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키즈카 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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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시키즈카 고분은 효고현 고베시 다루미구에 위치한 3단 전방후원분으로, 194m 길이를 자랑한다. 1657년 문헌에 처음 등장하며, 1921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2012년에는 출토된 하니와 등 유물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고분 주변에는 주호, 주구, 섬 모양 유구 등이 있으며, 하니와와 부엽석으로 덮여 있다. 매장 시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며, 출토된 하니와는 고베시 매장 문화재 센터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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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키즈카 고분 | |
---|---|
개요 | |
![]() | |
위치 | 다루미구, 고베, 일본 |
지역 | 간사이 지방 |
유형 | 고분 |
축조 시기 | 4세기 후반 - 5세기 중반 |
시대 | 고분 시대 |
지정 | 국가 지정 사적 |
지리 정보 | |
좌표 | 34°37′46.6″N 135°02′45.08″E |
구조 및 규모 | |
형태 | 전방후원분 |
전체 길이 | 194.0 미터 |
높이 (후원부) | 18.8 미터 |
역사적 정보 | |
축조 시기 | 4세기 말 - 5세기 초 |
매장 시설 (추정) | 수혈식 석실 |
피장자 (전승) | 제14대 주아이 천황의 위릉 |
특징 | 효고현 내 최대 규모, 사키미사사기 산 고분과 동일 형태, 일본서기에 기록 |
문화재 정보 | |
출토품 | 원통형 하니와, 형상 하니와 등 |
지정 문화재 | 출토품 (국가 중요문화재), 출토품 (고베시 지정 문화재) |
관련 시설 | |
관련 고분 | 센쓰보 고분, 고쓰보 고분 |
기타 | |
웹사이트 | 고시키즈카 (센쓰보) 고분, 고쓰보 고분 - 문화유산 온라인 |
2. 역사
고시키즈카 고분은 세토 내해와 아와지섬의 아카시 해협을 내려다보는 고베시 서부 다루미 언덕 남쪽 끝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하고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젠포코엔훈일본어)이다.
고분은 3단으로 축조되었으며 길이는 194미터이다. 둔덕의 각 단에는 원통형 하니와 열이 놓여 있고, 각 경사면에는 후키이시가 덮여 있다. 하니와의 수는 2200개 이상, 후키이시는 약 223만 개(2784톤)로 추정되며, 상단 및 중간 돌은 아와지섬 북동 해안에서 가져왔다. 고분은 이중 깊은 해자와 얕은 외부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해자 안에는 고분 주요 부분의 왼쪽과 오른쪽 및 후원부 북동쪽에 세 개의 사각형 섬 모양 둔덕이 있다. 매장실은 명확하지 않지만, 도쿠시마현에서 유래된 결정질 편암 조각이 발견됨에 따라 굴착식 석실인 것으로 여겨진다.[2]
이 무덤이 누구를 위해 건설되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아카시 해협 양쪽을 통제했던 통치자를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건설 방식과 규모 면에서 야마토 시대의 왕릉과 비교할 만하다. 고분의 크기는 나라현에 있는 사키료야마 고분과 거의 동일하다. 주변 지역이 이러한 건설을 위한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이는 야마토 정권과의 강한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여겨진다.[2]
고분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소나무 숲으로 보호받았지만, 전쟁 중에는 송진 채취 등에 이용하기 위해 벌채되었고, 전쟁 후에는 밭으로 개간되었다. 게다가 전방부 앞에는 산요 전기 철도 본선・JR 고베선이 부설되었고, 고분 주변에도 도로가 부설되어 주호 등도 변형되었다.
