안, 30일에서 35일 밤을 홀 안에서 보내며 작업을 진행했다.[1][25] 그는 갤러리 층에서 파란 손수건으로 빛을 가린 손전등을 사용하여 연설대 뒤 기둥의 나무 패널에 비밀 문을 설치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문 뒤의 석고를 제거한 후, 폭탄을 설치하기 위해 벽돌을 파내 공간을 만들었다.[1]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비어홀 내 화장실의 자동 세척 소리나 노면 전차가 지나가는 소리에 맞춰 작업을 계속했다.[25][38] 작업은 보통 새벽 2시에서 3시경에 마치고, 갤러리 밖 창고에서 문이 오전 6시 30분경 열릴 때까지 졸았다. 그런 다음 그는 뒷문을 통해 나갔으며, 종종 파편으로 채워진 작은 가방을 들고 나와 강에 버렸다.[1][25] 낮에는 지역 철물점에서 방음재 등 추가 부품을 구입했고, 지역 목공 장인인 브뢰그와 친구가 되어 그의 작업장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1] 뷔르거브로이켈러의 보안은 크리스티안 베버가 책임지고 있었으나 비교적 허술했다.[4] 그러나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에는 건물에 방공 감시원과 두 마리의 개가 배치되었다.[1]

엘저는 11월 1일과 2일 밤에 기둥에 폭발물을 설치했다.[1] 11월 4일과 5일 밤에는 표를 사서 갤러리에서 1시 이후까지 기다렸다가 시계 장치를 설치했다.[1] 엘저가 제작한 시한 장치는 최대 144시간(6일)의 시한 설정이 가능했고, 페일세이프 기능도 갖춘 매우 정교한 것이었다.[39] 그는 폭탄이 1939년 11월 8일 히틀러 연설 시간에 맞춰 폭발하도록 시한을 설정했다.[25][40] 11월 6일, 엘저는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여동생 마리아 히르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자신의 도구 상자와 짐을 맡겼다.[1] 그는 다음 날인 7일 밤 10시에 뮌헨으로 돌아와 뷔르거브로이켈러에 들러 시계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최종 확인했다.[1][41] 다음 날 아침, 그는 울름을 경유하는 기차로 뮌헨을 떠나 프리드리히스하펜으로 향했고, 이발소에서 면도를 한 후 오후 6시 30분 증기선을 타고 콘스탄츠로 갔다.[1]

1939년11월 8일, 히틀러는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매년 열리는 뮌헨 폭동 기념 연설을 했다.[42] 당초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열리는 제2차 세계 대전 관련 회의 때문에 연설회 참석 자체를 취소할 예정이었으나, 결국 참석하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25] 그러나 연설회 직전 뮌헨에 안개가 낀다는 일기 예보 때문에 비행기 사용을 중단하고, 밤 9시 30분에 출발하는 전용 열차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예년보다 이른 저녁 8시에 연설을 시작하여 9시 7분에 마치고 행사장을 떠났다.[25] 히틀러가 퇴장하고 약 13분 뒤인 밤 9시 20분, 엘저가 설치한 시한폭탄이 폭발하여 뷔르거브로이켈러 내부는 크게 파괴되었다.[43] 연단 뒤에 있던 기둥은 폭발로 산산조각이 났고, 홀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게 천장과 들보, 잔해가 무너져 내렸다. 이 폭발로 최종적으로 8명이 사망하고 62명이 부상당했다.[25]

3. 4. 폭탄 테러



1933년 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게오르크 엘저는 자신의 가족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과 노동자들에 대한 열악한 대우, 그리고 주데텐란트 할양으로 인해 세계 대전이 발발할 것을 우려하여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결심했다.[30][31] 그는 히틀러가 뮌헨 폭동의 무대가 되었던 비어홀인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에서 매년 폭동 기념일인 11월 8일 밤에 연설한다는 사실을 알고, 히틀러의 위치를 확실하게 예측할 수 있는 이 시점을 이용해 암살을 계획했다.[25]

1938년 11월 8일, 엘저는 사전 조사를 위해 뮌헨으로 가서 히틀러가 연설할 연단 뒤 기둥에 시한폭탄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32] 처음에는 하이덴하임(Heidenheim)의 공장에서 흑색 화약을 구했지만 위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고, 1939년 3월 해당 공장을 그만두었다.[33] 이듬해 봄부터는 채석장에서 일하며 시한폭탄에 쓸 폭발물을 조금씩 훔쳤고, 시한 발화 장치를 조립하고 실험하는 과정을 반복했다.[25][34]

