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베클리 테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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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 남동부의 고대 유적으로, 기원전 1만 년경에 건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신전 중 하나이다. 1963년에 처음 발견되었으나, 1994년 클라우스 슈미트의 발굴을 통해 그 중요성이 드러났다. 이 유적은 T자형 석회암 기둥으로 이루어진 원형 구조물로, 다양한 동물 부조가 새겨져 있으며, 수렵 채집 사회에서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건설했다는 점과 농경의 시작보다 앞선 시기에 종교 시설이 존재했다는 점에서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튀르키예 정부는 박물관 건설 등 보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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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 | |
---|---|
개요 | |
![]() | |
다른 이름 | 기레 미라잔 시라브레슈케 |
위치 | 튀르키예 샨르우르파 주 |
지역 | 동남아나톨리아 지역 |
종류 | 정착지 |
건축 시기 | 기원전 9500년경 (11450 BP) |
버려진 시기 | 기원전 8000년경 (9950 BP) |
시대 | 선토기 신석기 A 선토기 신석기 B |
발견 | 1963년 |
발굴 | 1995년–현재 |
고고학자 | 클라우스 슈미트 네즈미 카룰 리 클레어 |
보존 상태 | 양호 |
소유 | 튀르키예 |
접근 | 제한적 |
위치 정보 | |
크기 | |
높이 | 15m |
면적 | 8헥타르 |
세계 유산 등재 정보 | |
명칭 | 괴베클리 테페 |
등재 연도 | 2018년 (42차 회의) |
유형 | 문화유산 |
기준 | (i), (ii), (iv) |
지정 번호 | 1572 |
지역 | 서아시아 |
2. 발견
괴베클리 테페는 1963년 이스탄불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의 합동 조사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가 알려졌다.[9] 그러나 당시에는 유적의 중요성이 제대로 파악되지 못했다.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는 석조 유물과 T자 모양 거석의 윗부분을 발견했지만, 이를 비잔틴 시대의 무덤으로 오인하여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후 오랫동안 농경지로 사용되면서 유적은 점차 훼손되었다. 농부들은 암석을 옮기거나 깨뜨리기도 했다.
1994년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클라우스 슈미트가 시카고 대학의 보고서를 보고 괴베클리 테페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2. 1. 초기 발견
1963년 이스탄불 대학과 시카고 대학의 합동 조사에서 괴베클리 테페가 처음 발견되었다.[9]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는 유적 표면에서 수집된 석기를 무도기 신석기 시대의 특징으로 식별했지만, T자형 기둥의 상부를 무덤 표식으로 오인했다.[2] 베네딕트는 괴베클리 테페를 신석기 시대 지층이 동로마 제국 시대와 이슬람 시대에 묘지로 덮인 것으로 추정했다. 조사 기록에는 무수한 부싯돌(플린트)과 거대한 석회암 석판, 즉 T자형 석주가 지상에 드러난 부분이 묘비로 기록되었다.이 언덕은 오랫동안 농경지로 사용되었으며, 수 세대에 걸쳐 지역 주민들은 돌을 자주 옮겨 유적지의 상층부를 교란시켰다. 어느 시점에서는 일부 기둥을 부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농부들이 그것들을 일반적인 큰 돌로 오인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2]
2. 2. 재발견과 발굴
1963년 이스탄불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의 합동 조사로 괴베클리 테페가 처음 발견되었다.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는 석조 유물들과 T자 모양의 거석 윗부분을 발견했지만, 비잔틴 시대의 무덤으로 오인하여 추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괴베클리 테페는 오랜 시간 동안 농경지로 사용되면서 농부들이 암석을 옮기거나 깨뜨려 유적이 훼손되기도 했다.[2]1994년, 독일 고고학 연구소의 클라우스 슈미트는 이전에 네발리 초리 발굴에 참여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시카고 대학의 보고서를 보고 흥미를 느껴 발굴을 결심했다. 그는 유적이 선사 시대의 것임을 직감하고 발굴에 착수하여 T자형 돌기둥들을 발견했다.[2] 슈미트는 샨르우르파 박물관과 독일 고고학 연구소를 대신하여 발굴 작업을 지휘했으며, 2014년 사망 이후에는 리 클레어가 연구를 조정했다.