고분은 1921년(다이쇼 10년)에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11] 발굴 조사와 복원 정비를 거쳐 축조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2012년 (헤이세이 24년)에는 출토품(원통 하니와)이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10]
2. 1. 명칭의 유래
"고시키즈카(五色塚)" 또는 "센코(千壺)"라는 명칭은 에도 시대부터 불려왔다. "고시키즈카"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어 명확하지 않지만[5], "센코"는 둔덕 위의 하니와 무리 때문이라고 한다.고시키즈카와 관련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문헌 | 내용 |
---|---|---|
1657년 (메이레키 3년) | 『세쓰 명소 그림책』 | 「고시키즈카」라는 명칭으로 도해 |
1698년 (겐로쿠 11년) | 『제릉 주위 성취기』 | 「추아이 천황릉 토속 고시키즈카 천호라고 한다」라고 기재 (『효고현 사적 명칭 천연기념물 조사 보고서 제1집』에 인용, 단 「근왕 문고」 소장 원본에는 기재 없음) |
1716년-1736년 (교호 연간) | 『아카시 기』 | 상세 기술 (1762년 (호레키 12년)의 『하리마 감』에도 인용) |
『일본서기』 신공 황후 섭정 원년 2월 조에는 신라 정벌에서 돌아온 신공 황후가 주아이 천황의 능 조영을 위해 거짓으로 아와지섬까지 배를 띄워 그 돌을 운반하여 아카이시(= 아카시)에 진지를 구축했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다.[13] 아카시 해안가에서 "능"이라고 부를 만한 규모의 고분은 고시키즈카 고분뿐이므로, 예로부터 고시키즈카 고분이 이 "아카이시의 산릉"으로 비정되고 있다.
『하리마 국 풍토기』 가코 군 오쿠니 사토 조 (인나미 군 오쿠니 사토 조)에도 신공 황후가 주아이 천황의 매장 시에 사누키 국의 하와카이시 (하유코이시로 추정[14])를 구했다는 전승이 있다.[13]
2. 2. 역사적 배경
고시키즈카 고분은 세토 내해와 아와지섬의 아카시 해협을 내려다보는 고베시 서부 다루미 언덕 남쪽 끝에 위치한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젠포코엔훈일본어)이다. '고시키즈카'라는 이름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불린 것으로 그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추아이 천황의 무덤으로 여겨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센쓰보'라는 이름은 이 지역에 엄청난 수의 하니와가 있었기 때문이다.[2]고분은 3단 구조로, 길이는 194미터이다. 각 단에는 원통형 하니와 열이 놓여 있고, 경사면에는 후키이시가 덮여 있다. 하니와는 2200개 이상, 후키이시는 약 223만 개(2784톤)로 추정되며, 상단 및 중간 돌은 아와지섬 북동 해안에서 가져왔다. 고분은 이중 해자와 얕은 외부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해자 안에는 세 개의 사각형 섬 모양 둔덕이 있다. 매장실은 굴착식 석실로 추정되지만, 누구를 위해 건설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카시 해협 양쪽을 통제했던 통치자의 무덤으로 여겨지며, 야마토 시대 왕릉과 비교할 만한 규모이다. 이는 야마토 정권과의 강한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도 여겨진다.[2]
일본서기에는 진구 황후 치세에 이 지역에 대형 고분이 건설되었다는 언급이 있지만, 실제 매장이 없는 "가짜 무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1977년, 1982년부터 1993년까지 고고학적 발굴되었다. 2012년에는 발굴된 유물(원통형 하니와군)이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발굴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베시 고고학 센터에 보관되어 있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소나무 숲으로 보호받았지만, 전쟁 중에는 송진 채취 등에 이용하기 위해 벌채되었고, 전쟁 후에는 밭으로 개간되었다.[2] 산요 본선 철도가 고분 앞부분을 지나가고, 도로 건설로 주변 해자 일부가 파괴되었다.