1939년 8월 5일, 엘저는 폭탄 재료를 이삿짐 밑에 숨겨 뮌헨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발화 장치를 만들었다.[35][25] 그는 매일 밤 9시경 뷔르거브로이켈러를 방문해 저녁 식사를 한 뒤, 폐점 직전에 홀 안 창고에 숨어들었다.[36][37] 홀 내부가 조용해지면 기둥 안에 폭탄을 설치할 공간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25] 소음을 최소화하기 위해 화장실 자동 세척 소리나 노면 전차 소리가 날 때 작업을 진행했으며,[25][38] 다음 날 아침 7시 30분경 직원들이 오기 전에 뒷문으로 빠져나와 기둥을 파내면서 생긴 잔해는 강에 버렸다.[25] 엘저는 이런 방식으로 약 30~35일 동안 낮에는 폭탄과 시한 장치를 만들고 밤에는 비어홀에 잠입해 기둥 가공 및 폭탄 설치 준비를 했다.[25] 그가 만든 시한 장치는 최대 144시간(6일)까지 설정 가능했고, 페일세이프 기능까지 갖춘 매우 정교한 것이었다.[39] 엘저는 1939년 11월 2일 밤 또는 6일 밤에 기둥 안에 폭탄 설치를 완료하고, 11월 8일 히틀러 연설 시간에 맞춰 폭발하도록 시한을 설정했다.[25][40] 이후 11월 6일 슈투트가르트에 사는 자매 가족을 방문해 하룻밤을 보낸 뒤, 7일 밤 뮌헨으로 돌아와 시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고 다음 날 아침 스위스로 떠났다.[41]

1939년 11월 8일, 아돌프 히틀러는 예정대로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뮌헨 폭동 기념 연설을 했다.[42] 당시 행사에는 요제프 괴벨스,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루돌프 헤스, 로베르트 레이,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아우구스트 프랑크, 헤르만 에서, 하인리히 힘러 등 나치 고위 인사들도 다수 참석했다. 히틀러는 크리스티안 베버의 환영을 받았다.[4]

원래 히틀러는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프랑스 침공 계획에 집중하기 위해 연설을 취소하려 했으나, 결국 참석하기로 마음을 바꿨다.[25] 하지만 다음 날 아침 베를린으로 돌아갈 비행기가 안개 때문에 뜨지 못할 가능성이 제기되자, 당일 밤 개인 열차로 베를린으로 돌아가기로 계획을 변경했다. 뮌헨 중앙역 출발 시간이 밤 9시 30분으로 정해지면서, 연설 시작 시간은 오후 8시로 30분 앞당겨졌고, 히틀러는 예정된 2시간 연설을 1시간으로 줄였다.[4][25]

히틀러는 오후 9시 7분, 약 3,000명의 나치당원들 앞에서 연설을 마치고 자리를 떠났다. 이는 엘저의 폭탄이 터지기 불과 13분 전이었다.[4] 엘저의 폭탄은 예정대로 오후 9시 20분에 폭발했다.[43] 폭발로 연단 뒤의 기둥이 산산조각 나고 천장과 지붕 일부가 무너져 내렸으며, 갤러리와 외벽까지 붕괴되어 잔해 더미를 만들었다. 당시 홀에는 약 120명이 남아 있었다.[4] 이 폭발로 7명이 즉사하고(출납원 마리아 헨레, 프란츠 루츠, 빌헬름 카이저, 베버라는 이름의 라디오 아나운서, 레온하르트 라인들, 에밀 카스버거, 오이겐 샤흐타)[5], 6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그중 16명은 중상이었다. 중상자 중 한 명은 나중에 사망하여 총 사망자는 8명이 되었다.[4][6][25] 사망자들은 대부분 오랜 나치 당원이었다.[4]

히틀러는 그날 밤 뉘른베르크에서 잠시 정차했을 때 자신에 대한 암살 시도 소식을 들었다. 괴벨스로부터 소식을 전해들은 히틀러는 처음에는 "사람은 운이 좋아야 해"라고 말했지만, 곧 "이제 완전히 마음이 편안해! 평소보다 일찍 뷔르거브로이켈러를 떠난 것은 섭리가 내가 목표에 도달하게 하려 한다는 증거야."라며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4]

"1939년 11월 8일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일어난 범죄적인 폭탄 테러의 희생자 7명을 위한 뮌헨 펠트헤렌할레 앞에서의 장엄한 국가 의식"(원래 캡션)


한편, 엘저는 11월 8일 밤 콘스탄츠에서 스위스 국경을 넘으려다 독일 국경 수비대에 체포되었다.[45] 그의 소지품에서 폭발물 설계도와 부품, 뷔르거브로이켈러 사진 엽서 등이 발견되었지만, 당시 당국은 약 1,000명에 달하는 용의자를 구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엘저는 처음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25] 그러나 심문 중 폭발 사건 소식이 전해지면서 엘저의 신병은 즉시 뮌헨으로 이송되었다.[25] 11월 13일, 엘저는 자신이 폭탄을 설치했음을 자백했지만, 단독 범행임을 일관되게 주장했다. 이는 11월 9일 나치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가 암살 미수가 영국 정보부의 소행이라고 보도한 내용과 배치되는 것이었다.[46][47]