2021년 현재, 이스탄불 대학교, 샨르우르파 박물관, 독일 고고학 연구소가 공동으로 발굴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네지미 카룰이 총 지휘를 맡고 있다. 최근 발굴 작업은 이미 드러난 지역의 문서화 및 보존에 중점을 두고 있다.

3. 추정 건축 시기
괴베클리 테페의 건축 시기는 매우 오래되어, 최소 신석기 시대 이전인 기원전 1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오래된 건물은 기원전 1만 년 전에, 그보다 조금 작은 석조 건축물들은 기원전 9000년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을 통해 유적 아래쪽의 탄소를 분석하여 얻은 결과이다. 기둥 표면의 탄산염을 이용한 측정 결과도 있지만, 이는 유적이 묻힌 이후의 시간만 측정한 것이므로 실제 유적의 나이는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2]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다음과 같다.
실험실 번호 | 연대 BP | Cal BCE | 상황 |
---|---|---|---|
Ua-19561 | 8430 ± 80 | 7560–7370 | 울타리 C |
Ua-19562 | 8960 ± 85 | 8280–7970 | 울타리 B |
Hd-20025 | 9452 ± 73 | 9110–8620 | 층 III |
Hd-20036 | 9559 ± 53 | 9130–8800 | 층 III |
4. 구조
괴베클리 테페는 크게 세 층위로 구분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 지하 3층 (가장 오래된 층): 직경 10m~30m의 원형 구조물이 특징이다. 벽 안쪽에는 T자형 돌기둥이 있고, 중앙에는 두 개의 큰 돌기둥이 마주 보고 있다. 돌기둥에는 사자, 황소, 파충류, 새 등 다양한 동물 형상이 새겨져 있어 애니미즘적 경향을 보인다.
- 지하 2층: 3층의 원형 구조물로 통하는 직사각형 방들이 나타난다. T자형 기둥은 여전히 존재하며, 방 바닥은 광택을 낸 석회암으로 마감되었다. 2010년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토템 폴과 유사한 돌기둥이 발견되기도 했다.
- 지하 1층: 농사와 풍화작용으로 가장 심하게 파괴된 층이다. 기원전 8000년경에 의도적으로 매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언덕 서쪽에서는 사자 형상이 발견되어 조각 작업장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괴베클리 테페 유적 외곽에는 제례용으로 추정되는 플랫폼과 물탱크형 구덩이도 발견되었다.
4. 1. 지리적 환경
괴베클리 테페는 타우루스 산맥 산기슭의 타스 테페레르('돌 언덕')에 위치하며, 하란 평원과 유프라테스강 지류인 발리흐강 수원지를 조망하는 평평한 석회암 고원 위 텔(인공 언덕)이다.[13] 북쪽은 좁은 곶으로 산과 연결되어 있고, 다른 방향으로는 가파른 경사면과 절벽이 이어진다.[13]괴베클리 테페가 사용되던 시기의 기후는 현재보다 따뜻하고 습했다.[13] 유적 주변은 이삭밀, 밀, 보리와 같은 풍부한 야생 곡물과 야생 양, 야생 염소, 가젤, 말과 같은 초식 동물 무리가 서식하는 개방된 스텝 초원이었다.[13] 사막가젤 무리의 계절적 이동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13] 유적에서 발견된 숯의 90%는 피스타치오나 아몬드 나무의 것으로, 주변에 삼림은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13]
산 정상에 위치한 유적은 평원을 넓게 조망할 수 있었고, 건축 자재인 부드러운 석회암과 부싯돌에 대한 접근성이 좋았다.[13] 빗물 집수 시스템과 저수조를 통해 식수를 확보했으며,[13] 최소 150m3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13] 높은 지하수면으로 인해 샘이 활성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13]
4. 2. 고원
괴베클리 테페가 위치한 고원은 오랜 세월 동안 풍화와 채석으로 인해 그 모습이 변해왔다. 고원 남쪽에는 고대 채석장 유적이 남아있으며, 로마 제국 군사 기지의 유적도 발견된다. 고원에서 발견되는 대부분의 유적은 신석기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암벽에서 직육면체 모양의 돌을 떼어낸 흔적들이다.[15]이 채석장 유적에서는 아직 세워지지 않은 3개의 거대한 T자형 거석이 발견되었다. 이 중 가장 큰 것은 북부 고원에 있으며, 길이는 약 7m, 가로 폭은 약 3m이다. 나머지 2개의 미완성 거석은 남부 고원에 남아있다.[15]
언덕 남쪽에서는 사자 모양의 석상이 발견되었는데, 이와 함께 부싯돌과 석회암 조각들도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이곳이 일종의 조각 작업장이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16]
4. 3. 지하 3층 (가장 오래된 층)