1921년 (다이쇼 10년)에 소츠보 고분과 함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11] 2012년 (헤이세이 24년)에는 출토품(원통 하니와)이 국가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10]
『일본서기』 신공 황후 섭정 원년 2월 조에는 신라 정벌에서 돌아온 신공 황후가 주아이 천황의 능 조영을 위해 아와지 섬의 돌을 운반하여 아카시(赤石)에 진지를 구축했다는 기록이 있다.[13] 이는 고시키즈카 고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2. 3. 발굴 조사 및 복원
고시키즈카 고분은 1965년부터 1974년까지, 1977년, 1982년부터 1993년까지 고고학적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2] 2012년에는 발굴된 유물(원통형 ''하니와''군)이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3] 발굴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베시 고고학 센터에 보관되어 있다.[3]고분은 1921년 (다이쇼 10년)에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11] 발굴 조사와 복원 정비를 거쳐 축조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이는 일본에서 최초로 복원 정비가 이루어진 고분이다.[2]
연도별 발굴 조사 및 복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연도 | 내용 |
---|---|
1921년 (다이쇼 10년) 3월 3일 | 국가지정 사적으로 지정[11] |
1965년-1974년 (쇼와 40-49년) | 발굴 조사 및 복원 정비 공사 |
1974년 (쇼와 49년) 5월 22일 | 사적 범위 추가 지정[11] |
1975년 (쇼와 50년) | 관리 사무소 건설 |
1977년 (쇼와 52년) | 발굴 조사 및 복원 정비 공사 |
1979년 (쇼와 54년) 7월 2일 | 사적 범위 추가 지정[11] |
1982년-1993년 (쇼와 57-헤이세이 5년) | 고분 주변 범위 확인 조사 (제2차-제12차 조사) |
2006년 (헤이세이 18년) 7월 28일 | 사적 범위 추가 지정[11] |
2012년 (헤이세이 24년) 9월 6일 | 출토품(원통 하니와군)이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10] |
고시키즈카 고분은 효고현 고베시 다루미구에 있는 전방후원분으로, 아카시 해협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다. '고시키즈카'라는 이름은 에도 시대 초기부터 불려왔으나, 그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센쓰보'라는 이름은 이 고분에서 발견된 엄청난 수의 ''하니와''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2]
3. 분구
분구의 형태는 전방후원분으로, 전방부를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둔덕은 3단으로 축조되었으며, 둔덕의 바깥 표면 각 단에는 원통 하니와 열이 둘러져 있고, 각 단의 경사면에는 부엽석이 덮여 있다. 하니와는 추정 2,200개, 부엽석은 추정 223만 개, 2784ton에 달하며, 상단과 중단의 부엽석은 아와지섬에서 가져온 것으로 밝혀졌다.
분구 주변에는 열쇠 구멍 형태로 보이는 주호(물을 채우지 않는 빈 해자)가 둘러져 있으며, 주호 내에는 분구의 잘록한 부분 좌우와 후원부 북동쪽의 3곳에 사각형의 섬 모양 유구(마운드)가 있다.
분구 각 단의 경사면에는 부엽석이 덮여 있다. 돌 하나의 크기는 상단・중단의 경우 지름 15cm-30cm, 하단의 경우 지름 5cm-10cm이다. 부엽석의 재료는 상단・중단은 주로 반려암(일부에 화강암 등)으로, 아와지시마 북동해안산으로 추정된다. 하단은 주로 차트・규석으로, 고분 부근의 해안・하천산으로 추정된다. 『일본서기』진구 황후기 기사에는 아와지섬의 돌을 운반하여 아카시(赤石)에 능을 축조했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부엽석의 출처와 일치한다.
최근의 복원 정비에서는 전방부의 부엽석은 출토된 돌을 이용하고, 후원부의 부엽석은 새로 넣은 돌을 이용하여 재현하고 있다.