나치 지도부는 엘저의 단독 범행 주장을 믿지 않았다. SD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발터 쉘렌베르크는 영국 첩보 기관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다음 날인 11월 9일 네덜란드 펜로에서 영국 요원 Sigismund Payne Best|시지스문트 페인 베스트eng와 Richard Henry Stevens|리처드 헨리 스티븐스eng를 납치하는 펜로 사건을 일으켰다.[44] 히틀러 역시 영국의 음모라고 확신하며 게슈타포의 초기 수사 보고에 대해 "도대체 어느 멍청이가 이런 수사를 했는가?"라며 불신을 드러냈다.[25] 히틀러는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에게 배후 관계를 철저히 조사하라고 명령했다. 힘러는 직접 엘저를 심문하고 고문까지 가했지만, 엘저는 계속해서 단독 범행이라고 진술했다.[48][49] 엘저는 자신의 주장을 믿어주지 않자, 암살에 사용했던 것과 동일한 시한폭탄 장치를 직접 재현하여 심문관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25] 결국 힘러는 프란츠 요제프 후버, 아르투어 네베(후에 7·20 사건 가담자로 처형됨)에게 심문을 맡겼으나, 그들 역시 배후를 밝혀내지 못하고 "엘저의 단독 범행"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이드리히도 마지못해 단독범임을 인정했다. 수사 실패로 힘러는 히틀러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엘저는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에 특별 수감자로 구금되었다.[50] 수용소 내에서의 대우는 일반 수감자들과는 달리 비교적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한 달에 담배 120개비를 받고 식량 배급도 제대로 받았으며, 침실, 작업장, 그리고 SS 감시병이 있는 방 등 총 3개의 방을 사용했다.[51][52] 나치 정권이 엘저를 즉결 처형하지 않고 살려둔 이유는, 전쟁에서 승리한 후 공개 재판을 열어 그를 영국 정보부의 하수인으로 몰아 국제 사회에 선전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54]

그러나 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 엘저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같은 해 4월 9일 아돌프 히틀러의 직접적인 명령 또는 승인 하에 총살되었다.[53] 당시 나치 언론은 엘저가 연합군의 공습으로 사망했다고 거짓 보도했다.[25]

4. 체포 및 심문

1939년 11월 8일 밤, 게오르크 엘저는 스위스 국경을 넘으려다 독일 국경 경비대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당시 그는 폭발 장치와 관련된 여러 물품을 소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뮌헨 뷔르거브로이켈러 폭탄 테러와의 연관성을 강력히 시사했다. 엘저는 즉시 뮌헨 게슈타포 본부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기 시작했다.[4]

히틀러의 직접적인 지시에 따라 힘러와 뮐러가 수사를 총괄했으며, 네베는 현장 조사를 지휘했다. 게슈타포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으며, 엘저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 결정적인 증언을 확보하면서 수사는 엘저에게 집중되었다. 이후 엘저는 베를린국가보안본부로 옮겨져 혹독한 심문을 받았고, 결국 고문 끝에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4]

4. 1. 체포

힘러 (가운데)는 1939년 11월 후버, 네베, 하이드리히, 뮐러와 회의를 진행했다.(왼쪽에서 오른쪽으로)


11월 8일 밤 8시 45분, 엘저는 콘스탄츠의 스위스 국경 펜스에서 25m 떨어진 곳에서 두 명의 국경 경비대에게 체포되었다. 국경 통제소로 이송되어 소지품 검사를 받았을 때, 그는 철사 절단기, 폭발 장치, 발사 핀, 그리고 뷔르거브로이켈러 내부 모습이 담긴 수많은 메모와 스케치(백지 컬러 엽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밤 11시, 콘스탄츠에서 게슈타포가 엘저를 심문하는 동안 텔레프린터를 통해 뮌헨 폭탄 테러 소식이 도착했다. 다음 날, 엘저는 차에 태워져 뮌헨 게슈타포 본부로 이송되었다.[4]

4. 2. 뮌헨에서의 심문

히틀러는 기차로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중에도 하인리히 힘러에게 아르투어 네베, 크리포 (형사 경찰) 국장에게 뮌헨 폭탄 테러 조사를 맡기라고 지시했다. 힘러는 이 지시를 따랐지만, 게슈타포 수장인 하인리히 뮐러에게 조사의 전권을 위임했다. 뮐러는 즉시 뷔르거브로이켈러의 모든 직원을 체포하라고 명령했고, 네베는 현장 조사를 지휘하며 잔해를 뒤졌다.[4]

네베는 초기에 성과를 거두어,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슈베닝겐의 시계 제작자의 특허 번호가 새겨진 놋쇠판 잔해를 발견했다. 이는 명백히 독일산 부품임을 시사했지만, 힘러는 언론에 금속 부품이 "외국 기원"을 가리킨다고 발표하며 사건의 배후를 왜곡하려 했다.[4]