이 층은 괴베클리 테페 유적 전체에서 가장 오래된 층으로, 직경 10m~30m의 원형 구조물들이 나타난다. 가장 주목할 만한 특징은 원형 벽 안쪽에 거친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T자 모양의 돌들이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형 구조물은 약 20개가 땅 속에 묻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고, 각 구조물마다 8개의 석조 기둥들이 둘러싸고 있어 총 200개에 달하는 돌기둥들이 세워져 있다. 이 구조물을 이루는 석판들은 약 100m 정도 떨어진 기반암에서 떼어냈으며, 인부들은 끌로 바위를 쪼아 이 작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구조물의 중심에는 두 개의 거대한 바위가 서로 마주보며 서 있는데, 이 구조물들이 천장을 가지고 있었는지 여부는 불투명하다. 구조물 내부에는 앉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돌의자들이 있으며, 모든 석조 건축물들은 추상적인 그림, 동물들을 형상화한 돋을새김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러한 장식들은 신석기 시대에 광범위하게 숭배된 애니미즘의 경향을 띠고 있으며, 사자, 황소와 같은 포유류들과 함께 파충류들도 새겨져 있다. 또한 곤충, 새(특히 독수리)와 같은 것들까지 새겨져 있다.

당시에는 이 고원이 황량한 사막이 아니었고 오히려 울창한 숲이었다는 것이 유력하다. 하지만 몇 천 년에 걸친 인간 문명의 정착과 농경의 확산으로 인해 토지가 황폐화되면서 지금과 같은 사막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괴베클리 테페에는 인간의 형상을 띤 조각들은 많이 발견되지 않았다. 몇몇 T자 모양 돌기둥 하부에는 인간의 팔이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신과 정령을 상징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상단에 있는 석재 들보는 사람의 어깨를 뜻한다고 생각되는데, 이와 같은 장식들이 초자연적인 인간을 숭배한 것인지, 조상을 떠받드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불분명하다.
4. 4. 지하 2층
2층에는 3층의 원형 구조물로 통하는 직사각형 방들이 지어져 있는데, 3층보다 더 정교하게 만들어졌다. 이는 신석기 시대 기술 발전으로 추정된다. T자형 거석들이 2층에서도 발견되어, 이곳이 여전히 동일한 기능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방들은 직사각형이며, 문과 창문이 없고, 바닥에는 광택을 낸 석회암이 깔려 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 기원전 8000년 경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1.5m T자형 기둥들이 방 중앙에서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한 기둥에는 싸우는 사자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2010년에는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토템 폴을 닮은 돌기둥이 2층에서 발굴되었다. 높이는 1.92m이며, 3개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맨 위에는 곰을 닮은 맹수, 그 아래에는 인간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돌기둥이 파손되어 정확한 해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괴베클리 테페에서는 인간 몸에 동물 머리를 가진 조각들도 출토되었다.
이후의 울타리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원형 구조물에 비해 공간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T자형 기둥도 존재하여, 선사 도기 신석기 시대 B기 (PPNB) 동안에도 건물이 동일한 기능을 계속 수행했음을 나타낸다.[27] 여러 개의 인접한 직사각형 방은 문과 창문이 없고, 고대 로마의 테라조 바닥을 연상시키는 광택이 나는 석회 바닥을 가지고 있다. 탄소 연대 측정 결과는 기원전 8800년에서 기원전 8000년 사이의 날짜를 얻었다.[28] 최대 1.5미터 높이의 T자 기둥 여러 개가 방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사나운 모습의 사자로 장식된 한 쌍의 기둥은 그들의 울타리가 알려진 "사자 기둥 건물"이라는 이름의 근거이다.[29]
4. 5. 지하 1층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가장 위쪽에 있는 1층은 농사와 풍화작용으로 인해 가장 심하게 파괴된 부분이다. 이 장소는 기원전 8000년에 고의로 묻혔는데, 그 이유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30]구릉의 가장 윗부분 층에 해당하는 1층은 가장 얕지만, 가장 오랜 기간을 차지했던 시기이다. 이 층은 침식으로 인한 토사 유출을 포함하며, 유구가 종교 시설로서의 역할을 마친 후에도 농경 목적으로 사용되어 실질적으로 끊이지 않고 지속되었다. 유구는 기원전 8000년 이후 어느 시점에서 의도적으로 묻혔다.