3. 1. 구조 및 규모
고시키즈카 고분은 위에서 보면 네모난 한쪽 끝과 둥근 한쪽 끝을 가진 열쇠 구멍 모양의 전방후원분(前方後円墳)이다. 세토 내해와 아와지섬의 아카시 해협을 내려다보는 고베시 서부 다루미 언덕 남쪽 끝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고분은 3단으로 지어져 있으며, 길이는 194m이다. 각 단에는 원통형 ''하니와'' 열이 놓여 있고, 경사면에는 ''후키이시''가 덮여 있다. ''하니와''는 2200개 이상, ''후키이시''는 약 223만 개(2784ton)로 추정되며, 상단 및 중간 돌은 아와지섬 북동 해안에서 가져왔다. 고분은 이중 깊은 해자와 얕은 외부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해자 안에는 고분 주요 부분의 왼쪽과 오른쪽 및 후원부의 북동쪽에 세 개의 사각형 섬 모양 둔덕이 있다. 매장실은 굴착식 석실로 추정되지만, 누구를 위해 건설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카시 해협 양쪽을 통제했던 통치자를 위한 것으로 여겨지며, 야마토 시대의 왕릉과 비교할 만하다. 고분의 크기는 나라현에 있는 사키료야마 고분과 거의 동일하며, 야마토 정권과의 강한 연관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2]
고분은 1965년부터 1974년까지, 1977년, 1982년부터 1993년까지 고고학적 발굴되었다. 2012년에는 발굴된 유물(원통형 ''하니와''군)이 국가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3]
명칭 | 유형 | 크기 |
---|---|---|
고시키즈카 고분 | 전방후원분 | 길이 194m 후원부 지름: 125.5m 전방부 폭: 82.4m |
고쓰보 고분 | 원형 | 지름 70m 높이 8.5m |
분구 형태는 전방후원분으로, 전방부를 남쪽으로 향한다. 둔덕은 3단으로 축조되었다. 둔덕 길이는 194m로, 효고현에서는 최대 규모이다[4](전국에서는 40위 정도[6]). 둔덕 외표 각 단에는 원통 하니와 열이 둘러져 있으며, 각 단의 경사면에는 부키이시가 덮여 있다. 특히 하니와는 추정 2,200개, 부키이시는 추정 223만 개, 2784ton에 달하며, 상단・중단의 부키이시는 아와지섬 산으로 판명되었다.
분구 주변에는 열쇠 구멍 형태로 보이는 주호(물을 채우지 않는 빈 해자)가 둘러져 있다.
주호 내에서는, 분구의 잘록한 부분 좌우·후원부 북동쪽의 3곳에 사각형의 섬상 유구(마운드)가 인정되고 있다.
분구 각 단의 경사면에는 부엽석이 덮여 있다. 돌 하나의 크기는 상단・중단의 경우 지름 15cm-30cm, 하단의 경우 지름 5cm-10cm를 측정한다.
3. 2. 주변 시설
고시키즈카 고분은 세토 내해와 아와지섬의 아카시 해협을 내려다보는 고베시 서부 다루미 언덕 남쪽 끝에 있다. 산요 본선 철도 노선이 고분의 앞부분을 지나가며, 도로 건설로 인해 주변 해자의 일부가 파괴되었다.[2]고쓰보 고분은 아사고시의 차스리야마 고분에 이어 효고현 내에서 두 번째로 큰 원형 고분이다. 문헌에 따르면 주변 지역에는 한때 다른 대형 원형 고분들이 많이 있었지만, 현재는 파괴되었다.
이 유적은 고고학 공원으로 일반에 공개되어 있으며, 산요 전기 철도 본선 가스가오카역에서 도보로 약 10분, 또는 JR 서일본 산요 본선 타루미역에서 15분 거리에 있다.