힘러는 범인 체포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50만 마르크의 현상금을 내걸었고, 게슈타포에는 곧 수백 명의 용의자에 대한 정보가 쏟아졌다. 한 용의자가 호주머니에 기폭 장치 부품을 소지하고 있다는 보고가 접수되자, 게슈타포의 대(對) 첩보 부서 소속 오토 라폴트가 쾨니히스브론과 인근 마을로 급파되었다. 엘저의 모든 가족과 그를 알 가능성이 있는 지인들이 심문을 위해 체포되었다.[4]

슈나이트하임의 슈마우더 저택에서는 16세의 마리아 슈마우더가 최근 가족의 하숙인이었던 엘저가 "발명품"을 만들었으며, 그의 가방에는 이중 바닥이 있었고, 폴머 채석장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 이 증언은 수사 방향을 엘저에게 집중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4]

4. 3. 베를린에서의 심문

11월 9일, 뮌헨 게슈타포 본부에 구금된 수많은 용의자 중 한 명이었던 엘저는 며칠 동안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뷔르거브로이켈러 직원들과 대면했을 때, 웨이트리스 마리아 스트로블은 엘저가 음료를 한 잔만 시키는 특이한 손님이었다고 지목했다. 이후 시계 소리를 줄이기 위한 "방음 단열판"을 판매했던 상인도 엘저의 슈바벤 억양을 근거로 그를 확인했다.[4]

네베는 조사를 돕기 위해 의 게슈타포 수장이었던 프란츠 요제프 후버를 불렀다. 후버는 엘저의 무릎을 검사하여 심하게 멍든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그가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야간 작업을 하며 낮은 자세로 일했음을 시사하는 증거로 여겨졌다.[4]

뮌헨 형사 경찰청장 알브레히트 뵈메 박사는 엘저가 심하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이 구타에 힘러가 직접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뵈메는 "엘저는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신음했지만, 자백하지 않았다. 그가 원했더라도 신체적으로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1월 15일 엘저는 완전한 자백서를 작성했으나, 해당 문서는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4]

베를린, 프린츠-알브레히트-슈트라세 8에 위치했던 국가보안본부 건물. 이전에는 공예 박물관이었다.

5. 나치 선전과 음모론

11월 18일경 게오르크 엘저는 프린츠 알브레히트 거리에 있는 베를린 게슈타포 본부로 이송되었다. 그의 부모, 형제자매, 전 배우자, 그리고 전 여자친구 엘자 해를렌 역시 베를린으로 끌려와 모아비트 감옥과 카이저호프 호텔 등에 분산 수용되었다. 엘저의 어머니, 여동생 마리아 히르트 부부, 엘자 해를렌은 엘저가 있는 자리에서 직접 심문을 받았다.[4]

엘자 해를렌은 1950년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엘저의 얼굴이 심하게 붓고 멍들어 있었으며, 눈이 튀어나올 듯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녀에 따르면, 심문 과정에서 한 장교가 엘저 뒤에 서서 계속 등을 치거나 머리 뒤를 때리며 진술을 강요했고, 엘저는 결국 외국 요원의 사주를 받아 폭탄을 제조하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했다. 해를렌은 엘저가 명백히 심문관들이 원하는 대로 허위 진술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4]

엘저의 가족과 해를렌은 공범 혐의로 1년 이상 수감된 마리아 히르트 부부를 제외하고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해를렌은 하인리히 힘러와의 면담, 아돌프 히틀러와의 만남, 마르틴 보어만의 심문 등 이례적인 경험을 했으나, 나치 지도부가 원했던 엘저의 배후나 공범에 대한 증거를 제공하지는 못했다.[4] 이는 나치 정권이 엘저의 단독 범행을 믿지 않고 배후 세력이 있다는 음모론을 입증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엘저는 암살 시도의 유일한 배후임을 심문관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폭탄 설계를 완벽하게 그린 도면을 다섯 장 만들었다. 이 도면들은 게슈타포 심문 보고서에 언급되어 있지만, 현재 남아 있지 않다.[4]

5. 1. 나치 선전

게오르크 엘저가 심문 과정에서 단독 범행임을 일관되게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7] 히틀러는 뷔르거브로이켈러 폭탄 테러를 정치 선전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1939년 11월 22일, 독일 신문들은 엘저가 영국 정보국의 자금을 지원받았으며, 망명 중이던 나치당 탈당파 오토 슈트라서가 암살 시도를 조직했다는 허위 사실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8]

이러한 선전 공세의 일환으로, 사건 직후 벤로 사건에서 독일에 납치된 영국 비밀 정보국(SIS) 요원 리처드 헨리 스티븐스와 지기스문트 페인 베스트의 사진이 엘저의 사진과 함께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1면에 게재되었다.[8] 이는 영국 정보국이 암살 시도의 배후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조작이었다.