건물은 주로 플린트(flint)로 구성된 잔해, 석기, 어디선가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뼈 아래에 묻혔다.[30] 비블로스 석기(화살촉 등의 웨폰 헤드), 엄청난 수의 네므리크(Nemrik) 석기, 헬완 석기, 아스와드(Aswad) 석기가 되메우기에 사용된 석기에서 많이 발견된다.
4. 6. 기타 구조물
언덕 서쪽 가장자리에서 사자 형상이 발견되었다. 이 지역에서는 부싯돌과 석회암 조각이 더 자주 발견된다. 따라서 이곳이 일종의 조각 작업장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 반면에, 남쪽 고원의 표면에서 발견된 세 개의 남근 형상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이들은 고전 시대의 채석장 근처에 있어 연대 측정이 어렵다.[2]테르(tell) 외에도, 기둥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개의 홈과 이를 둘러싼 평평한 벤치가 있는 새겨진 플랫폼이 있다. 이 플랫폼은 테르의 가장 오래된 부분에 해당한다. 명명 패턴을 따라, 이는 "복합체 E"라고 불린다. 네발리 촐리의 제례 건물과 유사하여 "바위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바닥은 기반암에서 정교하게 깎아내고 매끄럽게 처리되었으며, 괴베클리 테페의 더 젊은 복합체의 테라초 바닥을 연상시킨다. 이 지역의 바로 북서쪽에는 복합체 E의 일부로 추정되는 두 개의 물탱크형 구덩이가 있다. 이 구덩이 중 하나에는 테이블 높이의 핀과 다섯 개의 계단이 있는 계단이 있다.[3]
4. 7. 이후 구조물
텔의 최상층은 가장 얕지만 가장 긴 기간을 차지한다. 이는 침식으로 인한 느슨한 퇴적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의례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멈춘 이후 농업 목적으로 언덕이 거의 끊임없이 사용된 데 기인한다.[30]Göbekli Tepe|괴베클리 테페영어는 기원전 8000년 초 무렵, 중요성을 잃었다. 농업과 축산업의 등장은 이 지역의 인간 생활에 새로운 현실을 가져왔고, "석기 시대 동물원"은 이 지역의 이전 채집 사회에 가졌던 중요성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주로 플린트(flint)로 구성된 잔해, 석기, 어디선가 옮겨온 것으로 보이는 동물의 뼈 아래에 묻혔다.[30] 비블로스 석기(화살촉 등의 웨폰 헤드)와 엄청난 수의 네므리크(Nemrik) 석기에 더해, 헬완 석기, 아스와드(Aswad) 석기가 되메우기에 사용된 석기에서 많이 발견된다.
5. 건축
괴베클리 테페가 위치한 고원은 신석기 시대부터 침식과 채석으로 인해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고원 남쪽에는 10m 길이, 20cm 너비의 수로 4개가 있는데, 이는 사각형 블록을 채취했던 고대 채석장의 흔적으로 해석된다.[15] 이 수로들은 인근의 사각형 건물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건물은 기초만 보존되어 있는데, 로마 망루의 잔해로 추정된다.