명칭 | 위치 | 유형 | 크기 |
---|---|---|---|
고시키즈카 고분 | 전방후원분 | 길이 194m 후원부 지름: 125.5 m 전방부 폭: 82.4m | |
고쓰보 고분 | 원형 | 지름 70.0m 높이 8.5m |
효고현 남부, 고베시 서부 다루미 언덕 남단부에 위치하며, 아래로 아카시 해협을, 맞은편으로 아와지섬을 조망하는 위치에 축조된 거대한 전방후원분이다. 고분 이름인 "고시키즈카(五色塚)"나 "센코(千壺)"는 에도 시대부터 불리던 명칭으로, "고시키즈카"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어 자세하지 않지만[5], "센코"는 둔덕 위 하니와 무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고분역은 전전에는 소나무 숲으로 보호되었지만, 전쟁 중에는 송진 채취 등에 이용하기 위해 벌채되었고, 전후에는 밭으로 개간되었다. 게다가 전방부 앞에는 산요 전기 철도 본선·JR 고베선이 부설되었고, 고분 주변에도 도로가 부설되어 주호 등도 변경되었다.
4. 외부 시설
고시키즈카 고분은 세토 내해와 아와지섬의 아카시 해협을 내려다보는 고베시 서부 다루미 언덕 남쪽 끝에 위치하며, 남쪽을 향하고 있다. 194미터 길이의 고분은 3단으로 지어져 있으며, 이중 깊은 해자와 얕은 외부 도랑으로 둘러싸여 있다. 해자 안에는 고분 주요 부분의 왼쪽과 오른쪽 및 후원부 북동쪽에 세 개의 사각형 섬 모양 둔덕이 있다.[2]
분구 주변에는 주호(물을 채우지 않는 빈 해자)가 둘러져 있다.[2] 산요 전기 철도 본선・JR 고베선이 전방부 앞면을 지나가고, 도로가 분구 주변에 깔려 있어 주호의 전체 모습은 분명하지 않지만, 원래는 분구를 완전히 둘러쌌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방부 남쪽에서는 통로 모양의 유구(토교)가 발견되었고, 후원부 쪽에서는 주호 바깥쪽에 주구가 둘러져 있다.
주호 안에는 분구의 잘록한 부분 좌우, 후원부 북동쪽 3곳에 사각형 섬 모양 유구(마운드)가 있다. 잘록한 부분 좌우의 섬 모양 유구는 한 변이 20미터이다. 후원부 북동쪽 섬 모양 유구에서는 원통 하니와 관 및 부장품이 출토되었다. 섬 모양 유구의 용도는 불분명하지만, 제단(잘록한 부분)이나 배총(후원부 북동쪽)으로 추정된다.
4. 1. 하니와
고시키즈카 고분의 둔덕 각 단에는 원통 하니와 열이 배치되어 있다. 하니와 열은 10미터에 18개 정도이며, 지느러미가 달린 원통 하니와 5-6개에 1개의 비율로 지느러미가 달린 나팔꽃 모양 하니와가 배치되어 있고, 모두 지느러미를 분구와 평행하게 놓았다.[10][9] 각 단에 총 3중으로 배치된 하니와의 총수는 2,200개 정도로 추정된다.[9] 검출된 하니와는 모두 흑반을 가지고 있다.[10] 지느러미가 달린 원통 하니와는 4조 돌대 5단 구성과 5조 돌대 6단 구성의 2가지 유형으로, 높이는 각각 100cm와 114cm로 다르지만, 돌대 간격은 약 17.5cm로 같다.[10] 이와 유사한 하니와 열은 일부 주호(垓壕) 바깥에서도 발견되었다.[10]최근 복원 정비에서는 하니와를 레플리카로 배치하여 재현하였다. 고시키즈카 고분의 원통 하니와와 유사한 하니와는 서쪽의 고쓰보 고분 외에 우타시키야마 히가시 고분, 우타시키야마 니시 고분, 마이코하마 유적, 폐총 고분에서도 알려져 있으며,[8] 특히 폐총 고분에서 발견된 하니와는 성분 분석 결과 고시키즈카 고분의 하니와와 같은 산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4. 2. 부키이시
분구 각 단의 경사면에는 부엽석이 덮여 있다. 돌 하나의 크기는 상단・중단의 경우 지름 15-30cm, 하단의 경우 지름 5-10cm이다.[2] 상단・중단은 1제곱미터당 평균 약 70개・약 220kg, 하단은 1제곱미터당 평균 약 240개・약 80kg으로, 고분 전체에는 2,233,500개・2784ton에 달하는 부엽석이 사용되었다.