친위대(SS) 장교 발터 셸렌베르크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히틀러가 영국 정보국과 슈트라서가 암살 시도를 조직했다고 확신했으며, 엘저와 영국 요원들을 함께 공개 재판에 회부하여 선전 효과를 노렸다고 밝혔다. 셸렌베르크 자신은 이러한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여겼으며, "이 광기를 막을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려 노력했다"고 술회했다.[9]

한편, 오토 슈트라서는 1939년 11월 23일 스위스 언론 ''아펜첼러 차이퉁''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엘저나 영국 요원들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다고 관련설을 강력히 부인했다.[4] 그는 인터뷰 직전 이미 히틀러 비방 발언을 이유로 스위스에서 추방된 상태였다.[4]

5. 2. 음모론

게오르크 엘저는 11월 19일부터 23일까지 5일간 고문을 받은 후 작성된 게슈타포 심문 보고서에서 자신이 단독으로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고 주장했다. 이 보고서는 1964년까지 독일 코블렌츠의 기록 보관소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현재 엘저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7] 엘저는 심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나는 또한 스위스에서 독일 경찰에 편지를 써서 암살의 유일한 범인은 나이며 공범은 없다고 설명할 의도가 있었고, 자세히 고려했다. 나는 또한 나의 장치의 정확한 도면과 범행 실행에 대한 설명을 함께 보내어 나의 주장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을 것이다. 독일 경찰에 이와 같은 메시지를 보내서 나는 어떤 경우에도 무고한 사람이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체포되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7]

그러나 하인리히 힘러는 이 최종 보고서를 읽고 엘저의 단독 범행 진술에 대해 강한 불신을 보이며, 보고서 표지에 "누가 이런 바보 같은 글을 썼는가?"라고 적었다.[4]

아돌프 히틀러는 엘저의 단독 범행 가능성을 무시하고, 뷔르거브로이켈러 폭탄 테러를 정치 선전에 이용했다. 11월 22일, 독일 언론들은 엘저가 영국 정보국의 자금을 받았으며, 오토 슈트라서가 범행을 조직했다는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벤로 사건에서 체포된 영국 비밀 정보국(SIS) 요원 리처드 헨리 스티븐스와 지기스문트 페인 베스트의 사진이 엘저의 사진과 함께 ''도이체 알게마이네 차이퉁'' 1면에 실리기도 했다.[8]

친위대(SS) 장교였던 발터 셸렌베르크는 그의 회고록 『미궁』(The Labyrinth영어)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그(히틀러)는 이 사건을 처리하는 데 대해 힘러, 하이드리히, 나에게 자세한 지침을 내리고 언론에 발표했다. 내가 실망스럽게도, 그는 암살 시도가 영국 정보국의 소행이며, (영국 SIS 요원) 베스트와 스티븐스가 오토 슈트라서와 협력하여 이 범죄를 실제로 조직했다고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 그 동안, 엘저라는 이름의 목수가 스위스 국경을 넘어 도주하려다 체포되었다. 그에 대한 정황 증거가 매우 강력했고, 결국 그는 자백했다 ... 나는 오토 슈트라서의 검은 전선 조직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 있고 영국 비밀 정보국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베스트와 스티븐스를 히틀러 암살 시도와 연관시키는 것은 매우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그는 엘저와 영국 비밀 정보국 요원들을 함께 재판에 회부할 것이라고 언론에 발표했다. 고위층에서는 독일 국민을 위해 무대 연출을 할 대규모 공개 재판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는 이 광기를 막을 최선의 방법을 생각하려 노력했다.[9]

한편, 오토 슈트라서는 1939년 11월 23일 스위스 잡지 ''아펜첼러 차이퉁''과의 파리 인터뷰에서 엘저, 베스트, 스티븐스와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그는 이미 11월 13일, 외국 신문에 히틀러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스위스에서 추방된 상태였다.[4] 이처럼 엘저의 암살 시도를 둘러싸고 나치 정권은 영국 정보국과 반체제 인사인 슈트라서가 연루되었다는 음모론을 퍼뜨렸으나, 관련된 인물들은 이를 부인하거나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6. 수감 생활과 죽음

베를린 게슈타포 본부의 지하 감옥은 수감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처우로 악명이 높았다. 엘저는 1941년 1월 또는 2월까지 최상층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아르투어 네베는 이 기간 동안 엘저가 쇠약해진 상태였다고 한스 기제비우스에게 전했다. 기제비우스는 나중에 엘저가 당한 고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엘저는 그들(게슈타포)이 그에게 매우 짠 청어를 먹이고 열에 노출시킨 다음 액체를 빼앗아 정보를 짜내려 했기 때문에 이전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 그들은 그에게 오토 슈트라서와의 연관성을, 아무리 막연하더라도 자백하게 만들고 싶어했다. 그 장인은 굳건했다. 마치 순수한 아이나 때때로 종교 집단 구성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사람처럼, 그는 자비를 구하거나 심지어 불평조차 하지 않고 네베에게 고문을 이야기했다—체포 이후 그를 인간적으로 대했던 사람(네베)을 다시 보게 된 기쁨의 폭발과 같았다.[4]


발터 쉘렌베르크는 하인리히 뮐러와의 대화를 기록했는데, 뮐러는 엘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히틀러의 지시에 대해 언급했다.