고원의 대부분 구조물은 신석기 시대 채석의 결과로 보이며, 채석장은 거대하고 단일한 건축 요소를 위한 원천으로 사용되었다. 채석된 돌들의 윤곽은 암석에 새겨졌고, 분리된 블록은 암석 둔덕에서 지렛대로 들어 올려졌다.[15] 둥근 작업물을 생산했던 여러 채석장이 확인되었으며, 남동쪽 경사면에서 3x3미터 크기의 조각이 발견되어 채석장이었음을 뒷받침한다.[16]
미완성된 T자형 기둥 3개는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아직 기반암에서 떼어내지 않은 상태였다. 가장 큰 것은 고원 북쪽에 있는데, 길이는 7m이고 머리 부분의 너비는 3m이다. 무게는 약 50톤 정도로 추정된다. 다른 두 개의 미완성 기둥은 남쪽 고원에 있다.[17]
클라우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 유적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 규모에 대해, 수 톤에 달하는 석회암 기둥을 채석하고 운반, 설치하는 작업은 소수의 인원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토르 헤이에르달이 라파누이의 모아이로 실험한 결과를 참고하여, 기둥을 옮기는 데만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32]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밧줄과 물, 또는 다른 윤활제를 사용하면 단 7~14명으로도 기둥을 옮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스톤헨지 건설에 사용된 기술과 유사하다고 본다.[32]
5. 1. 건축 방식
괴베클리 테페가 위치한 고원은 신석기 시대부터 침식과 채석으로 인해 현재의 형태가 되었다. 고원 남쪽에는 10m 길이, 20cm 너비의 수로 4개가 있는데, 이는 사각형 블록을 채취했던 고대 채석장의 흔적으로 해석된다.[15] 이 수로들은 인근의 사각형 건물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건물은 기초만 보존되어 있다. 이 건물은 로마 망루의 잔해로 추정되며, ''아라비아 변경지대(Limes Arabicus)''의 일부였을 것으로 보인다.[15]고원의 대부분 구조물은 신석기 시대 채석의 결과로 보이며, 채석장은 거대하고 단일한 건축 요소를 위한 원천으로 사용되었다. 채석된 돌들의 윤곽은 암석에 새겨졌고, 분리된 블록은 암석 둔덕에서 지렛대로 들어 올려졌다.[15] 둥근 작업물을 생산했던 여러 채석장이 확인되었다. 남동쪽 경사면에서 3x3미터 크기의 조각이 발견되어 채석장이었음을 뒷받침한다.[16]
미완성된 T자형 기둥 3개는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아직 기반암에서 떼어내지 않은 상태였다. 가장 큰 것은 고원 북쪽에 있는데, 길이는 7m이고 머리 부분의 너비는 3m이다. 무게는 약 50톤 정도로 추정된다. 다른 두 개의 미완성 기둥은 남쪽 고원에 있다.[17]
5. 2. 노동력 추정
클라우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 유적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 규모에 대해, 수 톤에 달하는 석회암 기둥을 채석하고 운반, 설치하는 작업은 소수의 인원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토르 헤이에르달이 라파누이의 모아이로 실험한 결과를 참고하여, 기둥을 옮기는 데만 수백 명의 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32] 이 실험에 따르면 괴베클리 테페의 T자형 기둥과 비슷한 크기의 모아이 하나를 조각하는 데 20명이 1년, 50~75명이 15km를 운반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을 것이다.[32]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밧줄과 물, 또는 다른 윤활제를 사용하면 단 7~14명으로도 기둥을 옮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스톤헨지 건설에 사용된 기술과 유사하다고 본다.[32]
괴베클리 테페 자체에서 진행된 실험에 따르면, 현재까지 발굴된 PPNB 구조물 전체는 돌을 채석하고 식량을 준비하는 시간을 포함하여 12~24명이 4개월 이내에 건설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32] 이러한 노동력 규모는 신석기 시대의 단일 대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의 능력 범위 내에 있으며, 동시에 건물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인원수와도 일치한다.[32]
6. 도상학
괴베클리 테페의 석조 기둥은 T자 모양으로, 이 지역의 다른 신석기 유적지와 유사하다.[2]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의 기둥은 낮은 부조 또는 높은 부조로 조각된 다양한 동물상이 특징으로, 뱀, 여우, 멧돼지 외에도 가젤, 무플론(야생 양), 아시아 야생 당나귀, 오리, 독수리 등이 묘사되어 있다.[2] 이 동물들은 식별 가능한 경우 수컷이며,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2]
추상적인 형태도 묘사되는데, 수직 또는 수평 H자 모양의 기호, 초승달, 원반 등이 있다. 인간 묘사는 드물지만, D 구역의 기둥 43에는 발기된 음경을 가진 머리 없는 남자가 새겨져 있다.[2] 기둥 자체는 의인화된 형태로, 몸통과 머리를 나타낸다. 일부 기둥에는 동물 부조 외에도 팔, 손, 샅옷 조각이 있어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2]
울타리 중앙에 있는 두 개의 기둥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다. D 구역의 기둥은 팔, 벨트, 성기를 가리는 천으로 사람을 나타내며, 슈미트는 이들이 두 명의 남성이라고 추정했다.[2] 여성의 묘사는 단 하나뿐인데, 판 위에 나체로 묘사되어 있다.[2]
슈미트와 요리스 페터스는 기둥에 묘사된 다양한 동물이 단일한 도상 체계를 나타내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묘사된 동물 중 다수가 포식자이므로, 돌이 마법적인 표현을 통해 부정 방지 마법을 하거나 토템 역할을 했을 수 있다고 보았다.[2]