석재는 상단・중단(추정 714,800개・2278ton)은 주로 반려암(일부 화강암 등)이며, 아카시 해협 건너편 아와지시마 북동해안에서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하단은 주로 차트・규석으로, 고분 부근 해안・하천에서 채취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서기』진구 황후기 기사(후술)에는 아와지 섬의 돌을 운반하여 아카시(赤石)에 능을 축조했다는 전승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위 사실과 부합하여 주목된다.
최근 복원 정비에서는 전방부 부엽석은 출토된 돌을, 후원부 부엽석은 새로 넣은 돌을 사용하여 재현하였다.
5. 매장 시설
매장 시설은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밝혀지지 않았다.[2] 복원 정비 전 둔덕 후원부에서 결정편암(도쿠시마현 동부산)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수혈식 석실(수혈식 석곽)이 존재할 것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2]
문헌상으로는 『하리마감』이 『아카시지』를 인용하여 본 고분에 대해 "석관 노출"이라고 기록한 것에서 석관(일설에는 나가모치형 석관)이 사용되었다는 추측이 있다.[2] 그러나 최근의 『발굴 조사·복원 정비 보고서』에서는 이 "석관 노출"이 실제로는 "수혈식 석곽의 일부 노출"을 가리키는 것이며, 시대적으로는 할죽형 목관이 매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한다.[2] 어느 쪽이든 조사 시점에서 석관의 노출이나 그에 따른 교란은 인정되지 않아 자세한 내용은 밝혀지지 않았다.[2]
덧붙여 『일본서기』 신공황후기 기사(후술)에서는 유해를 수반하지 않은 "가짜 능"이 아카시(明石)에 축조되었다고 하지만, 고고학적으로는 본 고분이 고분 시대의 인물 무덤임은 확실하다고 여겨진다.[2]
6. 출토품
고시키즈카 고분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유물로는 원통 하니와가 있다. 하니와는 총 2,200개로 추정되며, 그 중 600개가 채집되었다.[3][9] 채집된 하니와 중 지느러미 부착 원통 하니와 42점, 지느러미 부착 나팔꽃형 하니와 3점, 원통 하니와 3점 등 총 48점은 전체 형태가 복원되어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다.[10][9]
봉분에서는 뚜껑 모양 하니와, 방패 모양 하니와 등 형상 하니와가 출토되었다. 후원부 북동쪽 섬 모양 유구(마운드)에서는 지느러미 부착 원통 하니와 관 및 부장품인 하지기 항아리가, 후원부 분정에서는 하지기가, 서쪽 잘록한 부분에서는 자모 곡옥이 출토되었다. 형상 하니와의 잔해나 토기, 토제품은 국가 중요 문화재에 부지정으로 지정되어 있다.[9]
출토품 대부분은 고베시 매장 문화재 센터에서 보관한다.
7. 고쓰보 고분
고쓰보 고분(こつぼこふん일본어)은 고시키즈카 고분의 서쪽에 있는 고분이다. 원분 형태이며, 고시키즈카 고분과 함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고, 출토품은 고베시 지정 유형 문화재이다.