지금까지 나는 내가 데려온 모든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꺾을 수 있었다. 이 녀석에게 내가 초기에 구타를 가했더라면, 그는 이런 헛소리를 생각해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후 논의에서 히틀러는 하이드리히에게 명령을 내렸다. '나는 이 엘저라는 자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알고 싶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든 분류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나에게 보고하라. 그리고 더 나아가, 이 범죄자가 입을 열도록 모든 수단을 사용하라. 그를 최면을 걸고, 약물을 투여하라; 우리 과학자들이 시도한 모든 것을 활용하라. 나는 누가 배후 조종자인지 알고 싶다. 나는 누가 이 뒤에 있는지 알고 싶다.'[4]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엘저에 대한 강도 높은 심문이 이루어졌다. 사흘 후, 쉘렌베르크는 뮐러로부터 세 명의 의사가 엘저에게 24시간 동안 "상당량의 페르비틴"을 주사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같은 진술(단독 범행)을 반복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네 명의 최면술사가 동원되었으나, 단 한 명만이 엘저를 최면 상태에 빠뜨릴 수 있었지만 엘저는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고수했다. 심문 결과에 대해 심리학자는 엘저가 "광신자"이며 병적인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엘저가 "히틀러를 제거하고 동시에 독일을 히틀러의 악에서 해방시킴으로써 명성을 얻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4]

6. 1. 수감 생활

뮐러는 베를린 게슈타포 본부에서 엘저를 작업장에 가두고 뷔르거브로이켈러에서 사용한 폭발 장치를 재구성하도록 명령했다.[4]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발터 셸렌베르크가 작업장을 방문했을 때, 셸렌베르크는 엘저가 처음에는 질문에 답하기를 꺼렸지만, 그의 솜씨를 칭찬하자 마음을 열고 재구성한 모형에 대해 자세하고 열정적으로 설명했다고 기록했다.[4]

엘저가 재구성한 뷔르거브로이켈러 폭탄은 게슈타포에게 매우 높이 평가되어, 훈련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야전 교범에 포함되었다.[4]

7. 사후 평가 및 기념

뷔르거브로이켈러 폭탄 테러 다음 날,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SS 경비병들은 보복으로 유대인 21명을 사살하고 수용소 내 모든 유대인에게 사흘간 음식을 배급하지 않았다.[10]

게슈타포는 엘저의 고향인 쾨니히스브론을 급습하여 주민들을 몇 달 동안 반복적으로 심문했다. 마을은 "암살범의 마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엘저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이 게슈타포의 추적과 심문을 피할 수 없었다.[4]

엘저가 일했던 채석장의 주인 게오르크 폴머와 직원들은 게슈타포에게 심하게 구타당했다. 폴머는 폭발물 관리 부주의 혐의로 벨츠하임 강제 수용소에서 2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아내가 과거 인맥을 통해 루돌프 헤스에게 탄원한 덕분에 1941년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정신적 충격을 받은 아내는 남편이 석방된 지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죽기 전, 취리히의 음악상인 쿠흐와 공산주의자 3명이 엘저에게 암살을 사주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다.[4]

하이덴하임의 무기 공장 소유주 발덴마이어는 폴머보다는 운이 좋았다. 그는 1944년 아프베어의 지원으로 전쟁 공로 십자장 1급을 받았다. 1940년 한 게슈타포 요원은 발덴마이어에게 "엘서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노동자와 전 세계를 전쟁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고 끝까지 주장했다"고 전했다.[4]

엘저에게 금속 부품을 제공했던 뮌헨의 열쇠공 막스 니더홀러는 게슈타포에게 구타당하고 2주간 구금되었다. 런던 출생이라는 점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마리아 슈마우더의 아버지는 엘저가 자신의 집에서 외국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고 인정하면서 장기간 심문을 받아야 했다. 마틸데 니더만 역시 1939년 게슈타포에게 여러 차례 밤샘 심문을 받았다. 그녀는 엘저가 정치에 무관심했다고 주장했지만, 엘저가 콘스탄츠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은 인정했다. 약 60년 후, 마틸데와 엘저의 아들 만프레트 뷜은 1997년 뮌헨의 게오르크-엘저-광장 제막식에 참석하여 연설했으며, 같은 해에 사망했다.[4]

엘저의 연인이었던 엘자 헤를렌은 그가 "이중 생활을 했으며 정치와 사생활을 철저히 분리했다"고 증언했다. 그녀는 1959년 인터뷰에서 "나치들이 그녀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에" 서독 정부로부터 어떠한 보상도 원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엘저의 가족들은 그가 단독 범행을 자백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1950년, 그의 어머니는 여전히 다른 배후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내 아들이 혼자서 그런 일을 계획했을 리 없다"고 말했다.[4]