구분 | 내용 |
---|---|
동물 | 뱀, 여우, 멧돼지, 가젤, 무플론, 아시아 야생 당나귀, 오리, 독수리 (대부분 수컷, 공격적 자세) |
추상적 형태 | 수직/수평 H자, 초승달, 원반 |
인간 | D 구역 기둥 43 (발기된 음경, 머리 없는 남자), 의인화된 기둥 (몸통, 머리, 팔, 손, 샅바) |
7. 해석
유적 발굴자인 클라우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신석기 시대의 성소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이라고 보았다. 그는 약 150km 떨어진 곳에서도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유적지 근처에서 발견된 사슴과 가젤 뼈는 참배자들이 바친 공물로 해석했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망자를 위한 안식처이며, 동물 조각들은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적 뒤쪽 벽 틈새에서 유해가 발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2017년에는 쪼개진 두개골이 발굴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괴베클리 테페 근처에서 인류 최초로 곡물 재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유적에서 30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야생 밀의 DNA를 분석한 결과, 현대 밀의 조상 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유적지가 숭배 목적으로만 사용되었고 거주지가 아니었다는 가정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었다. 구조물들이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의 대형 판자집과 유사하며 의례적 기능과 세속적 기능이 공존하는 다른 PPN 유적과 일치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주거용 건물과 빗물 수확 시스템의 발견은 '사원'이라는 기존 해석을 수정할 필요성을 보여준다.[45] 기존 기둥이 몇 십 년마다 더 작은 동심원 안에서 새로운 돌로 교체되기 위해 묻힌 이유는 알 수 없다.[46]
7. 1. 클라우스 슈미트의 해석
클라우스 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신석기 시대의 성소이자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약 150km 떨어진 곳에서도 순례자들이 이곳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유적지 근처에서 발견된 사슴과 가젤 뼈는 참배자들이 바친 공물로 해석했다.[36]슈미트는 괴베클리 테페가 죽은 자들을 위한 안식처이며, 동물 조각들은 죽은 자들을 보호하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무덤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유적 뒤쪽 벽 틈새에서 유해가 발견될 것이라고 기대했다.[10] 2017년에는 쪼개진 두개골이 발굴되기도 했다.
학자들은 괴베클리 테페 근처에서 인류 최초로 곡물 재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유적에서 30k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야생 밀의 DNA를 분석한 결과, 현대 밀의 조상 격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37]
슈미트는 '사원이 도시보다 먼저 지어졌다'라고 하며, 괴베클리 테페가 도시 문명 발전에 기여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43] 그는 주변 지역에 괴베클리 테페와 비슷한 소규모 유적들이 흩어져 있는 것을 근거로, 이 지역에 널리 퍼져 있던 신앙의 중심지가 괴베클리 테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슈미트는 T자형 기둥이 인간, 특히 조상의 모습을 나타낸다고 보았으며, 이는 샤머니즘적 관습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39] 그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등장하는 에쿠르 산과 안누나키 신의 개념이 괴베클리 테페의 신앙 체계와 공통점을 가진다고 보았다. 슈미트는 이러한 신화가 신석기 혁명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 있는 원시 오리엔트 신화라고 생각했다.[39]
7. 2. 다른 해석
이 유적지가 숭배 목적으로만 사용되었고 거주지가 아니었다는 가정은, 구조물들이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의 대형 판자집과 유사하며 의례적 기능과 세속적 기능이 공존하는 다른 PPN 유적과 일치한다는 주장에 의해 의문이 제기되었다. 주거용 건물과 빗물 수확 시스템의 발견은 '사원'이라는 기존 해석을 수정할 필요성을 보여준다.[45] 기존 기둥이 몇 십 년마다 더 작은 동심원 안에서 새로운 돌로 교체되기 위해 묻힌 이유는 알 수 없다.[46] 레미 하다드에 따르면, 최근 "유목민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지역 의식 센터로 괴베클리 테페를 보려는 해석적 열정은 의례적 기능과 세속적 기능이 공존하는 다른 대형 토기 이전 신석기 시대 유적에 대해 알려진 것과 더 일치하는 비전으로 바뀌고 있다."8. 보존
정부와 여러 단체는 이 중요한 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계획을 추진해왔다. 2010년에는 튀르키예 정부와 클라우스 슈미트가 참여한 가운데 장기간 보존 계획이 수립되었다.[48] 이 계획에는 이미 발굴된 유적을 보호하고, 추가 발굴을 진행하며, 현지인 교육을 통해 유적의 중요성을 알리는 것이 포함되었다.