고분 이름인 '고쓰보'는 고시키즈카 고분의 별칭인 '센쓰보'와 대비되는 것으로 여겨진다.[5] 분구는 2단으로 축조되었다.[6] 하단 지름은 70m, 상단 지름은 43m, 분정 높이는 약 8.5m로, 원분으로서는 차스리야마 고분(아사고시, 지름 86m)에 이어 효고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이다.[4] 다만 분구가 주변 도로 아래까지 뻗어 있어, 현재는 원래대로 2단 복원하지 않고 흙을 쌓아 1단으로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분구 바깥 표면에서는 각 단에 하니와 열(추정 약 320개)이 발견되었지만, 고시키즈카 고분과 달리 후키이시는 덮여 있지 않다.[6] 또한 분구 주변에는 해자가 둘러져 있고, 해자 안에서는 분구 북쪽에서 통로 모양 유구(토교)도 확인되었다.[6] 출토품으로는 원통 하니와, 나팔꽃형 하니와 외에 형상 하니와(집 모양, 인물 모양, 개 모양 하니와 등)가 있다. 이 고쓰보 고분은 고시키즈카 고분과 같은 시대인 4세기 말~5세기 초 무렵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고시키즈카 고분과 어느 쪽이 먼저 축조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문헌에 따르면 과거 고시키즈카 고분 주변에는 고쓰보 고분 외에도 유녀총, 소총(고쓰보 고분으로 추정), 요쓰쓰카, 나나쓰쓰카, 동쪽 곁무덤이라고 불리는 고분들이 있었다고 한다.
8. 현대적 의의
고시키즈카 고분은 일본에서 최초로 복원 정비가 이루어진 고분이다.[2] 1965년부터 1974년까지, 1977년, 1982년부터 1993년까지 고고학적 발굴이 이루어졌다. 2012년에는 발굴된 유물(원통형 하니와 군)이 국가 지정 중요 문화재로 지정되었다.[3] 발굴된 유물의 대부분은 고베시 고고학 센터에 보관되어 있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소나무 숲으로 보호받았지만, 전쟁 중 송진 채취 등을 위해 벌채되었고, 전쟁 후에는 밭으로 개간되었다.[2] 산요 본선 철도 노선이 고분의 앞부분을 지나가고, 도로 건설로 인해 주변 해자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다.[2]
고분은 효고현 남부, 고베시 서부의 다루미 언덕 남단부에 위치하며, 아래로 아카시 해협을, 맞은편으로 아와지섬을 조망하는 위치에 축조된 거대한 전방후원분이다. 고분명인 "고시키즈카(五色塚)"나 "센코(千壺)"는 에도 시대부터 불리던 명칭으로, "고시키즈카"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어 자세하지 않지만[5], "센코"는 둔덕 위의 하니와 무리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9. 관련 시설
고베시 니시구 고지다이 6초메에 있는 고베시 매장 문화재 센터에서 고시키즈카 고분 출토품 등을 전시한다.[10]
참조
[1]
웹사이트
色塚(千壺)古墳 小壺古墳
https://bunka.nii.ac[...]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31
[2]
서적
(国指定史跡事典) National Historic Site Encyclopedia
学生社
2012
[3]
웹사이트
兵庫県五色塚古墳出土品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20-08-31
[4]
문서
兵庫県における主な古墳は次の通り。
[5]
문서
「五色塚」の名称の由来について、発掘調査・復元整備報告書では次の諸説を挙げる
[6]
문서
パンフレット「史跡 五色塚古墳 小壺古墳」。
[7]
문서
下垣仁志による説(菱田哲郎『古代日本国家形成の考古学』京都大学学術出版会、2007年、p. 74より)。
[8]
뉴스
五色塚古墳に眠る支配者解明に貴重な一歩 出土の埴輪、明石・幣塚古墳と「産地同じ」 専門家の分析で判明
https://www.kobe-np.[...]
神戸新聞
2022-11-17
[9]
웹사이트
国指定重要文化財(考古資料)
http://www.city.kobe[...]
[10]
간행물
兵庫県五色塚古墳出土品
[11]
간행물
五色塚(千壺)古墳 小壺古墳
[12]
웹사이트
市指定文化財(考古資料)
http://www.city.kobe[...]
[13]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5 風土記』
小学館
2003
[14]
서적
『新編日本古典文学全集 5 風土記』
小学館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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