7. 1. 사후 평가

7월 20일 음모의 공모자들과는 달리, 엘저는 독일 연방 공화국의 공식적인 기념 문화에서 오랫동안 외면받았다.[17]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999년 헬무트 G. 하시스(Hellmut G. Haasis)가 쓴 엘저 전기가 출판되면서 그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확산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18] 이 전기는 2009년에 확장 및 수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엘저를 기리는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졌다. 2001년부터는 시민의 용기를 기리는 '게오르크 엘저 상'이 2년마다 수여되고 있다.[19] 2003년 1월, 엘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독일 우체국(Deutsche Post)은 기념 특별 우표를 발행했다. 독일 전역에는 엘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최소 60곳 이상 있으며, 여러 기념물도 세워졌다.[20][21]

빌헬름 거리에 있는 게오르크 엘저의 베를린 기념관


2011년에는 베를린의 빌헬름 거리에 독일 극작가 롤프 호흐후트(Rolf Hochhuth)의 주도로 높이 17m의 강철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 기념물 건립은 베를린 주 상원의 지원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뮌헨 막스포어슈타트 지구에는 나치에 맞서 싸운 저항 투사들을 기리기 위한 '요한 게오르크 엘저 기념관'이 있다. 과거 엘저가 폭탄을 설치했던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는 1979년 철거되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GEMA 빌딩, 가스테이그(Gasteig) 문화 센터, 뮌헨 시티 힐튼 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GEMA 빌딩 입구 포장도로에는 엘저가 폭탄을 숨겼던 기둥의 위치를 표시하는 기념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24]

엘저의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서도 알려졌다. 1989년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Klaus Maria Brandauer)가 감독한 영화 Georg Elser – Einer aus Deutschland|게오르크 엘저 - 아이너 아우스 도이칠란트de와 2015년 올리버 히르쉬비겔(Oliver Hirschbiegel) 감독의 영화 13 미닛(Elser|엘저de)이 제작되었다.

2005년 클라우스 크리스티안 말찬(Claus Christian Malzahn)은 엘저가 오랫동안 동독과 서독의 역사가들에게 외면당한 사실을 지적하며, "이는 독일이 자신의 역사를 정직하게 직시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그는 엘저가 "이념적 범주화를 거부했기에 진정한 독일 영웅"이라고 덧붙였다.[22] '게오르크 엘저 상'은 국가가 저지른 불의에 맞서 시민적 용기나 불복종을 보여준 개인에게 수여되며, 엘저의 저항 정신을 기리고 있다.

7. 2. 기념

베를린의 게오르크 엘저 흉상


독일어 텍스트가 대문자로 적힌 현판: '
쾨니히스브론의 게오르크 엘저 기념 현판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의 공모자들과 달리, 게오르크 엘저는 1990년대까지 독일 연방 공화국의 공식적인 기념 문화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17] 1999년 헬무트 G. 하시스(Hellmut G. Haasis)가 쓴 엘저 전기가 출판되면서 그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열렸고,[18] 2009년에는 확장 및 수정판이 나왔다.

엘저를 기리는 다양한 활동들이 이어지고 있다. 2001년부터는 시민적 용기를 기리는 게오르크 엘저 상(Georg-Elser-Preisde)이 2년마다 수여되고 있다.[19] 이 상은 국가가 저지른 불의에 맞서 시민의 용기나 시민 불복종을 보여준 개인에게 주어진다. 2003년 1월, 엘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독일 우체국(Deutsche Post)은 기념 우표를 발행했다.

독일 전역에는 엘저의 이름을 딴 거리가 최소 60곳 이상 있으며, 여러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20][21] 언론인 클라우스 크리스티안 말찬(Claus Christian Malzahn)은 2005년 엘저에 대해 "그가 오랫동안 동독과 서독의 역사가들에게 무시당한 것은 독일이 자신의 역사를 정직하게 직시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를 보여준다. 요한 게오르크 엘저는 이념적 분류를 거부했고, 바로 그 이유로 진정한 독일 영웅이다"라고 평가했다.[22]

엘저가 청소년기를 보낸 쾨니히스브론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진 기념 현판이 있다.

: "나는 나의 행동을 통해 더 큰 유혈 사태를 막고 싶었다."

:

: 쾨니히스브론에서 그의 청소년기를 보낸 요한 게오르크 엘저를 기념하며. 1939년 11월 8일, 그는 아돌프 히틀러 암살을 통해 학살을 막으려 했다. 1945년 4월 9일, 요한 게오르크 엘저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2011년에는 극작가 롤프 호흐후트(Rolf Hochhuth)의 주도로 베를린 빌헬름 거리에 높이 17m의 강철 조각상이 세워졌다. 이 기념물은 베를린 주 상원의 지원으로 건립되었다. 한편, 엘저가 폭탄을 설치했던 뮌헨의 뷔르거브로이켈러(Bürgerbräukeller)는 1979년에 철거되었고, 현재 그 자리에는 GEMA(Gesellschaft für musikalische Aufführungs- und mechanische Vervielfältigungsrechte) 빌딩, 가스테이그(Gasteig) 문화 센터, 뮌헨 시티 힐튼 호텔 등이 들어서 있다. GEMA 빌딩 입구 포장도로에는 엘저가 폭탄을 숨겼던 기둥의 위치를 알리는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24] 뮌헨 막스포어슈타트 지구에는 나치에 저항한 투사들을 기리는 요한 게오르크 엘저 기념관(1939년 11월 8일)도 있다.