괴베클리 테페는 "인류가 만든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최초의 발현 중 하나"로서 2018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8]
하지만 2018년, 유적지 보존 작업과 관련하여 논란이 일었다. 고고학자이자 클라우스 슈미트의 미망인인 치이뎀 쾨크살 슈미트는 새로운 보행로 건설 과정에서 콘크리트와 "중장비" 사용으로 손상이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튀르키예 문화관광부는 콘크리트가 사용되지 않았고 손상도 발생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47]
9. 연구사
괴베클리 테페가 위치한 언덕은 고고학자들에 의해 기록되기 전, 현지 쿠르드어로 Girê Mirazanku 또는 Xerabreşkêku (Girê Mirazanku은 '소원 언덕'을 의미[2])로 알려져 있었으며, 신성한 장소로 여겨졌다.[2]
이 유적지는 1963년 이스탄불 대학교의 할레트 참벨과 시카고 대학교의 로버트 존 브레이드우드가 지휘한 고고학 조사에서 처음 언급되었다.[2] 미국의 고고학자 피터 베네딕트는 유적지 표면에서 수집된 석기를 무도기 신석기 시대의 특징으로 식별했지만, T자형 기둥의 상부를 무덤 표식으로 오인했다.[2] 이 언덕은 오랫동안 농경지로 사용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은 수 세대에 걸쳐 돌을 자주 옮겨 청소 더미에 놓았는데, 이는 유적지의 상층을 교란했을 수 있다. 어느 시점에서는 일부 기둥을 부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것들을 일반적인 큰 돌로 오인한 농부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2]
1994년 10월, 이전에 네발리 초리에서 작업했던 독일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는 이 지역에서 유사한 유적지의 증거를 찾고자 1963년 시카고 연구자들이 묘사한 위치를 재조사하기로 결정했다.[2] 그는 주변 마을에서 부싯돌이 있는 언덕에 대해 문의한 결과, 유적지가 위치한 토지를 소유한 가족의 마흐무트 이을드즈에 의해 괴베클리 테페로 안내받았다.[2] 이을드즈 가족은 이전에 밭을 갈면서 발견물을 발견하여 지역 박물관에 보고했다.[2] 슈미트는 네발리 초리에서 유사한 구조를 발견했기에 석판이 베네딕트가 추측한 무덤 표식이 아니라 선사 시대 거석의 상단일 가능성을 인식했다. 그는 이듬해 발굴을 시작하여 거대한 T자형 기둥의 첫 번째를 곧 발견했다.[2] 결국 그는 가장 동쪽에 있는 언덕 그룹에서 세 개의 무덤만을 발견했는데, 이는 순례지였다.[2] 이을드즈는 발굴 작업에 참여하여 유적지의 경비원으로 일했다.[2]
슈미트는 2014년 사망할 때까지 샨르우르파 박물관과 독일 고고학 연구소(DAI)를 대신하여 이 유적지에서 발굴 작업을 계속 지휘했다. 그 이후, 이 유적지에서의 DAI 연구는 리 클레어가 조정하고 있다.[2] 현재 이 유적지에 대한 작업은 네지미 카룰의 전반적인 지휘하에 이스탄불 대학교, 샨르우르파 박물관, DAI가 공동으로 수행하고 있다.[2] 최근 발굴 작업은 슈미트의 발굴 작업보다 제한적이며, 이미 드러난 지역의 상세한 문서화 및 보존에 중점을 두고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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