엘저의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서도 알려졌다.

  • ''히틀러를 쏴라! 독재자 운명의 7분간'' (Georg Elser – Einer aus Deutschlandde, 1989년):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 감독.
  • ''13분'' (Elserde, 2015년):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

7. 3. 한국의 관점에서의 추가 내용

(내용 없음 - 제공된 원본 소스에는 해당 섹션 제목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참조

[1] 문서 Gestapo Interrogation Report Bundesarchiv Koblenz 1939-11
[2] 웹사이트 Georg Elser working group http://georg-elser-a[...]
[3] 웹사이트 The Morning after the Night of Broken Glass (Kristallnacht) in Munich: The Destroyed Synagogue on Reichenbachstrasse in Munich (November 10, 1938) http://germanhistory[...] GHDI 1938-11-10
[4] 서적 Bombing Hitler: The Story of the Man Who Almost Assassinated the Fuhrer https://books.google[...] Skyhorse Publishing Company, Incorporated 2013-01
[5] 뉴스 British, Jews Are Blamed for Attempt to Assassinate Hitler https://www.newspape[...] Newspapers.com 2020-11-29
[6] 웹사이트 Georg Elser: Die Opfer des Attentats https://www.georg-el[...] 2023-07-28
[7] 문서 Gestapo Interrogation Report Bundesarchiv Koblenz 1939-11
[8] 뉴스 Deutsche-Allgemeine-Zeitung 1939-11-22
[9] 서적 The Labyrinth: Memoirs of Walter Schellenberg, Hitler's Chief of Counter-intelligence Harper & Brothers 1956
[10] 웹사이트 1939 – Buchenwald Memorial http://www.buchenwal[...]
[11] 서적 The Venlo Incident Hutchinson & Co 1950
[12] 서적 The Venlo Incident Hutchinson & Co 1950
[13] 서적 To the Bitter End Da Capo Press 2009
[14] 웹사이트 Georg Elser-Arbeitskreis (working group) Hermaringen http://www.georg-els[...]
[15] 서적 Conspiracy in Germany Zurich 1948
[16] 간행물 Das Attentat auf Hitler im Münchner Bürgerbräukeller 1939
[17] 웹사이트 Allein gegen Hitler Einestages 2009-11
[18] 서적 Den Hitler jag' ich in die Luf'. Der Attentäter Georg Elser. Eine Biographie. Edition Nautilus, Hamburg 2009
[19] 웹사이트 Georg Elser -Labour district Heidenheim http://www.georg-els[...] 2016-04-08
[20] 웹사이트 Georg Elser: Straßen und Plätze http://www.georg-els[...]
[21] 웹사이트 Georg Elser: 13 Denkmale und Gedenktafeln http://www.georg-els[...]
[22] 간행물 A German Hero: The Carpenter Elser Versus the Führer Hitler http://www.spiegel.d[...] 2005-11-08
[23] 웹사이트 Die Georg-Elser-Hallen München http://www.georg-els[...] 2014-02-20
[24] 웹사이트 tracesofwar.com http://en.tracesofwa[...]
[25] 문서 ロジャー(2007年)
[26] 문서 クノップ(2008年)
[27] 문서 クノップ(2008年)
[28] 문서 ロジャー(2007年)
[29] 문서 クノップ(2008年)
[30] 문서 クノップ(2008年)
[31] 문서 ロジャー(2007年)
[32] 문서 クノップ(2008年)
[33] 문서 クノップ(2008年)
[34] 문서 ロジャー(2007年)
[35] 문서 クノップ(2008年)
[36] 서적 ロジャー(2007年)
[37] 서적 クノップ(2008年)
[38] 서적 ベルトルト(1985年)
[39] 서적 ロジャー(2007年)
[40] 서적 クノップ(2008年)
[41] 서적 ロジャー(2007年)
[42] 서적 ロジャー(2007年)
[43] 서적 ロジャー(2007年)
[44] 서적 ロジャー(2007年)
[45] 서적 クノップ(2008年)
[46] 서적 クノップ(2008年)
[47] 서적 ロジャー(2007年)
[48] 서적 クノップ(2008年)
[49] 서적 ロジャー(2007年)
[50] 서적 ロジャー(2007年)
[51] 서적 ロジャー(2007年)
[52] 서적 クノップ(2008年)
[53] 서적 クノップ(2008年)
[54] 서적 クノップ(2008年)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